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는 미국에 있을 때, 친구들이 놀러 오면 안내해주던 곳이었어요. 거기에서 공연을 보며 언제쯤 나도 저 무대에 연극을 올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제가 만든 작품으로 공연하게 됐으니 감개무량하죠.”
송승환(46)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공연 ‘난타’가 9월25일부터 10월19일까지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다. 세계 공연의 메카인 브로드웨이에서 2003∼2004 시즌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국내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돈 받고 판 문화상품’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때문일까. 송승환은 공연을 앞두고 흥분과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7년 전 처음 공연된 ‘난타’는 대사 없이 2시간 동안 칼로 도마를 두드리며 벌이는 일종의 비언어 퍼포먼스다. 그동안 해외 16개국, 83개 도시를 돌며 공연돼 1백50만명 이상의 관객이 ‘난타’를 관람했고, 난타 전용관이 탄생 하기도 했다.
“‘난타’는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에요. 국내 연극 시장이 너무 좁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려면 해외로 나가서 공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언어가 큰 장벽이었죠. 언어를 쓰지 않는 비언어 연극이 유리할 것 같았고, 여기에 어떻게 우리나라 사물놀이를 입힐 수 있을까 고민하다 만든 작품이 ‘난타’였어요.”
‘난타’는 공연횟수만큼이나 재미난 기록도 많다. 주방이 배경인 탓에 연간 도마 소비량이 1백20개, 칼 1천1백 자루, 사용되는 여러 야채 중에서 오이만도 1만4천개나 된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난타’의 수익금은 자그만치 1백억원대를 웃돈다고 한다.
친구 집을 담보로 잡혀가며 끊임없이 세계 무대 노크
‘난타’가 브로드웨이에 입성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친구집을 담보로 잡히는가 하면,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브로드웨이 초청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이번 ‘난타’가 공연될 극장은 뉴빅토리 극장으로 예전에 작품성이 충분하지 않다고 ‘난타’의 초청을 거절했던 바로 그곳이다.
배우 겸 제작자이기도 한 송승환의 현재 직함은 (주)PMC 대표. 처음에는 직원 서너 명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30여명이 넘는 직원과 1백여명의 배우들을 거느린 거대 조직의 CEO가 됐다. 공연사의 대표이긴 하나 그는 여전히 ‘공연제작자’이기보다 ‘배우’이기를 원하고 TV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TV 드라마나 영화에도 출연하고, MC도 보고, 라디오 DJ도 하고, 연극에도 출연했지요. 하는 일은 다르지만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제가 하는 것은 다 같은 연기라고 할 수 있어요. 할 일이 많기는 한데 그거야 시간을 쪼개서 하면 되니까 문제도 아니죠.”
한때 그가 요샛말로 ‘톱’을 달리던 아이돌 스타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송승환은 수업시간에 책을 또랑또랑 잘 읽어 동화구연대회에 나갔다 어느 연출가에게 픽업돼 어린이 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했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면서 최고 하이틴 스타가 됐고, 당시 ‘젊음의 행진’의 MC와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DJ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인생에 변화가 왔다. 당시 약혼자였던 지금의 아내와 함께 돌연 뉴욕으로 떠난 것이다.
“남들은 ‘유학’이라고 했지만 ‘세상 구경’삼아 떠난 거였어요. 어릴 때부터 연예활동은 할 만큼 해봤기 때문에 ‘인기’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었어요. 그보다 미국에 가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죠.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거나 할리우드 영화를 마음껏 보기 힘들었거든요. 말하자면 문화적 갈증이 심했던 거예요.”
굳이 속내를 드러내자면 알려지지 않은 그의 가족사도 그의 뉴욕행을 부추겼다. 당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그는 아파트를 네채나 가지고 있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유학을 떠나기 2년 전 부친의 사업 실패로 졸지에 친구 집에 얹혀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집에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게 예사였어요. 돈을 많이 번 것은 사실이지만 매번 아버지 사업에 쏟아붓고 나니까 어느 순간 허무해지더라고요. 아등바등 돈을 버는 것보다 젊을 때 더 많이 보고 느끼는 게 더 큰 재산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거죠. 남들은 연예인인 제가 돈 싸들고 유학간 줄 알지만 그때 저와 집사람이 가져간 돈은 3천달러가 전부였어요.”
당장 벌지 않으면 하루 끼니가 걱정스러웠던 뉴욕생활. 아내 박찬실씨는 네일숍에서 일하고 그는 노점상에서 시계나 신발을 팔기도 했다. 두 사람의 유일한 낙은 여윳돈이 생기면 브로드웨이로 달려가 연극을 보는 것이었다.
“하루는 노점에서 신발을 팔고 있는데 젊은 여자가 ‘혹시 송승환씨 아니세요’하고 묻더라고요. 맞다고 했더니 측은한 눈으로 ‘참 용감하시네요’하는 거예요. 잘나가던 연예인이 벼룩시장에서 신발을 팔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하죠. 그래도 내 처지가 비참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신발을 판 돈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고, 남은 돈으로 아내와 극장으로 달려가 연극 한편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더 행복했으니까요.”
올해로 결혼생활 18년째. 그에게 아내는 ‘혈육 같은 존재’다. 힘든 시기에 많은 위로를 받은 것.
“아는 친구 카페에서 우연히 집사람을 만나고 3년쯤 연애를 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제가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힘들 때 만난 사람한테는 푹 빠지잖아요. 그리고 뉴욕에 있을 때도 아내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죠.”
“힘들 때 같이 있어준 아내 아이 없는 생활이 익숙하고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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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18년째, 힘들 때마다 많은 위로를 해주었던 아내는 혈육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와 아내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남들은 아이없이 사는 이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지만 정작 송승환은 “아이 없이 사는 결혼생활이 익숙하고 편하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그냥 살기로 했어요. 지금은 집사람이나 저나 아이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 있죠. 그래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한 것 같아요. 아이가 있어봤어야 좋은 점도 알고 그럴 텐데 말이죠. 하하하.”
두 사람은 성격이나 취향이 매우 비슷하다. 그다지 내성적이지도 외향적이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마는 성격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관람객으로서 공연을 보는 느낌도 비교적 잘 통하는 편이다. 그는 아내하고 있을 때는 일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지만 해외출장 때면 아내를 동반하는 것으로 점수를 딸 줄 아는 ‘괜찮은 남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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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박찬실씨와 미국에서 찍은 사진
송승환은 요즘 EBS ‘문화, 문화인’을 진행하면서 간간이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한다. MBC 드라마 ‘아줌마’ ‘고백’, KBS의 ‘내사랑 누굴까’ 등이 그의 최근작이다.
“연기는 제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역할을 하는 배우는 되기 싫었어요. 제작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해요. 현재로선 ‘난타’가 잘돼서 하고 싶은 역할만 골라서 할 수 있으니까 그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죠.”
송승환은 또 올 11월에 공연될 ‘아마데우스’ 준비로 한창 바쁘게 지내고 있다. 뮤지컬 ‘아마데우스’는 그가 스물여섯살 때 ‘모짜르트’ 역할로 출연했던 작품인데 이번에도 어느덧 마흔 중반이 된 나이에 ‘모짜르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최근 ‘세계를 난타한 남자, 문화CEO 송승환’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내년 목표는 “뮤지컬의 본고장 오프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전천후 예술인, 송승환의 또 다른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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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최숙영 기자 ■ 글·조희숙<자유기고가> ■ 사진·정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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