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3:4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임진왜란 때 해주를 함락한 왜병 3천 명이 연안(延安)성을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연안부사 이정암이 1백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습니다. 그는 민가에서 짚과 섶나무를 거두어 높이 쌓아 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패하면 불에 타죽겠다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죽을 각오로 3일 밤낮을 싸우니 적이 병력 1천여 명을 잃고 철수해 버렸습니다. 이 대첩 소식에 조정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본인인 이정암이 올린 전투보고서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적이 아무 날 성을 포위하였다가 아무 날 포위를 풀고 떠났다.” 는 말 뿐이었다고 합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표현 욕구의 하나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행동동기의 주요 원인은 이 자기 자랑에 있습니다. 상을 타거나 회장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부모 형제로부터 인정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타고난 생존본능이라 할 것입니다.
자연계를 보면 수컷들이 아름답습니다. 수컷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작의 부채살 꼬리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공작의 꼬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한 자기 과시 요구가 아니라 짝짓기 위한 생존본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꼬리로 암컷 공작을 유혹합니다. 암컷은 그 꼬리가 크고 아름다운 것을 짝으로 선택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외모와 명품에 대한 자랑이 심합니다. 여자들 중에 성형수술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심지어 남자들까지 예뻐지고 싶어 성형 수술을 하는 실정입니다. 요즘 남자들 성형 트렌드는 ‘동안’, 즉 어린 티가 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청소년들의 최대 관심사도 아마 외모일 것입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도무지 나오질 않습니다. 물론 자기 신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 만족과 불만족이 결정되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인생이 됩니다.
명품이나 값비싼 것을 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비똥, 구찌, 샤넬 등 한국은 명품의 천국이고, 이 명품을 구입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짝퉁 명품이라도 들고 다니려 합니다. 저희 때는 나이키 신발이 유행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나이키 고무신 아십니까? 우리 때는 나이키 신발이 유행이어서 나이키 신발을 신은 친구를 모두가 부러워했습니다. 그때 어떤 짓궂은 친구들은 하얀 고무신이나 운동화에 물감으로 물결 모양의 나이키 표시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자동차에 벤츠 문양의 표시를 하고 다니는 차들을 가끔 봅니다. 그 회사의 제품이 아님에도 그 표시를 통해 자신을 차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어서입니다.
인간의 발달 과정을 연구한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에릭슨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우리 자아도 성장하는데 그 단계에 따라 성취해야 할 자아의 과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태어나서 만 한 살 사이에 형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뢰감>이라 하였습니다. 신뢰감이라는 것은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배고프거나, 쉬를 했거나 불편할 때 아기는 사인을 보냅니다. 이 사인에 대해서 엄마가 사랑으로 응대해주면 신뢰감이 형성됩니다. 세상은 믿을만하다는 감정이 곧 신뢰감입니다. 만약 이 단계에서 엄마의 정성어린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면 아기는 세상에 대해서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이 불안을 채우기 위해서 자꾸 확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때 그것은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해 볼 수 있습니다.
“아 이 사람이 지금 사랑받고 싶어하는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기록한 이유는 무슨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가 자기 자랑과 또 시기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지혜에 대한 자랑, 은사에 대한 자랑이 심했습니다. 얼마나 자랑이 심했는지 고린도 전후서에 ‘자랑’이라는 단어가 무려 40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하나님이시며 내게 하나가 있으면 나는 그것을 열이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내게 열의 허물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부풀리는 죄속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회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도에서 선교하던 더프 선교사는 1834년 휴가차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더프는 사람들에게 윌리암 캐리의 성공적인 선교사역에 대해 자주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윌리암 캐리는 더프 선교사를 불러서 이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더프씨, 이젠 저를 자랑하지 말고 캐리의 구주에 대해 말해주시오.”
주님은 우리들이 자랑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려고 성경을 통해 우리들 앞에 믿음의 거인들을 소개합니다. 뛰어난 영적 거인들 앞에 설 때 자랑할 것이 내게 많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 자기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이스라엘의 족속입니다. 그중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수없이 하였고 죽을 뻔 한 고비도 여러 번 맞았습니다. 영적인 능력은 또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도 바울은 환상 가운데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다 왔다고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의 능력이 대단하여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났다고까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사도들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두었으나 그래도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9).
성도들과 비교했을 때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고백했으나 나중엔 사도나 성도가 아니라 죄인들의 위치에 자신을 두었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딤전 1:15).
기드온이란 사사를 보십시오. 미디안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을 때 기드온의 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기드온만 위대해 보이고 겁쟁이를 데려다가 큰 용사로 만드신 위대한 하나님께 드리는 환호도, 찬송도 들리지 않습니다. 300명의 특공대와 함성, 횃불, 깨진 항아리 같은 인간 편에서의 헌신만 보이고 하나님께서 미디안 군인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만든 사실을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된 결론을 내립니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삿8:22).
그러나 기드온은 왕으로 모시겠다는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그러나 이런 기드온의 멋진 고백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속셈이 있었습니다. 주제넘은 속셈, 공로의식으로 가득한 속셈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삿 8:24).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삿 8:27).
기드온이 자신을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겼을 때 위대했고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특별한 사람, 특별한 헌신을 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는 순간부터 내리막길을 걷는 성도요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님만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향해 우리의 가슴을 여는 만큼 그 사랑은 우리 존재 안으로 흘러들어 옵니다. 그 사랑이 내 존재를 채우는 만큼, 꼭 그 만큼 자기 자랑의 유혹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다른 지체들을 주 안에서 자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