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출생
1863년 12월 12일
사망
1944년 1월 23일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다.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하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마지막으로 체념하는 여인으로 보았다.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은 수태를 하는 여성을 뜻한다. 이러한 뭉크의 여성관의 모티브가 되어 나온 작품이 <마돈나>다. <마돈나>는 사랑과 개화라는 주제로 전시되었다.
<마돈나>--1894〜1895년, 캔버스에 유채, 91*70,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마돈나>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옷을 벗은 여자의 허리 아래쪽이 형체도 없이 흐르는 색채 속으로 사라지고 오른쪽 팔은 머리 뒤로 올려져 있고 왼쪽 팔은 허리 뒤로 묶인 것처럼 두르고 있다. 이런 역동적인 자세는 가슴과 복부를 내밀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이 작품 속 모자의 강렬한 색은 풍만한 육체와 자유분방한 머리카락의 곡선과 어울러져 있다. 모자 보다 큰 후광은 까만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어 색의 대비를 주고 있으며 여자는 깨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잠들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자의 신체 각 부분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단순화시켜서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다. 뭉크는 이 그림 속에서 삶과 죽음을 직접 연결하는 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글로 남겼는데 “당신의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고통이 넘칩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삶은 손을 잡고 수천의 죽음과 수천의 삶을 연결하는 고리가 지금도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설명했다.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는 폐결핵으로 죽은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에 뭉크의 생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뭉크에게 죽음은 그의 예술세계의 기본 색조를 이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노르웨이에서 뭉크는 젊은 작가로 주목받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을 감추지 못한다. 뭉크에게 파리 유학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파리에서 뭉크의 예술세계가 명확한 형태로 드러났다. 중요한 작품이 프랑스 유학시기에 그려진다. 베를린에서 개인전이 폐쇄되는 ‘뭉크 스캔들’을 계기로 뭉크는 베를린에서 살게 되면서 그는 파리와 다른 예술세계가 전개된다. 베를린에 머무는 삼 년 동안 뭉크는 생애는 가장 충실한 열매를 맺은 생산적인 시기였다. 동시에 문학적 철학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이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국제적 명성을 얻은 뭉크의 후반기는 병마와 고독으로 점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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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시청과 에드바르드 뭉크)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바이킹의 나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다.
완전한 독립국가로 출발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국민소득이 높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여
북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는 나라중의 하나다.
또한 북극해와 대서양을 길게 마주하고 있어
이 나라는 선천적으로 모험심이 강하고 전통적으로 진취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성질을 타고나 극지와 학술탐험을 운명적으로 받아드리는
개척정신이 투철한 민족이기도 하다.
오슬로시 창립 900주년을 기념하여 1950년 완성된 시청 건물이다.
붉은 벽돌과 두개의 사각기둥 탑이 대칭으로 서 있어
우선 강한 인상을 심어 준다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그림과 벽화들이 있어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며
언제나 개방되여 있어 관람이 가능하다.
수도 오슬로는
국토의 남쪽 덴마크와 마주보는 협만 깊숙한곳에 위치해
지리적 이점이 많아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여 많은 부를 축적해
오늘날 노르웨이의 정치 경제 중심지로 도약한 도시이다.
이곳은 매년 12월 10일
노벨의 숨진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노벨평화상 수상식이 열리는데
최초의 수상자 적십자를 창설한 스위스의 앙리뒤낭을 비롯하여
마틴루터킹 목사.고르바초프. 넬슨 만델라.
그리고 2000년에는 우리나라의
김대중 전대통령이 수상한바 있다.
우리나라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최초로 영광스럽게 노벨상을 받게된 이유는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집중적으로 이바지했다는 점과
IMF 환란을 슬기롭게 극복한점. 냉전상태인 남북관계를 평화 분위기로 조성한점.
그리고 아시아 국가관계를 한층 발전 식혔다는 공로였다.
시청사 내 의원실의 책상과 의자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아주 소박한 것들이여서 검소한 의회정신을
보는 것 같았고 특히 벽에 그려진 독일 나치군이 오슬로 점령하의 고뇌를 표현한
작품들을 대할때는 당시 국민감정을 잘 묘사해 준 것 같아
피지배자의 애환을 엿볼수가 있었다.
오슬로는 조그만 도시지만
거대한 공원같은 행정의 요충지이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실내에서 뒤편 창문으로 보이는 항구의 아름다움이 정말 그림같아
지금까지 머리에서 지워지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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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의 그림
The Dance of Life, 1899-1900, oil on canvas, Nasjonalgalleriet at Oslo.
Woman in Blue (Frau Barth), 1921,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he Murderer on the Lane, 1919, oil on canvas, Munch Museum, Oslo.
The Kiss, 1897, oil on canvas, Munch Museum, Oslo.
Self-Portrait with a Burning Cigarette, 1895,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slo.
Study for Madonna, 1893-94, charcoal on paper, Munch Museum, Oslo.
The Scream, 1893, oil, tempera and pastel on cardboard, National Gallery, Oslo.
The Vampire, National Gallery, Oslo.
Sister Inger, 1884,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slo.
뭉크 /뭉크가 제작한 석판화 〈자화상〉(1895)
에드바르 뭉크(노르웨이어: edvard munch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이다..작품 〈절규〉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고 노르웨이에서는 국민적인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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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생애와 작품 세계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노르웨이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하여 내면 세계를 시각화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작품 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한 전환점을 제기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19세기 말 대두된 자연주의, 인상주의에 대한 역작용으로 상징주의나 아트 누보Art-Nouveau와 일련의 관계를 가지면서 발생되어진 주관주의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고갱, 앵소르, 고흐, 호들러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회화에 있어 극적 테마, 요약된 강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을 통하여 이탈된 회화는 평범한 대상 묘사가 아닌 자유 분망한 자기 표현을 나타낸 점이 주관주의 회화와 공통된다. 뭉크의 작품은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테마로 내면의 자기 표현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으로서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가정으로서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인간 생명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상념에 늘 싸여 있었다. 뭉크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세는 내향적이었으며, <안으로의 응시>의 특징은 줄곧 죽음을 향한 불안에 근거를 두고 존재되어졌다. 이런 속에서 관찰된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주제로 하여 <생명 프리이즈The Frieze of Life> 시리즈를 위시한 많은 작품을 만들 었다.이외의 <절규>를 비롯하여 자화상, 입맞춤, 마돈나, 인간들, 초상화 등의 유화, 판화 작품들을 남겼다. 근년에 이르러 뭉크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다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으로 부터 많은 공감을 강하게 갖게 되는데 이는 생명과 죽음,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과 불안 등이 뭉크의 예술과 공통되는 청년기 특유의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뭉크 예술의 특징적인 것은 모티브의 변화는 약간 있기는 하나, 양식의 변천은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ii) 뭉크의 가정은 19세기 노르웨이에서는 상류 계급에 속하는 존경받는 전통적 전형이었다. 아버지 크리스찬 뭉크Christian Munch는 군의관 이었고, 백부인 페타 안드레 뭉크Peter Andreas Munch는 유명한 역사가로 집안의 자랑이었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남 노르웨이의 로이뎅 근처 엔겔호이크에서 태어났으며, 뭉크가 태어나자 일가는 현재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사를 했다. 뭉크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서 그가 다섯 살인 1868년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불행을 맞게 된다. 국교 신도인 아버지는 하류층을 상대로 한 병원을 개업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성격의 변화를 일으킨 듯 거칠면서도 편벽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어머니 대신 가정을 맡아 돌봐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 나이 14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이런 환경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소년 시절을 경험은 일생 지워지지 않은 속에 비극적인 제재를 중심으로 반복하여 그렸다. 후에 유화, 판화로 제작한 <병든 아이>는 누이 소피에의 모습으로 그녀에 대한 추억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의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지망하여 오슬로 국립 공예학교에 입학한 후 조각가 미테르 트웅과 화가 크리스티나 크록에게 사사하게 된다. 오슬로에서 그는 마네의 뛰어난 기술과 색채를 노르웨이에 전하였다고 하는 크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과 동시,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고독과 우수만이 내재된 속에 죽음만을 생각하던 그는 미술을 통해 생의 전환기를 갖게 되었으며, 1893년 그룹 전람회에 참가 하기로 하는데 중요한 진보의 계기가 된 것은 오슬로의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 파와의 교류로 인한 시대 의식을 민감하게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이다. 보헤미안 파에 대하여 <그들의 무신론, 그러한 두려움을 모르는 태 도는 노르웨이 시민의 녹슨 것 같은 혼에 불안의 그림자를 안겨 주었다. 1880년대 초에 뮌헨에 있던 화가 중 가장 우수하고 의욕적인 젊은 화가들은 파리에 이동하고 있다가 그들도 귀국하여 왔다. 그들은 인상주의나 아나키즘 등 새로운 사상으로 차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정부주의적일 만큼 철저한 개인주의자였으며, 문단에서는 입센Henrik Ibsen, 비요른손Bjornstjerne Bjornson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에밀 졸라(Emile Zola)를 존경하였으며, 졸라의 자연주의에 심취한 크로그가 이끄는 보헤미안과의 접촉을 통해 정신면에서의 진보와 함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9년 프리츠 다우로의 추천으로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하게 되 는데 마네의 안상파에서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되며 피사로, 고호, 고갱, 로트렉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는 <카를 요한 거리의 군악대>, <병든 아이>, <사춘기> 등의 걸작을 남기고 있다.1889부터 1892년까지 파리에 머물게 된 뭉크는 처음에는 아카데믹한 초상화가 레옹 보나 Leon Bonat의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비례, 구도에 대한 기초적인 소묘 기법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고 뭉크의 예민한 감수성은 후에 새로운 예술에 접하면서 인상파,신안상파로부터 공감을 받은 후 나비파,상징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체험을 통한 극기 후에 주관주의적인 작품 해석으로 승화 발전하게 된다. 18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이해 생 클루Saint Cloud로 이사를 하고 이 시기에 <생명 프리이즈> 연작을 구상케 된다. 생 클루에 머물면서 쓴 그의 일기 중에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게질을 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와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단체와의 교류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되며 그 해 오슬로로 돌아와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반자연주의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스캔들을 일으킨다. 인상파나 마네의 작품에 대한 문제성에 대해 귀결도 못보던 당시의 화단은 주관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이 너무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물의로 인해 개인전은 중지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유명해졌으며, 그의 예술을 이해하여 주는 예술가, 시인, 평론가, 콜렉터 등의 주위에서 지지와 호응을 안겨 주었다. 1893년에는 드레스덴, 뮌헨, 베를린, 94년에는 함부르크, 드레스덴, 프랑크 푸르트, 코펜하겐 등 북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전람회를 개최하는 한편 개성적이면서도, 확고한 예술 세계를 위해 정진했다. 1895년은 베블린 시대의 문인들과의 접촉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판화, 유화로 그렸는데 특히 이 시기는 뭉크가 판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동판, 드라이포인트를 시도한 것은 1894년이며, 채색 석판화, 목판화를 시작한 것은 1896년으로서 <병든 아이>, <죽음과 소녀>, <마돈나>, <절규>, <입맞춤>등의 무수한 판화 버전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판화를 회화만큼 중요시 다루었던 그는, 판화의 창의적 시도와 기법 혁신을 유화와의 동질로서 같은 모티브에 대한 재확인 식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에 걸쳐 파리에 있는 동안은 삽화, 무대 장치 등에도 손을 대었으며, 앙데팡당, 아르누보전 참가, 개인전 등을 통해 의욕적인 자세를 보 였다. 1898년부터 1907년까지는 독일,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건강을 위한 요양 생활을 하는 한편, 새로운 작업을 위해 매진하였다. 베를린 분리파 전람회에 <생명 프리이즈> 22점을 출품하고 파리 앙데팡당전에 참가한 것도 이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뒤에는 알콜 중독과 노이로제, 정서적 강박 관념등으로 인해 괴로워 하는 개인적인 모습이 있었는데 그는 이런 문제들로 인해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퇴원을 한 후에는 자연에 대한 친숙함을 표현키 위해 풍경화를 많이 그리기도 했다. 1911년 오슬로 대학 페스티벌 홀의 벽화 콩쿠르에 당선되면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된다. 1912년에는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 대전람회에 세잔, 고호, 고생과 동시에 전시를 갖게 되는 영광을 안으면서 뭉크 예술에 대한 평가는 점점 높아지게 된다. 같은 해 처음으로 미국에서 전시를 갖게 되는데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전에 이어 1913년 유욕 아몰리 쇼와 1922년 취리히 미술관, 1927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 등에서 각각 대회 고전이 열리게 되는 등 국제적으로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는 칸딘스키 등과 함께 퇴폐 예술이란 낙인을 찍히고 나치스에게 작품을 압수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한다. 1944년 1월 23일 나이 80세가 되는 해 사망했다. iii) 뭉크는 사랑과 죽음, 불안, 자화상, 초상화, 판화 등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남기고 있다.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생명 프리이즈>는 인상파 작가들이 다루려는 직관적 감각성과 달리 작가 자신의 의식에 배어있는 내재적 상태를 중요시했으며 인간 내부적인 심성을 나타내려 했다. 1894년 스톡홀름에서, 1895년 베를린에서 전시된 것이 <사랑> 연작으 로서 이 22점의 프리이즈는 사랑의 싹툼, 사랑의 만개, 애락哀落, 생의 불안, 죽음으로 구성된 악장으로 된 연작으로서 이 거대한 테마는 그의 체험적 사고에서 발생된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작품에서의 분위 기는 1880년대의 갈등으로부터 생겼으며, 당시 주류를 이루던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겠는데 이 연작이 그중 가장 대표적 이면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또 뭉크의 작품에서는 사랑, 죽음, 불안 등과 언제나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정신 분열에 의한 두려움의 개인적인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생활 자체를 존재의 사실성으로 복귀시키려는 자아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자화상 시리즈는 삶과 죽음과 싸우는 속에 죽음을 관념으로 확대하여 받아들이려는 자세로서 생을 향한 불안의 극복은 전생애를 통한 자기 완성에의 도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뭉크는 생애를 통해 가장 위대한 초상 화가였으며 항시 그리는 대상은 그 자신이었고 전 인생을 통해 변천 되어진 자아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한 마디로 객관적인 사실성을 초월하여 자신의 내적 혼과 정신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연계적인 그의 자화상은 뭉크 자신의 내면성의 고백, 죽음에 대한 갈등, 대결, 불안 등에 대한 상징으로서 죽음을 수용하려는 모습이 기조가 되고 있다. 복수 예술로서 다원성을 지닌 판화는 뭉크에 있어 회화에 필적하는 것으로 중요시 하였다. 뭉크가 처음으로 판화를 한 것은 1894년 8장의 에칭Etching과 1장의 목판화를 제작한 것부터인데 1896년 파리 시대는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유화의 중요한 작품과 초상화가 판화를 위한 출발점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반대로 유화로 옮겨진 것도 있다. 그는 수많은 시도를 통해 회화 못지 않게 판화 작품을 제작하 였고,판화 기법상으로도 다양한 혁신을 주고 있다. 판종을 여러가지로 병용 하거나, 판목을 분리해서 합성하기도 했으며 부식판을 통해 릴리프적 효과를 의식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뭉크의 현대에 와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단순히 복제품이라고 하는 사고에서 독립된 미술의 예술품으로 발전시켰다. 뭉크의 회화는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시각화하였으며, 미술사에 한 전화점을 제기하였고 주관주의적 경향을 특징으로 한 속에 대상을 묘사하는 회화로부터 벗어나 자기 표현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고 완성시켰다.
STARRY NIGHT, 1923-24 Oil on canvas 139 x 119 cm
TRAIN SMOKE, 1900 Oil on canvas 84.5 x 109 cm
FOUR GIRLS IN ASGARDSTRAND, 1903 Oil on canvas 87 x 111 cm
THE YELLOW LOG, 1911-12 Oil on canvas 131 x 160 cm
GALLOPING HORSE, 1910-12 Oil on canvas 148 x 119.5 cm
Edvard Munch <우울>
근심 (1894) oil on canvas 94x73cm Munch Museum, Oslo
THE BROOCH / EVA MUDOCCI, 1903 Lithographic crayon, tusche and scraping tool on stone. 600 x 460 mm
YOUNG WOMAN ON THE SHORE, 1896 Burnished aquatint on zinc 288 x 219 mm
Two Women on the Shore Woodcut, 1898; 45.5 x 51 cm
목소리/ 여름밤, 1893 Oil on canvas 90 x 118,5 cm
꿈
빨강과 하양, 1894 Oil on canvas 93 x 125 cm
<밤나무 아래에서>, 1937 Oil on canvas 116,5 x 119 cm
KISS, 1897 Oil on canvas 99 x 80.5 cm
키스
VAMPIRE, 1893-94 Oil on canvas 91 x 109 cm
TOWARDS THE FOREST II, 1915 Woodcut with gouges and fretsaw 504 x 647 mm
이별 Separation (1894) oil on canvas 115x150cm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