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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설악무산(雪嶽霧山) 선사(사진)는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에 추대되던 날, 제방에서 모인 대중들을 향해 이 같은 법구를 내렸다. 선사의 법구가 가진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았지만, 천편일률 칠언절구의 한문게송에 식상했던 대중들은 한 편의 시처럼 간결하고 알기 쉬운 설악무산 선사의 시조형식의 게송에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부처님의 경지, 조실스님의 경지를 이렇게 멋지게, 누구나 알아듣는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구나! 어려운 한문을 사용하지 않아도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이 목숨을 걸고 전해준 혜등(慧燈)의 빛이 오늘 설악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한글 게송으로 눈부시게 현전(現前)하는구나!
설악무산 조실의 조실 수락법문에는 그 흔한 할(喝)이나 난해한 한문게송은 없었다. 한글로 쓴 게송, 그것은 설악무산 선사가 마침내 우리말로 완성해낸 우리말로 깨침의 노래, 즉 한글 선시(禪詩)였다.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와 같다는, 즉 너와 나, 우리네 사는 모습이 모두 이 떠내려가는 뗏목다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실상이 그러하니 부질없는 대상(강물 없는 강물)에 얽매여 맥없이 흘러가지 말고(소중한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정각산을 떠나 정각(正覺)을 이루기 위해 보드가야를 향해 네란자라(니련선하) 강을 건너실 때, ‘이 강물을 역류하는 삶을 살리라’라 결심한 것처럼 마땅히 일대사를 이룬 대장부의 삶을 살아가라는, 절절하게 가슴을 진동시키는 사자후에 다름 아니었다.
설악무산 선사가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로 추대되던 날, 밤새 내린 상서로운 눈으로 설악은 '설악'이 되었다.
조실 추대법회가 열리는 설악산 신흥사 설법전으로 수좌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는 설악무산 선사. 선사의 가사자락이 청풍을 맞아 펄럭이고 있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조오현(설악무산) 시 ‘아득한 성자’ 전문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조오현(설악무산) 시 ‘적멸을 위하여’ 전문
설악무산 조실스님의 사자후를 들으면서 스님의 주옥같은 선시(禪詩)가 떠오른다. 스님의 시는 여느 시와 달리 깨달음의 경지를 원초적으로 표현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감동과 교훈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순간, 조실스님의 한글 선시를 떠올린 것은, 국내외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 선시들이 지닌 웅장한 기품과 유장한 의미를, 마침내 한국 선문(禪門)을 대표하는 수좌들이 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선문을 이끌고 있는 선원수좌회 소속 선원장과 유나급의 구참 납자들은 설악무산 스님이 발표해온 한글 선시들이 저 중국 당송대의 조사들이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들에 비해 조금의 손색도 없으며, 오히려 우리 시조와 시의 틀을 빌어 표현한 오도(悟道)의 노래이자 깨침의 절창(絶唱)임을 확인하고는, 완고한 고사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설악선문의 조실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2011년, 설악무산 스님이 선원수좌회의 삼고초려로 신흥사 조실로 추대될 때의 이야기다. 살활자재 파주방행에 자유자재한 조실방장이 부재해 한국선문의 혜등이 풍전등화에 있음을 염려한 선원수좌회의 스님들이 모여 설악에서 무금선원을 세우고, 신흥사에 향성선원을 열어 북산(北山, 설악산)에서 소리 없이 선풍을 발양하고 있는 설악무산 선사를 화제로 올렸다. 이들은 설악무산 스님이 지난 반세기 가까이 발표해온 한글 선시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그 선시들의 경지가 능히 한국선문을 이끌어갈 선지식의 게송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설악산의 한주로, 늘 스스로를 스님의 자격이 없다며 낙승(落僧)이라 부르던 스님, 만해와 미당에 견줄 격조 높은 시(시조)를 간헐적으로 발표하면서 ‘한글선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활짝 연 문장(文丈), 설악무산 스님은 이렇게 선방의 최고 어른을 지칭하는 조실에 추대됐다.
당시 설악무산 스님의 신흥사 조실 취임은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선문의 구참들이 의견을 모아 조실로 추대한 것이니, 절집 큰 문중에서 노사(老師)를 대접하는 의미로 어른을 조실로 추대하는 관행과는 그 격이 다른 것이었다.
2011년 하안거 해제일 하루 전, 신흥사 설법전에서 200여 명의 납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봉행된 조실 추대식은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꽃다발을 증정하는 간결한 의식으로 진행됐다. 신흥사 조실 추대 자리에는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 파계사 성전암 현응선원 선덕 일오 스님, 전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의장 영진 스님 등 선방을 대표하는 구참 수좌들과 이수성 전 국무총리 등 사대부중 30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당시 설악무산 스님은 법상에 올라 “모두 정진해 각자 마음 밭의 조실이 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14년 3월 14일, 설악무산 조실은, 처음으로 선문에 발길을 들이는 눈 푸른 납자들을 교육해 부처의 길을 올바르게 걷도록 지도하는 조계종단의 기본선원 조실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조계종의 종립 선원은 봉암사 선원과 신흥사 교구의 백담사 기본선원 두 개 뿐이니, 설악무산 선사의 기본선원 조실 추대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추대법회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있는 설악무산스님과 대중들.
전 기본선원장 지환 선사로부터 기본선원의 조실을 상징하는 주장자를 받아 대중들을 향해 들어보이는 설악무산 조실. 조계선맥이 다시금 설악으로 돌아왔음을 선언하듯, 스님의 표정에 비장함이 흘렀다.
이날 설악무산 조실스님의 기본선원 조실추대법회에 참석한 수좌들. 왼쪽에 신임 기본선원장 신룡 선사, 가운데 기본선원운영위원장 영진 선사, 오른쪽에 전 기본선원장 지환 선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종단의 기본선원이 설악에 둥지를 튼 이날, 설악무산 선사는 조실 추대를 수락하는 법어에서, 이례적으로 장황하게 설악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흥성했던 우리 선문의 역사를 설명했다.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정수이자 최고의 수행전통으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조계선문의 도도한 흐름이, 그 선문을 처음 열었던 설악으로 다시 옮겨져 왔음을, 법석에 모인 대중과 한국불교에 선포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법문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날의 법문 요지는 이곳 설악이 단순히 도의국사가 머문 곳이 아니고 한국의 선문이 개창한 곳이며, 고려 때까지 한국 선문의 중심지였던 곳이었다. 남설악 진전사에서 주석하며 한국선문의 혜등을 높이 세운 도의국사의 원력이 결실을 이룬 곳, 국사의 위덕을 기려 그의 부도탑을 찾아 당대의 고승들이 애써 찾아 들른 곳, 그래서 설악은 선종사찰 중의 하나가 아닌, 우리나라 선의 본향임을 설악무산 선사는 역설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종단(조계종) 수좌회의 결정에 따라 설악산 백담사를 기본선원 근본도량으로 정하고 개원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해 ‘귀원정종(歸源正宗)’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악산이야말로 도의국사가 선법을 전한 우리나라 선종의 남상지이자 울흥지인데 이 산중에 기본선원 근본도량을 설치한 것은 마땅히 근원으로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악무산 조실은 조계종 기본선원의 설악산 이전 개원의 의미를 근대의 선지식 용성진종 선사가 쓴 <귀원정종>이라는 책의 제목을 따서 표현했다. 조계종단의 기본선원이 설악으로 온 것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선의 근원을 다시 찾아 온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설악무산 선사는 진전사, 억성사, 사림원, 오색석사 등의 절들이 설악의 품에 자리한 선종의 본찰이었음을 소개했다. 오색석사는 범일 선사가 출가한 절이고, 억성사는 홍각국사와 도의의 제자 염거화상이 주석하던 절이라는 사실을 비문의 기록을 근거로 설명했다. 설악무산 선사는 또 도의의 문손들이 중부권 일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활동했음을 상기시켰다. ‘북산의 남악척(北山義 南嶽陟)’ 즉, 북산(설악)에는 도의국사 남악(지리산)에는 홍척국사가 선문을 융성시켰다는 기록을 찾아내 제시하며, 조계종의 기본선원의 설악에 자라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선사의 목청에서는 고려 말까지 선종 수행처로서 대단한 명성을 가졌던 설악의 옛 선풍을 되살려 기필코 한국을 대표하는 선불장(選佛場)으로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가 진하게 묻어나왔다.
“도의국사가 전해온 조계법맥은 육조혜능대사, 남악회양선사, 마조도일선사, 사당지장선사로 이어지는 선종의 정통 법맥입니다. 도의 국사는 이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귀국후 10여년간 설악산 진전사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길렀습니다.”
우리 선종사에서 설악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설악무산 선사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법문 구절구절 속에 간절함이 나타났다. 선사가 자신의 자호를 설악으로 정한 것에 깊은 의미가 스며 있음을 웅변으로 드러냈다.
“설악산은 우리나라 선종사에서 요람이자 고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설악산은 북산불교(北山佛敎)의 요람이었으며, 이 지역은 우리나라 초기선종의 인재를 키워낸 모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또한 후학들에 의해 설악산은 한국선종의 성지로 인식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서 도의국사나 염거화상, 보조체징, 홍척국사, 수철선사, 홍각선사, 일연선사, 태고보우선사와 같은 고승이 나와야 합니다. 아니 그분들을 능가할 고승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참다운 전통과 사상과 정신의 계승이고 복원입니다.“
조실스님의 법호를 상징이나 하듯, 이날 오전 눈발이 날리던 설악산 신흥사 경내에는 아침부터 눈발이 내렸다. 안개처럼 뿌옇게 흐린 날씨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실추대법회가 진행되면서 날이 개었고, 햇빛이 도량을 밝게 비추었다.
법어에 앞서 제3교구본사 신흥사 주지 무송스님은 “그동안 설악무산 조실스님이 보여주신 행적과 감로법문은 수처작주의 진제였다”며 “이제 설악산 선불장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은 설악무산 조실스님의 줄탁동시 지도에 힘입어 은산철벽을 깨부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추대 수락법어에 앞서 합장을 하고 대중들로부터 삼배를 받고 있는 설악무산 선사.
앞으로 백담사에 개설된 조계종 기본선원의 선원장을 맡은 신룡 선사에게 설악무산 조실스님이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조실추대법회가 끝난 후 신흥사 대웅보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설악무산 조실은 백담사 기본선원에서 참선공부를 시작하게 될 수좌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조계종 기본선원운영위원회 위원장 영진 스님은 “지난 1996년부터 16년 동안 동화사에서 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운영되었던 기본선원이 이제 설악산 백담사로 이전되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며 “겸양하신 성품으로 인해 늘 사양만 하시던 설악무산 조실스님을 삼고초려를 통해 어렵게 기본선원 조실을 맡아주시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으니, 오늘 이 법석은 일찍이 도의국사가 일으킨 설악의 선풍이 설악무산 조실 스님에 의해 다시 제창되는 감격스러운 자리”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기본선원의 조실을 상징하는 주장자를 그동안 기본선원장을 맡아왔던 동화사 유나 지환 선사가 설악무산 선사에게 지극한 예로 올렸고, 주장자를 건네받은 설악무산 조실은 주장자를 높이 들어 대중에게 보이는 것으로, 간결하지만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추대의례를 마쳤다. 설악무산 조실스님은 법문을 마친 후 기본선원 선원장에 현 백담사 무금선원선원장 신룡 선사를 임명하고,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날 설악무산 선사의 기본선원 조실 추대법회에는 제방의 선원장들과 수좌들, 본사주지, 중앙종무기관을 대표한 스님들, 지원, 도후, 무송, 정념 스님 등 제3교구 소속 사찰을 이끌고 있는 스님들과 기본선원에 입방한 수좌들이 설법전을 가득 메웠다. 또한 선사의 조실 추대를 축하하기 위해 이근배 시인(예술원 회원, 전 시인협회장), 오세영 시인(전 시인협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신달자 시인(전 시인협회장), 최동호 시인(고려대 명예교수), 이상국 시인(전 작가회의 부이사장), 홍성란 시인(성균관대 교수), 유자효 시인(전 SBS본부장), 한분순(여성문인회 이사장) 등 한국 문단의 원로·중진 문인들이 함께 했다.
조계선문(禪門)의 천년 법통
북산(北山)자락에 돌아오던 날,
초목은 봄기운에 미소짓고
안개는 청풍에 두 팔 벌리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설악무산 스님은?
194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 어린 나이로 출가해 1958년 성준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은 직지사에서 사미계를,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고, 법명은 무산, 법호는 만악, 자호는 설악(雪嶽)이며 조오현이라는 속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고, 시조시인으로 문단에 큰 거목으로 추앙받고 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 및 주필, 춘천불교방송 사장 등을 지냈고, 특히 만해사상을 선양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만해축전을 세계적 축제로, 만해대상을 한국의 노벨상으로 정착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조계종의 종조 도의 국사가 창건해 한국 선종의 맥을 연 강원도 양양 진전사를 복원했고, 그동안 신흥사와 백담사에 각각 향성선원과 무금선원을 열어 수좌들의 정진을 독려해왔다.
시집으로 <심우도>, <산에 사는 날에>, <절간 이야기>, <만악가타집>, <아득한 성자>, <비슬산 가는 길>이 있고, 역서로 <벽암록 역해>, <백유경의 교훈-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을 어찌 알랴> 등이 있다. 현대시조문학상, 가람문학상, 남명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 신흥사 조실로 내설악 백담사 무금선원에 주석하고 있다.
첫댓글 주장자가 있거늘 다시 받는 주장자는 어찌할 것이오.
시주은혜가 무거우거늘 가사장삼에다 주장자까지 한치라도 어긋나면 죄업이 수미산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