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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圓 |
신信 |
교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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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佛=각覺 |
원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고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은 깨닫기 전에는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믿은
사람은 잣대,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따르다 보면 빨리 깨닫게 되고
실수를 줄이게 되고 자행자지를 적게 하게 되죠. 믿음이 없이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은 깨달음이 늦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문유관四門遊觀이란 말이 있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이 가비라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네 군데의 성문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그리고 승려를 만나고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쫓아 다니지만 자신에게는 이미 있는 권력과 명예와 부귀를
던져버리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을 밤에 넘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거기서 이미 끝난 것 같습니다. 깨달아서 부처님이지만
깨닫기 전에 그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 의심을 얼마나 연마
하나요? 확실히 의심이 걸린 사람은 손 들어 보세요? 다 풀렸습니까?
그래서 걸림이 없습니까? ㅎㅎㅎ
나이와 명예를 떠나서 성리를 가늠 잡은 사람을 대인(大人)이라고 하고,
성리를 가늠 잡지 못한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합니다. 성리를 가늠
잡지 못한 사람은 번뇌와 차별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계교병이
들 수 밖에 없고 머릿속이 복잡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리에 가늠 잡은
사람은 차별의 세계에 떨어져 괴로워하지 않고 든든합니다.
사람에게는 영지가 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영지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다 있습니다. 하다못해 마른 장작에도 영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하나 더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혼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있다고 합니다. 이 각혼을 가늠 잡았을 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통쾌 할 때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자리를 가늠 잡지 못하고
모르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돈을 뜯기면 고통스럽습니까?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영•기•질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영과 기와
질에 대해서 설명 할 수 있는 분? 공•원•정에 대해서 견성과 양성과
솔성의 세 가지 방면으로.. 즉, 3x3=9 아홉 가지 방면으로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분 있습니까? 만법귀일을 의리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 업에 대해서, 또는 육도 윤회에 대해서 설명 할 수 있는 분..?
또는 벽암록의 어떤 의두 요목을 가져와도 해설할 수 있는 분..?
손들어 보세요?
서울대와 고려대에서는 경영학과가 인기가 많답니다. 결국에는
공대생들은 경영자들의 밑에 있거든요… 경영하는 사람들이 현실의 일과
효율성에 대해서 앞서갑니다. 재미도 있고, 돈도 들어오고, 명예도
들어옵니다. 그래서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일을 시비이해라고 하는데,
시비이해가 이치에 가늠을 잡은 대소유무의 시비이해와 이치가 빠진
시비이해는 서로 다릅니다. 오늘 처음 온 사람은 헷갈리겠네요…
인간은 보통은 편안하고자 합니다. 그런 편안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몸으로 하는 것이 수양입니다. 인간은 밝게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일과 이치 간에 다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 안에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사실은 서가모니 부처님은 중생제도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아까 그 의심을 깨쳐서 생로병사의 이치뿐만이 아니라, 자기
본래의 자성자리를 깨달아 이미 우리 안에 밝은 지혜가 갊아져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어렵게 살지 말라고 알려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자기 등에 금은보화를 짊어지고는 빌어먹고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자신의 등에 금은보화가 짊어지고 있는데..
아세요? 그것을 아는 방법은 믿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쳤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전을 보면서 하겠습니다. 56쪽입니다. 의두는 의심의 머리를 말합니다.
투망의 끄트머리를 말합니다. 탁 잡아채면 나머지 다 올라오는 것입니다.
온갖 의심들이 있는데 그 의심. 의심. 의심. 의심들을 모아서 모아서
모아서.. 잔챙이가 아닌 그 머리가 있는데 그것이 의두란 말입니다.
투망 끄트머리를 잡아 당기면 쭉쭉 올라오듯이 다 올라옵니다.
그럼 그 의심의 머리가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대소유무의 이치입니다. 그 의심의 머리를 모은 것이
대소유무입니다. 둘째는 시비 이해의 일입니다. 마지막은 과거 불조들의
화두 중에서 의심 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과 이치에 대한 대표적인 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백양사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뭐꼬’ 라고 써있는 돌탑이 있습니다.
한자로 시심마 是甚麽라고 합니다. ‘이것이 뭐냐?’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이 글씨를 처다 보는 네가 뭐냐? 란
뜻입니다. 무엇이 들어서 네가 보고 알고 듣고 생각하느냐? 그 말입니다.
눈이 보는 것이냐? 마음이 본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무엇이냐?
의두는 분석하는 것입니다. 만법귀일 일기하처 라고 합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은 의두이나 사실은 성리입니다. 분석하는 것은 의두고 그것을
직관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리입니다.
<이는 연구의 깊은 경지를 밟는 공부인에게 사리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함이요, 성리는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요. >
우주 만유가 사은입니다. 사은의 본래 이치가 무엇이냐? 그리고
천지 만물, 허공 법계의 본래 이치가 무엇이냐? 이런 뜻입니다.
그 다음.. 우리의 자성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요.
우리의 자성은 여래의 불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래의 불성자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이 말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공안 公案, 또는
화두라고 합니다. 우리는 문목 問目이라고 했다가 의두로 바꿨습니다.
무엇에 의심이 걸려있으십니까? 우리 성철 스님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무 無자입니다. 제자들에게 맨날 ‘무자로 말해
보래이~.’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철 스님이 천진암에 계실 때부터
제자들에게 3만 배를 하고 오면 화두를 준답니다.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말고 3만 배 마치고 오너라.’
성철 스님의 이야기 입니다.
저는 그분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시간 이상을 자지 말고
3만 배를 하라는 이야기는 그만큼 네가 화두를 받을 준비를
갖추었느냐? 라는 뜻입니다. 진짜 도에 대한 욕심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일반 사회적 욕심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못 할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피곤해서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3만 배를 하고 4시간 정도만 잔다면 기본적인 업장은 녹아납니다. 일반
사람은 헌배를 3백 배, 아니 2백 배만 하고 앉아 있으면 단전 호흡이 잘
됩니다. 그런데 3만 배를 하면 어지간한 것은 뚝뚝 다 떨어질 것입니다.
3만 배를 보통 열흘 만에 하고 온답니다.
우리는 5백 배만 해도 ‘미웠던 그 사람이 안 미워졌어요, 갑자기 참회의
마음이 들었어요. 머리가 시원해졌어요.’ 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철 스님은 어린 스님이 3만 배를 다 하고 와서 3배를 하고 앞에
앉으면 손을 내 놓으라고 하고는 이렇게 묻는답니다. 책을 읽어 보면…
< ‘너의 손을 탁 끊어도 화두를 받고 싶으냐?’ ‘네..’ 라고 대답하면..
다시 묻습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이 바뀌어도 그 화두 공부하려는
마음이 바꾸지 않겠느냐?’ ‘네, 변치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데…>
이 책은 법정 스님이 쓴 책인데, 우리에게 강연했던
원철 스님이 편집한 책입니다. 계속 읽어 보면…
<3만 배를 하고 화두를 받기 위해서 수백 리를 걸어왔던
그때의 그 마음, 천지가 무너져도 화두만 하겠다고 맹세했던
그 초발심의 마음으로 꾸준하게 정진한다면 3년 안에 결단이
날 것이다. 성속을 막론하고 말이다…>
저는 이 말에 동감합니다. 의두 성리를 들려면 먼저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겠죠? 내가 깨쳐야겠다는 강한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의 한
대목을 또 읽어 드리겠습니다. 법정 스님이 산 속에서 수행하다가 든
감상을 적은 것입니다. 감각 감상으로 일종의 일기입니다.
<만약 한 물건을 깨치기 전에 죽게 된다면 들짐승이 될 것인지
날짐승이 될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지 다시 사람
몸을 받을 것인지 모를 일이다. 요행히 사람 몸을 받아도 불법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불법을 만나다 해도 최고의 길인 참선 공부를
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생각이 일어나 묘적암에서 많이
울었다. 공부하는 수자에게 공부의 진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마음을 밝히지 못한 채 오늘 호흡이 끊긴다면?
이 몸둥이는 어디로 갈 것인가?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행이다. 더딘 수행에 성취를 자책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가슴에서 뭉쳐 나오는 눈물이었다. >
이분은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초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절에 오게
되어서 출가를 아주 일찍 했습니다. 이때가 출가 해서 서른 두 살 때의
일입니다. 이 정도의 각심, 각오심이 있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주세불이고 원불교는 불교와는 달리 앉아서만 하지 않는다
하고, 묵조선을 하면서 간화선은 생각 날 때마다 한 번씩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선은 얼마나 하느냐고 물으면? 선은 무시선이니까 활동하면서
마음 경계에 따라 잘 챙기면 되죠 라고 합니다. 이런 개뿔따귀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교에 몸 담고 있으면 더디 깨치고, 원불교에 몸 담고 있으면 빨리
깨친답니까?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을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1조에는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취사를
잘하려면 생각이 깊어야 합니다. 생각이 깊게 하려면 온전해야 할
것입니다. 온전하게 하려면 미리 연마를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응용의
형세를 보아 미리 연마를 잘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경전 법규를 연습한다는 것은 공부의 기본 방향로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경전에 이런 말이
나왔더라고 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경전 법규 공부하기를 대강 마친 사람은 의두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이것은 경전 법규의 기본 분석을 끝내고 나서 의두를 들어서 실지로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원불교 신앙의 표어가 무엇이냐? 고 물으면 답은
처처불상입니다. 처처불상은 범신론이고 우주가 다 부처님이고
똥강아지도 위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전 법규를 연습한 것입니다.
의두 연마는 그래? 내가 부처야? 나의 뭐가 부처지? 저 사람이
부처라고? 부처는 이래야 하는데 부처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다니고
성질이 더럽냐? 돈 빌려간 사람이 돈을 갚지 않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저 사람이 처처불상이지? - 형제간을 떠나서 나 빼고 누구든지 돈을
빌려간 사람의 95%는 돈을 갚지 않습니다. 그것만 아세요. - 그럼
처처불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라고 의두에 들어가줘야 합니다.
여러 의심 중에 의두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일 쉽게 가지는 의두는
자기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육신인가? 이것이 나인가? 나라면 나라고
말하지 어째서 나의 소유로써 나의 손이라고 하고 나의 머리라고 하고
나의 몸이라고 하느냐? 그럼 나는 뭐냐? 이 마음인가? 마음이 언제
생겼지? 어떻게 생겼지? 어디에 있지? 크기는..? 빛깔은..? 냄새는..?
맛은..? 나는 죽으면 끝나나? 개와 나와의 관계는? 그럼 무엇이 나지?
그리고 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아는 것이 나인가? 꿈도 없이 잠 잘
때는 어디에 갔지? 나가 없어지는 것인가? 부모로부터 몸 받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지? 숨이 멎어지면 어디로 가는 것이지? 이렇게 의심이 계속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지 근성으로 원심교나 다니고 설교나 듣고 다니려면 원불교에 오지
마세요? 난 숫자 교화 안 할 테니까? 처음에는 믿으면서 다니고
들으면서 다닙니다. 그러나 견성을 하지 않으면 항마위는 절대 갈 수
없습니다. 마치 국문에 본문을 아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목수가
먹줄과 잣대를 얻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직 집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목수가 먹줄과 잣대를 얻어서 그것으로 집을 지어야겠죠?
의두 성리는 사량 계교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성리는 직관
전도라고 하는데, 직관 전도라는 것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그 자리에 합일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자리를 직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편안하고 고요 하려면 수양을 해야 합니다.
수양을 해서 적적 성성한 그 자리에 이르고 원적무별한 진경자리에 딱
들어 갔을 때, 비로소 의두 성리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뭐냐?
고 들이대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들이대다 보면 반드시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양은 젊을수록 더 좋습니다. 젊은 사람은 나이 먹은 사람들
보다 조금.. 약 백배 정도 더 좋습니다. ㅎㅎㅎ
전생에 수양을 해 본 사람은 이생에 조금만 해도 빨리 진경에 들어가고
욕심이 적은 사람이 진경에 빨리 들어갑니다. 욕심이 많으면 그것에
비례해서 번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요해 지겠습니까? 고요해진
상태에서 의두 성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의두 성리를 하려고 해도
의심이 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두 성리를 걸려면 독심을 품고 해야
하고 그것이 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3년 이면 된다고 했는데 정말로 3년이면 가능합니다. 출가해서
3년 하거나 재가를 해서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을 자꾸 응용할 수 있고
동정 일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가능합니다. 따로 노는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상근기는 한 번 들으면 알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은 제가 바로 큰 절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전강 스님은 27살 때 조실 스님이 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견성 인가를
받으려면 스님들과 마주 앉아서 다 문답을 합니다. 그것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대중이 그 사람에게 견성 인가를 내려서 떡을
합니다.
어느 날 성철 스님이 법전 스님에게 묻습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어째서 없다고 했노?’
그러니까 법전 스님이
‘일월동서별 日月東西別 하니 좌인기이행 坐人起而行 이라’
이 뜻은 ‘일월이 동서로 나누어져 있으니 앉아 있는 사람이 걸어가더라’
란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또 성철 스님이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나?’ 라고 묻자.
법전 스님이 훽 돌아서버렸답니다. 그래도 성철 스님은
‘말을 해봐라.’ 라며 다그치니 말로 답했고 성철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견성을 인가 했습니다. 견성은 인가를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법전 스님은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법전 스님
같이 우직하고 오롯하게 사심 없이 한 양반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려버리는 것입니다. 법전이니까 열린 것일까요? 불교니까 열린
것인가요? 성철 스님 밑에 있으니까 열린 것인가요?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지극하게 화두가 의단이 되어서 했기 때문에
그 양반은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수양하자는 것은 맑히고 비우자는 것인데, 비워서
밝히자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금은보화의 가방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뭐냐? 바로 의두입니다. 의두가 없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듣고 짐작하고 이해하고 가늠 잡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자력적인 열림이에요. 그것은 서원과 연마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됩니다.
대종사님은 대각을 하고 나서 너무 좋아서 면도를 하고 손톱을 깎고
나막신을 신고 영산을 뱅뱅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다시 의두로 들어갑니다. 아까 서원을 세워서 경전 법규를 한 다음
수양을 통해서 의두를 계속 연마하라고 했는데, 이 의두 연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경전 연마를 하다 보면 탁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걸렸다가 놔버리면 걸린 것이 아닙니다. 안 걸린 것입니다.
저는 의두 요목을 보는데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 당시 저는 경전 법규를 얼마 안 했기 때문에 말의 의미 자체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습니다.
맨 먼저 의리선 義理禪이 있습니다. 의리선은 기본적으로 분석해 내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상? 천하? 유아 독존..? 무슨 소리지?
이렇게 분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여래선 如來禪이 있습니다. 뭐냐? 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적적하고 고요한데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선을 하려면 반드시
수양을 해야 합니다. 수양을 해서 적적한데 갖다 놓으면 고요 적적한
그 자리와 화두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어울리면서 밝아집니다.
적적.. 성성..이라고 하죠? 적적해지면 성성해져 버립니다. 진공하면서
묘유가 탁 들어나 버립니다. 공적되면서 영지가 솟아 올라와 버립니다.
둘이 하나입니다.
그 다음이 조사선 祖師禪 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에
지기 조사님한테 인가를 받으셨습니다. 진기 조사는 서가모니 부처님
보다 어른입니다. 어중간히 아는 사람은 여래가 조사보다 더 높지
않느냐? 하는데 여기서는 그 차원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여래 밑의
조사가 아니라, 그 진기 조사를 의미합니다. 여래선이 진공의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면, 조사선은 묘유의 자리를 관하는 것입니다.
견성은 의리선, 여래서, 조사선 이 세 가지가 기본 견성입니다.
이 세 가지가 통과되면 의두 요목 20개가 싹 한꺼번에 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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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리선 義理禪 |
진공 - |
2. 여래선 如來禪 |
묘유 - |
3. 조사선 祖師禪 |
그 다음에 양성(養性)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품을 보았으니까.
그 성품을 어떻게 잘 기를 것인가 하는 공부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가 솔성(率性) 이라고 합니다. 그 성품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나투어 쓸 것이냐? 양성과 솔성은 테스트와 같습니다.
견성한 것을 실지로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지켜내고 쓸 것이냐? 의 문제입니다.
Test< |
4. 양성 養性 |
5. 솔성 率性 |
견성 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견성이 공부의 출발입니다.
제가 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견성하려면 10의 에너지가 들어간다면,
성불은 900의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역량이 뛰어난 사람들은 동시에 조사선까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조 대산 같은 양반이 그렇습니다. 대종사님과
정산 종사님도 바로 끝나버리셨습니다. 우리 대산 종사님도
30대 초에 다 끝났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의 90% 이상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 초반에 다
끝냅니다. 20대와 30대 초반에 과외 하다면서 교당 빠지든지 알아서
하세요. 유학 간다고 하는데.. 알아서 하세요. 견성도 못하고
유학 가고 결혼하고 하는데..
정기 일기를 보시면 네 가지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
< 당일의 작업 시간 수와 수입 지출과
심신 작용 처리건과 감각 감상을 기재 >
시키는 것입니다.
먼저 작업 시간 수는 자신이 하루 일과 속에서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허송 시간을 얼마나 보내고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기록하여 허송 시간을 줄이자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허송 시간을 줄이자는 것은 그일 그일에 삼학을 병진하자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수입 지출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것만 아니라 정신과 육신도 포함합니다.
심신 작용 처리는 좀 전의 의두요목에 시비이해의 일에 대해서 쓰는
것을 심신 작용 처리 건을 기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신 작용이
많고, 어떤 사람은 대소유무의 이치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심신 작용이 많습니다.
저의 일기에는 심신 작용이 별로 없습니다. 제 일기장을 뒤져보면 한
30%가 안 됩니다. 70%가 이치에 대한 것입니다. 요새 마음 공부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90%가 심신 작용입니다. 맨날 경계 속에서
경계라고만 합니다.
감각 감상은 이치에 대한 것입니다.
아까 대현 교우가 저녁에 밥을 먹을 때 물었습니다.
‘현대 홈쇼핑에서 교수님이 추천해 주어서 자리가 나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일에 대한 의두 거리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그것을 분석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급여는 얼마냐? 근무 여건은? 무슨 일을 하느냐? 의료 경영 자리가
얼마 남았느냐? 졸업장은 땄냐?’
대현 교우가 또 물었습니다. ‘저는 병원 경영에 대해서 계속 공부를
했는데 갑자기 홈쇼핑 물류센터로 들어가면 곤란하고, 교수가
추천해주었는데 중간에 나오기 곤란하잖아요.’ 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이 의두 연마입니다. 밝고 빠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요새 취업 전쟁인데 연봉이 한 3천 8백 준다니
괜찮네.. 물류.? 병원 경영이나 물류나 별 차이가 없다.’
- 앞으로 미래 사회는 젊은 사람의 직업은 평균 12번 바뀐답니다. -
‘그러면 일단 들어가서 업무도 배우고 해라. 작은 회사와 큰 회사는
차이가 있다. 작은 회사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사람들 수준이
낮고 복지가 약하고 근무 여건이 열악하다. 반면에 큰 회사는 복지가
좋고 사람들이 수준도 있고 교육 시스템도 좋다. 그리고 근무 여건도
좋다. 일단 들어가서 맞으면 계속하고 아니면 다시 나올 수 도 있지
않느냐? 교수님이 추천을 해주었으면 기본만 있으면 나중에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네가 나온다고 회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걱정하지 마라’
이것이 의두입니다. 어떤 것이 들어오면 탁 분석을 해야 합니다.
내가 들어갈 자리가 곧 나올 것 같으면 들어갈 필요가 없지만,
곧 나올 것 같지 않다면 일단 들어가는 게 좋다. 이것이 의두입니다.
대종사님은 생활 속에서 일과 이치를 병행 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 진공의 체자리를 하는 것, 묘유자리를
아는 것이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입니다. 그 다음이 양성과 솔성입니다.
이것이 견성 5단계입니다.
자.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치와 일,
그 다음이 화두입니다. 의두는 문제를 먼저 찾아내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의두는 경전 공부를 해서 내것화 하고
확실한 나의 지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서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일과 이치입니다.
대소유무 - |
이(理) |
시비이해 - |
사(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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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
사람들은 이득을 바라지만 결국은 손해를 봅니다. 시비이해의 이가
낙이고 해가 고통인데 전부 낙을 원합니다. 즉, 이득을 원합니다.
그런데 전부 고통 속에서 삶니다. 즉,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원인이 있습니다. 시비가 인이고 이해가 과입니다.
내가 옳으냐 그르냐에 따라서 옳은 것은 이가 되고 그른 것은 해가
된다는 인과의 이치가 들어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무엇이 시에요?
정산 종사님의 일곱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그 일곱 가지는
대소유무를 보면 압니다. 대소유무를 따라서 시가 될 수도 있고,
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서 무엇을 보던 간에 가늠이 탁탁 나와야 합니다.
원불교에 다니는 사람이 이것에 가늠이 잡혀야 경전 공부의 기본이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 생활 속에서 응용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내 지혜를 활용해 쓰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
과정 속에서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연구하는 것인지, 또는
내가 연구한 거이 맞는 것인지를 스승이 점검해 주기만 하면 되고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성리도 마찬가집니다. 많은 경계 속에서 자신의 표준이 서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기본적으로 나옵니다. 견성을 해도
습관과 업력과 욕심이 남아 있어 잘못하고 실수는 해도 절대 속지는
않습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동선과 하선을 나면 마지막 단계로 첫째 날은
여래선으로 묻습니다. 만법귀일을 여래선으로 대답하라고 합니다.
여래선은 말도 하지 말고 행동도 하지 말고 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때 당시에 별 사람이 천지였다고 합니다.
둘째 날은 조사선으로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럼 앉았다 일어선 사람, 인상 쓰는 사람.. 난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날은 그 여래선자리와 조사선자리를 말로 해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의리선입니다. 그 자리를 말로 증명을 하게 하고 문답을
하게 됩니다.
제가 오늘 강연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오늘 오신 모두가 자기 자신이
깨닫고자 하는 서원을 확실히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 공부를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렇게 하려면 수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양 없이는 깨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의두를 확실히 해서
그것을 계속 연마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의두를 스승한테 받습니다. 그 의두를 연마해서 감정을
받아서 견성 인가를 얻어야 합니다. 원불교는 그것을 배제한 것이
아닌데, 자기 혼자 의두 하나 들어서, 자기 혼자 연마 했다가,
자기 혼자 중간에 그만 두고, 자기 혼자 아는 척 합니다.
정기일기는 아까 말했듯이 네 가지로 합니다. 수양을 통해서 연구를
하고 그것을 강연으로 말 할 수 있고, 강연하기 전에 글로 써서 강연할
수도 있죠. 글로 쓴 것이 심신 작용이나 감각 감상이 됩니다. 즉, 심신
작용은 일에 대한 것, 그리고 감각 감상은 이치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과 이치에 걸림이 없는 도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치에
밝으면 지혜가 밝고, 일에 밝으면 복이 쏟아지는 것이 기본 원리입니다.
법정 스님이 쓴 글의 대부분이 감각 감상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것의
대부분이 제가 세상이나 자연을 보면서 연마 한 것은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 좌선 후에 대산 종사님 법문집을 읽는데,
전부 감각 감상과 심신 작용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우리 대종경이 전부 감각 감상과 심신 작용입니다. 돼지가 맛있는 것을
먹다가 겨를 주니까 안 먹는 것을 보고 대종사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죠?
‘사람이 편한데 살다가 어려운데 살기는 힘들구나..
낙 생활 하다가 고생활 하는 것은 어려워 하는 구나…’
그것이 대종사님의 감각 감상입니다.
제가 이거 하나 부탁하고 마칠까 합니다. 저도 잘 못하는 것인데,
일기를 잘 기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일기를 잘 기재하려면 감각 감상이나
심신 작용이 나와야 할 것이고, 감각 감상이나 심신 작용이 나오려면
화두를 들어야 할 것이고, 그 화두를 들려면 좌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좌선을 하려면 서원이나 기본적이 교리 연마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일기를 기재하는 것은 원불교 공부의 총체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법정 스님같이 기가 막힌 감각 감상이나 심신 작용을
책으로 내고 베스트 셀러가 되어 원불교 교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한갓 글로 치부하지 마세요. 중국에 한산
寒山이라는 분이 쓴 시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확실하게 얻은 분인데
그분의 시를 한 번 보세요. TV에 나오는 코미디언만 보지 말고
제발 책 좀 보세요. 글도 좀 쓰시고..
자. 질문 있으면 하세요.
n 질문과 답변 =========================================
Q_오선허 : 빌 게이츠 같이 컴퓨터에 해박한 사람과 깨친 사람 중에서
큰 결정이나 판단을 할 때는 깨친 자가 더 잘할 것 같은데요?
A_교무님 : 의두는 의심의 머리고, 성리는 성품의 이치다. 핵심을
알자는 것이다. 핵심은 분별의 세계를 넘어선 분별 이전의 세계를
알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별의 세계를 자유자재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분별 이전의 세계를 알겠어요? 빌 게이츠는 일에
대해서는 아주 밝습니다. 그런데 이치에 세계에 대해서는 약점이 있을
수 있겠죠.
우리가 의두 성리를 한다는 것은 일원의 진리라고도 말하는데, 분별
이전의 세계를 깨쳐서 분별 세계를 자유자재로 복과 혜가 나오도록
활용해 쓰자는 것입니다.
빌 게이츠는 잘 살고 이생에 복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당장 죽어서 해탈
천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치가 먼저고 복이 그 다음입니다. 예를
들어서 빌 게이트가 죽으면 영혼의 자유의 힘이 없어서 어디로 몸을
받을지 모릅니다. 몸을 받았다고 하면 처음에는 착심을 따라 가다가
그 다음에는 업을 따라 받습니다.
그래서 일과 이치를 같이 하지 않으면 서로가 힘을 받지 못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복 많이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즉, 잘 사는 것, 돈 많은
것, 일 잘하는 것..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치를 모르는 복은
가두어진 저수지의 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퍼내고 나면
끝납니다. 그런데 이치를 알면 퍼도 퍼도 한정 없이 나오는 물입니다.
그래서 이치를 알자. 깨치자고 하는 것입니다.
Q_
아프리카 난민들을 보다 보면 저렇게 태어나는 것 보다 왕관 쓰는
코끼리로 태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럴 때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시 낫다고 할 수 있는지요?
A_교무님 :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차라리 풍족한 미국의 부잣집 개로
태어나는 게 낫다는 거에요? 주인에게서 몇 십억 유산 받는 개도 있는데,
그것이 낫겠습니까?
사람은 흑백을 떠나서 각혼이 있습니다. 깨달을 수 있고, 참회도 할 수
있습니다. 양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축생으로 한 번 몸을 받으면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을 받아도 진강급이 있습니다.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고, 똘똘한 사람도 있고, 안 똘똘한 사람도 있고, 징그럽게 부자인
사람도 있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복과 혜를
짓고 닦은 만큼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과 축생을 칼로 베듯이 나눌 수 있겠어요? 중간에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전생에 소였던 사람은 이생에 아주 건강하기는 한데,
사람과 짐승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육도 윤회라고 합니다.
Q_박원허 : 크게 의두는 안 가지고 있어도, 작업취사의 문제에서 도대체
왜 이럴까? 하면서 의두를 연마 해본적이 있는데, 파고들면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정에 휩싸여서 원망심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치솟으니까 화기 때문에 머리도 어지러운 적도
있었는데 이럴 때는 끝까지 파고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일단 멈추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A_교무님 : 의두 성리는 자연 현상을 보면서 만물과 나와의 관계를 계속
까닭 있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몸이 정 안 좋으면 잠깐 놓을 수는
있지만 잠깐이고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의두 성리는 간단하지 않나요? 궁굴리면 되는데… 간단한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철저한 자력입니다. 그런데 진짜 좋은 것은 수양회
같이 혼자 선하는 것보다는 같이 선하는 것이 낫고, 혼자 헌배하는 것
보다 같이 헌배하는 것이 낫고, 공부도 혼자 하는 것 보다 같이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의두도 의단을 뭉쳐서 치고 들어가는 것도 있고, 또는 문답을 통해서
의견 교환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연 현상을 보고 의두 성리를
연마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이 하는 방법이 참 좋습니다.
결국 깊이 들어가는 것. 즉, 선의 진경에 들어가고, 의두를 치고
들어가는 것은 자력 몫입니다. 같이 하는 것은 환경일 뿐이고,
수행의 철저한 자력적인 측면입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950316_화공_47_제2장_1절 정기훈련법-의두 성리.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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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꼼꼼한 정리 감사합니다.
답글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