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1-6
▣ 이사야의 소명-이사야 1-6장-
이 부분에서는 6장이 핵심 장이다. 6장에서는 이사야가 성전에서 탄식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웃시야왕은 죽었고 유다의 보좌는 비어 있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사야는 도움과 위로를 받고자 하나님에게로 향하였다. 외관상으로는 패배한 것 같은 때에 그는 영적인 큰 축복을 체험하였다. 그가 받은 삼중의 환상을 살펴보자.
1. 위(여호와)를 바라봄(1-4절)
모든 헌신한 시민들처럼 이사야는 웃시야왕을 우상화하였다. 52년간 웃시야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계획들을 시행해 왔으며, 이 때는 위대한 건설과 물질적인 업적을 남긴 시기였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여 문둥병자로 죽어야 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왕하 15:1-7/대하 26:1- 장). 이사야는 이 나라가 물질적으로는 번영되었지만 영적으로는 형편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강조하였다. 외적인 성장과 평화는 부패한 마음을 덮고 있을 뿐이다! 유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하나님은 이사야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던 자리에서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도록 하셨다. 유다의 왕좌는 비어있었으나 하늘의 보좌는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땅에서는 혼돈과 불안이 있었으나 하늘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었다. 하나님은 장엄한 권세와 영광 중에 앉아 계셨다. 이 땅의 인간들은 웃시야가 문둥병자로 죽은 것을 수치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늘에서는 실패로 인한 수치나 그늘은 없었다. 오히려 하늘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였다!“
요한복음 12장 38-41절은 이사야가 영광 중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는 하늘의 보좌에 계셔서 천사들의 찬양을 받고 계셨다. 주님의 천사들인 스랍들(“불의 천사들“)은 주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였다. “온 땅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하다!“ 이사야는 그 당시에 그같은 영광을 보지 못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도 보지 못한다. 오히려 온 땅은 강포로 충만한 것만 같다!(창 6:11) 우리는 인간적인 시각으로 사건들을 보지만 천사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들을 본다. 어느 날 예수께서 통치하실 때 온 땅은 그의 영광으로, 가득찰 것이다(사 11:9/민 14:21/시 72:19/합 2:14).“만군의 여호와“는 이사야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적어도 65회이상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군대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선지자는 또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최소한 30회를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는 거룩한 전쟁의 하나님이시며 죄를 적대하시고 적을 무찌르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사야는 유다가 패망할 것 같아 보이는 날에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좋은 실천적인 교훈이다. 날이 어두울 때 눈을 하늘로 향하여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계신다!“
2. 안(자신)을 바라봄(5-7절)
참으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하심을 보게 되면 자신의 죄악과 실패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 욥은 하나님을 보고 회개하였으니(욥 42:6),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보았을 때(눅 5:8)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쳤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랍비 사울은 자기의 의가 그리스도의 영광만 같지 못한 “쓰레기“였음을 알게 되었다(행 9장/ 빌 3장). 그는 믿었고, 사도 바울이 되었다. 신자가 주님과의 참된 경험을 가지는 것은 그를 교만하게 하지는 않으며, 겸손케 하며 그를 깨뜨린다.
이사야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을 때 그는 자기의 깨끗하지 못한 입술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였다. 물론 깨끗하지 못한 입술은 깨끗하지 못한 마음의 산물이다. 이 선지자는 그가 준비되지 못하고 정결케 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을 충성스럽게 전파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주님을 만나 정결함을 받을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겠다고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과는 얼마나 다른가. 하나님은 이 선지자의 필요를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스랍을 보내어 제단의 숯불로 그를 정결케 하였다. 제단없이 보좌를 소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혹독한 일인가! 죄를 깨닫기는 하지만 정결함을 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스랍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도 이사야가 영혼 구원자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일이 더욱 중요했음에 유의하라! 진정한 예배는 증거와 영혼 구원으로 이끌어 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영적 체험“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해 나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격려의 말이 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정하게 하시는 데에 신속하시다(요일 1:9).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준비하기를 원하신다.
3. 밖(필요들)을 바라봄(8-13절)
이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 사용하실 수가 있게 되었다. 선지자는 더이상 자기 자신의 필요들에만 얽매여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한다. 그는 더이상 죄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는 정결케 되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이 보좌에 계심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실망하지도 않는다. 이제 그는 일하러 갈 준비가 되었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그는 이 땅 위에 자기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즐겨하신다. 하나님은 물론 스랍들 중의 하나를 보내실 수도 있으며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순종하도록 할 수도 있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입술을 사용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신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러나, 이에 응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사야 시대에는 “남은 자들“만이 듣고 순종할수가 있었다(13절).
“가서 말하라!“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민족이 죄와 심판의 멧세지에 귀를 기울일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장에서 하나님은 이 민족을 상처와 곪는 종기 투성이의 아픈 몸으로 비유하셨으며, 또한 자기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고집세고 반역적인 동물에 비유하셨다. 5장에서 이 민족은 좋은 포도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포도원으로 비유하였다. 1-5장을 읽으면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부담감을 이해하게 된다. 민족은 번영하는데 왜 죄에 대하여 전파하는가? “유행을 따르는 여인들“은(3:16-26) 이러한 멧세지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지도적인 통치자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5:8- 이하). 사람들은 부유하고 넉넉하고 만족할 때 심판이 오는 것을 믿지 않는다.
9-10절은 신약에서 여섯 번 인용되었다(마 13:13-15/막 4:12/눅 8:10/요 12:40/행 28:25-28/롬 11:8). 따라서 모두 합하면 일곱 번 언급되는 셈이다.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눈멀게 하시고 이들을 정죄하시는 것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을 순복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힘이 들고 눈이 먼 것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이사야가 말하는 내용이다. 얼음을 녹이는 태양이 또한 진흙을 굳게 한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아래로 향하는 단계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으므로(37절),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39절).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은(40절) 이들은 자신의 운명에 인을 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은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명에 순종하는 데에는 이사야의 편에서 볼 때 많은 믿음을필요로 하였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결과들을 산출하고 있는데 얼마나 오랜 동안 계속 전파해야 합니까?“라고 그는 묻는다. 주님은 “이 땅의 심판을 마칠 때까지“라고 대답하신다. 이러한 종류의 심판은 1장 7-9절과 2장 12-22절에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이 민족이 멀리 포로로 잡혀가더라도 주님은 그 남은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12-13절). 이 예언은 포로가 되는 데에 직접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또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 때는 유대인의 소수만이 환란 기간 동안 믿음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이 민족을 찍혀 넘어져 있는 나무로 비유하여, 그루터기가 남아서 새로운 싹이 거기서 날 수가 있는 것으로 상징한다. 이것을 11장 1절 이하의 “가지-예수 그리스도“의 예언과 연관시켜 보자.
이사야가 그 날 성전에서 걸어나올 때 이제는 더이상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는 선교사였다! 그는 구경하는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였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일을 하도록 준비를 갖추어 주셨다. 이사야는 주님을 보았고 자기자신을 보았으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하나님이 보좌에 계심과, 하나님이 그를 불러 사명을 맡기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씀을 전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죽도록 충성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따라야 할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