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는 일이 때론 하염없이 울먹이는 파문 같은 것이어서
누구나 울면서 파도 소릴 들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품어 볼 수 있는 희망
인간사의 덧없음을 윤회의 미학으로 풀어낸 시
1989년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경윤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무덤가에 술패랭이만 붉었네」가 걷는사람 시인선 96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과연 삶이란 덧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탄생에는/얼마간의 피 냄새가 묻어 있다”(「여수 동백」)라는 시인의 고백처럼, 생이란 얼마간의 피로 시작하여 피로 종결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무력감 또한 감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 보이는 삶들이 결국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통로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온다. 태어난 이상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할 때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꾸려 갈 용기를 일순 잃어버린다. 그러나 시인은 인간사의 덧없음을 딛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법을 아는 듯하다. 시인에게 그것을 알려 준 스승은 다름 아닌 자연이다. 팽나무가 “세상에서 와서 처음 만난/나의 스승”(「팽나무에 대한 헌사」)이라는 진술에서 미루어 보듯, 김경윤의 시편들을 읽다 보면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으며 묵묵히 존재하는 자연에 대한 경의를 느낄 수 있다. 자연을 거닐며 시인은 세상사의 법칙을, 그 공연함을 실감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허공에 바람의 노래를 필사하는”(「달마의 저녁」) 작업이다.
생이 슬픈 이유는 한 사람의 인생이 상실이라는 슬픔의 사건으로 빼곡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확정된 미래는 우리로 하여금 상실의 경험을 누적시킨다. 하나의 이별을 완전히 추스르기도 전에 찾아오는 여러 죽음들. 그러나 시인은 죽음 뒤에, 죽은 이들이 새로이 태어날 공간을 믿는 듯하다. “별들은 지상에 내려와 꽃으로 피고/꽃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모래를 삼킨 집」)는 문장처럼 그의 시편엔 불교의 윤회 사상이 짙게 녹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연으로 돌아와 나의 슬픔을 지켜보고 있기에, 시인은 자신 앞에 놓인 나날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을 필사하며 그는 속세 속에서 괴로워하는 한 생명에게 우리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갈 예지된 존재임을, 삶의 무용함이란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필연적 사건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져 세상을 대면할 용기를 얻게 되는 동시에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배우게 된다.
한편 시집에는 역사적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기리는 마음이 담겨 있다. 어쩌면 시인이 윤회에 대해 그토록 깊은 사유를 가지게 된 까닭은 죽은 이가 자연으로 다시 태어나 자유롭게 넓은 꿈을 펼치기를 바라는 산 자의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시편을 읽다 보면 가슴속에 켜켜이 쌓이는 희망이 밤의 창문을 통과하는 달빛처럼 아름답고도 슬프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저자 소개
김경윤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89년 무크지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 『신발의 행자』 『바람의 사원』 『슬픔의 바닥』, 시 해설서 『선생님과 함께 읽는 김남주』 등을 냈다.
작가의 말
달마의 슬하에 들어
하염없이 바라보던
땅끝 바다의 윤슬과 물마루 건너
붉은 옷자락을 적시며 오는
당신을 기다리던 그 저녁의 감정을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그 마음의 일을
詩라는 이름으로 당신에게 드립니다.
2023년 가을, 땅끝 해은재(海隱齋)에서
목차
1부 비파나무 그늘에서
몽돌론
독거
채마밭 잠언
그 여름 사구미
여덟 개의 모퉁이가 있는 길
늙은 비파나무 그늘에서
달마의 슬하
그대 별서에 두고 온 배롱나무 붉은 꽃잎처럼
달마의 저녁
모정
텃밭의 산수
부추꽃의 기도
팽나무에 대한 헌사
고양이를 기다리는 저녁
2부 붉은 새로 환생하는 꿈
바다 여인숙
모래를 삼킨 집
파도의 안부
바다의 노래를 필사하다
바다의 적막
그 봄날 나는 바다의 애인이었네
몽돌의 연가
바다의 비애
몰운대에서 울다
황혼의 식탁
없는 사람처럼 빈 벤치에 앉아서
봄날 저녁
밤의 산책자
봄눈
3부 사람의 그림자가 발등에 수북이 떨어지면
마음이 붉어지는 저녁
그 여름의 부추꽃
고비의 저녁
홍그린 엘스를 찾아서
돈뜨고비에서 듣는 밤비 소리
불의 경전을 읽다
칭기즈칸 보드카와 저녁의 말들
옛 산에 두고 온 여름
고양이 얼굴로 찾아오다
어란
쓸쓸함을 위하여
당신은 누구시길래
애호박찌개와 나와 나의 시
노숙
4부 불칸낭의 노래
봄 같은 삶
어느 길냥이의 일생
희수
장터국밥집 뚝배기에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여수 동백
당산나무의 비명
불칸낭의 노래
황세왓에 부는 바람
그 봄날의 폭낭
계춘이 할망
늙은 폭낭의 노래
오월의 찔레꽃
해설
봄같이 사는 삶으로 가는 길
-김익균(문학평론가)
추천사
김경윤 시인을 생각하면 ‘여여(如如)’라는 말이 떠오른다. 늘 한결같고 속되지 않은 마음을 지닌 사람, 어떤 꾸밈도 과장도 없이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 불가에서는 우주의 진리를 깨우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이번 시집에는 차마 내색할 수도 없는 깊은 슬픔이 곳곳에 박혀 있다. “황망하게 하늘로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고” 바닷가 외딴집에서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견뎠을 시간이 젖은 모래알처럼 먹먹하다. “정처 없이 찾아간 몽골”에서도 ‘나’는 “황막한 모래바람 속을” “눈물 머금은 낙타처럼” 걷고 있다.
이렇게 “생의 고비”를 건너며 애도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시인은 “선방의 묵언 수행자처럼” 모래의 경전을 읽고 바다의 노래를 필사했다. 늙은 비파나무와 팽나무 그늘 아래서 슬픔을 달래며 허기진 고양이나 새끼 잃은 낙타에게 마음을 내어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을 부른 적도 없지만 삼라만상 속에 깃들어 있는 ‘당신’의 얼굴을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당신’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은 시집 후반부에서 여순사건이나 제주 4·3, 광주 5·18 등으로 무고하게 죽어 간 원혼들에 대한 애도로 이어진다. 이처럼 개인적 슬픔을 역사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우주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김경윤의 시들은 슬픔으로 빚어진 “인다라의 구슬”처럼 고요히 빛나고 있다. 글썽거리는 눈동자 속에서 서로를 비추는 만물들, 이 또한 그가 달마의 슬하에서 길어낸 여여(如如)의 경지가 아닌가.
-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학 교수)
책 속으로
떡갈나무 잎새에 별빛 걸어 두고
허공에 바람의 노래를 필사하는 저녁
-「달마의 저녁」 부분
어린 시절 고향 마을
큰댁 텃밭머리에서
생명의 신비를 처음 가르쳐 준 팽나무.
세상에 와서 처음 만난
나의 스승이에요
-「팽나무에 대한 헌사」 부분
오늘 밤엔 누가 들었는지
며칠째 캄캄하던 창문에 불빛이 환하다
헐벗은 해조(海藻) 그 쓸쓸한 필생들이
하룻밤 혹은 달방 얻어 한 철 머물다 가는
바다 여인숙, 잠 못 드는 밤이면
마음은 해인정사(海印精舍)에 들어
해조음에 잠귀를 적시며 불면을 잠재운다
-「바다 여인숙」 전문
달이라도 뜨는 날이면
만조의 바다는 가릉빈가처럼 날개를 파닥이고
달빛이 새의 깃털처럼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달이 토해 놓은 모래를 삼킨
언덕 위 외딴집에는
소음의 모래 같은 침묵이 쌓이고
모래를 삼킨 빈방에 누워
나는 붉은 새로 환생하는 꿈을 꾸었다
-「모래를 삼킨 집」 부분
내가 애호박찌개를 좋아하게 된 까닭은
애오라지 호박 앞에 붙은 애자(字) 때문이라
애자, 애자 하니 슬프고도 애잔한 나의 한생이 애호박만 같아
슬픔을 졸여낸 찌개를 애호하게 되었나 보다
(중략)
그런데, 누군가는 내 애호박찌개가 좀 슴슴하다 하고
또 어떤 이는 톡 쏘는 매운맛이 없다고 한다
그래, 청양고추 한 개만 잘게 썰어 넣었다면
제대로 맛나는 애호박찌개 되었을 것을
어쩌랴, 매운 말 못 하고 살아온 내 삶이 이 찌개의 맛이고
내 시의 맛인 것을.
-「애호박찌개와 나와 나의 시」 부분
바다가 밤새 뒤척이고
당신은 여수가 처음이라고 했다
첫, 이라는 말속에는
갯벌 같은 비릿함과 아픔이 있음을
여수의 밤바다가 일러 주었다
당신이 내 안에서 꽃피던 날부터
시(詩)가 처음 찾아왔고
세상에 첫아이가 태어났다
그 후 세상의 모든 탄생에는
얼마간의 피 냄새가 묻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여수 동백」 부분
동백꽃 붉은 가슴 안고 찾아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그늘 깊은 후박나무 아래에서
불칸낭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토벌대 불구덩에 아방 어멍 다 잃고
조천바다 숨비소리로 살아온 세월
고랑 몰라 고랑 몰라
목시물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슬픔의 밭담을 쌓고 견뎌 온 세월
고랑 몰라 고랑 몰라
불칸낭이 들려준 그 노래
사뭇 가슴에 남아
후박나무 새순처럼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불칸낭의 노래」 전문
기본 정보
ISBN 9791193412077
발행(출시)일자: 2023년 11월 02일
쪽수: 128쪽
크기: 126 * 200 * 12 mm / 289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걷는사람 시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