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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충주의 시골교회인 추평교회 담임목사인 虛耳(만득이) 전생수 목사가 2005년 10월 19일(수) 향년 52세의 일기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가셨습니다. 전생수 목사는 일주일 전 교회 강단에서 철야하며 기도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그의 유언대로 장기는 기증되고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그의 고향인 인제 산야에 뿌려졌습니다. 고인의 유서는 21일(금) 장례예배 시 그의 아들(보람)에 의해서 공개되었습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과 아들, 딸(한나)을 두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삶의 흔적은 http://cafe.daum.net/sanheaddlehead 에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虛耳(만득이) 전생수 목사의 유서
이 땅에 "아무개"라는 이름을 달고 산 지
쉰 한 해 되는 봄.
예수의 도에 입문한지 스물 여덟 번째 되는 해에
유서를 쓰노라.
나는 스물 셋 되던 해에 예수의 도에 입문하여
늦은 나이에 학문을 접하며 좋은 스승들을 만났고
좋은 길벗들을 만나 여기까지 살게 된 것에 감사하노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노라.
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
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
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 없는 때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이에 남은 이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노니,
첫째, 나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지 않을 것인즉,
병원에 입원하기를 권하지 말라.
둘재, 나는 병에 걸려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어떤 음식이든 먹지 않을 것인즉
억지로 권하지 말라. 또한 내가 의식이 있는 동안에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나누기를
꺼려하지 말라.
셋째. 내가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려 장례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넷째, 내가 죽으면 내 몸의 쓸모 있는 것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내가 예배를 집례할 때 입던 옷을 입혀 화장을 하고,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향 마을에 뿌려 주기를 바란다.
다섯째, 내가 죽은 뒤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땅 위에 남기지 말라.
(푯말이나 비석 따위 조차도)
와서 산 만큼 신세를 졌는데 더 무슨 폐를 끼칠 까닭이 없도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목회자로 살면서 목회를 위한 목회, 교회를 위한 목회를 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목회를 하였으니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어우러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노라.
예수의 도에 입문한지 스물 여덟 번째 되는 해 봄(2004.2,25)
사순절 첫 날에
허이(만득이) 전생수 씀.
* 고 전생수 목사는 스스로 이름을 만득이, 허리라고 지었다.
만득이란 말은 곧이곧대로 하면"늦게 얻었다"는 뜻인데,
형은 만득이란 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모든 것이 늦었다.
서당에 다니면서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늦었고,
주민등록도 3년이나 늦었고,
예수의 도에 들어간 것도 늦었고,
스승을 만난 것도 늦었고,
깨닫는 것도 늦다.
그래서 晩得이라 이름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천천히,
걸음을 걷는 것도 천천히,
운전도 천천히
했던 형이
남들보다 서둘러 갔다.
虛耳란 말은 우리 말로 하면
"허이! 헤이!"다.
사람을 부를 때 앞에 덧붙이는 의미없는 말이다.
한자를 풀면 "빌 허虛자에 의미없는 어조사 耳('귀 이'자는 문장의 끝에 있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그냥 비어 있다는 의미다.
생전에 왜 이름을 허이라고 했어요? 하고 물었더니,
"쉽잖아, 부르기 좋잖아.
호라고 하면 남들은 의미가 깊고, 어려운 것으로 부르려고 하지.
나는 상관없어. 부르기 쉬우면 돼.
허이, 참 먹어!
허이, 밥은 잘 먹었나?
허이, 잘 지내지!
이런 의미에서 아무런 뜻도 없는 이름 허이라 했지."
강산이 물들었다.
정선아리랑을 부르며
설악산을 다녀왔던 기억이
지금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