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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李範奭) (1900 ~ 1972)】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전설"
1900년 10월 20일 서울 용동(현 명동)에서 아버지 이문하(李文夏)와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 李氏)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호는 철기(鐵驥, 哲琦), 자는 인남(麟男)이다. 이명은 이국근(李國根) ・ 윤형권(尹衡權) ・ 김광두(金光斗) ・ 왕운산(王雲山) ・ 왕모백(王慕白) 등이다.
조선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17대 후손이다. 선대들은 줄곧 벼슬을 하여 서울에 살았다. 증조부 이목연(李穆淵)은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부친은 대한제국에서 농상공부 서기관을 지냈다. 증조부 대에 충남 천안군 목천면으로 이주하였다가, 아버지 대에 다시 서울로 이사하였다.
어려서는 외삼촌 이태승(李兌承)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태승은 한성외국어학교 출신으로, 신익희(申翼熙)와 동창이었다. 1910년 사립 장훈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11년 부친이 강원 이천(伊川)군수로 부임하게 되자 이천에서 보통학교를 다녔다. 1913년 서울로 올라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천은 항일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으로, 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의병들의 활동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의병들이 일제에게 붙잡히는 것을 목격하면서, 특히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는 동안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민족적 모욕을 받는 일도 있었고, 일본학생들과 자주 충돌하여 싸움을 벌였다. 이러한 것들이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15년 11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여운형(呂運亨)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을 다니던 여운형이 국내로 잠시 귀국하였을 때, 그를 만나 중국의 실정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망명을 결심하였다. 망명을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신의주를 거쳐 펑텐(奉天)으로 가 그곳에서 여운형을 만나 함께 상하이(上海)로 향했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신석우(申錫雨)를 찾아갔다. 신석우는 누이의 남편으로 매형이었다. 신석우를 통해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게 되었고, 특히 신규식(申圭植)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규식은 장차 큰 일을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항저우(杭州)에 있는 체육학교에 입학을 주선해주었다. 6개월 정도 학교를 다녔지만, 흥미를 갖지 못했다. 자퇴를 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신규식은 군인이 되라며,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추천해주었다. 운남강무학교는 윈난성(雲南省) 군벌 탕지야오(唐繼堯)가 설립한 군사교육기관으로, 윈난성 쿤밍(昆明)에 있었다. 탕지야오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인물로 신규식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신규식이 탕지야오에게 한국청년들이 운남강무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교섭하였고,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 주었다.
신규식의 추천장을 가지고 김세준(金世俊), 배천택(裵天澤), 김정(金鼎), 최진(崔震)과 함께 쿤밍으로 행했다. 광주 ・ 홍콩 ・ 베트남을 거쳐 쿤밍에 도착, 운남강무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을 위해서는 중국인으로 위장을 하여야 한다고 하여,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출신으로, 이름은 이국근(李國根)으로 바꾸었다.
당시 운남강무학교는 보병 ・ 기병 ・ 포병 ・ 공병 등 4개 병과가 있었다. 기병과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훈련은 일본육군사관학교와 거의 같았다. 교관들 대부분이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고, 교과목도 거의 비슷했다. 교육기간은 3년 과정이었고, 1919년 3월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수석졸업을 기념하여 기병과의 교관 서가기(徐家驥)가 자신의 이름인 기(驥) 자 앞에 철(鐵) 자를 붙여, 철기(鐵驥)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졸업 후 건해자(乾海子)에 있는 중국군 기병부대에 배속되어 견습사관으로 복무하였다.
중국군 부대에서 견습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탕지야오에게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고 싶다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919년 7월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동녕(李東寧), 조완구(趙琬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독립군으로 활동하기를 원했다. 이시영(李始榮)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가라며 추천장을 써주었다.
1919년 10월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하였다.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고산자(孤山子)에 있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지청천(池靑天)과 김광서(金光瑞)도 일본군을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하였고, 이들과 함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교성대(敎成隊) 대장도 맡았다. 교성대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흥업단(興業團)에서 훈련을 받은 청년들로 구성된 일종의 별동대였다.
1920년 4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으로부터 북간도로 오라는 요청을 받고, 북간도로 갔다. 당시 김좌진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왕칭현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에 임명되었다. 이장녕(李章寧), 박영희(朴寧熙), 강화린(姜華麟) 등 교관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1920년 9월 310여명을 졸업시켰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지역 독립군에 대한 공격계획을 세우고, 제19사단을 비롯한 대규모 병력을 3개 지대로 나누어 독립군 부대들을 추격하였다. 김좌진 총사령관과 함께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고 백두산으로 이동하던 중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에서 동지대(東支隊)의 야마다(山田)연대와 만나 매복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10월 22일에는 천수평(泉水坪)에서 일본군 기병대를 기습공격하는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 기병대가 숙영하고 있다는 마을주민의 제보를 받고, 새벽에 기습공격하여 일본군 대부분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어랑촌 전투에서는 홍범도(洪範圖) 부대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26일까지 맹개골 ・ 만록구 ・ 쉬구 등에서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청산리 일대에서 벌인 전투에서 독립군은 크게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청산리대첩이라고 한다.
청산리전투를 치른 후 독립군 부대들이 러시아로 이동함에 따라, 일단 안투현(安圖縣)으로 퇴각하였다. 여기서 북로군정서 군대를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러시아로 향했다. 12월 밀산(密山)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한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을 때, 학도대 대장을 맡았다.
1921년 1월 중국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이만에 도착하였다. 러시아로 깊이 들어갈 경우 독립군의 존립과 활동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김좌진, 김규식(金圭奎) 등과 함께 군대를 이탈하여,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다. 이로써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22년 6월 솔밭관 한족공산당(松田關 韓族共産黨) 군대에서 활동하였다. 솔밭관 한족공산당은 연해주(沿海州)에서 결성된 한인공산주의단체였고 여러 독립군 세력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김규식, 양규열(梁圭烈)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솔밭관 한족공산당 군대는 1922년 9월 고려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기병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백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925년 3월 고려혁명군이 중국군 장종창(張宗昌)부대에 무장해제를 당하는 일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장종창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윤형권(尹衡權)이란 이름을 사용하였고,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에 배치된 병력을 순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5년 7월 김좌진의 전보를 받고 영고탑(寧古塔)으로 갔다. 당시 김좌진은 신민부(新民府)의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고탑에서 김좌진과 함께 성동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장종창 부대에 있을 때 장학량(張學良)의 군대를 전멸시킨 것이 드러나 몸을 숨겨야 했다. 이름을 김광두(金光斗)라 하고, 대흥안령(大興安嶺) 부근 할라수에서 아편밭을 지켜주는 총잡이로 고용되어 숨어 지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한 후, 중국의 소병문(蘇炳文) ・ 마점산(馬占山)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소병문과 마점산은 하얼빈 이북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참여한 시기나 계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마점산 부대의 참모장 또는 작전과장으로 활동하였다. 일본군에 패한 마점산 부대가 러시아 톰스크(Tomsk)로 이동하자, 함께 이동하여 톰스크 피난민 수용소에서 지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소련측과 교섭하여 마점산 부대를 귀국시키자, 이들과 함께 톰스크를 떠났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마점산을 구라파군사사절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유럽 각국의 군사시설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47명으로 구성된 단원의 일원이 되어, 52일 동안 러시아 ・ 폴란드 ・ 독일 ・ 이태리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태리에서 배를 타고 1933년 6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934년 2월 김구가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였을 때, 학생대장에 임명되었다. 지청천, 오광선(吳光鮮), 조경한(趙擎韓) 등의 교관과 함께,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사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일본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도록 하자 왕운산(王雲山)이라 하였다. 한인특별반 운영을 둘러싸고 김구, 지청천, 김원봉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김구가 자기 계열의 학생들을 철수시키자, 이에 불만을 품고 교관직을 그만두었다.
다시 중국군에 들어갔다. 1936년 12월 양호성(楊虎城) 부대에서 기병연대장으로, 중국 제3로군의 한복거(韓復渠) 부대에서 고급참모로 복무하였다. 1938년부터는 제3로군 예하의 제55군 조복림(曹福林) 휘하에서 주임참모로 복무하면서, 태아장(台兒庄) ・ 농해선(隴海線)전투 등 중일전쟁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1939년 6월 중국 국민당 중앙훈련단 당정훈련반(黨政訓練班) 제3기로 입교하였다. 중앙훈련단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최고간부 훈련기관이었다. 이를 졸업한 후 중앙훈련단 영예대대 중대장과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 창설을 추진하자, 1940년 6월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박찬익(朴贊翊) ・ 지청천 ・ 유동열(柳東說) ・ 김학규(金學奎) ・ 조경한 등과 그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창설위원회 위원으로 광복군 창설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광복군을 창설하여 한중연합군으로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한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韓國光復軍編練計劃大綱)을 작성하였고, 이는 1940년 5월 김구 명의로 장제스(蔣介石)에게 제출되었다.
장제스는 ‘한국광복군이 중국항전에 참가한다’는 전제로 이를 승인하였다. 그렇지만 계획서를 넘겨받은 중국군사위원회 실무자들이 광복군은 중국군과 대등한 관계일 수 없다며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중국군사위원회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자,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중국)국민당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우선 만들어 놓고 내밀어 보자는 뱃심 뿐이었다”라고 하여, 우선 광복군을 창설해 놓고 중국측의 승인과 원조는 나중에 교섭한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선 동원이 가능한 인원을 중심으로 지휘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여 광복군을 창설하고, 하부조직은 병력을 확보하는 대로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의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군사간부들을 중심으로 1940년 8월 4일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인청년들을 소집하여 부대편제를 갖춘다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총사령부 구성이 완료되고 부대편제 방침이 결정된 후,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는 중국군사위원회 실무자들과 협의없이 발표한 것으로, 장제스가 비준한 것을 근거로 광복군 창설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총사령은 지청천이었고, 참모장을 맡았다. 총사령부를 성립한 후, 광복군이 추진해나갈 당면전략을 수립하였다. 광복군의 경비와 장비는 외국의 원조를 받고, 초모활동(招募活動)을 통해 병력을 모집하여 1년 이내에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초모활동을 위해 총사령부를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이전하였다. 시안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베이(華北)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곳으로, 화북지역에 이주해있던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조처였다. 중국측과의 교섭을 위해 총사령 지청천과 함께 충칭(重慶)에 남았다. 그리고 1940년 11월 황학수(黃學秀)를 총사령 대리, 김학규를 참모장 대리로 한 총사령부잠정부서를 편성하여, 이들을 시안으로 보냈다.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전한 후, 충칭에서 지청천과 함께 중국측을 상대로 광복군 창설에 대한 인준과 지원을 위한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1941년 11월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가 통할하고 지휘한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準繩)을 보내오면서, 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隸屬)되었다.
1942년 10월 광복군 참모장의 직책을 사임하고, 시안에 있는 제2지대의 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제2지대는 1941년 3월 제5지대에서 일어난 지대장 나월환(羅月煥) 암살사건, 그리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계기로, 종전에 편성되었던 제1 ・ 제2 ・ 제5지대를 통합하여 편성한 것이다.
지대장으로 부임한 후 지대 본부와 더불어 안춘생(安椿生), 노태준(盧泰俊), 노복선(盧福善)을 구대장으로 임명하여 3개 구대(區隊)의 편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대원들을 화북지역으로 보내 초모활동을 전개하여 250명에 이르는 대원을 확보하였다.
1944년 10월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접촉하여, 광복군과 OSS의 군사합작을 교섭하였다. 교섭내용은 광복군을 미군에 복무하도록 할 것, 미군을 위한 전략첩보 수집과 한국에서의 연합군 작전을 돕기 위해 광복군에 대해 OSS훈련을 실시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교섭은 OSS측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성사되었다. 1944년 겨울부터 안우생(安偶生), 엄도해(嚴道海) 등이 주중미국대사관에서 신문 ・ 잡지 ・ 뉴스방송 등을 통해 정보수집과 일본문서번역 등의 첩보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1월 OSS의 싸전트(Clyde B. Sargent) 대위를 시안의 제2지대로 초청하여, 광복군에 대한 OSS훈련 문제를 협의하였다. 싸전트는 제2지대 대원들의 사기(士氣) 능력 ・ 단결심 등을 조사하였고, 대원들에 대한 OSS훈련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OSS측에서 광복군 대원들에게 OSS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국내에 진입시켜 적후방공작을 전개한다는 내용의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입안하였다. 4월 1일 지청천 총사령과 함께 싸전트를 만나 독수리작전을 매개로 한 광복군과 OSS 사이에 공동작전을 추진하기로 합의를 이루었다.
1945년 4월 3일 총사령 지청천과 제3지대장 김학규와 함께 싸전트를 데리고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가, 주석 김구와 면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주석 김구로부터 그동안 싸전트와 협의한 내용에 대해 최종적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광복군과 미국 OSS 사이에 ‘독수리작전’을 매개로 한 공동작전이 추진되게 되었다.
1945년 5월부터 제2지대 대원들을 대상으로 OSS훈련을 실시하였다. 우선 제1기생으로 50명을 선발하여 OSS훈련에 들어갔다. 훈련에 필요한 장비와 시설 등은 모두 OSS측에서 부담하였고, 미국인 교관들에 의한 훈련이 실시되었다. 훈련은 3개월 과정이었고, 1945년 8월 4일 제1기생의 훈련이 완료되었다.
1945년 8월 7일 OSS측과 훈련받은 대원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적후방공작을 전개하기 위한 국내진입작전을 협의하였다. 장소는 제2지대 본부였다. 주석 김구 ・ 총사령 지청천과 함께 참석하였고, 미국측에서는 OSS총책임자인 도노반(William B. Donovan) 소장과 중국책임자인 홀리웰(Holliwell) 대령이 참석하였다.
협의는 양국의 국기를 걸어놓고 진행되었다. 이 협의에서 OSS훈련을 받은 대원들을 국내에 진입시키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도노반 소장은 “오늘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이에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한미간에 공동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국내진입작전을 수행하는 명칭은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이라 하였고, 총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각 도(道)를 단위로 공작반(工作班)을 편성하고, 3개 도를 한 지구(地區)로 묶어 안춘생, 노태준, 노복선을 제1지구 ・ 제2제구 ・ 제3지구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8월 10일 일제가 항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안시내에 있던 주석 김구와 총사령 지청천이 곧바로 제2지대 본부로 돌아왔고, 이들과 함께 향후 문제를 협의하였다. 협의는 OSS측과 교섭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싸전트에게 광복군이 국내에 진입하여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고, 싸전트는 OSS본부에 타전하여 승낙을 받아냈다.
1945년 8월 16일 ‘국내정진대(國內挺進隊)’를 편성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다. 정진대는 버드(Willis Bird) 대령을 포함한 OSS측에서 18명, 그리고 광복군에서는 자신을 포함하여 김준엽(金俊燁), 장준하(張俊河), 노능서(魯能瑞) 등 4명으로 구성되었다. 8월 16일 오전 4시 30분 미군비행기로 시안을 출발하여 산둥(山東)반도에 이르렀다. 이때 일본군이 연합군에 대해 계속 공격을 감행한다는 보고를 받고, 시안으로 돌아갔다.
8월 18일 재차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다. 미군비행기 C-47을 타고 시안을 출발하여 오후 12시경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그러나 일본군이 포위하고, 국내진입을 가로 막았다. “중국전구사령관 웨드마이어(Wedmeyer)의 지시로 연합군 포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예비대로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신임장이 없다는것과 도쿄(東京)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며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8월 19일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여, 산둥성의 유현(維縣) 비행장을 거쳐 8월 28일 시안으로 돌아갔다.
광복군의 조직을 확대하는 확군활동(擴軍活動)과 교포들의 귀국을 주선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패방 후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에 일본군 항복을 접수할 때, 일본군으로 끌려나온 한적장병(韓籍將兵)들을 광복군에 편입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중국에 이주해 있는 한인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성한다는 확군 방침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광복군 대원들이 중국대륙 각지에 파견되어 확군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교포들을 보호하는 활동과 귀국을 주선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뤄양(洛陽) ・ 카이펑(開封) 등지에서 확군활동과 교포들의 보호 및 귀국을 주선하는 활동을 지휘하였다.
광복군의 해산을 선언하고 귀국하였다. 교포들의 귀국이 거의 완료된 후, 1946년 5월 16일 총사령 지청천 명의로 “이제 숙적(宿敵) 일본이 항복하여 연합군은 승리를 획득하고 우리 국토는 광명을 되찾았으니 본군(本軍)의 중국경내에서의 작전임무도 이로써 끝났다”라는 내용의 『한국광복군 복원선언(復員宣言)』이 발표되었다. 복원선언은 광복군의 해산을 선언한 것이었다. 1946년 6월 3일 광복군 대원 500여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하고, 비정치 ・ 비종파 ・ 비군사를 행동원칙으로, ‘국가지상(國家至上) 민족지상(民族至上)’을 이념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창단 2년 만에 전국적인 조직과 115만명의 단원을 확보한 단체로 확대 발전시키면서, 해방정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였다. 8월 31일 미군정으로부터 통위부와 국방경비대를 이양받아 국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민족청년단과 관련하여 “히틀러를 꿈꾸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악선전과 모함을 받았다. 1948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민족청년단을 해체하고 대동청년단에 합류시켰다. 1950년에는 주중국대사와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51년 12월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52년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하였다. 1953년 자유당에서 제명되었고, 1956년 무소속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고배를 마셨다. 1960년 자유연맹 소속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