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2
한 식료품 가게 앞에 빨간 공중 전화가 보였다.
주머니에서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집어넣고 다이얼을 돌렸다.
영빈관 앞수사대 사무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조금 전 확인했으니, 남성우의 부상까지 생각한다면,
허열이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니다. 93-6875. 마지막 다이얼을 돌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신호가 가기 시작했고,
백수웅은 초조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이른 새벽인데도 노옥진은 소파에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며칠 사이 얼굴이 몰라보리만큼 초췌해 있었고,
수면 부족으로 눈이 푸석푸석해 있었다. 남편 허열은 이틀 동안 전화 한 통 없었고, 삼선교 아버지(노범호)만이
두 번 정도 안부 전화를 걸어 왔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며칠을 보내는 이유는 백수웅 때문이었다. 그가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만나자. 연락만 오면 다시 만나자. 지난번 만났을 때는 설득할 겨를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어.
너무나 격정에 떨었기 때문이었어. 안 돼. 테러도 안 되고 미라를 희생시켜서도 안 돼. 그의 성격을
잘 알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설득해 일본으로 돌려보내야 돼, 아버지도 남편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을 거야.'
언젠가는 전화가 오리라 생각했다. 전화가 올 때까지 절대 전화기 옆을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5월 7일 새벽 6시가 훨씬 지난 시간, 마침내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노옥진은 깜짝 놀라
전화기를 바라보면서 선뜻 수화기를 집어 들지 못했다.
전화 벨은 자지러질 듯 울어 대고 있었다. 노옥진은 기어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른 아침 이 시간의 전화라면 남편밖에 없다.
"접니다."
힘없는 목소리가 전류를 타고 흘러와, 백수웅은 가슴이 다시 폭발할 듯 격정이 치밀어 올라왔다.
"여보세요?"
잠시 조용해진 수화기를 향해 노옥진은 재차 물었다.
"누구세요? 우이동 미라 집인데요."
"나야!"
'흑-.' 노옥진은 심장이 일순에 얼어붙는 듯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백수웅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허 검사가 집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백 백수웅 씨 저예요."
수화기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이 후들후들 떨렷다.
" "
"다친 곳은 없나요? 만나요. 다시 만나요. 할 얘기가 있어요."
"지난번 부탁한 것은 어찌 되었지?"
"일단 만나요. 만나서 얘기하자구요. 여기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다시 만나자구? 좋아. 오늘이라면 나도 시간이 좋은 편이니까."
"시울은 안 돼요. 광릉, 아시죠? 옛날 함께 거닐던 광릉, 입구에서 11시 정각에 만나요. 서울은 위험해요."
"좋아. 광릉 입구에서 11시에 기다리겠어."
지금 시간이 6시 45분, 약 네 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렇다고 그 시간을 활용할 일도 없다.
숙소로 지금 돌아간다면 가겟집 주인 여자의 호들갑에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이다.
백수웅은 몸을 돌려 오토바이에 올라 굉음을 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노옥진은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앞이 캄캄해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이성을 차려 할 말을 모두 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설득 방법 모색보다도 화장부터 고치기 시작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아니 지금도 마음 구석에 꺽혀 지워지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여성적 본능이 먼저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라 아빠 백수웅!'
화장을 끝낸 후 거울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가서,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하지? 미라가 당신의 아이라고? 아니면, 모든 걸 잊고 돌아가라고?
아냐, 이 권총으로 쏘아버릴 거야. 나나 미라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하게.'
그러나 그런 다짐은 한낱 물거품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화장대 서랍에 감추어 두었던 남편의 호신용 권총을 꺼내고 있었다.
"바람 좀 씌고 올게."
그 한 마디를 남겨 둔 채 노옥진은 집을 빠져나왔고, 집 관리인은 이 사실을 즉각 허열에게 보고했다.
남성우의 치명적인 부상과 은퇴 결심, 도무지 안개처럼 잡혀지지 않는 백수웅,
그리고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자신의 장래 문제등으로 허열은 수사 본부에서 침통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보고가 올라왔다. 집 관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뭐라구? 아내가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고? 미라는?"
"혼자 나가셨습니다."
"간 시간은?"
"9시경입니다. 작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나가셨습니다. 미라아가씨는 가정부가 보살피고 있고요."
"알았어!"
허열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두 번째 외출이다. 외출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내의 이번 외출도 지난번처럼 그로서는 의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라도 데려가지 않고 혼자서? 혹, 삼선교로?'
그러나 직접 차를 몰고 외출한 아내는 20분이 지나도 삼선교 장인 어른의 집에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허열은 손으로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보여준 그녀의 넋 잃은 듯한 태도,
이유 없는 외출, 호신용 권총을 들고 나타났던 그린파크에서의 밤, 이 일련의 사태들을 종합해 볼때,
아내 노옥진과 테러리스트 백수웅의 관계를 연계하여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최 형사!"
마지막 심복이 된 최일우를 불렀다.
"네, 검사님."
최일우를 불러 놓고 지갑을 꺼내 당좌 수표를 꺼냈다. 그리고 일금 1백만 원을 기입한 뒤 넘겨 주었다.
"이걸 남 형사 부인에게 갖다 줘 ! 내가 전하는 돈이니 쓰라고해."
"알겠습니다."
남성우의 부인은 아직 남편의 부상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최일우를 시켜 돈을 보낸 허열은, 이번에는 남성우가 입원해 있는 경찰 병원으로 다시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오히려 남성우가 놀라워했다.
"전, 괜찮습니다. 수사 본부를 비우고 다시 오시다니"
허열이 침대 옆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이제 막 주사를 놓고 돌아서려는 간호원에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남성우!"
"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나의 명예와 위치를 지켜 준 네게 감사하고 있고,
또 은퇴하더라도 너의 가족을 책임져 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부족해서"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허열의 말투는 경직되었고, 얼굴은 보기 드물게 굳어 있었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던 허열이었다.
허열의 경직된 태도는 남성우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제가 혹 실수라도?"
"그런 게 아냐.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주기를 기대한다. 백수웅 녀석 제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일이니까."
" "
"8년 전, 그러니까 백수웅이 대학 다닐 때 그 녀석 수사를 남형사가 맡아서 했다고 그랬지?"
"네 그랬습니다만"
"그렇다면, 내 아내와 백수웅의 관계도 알고 있었겠군."
"네?"
남성우가 깜짝 놀라 휘둥그래진 눈으로 허열을 바라보았다. 알고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백수웅과 노옥진이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 사이라는 사실만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에 부치라는 특명이 내려져 있었다.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허 검사의 장인 노범호였다.
"말해 다오. 녀석의 수사 기록이 전부 없어졌어. 녀석의 과거를 알 만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남성우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경찰계나 정보계로부터는
'완전히 은퇴한 상태다. 더구나 자신을 평생 성 불구자로 만든 녀석이 바로 백수웅이다.
그들의 과거를 밝혀 두는 것이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고백할 것이다.
"말해 다오. 내 성격을 잘 알지 않나.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 주겠다."
남성우는 시선을 병실 창문으로 옮겼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다.
그는 마침내 기억을 더듬어, 백수웅이 처음 금호동 집에서 체포 되었을 때 둘이 함께 있었다는 것,
백수웅이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노옥진이 자살 소동을 벌여, 노범호가 백수웅을 빼돌려
주었을 때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엄청난 부하의 고백을 듣는 허열은 흥분을 견디지 못해 움켜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 대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보냈던 거야. 백수웅은 일본에 내버리고,그렇다면 아내와 백수웅은?'
남성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아 두셔야 할 겁니다."
"뭐야,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흥분한 허열이 죄 없는 남성우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백수웅을 취조할 때 노 회장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은게 있었습니다. 따님의 순결을 걱정했던 거죠,
녀석은 어떤 고문이나 협박에도 당당하고 솔직했습니다. 제가 '관계'를 추궁했을 때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네가 알아야 할이유도 없고 또 대답해야 할 의무도 없지만,
노옥진을 위해 분명히 밝혀 둔다. 우리는 깨끗하다. 이건 하늘에 맹세해도 좋다.' 라고요."
"그것이 사실이란 걸 내게 다짐할 수 있겠나?"
비로소 밝혀지는 아내와 백수웅의 과거. 그들이 순결을 지켰다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허열은 남성우의 고백을 거듭다짐하며 진실을 요구했다.
"두 사람이 순결을 지켰다는 것이 사실이란 말이지?"
'사실입니다! 그 녀석 성격에 절대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고, 더구나 사모님은 그 당시 겨우 대학 1학년이었습니다."
"그건 문제가 안 돼. 그 해에 나와 결혼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허열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기증을 느끼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차갑던 아내의 그 동안의 태도,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살아 온 지난 8년,
만일 미라마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미이라처럼 더없이 건조하게 살아 왔을 것이다.
이제 그런 아내의 태도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아내 노옥진은 지금까지 몸만 붙어 살아 왔을 뿐, 가슴은 백수웅에게 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동안 허상과 함께 살아 온 것일까?'
그런 배신감 속에서도 유일한 핏줄인 미라만은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 스쳐 갔다.
허열은 갑자기 남성우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고맙다. 이 사실을 절대 비밀에 부쳐 주기 바란다."
"허 검사님, 그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이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바로 노 회장님이었으니까요. 백수웅 체포조에 저를 합류시킬 때 가장 큰 지시가 그것이었습니다."
만일 허열의 부하 사랑이 진실하지 못했다면, 남성우는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동안의 태도로 보아 허열은 틀림없이 자신을 노범호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남성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허 검사가 1백만 원을 보내 주어 받았다는 것이었다. 허열의 강점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의리와 진실, 그리고 자기 몸처럼 부하들을 돌보아 주는 사랑.
"고마워할 거 없어. 당당하게 받으라구. 퇴직 후 일할 직장도 알선해 줄 거니까."
허열은 남성우를 병실에 남겨 두고 수사 본부로 되돌아왔다.
집으로 연락해 보았지만, 아내 노옥진은 아직도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스토리아 호텔로 연락해 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기사키 하쓰요도 행방이 묘연했다.
허열은 문득 얼마 전 워커힐 정문 앞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던 아내와 노범호를 생각했다.
그 때 백수웅이 장인 어른이나 아내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도주해 버린 사실을 생각하고 이유를 따져 보았다.
'그렇다. 백수웅은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고 있고 또 만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아내를 이용하여 회담 장소와 날짜를 알아 내려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얼굴이 또다시 경직되어 갔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잇었다,
집을 나선 노옥진은 시내를 가로질러 청량리를 지나고 회기동을 지나 광릉을 향해 무섭게 돌진해 갔다.
그녀의 포니 승용차가 광릉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20분. 백수웅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는
40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핑크빛 날아갈 듯한 원피스, 치렁치렁한 머릿결, 은빛 포니가 하모니를 이뤄 노옥진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
지나가던 젊은아이들이 차창 안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어 댔다.
그녀는 자신의 핸드백을 다시 한 번 만져 보았다. 권총이 들어있었다. 탄환이 장전되어 있고, 안전 장치도
풀려 있었다. 만일 백수웅 설득에 실패한다면 그를 쏘아 버리든가 자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백수웅은 미라가 자기의 딸인 줄을 모르고 있다. 만일 백수웅이 미라의 생명을 끊어 버린다면,
그것은 하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노옥진이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벌컥 차문이 열렸다.
노옥진은 소스라쳐 놀라 바라보았다. 검은색 오토바이에 올라앉은 백수웅이엇다.
"나와 주어 고마워!"
노옥진은 한 손으로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차에서 나와 백수웅 앞에 섰다.
"가자. 길가에 서서 얘기할 수는 없으니까. 장소를 옮기자구."
"또 여관으로요? 안 돼요."
"그럼 산 속으로라도 들어가야지."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광릉 주차장에 파킹시켜 놓고, 이들은 숲을 헤집으며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백수웅이 노옥진의 팔뚝을 움켜잡고 난폭하게 끌고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 발길이 뜸한 숲 속,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숲 속의 한 공터에서 멈추어 섰다.
광릉 주차장이 저 아래 내려다보였다.
"어떻게 됐지, 회담 장소와 날짜가?"
"도대체 저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아야 돼. 1964년 12월, 당신 아버지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갈때, 나는 이빨을 악물며 맹세했지.
조국에 돌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하지만 난 참았어. 그만한 대가는 받아야지.
옥진이의 아버지 노범호는 알고 있어. 남편 허열은 물론이고. 이번이 마지막이야. 일 주일 내에 알아 놔!
그렇지 않으면 너와 허열, 노범호 눈에서 눈물 대신 피가 흐를 거다. 미라를 생매장한 장소가 알려질 테니까."
노옥진의 등가죽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놀라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미 미라를 생매장?"
"그래, 생매장. 내가 피눈물로 절규하며 하늘을 향해 목숨을 건져 달라고 빌고 있을 때,
너희들은 최고급 침대에서 헐떡이며 미라를 만들었어."
'철썩', 노옥진의 손이 백수웅의 빰을 갈겼다.
"추잡한 사람 어쩌다 백수웅이 이렇게 되었지?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고 떠들던 천하의 백수웅이가 겨우 어린 아이 생명을 볼모로 잡으려 하다니"
노옥진은 치를 떨며 백수웅을 바라보았다. 백수웅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의 딸을 생매장시키겠다니
백수웅의 눈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다.
"모든 책임이 너의 아버지에게 있다는 걸 왜 몰라? 그렇기 때문에 알아 오라는 거야. 더 이상의 타협은 필요 없어."
노옥진의 손이 또 한 번 올라가는가 싶더니 힘없이 떨어졌다. 그녀는 머리를 숙였고,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
당신 딸이에요! 미라는 당신 딸이에요!' 그녀는 가슴 속으로 그 말을 수도없이 내뱉고 있었다.
"테러를 해서 어쩌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공할 것 같아요? 돌아가세요. 제발 일본으로 조용히 돌아가세요.
그 약속만 해준다면, 정말 미라의 목숨을 걸고 책임지겠다는 걸 약속할게요. 무사히 돌아가도록"
"안 돼. 우리 나라는 더 이상 쪼개져 살 수는 없어. 그리고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들의 야심 때문에 형제들이, 부모들이 모두 갈라서서 살고 있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나는 틀림없이 조국을 통일시킬 거야."
"미쳤군요, 수웅 씨 혼자 통일시키겠다니. 그러지 말고 돌아가세요. 제발 제발"
몇 번이나 핸드백을 움켜잡았지만, 끝내 총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녀는 백수웅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수웅 씨 , 으흐흐 수웅 씨 차라리 제가 죽을 게요. 그럼 되나요? 제가 죽으면"
백수웅은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당장에라도 노옥진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래, 옥진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면 내가 돌아가지. 하지만 일본은 갈 수 없어.
이젠 날 받아 줄 사람이 없거든. 너 대신 내가 죽어 버릴 거야.'
백수웅은 두 팔을 들어 그녀를 천천히 밀어 냈다.
'우리들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조국이 더 중요해. 일 주일 후 다시 전화한다. 5월 14일 일요일.
그 때까지는 반드시 알아놔. 미라 다음엔 또 누군가가 희생될 거야. 정보가 입수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하나씩 하나씩 그럼 난 간다."
백수웅은 마침내 발길을 돌렸다. 발걸음이 무거워 떨어지지가 않았다 흐느끼는 노옥진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뚜벅뚜벅 걷는 그의 두 눈에서 커다란 눈물 방울들이 떨어졌다.
주차장까지 되돌아온 그는, 방금 노옥진이 타고 온 포니 앞으로 다가갔다.
"옥진이, 나를 용서해 줘.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진심이 아니었어. 하지만 난 알아야 돼.
알아 내서 반드시 두 사람을 폭파시켜야 돼. 너는 내 진심을 모른다. 너라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아.
네가 허열의 아내라는 건 내겐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부탁이다. 제발 알아 내서 연락해 다오."
마치 자동차가 살아 있는 사람이나 되는 양 어루만지던 그는 발걸음을 돌려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백수웅을 태운 오토바이가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갔고, 마침내 노옥진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힘없이 앉아 있던 그녀는 핸드백의 권총을 몇 번이나 만졌지만, 이번에도 꺼내지 못했다.
백수웅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했고, 자신의 머리를 쏘아 버리지도 못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 있던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와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이르른 그녀는, 현관에 모여 있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오후 2시. 남편이 집에 돌아올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승용차와 또 다른 몇 대의 지프, 포니 등이 보였던 것이다.
'남편이 벌써 집에? 혹 내가 백수웅 씨와 만나는 것을 눈치라도 챈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는 불안했다.
만일 백수웅과의 밀회가 들통나 버린다면? 노옥진은 겁먹은 얼굴로 들어섰다.
남편의 서재에서 몇몇 남자들의 목소리가 어수선하게 들려 왔다. 아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허열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당신, 외출했었어?"
"네 그런데 이 시간에"
"음, 잠깐 할 말이 있어."
노옥진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마침내 꼬리가 잡힌 것이 분명하다. 너무나 조심성 없이 행동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의 얼굴은 비교적 온화해 보였다.
"당신한테 미안한 말 좀 해야겠어. 장충동 수사 본부에 무전시설과 내부 단장을 하게 되어,
오늘 하루만 집에서 수사 회의를 열기로 했거든."
"아 그래요? 그거 잘 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안정이 안 되던 참이었는데"
"하지만 당신은 신경쓸 거 없어. 자질구레한 일은 가정부가 해줄거니까, 당신 건강이나 보살피라구."
"미라는요?"
"응, 미라는 삼선동 외할아버지한테 갔어. 내일 오겠대. 아버님도 미라가 보고 싶다며 보내라고 하셨거든."
노옥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편의 귀가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층계를 밟던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 버렸다.
'여기서 수사 회의를? 그렇다면 백수웅 씨가 알고자 하는 회담장이나 날짜에 관한 정보가 이 회의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임시 수사 본부가 집으로 옮겨졌다. 만일 미라가 정말 급박한 상황을 맞는다면 백수웅에게 회담장과
날짜를 알려 주고라도 딸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녀는 부지런히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가정부를 제쳐 두고 자신이 직접 커피도 끓이고 과일도 깎았다. 임시 수사 본부가 되어버린
남편의 서재는 그렇게 시끄럽다가도, 그녀가 들어가면 모두 잡담으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된 회의는 밤 10시가 되도록 끝날 줄 모르고 있었다.
만일 한 통의 전화만 오지 않았다면, 이들의 수사 회의는 밤샘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전화를 걸어 온 장본인은 이후락 부장의 비서라는 사람이었다.
허열이 부하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이 부장님이 급히 자택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리셨어. 집 잘지키고, 혹 무슨 일 생기면 그 쪽으로 연락해.
늦어도 한 시간내로는 돌아오게 될 테니까."
허열은 아내 노옥진에게 그 말을 남기고 부하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 나갔다.
남편을 문 밖까지 배웅한 노옥진은, 요란한 엔진 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을 보살피는 비서진들의 사랑채는 건너편에 있고, 가정부는 거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찍 주무세요. 아기 아빠 돌아오실 때까지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가정부를 방에 들여보낸 후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가며 남편의 서재로 갔다.
서재는 잠겨 있었다. 꼼꼼한 그의 성격다운 조치였다. 그러나 집 안의 열쇠는 모두 하나씩 여분이 있었고,
그 여분의 열쇠는 노옥진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집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열쇠를 들고 서재를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해 댔다.
열쇠를 꽃고 옆으로 비틀자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뛰어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서재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재떨이에는 꽁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원형의 테이블 위에는
메모지와 서류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검은색 표지의 수첩도 네 개나 있었다.
노옥진은 문 밖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메모지와 서류와 수첩들을 뒤져 가기 시작했다.
오금이 저리고 손이 떨려 제대로 뒤져보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아니, 이건!"
남편이 앉아 있던 쪽에서 커다란 종이가 한 장 나왔는데, 그 종이에는 워커힐 에메랄드 별장이
지도처럼 그려져 있고, 그 별장을 중심으로 병력 배치 상태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종이 하단에 '
5 월 29일 오후 4시부터.' 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글을 들여다보는 노옥진의 손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다. 백수웅이 애타게 찾고 있는 회담장과 날짜가 바로 이것이다.
박성철과 이후락이 회담하는 장소는 워커힐 에메랄드이며, 날짜는 5월 29일부터이다.
그녀는 메모지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왔다.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지만,
놀란 가슴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남편의 비밀 서류를 뒤져 보았다는 자책감도,
백수웅에게 이 엄청난 비밀을 알려 주게 되었다는 기쁨도 없었다.
조국이 어떻게 된다는 것도, 남편이나 아버지가 어찌 된다는 것도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것은 오직 미라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낳아 준 아빠가 노리고 있는
생명을 건져 내게 되었다는 안도감, 그것 하나뿐이었다.
"아 아."
그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비탄의 한숨을 길게 길게 내 쉬었다.
남편 허열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도 1시간이 훨씬 지난 11시30분이었다.
그는 단 두 명의 부하만 인솔한 채 돌아왔다.
"별다른 일은 없었지?"
"네."
"좀 늦을지 모르니까 먼저 자도록 해요. 귀찮겠지만 음료수나 갖다 주고."
남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허열은 부하들과 함께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옥진은 잔뜩 긴장한 채 쟁반에 음료수를 얹어 가지고 서재로 들어갔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나이 많은 부하들이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인사했고, 허열은 웃으며 쟁반을 받아 들었다.
"자, 먼저 가서 자요. 난 뒷일이 있으니까."
노옥진은 침실로 갔다.
침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허열은 서둘러 부하들을 돌려 보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장충동 본부로 출근하라."
부하들은 전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왜 이 날 하루 갑자기 본부를 바꿨는지,
왜 이후락 부장이 찾는다고 거짓말하고 외출하여 쓸데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다가 되돌아왔는지를.
그러나 부하들은 단 한 마디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허 검사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때문이다.
부하들이 돌아간 뒤 허열은 손에 묻어 있는, 스카치 테이프 조각을 만져 보고 또 만져 보았다.
서재 문짝과 벽 사이에 붙여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테이프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누군가가 이 방에 침입했다는 뜻이며, 침입이 가능한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회담장은 이미 영빈관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아내는 회담장을 워커힐 에메랄드로 알 것이며,
이 가짜 기밀은 즉각 백수웅에게 전해질 것이다.
영빈관에서 이후락 부장과 박성철 부수상이 회담을 시작하는 시간인 1972년 5월 29일 오후 4시,
백수웅은 워커힐 에메랄드로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그 곳에 미리 위장 병력을 배치해 놓았다가
백수웅이 침투한 뒤에 에워싸 극적으로 체포하거나 사살해 버릴 것이다.
위장 정보가 백수웅의 손으로 넘어가리란 것을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 날 낮 아내의 외출 목적은
틀림없이 백수웅과의밀회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내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불 같은 증오와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 배신 행위에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아니, 더 많은 시간을 참아야 할 것이다.
아직은 그녀의 아버지 노범호의 그늘이 더 필요하기때문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 아내와 백수웅,
그리고 자신에게 딸을 준 노범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린 미라와 자신의 장래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첫댓글 물안개님께 감사하는 마음 전합니다~~~북경시간으로 11시만 넘으면 소설방으로 튑니다~~ㅎㅎ
만일 백수웅이 작전이 성공 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게 됐을까?
내가 만일 노옥진 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