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만들어진 이래 오랫동안 무기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석기 시대의 세석기류 중 화살촉이 출토되어 활이 이미 원시사회에서 널리 쓰였던 수렵도구 임을 알 수가 있다.
근대의 화약병기가 발명된 때 까지도 화약으로 추진되는 화살이 만들어 지면서 근대에도 사용된 무기이기도 하며 요즘은 심신단련에 좋은 운동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나누고 재료에 따라 목궁,각궁,철궁,철태궁 등으로 나누며 재료의 수에 따라 단일궁,복합궁, 크기에 따라 장궁,단궁, 세기에 따라 강궁,연궁, 용도에 따라 예궁(禮弓),정량궁(正兩弓),고궁 등과 활의 장식에 따라 붉은 칠한 동궁, 검은칠한 노(蘆)궁으로 분류되며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활은 각궁으로 복합궁, 만궁에 속하며 물소뿔, 뽕나무, 소힘줄, 실등을 민에부레풀로 붙여서 만들었다.
1. 삼국시대 이전의 궁시(弓矢)
문헌 및 유적에 의하면 우리민족은 선사시대부터 궁시(弓矢)를 사용했으며 이는 한국 전역에 걸쳐 출토된 타제(打製) 및 마제(磨製) 화살촉으로 보아 분명하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면 삼국이전의 부족국가인 부여, 옥저, 예, 마한, 진한, 변한 등에서 궁시의 사용이 활발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부여는 궁시와 도(刀)와 모(矛:창의 일종)로서 병기를 삼으니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가 있었다"라고 하여 궁시가 부여의 중요한 무기였음을 알려 주고 있으며 "예(濊)는 모(矛)를 만드니 길이가 삼장(三丈)이라 이것을 여러사람이 함께 들고 보병전에 사용하였으며,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이곳에서 나온다"라고 하여 그 활이 일찍부터 유명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위지진한전(魏志辰韓傳)에는 "진한(辰韓)은 국명을 방(邦) 이라고 하고 궁(弓)을 호(弧)라고 한다." 그리고 "보병전에 능숙하며 병장(兵仗:무기)이 마한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삼한에 활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진한(辰韓)에서 철이 생산되었으 므로 철제 화살촉을 사용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삼한에 궁(弓)이 있었음은 진서(晋書)에 "마한(馬韓)은 궁(弓)과 순(楯:방패의 일종)과 모(矛)와 노(櫓:큰 방패)를 잘 쓴다."라고 기록 되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고조선에 예속하였던 예와 옥저(沃沮)가 궁시를 사용하였고, 인접한 부여와 읍루(相婁)도 이미 궁시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조선과 대립하던 삼한이 또한 궁시를 사용하였던 점으로 보아 고조선에도 궁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기술한 예에 관한 기사중 "낙랑단궁이 이곳에서 생산된다."라고 한 것과 위지(魏志)에 "桓帝)때 예의 사신이 단궁(檀弓)과 기타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라고 기록된 점으로 본다면 단궁은 본래 고조선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예의 땅에서 생산되어 낙랑일대와 기타 여러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던 것이 한사군(漢四郡)설치 이후 중국에 알려짐으로서 중국사람은 그것을 낙랑단궁이라 칭했다고 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낙랑단궁은 곧 조선단궁(朝鮮檀弓)이라 할 수 있으며 어느 한 지방에 국한되어 상용되었거나 한사군시대(漢四郡時代)에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이것은 그 후 만주지방까지 퍼져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한국 목궁(木弓)의 시초는 곧 단궁(檀弓)이라 할 수 있다. 단궁은 각궁(角弓)이 출현한 후에도 함께 사용된 목궁으로서 그 재료는 단(檀), 즉 박달나무이다.
그러나 점차 전해내려 오면서 산뽕나무와 산비마자(일명 애끼찌나무)가 대신 쓰였다. 산뽕나무와 산비마자는 목궁의 좋은 재료이므로 각각 궁간상(弓幹桑), 궁간목(弓幹木)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특히 궁간목은 탄력이 아주 좋아 좋은 활은 이것을 전체에 다 사용하고 보통 활은 내면만 이것으로 붙였다.
2. 삼국시대의 활
1) 고구려의 활
고구려의 활은 그 성능이 뛰어나 이웃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기록도 많다. 즉 위지(魏志)에 보면 "고구려 별종(別種)이 소수(小水:서안평 북쪽에 있는 강)를 근거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로인해 나라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하며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貊弓)이 이것이다."라고 하였고 중국 남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의 와유록(臥遊錄) 에는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 10년(고구려 山上王때) 처음으로 익주(翼州)를 정하니 예맥(濊貊)이 질좋은 활을 공물로 바쳤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맥은 고구려가 예맥의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므로 당시 중국에서 고구려를 지칭할 때 쓰던 말이다. 또한 우부강표전(虞溥江表傳)에서는 "오나라 손권(孫權)시대에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각궁(角弓)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손권이 즉위한 때는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26년(222년)이므로 이 때에 벌써 고구려가 각궁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단궁과는 다른 맥궁이 곧 각궁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할 수 있다.
2) 백제의 활
백제(百濟)는 마한(馬韓)의 후신이며 역시 부여족(夫餘族)의 일파가 남하(南下)하여 세운 왕국이므로 궁술의 발전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제 21대 비류왕(比流王) 17년(320년)에 궁성 서쪽에 사대(射臺)를 세우고 매달 삭망(朔望)에 활을 쏘았다." 하였고, 주서(周書)에 의하면 "병(兵:병기)은 궁전(弓箭:활과 화살)과 도(刀) 등이 있으며 기사(騎射:말을 타고 쏨)를 중요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아 백제 역시 궁도를 중요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신라의 활
신라(新羅)에 있어서도 궁도(弓道)는 고구려 못지 않게 중시되었다. 신라는 특히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병합한 나라였던 만큼 전쟁무기의 중추인 궁시(弓矢)에 대하여 소홀하였을 까닭이 없다.
삼국사기 직관지(三國史記職官志)에 보면 주로 변경(邊境)을 수비하는 이궁(二弓)이라는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는데 진덕여왕(眞德女王) 6년에 처음으로 한산주(漢山州)에 설치하고 다음 진평와(眞平王) 20년에 하서주(河西州)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궁술(弓術)을 관활하던 관원으로서는 법당주(法幢主)에 예속된 노당주(弩幢主) 15명과 법당감(法幢監), 법당두상(法幢頭上), 법당화척(法幢火尺)에 각각 예속된 45명 그리고 법당벽주(法幢酸主)에 달린 노당(弩幢) 1백35명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보면 "진흥왕(眞興王) 19년(558년) 봄 2월에 나마신득(奈麻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쳤는데 성 위에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된 노(弩)와 같은 병기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사용된 적이 없는 신병기이다.
신라는 포노 이외에도 차노(車弩)를 가지고 있었으며 노(弩)의 제작에도 아주 뛰어났다. 이는 당(唐)이 신라에 교섭하여 노사(弩師:쇠노를 만드는 사람) 구진천 사손(仇珍川沙 )를 초빙하였다는 사리로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손은 신라 17등급의 관직중 8번째에 해당하는 관직인데 이로보아 당시에 신라가 궁시 제작자를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삼국시대의 화살
이상의 여러 기록을 통해 부족국가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각 시대에 사용된 활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양궁(良弓)이나 신라의 경노(硬弩)에 사용된 화살은 어떠한 것인가? 지역에 따라 기후와 산물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된 화살 역시 서로 다르다. 고구려는 호시를 사용하였고 신라와 백제는 죽전(竹箭)을 사용하였다.
호시는 광대싸리로 만든 화살로서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이 지은 순제조석노기(順濟廟石弩記)에 보면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호"는 나무이니 단단하여 유이북(幽以北)에서 화살대로 쓰인다."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유(幽)는 고대 12주(州)의 하나로서 지금이 하북성(河北省) 순천(順天), 영평(永平) 및 요녕성(遼寧省)의 금주(錦州) 서북서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한나라 때에는 대(代), 상곡(上谷),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낙랑(樂浪) 등이 이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가 가장 강성하였을 때의 영역이 북은 장춘(長春)부터 송화강(松花江) 상류지역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요서까지 이르렀으니 유이북의 핵심지역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 바 고구려가 호시를 사용했음은 의심 할 바 없다.
신라와 백제는 대나무가 자라기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좋은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죽전(竹箭), 적(笛)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도 남아있는데 삼국사기 견훤전(甄萱傳)과 고려사 태조세가(高麗史太祖世家)의 "신라 경명왕(景明王) 2년 (918년)에 후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일길손민극(一吉 閔 )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죽전을 바쳤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을 중명하고 있다.
단궁과 각궁, 호시와 죽전은 한국 궁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목궁의 시초가 되는 단궁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재료가 변화하였지만 각궁, 호시, 죽전은 시대 변처에 따라 모양은 바뀌었지만 재료, 만드는 방법, 제원 등은 근본적으로 변치 않았다.
4. 역사상 이름난 명궁
1) 양 만춘
양만춘은 고구려때의 장군이다. 645년 연개소문이 막리지로 있던 고구려에 당나라 태종은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개모성을 함락시킨 뒤 요동성까지 손에 넣었다. 그런후 군사을 이끌고 안시성에 이르러 2-3개월간 포위하면서 하루에 6-7차례씩 치열한 공격을 퍼부었다. 고립된 상황에서 양만춘은 병사와 주 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적을 물리쳐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서 양만춘은 당태종의 오른쪽 눈을 명중시켜 결국에는 앓다가 죽게만들었다. 당나라 군대가 물러갈 때 양만춘이 성루에서 송별의 예를 갖추자, 당태종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비단 100필을 주었다고 한다.
2.궁예
신라의 왕족으로 신라말기 태봉이란 나라을 건국하였고 이후, 이는 후 고구려의 기반이 되었다. 궁예는 이름 그데로 활을 짤 쏘았다고 한다. 날아가는 새, 뛰는 노루, 떨어지는 낙엽까지 백발백중 으로 맞추었다고 한다.
3) 이 성계
고려 말기 신흥 사대부 계층을 대표한 무인이다. 고구려를 새운 주몽이 활의 명수였듯이 이성계도 활의 명수여서 일찍이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성계 는 고려 말기의 장군으로 원나라의 쌍성 총관부를 공격하여 빼앗았고, 홍건적 10 만 명이 고려에 쳐들어왔을 때도 용감히 맞서 싸웠다. 그 후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원나라 장군 나하추를 무찔렀으며, 1378년부터 1380년까지 지리산과 해주·황산 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왜구의 투구가 너무 두꺼워 쏜 화살이 튕겨나왔다고한다. 그래서 우선 화살을 이마에 맞추고 아프다고 벌린 입속에 화살을 다시 쏘아 맞출정도로 신궁이었다.
첫댓글이성계는 신궁이라 불리었죠.화살없이 그냥 시위만 당겨 쏴 죽였다는 야사가 많죠.그리고 양만춘 일화 또한 야사? 인데,사실상 양만춘도 정확한 사료가 없죠.당태종이 진짜 화살을 맞았는지는 다른 사료에는 없습니다.뭐 당연하죠.개쪽이니..비단백필은 추격방지의 뇌물성격이죠.
물론 야사에는 연개소문이 공포의 추격을 -_- 하여 명군이자 성군인-_-당태종은 아주 돌아가실 뻔했는데 고구려출신 장수 설인귀가 중상을 입으며 막았답니다.당태종은 황제를 죽여도 용서한다는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걸 주었습니다.설인귀는 연개소문이 비천한 출신이라고 하도 갈구서 빡돌아서 당으로 갔다더군요.
고려말,목은 "이색"이 사신으로 가다가 안시성을 지나며 이 곳이 이전에 고구려의 양만춘 장군이 검정색의 날개를 당태종의 눈에 박은 곳 이라는 한시를 지어 전해져 내려오는 거라네요.또 제가 알기론,조선후기 때 한 실학자가 중국인과 대화하다 오히려 중국인이 양만춘장군을 가르쳐 주었다는군요.-_-
첫댓글 이성계는 신궁이라 불리었죠.화살없이 그냥 시위만 당겨 쏴 죽였다는 야사가 많죠.그리고 양만춘 일화 또한 야사? 인데,사실상 양만춘도 정확한 사료가 없죠.당태종이 진짜 화살을 맞았는지는 다른 사료에는 없습니다.뭐 당연하죠.개쪽이니..비단백필은 추격방지의 뇌물성격이죠.
물론 야사에는 연개소문이 공포의 추격을 -_- 하여 명군이자 성군인-_-당태종은 아주 돌아가실 뻔했는데 고구려출신 장수 설인귀가 중상을 입으며 막았답니다.당태종은 황제를 죽여도 용서한다는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걸 주었습니다.설인귀는 연개소문이 비천한 출신이라고 하도 갈구서 빡돌아서 당으로 갔다더군요.
물론, "야사"로 "취급" 받는 사료이지만, 상고사에 대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작금에 누가 야사로 치부하며 비웃는진 몰라도(누굴까요? 훗.) 부정할 수 있는 사료는 아니지요.
사실 양만춘이 연개소문시대에 안시성주인지도 확실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어디 자료에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다라고 적혀있다고 들은거 같은데.(말하고 보니 이게 진짜인지 제가 궁금하네요. 아시는분 답변좀) 신궁이라면 고주몽, 정조도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조가 50발을 쏴서 과녁에 49발을 맞췄는데도 '아직도 수련이 부족하다' 라고 했다죠 아마. 이것가지곤 명궁이라기엔 부족한가 ㅡ_ㅡ;
동양 3국을 상징하는 무기 중...우리는 弓(활)이고, 일본은 刀(칼)이며, 중국은 槍(창)이죠..^^;;
이성계.. 왜구의 왼눈을 저격하겠다고 하고 전장에 나갔는데, 나중에 시체를 보니 왜구들 상당수가 왼눈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화살없이 시위만 당겨서 맞추려면 무협지에 나오는 기공탄을 쓸 수 있었단 소리군요; 역시 무림의 고수였나;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도 빼놓을 수 없죠. '주몽'이란 이름 자체가 뛰어난 명궁의 별칭입니다.
고려말,목은 "이색"이 사신으로 가다가 안시성을 지나며 이 곳이 이전에 고구려의 양만춘 장군이 검정색의 날개를 당태종의 눈에 박은 곳 이라는 한시를 지어 전해져 내려오는 거라네요.또 제가 알기론,조선후기 때 한 실학자가 중국인과 대화하다 오히려 중국인이 양만춘장군을 가르쳐 주었다는군요.-_-
궁예가 활의 대가였다는 것은...첨 듣는데...(태조왕건에서 철퇴 휘두르는 애꾸는 누굴까?)
요즘들어 글보다 리플에 더 큰 기대를 걸고 클릭합니다.-_-;;
궁예라는이름도 활잘쏜다는 뜻이에요 ;;근데 그가 잘쐇는지는..의문.. 애꾸인데 잘쐇으면 세계최고아닌가..
무림은 허풍이 좀강합죠;
이순신은 명궁 아닌가염?
제가 알기론... 이성계는 활을 쏜것이 아니라 작은활 (이름이 잘..)아무튼 역사스폐셜에서 보았는데요 다른 활보다 스피나 파워로보나 훨씬 쌘것이라고 합니다 ... 물론 쏠때도 일반활 보다 힘이 더 들어가는 활이구요 (정말 대단해요!)
이성계가 "편전의 달인" 이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거군요.편전은 고려때 발명되었습니다.작은 활이 아니라,편전에 쓰이는 "애기살" 입니다.보통 어느정도 무술이 되면 날아오는 화살도 쳐내곤 했는데,애기살은 작고 빨라서 어디서 날아 오는지도 모르고 누웠다더군요.편전의 사격법은 실전되어,고증법은 4가지가 있습니다.
편전이 아니라 명적 아닌가요?
태초명적을 말씀하시는군요.뭐,쏘기가 어려워 이성계 자신밖에 쏠 줄 몰랐다죠.명적은 우는 화살이란 뜻인데,신호용 효시입니다.촉 뒤에 소리통이 달려있습니다.편전과 명적을 잠시 헷갈리셨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