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정권을 장악한 1860년대 조선의 역사적 조건은 국내외적으로 일대 전환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일고 있던 격동의 시대였다.
17세기 후반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대동법은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시킴으로써 전국적으로 상품의 유통범위를 확대시켰다. 전국 방방곡곡에 5일 간격으로 장시(場市)가 열리고 이 곳에서 상인을 통한 거래가 성행했다. 농민들도 기본적으로는 자급자족적 자연경제에 머물면서도, 곡물과 담배·인삼·채소 등의 상품작물과 가내수공업 생산물인 저포·면포 등을 팔아서, 농구·유기·소금 등 생산도구 및 일상용품을 구입하였다. 상품유통의 매개자로 보부상과 객주(客主)·여각(旅閣)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객주·여각은 장시에 정착하여 물화의 매매와 금융·창고·여관업까지 겸함으로써 상업의 주역이 되었다. 이러한 장시 상인 위에는 서울을 위시한 대시(大市)를 장악한 송상(松商)·경강상인(京江商人)·만상(灣商) 등 거대한 상인군들이 전국적인 상업경제의 새로운 질서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상인자본은 봉건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립해 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종래의 특권적 어용상업체인 육주비전(六注比廛)과는 일정한 대항관계인 새로운 민간상업으로 발전하였다. 대규모의 자본력을 가지게 된 사상(私商)층의 성장은 독점적 상권을 형성하고 수공업부문까지 고리대적 선대적 방법으로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까지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품 유통과정에서의 화폐적 요소의 증대에 따라, 농촌사회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토지와 노동력의 상품화를 토대로 농민층 분해가 촉진된 것이다. 다시 말해 화폐유통이 농촌사회에 침투되어 조세가 금납화됨으로써, 지주나 부상층의 고리대적 방법에 의한 부의 축적이 일반화하여 비특권적 양반층의 몰락과 소작빈농의 창출이 진행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농사 지을 토지를 잃은 유랑민이 전국에 넘쳐 흘렀다. 이러한 무토농민(無土農民)의 창출과정에서 농업경영의 합리적 개선으로 인해, 새롭게 탄생한 부농층 또는 서민지주가 중세사회를 해체시킬 주체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양반지주나 지방 관리들과 일정한 대항관계에 서서 민중의식을 일깨우고 있었으나, 그 힘은 아직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더우기 봉건사회의 파괴작용을 수행하면서 근대적 농업생산자가 되어야할 이들 부농층은, 축적한 부를 미끼로 상층 신분인 양반 지배층으로 쉽사리 편입하여 봉건체제에 유착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은 조선 후기사회에 중대한 변화를 일어나게 했다. 부농·부상의 신분상승과 소작빈농·영세상인의 증가는 관료행정의 부패와 계속되는 한발·홍수·역질의 유행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와 함께 지주층에서 농업경영자로의 변신, 차지(借地)소작농에서 경영형부농으로의 성장, 유통과정에서 화폐적 요소의 증대, 거대자본의 사상인(私商人)의 형성 등 18세기 이래의 조선사회 내부에서는 근대적인 요인들이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0년대에서는 이들이 아직은 사회혁신의 추진세력으로까지 뚜렷하게 성장해 있지는 못했다. 분명히 새로운 사회의 태동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근대시민계급의 출현은 아직 없었고, 따라서 사회관계의 기본적 대립은 여전히 양반계층의 토지 소유자와 이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간의 모순이었다.
1862년 진주민란을 시초로 터진 삼남 37개 지방의 농민봉기도 봉건지주층과 농민간의 대립모순에 그 근본 원인이 있었다. 삼남지방은 일찍부터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확립되어 농민에 대한 지주의 수탈이 집중적으로 자행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때의 농민봉가는 전국적으로 연계된 반란은 아니었으나, 봉건왕조의 누적된 모순이 폭발한 것이기 때문에 무력한 왕조를 붕괴시키기에 충분한 기세였다. 특히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지배자들에게는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고 안핵사 박규수(朴珪壽)의 건의에 따라, 합리적 세정을 입안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신설했다. 그리하여 널리 삼정에 대한 개혁방안을 공모했다. 이때 뜻있는 지식인들이 상소한 삼정구폐응지소(三政捄弊應旨疏) 가운데는 일찌기 경세치용학파의 실학자들이 주장했던 농업개혁안과 같은 논지의 훌륭한 현실타개책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혁을 단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부패한 외척 세도정권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민란의 수습을 위한 실질적인 어떠한 방안도 수립하지 못한 이정청은 설치 3개월 만에 다급하게 ‘파환귀결(罷還歸結)’이라는 미봉책을 내놓았으나, 이 조치마저 불과 5개월 뒤에 “삼정을 옛 법규로 복귀시킨다”는 왕명으로 취소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봉건 지배자들은 삼정문란의 근원적 개혁은 외면한 채, 다만 수세 운영상의 속임수로 사태를 미봉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지배층 상호간의 의견 불일치만 노정되었다. 이런 사실은 이정청의 총재당상(摠裁堂上)의 토론내용에서도 드러난다. 이때 외척세도의 총수격인 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左根)은 당장 발등의 불이라도 꺼야하니 파환귀결의 방법으로나마 농민을 무마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으나, 정원용(鄭元容)·조두순(趙斗淳)은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고 해서 몇 백년 왕조의 법전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민란수습의 임시방편으로 채택된 ‘파환귀결’ 조치를 반대한 정원용과 조두순이 후일 대원군정권에 최고위 관료로서 참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7~18세기 이래의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동과 농민들의 동요는 봉건체제의 위기를 심화시켰고, 필연적으로 지배계층의 사상체계의 위기를 수반하게 되었다. 즉 그때까지 조선왕조의 유일 절대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누려왔던 성리학이 그 정치적 기능과 윤리적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일련의 진보적·애국적 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현실적 모순들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사상이 형성되었으니, 이것이 곧 실학이다. 실학사상은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반영하여 봉건적 모순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계층의 요구를 대표한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사상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조의 죽음 이후 60년간이나 계속된 세도정치에 의해 그것은 압살되고 말았다. 봉건 지배자들이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을 탄압하고 과학의 발전을 억제하면서, 나라의 부강 발전과 국민생활의 향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기론(理氣論)이나 예론(禮論) 따위로 스콜라적 논쟁이나 되풀이하고 있을 때, 백성들 사이에서는 각종 도참사상(圖讖思想)과 주술적 민간신앙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널리 민중사회에 유포된 것이 『정감록』이었다.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도래한다”는 『정감록』의 반역적 예언은 봉건 지배층의 가렴주구로 헐벗고 굶주리는 민중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특히 『정감록』의 여러 참언 가운데서도 현사회가 운이 다해 망하게 될 것이라는 현실 부정사상과, 정도령이 나타나 이 난세를 바로 잡게 될 것이라는 구세주사상은, 박해와 빈궁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는 민중들 속으로 강렬하게 침투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시기에 봉건지배체제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변혁욕구가 반영된 사상으로서, 동학이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되었다. 동학은 유교·불교·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그밖의 각종 민간 토속신앙의 잡다한 교리와 요소들을 종합한 독창적인 사상체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봉건적 농민의 낙후한 신비주의적 견해가 반영된 부정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는 있었지만,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고 인간의 평등을 요구하는 대목은 봉건적 질서로부터 자신을 해방코자 하는 신흥 제계층의 요구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동학이 일본과 서구 열강의 무력적·사상적 침략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애국주의에 입각한 대외 위기의식을 민중들에게 고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은 일찍부터 천주교문제와 관련하여 봉건 지배자측에서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그들은 천주교의 신앙 체계를 조선왕조의 전통적 고유질서를 파괴하는 이단으로 지목하고 주자학적 봉건 이데올로기의 수호라는 정치적 동기를 수반하는 위정척사의 논리로 이를 극복하려 하였다. 봉건 지배층에 의한 여러 차례의 천주교 탄압은 그들이 이단문화로서의 종교를 봉건체제의 정치적·윤리적 정통성에 대한 엄중한 도전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사실 조선사회에 급속하게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는 당시 서해안을 분주히 배회하면서 조선왕조에 강압적으로 무역통상을 요구하고 있던 무장 이양선과 함께, 봉건 지배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지배체제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대원군이 집권한 것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외척의 60년 세도정치로 왕권이 극도로 약화되어 모든 국가권력은 안동 김씨 일족이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한때 외척 풍양 조씨가 다수 요직에 등용되어 안동 김씨와의 연합 세도정치체제가 형성되기도 했으나 김좌근 등에 의해 밀려났고, 철종 때는 김문근(金汶根)이 정사에 참여하고 이때부터 김병학(金炳學) 형제가 정치에 나섰다. 척신들의 세도정치는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민중들의 봉기와 당쟁에서 패배하여 중앙권력에서 밀려난 비특권 양반층의 불평을 억압하고 유약한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형태였다. 그러나 척족의 대가족이 연합해서 정무를 섭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패와 무능이 쌓이고, 게다가 집권의 장기화는 척족 내부의 반목을 싹트게 했으니, 김좌근·김병기(金炳冀) 부자와 김문근·김병국 숙질 사이의 불화설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척당 지배체제의 동요는 왕실의 공자를 옹립해서 정권을 탈취하려는 모반사건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행정능력의 저하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어 지방행정관료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지배계층 스스로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령자의 출현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대원군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1860년대 조선의 역사적 조건은, 봉건왕조의 제모순이 그 말기적 현상을 나타내어 왕조지배체제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정치적으로는 외척벌열(外戚閥閱)에 의한 장기간의 세도정치로 왕권이 극도로 약화되어 왕은 허위(虚位)를 보전할 뿐이었고, 중앙집권력의 약화는 지방관료의 기강을 문란케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탐관오리에 의한 수탈은 갈수록 가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패관리의 비리가 날뛰는 정치상황은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새로운 계급의 정상적인 성장을 저해하였을 뿐 아니라, 환곡을 농간하고 대동미포전을 횡령하여 국가 재정을 파탄의 지경으로 빠뜨렸다. 이와 같은 가렴주구는 급기야 임술민란이라는 광범한 농민들의 봉기를 촉발하게 되었는데, 이 민란의 수습대책을 둘러싸고 봉건 지배층 내부에서 분열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음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이러한 국내적 위기에 덧붙여 19세기 조선왕조는 밖으로부터의 새로운 도전에 부딪치게 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천주교라는 서양의 이단종교가 그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와 표리 관계를 가진 구미열강의 식민지 분할을 목적으로 한 무력침략의 위협이었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위기에 직면한 봉건 지배자들은 안으로는 민중들의 개혁의지를 억압하고, 또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천주교를 금지탄압하며, 다른 한편 국외로 부터의 통상무역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쇠퇴하는 왕조체제를 보호하는 것만이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로 알고 있었다.
대원군의 집권이 1862년의 삼남지방의 대규모 농민봉기의 직후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왕조체제를 재편성 재정비하라는 요구가 이 시기 봉건 지배층의 일치된 소망이었고, 대원군의 집권은 이러한 지배층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2) 대원군정권의 권력구조
앞에서 보았듯이,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것은 봉건 왕조체제의 멸망을 저지하려는 지배층의 절실한 요망에 부응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대원군은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봉건 지배층으로부터 암묵적으로 위임받은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원군정권은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보다 더 한층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또다른 형태의 세도정권이었다.
그러면 대원군정권의 권력구조는 어떠했는가. 즉 이 정권의 형성과정과 주체세력이 어떤 계층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대원군정권의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최근 년간 일본 학계에서 발표된 다음 4편의 논문이 주목된다.
梶村秀樹, 「朝鮮近代史の若干の問題」, 『歷史學硏究』288 호(1964).
渡部學, 『朝鮮近代史』(東京:勁草書房, 1968).
藤間生大, 「大院君政權の歷史的意義」, 『歷史評論』254, 255호.
安秉珆, 『朝鮮近代經濟史硏究』(東京:日本評論社, 1975).
梶村은 “대원군정권은 外壓의 危機에 대응하기 위해 王朝權力을 강화하고 郡縣領域社會를 지배하는 封建貴族의 권력에 제한을 가한 정권이다. 대원군정권의 실체는 南人·北人系의 非特權的 封建貴族과 吏族層·常民層에 의해서 構成되었고, 都市 非特權商人層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광범한 農民·小商品生產者층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前進的 努力이었다. 따라서 大院君政權은 絕對王政에 유사한 諸特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藤間生大는 대원군정권과 朴珪壽와의 관계를 강조하고, “王權强化主張者인 朴珪壽가 그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手段으로 대원군과 제휴했다”면서 “대원군정권이 장악한 階層은 在地商人層·富農兼在地地主層·下級吏族層과 港口와 市場의 運輸業者·大商人·手工業者·行商·褓負商이다”라고 말하고 결론적으로 “대원군정권의 성립은 朝鮮民族 各界各層의 힘의 結集의 成果였다”고 했다. 安秉珆 또한 “대원군은 불우한 在野時節에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교제했기 때문에 집권을 하자 特異한 人脈을 만들었다. 이것은 종래의 貴族들이 형성하는 血緣姻婭를 核으로 하는 人脈과는 달랐다. 이것이 대원군을 지지하는 政治勢力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대원군의 권력구조에 관한 평가는 최근 몇년간 한국사 연구에서 이룩한 조선 후기사회의 내재적 역사 발전론에 입각한 자본주의 맹아논쟁의 연구성과를 수용해서 얻어낸 학설인 듯하다. 그러나 구체적 史料의 제시없이 조선조 후기사회의 社會階層을 자의적으로 분류해서 대원군정권이 마치 일부 봉건왕조의 귀족적 지배군 이외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정권으로 단정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章은 이에 대한 筆者의 견해다.
1863년 12월 3일 재위 13년에 후사도 없이 철종이 죽자 궁중 제일의 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는 그 날로 영중추부사 정원용을 원상(院相)으로 삼아, 시원임(時原任) 대신을 중희당(重熙堂)에 모아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으로 하여금 익종대왕(翼宗大王)의 대통을 입승토록 하라”는 교지를 내리고 봉영(奉迎)대신으로 영의정 김좌근을 임명하여 입궐토록 하였다. 이리하여 그해 12월 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고종의 즉위식을 갖고 대왕대비가 희정당에서 수렴청정의 의례를 거행함으로써, 정권은 대왕대비 조씨의 장중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60년간이나 국권을 천단하던 외척 안동 김씨 일문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그들은 대왕대비가 발의한 고종의 왕위계승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으나, 국왕에 대원군의 칭호를 가진 생부가 있었던 사례는 일찌기 왕조사에 없었던 일임을 내세워 흥선대원군의 정치 간여에 대한 예방적 반발을 했다. 이것은 대왕대비가 대원군에 대한 대신들의 예우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하문하자, 김좌근과 김홍근 등이 “내조(內朝)와 외조(外朝)의 구별이 엄격히 있는 터이요, 따라서 대신과 대원군은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면서 대원군의 정치 간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나섰던 사실과,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즉시 강진 신지도(康津薪智島)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벌을 받고 있던 종친 이세보(李世輔)를 석방하려고 했을 때, 승정원·홍문관·대사헌·대사간 그리고 시원임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선 사건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대왕대비가 정권은 잡았으나 아직도 조정에는 철종조의 안동 김씨 외척벌열들이 건재하고 있었으니, 이 막강한 안동 김씨세력을 억제할 자기세력의 구축이 시급했다. 대왕대비의 친정 풍양 조씨는 철종치세 중에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서 영락했고 친정 조카인 조성하(趙成夏)·조영하(趙寧夏) 형제가 있었으나, 척신으로서 세도의 지위를 감당하기엔 나이도 경륜도 부족했다. 이 일을 맡을 사람은 대원군이었던 것이다. 대왕대비는 고종 3년까지 수렴청정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크고 작은 모든 정사는 처음부터 대원군에게 위임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의 동맹으로 새정치가 시작되었다.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안동 김씨 일족은 불리하게 전개되려는 정국을 저희들 쪽으로 돌리려 했으나, 안동 김씨세도의 중심인물로서 김좌근·김병기 부자와 쌍벽을 이루었던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대원군쪽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이미 옛날과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대원군은 그의 정치권력을 확고하게 굳히는 조치로, 첫째 중앙관제를 개변(改變)하고, 둘째 새로운 관료를 발탁하여 구관료와 교체하고, 세째 경외서리(京外胥吏)를 포섭하고, 네째 선파인(璿派人) 중심의 병권장악을 추진하였다.
중앙관제의 개변은 비변사(備邊司)를 없애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철종조까지 비변사는 외척세력의 실질적 근거지였기 때문에, 비변사의 기능을 제한하고 왕조 초기처럼 의정부와 육조의 기능을 복고시키려는 대원군의 의도는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고종 1년 1월 10일 “의정부와 비변사가 다 같이 묘당(廟堂)이라 칭하면서 문부(文簿)는 비변사에서만 거행하고 있으니, 지금부터는 각자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대왕대비의 명령이 내렸을 때, 조두순은 즉각 “옛날 최명길이 비변사 설시 후에 의정부가 할 일이 없어졌다고 상소한 적이 있는데, 지금 이 교령은 지당하고 지당하다”고 찬성한데 반해, 김좌근은 “수백년 해왔던 일”이라면서 선뜻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잠정적으로 본사정부 분장절목(本司政府分掌節目)에 의해 정사를 비변사와 의정부에서 분할해서 집행하는 조치를 하는 것으로 그쳤다. 아직도 대원군은 국정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원군은 종친 이응하(李應夏)를 암행어사로 의주에 특파하여 전(前)부윤 심이택(沈履澤)의 부정을 고발케하고 한편, 그의 아비 심의면(沈宜冕)을 불경죄로 탄핵처벌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외척 안동 김씨의 영수인 김좌근에 대한 정략적 위협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건 직후에 김좌근이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그리고 고종 2년 3월 28일에는 비변사도 없어졌다. 이것은 1년이나 끌어온 비변사와 의정부의 양립상태를 타파하고 의정부가 국정 최고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일이었고, 이로써 철종조의 잔존세력은 그 거점을 잃게 된 셈이었다.
대원군정권의 저해분자로서 외척 안동 김씨의 중추인 김좌근·김병기·김홍근 등이 물러나자, 김병학·김병국 형제를 위시한 안동 김씨세력은 대원군과 쉽게 제휴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대왕대비의 친정 풍양 조씨(豊壤趙氏)와 김좌근의 후임으로 영의정에 제수된 조두순 일문의 양주 조씨(楊州趙氏)와 원상을 지낸 정원용 일문의 동래 정씨(東萊鄭氏) 가운데서 중앙관료의 핵심 인물을 유임시키거나 발탁·기용하여, 새 정부의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대원군정부의 고위관료는 종래 세도정치의 중심씨족인 안동 김씨와 조선왕조의 역대 지배적 권력층이었던 명문 양반 씨족으로 재편성되었던 것이다. 흔히 대원군의 인사정책을 “사색당파를 초월하고 지방차별을 타파하여, 유능한 인재를 기회균등의 방침아래 적재적소에 등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상(班常)과 귀천을 불문하고 평민과 아전까지도 기용하였다고 하지만 실상과는 다르다.
사색당파를 무시하고 남인과 북인을 고루 기용했다는 예로, 남인계의 유후조(柳厚祚)·한계원(韓啓源)·조성교(趙性敎)와 북인계의 임백경(任百經)·강로(姜㳣)·김세호(金世鎬) 등의 등용을 들고 있으나, 이것은 노론 전성시대에도 계속되어 온 극히 사소한 배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 지방차별을 타파했다고 하지만 개성지방의 민심수렴을 위해 고려 왕실의 후예인 왕정양(王庭楊)·왕성협(王性協) 부자를 특채하였을 뿐, 그 밖의 어떠한 서북인을 실직에 등용한 사실도 없었다. 그리고 반상과 귀천을 불문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탁했다는 예로 경성(鏡城)의 소교(小校) 마행일(馬行一)이 일약 경성부사가 된 것을 그 예로 내세우지만, 이러한 예외적 조치는 전제군주들의 상식을 벗어난 기행일 뿐, 이것만으로 정책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대원군의 인사정책은 장기간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남북인에게 몇몇 요직을 안배하고 지방유생에게도 정치참여의 기회를 균등하게 베푸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려 했지만, 이로 인해 등용된 관료는 극히 제한된 소수이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왕실과 왕실의 외척세력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는 전통적 조선왕조의 인사정책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조선왕조 후기(순조·헌종·철종·대원군 집정기·고종 11년 이후)의 문과합격자 인원수를 성씨별로 비교한 〈표 1〉로서도 알 수 있다. 언제나 최다 합격자를 배출한 씨족은 전주 이씨였으며, 그 다음 순위는 재위중인 왕의 외족 또는 처족, 그리고 왕실과 혼인관계에 있는 특정 씨족이 차지하고 있다. 그 순위의 변동은 약간 있으나 안동 김씨, 남양 홍씨, 반남 박씨, 청주 한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 여흥 민씨, 풍양 조씨 등이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성씨들은 조선 후기 이래의 왕비와 부마(駙馬)들의 성씨와 일치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전주 이씨를 정점으로 한 왕실의 외척과 인척이 지배하는 국가였고, 이 점에 있어서는 대원군이 집권한 다음에도 추호의 변동이 있을 수 없었다. 변화한 것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외척 안동 김씨 때문에 그동안 위축되어 있었던 종친 선파인(璿派人)이 중앙권력에 복귀한 사실이다.
〈표 1〉 조선 후기 시대별 문과합격자 성씨별 인원비교
순 조
헌 종
철 종
대원군집정기 (고종원년~10년)
전주 이 (63)
전주 이 (29)
전주 이 (25)
전주 이 (58)
안동 김 (35)
안동 김 (12)안동 권 (12)
안동 김 (21)
풍양 조 (13)
남양 홍 (30)
풍양 조 (11)
남양 홍 (11)
청주 한 (11)
남양 홍 (14) 진주 강 (14
남양 홍 (12)
안동 최 (12)
수원 백 (12)
반남 박 (29)대구 서 (29)
청송 심 (10)
한산 이 (10)
연안 김 (10)
진주 강 (10
풍양 조 (13)
안동 김 (11)
파평 윤 (11)
경주 김 (27)청주 한 (27)
대구 서 (8)
동래 정 (8)
의령 남 (8)
밀양 박 (3)
반남 박 (12)
청주 한 (12
청주 한 (10)
안동 최 (25)연안 김 (25)
파평 윤 (7)
반남 박 (7)
청풍 김 (7)
풍산 임 (7)
동래 정 (11)
연안 김 (9)
파평 윤 (23)
나주 임 (6)
여주 이 (6)
해평 윤 (6)
연안 이 (10)
밀양 박 (10)
대 구 서 (10)
여흥 민 (8) 반남 박(8)
풍양 조 (22)
여흥 민 (5)
전의 이 (5)
연안 이 (5)
은진 송 (5)
평산 신 (5)
진보 이 (5)
파평 윤 (9)
순흥 안 (9)
청송 심 (7)
평산 신 (7)
연안 김 (21)
수원 백 (4)
광산 김 (4)
나주 이 (4)
고령 신 (4)
광주 이 (4)
경주 김 (4)
안동 최 (8)
한산 이 (8)
양주 조 (8)
광산 김 (8)
연안 김 (8
경주 김 (6)
청풍 김 (6)
진주 강 (6)
조선왕조의 지배계층 가운데, 왕실 종친이 법전적 신분에 있어서나 현실적 직위로나 경제적 특권을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순조 이래로 유충암우한 왕이 잇달아 그 보호세력으로서의 외척세도가 국권을 농단하였기 때문에 몹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제 대원군이 집권함에 따라서 종친들은 잃었던 기운을 되찾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종부시 (宗簿寺)를 종친부(宗親府)에 통합하여 종친부의 권위를 높이고, 조선 중기 이래 각종 정변에 연루되어 피주(被誅)되었거나 죄적(罪籍)에 기록된 모든 왕실 종친들을 재심사해서 신설(伸雪)·복작(復爵)하고, 동시에 멸손 된 집은 계후(繼後)하여 시호를 내리기도 하고 더러는 역대 묘정(廟庭)에 배향했다. 그리고 종친들의 왕궁출입을 자유롭게 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자손을 특별히 등용했다. “모두 한 조상, 같은 혈맥인데 각 파의 항열(行列)자가 다르니 응(應)자(대원군 자신의 항열자) 항열부터는 반드시 동일하게 개명토록” 종친부와 이조(吏曹)에 분부까지 했다. 선원보 간행 때에는 “전주 이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붙어서 향곡의 천민까지도 선원보에 끼어 들었다”한다. 대원군은 또 선파유생응제(璿派儒生應製) 應製란 王의 명령에 의해서 詩·賦·表 등 글을 짓는 科擧의 一種인데, 일정한 格式에 얽매이지 않고 特定人에게만 應試資格이 부여되었다. 대원군은 초기 집정 10년간 종친 선파의 유생과 무사에게만 特定해서, 매년 이 科擧를 설시했다. 다음 表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체로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 全文科合格者 14,620명 가운데 全州李氏 登科者數는 845명으로 전체 及第者數의 6%인데 비해, 대원군 집정기엔 무려 13%라는 높은 比率을 나타내고 있다.
〈표〉문과급제자 중 全州李氏급제자 비율
구분
전체 급제자
전주 이씨
백분비
조선 全時期
14,620(人)
845(人)
6(%)
純祖
1,049
63
6
憲宗
455
29
6
哲宗
471
25
5
高宗 1년~高宗10년(대원군 집정기)
424
58
13
高宗 11년~高宗 31년
1,341
66
4
(『國朝傍目』으로 작성)
닫기와 종친부종과(宗親府宗科)라는 종친 선파인에게만 실시하는 변칙적인 과거제도를 운영함으로써, 부패 타락한 양반 지배층의 신분적 출세놀음이 된 과거제도의 부조리를 광정하기는 커녕, 종래 종친의 정권참여를 제한해 온 구법마저 깨뜨리면서 다수의 일가친족을 특별히 등용하여 이씨 왕조의 재건을 정력적으로 획책하였다. 이같은 수법으로 종친 선파 중심의 권력을 구축하여, 대원군은 “종친부의 화수연에 모인 6~7만의 참석자를 보고, 내가 국가를 위해 10만 정병을 얻었다”고 기뻐했다.
대원군은 큰집 조카인 이재원(李載元)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임명하여 왕의 교육을 맡기고, 호조판서에는 종정경(宗正卿) 이돈영(李敦榮)을 특채하고, 아울러 숙부인 이도중(李導重)을 호조참외로 발탁하여 국가 전반의 경제재정을 종친인으로 장악하였다. 이와 함께 이경순(李景純)을 배왕대장 겸 좌포장(陪往大將兼左捕將)으로 기용하여 왕의 경호를 담당케 하고, 이경하(李景夏)를 총융사(總戎使)에, 이규철(李圭澈)을 병조판서에, 이주철(李周喆)을 금위대장(禁衛大將)에 각각 배치하고, 강화유수에 이인기(李寅夔), 개성유수에 이승보(李承輔)를 임명함으로써, 궁성과 수도 그리고 경기 일원의 모든 병권도 선파인으로 장악하였다. 그런 다음 북병사(北兵使)에 이남식(李南軾), 의주부윤에 이건필(李建弼), 황해병마절도사에 이종승(李鍾承), 충청병마절도사에 이동현(李東鉉), 전라좌수사에 이주응(李周膺), 전라우수사에 이중영(李重榮) 등 선파인을 배속시켜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다.
대원군정권의 군사력의 핵심은 선파 중에서도 대대로 무관집으로 이름있는 무림군(茂林君)파에서 이규철·이종무(李鍾武) 부자를, 효령대군(孝寧大君)파에서 이경순·이봉의(李鳳儀) 부자를, 계성군(桂成君)파에서 이남식·이장렴(李章濂) 부자를, 덕양군(德陽君)파에서 이주철을, 광평대군(廣坪大君)파에서 이경하를 발탁하고, 조선왕조의 전통 무신가의 후예인 신헌(申櫶)·임태영(任泰瑛)·허계(許棨)·이현직(李顯稷)·임상준(任商準)을 기용하여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독재적 권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조선왕조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도고(都賈) 사상인(私商人)층이나 서민지주 또는 부농층이 성장하고는 있었으나 아직도 정치에 개입할 만큼 성장해 있지는 못하였고, 또한 몰락양반과 서얼 출신의 지식인과 중인계층에서 애국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사상이 배태는 했으나 민족적 과제를 담당할 만한 정치역량은 없었다. 더구나 가난한 농민들은 그들의 생존권적 절박성 때문에 격렬한 반란으로 봉건적 착취에 저항하고는 있었으나, 그들도 강력하게 통일된 전국적인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지배자를 타도하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사상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봉건 지배층은 그들의 물질적 기초인 봉건 왕조체제의 옹호를 위해 강력한 통치자를 필요로 했고 대원군이 이 계급적 임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대원군 권력은 종래의 어느 왕조보다도 보수적이며 군사적·폭력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이것은 당시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이 한층 폭력적 양상을 띠면서 확대되고 있는 것과 대응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대원군정권은 이러한 봉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종래의 외척 세도와는 다른 선파 종친을 중심으로 재조직 한, 보다 독재적이고 군사적인 새로운 세도정권이었다.
3) 정치:폭력 수탈정책
새 집권자 대원군이 처리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임술민란의 사후 수습이었다. 그것은 민란의 발생 원인을 찾고, 농민들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알아서 폐정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진주민란 때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는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민란에 가담한 자들이 호소하는 억울한 일이란 삼정의 문란일 뿐이다. 그 중에서도 환향(還餉)의 폐단이 가장 우심한데, 이것은 한 고을 한 지방의 우환이 아니라 가히 전국적 현상이니 크게 근심되는 바이다”라고 했다. 같은 시기의 영남선무사(嶺南宣撫使) 이삼현(李參鉉)도 “각 고을의 난민들이 호소하는 문제가 모두 전결세(田結稅)를 터무니없이 거두는 일과 환자의 기록을 속이는 일과 군역(軍役)을 거듭 지게하는 일일 뿐이나, 이것은 일조일석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농민들이 처해 있었던 상황은 임술민란에서 제기한 삼정의 폐단이 개혁되지 않는 한, 민란은 언제 어디서나 사소한 촉매적 자극만 있어도 재봉기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가렴주구에 허덕이는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근본적 개혁은 외면한 채 집권하자 마자 즉시 고갈된 국고를 채우기 위해 각 지방 수령들을 들볶기 시작했다.
이때 영의정 김좌근이 “지금 보건데 백가지 법도가 해이하여 수습할 길이 없으나 양전(量田)을 한 번 시행한다면 얼마간의 효과를 볼 것이라”고 장계를 올렸다. 철종 때 정권을 농단하던 시기에 태만히 했던 일을 대원군에게 제소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나, 양전을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시행해야 한다고 일깨운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맞서 조두순은 “이서배(吏胥辈)의 작간을 징치하고 감사와 수령을 엄벌로 몰아 세우면서, 미납된 대동미포전(大同米布錢)을 독려 수납케 하는 방침”을 제시했다.
대원군은 이 두 가지 정책안 가운데서 조두순의 제안을 채택했다. 그는 토지정책의 중요성은 외면한 채 “현재 각도에서 대동미포전을 미납한 액수가 거의 1년간의 총 세액수와 맞먹으니, 이것은 법과 명령이 시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각 지방수령은 지난해 미납된 것과 금년도 것을 남김없이 2개월 기한 안에 바치도록 할 것이며, 만약 다 수납치 못 할 경우에는 파면한 다음 체포할 것이다”라는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각 지방의 대동미포전의 미납자 또는 횡령자 가운데서 그 액수가 많은 자는 군민을 모아 효수형에 처하고 액수가 적은 자는 유배형에 처하는 엄벌정책으로 수세를 독려했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다 못해 봉기한 임술민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로 인해 농촌경제는 극도로 피폐하였으므로, 일정 기간 농민들의 각종 세정상 부담을 경감하여서 그들의 생활을 보호 안정케 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고종 2년부터 경복궁 중건이란 대토목공사를 시작했다. 경복궁 중수는 임진왜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숙원 사업이었으나, 당시 나라 사정으로는 힘겨운 일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공사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감히 이 공사를 중지시키는 발언은 하지 못했다. 국가 재정은 처음부터 고갈상태였고 따라서 이 공사에 필요한 자금은 오로지 백성들로부터 긁어 모으는 방법밖엔 없었다.
대원군은 이 무모한 대공사를 추진하기 위해 일종의 사기극을 연출했다. 의정부 건물을 수리할 때 발견한 청석합(靑石盒)에 “경복궁을 새로 지어 보좌를 이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신왕도 자손이 끊어질 것이다”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경복궁 중건사업을 반대할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협박이었다. 이리 하여 경복궁 중건사업은 하늘의 뜻이요, 만 백성이 원하는 바이라면서 전국의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부호민에게는 원납전을 부가하였다.
경복궁 중건의 공사비는 고종 5년 8월까지 대왕대비가 내놓은 내탕금 11만냥을 합쳐 거의 800만냥이란 거대한 원납전을 투입했으나, 이것으로도 부족했다. 대원군은 원납전이 잘 걷히지 않자, 고종 5년 10월 호조에 5부(部) 8도(道) 4도(都)의 대소민과 진신가(搢紳家) 반호(班戶) 낭속(廊屬) 등 신역을 면제받고 있는 15세 이상의 전 백성에 대하여 1인당 당백전(當百錢) 1닢씩을 원납전으로 받아 들이되 다음 달 말일까지 도감에 직납하도록 분부하였으나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그래서 그 이듬해 7월에 이 대원위(大院位) 분부를 영건도감에서 직접 재차 발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납속자(納粟者)를 보관(補官)하던 고사에 따라, 1만냥 이상을 원납한 자들에게 수령 또는 육품직을 제수하는 포상제도를 마련하여 공공연히 매관매직을 하였다. 이와 같은 원납전의 다액 헌납자에 대한 관직의 제수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원군이 표방한 왕조의 기강확립과도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수입의 증대를 위한 방편으로 함부로 관직을 팔아 넘김으로써, 그가 궁극적으로 수호하려고 한 왕조체제를 허물어뜨리는 모순된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납전은 그 시작부터 나라의 어느 법전에도 없는 백성에 대한 자의적 수탈로서, 대원군정권이 만들어낸 신종 세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표 3〉 원납전 납부에 대한 포상자명단
이름
전직(前職)
금액(단위 :兩)
신관직
비고
안시혁(安時赫)
전현감(前縣監)
100,000
수령(守令)
안홍덕(安鴻悳)
출신(出身)
〃
〃
정언술(鄭彦述)
전현감
〃
〃
전주(全州)
이승검(李承儉)
출신
30,000
초사조용(初仕調用)
박영주(朴永胄)
참봉(參奉)
〃
6품직조용(調用)
함흥(咸興)
김상홍(金相洪)
진사(進士)
〃
초사조용
태인(泰仁)
김정실(金鼎實)
충장장(忠壯將)
〃
수령
송도(松都)
김영필(金永弼)
〃
상당직(相當職)
화순
이도응(李度膺)
20,500
오위장(五衛將)
백목전시민(白木廛市民)
조윤현(趙胤顯)
오위장(五衛將)
20,000
수령
안정국(安貞國)
유학(幼學)
〃
초사조용
함흥
윤동민(尹東敏)
전현감
〃
수령
이원(利原)
유도(柳燾)
진사
15,000
초사조용
무주(茂朱)
김재묵(金在默)
오위장
14,300
수령
이원
천치관(千致寬)
유학
13,100
초사조용
양산(梁山)
편기진(片沂珍)
전중군(前中軍)
12,000
수령
금산(金山)
박상묵(朴尙默)
진사
11,500
초사조용
재령(載寧)
김규엽(金奎燁)
〃
11,500
〃
백락선(白樂善)
오위장
수령
부자간
백남승(白南升)
감목관(監牧官)
11,300
오위장
방효함(方孝涵)
오위장
11,000
수령
박양진(朴陽鎭)
10,690
상당직
진주(晋州)
황의연(黃義淵)
유학
10,690
초사
전주(全州)
한영조(韓永祖)
전정관(前正官)
10,000
참의(參議)
서산(瑞山)
임재식(林在植)
진사
〃
〃
해주(海州)
김순봉(金順鳳)
유학
〃
초사조용
함흥
유임(柳恁)
오위장
〃
수령
전주
안시윤(安時潤)
〃
〃
수령
최우형(崔禹亨)
출신
〃
초사
김문락(金文洛)
오위장
〃
수령
함흥
김기형(金箕亨)
〃
〃
〃
함열(咸悅)
김인득(金仁得)
〃
오위장
만리현(萬里峴)
이의익(李義益)
오위장(五衛將)
10,000
수령
김한웅(金漢雄)
현감
〃
〃
안변(安邊)
김수찬(金守纘)
생원
〃
초사조용
전주
조경렴(趙景濂)
유학
〃
〃
함흥
김경희(金敬熙)
진사
〃
〃
회인(懷仁)
김노익(金魯益)
출신
〃
〃
김해(金海)
동극량(董克亮)
유학
〃
〃
명천(明川)
설병주(薛秉周)
전현령
〃
수령
송도
임유하(林有夏)
유학
〃
초사(初仕)
〃
김진수(金震銖)
진사
〃
〃
순흥(順興)
박종의(朴宗義)
참봉
〃
6품직
홍원(洪原)
김동교(金東敎)
진사
〃
초사
옥천(沃川)
안효직(安孝稷)
유학
〃
〃
안성(安城)
한상이(韓相履)
유학
〃
〃
상주(尙州)
한은주(韓殷周)
첨사(僉使)
〃
수령
대구(大邱)
김국민(金國民)
오위장
〃
〃
철산(鐵山)
김상락(金尙洛)
첨사
〃
〃
홍원(洪原)
김이건(金履健)
〃
〃
오위장
대구
백동한(白東翰)
〃
〃
수령
전주
조진구(曺鎭九)
전 부사과(副司果)
〃
6품직
금산(金山) 형제
조진억(曺鎭億)
참봉
24,000
(『日省錄』, 高宗編 병인년 10월 1일조에서 발췌)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토목 공사가 진행중인 고종 3년에 왕비의 가례(嘉禮)가 있게 되어 왕실의 경용은 늘어났는데, 이때 설상가상으로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삼남으로부터의 세곡선의 뱃길이 막히는 바람에 쌀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호조정랑(戶曹正郎) 임면수(林冕洙)를 공금 8천냥과 무명 9동(同)을 범용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고 쌀값의 폭등과 재정적 불안의 책임을 호조 정랑에게 전가함으로써 흉흉한 민심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바닥난 재정을 메울 길은 없었다.
대원군은 고종 3년 11월에 당백전(當百錢)이란 고액 악화(惡貨)를 주조하여서 재정적 위기를 넘기려고 했다. 호조의 전관하에 금위영(禁衛營)에서 찍어내기 시작한 당백전은 그 이듬해 주조를 중지할 때까지 약 6개월간 무려 1,600만냥이란 거액이 발행되었다. 정부에서는 “모든 거래에 신구 화폐를 고루 유통시키기 위해 각 아문과 각 고을의 공납전은 신전 2/3와 구전 1/3의 비례로 혼합해서 수납토록”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이 당백전으로 전쟁 때문에 파괴된 강화부와 근기연안의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위시한 각 진해와 성첩을 수리하고 무기를 보충케 하고, 한편으로는 영남에 60만냥, 호남에 48만냥, 호서에 30만냥, 해서에 12만냥을 내려보내어 이 돈으로 곡식을 매입하였다. 백성들은 당백전의 일상적 사용을 기피하고 옛 엽전만 좋아하니, 재정유통의 질서는 무너지고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원군은 상인들을 불러서 당백전 사용을 백방으로 효유하고, 또 호조에 “경외의 각사 각영의 공납금은 당백전으로 받고 모든 화폐거래시에 1냥 이내는 엽전으로 유통하고 1냥 이상은 꼭 당백전을 사용토록” 분부했으나, 백성들로부터 그 사용이 거부되고 있는 당백전이 이러한 강제적인 명령으로 쉽게 유통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목가치가 실질가치의 20배나 되는 당백전의 유통이 백성들로부터 외면되자, 그 대안으로 중국을 내왕하는 역관과 상인들을 통해 청전(淸錢)을 밀수입해서 급증하는 재정적 수요를 메꾸려 했으나, 이 청전 또한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1/2 내지 1/3에 불과한 악화였으므로, 유통시장에서 상평통보가 자취를 감추는 등 악성 인플레이션 현상을 일으켜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파탄으로 몰아갔다.
대원군에게 남은 길이라고는 세금을 강력하게 거두어 들이는 일밖에 없었다. 고종 4년 2월에는 훈련도감(訓練都監)·금위영·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에 서울의 각 성문(城門)의 통행세를 수취하도록 허락해 주고, 이 세전으로 각 군영의 군수에 보용하도록 하였다. 당시 서울 5부의 호구수는 45,646호에 인구는 20만 정도였다. 이 성중 인구의 일상생활은 성문을 통과해서 반입되는 각종 물화와 곡식에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하루를 지탱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문통행세의 신설징수는 서울의 물가를 상승시키는 또다른 원인이었고, 도성인과 성외농민 그리고 상인들에게는 또다른 수탈이었다. 이 성문통행세는 고종 10년 10월 까지 계속되다가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다음에야 철폐되었다.
고종 8년에 미국함대가 강화에 침입하여 분탕질을 하고 퇴거했다. 이때 정부에서는 “옛날 임진왜란 후에 훈련도감을 창설하면서 전결에 세외로 삼수미(三手米)를 부과한 사례를 본따서, 6도의 수조도 총70만결에다 매결 1두미를 첨배하여 심도 포량미(沁都砲糧米)라고 이름하고, 매년 5만석을 거두어 해방(海防)의 요충인 강화를 보장하기 위한 군비로 삼을 것이다. 1결에 1두씩 가렴하는 것은 실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이나 같다”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 심도 포량미는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강화 교동(喬洞)·영종(永宗)·풍덕(豊德)·통진(通律) 등 각 요새의 군비와 포군(砲軍)을 양성하는 재원이 되었으나, 1결에 1두의 십시일반격인 사소한 이 세액도 당시 40여 종목의 각종 수세조항에 또다른 세목이 첨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더이상 견딜 수 없는 가렴주구였다.
국가의 재용(財用)은 백성의 출세(出稅)가 그 원천이며 수세의 기본 대상은 토지였다. 따라서 국고수입을 증대시키는 방법은 전지의 은결(隱結)을 밝히고 면세결(免稅結)을 감소시켜서 조세의 대상이 되는 출세실결수(出稅實結數)를 일정량 늘리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래의 〈표 4〉로서도 알 수 있듯이, 철종 때의 출세 실결수(出稅實結數)·급재 면세결(給災免稅結)·제반 면세실결수(諸般免稅實結數)와 대원군 집정기의 수치 사이에 큰 변동이 없다. 고종 5, 6년 경부터 출세 실결수가 얼마간 증가하고 있는 것은 급재 면세결수의 감소분이 이동한 것에 불과하며, 정작 제반 면세결 또한 약간의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다. 수령이나 이서배의 부정과 작간으로 급재 면세결이 늘어나는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가뭄이나 홍수가 거의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던 당시에 급재 면세결의 수치가 급격하게 감소하였다는 것은 대원군정권이 농민들의 재해마저도 인정해 주지 않고 가혹하게 수세하였다는 추정도 낳게 한다.
대원군이 초기 집정기간에 실시한 정책 가운데, 개혁적인 정치로 크게 칭송되고 있는 서원훼철과 호포법 시행도 그의 세원 확대정책이었다는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서원훼철의 경우, 당시 성장하고 있던 지방 유림의 왕권에 대한 도전을 막기 위한 정치적 조치라는 측면이 강하며, 서원의 증가는 곧 막대한 면적의 면세전과 군역기피자의 증가로 국가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준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따라서 대원군의 서원훼철은 서원의 대정부 견제나 항의의 기능을 두려워 하여 이것을 그의 독재적인 정치력 행사의 장애요소로 간주하여 제거하라 했던 것이며, 아울러 서원이 소유한 면세전을 해제하여 전세를 받아내고 막대한 인원의 원노(院奴)에 군역을 지게함으로써 군포를 징수하려는 재정적 이유도 컸던 것이다. 호포법도 대원군이 양반과 상민을 평등하게 하기 위해 실시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있었던 군포제도를 확대 개편해서 세원을 양반층까지 확대하여 수세액을 늘려 보려는 목적으로 시행한 세원 확장정책이었다.
백성들에 대한 대원군정권의 수세정책이 가혹했다는 것은 “토목의 부역을 중지하고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를 금지하라”는 이항로(李恒老)의 병인년 상소문과 “낮이면 탐관오리가 전재(錢財)를 토색하고 밤이면 명화적(明火賊)이 들이닥쳐 노략질을 하므로, 백성들이 견디다 못해 권속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도망간다. 이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이를 방지하려고 하였더니 밤사이 5가가 몽땅 월강 도망했다”는 기정진(奇正鎭)의 상소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대원군정권은 당시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부농·부상들을 보호육성하고 가렴주구에 시달려 유랑민 또는 도적으로 전락하고 있던 소작농·빈농 그리고 영세 상공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개혁정치는 외면한 채, 처음부터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경복궁 중건사업을 벌임으로써 원납과 부역으로 백성들을 억압 착취하는 길로 들어섰다. 설상가상으로 왕비 가례와 프랑스함대의 침입으로 국가재정이 곤란해지자, 악화를 유통시키고 수세(收稅)를 강화함으로써 한층 더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임술민란 이후 한동안 진정된 상태에 있던 농민은 다시 봉기하기 시작했다. 봉건왕조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은 대원군 집권 초부터 있었으나 종래의 민란과는 달리 과격한 양상을 띠고 나타난 것은 고종 5년의 칠원(柒原) 민란과 고종 6년의 광양(光陽) 민란이었다. 광양민란은 지금까지의 농민봉기가 삼정의 혁폐를 목표로 한 것과는 달리 병란적인 성격이 다분히 있는 그런 반봉건적 저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원군정부는 난의 주모자급 6명을 서울까지 압송하여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참형하고, 그밖에 44명을 효수하는 참혹한 탄압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한 탄압에 반발이나 하듯이, 고종 8년에는 영해(寧海)에서 관아를 불사르고 군기를 탈취하며 부사(府使)를 살해하는 격렬한 민란이 또다시 일어났다. 특히 이 민란은 그 행동이 매우 조직적이어서, 과거 본읍인들이 주동한 민란과는 달리 관아습격이 끝나면 재빨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유격전술을 구사하는 병란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원군은 철종 말년의 삼남민란으로 인해 조성된 역사적 조건하에서 정권을 장악한 정치가이기 때문에, 민란의 지혜로운 수습이 그에게 부과된 무엇보다도 긴급한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란에서 제기된 봉건적 모순 특히 농민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정치는 외면한 채 오직 조선왕조의 재건을 위해 백성들을 사역하고 수탈하는 구태의연한 정치를 강화하는 길로 들어섰다. 농민들이 고종 5, 6년 경부터 새로이 항거에 나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때의 봉기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철종 말년의 지방분산적·비조직적 민란이 아니라 타지방과와 연계성까지도 갖춘 한층 더 발전된 형태의 조직적인 민란이었다.
대원군정권은 임술민란의 수습방안을 세워 봉건왕조의 말기적 위기를 개혁하는 근대적인 새 정치를 실시하지 못하고, 농민들의 개혁의지를 탄압하고 괴멸해가는 봉건왕조를 수호하는 정치에만 매달리다가 붕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