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우 선생 해적이
1907년 1월 24일(음 1906년 12월 30일):한국의 북녘 구석진 산골인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상동 338번지에 있는 ‘양짓집’이라 불린 자작농으로 성공한 할아버지(공희수) 집에서 아버지 공정규 님과 어머니 김택규 님과의 8남매 중 장손으로 태어나다.
1919년:할아버지 밑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마을 서당에서 <동몽선습> 등을 배우다가 한문 배우기가 어렵고 싫어서 서당을 그만두고, 마을에 세워진 2년제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식 공부를 시작하다.
1920년:보통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 권유로 이웃 별단 마을에 사는 두 살 위인 처녀와 혼인을 하다.
1921년:처가댁이 있는 별단 마을의 4년제 보통학교의 3학년에 전학하다.
1923년:벽동읍에 있는 6년제 보통학교 5학년에 다시 전학한 후, 6학년 때 의사가 될 결심을 하고, 신의주 고보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여 3년제 신의주 농업학교에 진학하다.
1925년:신의주 농업학교 2학년 때“나의 희망과 농업학교”란 작문을 써 문제가 생기자, 교장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사립 치과 학교에 시험 보러 가는 도중, 때마침 평양 도청에 생긴 “평양 의학 강습소”에서 입학시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도중에 시험을 본 결과 합격하다.
1926년 10월:서울 조선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사 검정시험” 제1부에 응시하여 합격하다.
1927년:안간힘을 다하여 공부한 보람 있어, “의사 검정시험”의 제2부와 제3부를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제3부 시험을 앞두고 아내가 수술을 받다가 돌아가서 충격을 받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사 수업을 위해 신의주 도립병원에 취직하다.
1928년:병리 실험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 선배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와 경성 의학전문학교 병리학 교실에서 윤일준 교수의 조수로 일하게 되다.
1929년:백인제 교수의 추천으로 3년 계약을 맺고 안과 교실 조수가 되다.
1930년 11월 10일:평안북도 삭주에 있는 신부 이용희 님 집에서 구식 결혼을 하다.
1931년:맏딸 영일 태어나다.
1933년:안과 교실에 있으면서 경성제대 병리학 교실에서 개인 연구생으로 병리학을 연구하다. 맏아들 영길 태어나다.
1936년:일본 도쿄에서 열린 안과학회 학술대회 때 ‘중심성 맥락망막염의 원인 규명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다. 그리고 2녀 영심 태어나다.
1937년:해주 도립병원의 안과 과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소위 중심성 맥락망막염의 본태에 관한 실험적 연구’란 박사학위 논문을 일본 나고야 의과대학에 신청하여 4개월 10일 만에 학위 논문이 통과되어 의학박사 학위를 받다.
1938년:안국동에서 처음 안과병원을 개원하다. 이때 이극로 박사를 만나 한글 사랑이 나라 사랑의 길임을 알게 되었고, 3녀 영애가 태어나다.
1939년:서린동으로 안과병원을 이전 개업하다.(백기호 내과와 어울려).
1941년:“공병우 누도(눈물길) 검사법”을 개발하였으며, 4녀 영미 태어나다.
1943년:‘소안과학’ 교재를 펴내었으며, 5녀 영완 태어나다.
1945년: 8․15 광복이 되는 해 6녀 영경 태어나다.
1947년: 10월 백인제 박사와 함께 <수선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었으며, 최초로 한글 시력 검사표를 만들어 유한양행을 통해 보급케 하였다. 둘째 아들 영태 태어나다.
1949년: 1947년부터 한글 타자기 연구 개발에 힘써,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발명하였으며, 셋째 아들 영재 태어나다.
1950년: 세벌식 ‘공 속도 한글 타자기’ 첫 시제품 3대를 만들다.
1954년:‘쌍 초점’ 타자기를 발명하다.
1956년: 안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다.
1958년: 미국에서 ‘콘택트렌즈’를 도입하여 국산품으로 개발하다.
1959년: 1977년까지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를 지내었고, ‘스크레타’ 콘택트렌즈의 첫 개발품 쉬팅을 시작하다.
1960년: 서울 맹인 부흥원을 설립하여 맹인 재활 사업으로 맹인 점자 교육과 한글 타자 교육을 하다.
1961년: 의안 및 콘택트렌즈 제작부를 최초로 만들다.
1962년: 한글학회 부설 ‘한글 기계화 연구소’발족에 참여하여 <한글 기계화> 지를 처음으로 펴내다.
1965년: 한국 콘택트렌즈 연구소를 만들어 한국 최초로 약시 검안을 위한 약시부를 신설, ‘누도 폐쇄에 대한 뿌리비누관과 인공비누관의 사용법’을 개발하다. 또 서울 천호동에 공 안과 의원 분원을 개설하다.
1967년: 한글 텔레타이프를 개발하여, 치안국과 통신사에 설치 활용하게 하다.
1968년: 한영 겸용 타자기를 발명하고,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를 설립하다.
1971년: 맹인용 점자 타자기를 개발하고, 중국 주음부호 타자시도 뱔명하다.
1972년: 1982년까지 한국 맹인 생활 센터를 설립하여 중도 실명자 재활 교육을 실시하다. 한편 한글학회에서 창간한 <한글 새소식>의 편집위원이 되어 공 세벌식 타자기로 쳐서 펴내다.
1974년: 한글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외솔상(문화 부문)을 받다.
1977년: 사진 연구를 시작하면서, 1978년, 1980년에 <공병우 사진집>을 펴냈으며, 전시회 등을 열다.
1979년: 1982년까지 돈화문에 공 안과를 열었으며, 일본‘ ’와 ‘로마’자의 겸용 3단 타자기를 발명하여 일본에서 특허를 얻었으며, 한일 국제 맹인 타자 경기대회를 열기도 하다.
1980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국으로 가서 한글을 컴퓨터화하기 위한 연구를 하면서, 한편 조국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쏟다.
1982년: 세벌식 한글 워드 프로세스(매킨토시)를 개발하다.
1983년: 세벌식 한글 컴퓨터 식자기를 개발하다.
1985년: 매킨토시 컴퓨터로 직결식 한글 폰트를 최초로 개발하다.
1987년: 제1회 서재필 상을 한글 과학화 연구 등의 업적으로 받다.
1988년: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한글문화원’을 열고, 한글 전용과 한글 과학화 및 한글문화 발전 사업에 전념하다.
1989년: 세벌식 한글 전자 타자기를 개발하면서,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는 자서전을 펴내다.
1994년: 매킨토시용 무른모 한손 자판을 개발하고, 세종대학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다.
1995년: 연세대학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다.(시신은 의과대학 실습용으로 기증하다.
2005년 3월 7일: 한글학회와 한글문화원 공동 주최로 ‘공병우 박사 10주기 추모식’을 베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