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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보 2호는? |
원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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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보 2호는? - (원각사지십층석탑 보존관련입니다.) 국보 1호에 대해 우리 모두 각자의 생각을 갖고 있죠? 그럼 국보 2호는 뭔지 아시나요?(^_^) 짠~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입니다.
▒ 지정번호: 국보 제2호 ▒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 조성 시대: 조선시대, 세조 13년(1467) ▒ 규모·양식: 높이 약 12m, 3층의 기단부에 10층의 탑신부를 갖춘 특수형 석탑 ▒ 재료: 대리석 ▒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번지 탑골공원 내
일반적인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다른 탑에 비해 목조 건물의 형태를 본 뜬 것으로, 이는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건립된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과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어 이 탑의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천사탑은 앞에서... ^^) 석탑 상층부 밑바닥에서 '成化三年二月日金石同年十八刻'과 '丁丑九月二十二日化亡人林茂'라는 명문을 발견하게 되어 이 석탑이 세조 13년 즉 1467년에 조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일제시대에는 상층부 3개층이 없는 채 오래 동안 있어왔다고 한다. 이러던 것을 1946년 2월 17일 오전 10시 30분 무렵 미군에 의해 석탑이 복구되었다고.
일제시대의 원각사 석탑. (1910년 이전에 촬영) 원래 용산의 일본군사령부 구내에 있던 것을 1916년 봄에 옮겨왔다.
1950년대
서울의 탑골 공원에 최근에 가보면, 탑이 유리 보호각 안에 갇혀(?!)있는 걸 볼 수 있다. 방랑을 하던 경천사10층석탑이 더러움을 깨끗이 닦아내고 중앙박물관 실내에 자리 잡은 것과는 달리, 야외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은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환경 문제 외에도 비둘기의 사랑(?!)을 벗어날 수 없어 두툼한 유리 옷을 입을 수 밖 에 없었다고... 비둘기의 배설물이 그러지 않아도 약하고 부드러운 대리석 재질의 풍화를 더욱 촉진시키기 때문이다.(화학반응식?>.<)
그리고 지금의 모습
문화재의 참맛을 느끼고 싶은 욕망과, 문화재를 불순한(?!) 환경에서 보다 건강히 오래도록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욕망사이에서 난 어디에 서있는지...
사진과 많은 내용은 서울문화재 사이트와 오마이뉴스의 이순우기자, 동아일보의 이광표기자의 기사에서입니다. http://sca.visitseoul.net/korean/stone_construction/i_stone_pagoda08015.htm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c10200&no=113636&rel_no=1 http://news.posco.co.kr/news/SGM/PNB/docs/news/s91fnews002v.jsp?menuCatId=0432&idx=130253 ================================= 다음은 서울 문화재 site에서 베껴온 탑에 대한 내용입니다.(너무 자세한 느낌이지만 곰곰 읽어보면 살이 되고 뼈가 될 듯 싶은 얘기라... 두고두고 읽으려고 퍼왔습니다...^^) 기단부는 모두 3층으로 평면이 亞자형으로 된 사면 돌출형을 하고 있다. 기단부의 석재 결구 방식은 지대석ㆍ기단저석ㆍ면석ㆍ갑석의 순서로 각 부마다 8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면석의 각 면은 여러 가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1층에는 용ㆍ사자ㆍ모란ㆍ연화문 등의 무늬를 새겨 넣었고, 2층에는 각종의 인물ㆍ조수ㆍ초목ㆍ궁실 등을, 3층에는 많은 나한과 선인(仙人)들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상층기단 갑석 상단에는 난간을 두어 그 위에 탑신부를 받치는 형태로 구성하였다. 탑신부는 모두 10층으로 1층부터 3층까지는 기단부의 평면과 같이 亞자형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난간돌ㆍ몸돌ㆍ지붕돌이 각각 8매의 별석으로 이루어졌고 표현방식도 동일하다. 1~3층의 탑신은 각 면의 양쪽 모퉁이마다 용무늬가 표현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은 다포계 목조건축의 방식을 따르면서 창방과 평방으로 연결하였다. 사방 20면으로 구성된 벽은 한 방향에 다섯 면의 벽이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주벽에는 불회도상(佛會圖像)이, 중간벽에는 인왕상이, 뒷벽에는 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13회불을 조상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옥개석 역시 목조건축의 부재를 빠짐없이 표현하고 있는데, 주벽 위에는 4개의 공포를, 중간벽과 뒷벽 위에는 각각 2개씩의 공포를 구성하면서 2출목 첨차를 하고 있다. 지붕 밑은 서까래와 부연을 표현하였고 그 끝은 막새기와로 마무리하였으며, 지붕 위는 기왓골을 치밀하게 표현한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특히 3층은 이중의 지붕으로 되어 있어 그 기교를 더해 주고 있다. 한편 4층부터는 평면이 일반 석탑의 형태와 같은 정방형으로서 난간 밑과 처마에는 5개의 공포를 만들었고, 난간돌ㆍ몸돌ㆍ지붕돌 등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4층의 면석에는 본존과 협시보살을 배치하였으나, 5층 이상부터는 오로지 각 면에 불상만을 배치하였다. 상륜부는 상당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10층의 탑신의 위는 十자형 지붕으로 마무리하였는데 그 위의 상륜부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이는 상부의 3층 옥개석이 오랫동안 지상에 방치되어 있다가 1947년에 원상태로 복원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상륜부의 결실은 오래 전의 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탑의 형태는 약 120년 전에 만들어진 경천사지십층석탑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양탑의 관계를 인정할 수 있기는 하지만, 입체적으로 도드라지게 표출되었던 벽면의 처리가 원각사지탑에서는 평면화되어가고, 역동적인 선의 처리도 점차 경직되어 가는 등 전체적으로 형식화되어 가는 경향을 알 수 있어 시대적인 차이에서 생겨나는 표현양식의 변화가 느껴진다고 하겠다. 이 석탑의 소속 사원이었던 원각사는 고려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의 이름으로 전승되어 오다, 세조 11년(1465)에 회암사(檜巖寺)에서 일어난 사리분신의 서상(瑞祥)을 기념한다는 명분(세종실록 권33 세조10년 5월 갑인조)으로 중건된 국왕의 원찰로서의 성격을 가졌던 사찰이다. 따라서 석탑 역시 2년 후인 세조 13년(1467) 사월초파일에 완공되어 성대한 연등회를 베풀고 낙성하였는데, 탑 속에는 절의 불상에서 분신한 사리와 『국역 원각경』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에는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방으로 만듦으로써 승려들이 머무를 수 없게 되었고, 중종 7년(1512)에는 원각사를 헐어서 그 재목을 나누어줌으로써 절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찰의 쇠퇴와 더불어 석탑의 관심 또한 사라지게 되었고, 그 결과 상층부의 일부분이 지상에 방치되어 50여 년 전에 복원되었으나 대리석 재질의 풍화작용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최근 심각한 훼손으로 말미암아 유리방호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그 수려하고도 기교적인 면에서 볼 때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탑파사상에 있어서도 가히 손꼽히는 수작이라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