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 관해서 제작된 아주 달콤한 한 편의 영화
에서는 햇빛 쏟아지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금발의 미녀 클라라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짝이 될 한 소녀의 운명을
그린 장면이다. 그녀의 수도 생활의 시작은 그야말로 영화의 주
제가 될 만했다. 그녀는 15세에 결혼을 단념하고, 프란치스코의
힘찬 설교에 따라 움직였다. 프란치스코는 일생 동안 그녀의 친
구이며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밤 집을 도망쳐 나와 포르지웅콜
라로 가다가, 횃불을 들고 가는 수사를 만났다. 그녀는 그곳의
초라하고 조그마한 경당에서 거친 모직옷을 받아 입고 자기의 보
석 벨트를 매듭이 있는 보잘것 없는 밧줄과 바꿨다. 프란치스코
는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를 가위로 잘라 버리고 그녀를 베네딕
토 수녀원에 보냈다.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대단히
노하여 들이닥쳤다. 그녀는 자신의 잘라 버린 머리카락을 보이려
고 머릿수건을 벗어 던진 채 성당의 제대에 매달려 완강하게 버
티었다.
그로부터 16일 후에 그녀의 여동생 아녜스가 그녀에게로 왔다.
다른 이들도 왔다. 그들은 제2회 회원-클라라 수녀회-으로서 프
란치스코가 준 규칙에 따라서 속세와는 완전히 떨어져 청빈과 엄
격함과 단순한 생활을 지켰다. 프란치스코는 21세의 그녀를 여자
대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으며, 그녀는 죽을 때까지 순명으로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다
수녀들은 맨발로 지내고, 맨바닥에서 자며 고기를 먹지 않고, 완
벽하게 침묵을 지켰다. 후에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자매들에게 그런 과격함을 완화시키도록 설득했다. "우리 몸은
놋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복음적 가난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하루를 생활해 나가는 데 필
요한 재물조차도 소유하지 않았다. 교황이 그녀에게 그런 생활
방식을 완화하도록 설득했을 때 그녀는 확고 부동하게 말했다.
"나는 나의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의무를 면제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기록들은 아시시의 성다미아노 수녀원에서 살던 그녀의
생활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하다. 클라라는 식탁 옆에서까지 환자
들을 돌보았고, 구걸하는 수녀들의 발을 씻겼다. 그녀가 기도를
드릴 때에는 얼굴이 너무도 빛나서 주위 사람들의 눈이 부실 정
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생애의 마지막 27년 동안 중병으로
고생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교황,추기경, 주교들도 가
끔 그녀에게 의논하러 올 정도였으나 그녀 자신은 결코 성다미아
노 수녀원을 떠난 적이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에게 커다란
우정과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항상 그의 뜻에 따랐으며, 그가
이룬 참된 복음적 생활의 이상에 따랐다.
그녀의 기도와 진실에 관한 잘 알려진 이야기 하나가 있다. 사라
센 침공으로 수녀원이 점령 직전에 있었을 때, 그녀는 수녀원 벽
에다 축복의 기도문을 붙였다. "오! 주님, 제가 당신의 사랑으로
길러 온 무력한 이 자녀들을 적의 손에서 구해 주시는 것이 당신
의 마음에 맞는 일이 아니옵니까? 제가 지금 보호해야 할 이들을
사랑하올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애원합니다."
자매들에게는 "두려워 마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라
고 말했다. 결국 사라센은 도망가고 말았다.
설명 ; 41년에 걸친 클라라의 수도 생활은 보잘것 없는 영화 소
재로 다루어졌지만, 그 생활의 고결함은 바로 영화 각본 자체이
다. 단순함으로 이끈 흔들림 없는 결단력, 프란치스코가 그녀에
게 가르친 문자 그대로의 복음적 생활,이상을 약화시키는 현세적
압박에 맞선 용기 있는 저항, 가난과 겸손을 향한 열정, 열렬한
기도 생활과 자매들에 대한 관용 등이 그것이다.
이야기 ; 클라라는 임종 때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평화로이 출발하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좋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두려움 없이 가시오.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셨으며 항상 당신을 보호하셨고 어머니처럼 당신을 사랑하시
기 때문입니다. 축복 받으소서,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나를 창
조 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