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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세검정 차일암 조지서
한국의산천 추천 0 조회 70 08.02.15 20:5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홍지문 세검정 차일암 탕춘대터 둘러보기 

[답사·촬영. 2008. 2. 15일(금요일).   한국의산천 ]

 

현재 서울 세검정이라는 지역은 세검정(洗劍亭) 정자를 중심으로 한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일대를 통틀어 가리키는 지역 대명사로 쓰인다. 이곳의 지형은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과 산이 많다. 그렇기에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 후 간장 담그는 기술자와 창호지 만드는 기술자를 상주케 하여 '메주가마골' 이라는 별칭도 생겨 났으며, '실록'을 편찬 한 후 실록의 기초가 되었던 사초(史草)를 물에 지우는 세초지가 있었으며,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말에는 이곳에 신식 군영(軍營)을 설치하였고, 또한 광목을 바래던 표백서(漂白署)도 있었다.   

 

▲ 세검정 일대는 북한산 줄기가 뻗어 내린 관계로 평지보다는 계곡과 산이 많다. ⓒ 2008 한국의산천  

서울 도성안에는 아침의 파루(罷漏), 저녁의 인정(人定)을 알리는 종루가 있었기에 그곳을 종로(鐘路)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한산성내의 가운데를 종로라고 부르고 수원의 화성의 가운데 화성행군 일대를 종로라고 부른다. 또한 평창동은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었으므로 해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세검정 길을 사이에 두고 평창동사무소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간 평창동 330번지에 소재하며, 원래 평창은 상·하로 2창(倉)이 있는데, 부평, 인천, 과천, 시흥, 안산, 양천, 양주, 용인, 고양, 파주, 교하의 11개 읍으로부터 운반해 온 대동미(大同米)를 보관하였다.

평창동 330번지의 평창은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의 창고로 상창(上倉)이 되고, 156번지의 평창은 선혜청(宣惠廳)의 창고로 하창(下倉)에 해당되는데 나중에 지었기 때문에 신창(新倉) 혹은 센창이라고 불렀다. 한편 선혜청은 여러 곳에 창고를 두었는데 북창(北倉)은 삼청동에, 별창(別倉)은 용산강(龍山江), 동강(東江)은 옛 장용영(壯勇營)에 두었으며, 그 외에도 평창(平倉), 만리창(萬里倉), 광흥창(廣興倉)을 두었다. 

 

이렇듯 지명에는 예부터 전해오는 내력이 있기마련... 쌀쌀한 아침 파란 하늘을 보며 세검정을 찾아 나섰다.   

 

세검정 삼거리에서 상명대로 올라가는 입구의 왼편으로 흐르는 개천가를 따라가다 보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을 만날 수 있는데, 홍지문은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오간대수문 및 서성과 함께 건립한 문루로서 한북문 이라고도 한다.

 1921년 7월에 문루가 붕괴되고 같은 해 8월에 오간대수문이 홍수로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고, 원래는 지금의 차도에 위치하고 있다가 복원 당시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지금의 현판은 복원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세검정 삼거리에서 상명여대를 정면으로 보며 왼쪽은 홍지문, 오른쪽으로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있다) 

▲ 홍지문(弘智門) ⓒ 2008 한국의산천

 

홍지문(弘智門) 및 탕춘대성(蕩春臺城) (위치 : 서울시 종로구 홍지동, 부암동내)

홍지문은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하여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및 서성(西城)과 함께 건립한 문루로서 일명 한북문(漢北門) 이라고도 한다. 문안의 신영동, 구기동 일대는 삼국시대 이후 국방의 요새지로 중시되어 왔으며 선혜청 창고, 상.하 평창, 군량미 창고 등이 있었다. 1921년 7월에 문루가 붕괴되고 같은 해 8월에 오간대수문이 홍수로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서성과 함께 197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탕춘대성

인왕산의 정상 밑에서부터 홍제천을 건너 구기동의 북한산 비봉 밑으로 이어지는 탕춘대성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축성된 서울성곽을 보완하기 위해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이후 수도 방위를 위하여 1719년에 완성한 성곽으로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弘智門), 오간수문(五間水門),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西城)이라고도한다.
원래 탕춘대성이 있는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지역이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홍지문을 거쳐 수리봉까지 이어진 4km 정도이다. 현재는 주택의 난립으로 인하여 무심코 지나칠 수 밖에 없는 외진곳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의미의 성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홍지문 편액ⓒ 2008 한국의산천 

▲ 성곽이 지나던 자리 옆으로 길이 만들어지고 터널로 이어진다. ⓒ 2008 한국의산천 

▲ 홍지문 위의 잡상 ⓒ 2008 한국의산천

잡상(雜狀)
고궁의 옛 건축물이나 성문의 추녀마루를 보면 한줄로 죽 늘어 인형같은것이 보인다. 엎드려 절하는 사람같기도하고 무슨 동물의 형상 같기도 하다. 바로 그것은 진흙으로 빚어 만든 여러 가지 형상의 토우(土偶·흙인형).즉 잡상(雜像)이라고 말한다.

잡상은 궁전·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설치되며 궁궐이나 관아의 건물, 도성의 성문이야말로 왕조의 기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쳐 건물을 지키는 일. 목조 건물의 화재예방 등 잡귀를 막고자 주술적인 효과를 바라는 것으로 민간신앙의 하나라고 해석되며 조선시대에 성행 했던 잡상은 3마리부터 11마리 까지 대개 3, 5, 7, 11의 홀수로 앉혀진다. 음양오행과 관련이 있는것일까? 음력 3월 3일(삼월 삼짇날), 5월 5일(단오端午), 7월 7일(칠월 칠석) 처럼 모두 홀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맨앞에는 삼장법사의 머리같은 스타일의 인물상이 자리잡아 뒷자리의 잡상을 이끄는 선두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삼장법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 세검정(洗劍亭) 위치 :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 2008 한국의산천

▲ 세검정(洗劍亭) 서울시 지정 기념물 4호 ⓒ 2008 한국의산천 

이 정자는 원래 연산군때 (1500~1505년경)때 탕춘대를 마련하고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도 전한다. 유흥을 위해 세웠다고 하며, 일설에는 숙종때 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 총융청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에 있는 군인들의 휴게시설로 세웠다는 말도 있다. 이후 영조 24년 (1748 ) 중건하였으며 이때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이귀, 김류등과 함께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후 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홍제천(모래내) 맑은 물에 칼을 씻었다 하여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 '세검이라 함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진것이다.

▲ 겸제 정선의 세검정圖 (출처: 간송미술관·DongA.com참고) ⓒ 2008 한국의산천

현재의 건물은 1941년 부근에 있던 종이 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고 1977년 복원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보면 정자의 받침 돌기둥이 높직한 누각형식의 건물로 도로쪽을 향하는 면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돌리고 입구에 일각문을 두었으며 건물의 측면에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수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현재는 개울로 내려갈수있는 시설물은 없어서 조심스레 경사진 바위를 타고 내려갔다. 여느 정자와는 달리 'ㄱ'字 모양의 육각 정자로 되어있다.

 

세검정은 차일암 위에 세워졌는데,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열조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를 했다고 한다. 세초지는 서대문 밖 아현동에도 있었다고 전한다. 

 

차일암 세초지와 사관 

사극을 보노라면 왕 아래 곁에서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붓을 들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사관이다.  

사관의 역사는 중국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사관은 국왕이 있는곳에는 항시 같이 있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기록되고 있으니 국왕에게는 친숙하기보다는 지긋 지긋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여자사관을 뽑아 잠자리가지 기록하자고 할 정도였으니... 사관이 기록한 것을 사초라하며 이 사초를 모아서 실록을 만든다.

 

참고 한림·사관이란?  >>> http://blog.daum.net/koreasan/13886930

 

조선시대 사관은 예문관 소속 8명의 전임사관이 있었고 이를 가르켜 한림이라 하였다. 그외 춘추관의 겸관들은 3정승을 비롯하여 52명쯤 된다. 전임사관들이 입시하는 제도가 정착할때 까지는 군왕과 사관들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사관들이 모든 정사에 입시하게 된것은 사관을 비롯한 젊은 신진인사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 세검정(洗劍亭) ⓒ 2008 한국의산천  

세검정 이곳은 여름철에 詩會를 연 곳으로 유명했다. 시회는 원래 글을 통해 인격을 닦으려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주요 모임이었다. 지금은 길이 터널이 뚫리며 차량 소통도 많아지고 많은 집들이 들어서며 복잡한 도시로 변했지만, 예전 세검정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모래내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동네 아낙들의 빨래터로 이용되며 항시 맑은 물이 넘치는 풍경 좋은 곳이었다.    

▲ 세검정(洗劍亭) ⓒ 2008 한국의산천   

조선왕조실록

사고(史庫)에는 실록을 비롯하여 선원록(璿源錄), 어제(御製) 등의 서책이 봉안 ·관리 되었다. 사고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다가 1660년(현종 1) 이후 강화 정족산(鼎足山), 평창 오대산(五臺山), 봉화태백산(太白山), 무주 적상산(赤裳山) 등 네 개의 사고[四史庫] 체제로 정비되었다. 사고에 보관된 서책은 엄격하게 관리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3년마다 춘추관의 관원이 파견되어 서책의 실태를 조사하고 실록형지안(實錄形止案)을 작성하였다.
실록형지안에는 각사고에 보관된 실록·어제(御製)및 기타 서책의봉안(奉安)·이안(移安)·고출(考出)·실록각개수(實錄閣改修)·포쇄등의 전말을 기록하였다. 현재 규장각에는 총 585책의 형지안이 소장되어 있는데, 실록 및 선원록의형지안이 대부분이다.
 

▲ 세검정과 차일암 ⓒ 2008 한국의산천

차일(遮日)

차일이란 햇볕이나 비를 막기위해 하늘을 가리는 포장으로 학교 운동회때 귀빈석에 쳐진 천막을 생각하면 쉽다. 예전에는 광목 ·삼베로 만들어서 혼인이나 회갑잔치 등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볕을 막기 위하여 사용하며 장례식 때도 사용한다.

차일을 우산처럼 대나무에 기름종이를 발라 쓰는 것을 차일산(傘)이라 하는데 옛날 야외의 시연(詩筵)이나 향연(饗宴) ·과거시험 ·한시백일장 같은 데에서 사용하였다.

 

차일암의 세초연

실록은 '당대사'였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현대사인 셈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이 보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군왕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실록은 오직 '조선왕조실록' 뿐이었고,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이 빛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실록'을 만들기 전에 사관들이 매일 왕의 곁에서 모든것을 일일이 기록한 글이 사초이다. 사초(史草)란 실록 편찬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였다.

 

사초편찬 과정은 크게 초초, 중초, 정초의 3단계로 나뉜다. 실록은 이 가운데 정초본을 대본으로 삼아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시대에 따라 4부 또는 5부를 만들었다. 실록청은 총재관(總裁官), 도청(都廳), 방(房)의 3단계로 구성되었으며 실록의 편찬이 3단계의 공정을 거쳐 이루어지며 실록을 편찬할 때 주로 이용되었던 자료를 보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사초와 시정기(時政記)였다. 그 밖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과 후대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등을 비롯하여 '각사등록(各司謄錄)', 개인의 일기나 문집, 소(疏), 야사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였다. 

 

'실록' 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의 비밀을 보장하고 그 기록을 없애버리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을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세초(洗草)하여 먹으로 쓰여진 글씨를 없애고, 종이를 재생하는 차원에서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造紙署: 아래 상세안내 참고)로 보내져서 다시 종이로 재생되었다.

 

세초연(洗草宴)은 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이후 사초(史草)나 초고(草稿) 등을 물에 씻어 지우며 여는 잔치를 말한다.
세초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던 세검정(洗劍亭) 냇가에서 행해졌는데, 실록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근처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을 베풀었다.
다음의 시는 숙종∼영조 연간의 문신인 조문명(趙文命,1680∼1732)이 '숙종실록'을 편찬한 뒤 세초연에 참석하여 노래한 한시이다.

세초연(洗草宴)을 노래한 한시(漢詩)

寸管那能盡畵天 작은 붓으로 어찌 하늘을 다 그려내리요?
於休盛德百王前 아아! 성대한 덕은 백왕보다 앞서도다.
十年始訖編芸役 십년만에 비로소 실록 편찬의 일을 마치고
暇日初開洗草筵 한가한 날에 사초 씻는 잔치를 막 열었네.
晩後溪炊當美饌 저녁에 시내에서 밥 지으니 맛난 음식이요,
雨餘山水勝鳴絃 비온 뒤의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보다 낫네.
舊時簪筆今如夢 지난날 붓을 들었던 것이 이제 꿈결 같은데
手閱成書更泫然 직접 완성된 책을 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조문명, 학암집 권2 <세초연(洗草筵)>-   

▲ 차일암의 차일을 칠때 기둥을 세웠던 흔적 ⓒ 2008 한국의산천

산과 바위가 어우러려 물이 맑은 세검정(洗劒停) 일대는 서울시민들의 둘도 없는 소풍 장소였다. 인왕산을 앞에 두고 북악산을 뒤로한 공기 맑고 풍경 좋은 세검정. 북악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육각형의 작은 정자인 세검정은 '차일암'이라 부르는 평평한 바위에 세워졌는데, 왕조의 실록을 편찬한 뒤에 그 원고가 되는 사초를 이 바위 위에서 차일(천막)을 치고 맑은 물에 한지에 쓴 사초를 집어넣어 먹글씨를 씻어버린 일에서 비롯되었다.  

▲ 세검정 차일암 표석 ⓒ 2008 한국의산천 

선왕조실록은 세계 최대의 역사서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우선 양적, 질적으로 어느나라에서 찾아 볼수없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로부터 철종 이원범까지의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쓴 방대한 역사 기록이다. (※ 편년체란 국왕의 재임기간을 날짜별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역사 편찬 체제)

이렇게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이면에는 서릿발 같은 조선의 선비정신이 형형이 빛나고 있다. 바른 역사와 직필을 위해 일개 9품 벼슬아치가 하늘 같은 왕에 맞서간 감투가 있으며, 끝내 붓을 휘지 않고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진 수많은 사관들의 붉은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다. 후세에 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 붓자루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의 사관들

 

국왕이 가장 겁냈던 사람은 사관이었다. 간관은 살아있을 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만, 사관은 보고 듣는 대로 기록하였다. 사관은 국왕의 자신이 사후에 듣기 싫은 이야기를 기록하기 때문. 그래서 국왕과 사관 사이에 실랑이와 긴장관계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관들은 늘 군왕의 곁에,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사관들은 당대의 사초는 물론, 바로 선대왕의 실록도 국왕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기록한 사초가 실록으로 편찬되면 이곳 세초지에서 지워지고 종이는 다시 재생되었다.

▲ 탕춘대(蕩春臺)터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이다. 연산군은 경치가 좋은 이곳 일대를 연회 장소로 삼고 시냇물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위에 탕춘대를 지었다. 영조때에는 무사들을 선발하여 이 일대에서 훈련 시켰다하여 연융대(練絨臺)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이 위로 빌라촌이 형성되어있다.

▲ 탕춘대 알림 표석 ⓒ 2008 한국의산천

 

실록포쇄

실록포쇄란 사고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좀이나 습기로 인한 부식이나 충해(蟲害)를 막기 위해 3년에 한번 정도 바람을 쏘이고 햇볕에 쬐어 말리는 것을 말한다. 실록은 아무나 볼 수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실록의 포쇄를 매우 엄격하게 시행하였는데,춘추관(春秋館)에서 사관을 파견하여 이를 담당하였다. 

 

포쇄를 노래한 한시  
다음은 한시는 1709년(숙종 35) 가을에 신정하(申靖夏, 1681∼1716)가 포쇄관에 임명되어 태백산 사고(太白山史庫)에서 포쇄를 할 때 지은 한시이다. 총 24구의 오언고시(五言古詩)인데 그 중 일부를 보인다.

 
我來啣丹詔 나는 임금의 조서를 받들고
馹騎橫秋風 가을 바람에 말을 달려 왔네.
再拜手啓 두 번 절한 뒤 손수 자물쇠를 열고서
曝之蓮臺畔 연선대(蓮僊臺) 가에서 포쇄를 하네.
金箱三十六 귀한 상자 서른 여섯 개를 내놓으니
白日當天半 해가 하늘 중앙에 이르렀네.
過風時與披 지나는 바람에 때로 함께 책장을 열고
度鳥忽遺影 날아가던 새가 홀연히 책에 그림자를 드리우네.
時於簡編中 때때로 서적 가운데서
是非獨自領 시시비비를 스스로 깨닫네.

-신정하, 서암집 권3, <포사(曝史)>-   

▲ 성산대교를 지나며 ⓒ 2008 한국의산천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궁중과 중앙정부기관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등을 생산하던 관설 제지소.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5년(세조 11)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 근교의 물이 좋고 넓은 바위가 있어 한지(韓紙) 제조에 적당한 자하문(紫霞門) 밖 탕춘대(蕩春臺)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제지 기술자인 지장(紙匠)이 81명, 보조역이라 할 수 있는 차비노(差備奴)가 90명이 있던 수공업장이었다. 지장은 조선의 '부역동원제'에 의해 3교대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제지기술자들이었고, 따라서 조지서에서 생산되는 종이는 국내에서 최고 품질의 종이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천하무비(天下無比)로 알려졌었다. 조지서에 소속된 지장들은 이미 조선의 전기부터 조지서 근처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생산에 종사할 만큼 전업수공업자화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때 조지서가 큰 타격을 받기도 했는데, 1626년(인조 4)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 후에 조지서에는 겨우 5명의 지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승려지장을 동원했다고 전한다.  

ⓒ 2008 한국의산천

 

과거의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역사란 긴 세월에 걸쳐서 쌓여진 금맥(金脈)이다. 그 금맥은 미래를 내다볼수있는 황금사다리가 되어준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역사가 없는 미래를 생각 할 수는 없다.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일로 치부할 때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조상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때에 우리의 미래는 빛날것이다.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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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2.16 03:42

    첫댓글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는 세검정, 임금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하였었던 사초가 이조실록으로 편찬 된후에 먹물을 빨았다는 곳 그 서릿발 같은 글을 썻엇던 먹물은 무엇이 되어 다시 태어 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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