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깊은 신의 분노가 눈을 떴다.
타락한 카펜 스스로 만든 허무의 업화가 번져
그 모습만으로 존재를 지우리라
-『공용어로 읽는 선인류 문헌』
보아르니 갤럽슨의 논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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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늙은 귀족들이 무릎을 굽혔다. 그들의 예복과 바닥의 붉은 융단은 어울리지 못했다.
“프리스터 점령을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일행의 가운데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던 총리대신이 융단의 끝, 황좌를 향해 말했다. 황좌에 앉은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늘어선 노인들을 내려다 보았다.
“고맙소.”
“폐하께선 대제국의 위대함을 은하에 증명하셨습니다. 미천한 저희들은 위업에 깊은 감명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로써 제국은….”
“그래서.”
에릭터 3세가 말을 끊었다.
“무엇을 바라시오?”
총리대신은 고개를 들고 황제를 보았다. 날카로운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의 지배자로서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폐하의 영광을 위해서 저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대들의 공로는 기억하고 있소.”
“황송하옵니다. 늙은이들은 불확실한 일을 견디지 못하지요. 폐하의 안전(眼前)에서 추태를 부린 것은 아닌지 심려되옵니다.”
무릎을 꿇은 귀족들은 힐끔 거리며 눈짓을 주고 받았다. 에릭터 3세가 총리대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약조는 지키겠소.”
“성은이 망극….”
“브케일.”
황좌의 뒤편에 서 있던 회색 머리카락의 참모장이 앞으로 나섰다. 슬쩍 고개를 든 귀족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총리대신의 얼굴에도 경멸의 빛이 서렸다.
“이 공신들께 배분된 영지를 알려 드려라.”
“알겠습니다.”
브케일은 문서를 풀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변방 행성들의 이름이 브케일의 차가운 목소리를 타고 대전에 퍼졌다. 귀족들의 얼굴이 굳었다. 총리대신은 눈살을 찡그리며 젊은 황제를 보았다.
“폐하의 넓디 넓은 은혜는 알겠사오나, 이건.”
“아직 주요 행성들을 덜 파악해서 그렇소. 시일이 필요한 문제잖소? 연륜이 풍부하신 여러분들은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럼 물러가시오. 후일 보도록 하지.”
에릭터 3세는 입을 닫았다. 잠시동안 그를 응시하던 총리대신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켰다. 다른 귀족들도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황제와 브케일은 인사를 올리고 물러가는 귀족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들이 나가고 궁인이 대전의 문을 닫았다.
“퇴물들.”
황제가 혐오의 말을 토하자 브케일이 웃었다.
“속이 쓰리겠지요. 배반의 대가로 얻은 것이 고작 불모지 뿐이라면.”
에릭터 3세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늙은 기생충들의 몫은 그걸로 족해.”
“…….”
“놈들에게선 에릭터 2세의 비린내가 난다. 미친 황제가 날뛸 때, 저놈들은 꼬리를 흔들며 함께 짖어댔을 뿐이야. 그런 것들을 대신이라고 불러 줘야겠나?”
“선제를 제거할 때 저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사실이야.”
뒤틀린 황제의 입가에 냉소가 피었다.
“그건 나 역시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저들의 처세술입니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각자의 방법으로 몸부림치니까요.”
“그래서 알려주려고 하는 거야. 놈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걸.”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브케일은 당연한 것과 당연하게 보여야 하는 것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스트러겐터는 폐하의 것입니다. 늙은이들의 생명 역시 그렇지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 기다리십시오. 시대의 유물들도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으니까요.”
에릭터 3세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냈다. 제국은 황제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훨씬 중요한 것을 논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
“폐하께선 프리스터와 머셜리아를 얻음으로써 북부 은하를 통일하셨습니다. 이제 선택은 폐하의 몫입니다.”
브케일이 잠시 말을 멈추고 에릭터 3세를 보았다. 브케일의 차가운 눈동자 위에, 타오르는 황제의 눈이 겹쳐졌다.
“제국은 선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 졌습니다. 폐하께서는 에릭터 태황(太皇)마저 넘어 선 것입니다. 이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에릭터 3세가 황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브케일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은하를 통일한다. 그게 나의 유일한 목표다!”
황제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더 많은 피를 의미하는 목소리였다.
데본스테아는 스트러겐터 제국과 인접한 항성계다.
또한 행성 데모네를 수도로 삼은 왕국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백년 전쟁」당시, 데본스테아는 다른 영주국들과 함께 대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원군은 너무 늦게, 토벌군은 지나치게 빨리 등장했다. 그들은 독립 연합의 원조를 받지 못한채 토벌당했다. 당시 스트러겐터 황제였던 막트 17세는 가신(家臣) 그룬가터에게 데본스테아를 하사했다. 그로써 그룬가터 왕조가 열렸다. 「이백년 전쟁」이 끝나고 대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데본스테아는 스트러겐터의 속국으로 남았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룬가터 5세는 손수건으로 콧수염에 밴 땀을 훔쳤다. 신경질환자마냥 안정을 찾지 못하는 왕의 모습을 세자스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일국의 왕과 일개 사자(使者)란 연극은 대전(大殿)의 무대에서 끝났다. 그룬가터 5세의 집무실에서는 역학관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스트러겐터 제국의 사자로서 세자스는 데본스테아 왕의 접대를 받았다. 그룬가터 5세는 아들 뻘의 청년 앞에서 허둥대야 했다.
세자스는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의는 없으실거라 생각합니다. 스트러겐터와 데본스테아는 형제와도 같은 나라니까요.”
“제, 제국과의 오랜 친분에 영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지원을 기대해도 좋겠군요.”
“예, 예.”
그룬가터 5세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본스테아의 왕은 식은 땀을 많이 흘렸다.
“…전함 4천척과 함께 하루엔파즈 이아니즈, 하루엔파즈 브라이메를 원정군에 편입시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데본스테아는 영광을 함께하게 될 겁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공손히 인사한 세자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룬가터 5세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둘러 몸을 숙였다. 세자스의 뒤를 수행원들이 따랐다. 집무실의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룬가터 5세는 입을 다문채, 문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데본스테아 왕궁엔 개성이 없었다. 단조로운 융단이 복도 길게 놓여 있었다. 벽화도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천장 가까이 채광창이 있었지만 날이 흐려서 왕궁 안은 어두웠다. 군데군데 밝혀놓은 촛불이 빛을 떨어뜨렸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듣던대로 무능한 놈이군.”
“여기 왕들 중에서 변변한 자가 있었나.”
수행원들이 수근거리며 그룬가터 5세의 집무실 쪽으로 비웃음을 던졌다. 세자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데본스테아입니다. 목소리를 낮추시는 게 좋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나 세자스도 수행원들의 평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괜찮다. 외교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제국의 군사력에서 데본스테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그들의 원조를 확실히 함으로써, 그리고 머셜리아의 경제력을 손에 넣음으로써 스트러겐터는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북부 은하의 하루엔파즈들을 모두 얻은 것이다.
황제의 야망을 실현할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당신이 믿는 길을 가겠습니다, 브케일 님.’
세자스는 망설임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영토의 방대함이나 지배 행성의 수는 스트러겐터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데본스테아는 풍부한 마력석 자원과 전함 생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라 자체가 병기창과 같아서, 스트러겐터 황실은 지배 행성의 반란같은 국내의 무력 충돌 때 데본스테아로부터 전함을 징벌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스트러겐터가 국외 원정을 단행한 것은 이백년 전쟁 이후 처음이었고 그룬가터 5세가 지원을 맡은 병력 역시 전례를 초월했다. 두 척의 하루엔파즈까지 따랐으므로 질과 양 모두 막대했다. 하지만 그 규모에 비해 준비는 경탄스러울만치 빨랐다. 스트러겐터의 압력은 둘째치고, 데본스테아의 전함 비축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세자스와 그룬가터 5세의 접견이 이루어진 직후, 하루엔파즈 브라이메와 하루엔파즈 이아니즈는 전함 4천척과 함께 프리스터로 출항했다. 스트러겐터 군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귀족들의 주거지는 수도성 코어스트의 중심부를 차지한 황궁에서 서너 구역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평온함을 방해하는 여름의 햇살이 코어스트를 내리쬐었지만 평민가처럼 열기가 끓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귀족의 저택은 잘 정비된 통풍 시설과 차양 장치로 쾌적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홍갈색 머리카락의 젊은이는 저택 설계자의 고심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뙤약볕이 바로 드는 정원에 자리 잡은 채, 울타리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청년의 얼굴엔 땀방울이 맺혔다. 고지대에 위치한 저택은 청년이 앉은 곳에선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악취미시군요. 이런 더위에.”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청년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 사람좋아 보이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청년에게 말을 건 처녀는 차가운 음료를 내려놓고 나서야 어깨까지 출렁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수 있었다. 음료를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며, 젊은 황족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시에라 양이 만들어 준 흑차는 최고야.”
청년의 말엔 가식이 없었다. 흑차 끓이기의 달인으로부터 받은 칭찬에 시에라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뒤로 묶은 청년의 머리가 약간 흩날렸고 청년은 눈을 감은채 숨을 들이 마셨다. 바람은 여름의 열기를 머금었지만 땀이 증발하는 시원함도 함께 주었다. 시에라는 청년이 굳이 그늘에서 나와 도심을 감상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잠깐. 그녀의 군복은 마음 편히 시원함을 즐기기엔 적당치 않았다.
“미안해. 전장에서 막 돌아왔는데 여러 가지를 조사시켜서.”
“아뇨. 괜찮습니다, 카에아 님.”
시에라는 진심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저택으로 돌아와 메이드 복을 입기 보다는 부관으로 남고 싶었다. 그것이 카에아에게 좀더 도움이 되는 일이었고,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황제들과 같은 성(姓)을 지녔지만 청년은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저택보다 변방 행성의 전장에서 월등히 많은 시간을 보내 왔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역시 수도성이 아닌 변방의 행성에서였다.
“폐하께서 원정을 결행하셨단 말이지….”
친족을 입에 담으면서도 카에아는 그런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다. 둘 사이의 교류가 극히 적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에아의 중얼거림에 시에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하루엔파즈 테레젠나트와 하루엔파즈 하르마달타가 프리스터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데본스테아 군과 합류한 뒤 진격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어쩐지 돌아왔을 때 크란트가 안 보인다 했어. 그나저나 넬까지 참전시키다니. 너무한 걸.”
카에아의 졸린듯한 목소리는 오후의 햇볕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에라는 전장에서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겉모습으로만 사령관을 판단했던 신병들이 몇차례의 전투를 겪은 뒤 심한 자기혐오에 빠지는 경우를 그녀는 자주 보아왔다. 청년에게 붙은 별명은 결코 농이 아니었다.
“변방을 평정하면 휴가라도 줄거라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힘들겠네.”
카에아의 얼굴에 비친 미안한 기색을 못 견디고 시에라는 고개를 돌렸다. 수도성으로 돌아가면 여행이나 함께 하자는 제안에 들떠 있던 마음을 황급히 추스렸다. 그녀는 여전히 부관으로 남아야 했다. 메이드 복을 벗고 주인의 아들을 따라 코어스트를 떠났을 때부터 결정된 일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시에라의 야무진 대답을 들으며 카에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피할 순 없어.”
미지근해진 흑차를 마저 비우고 뒷말을 입안에서 웅얼거렸다.
“명색이 하루엔파즈의 로드니까.”
하루엔파즈는 유사이래 가장 강력한 마력장을 가진 존재였다. 함체를 이루는 금속도 인간의 지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평상시는 경질이지만 마력장과 반응하기 시작하면 생물과 흡사한 움직임이나 재생력을 보이곤 했다. 마력장의 순간적인 폭발로 생성되는 배리어나 함체 자체의 방어력이 무적이라 단언하진 못한다. 이백년 전쟁 당시, 470척의 전함이 포위 공격을 펼친 결과 하루엔파즈 하르마달타의 함체에 손상을 줬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백척에 가까운 병력이 투입되었는데도 손상을 주는 수준에 그쳤다.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그 수십, 수백배 이상을 투자한다고 수확량이 비례적으로 높아질지 아무도 모를 현실에서, 모험을 감내할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엔파즈는 무적이 아니지만 무적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전쟁에서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인류는 하루엔파즈라는 「배」를 발견한 뒤, 수백년동안 수천명의 마학자를 동원하여 연구를 계속했지만 기초적인 구조마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다룰 수 있게 만드는 것만으로 무구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하루엔파즈는 아군에게는 경탄을, 적에게는 경악을 선사해주는 존재였다.
“선전 중이신가요?”
관능적인 목소리가 들리자 크란트는 고개를 돌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의 여인이 히죽 웃음을 띤채로 테레젠나트를 보고 있었다. 테레젠나트의 거대한 흑체는 프리스테아 우주항 한편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물론 관객은 프리스터 시민들이겠죠? 짓궂네요. 저항할 힘도 없는 사람들을 겁주다니. ”
“눈으로 봐야 현실을 아는 자들도 있지요.”
크란트는 단호하게 답했다. 여인의 붉은 입술이 묘한 곡선을 그렸다. 자극적인 향수 내음이 풍겨났다.
하루엔파즈는 로드의 의지에 따라 공간을 왜곡시킨다. 다른 물체에까지 영향을 주지 못하는 좁은 범위였지만 하루엔파즈의 실체를 숨기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분명 테레젠나트의 모습을 드러낸 건 프리스터 시민들에게 시위하여 있을지모를 폭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크란트 자신의 과시욕을 위해서도. 생각을 읽힌 것 같아 크란트는 언짢아졌다.
“코아리노아 침공을 준비하시나요?”
여인이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른하고 느린 말투 속에는 신경을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크란트는 내색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거기엔 하르마달타가 갈 겁니다.”
“그랬던가요. 아침부터 우주항에 계신 걸 보고 착각했네요.”
참 할 일도 없으신가 봐. 크란트의 귀엔 여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바람이 불자, 제국기(帝國旗)가 펄럭였다. 얼마 전까지 그 자리엔 프리스터 문장이 나부끼고 있었다. 사라진 나라의 흔적들은 남김없이 제거되었다. 황궁이 점령된 뒤에도 봉기가 이어졌지만 빠르고 철저하게 진압당했다. 처음부터 시민들은 고도로 살인 훈련을 받은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곧 사상 검증이 시작되겠군요. 부적합한 사람은 정신개조연구소로 보내진다던데….”
“사실입니다.”
크란트가 잘라말했다.
“스트러겐터에 대항한 것 자체가 죄악이니까요.”
“재미있는 말이예요.”
여인은 붉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빠져들듯한 여인의 눈동자 앞에서 크란트는 날카롭게 눈썹을 찡그렸다.
“헤즈라 경 역시 하루엔파즈의 로드가 아닙니까. 이런 곳에서 서성일 시간이 있는 겁니까?”
가시돋친 말에 헤즈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스트러겐터의 로드님들께서 너무 훌륭하셔서…제가 낄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크란트가 대꾸를 하려고 했을 때, 저편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형-!”
팔을 흔들며 달려오는 소년이 보였다. 흔들리는 소년의 금발엔 경쾌함이 물씬 스며 있었다. 꽤나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소년은 두 사람 앞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상기된 얼굴이 사과처럼 발갛게 익었다.
“이만 물러가죠. 방해되긴 싫으니까.”
헤즈라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몸을 옮겼다. 소년은 어색한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데본스테아에서 온…하루엔파즈 브라이메의 로드 맞죠?”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크란트는 헤즈라가 사라진 쪽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 기분나쁜 여자야.”
“예?”
“아무것도 아니다. 출진 준비는 끝났어?”
“아직이예요.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보미자크 경이 도와주셔서 다행이지만….”
명랑했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크란트는 소년의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로드라는 지위가 너에겐 아직 부담스러울지도 몰라. 하지만 힘내라, 넬. 우리들은 선택받았어. 그 점을 잊지마. 언제나 자부심을 가지고 싸워 나가는 거야.”
“격려 감사합니다!”
하르마달타의 로드 넬 오필리안은 소년다운 밝은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답했다.
통로를 걸어가던 헤즈라에게 장신의 남자가 다가왔다. 얼굴을 뒤덮은 철가면이 흔들리며 쇳소리를 냈다.
“섯부른 행동은 하지 마라.”
남자의 목소리는 가면 속 눈동자 만큼이나 싸늘했지만 헤즈라는 거리낌없이 그를 마주보았다.
“뭘 꾸물거리지? 얌전히 있는 건 딱 질색이야.”
“기회는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지금은 기다려야 한다.”
“포르테~엘.”
헤즈라가 콧소리를 내며 남자의 망토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철가면에 볼을 비비며 그녀는 차가움을 느꼈다. 포르텔의 귓가에서 헤즈라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맴돌았다.
“당신은 가끔 짜증나. 똑똑한 놈마냥 어려운 말을 지껄일 필요는 없잖아?”
“…….”
“하지만.”
헤즈라는 철가면에서 얼굴을 떼며 히죽 웃었다.
“그래서 더 귀여워.”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여인은 몸을 돌렸다. 끌리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그녀를 따랐다. 포르텔은 멀어져가는 헤즈라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엔더리아 우주항은 한산했다. 본래의 건설 목적이 수도성으로의 마력석 운반이었기 때문에 여객용 셔틀보다는 화물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아침이어서 마학자나 인부들 제외하곤 사람이 별로 없었다. 히아스 일행은 금방 주목받았다. 오래간만의 대인원인데다, 결코 조용하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우주항 전체를 가득히 점령했다.
“형! 정말 가?”
“어디?”
“바보야. 히아스 형은 세르비안에 간다구!”
“세르비안이 뭔데?”
“임금님이 사시는 곳이잖아. 할아버지 얘기 못들었어?”
“아- 부럽다. 궁전 보고 싶었는데.”
“형은 놀러가는 게 아니래.”
“거짓말~!”
“나도 데려가. 그럼 안돼?”
“선물 사와!”
폴짝이며 쉴새없이 나불거리는 아이들 덕분에 벌써 머리가 멍해져 버린 페날이었지만, 히아스는 웃는 얼굴로 일일이 대답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탄했다.
“존경스럽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죠.”
보일과 아레사가 나선 다음에야 아이들은 약간 수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활주로에 늘어선 배들을 보거나 자기들끼리 떠들거나 하며 우주항을 뛰어다녔다. 그래서 아레사의 배웅은 조금 늦어져야 했다.
“잘 다녀 오렴. 집 걱정은 말고.”
“그런데 아주머니. 부탁하신 편지는….”
“페날이 갖고 있어. 받을 사람도 알고 있고. 그렇죠?”
아레사의 말에 페날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 쪽 주머니를 두드렸다.
“잘 넣어 놨습니다. 히아스 녀석이 한눈팔지 않게 잘 감시할께요.”
“심부름은 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히아스의 투덜거림에 페날은 코웃음을 쳤다.
“수도성이 애 이름이냐? 시골뜨기가 헤매다 코 베이기 딱 좋지.”
“그만 겁주게. 죽으러 가는 줄 알겠구먼.”
보일이 페날의 말을 끊으며 히아스의 손을 잡았다. 노인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히아스는 알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적부터.
“가서 보고 오너라. 세르비안이 어떤 곳인지. 많은 것을 배우길 바란다.”
“네, 할아버지.”
고개를 끄덕인 히아스의 시선이 아이들 쪽에 머물렀다. 미네는 아이들과 함께 서 있었다.
“다녀 올게.”
“…….”
미네의 굳은 얼굴이 붉어졌다. 머뭇거리는 미네도 그녀를 보는 히아스도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 어렴풋이 알듯했다. 지금까지 둘은 멀리 떨어져 본적이 없었다. 히아스가 공장에 갔을 때도 자주 찾아오던 미네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굴을 보는 게 당연한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떨리는 걸까? 이 느낌은 틀려. 보일 할아버지와 아레사 아주머니와는 달라. 히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약속…잊으면 안돼.”
미네가 입을 열었다.
“약속?”
“그래.”
“무슨….”
“이 바보얏!”
미네의 외침에 히아스는 기겁했다.
“세르비안이 어떤 곳인지 말해 주기로 했었잖아. 그새 잊어버린거야?!”
“아, 저.”
“그러니까 멍해있지 말고 똑바로 보고 와. 멍청이 혼자 보내서 걱정이지만.”
“누가 멍청이야?”
“잠깐 기다려. 거울 보여줄께.”
히아스는 마음 속으로 웃었다. 그래, 이래야 돼. 내가 아는 미네는 침울함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라구. 잠시나마 쑥스러워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미네가 숨결을 가라앉혔다. 아이들은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고 보일은 헛기침을 했다. 아레사는 미소지었다.
“몸 건강해.”
“그래.”
소녀의 말에 히아스가 대답했다. 두 아이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목걸이 말인데.”
“이거?”
미네가 하고 있던 목걸이를 품에서 꺼냈다. 매달린 나무열매가 대롱거렸다.
“걱정마. 만들어 준 바보를 생각해서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고맙게 생각해.”
“으, 응.”
히아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셔틀이 출발함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놓아두었던 여행 가방을 들고 히아스와 페날은 입구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소리지르며 펄쩍거렸다. 보일과 아레사는 미소와 함께 히아스를 바라보았다. 미네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 다음에 또!”
페날이 힘차게 인사하며 히아스를 데리고 통로로 들어갔다. 모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몇 발자국 걸었을 때, 페날은 혀를 차더니 히아스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왜요?”
“왜긴. 말도 못 꺼냈잖아. 새 목걸이 사주겠다고.”
“…….”
고개를 돌리는 히아스를 보며 그는 히죽 웃었다.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과 용기. 자넨 수련이 부족하군.”
“멋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히아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찡그렸다.
“미네는 그냥 여동생이예요. 동생 선물을 사주는 게 뭐가 이상하죠?”
“헤에. 난 오누이 사랑을 말했는데.”
태연한 페날의 대꾸에 히아스는 고개를 돌리고 신음소리를 냈다. 미안하지만 넌 한참 멀었어, 요 순진한 녀석아. 나이는 공짜로 먹는 게 아니란다. 페날은 즐겁게 키득거린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셔틀 떠나겠다. 늦장부리면 버리고 갈거야.”
“아저씬 잔인해요!”
볼멘 소리로 외치며 뒤를 따르는 히아스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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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희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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