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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등의 경서에 보면 부처님이 득도 후 49년간 설법하자 마왕 파순이 나타나 말한다.
“당신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제도하셨으니 이제 그만 반열반하십시오.”
붓다는 대중들과의 인연이 이제 다 한줄 알고 석 달 후 반열반하겠다고 말한다.
마왕 파순은 “말법시기가 되면 나는 내 제자들을 절에 들어가게 하여 당신의 가사를 입고 경전을 곡해하며 계율을 파괴하고 불법을 파괴할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무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할 것이오.”라고 했다.
붓다는 마왕의 말을 듣고 오랫동안 말이 없었고 그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불설법멸진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내가 열반한 뒤 법이 장차 멸하려 할 때 오탁악세에 魔道가 성행한다. 마가 승려로 가장하여 나의 도를 어지럽히고....술 마시고 고기를 먹고, 살생하고, 탐욕을 부리며, 계율을 지키지 않는 '마의 비구'들이 나타난다" 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또 《불장경》(佛藏經)에는 미래에 악마가 사문의 모습으로 변하여 승려 중에 들어가 여러 가지 삿된 법을 설하여 중생을 사견으로 이끈다는 내용도 있다.
「當來之世惡魔變身,作沙門形入於僧中,種種邪說,令多眾生入於邪見,為說邪法。」
붓다는 자신이 가르친 계정혜 수행법이 말법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55권 <월장분(月藏分)>에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만약 내가 세상에 있을 때는 법을 들은 모든 성문들은, 계구족(戒具足 계를 잘 지키며), 사구족(버림을 잘 지키며), 문구족, 정구족, 혜구족, 해탈구족, 해탈지견구족하여, 나의 正法이 세상에서 활짝 타오를 것이다..... 나의 법에서 해탈한 듯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에는 나의 법 중에서 선정에 들고, 삼매에 드는 사람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에는 경을 많이 읽고 경을 많이 듣는 사람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은 나의 법을 배우는 사람 중에 탑과 절을 많이 짓는 사람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은 나의 법에서 다투며 법이 사라지며 견고함이 없어질 것이다.
청정한 사람들아 알지어다! 이때 이후 나의 법을 배우는 사람은 비록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었지만 戒를 파괴하며 法이 없는 듯이 행동하며 이름만 비구라 하리라.”
즉, 말법시기가 되면 마의 제자들이 절에 들어가서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계율을 파괴하고 불법을 파괴하여 중생들이 불교 수행을 통해 해탈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인데, 오늘날 마왕의 계획과 붓다의 예언이 모두 현실화 되었다.
붓다가 열반한 후 불교는 바라문교와 합해져 힌두교로 변하여 원시불교는 결국 인도에서 소실되었고, 중국에 들어온 것도 대승불교로 변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에 대해 李洪志 사부님의 자세한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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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중의 교훈
현재 일부 화상이 많은 책을 썼는데 쓴 것이 무엇인가? 자간과 행간(字裏行間)이 온통 검고 검어 전부 다 검은 기(黑氣)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보아내지 못하지만 그 속의 것들은 이미 말이 아닐 정도로 난잡하다. 이런 현상은 말법시기에 이미 아주 심각하다.
석가모니부처의 법(法)은 인도에서 생겼지만 무엇 때문에 인도에서 소실되었는가?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전한 것을, 사람들은 모두 석가모니부처의 요구에 따라 그대로 했다. 석가모니부처가 설법할 때 모르는 것은 물어볼 수 있었다. 당신이 잘못하면 석가모니부처는 당신을 바로잡아 줄 수 있었다.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을 떠난 후에 많은 승려들이 석가모니부처가 한 말을 자신의 인식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해석했다. 가령, 석가모니부처가 집 높이만큼 수련되었다면 일반 승려는 한 자(尺) 높이밖에 수련되지 못했는데, 그가 부동한 층차에서 여래 과위(果位)까지 법(法)의 내포를 진정하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석가모니부처가 한 말에는 매 하나의 층차마다 그 층차 중의 수련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련자는 부동한 층차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수련해 올라갈 수 있었다. 그가 부동한 층차로 수련하는 데에는 모두 법(法)의 지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한 마디 불법(佛法)은 매 하나의 층차마다 또 새로운 인식을 갖고 있다.
그 불경의 원문은, 당신이 매번 볼 때마다 모두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된다. 제고된 후 다시 불경을 보면 또 새로운 체득이 있다. 바로 이렇듯 끊임없이 인식하면서, 끊임없이 인식을 개변하고 제고한다면 수련 층차는 제고된다.
그러므로 일부 승려들이 일단 속인의 말과 그 자신의 견해로 불법을 말하거나 혹은 책으로 써낸다면 그는 즉시로 사람을 그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그는 불경의 함의(涵義)에 정의를 내렸다. 석가모니부처가 한 그처럼 높은 말과 그처럼 많은 함의를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수련됨이 아주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을 수불(修佛) 하는 사람이 믿게 된다면 그는 사람을 자신의 사상 틀 속으로 끌어들여 한정짓게 된다.
이런 현상은 비록 그가 마치 여러 사람들에게 부처를 배우라고 한 것과 같이, 표면적으로는 좋은 일인 것 같지만 불법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법을 파괴하는 데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일부 파괴하는 사람은 불법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란한다. 이러한 파괴야말로 가장 분별하기 어렵고 가장 간파하기 어려우며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의 법(法)이 인도에서 실전(失傳)된 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부처의 말을 해석하면서 “석가모니부처가 하신 말씀은 이런 뜻이고, 저런 뜻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다만 그의 한 층차에서 그가 깨달은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천목이 열려 부동한 층차에서 일부 진상(眞相)을 보지만 석가모니부처가 여래 층차에서 본 것처럼 높고 깊지 못하며 돌파한 공간도 그처럼 크지 못하다. 또한 아주 낮은 층차에서 천목이 열린 사람은 그가 볼 수 있는 공간이 아주 적으며 볼 수 있는 우주공간도 아주 낮다.
부동(不同)한 층차에는 부동한 이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불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모두 자신이 인식하는 틀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그는 불법을 교란했는가 아니면 불법을 수호했는가? 그러므로 누구도 그 경서는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 경서의 원뜻에 좇아 깨닫고 수련하라! 누구도 경서 중의 어떠한 한 글자도 함부로 해석할 수 없다.
부동한 층차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인식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며 여러 사람들이 상호 간의 체득을 말할 수는 있다. 즉, “나는 깨달았는데 현재 내가 깨달은 것은 이런 뜻이다. 내 생각에 어떤 일을 내가 잘못했는데, 나는 어떻게 개선하려고 한다.”거나 “이 말은 나에게 한 말이고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로서, 나는 정말로 좋다고 느낀다.”는 등이다. 그가 다시 제고되어 다시 보면 같은 한 마디 말에 또 새로운 인식이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제고인바 모두 이렇게 깨달으며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현재 어떤 화상 혹은 거사(居士)는 많은 글을 썼는데 모두 자신이 쓴 것을 경(經)으로 삼고 있다. 오직 부처가 말한 법(法)만이 경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쓴 것들이 포함된 이런 것을 어찌 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경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많은 거사와 화상은 명(名)과 이(利)를 추구하여 허례허식을 즐기기까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좋다고 추켜올리면 그는 득의양양해한다. 수련자라면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진정한 수련은 바로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속인 중의 명(名)이요 이(利)요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과 쟁투심이요 과시심이요, 질투심이요 하는 것과 각종 속인의 욕망, 각종 마음을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한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세속 중에서 그의 영화(榮華)를 뽐낸다면, 이런 사람은 얼마나 많은 집착심이 반영되어 나오겠는가?
진정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을 보기만 해도 괴로워한다. 또 어떤 수불(修佛)하는 사람은 돈과 재산에 대한 욕망이 아주 큰바, 겉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心念)이 움직이기만 하여도 수련 층차가 높은 사람이나 부처는 바로 알아차린다.
여기에서 주로 이야기한 것은 전업수련자(專修)인데 사실 여기에는 불학(佛學)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을 포함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부처를 배우는 것인가? 수련하는 사람은 무엇을 수련하는가? 바로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속인 중의 욕망을 모두 아주 담담하게 보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도를 얻은 많은 사람이 깊은 산으로 들어가 말법시기의 절에 있기를 싫어하는가? 심산수림(深山老林)으로 간 원인은 그들이 절 안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많은 화상들이 모두 내려놓기 싫어하는 집착심이 있고 이로 인해 아귀다툼을 하며 또한 정토(淨土)가 아니고, 진짜 수련하는 곳이 아니기에 멀리 피한 것이다.
물론 일부 사교(邪敎)·마교(魔敎)가 공개적으로 파괴했다. 이런 것은 사람들이 분별하기 쉬워 척 보면 삿된 것을 알아낸다. 그러나 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파괴하는 이것이 가장 심각하다. 석가모니부처는 무엇 때문에 그의 법(法)이 말법시기에 이르러 사람을 제도할 수 없다고 했는가?
지금이 바로 말법시기이다. 화상이 자신을 제도하기도 매우 어려운데 하물며 사람을 제도하랴! 내가 말법시기의 현상을 말해냄으로써 일부 사람들은 홀연 크게 깨달았다. 지금 이 사회의 발전은 아주 무섭다. 당신이 보라! 각종 가짜, 삿된 것, 악한 것, 난잡한 것들이 모두 나왔다.
여기에서 이러한 이치를 말하는 것은 누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화상이 책을 쓰지 않았는가? 표면적으로는 마치 불법을 널리 펴내려는 것 같지만 뼛속으로는 명리(名利)를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그가 어떠한지를 묻는다. 나는 말한다. 당신이 그의 명성이 대단히 큰 것만을 보지 말라, 제멋대로 불경을 해석하고 자기를 선전하여 사실 그는 일찍이 지옥 속에 있다.
경(經)·율(律)·논(論)은 경(經)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법의 원뜻을 파괴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삼장(三藏)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삼장이 아니라 바로 불경(佛經)이며 경은 바로 경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경(經)과 함께 나열할 수 없다. (출처 : 전법륜2)
불법과 불교(佛法與佛敎)
사람들이 부처(佛)를 언급하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은 바로 불교를 연상한다. 사실, 불교는 단지 불법(佛法)이 인간 세상에서 표현된 한 가지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세상에서 또 다른 표현형식이 있는데, 다시 말해서 불교는 불법(佛法)의 전부를 대표하지 못한다.
그 불교만 말하더라도, 역시 전부 다 석가모니부처가 전한 것이 아니다. 세간에는 또 다른 불교가 있고, 또한 석가모니부처를 교주로 여기지 않는데, 심지어 어떤 것은 석가모니부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티베트 불교의 황교(黃敎), 그들이 공양하는 것은 대일여래(大日如來)며, 게다가 황교는 석가모니부처를 단지 대일여래의 한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한다. 티베트에 전해진 불교 중 백교(白敎)가 공양하는 것은 밀라레빠(密勒日巴)로서, 석가모니부처와 전혀 관계가 없고, 또한 석가모니교의 일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 당시, 신도들은 석가모니부처의 명호(名號)조차 몰랐는바, 석가모니부처가 누구인지도 전혀 몰랐다.
티베트에서 전해진 불교의 다른 교(敎)들도 석가모니부처에 대한 인식이 또한 같지 않았다. 소승(小乘)불교는 줄곧 자신들이 석가모니부처의 정전불교(正傳佛敎)라고 여기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확실히 형식상에서 석가모니부처 시대의 수련형식을 계승했고, 원래의 계율과 복장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석가모니부처 한 분만을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한인지역(漢地)의 불교는 오히려 개량을 거친 후 중국으로 전수되어 들어온 것으로, 수련 형식상에서도 완전히 같지 않으며, 여러 부처를 신봉(信奉)하였고 단지 석가모니부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계율(戒律)도 배로 늘어났으며, 동시에 고대 한인지역의 민간 종교의식을 섞어 넣어 법사(法事) 속에는 또 목어(木魚), 타종(撞鍾), 바라와 북 등 중국 악기를 채용했으며, 복장 또한 중국 고대인의 민간 의복으로 갈아입고서, 대승(大乘)불교라 고쳐 불렀다. 이는 당초 석가모니불교와는 차이가 이미 아주 컸기 때문에, 그 당시 소승불교는 대승불교를 석가모니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불교 중에서 불법(佛法)과 불교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그럼, 우리는 또 역사에서 말해 보자. 서방 사회에서 출토된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도 만자(卍字) 도형을 발견했다.
사실, 대홍수(大洪水) 이전의 상고(上古)시대에는, 그들 역시 부처를 신봉(信奉)했다. 대홍수가 났을 때 일부 서아시아와 히말라야 산의 서남쪽 일대에 살던 고대 그리스 인종(人種)이 살아남았는데, 바로 지금의 백인종 인도인이며, 그 당시에는 바라문(婆羅門)이라고 불렀다.
사실, 바라문교가 처음에 신봉한 것은 부처였고, 상고(上古)시대 그리스인이 신봉한 부처의 계승이었으며 그 당시 그들은 부처를 신(神)이라 불렀다.
대략 1천 년이 지나, 바라문교는 바로 현대불교인 대승불교의 개량, 티베트 불교의 개량, 일본불교의 개량 등등처럼 개량하기 시작했다.
1천여 년 후의 고인도(古印度)에 이르러, 바라문교가 말법시기에 진입했을 때, 사람들은 부처 이외에 난잡한 것들을 신봉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의 바라문은 이미 부처를 믿는 사람이 없었으며, 믿는 것은 모두 마(魔)였고, 살생하여 가축으로 제를 올리는 상황이 나타났다.
석가모니부처가 세상에 왔을 때 바라문교는 이미 완전히 사교(邪敎)로 변해 버렸다. 이것은 부처가 어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이비로 변했다는 말이다.
인도 고대에 남겨놓은 문물에서도 바라문교가 초기에 남겨놓은 산굴의 조각상 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조각된 신상(神像)은 모두 부처의 형상이다. 이것은 우리 한인지역의 불교에서 조각된 불상 중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몇몇 큰 석굴 속에 두 부처가 마주 앉아있는 조각상 등이 있다. 부처는 여전히 부처이고, 종교가 사이비로 변한 것이다. 종교는 신불(神佛)을 대표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심이 나빠져서 종교를 변이(變異)시킨 것이다.
이 일체는 불법(佛法)이 영원한 것임을 설명하며, 불법(佛法)은 우주의 특성이고, 위대한 불법(佛法)이 부처를 육성한 것이지, 석가모니부처가 불법(佛法)을 육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석가모니부처가 불법(佛法)을 깨달았고, 자신의 과위(果位)를 증오(證悟)한 것이다.
나는 다시 이번 시기 인류 문명을 말하고자 한다. 당신들은 아는가. 도(道)는 신(神)의 일종이고 불(佛)도 신(神)의 일종이며, 아울러 여호와와 예수, 성모 마리아도 신(神)의 일종으로서, 수련의 목표와 우주 대법(大法)에 대해 증오(證悟)한 인식이 다름으로 인해 얻은 과위(果位)와 외형(外形)이 다를 뿐이다.
방대한 천체는 불법(佛法)이 육성한 것이지, 이러한 불(佛)ㆍ도(道)ㆍ신(神)이 육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이 모르는 것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석가모니부처는 여래부처만 해도 많기가 마치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이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부처들이 말한 법이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인간 세상에 와서 법을 전한다면, 석가모니부처가 이전에 말한 것과 글자 하나 틀림없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석가모니부처가 와서 법을 전하기 전에 여섯명의 부처(六佛)가 말한 것은 석가모니부처가 말한 법인가? 그렇다면, 불교 중에서 말한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세상에 와서 설법한다고 하는데, 석가모니부처의 말을 다시 반복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날 불교가 이 모양으로 변하게 된 것을 보니 마음속으로 아주 괴롭다. 종교 자체에 어리석게 미혹된 것이지 진수(真修)하는 것이 아니다. 위선자, 종교건달(痞子)들이 수련하는 장소와 출가인을 심하게 패괴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결코 이상할 것도 없다. 사실 석가모니부처도 일찍이 말법 시기의 상태를 말했는바, 현대 불교와 후기의 바라문교는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오늘날, 나는 다시 한 번 세상에 와서 法을 전하며 더욱이 직접 우주의 근본 대법을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하는데, 수련에서가 아니라 종교 자체와 속인의 감정을 수호하는 데서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종교를 마치 부처와 마찬가지로 여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교 중의 위엄과 명망이 충격을 받음으로 인해, 속인의 마음을 움직여 반대하는데, 이런 집착이 그래도 작단 말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그런 사람들은 불법(佛法)과 부처마저도 감히 욕하는데 이미 지옥의 귀신으로 되었으나, 단지 인간 세상의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줄곧 무슨 종교의 학자로 자처하지만, 그들이 불법(佛法)을 진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흔히 사람들이 부처를 언급하기만 하면 그들은 즉시 불교를 연상하고, 불가(佛家)를 언급하기만 하면 그들은 바로 그들 한 가(家)의 불교를 언급한 것처럼 여기며, 사람들이 불법(佛法)을 언급하기만 하면 그들은 곧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전 세계에 장기간 깊은 산 속에서 수련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역시 부동(不同)한 佛家의 수련방법에 따라 수련하고 있으며, 천백 년 이래 줄곧 전승(傳承)되고 있으나, 석가모니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용어 개념마저도 모두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는 종교 건달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비평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예수의 출현은 유태교를 노하게 했고, 2천5백 년 전 석가모니부처의 출현은 바라문교를 건드렸다. 역사적으로 정면(正面)적인 교훈은 사람에게 마치 영원토록 거울이 되지 못하는 것 같고, 그와 반대로 사람은 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면 교훈을 계(戒)로 인용하고 있다.
우주에는 성(成)ㆍ주(住)ㆍ괴(壞)의 법칙이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부동(不同)한 시기에 모두 부처가 세상에 와서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했으며, 역사는 바로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바, 미래의 인류도 마찬가지로 불법(佛法)을 들을 것이다.
정진요지 李洪志
1998년 12월 17일
전법륜2 http://kr.falundafa.org/book/HTML/zfl2.html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