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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1923-1977)
미국 태생의 그리스 소프라노.
당대에 전설화된 위대한 소프라노 가수, 그 사람이 바로 마리아 칼라스다.
2차 세계 대전 후의 오페라계에 여왕으로 군림했고 <세기의 가희>라는 찬사를 받은 그녀에 미칠 만한
가수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그녀가 20세기를 대표했던 빼어난 소프라노임에는 변함이 없다.
한때 테발디와 인기를 겨루었던 칼라스,멋대로 처신하여 갖가지 일화를 남겼으며,저널리즘을 쥐고 흔들다시피한 것도 칼라스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자신이 연기했던 오페라의 주인공들과 같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갔다.
금세기 최고의 디바인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이 넘었지만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대위에서 불태웠던 열정과 진정한 예술혼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베르디 오페라
개성이라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캐릭터와 비교를 거부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칼라스는 10여년의 길지 않은 전성기를 누렸지만,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처럼 현재와 미래에도 영원히 불멸의 위대한 디바로
오페라역사에 찬란하게 기록될 것이다.
칼라스는 1923년 12월 4일 미국으로 이주한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배우가 꿈이었던 어머니 에반겔리아와 약국을 경영하는 아버지 조지에게 있어 마리아 칼라스의
탄생은 실망 그 자체였다.
일찍 죽은 아들을 대신할 사내아이가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던 부모는 5Kg의 우람한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비만과 지독한 근시를 지닌 칼라스의 유년기는 날씬하고 예쁜 언니 재키로 인해 더욱 비참했다고 할 수 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랐지만 다행이도 음악에 관해서는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그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11살 무렵에 WOR 방송국의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 출전, '라 팔로마'를 불러 1등상과 함께 블로바 시계를 받는 등 가려졌던 그녀의 재능은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경제공항으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영하던 약국을 팔면서까지 부모는 두 딸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키게 된다.
특히 어머니 에반겔리아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예술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고자 음악교육에 더욱 열성을 쏟았다.
칼라스가 13살이 되던 해 그녀의 어머니는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위해 뉴욕을 떠나 두 딸과 함께 고국인 그리스로 향한다.
부부간의 불화도 겹쳤던 이 시기에 칼라스의 부모는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아테네에 자리를 잡은 후 왕립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게 된 칼라스는 서서히 자신의 잠재력을 드러낸다.
당당히 장학생이 된 그녀에게 최초의 진정한 스승인 이달고와 만디키안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자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였던 이달고는 칼라스의 재능을 다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가르침과 오페라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전수해 주었다.
오페라에 숨어있는 드라마틱한 감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달고의 가르침으로 인해 칼라스의 집중력과 배움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져갔다.
2차대전의 혼란 속에서도 오직 끊임없는 연습과 공부에 몰두하며 오페라 역사를 빛낼 '불멸의 디바'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정결핍과 외모 콤플렉스를 지닌 사춘기 소녀가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칼라스의 노력의 결실은 16세의 나이에 아테네 왕립 극장 무대에 프란츠 폰 주페의 오페레타<보카치오>에 첫 출연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마스카니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짜로 데뷔했다.
또한 스승 이달고의 후원에 힘입어 17살에 아테네 오페라단에 최연소 단원이 되었으며 토스카,피델리오 등을 공연하면서 점차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7월 칼라스는 아테네에서 최초이자 단 한번뿐인 리사이틀을 열고 자신의 출생지이자 어머니에 비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1945년 미국으로 돌아온 칼라스는 기대했던 미국 데뷔를 이루지 못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그녀에게 피델리오와 나비부인의 타이틀 롤을 제안했지만 90Kg의 과체중과 영어로 부르는 오페라에 대한 부담으로 이를 거절 했던 것이다.
칼라스는 1947년 8월 8일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폰키엘리의 오페라<라 죠콘다>의 주역을 맡고 센세이셔널한 데뷔를 하며 오페라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또한,칼라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죠반니 바티스타 메게니니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메게니니는 칼라스보다 23살이나 연상인 지방 부호였으며 훗날 매니저이자 남편이 된 인물이다.
메게니니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인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의
지도를 받게 되었고 칼라스는 점차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해 나갔다.
1948년 피렌체 시립극장에서 막을 올린 세라핀과 칼라스의 노르마는 이탈리아 벨칸토의 새로운 지평을 선언한 무대가 되었고 이후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그녀만의 전설을 만들어 간다.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투란도트>의 타이틀 롤을 맡았고,1951년에는 스칼라 극장에 데뷔하여 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엘레나를 불렀다.
베르디와 푸치니뿐만 아니라 벨리니,도니제티의 여러 작품들을 라 스칼라의 주요 레파토리로 삼은 것은 그녀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50년 3월 라 스칼라의 히로인이었던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가 갑자기 병이나자 칼라스에게 출연요청이 들어오게 된다.
라 스칼라에서 <아이다>로 데뷔한 이후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노르마>,<후궁탈출>에 출연하며 금세기 최고의 디바의 진면목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칼라스가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을 무렵 그녀 인생의 중요한 인물인 루키노 비스콘티를 만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비스콘티는 지적이고 세련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비스콘티의 연기지도는 칼라스를 더욱 드라마틱한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몽유병 여인>,<해적>,<라 트라비아타>와 같은 오페라에서 배역을 관통하는 극적인 표현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음악이 요구하는 완벽한 테크닉과 연기로 무장한 칼라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세계에 걸쳐 있는 오페라 무대를 정복하는 것뿐이다.
런던 파리,뉴욕,브라질,아르헨티나 등 그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칼라스 마니아들의 광적인 열광과 뜨거운 갈채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90Kg이 넘는 육중한 몸을 1년간의 다이어트로 28Kg이나 줄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던 칼라스의 전성기는 꾸준히 이어졌지만 35세가 되던 1959년 9월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만남은 그녀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후원자이자 매니저,그리고 남편였던 메게니니와 10여년에 걸친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았으며 오나시스와의 애정행각은 그녀를 오페라 무대에서 점차 멀어지게 하였다.
최고의 패션리더이자 매스컴이 주목하는 여인으로서의 칼라스는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오나시스에게 쏟아 부으며 오페라 무대에서 얻지 못했던 상류사회의 달콤함에 빠져든다.
이제 마리아 칼라스의 삶의 중심은 오페라에서 오나시스로 옮겨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60년대에 접어들어 그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영원히 곁에 머물러 줄 것 같았던 오나시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제클린 케네디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고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버림받으며 마치 자신이 연기했던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칼라스의 인기는 급속히 하락해 갔다.
오나시스와 희대의 연예사건을 치루는 와중에 무대에 서는 횟수는 확연히 줄어들었고 그에게 버림받은 이후에는 더욱 더 무대에 서지 않게 되었다.
1947년 <라 죠콘다>로 데뷔한 이래 13년간의 칼라스 시대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나시스와 파경,그리고 그녀의 음성장애는 결국 그녀를 오페라 무대에서 끌어 내렸다.
은퇴한 칼라스는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다시 그리스 국적을 가짐으로 해서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오나시스가 결혼해 줄것을 기대했으나 관계가 멀어져가던 오나시스는 1968년 J.F.케네디 미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했다.
칼라스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게된 것이다.
1971년과 72년,칼라스는 뉴욕의 줄리어드 스쿨에서 일련의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으며,옛 동료이며
만년의 연인이자 친구가 된 주세페 디 스페파노와 재회했다.
1973년 스테파노는 그의 딸의 치료비를 위해서 마리아를 설득해 전세계 투어를 그와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이 공연은 다음 해까지 계속되었다.
1974년 11월 일본 사포로 공연을 끝으로 스테파노와의 공연은 끝이나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1975년 오나시스가 죽게되고 칼라스도 1977년 9월 16일 54세를 일기로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무대에서의 칼라스는 그 자태가 단려(端麗)하고 기품과 관록이 묻어났으며,그 아름다운 거동은 노래와 밀착되어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그녀의 음성은 지금의 가수들과 달라서 성역(聲域)이 넓고,성질(聲質)이 연연하며 성량(聲量)이 풍부했다.
약성(弱聲)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강성(强聲)은 날카롭고 힘찼다.
그녀만큼 성격묘사나 심리표현에 노력하는 가수는 있지만,그녀만큼 기교와 용모와 연기력이 뛰어난 가수는 없다.
천재 칼라스라는 말이 결코 헛되이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에게 조차 환영받지 못했던 마리아 칼라스는 최후의 순간에도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오페라 무대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그녀였지만 한 여인으로 살아가기에는 사랑의 상처가 너무도 깊었던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드라마속의 여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았지만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며 금세기뿐만 아니라 다음 세기에도 이어질 그녀만의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1923 - 1977)
칼라스의 생애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1937년 부모의 이혼으로 인하여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되돌아왔으며 이듬해부터 아테네의 국립 콘서바토리에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1945년까지 그리스에서 착실한 경력을 쌓아가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스가 소란스러워지자 다시 미국으로 아버지를 찾아 돌아온다. 이해 겨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오디션을 받았지만 탈락하게 된다. 그후 힘들게 얻어낸 계약도 기획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또다시 좌절에 빠지지만 그 기획사의 멤버이기도 했던 베이스 가수 레메니의 소개로 1947년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La Gioconda"를 부를 기회를 잡게 되어 6월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다. 이때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 지오반니 파티스타 메네기니를 알게된다. 8월 2일 이탈리아 데뷰 공연을 세라핀의 지휘로 갖게 된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음에도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서 추가 계약은 맺어지지 않았지만 그해 12월에 이탈리아어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을 부르게되고 푸치니의 "투란도트"중 타이틀롤로 재계약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1949년에는 이탈리아 벨칸토 레파토리를 부르는 소프라노로서의 중대한 전환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지휘자 세라핀의 강력한 고집으로 마카레타 카로시오가 맡았던 "I Puritani"에서 엘비라역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해 4월 21일에는 메네기니와 결혼하게되고 남편으로서 그리고 매니저로서 메네기니의 도움을 받아 2년간 이탈리아와 유럽등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결국 칼라스는 1951년 라 스칼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시즌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1958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맡게된다. 그녀는 곧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같은 벨칸토 레파토리로 옮기기 시작함으로써 수년동안 무시당했던 많은 오페라의 레파토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1952년 6월엔 EMI사와 전속 계약을 맺게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죠반니"중의 돈나 안나의 아리아 "Non mi dir"를 테스트로 녹음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칼라스는 뚱뚱하고 덩치 크고 껑충해서 외모는 그리 매력이 없었는데 1954년 극히 짧은 기간만에 30kg을 감량하는 데 성공해서 그녀의 외모는 타인이 알아보기 힘들만큼 급격히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발목만은 여전히 굵은 편이어서 칼라스는 발목이 드러나는 차림은 피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56년엔 과거 그녀를 오디션에 탈락시켰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 "노르마"를 부름으로 해서 최초로 서게되고 "토스카"와 "루치아"도 공연하게 된다.
1957년엔 베니스의 한 파티에서 메네기니와 칼라스 부부는 후에 칼라스의 연인이 되게 되는 그리스의 선박 재벌 오나시스를 처음 만나게된다. 1958년은 칼라스에게 많은 사건이 터지는 해라고 기억된다. 1월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했던 "노르마"의 로마에서의 갈라 콘서트에서 1막이후 갑자기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퇴장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때문에 언론에 호된 지탄을 받게된다. 또한 그해 5월엔 라 스칼라의 감독 기링겔리와 말다툼후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다시는 라 스칼라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11월엔 메트르폴리탄에서도 해고된다. 하지만 12월 19일에 파리에서 갖은 데뷰 갈라 콘서트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만큼의 대성공을 거두게된다. 이때 청중속에 있던 오나시스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한다. 결국 이듬해 6월 메네기니 부부는 오나시스의 요트에 초대받게되고 항해가 끝나갈 즈음엔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연인이 되어있었으며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은 끝나버리게 된다.
1960년부터 61년까지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은 포기하고 오나시스와 함께 화려한 상류생활을 즐기는데만 집착한다. 제피렐리의 설득으로 1964년부터 코벤트 가든에서의 "Tosca"를 시작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된다. 이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전성기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공연들은 대성공을 거둔다. 점점 목소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칼라스는 의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 로얄 갈라 콘서트를 열게되는데 이것이 오페라 가수로서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된다.
은퇴한 칼라스는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다시 그리스 국적을 가짐으로 해서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한다. 오나시스가 그녀와 결혼해 줄것을 기대했으나 관계가 멀어져가던 오나시스는 1968년 J.F.케네디 미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해버린다. 칼라스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게된 것이다.
1971년과 72년, 칼라스는 뉴욕의 줄리어드 스쿨에서 일련의 마스터 클래스를 연다. 또한 그녀의 옛동료이자 만년의 연인이자 친구가 된 주세페 디 스페파노와 재회한다. 1973년 스테파노는 그의 딸의 치료비를 위해서 마리아를 설득해 전세계 투어를 그와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이 공연은 74년까지 계속된다. 1974년 11월 일본 사포로 공연을 끝으로 스테파노와의 공연은 끝이나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된다. 이로써 스테파노와의 관계도 끝이 나게된다. 1975년엔 오나시스가 죽게되고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54세의 나이로 그녀의 아파트에서 홀로 죽을때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은둔하게된다.
"Singing for me is not an act of pride, but an effort to elevate towards those heavens where everything is harmony."
- Maria Callas
칼라스의 음악
필자가 오페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드라마틱함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페라의 매력에 필자를 빠져들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마리아 칼라스이다. 마리아 칼라스를 알고 난 이후에야 "인간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최고의 악기이다."라는 조금은 식상한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필자가 칼라스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은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마무어의 루치아"에서 결혼 첫날밤에 남편을 살해하고 미쳐버린 후 부르는 소위 광란의 아리아 (Scena dalla pazzia)를 듣고부터다. 그 때 말로 표현할수 없는 감동으로 빠져버렸으며, 그 이후 마리아 칼라스라는 여인은 필자의 여신이 되어버렸다. 또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서 "In mia man' alfin tu sei (마침내 그대는 내 수중에)"라는 아리아를 부른 후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드루이드의 여승인 노르마역도 칼라스 아니면 불가능한 매력을 풍긴다. 미친 여인과 복수에 가득찬 여인, 완전히 다른 성격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반대의 모습으로 바꾸는 능력은 탁월하다고 할 수 밖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연약하고 섬세한 질다를, 정열적이면서도 요염한 카르멘을 마리아 칼라스에게서 기대한다면 아마도 실망을 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세하면서도 드라마틱함을 느낄수 있는 콜로라투라보다는 오히려 아주 파워풀한 느낌으로서 시원함을 갖게 한다. 때때로 아주 경직되어 있으며 듣기 거북스러운 쇳소리가 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약함이나 요염함 보다는 카라스마적인 것을 느낀다면 마리아 칼라스의 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라는 쟝르는 설정된 대본에 의해 무대위에서 소프라노를 비롯한 배우들이 연기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만 배우들이 어느만큼 그 연기에 얼마나 몰두할 수 있을까 하는것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특히 칼라스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마리아 칼라스가 아닌 다른 소프라노들도 열심히 노래를 했지만 필자가 느낀 바는 "람마무어의 루치아"를 듣고 있으면 루치아가 아닌 마치 마리아 칼라스가 미쳐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것이다. "노르마"를 듣고 있으면 여신인 노르마가 불타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 칼라스가 불타 죽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칼라스는 주어진 배역에 스스로를 던져버려 몰입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이런 특징이 잘 살아있은 음반으로 줄리니와 함께한 1955년 스칼라 극장의 시즌 첫 공연의 실황음반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줄리니의 곡에 대한 사랑이 잘 들어나는 반주와 함께 극의 후반부로 갈 수록 점점 배역과 자신을 합일시키는 칼라스는 결국 그녀의 죽음에 도달하면 청자로 하여금 극과 현실을 혼돈시킬 정도의 몰입된 노래와 연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이날 객석은 눈물바다가 될만치 감동적인 공연이었다한다.
또한 마리아 칼라스라는 소프라노가 부르는 아리아를 듣고 있으면 카리스마라는것을 느끼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을 느낀다. 아름다움과 카리스마가 동시에 와 닿는것이다. 아름다움은 다른 소프라노를 통해서도 느낄수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라는 것은 필자가 여러 음반을 그리고 여러 소프라노를 들어봤지만 아직까지 마리아 칼라스 만큼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다가온 사람이 없다.
필자가 비제의 "카르멘"을 처음 들었을 때 카르멘이란 여인에게서 연상되는것을 열거하자면 일단 주 무대인 스페인이 먼저 생각나고, 영화배우인 소피아 로렌, 그리고 영화 "해바라기"가 생각난다. 말하자면 "정열"과 "요염"이란 단어가 연상되었다. 마리아 칼라스와 요염함,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마음속에 내재된 요염함으로 따진다면 마리아 칼라스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물론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드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필자가 원하는(?) 요염함을 묘사하자면 마릴린 먼로형의 백치미를 갖고 스커트를 살랑 살랑 흔들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육체파의 요염함보다는 소피아 로렌형의 아주 쌀쌀맞고 냉정하면서도 지적인 눈빛 하나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을수 있는 지성파의 모습이다. 어쩌면 소피아 로렌이란 여인과 마리아 칼라스라는 여인을 합한 필자의 이상형일수도 있다. 카르멘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무리일까?
베스트 10이란 이름으로 10개의 타이틀을 선택하였지만, 사실 베스트 10 이라고 하니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든다. 굳이 순서를 정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녹음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이건 별로야"라고 할 수가 없기에, 필자의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음반들의 순서라고 말할수 있다. 만약 마리아 칼라스의 매니아가 되고 싶다면, 하일라이트 판이 아닌 전곡반을 반드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소름이 끼칠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던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당신은 마리아 칼라스에 중독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마리아 칼라스 - 숨겨졌던 뒷 이야기 - 이 덕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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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라 스칼라에선 26년 동안이나 <라 트라비아타>와 라 스칼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공포의 벽'을 무너뜨린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티치아나 파브리치니(28)이라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이 소프라노는 1955년 , 마리아 칼라스가 보여준 <라 트라비아타>의 기념비적인 공연 이래, 라 스칼라의 냉혹한 관객들로부터 폭발적인 갈채를 이끌어 낸 최초의 비올레타가 되었다. 성급한 비평가들은 파브리치니를 '칼라스의 재래'라고까지 떠들어댔지만, 사실 오페라의 역사에서 마리아 칼라스와 대등하거나 그녀를 능가할 예술가가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누구보다도 '제2의 칼라스'란 소리를 듣게 된 파브리치니 자신이 현명하게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저는 제2의 칼라스가 아닙니다. 그녀가 남긴 기억에서 그 빛을 뺏거나 그녀의 그림자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지요. 우리는 칼라스에게서 그저 무언가를 배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녀의 말이다.
아마도 마리아 칼라스는 당대 성악가 가운데 가장 깊은 음악적 본능과 총명한 지력, 그리고 가장 빼어난 극적인 힘을 겸비하고 있었다. 1950년대엔 그녀의 걸출한 예술성은 차치하고, 그 목소리 자체만도 심금을 꿰뚫는 힘과 개성, 그리고 풍부한 색채를 지닌 무한한 감명 깊은 악기라 할 만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서서히 그의 목소리는 결함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1965년 42세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녀는 코벤트 가든의 <토스카>공연을 마지막으로 오페라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수년 뒤 다시 무대로 돌아와 1973년부터 74년까지 옛 파트너였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더불어 세계 순회 콘서트를 가졌으며 74년엔 우리나라도 다녀갔다.
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현저히 약화되기는 했으나 그 비견할 수 없는 예술적 힘은 전혀 감퇴되지 않았다는 게 정평이었다.
이와 관련해 칼라스가 1971년-72년에 걸쳐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갖고 있을 무렵, 그녀의 수업을 참관했던 헨리 비스네스키가 <전설 뒤의 예술>이라는 칼라스에 관한 저서 속에서 기술하고 있는 장면은 감퇴되지 않는 칼라스의 유례없는 예술성을 웅변해 준다.
"그녀의 참으로도 압도적인 노래의 힘은 <리골레토>의 '정신들아(Cortigiani)....'부분을 토의하고 난 다음에 나타났다.
그는 젊은 바리톤에게 리골레토는 '마치 눈먼 동물처럼 미칠 듯이 포악하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왼손을 들며 비상하게 빠른 템포를 피아니스트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정신들아, 천벌을 받을 놈들(cortigiani, vil razza)·,.'의 구절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가 욕설을 퍼붓는 이 짧은구절을 소리칠 때 그녀의 두손은 흡사 발톱터럼 구부러지고 얼굴은 어릿광대의 공포와 분노를 반영하고 있었다.
좌중은 자리에 붙박힌 채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가장 격렬한 순간에 칼라스에게서 방출되는 전류에 관해 단순히 말로만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의 표현력이 창출하는 압도적인 충격을 완전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1분도 지속되지 않는 이 짧은 장면이 끝났을 때객석의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페라의 예술사에 불후의 기념비 세워
마리아 칼라스는 모국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열여덟 살 때(1941년)에 데뷔했지만, 진정한 그녀의 이력이 시작된 것은 1947년, 베로나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에 출연하고부터였다. (칼라스는 그리스인을 양친으로 1923년 12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나 14세 때 어머니, 언니와 함게 아테네로 돌아가 아테네 음악원에서 유명한 소프라노 엘비라 히달고를 사사했다. 학생신분으로 2차적 배역에 출연하다 졸업 후(1941년) 아테네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토스카>로 데뷔, 이후 3년 동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차, <피델리오>의 레오노라 역 등에 출연했다.)
그 때까지 오페라계에서 그녀 장래는 퍽이나 불투명했으며 사실 무척 비관적인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65년에 무대를 떠날 때까지 20여년 동안 이탈리아의 모든 중요한 오페라를 포함해서 글루크와 하이든, 모차르트, 스폰티니와 케루비니, 그리고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거의 모든 종류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특히 <노르마>를 비롯해서 <메데아>, <안나 볼레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그리고 베르디의 <멕베스>와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토스카> 등에서 오페라 예술사에 불후의 기념비를 세웠다.
마리아 칼라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세계의 모든 신문들은 탐욕스럽게 그녀의 예술뿐만 아니라 사생활에 대한 것까지 칼라스에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나 독자들의 물릴 줄 모르는 호기심을 채워 주는 원천이었다.
특히 칼라스의 인기가 절정에 있던 1956-57년에 그녀의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사거리가 되었을만큼 그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마치 새장속에 갇힌 새처럼 느꼈다. 오페라계의 모든 이들이 그녀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느꼈고, 모두가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해 언급했다.
그녀는 대중과 신문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기 전에는 어떤 말과 행동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몸이 불편해서 출연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사실대로 신문에 발표되지가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곤 했다. 의사들, 사회학자들, 심지어 거리의 사람들까지. 따라서 칼라스의 예술엔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들마져 당연히 그녀에 대한 가십 몇 개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은 1959년 칼라스가 12년 동안 유례없이 다정한 부부로 함께 생활해 온 남편을 버리고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줄행랑을 쳤을 때 절정에 이르게 된다.
"나처럼 행복한 아내는 없어요"
사정이 이러했으니만큼 칼라스의 생전에 이미 그녀에 관한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음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칼라스 사후 1970년대 말쯤에 이르러 칼라스에 관한 책들은 대략 20여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우습게도 이 가운데 칼라스가 오페라 가수로서 가장 위대한 성공을 누렸던 시기에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책은 한 권도 없었다(즉 모두가 칼라스 부부가 헤어진 다음에 그녀를 알게 된 사람들이 쓴 것이었다). 사실 칼라스 자신이 자서전을 써달라는 권유를 받았으며 이런 부탁을 수락하기까지 했지만 끝내 실천하지는 못했다. 죽기 몇 달 전 칼라스는 회고록을 쓰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 관해서 무엇이나 다 알고 있는 오직 한 사람, 즉 나의 남편만이 나의 전기를 쓸 수 있습니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하루 아침에 결혼 생활이 파탄을 맞았을 때까지 칼라스 부부는 거의 믿을 수 없을만큼 다정한 한쌍이었다. 이탈리아의 대부호로 예술 애호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남편이자 보호자요 매니저였으므로 둘은 예술과 생활을 완벽하게 공유했다. 메네기니에 대한 사랑의 선언은 1950년대르 통해 칼라스가 기자회견에서 줄곧 견지해 온 모티프였다. "제 남편처럼 다정하고 민감하며 친절한 사람과 더불어 누리는 결혼 생활의 행복을 자랑할 수 있는 아내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메네기니는 12년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생일날 아침이면 열렬한 사랑의 편지와 생일선물이 책상 위에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바티스타, 당신은 나의 삶 전부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신처럼 존경한답니다. 나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잘 돌보길 애원해요. 당신의 마리아' 혹은 '나의 행복이여,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한층 깊이 당신을 숭배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남편이에요. 당신 없이 나는 생명도 기쁨도 누릴 수 없을 거예요'
칼라스는 어쩌다 공연 때문에 남편과 멀리 떠나 있을 땐 언제나 긴 편지를 보냈고, 집에 함께 있을 때도 남편의 눈에 띄도록 그의 책장이나 침대 위에다 항상 꽃다발과 함께 사랑의 메모를 남겨두곤 했다. 그리고 이같은 습관은 12년 결혼생활 동안 줄곧 지속되었으며 사실상 오나시스와의 사건이 있기 몇 주전까지도 계속됐다.
'당신을 숭배해요. 나의 영혼이여'
'세월이 갈수록, 사랑하는 이여, 이전보다 더욱더 나는 당신을 숭배한답니다'
혹은 또 이런 것도 있다. '내가 멀리 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짜증이 나고 피곤할 때면 당신이 나를 위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세요. 내가 당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나는 다만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많은 기쁨을 주신걸 감사하고 싶을 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나처럼 운이 좋고 행복한 아내는 없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 줬으면 해요. 우리가 이처럼 항상 만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비세요. 당신의 충실한 아내 마리아'
이처럼 하나같이 사랑에 가득찬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오페라계의 '호랑이'로 불렸던 '거만하고 변덕스러우며 전제적인 디바(Diva)'였던 것이다. 주로 칼라스의 성격상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온 가십 기사에 너무나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이것은 확실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와 메모들을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가지고 오랫동안 간직해 온 메네기니가 그녀의 사후 몇 년이 지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공개하지 않았던들 칼라스의 진정한 인간적인 면모와 여성적 특질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왜냐하면 칼라스에 관한 모든 책들은 대부분 그녀의 공연을 자주 보았거나 그녀와 직접 알고 지낸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부분은 무대 위의 그녀를 단 한번 보았거나 그녀와 단 몇 분간 얘기를 해 본 것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그녀의 예술에 대한 결론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
예술가로서의 칼라스에 대해서 말하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칼라스에 대해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12년 간이나 칼라스와 '모든 것을 공유했던' 그녀의 남편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1977년에 칼라스가 사망한 후 많은 잡지사에서 다투어 메네기니에게 회고록 집필을 권유했으며 심지어 프랑스의 어떤 출판사는 백지수표까지 동봉한 출판 권유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리아와 함께 공유한 내밀한 세계를 세상에 공개한다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제의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날조된 내용으로 가득찬 엉터리 전기들이 계속 출판되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메네기니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양한 출판물에 나타난 자기와 마리아와의 결혼생활에 대한 악의적인 언급이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에 관한 부분은 어느 페이지나 다 조소적이고 부정적인 어조로 기술돼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메네기니가 마리아보다 28년 연상이란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그는 자기들의 가장 내밀한 감정이 모욕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마리아를 위해 살았고, 나의 삶의 대부분을 그녀를 위해 헌신했으며 한결같이 그녀를 사랑했다. 이제 나는 그녀와의 추억을 지키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이다. 덕택에 우리는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마리아 칼라스의 진정한 인간적 면모, 전설화된 신화속의 <라 디비나>의 베일 뒤에 숨은 '여성 칼라스'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부애와 가정의 행복에 대한 청교도적 결벽성 지녀
대체로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 겨의 언제나 예술을 위해서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특히나 여성의 경우 가정보다 예술을 우위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 예술가상으로 이해되고 있거니와, 이같은 선입견이 자주 한 예술가의 인간적 측면을 실제와 다르게 포장해서 '전기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왜곡된 인간상'을 창조하게 되는 수가 허다하다. 마리아 칼라스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언제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예술이라고 주장해 왔다. 물론 예술, 즉 노래하는 것은 그녀가 열광적으로 추구하고 헌신한 천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메네기니와 함께 생활하는 기간에 칼라스의 최대 관심사는 두 사람의 사랑과 상호 행복이었다.
"만약에 바티스타가 요구한다면 나는 그를 위해 나의 이력을 포기하기까지 할 거예요"라고 그녀는 자주 공언했던 것이다.
부부간의 애정과 가정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칼라스의 태도는 적어도 오나시스와의 '사건'이있기까지는 거의 청교도적인 결벽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같은 신념은 그녀의 교우 관계에도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를테면 어느땐가 칼라스 부부와 친밀히 지내던 친구가 자신의 아내에게 심하게 대하다가 마침내 별거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칼라스는 그를 다시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 칼라스의 집을 자주 드나들던 한 친구가 부인을 버렸을 때는 그를 집안에 들여 놓은 하녀를 꾸짖고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처를 버렸으니 이제 더 이상 우리 친구가 아니에요"
또한 잉그리드 버그만 부처는 칼라스 부부와 친한 사이였는데, 버그만이 남편과 이혼했을 때 그녀는 버그만을 비난하며 다시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칼라스의 여성적 본능은 아기에 대한 열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칼라스는 결혼 직후부터 열렬히 아기를 원했으나 끝내 이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많은 전기는 칼라스가 예술을 위해 아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어떤 전기에선 그녀가 아기를 원했지만 남편이 그녀의 이력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거부했던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신체적 결함이 임신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칼라스 부부는 둘다 열렬히 아기를 원했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들을 비롯해서 여러 전문의들과 수없이 상의하고 검사를 받았으며 가능한 온갖 시도를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녀의 자궁이 기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수수을 한다면 다소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칼라스는 수술을 거부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칼라스는 평생의 적수였던 레나타 테발디가 일생 독신으로 아이도 갖지 않았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오페라계의 생리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수한 매니저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아무리 그가 재능이 있고 노력을 한다해도 능력있고 양심적인 매니저를 갖지 못한 가수는 무대에서 빛을 보기도 힘들뿐더러 재정적인 이익을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그처럼 오랜 기간을 세계의 오페라 무대에서 여신처럼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며 보호자인 탁월한 메네기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거물 메네기니의 눈에 띤 빈털터리 무명가수 칼라스
메네기니가 칼라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는 7년의 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명의 가수였다. 메네기니의 도움으로 칼라스는 극히 짧은 시일내에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되었으며, 남편을 떠난 후로는 한동안 명성의 광휘를 누리긴 했으나 곧 그녀의 경력은 쇠퇴했다. 칼라스 자신이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전적으로 나를 의탁할 수 있는 남편을 매니저로 가졌어요. 그는 나를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만들 수 있답니다"
오페라계에서 종종 물의를 일으켰던 칼라스의 불같은 논쟁과 공격적인 태도는 실은 모두 메네기니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칼라스는 원래 조용하고 평화적인 성격이었다. 세계의 어느 극장에서나 여왕처럼 대접해 주는 환경 속에서만 그녀가 노래하기를 원했던 메네기니의 책략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칼라스가 죽은 뒤 테너 자코모 라우리-볼피가 메네기니에게 써보낸 편지는 예술가 칼라스와 매니저 메네기니와의 관계를 잘 요약해 설명한다.
'당신이 없었다면 칼라스는 그녀를 향한 극장가의 적의를 극복하고 오페라의 영역에서 그와 같은 절정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오페라 예술사에 그녀의 인격을 그처럼 뚜렷이 각인시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국제적인 사교계의 소용돌이의 늪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기 전에 승리를 구가했던 사람은 마리아 '메네기니'였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기적이 이미 성취되고 난 후에 그걸 물려 받았던 것이지요'
마리아 칼라스를 다루는 모든 책은 한결같이 베로나의 아레나 극장에서 가진 칼라스의 데뷔공연 <라 조콘다>를 전설적인 승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설이 자주 그렇듯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연은 훌륭했으나 특별한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 새로운 스타가 예고될 때면 늘상 그렇듯이 계약 제의가 쇄도하기는커녕, <라 조콘다>의 4회에 걸친 공연이 끝난 후 칼라스는 단 한건의 제의도 받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설은 또한 칼라스의 이력이 시작될 무렵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도와줬다고 하지만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칼라스를 도와줬노라고 자랑했지만 그건 모두 그녀가 유명하게 되고 난 후의 일이었고 사실은 누구나 그를 착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라스는 우수한 목소리와 성악가로서의 훌륭한 교육적 바탕을 지니고 있었지만 뉴욕에선 아무도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뉴욕에서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베로나 출신의 베이스 티콜라 로시-르메니 한 사람 뿐이었다.
당시 베로나 아레나 극장의 공식적인 디렉터는 베로나의 유명한 테너로 주로 뉴욕에서 살고 있던 조반니 제나텔로였는데, 르메니는 베로나의 여름 시즌을 준비하고 있는 제나텔로에게 마리아 칼라스를 라 조콘다로 추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나텔로는 당시 2년 동안이나 무대에 서보지 못한 칼라스의 다급한 처지를 최대로 악용했다. 그는 칼라스를 아주 형편없는 가수로 치부하고는, 베로나의 계약을 거의 모욕적인 조건으로 제안했다(4회 공연에 매 공연마다 4만 리라를 지불).
그러나 칼라스는 워낙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돈이 없어서 이탈리아행 여비를 대부로부터 빌려야 했다. 게다가 가난한 이민들이 대개 그랬듯이, 실로 꼰 마분지 상자를 여행가방 대신 들고서 러시아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항해 도중 숱한 역경을 겪고 소지품도 일부 약탈당한 채, 겨우 나폴리에 정박했다. 그리고는 거기서 기차를 타고 베로나에 갔는데, 하루 반이 걸리는 이 여행에서 그녀는 앉을 자리가 없어 통로에 서 있어야만 했다. 칼라스로선 이탈리아에의 여행이 마지막 희망이었으며 다가올 아레나 공연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칼라스가 <라 조콘다>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의 정확한 사정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나게 된다.
마리아 칼라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1947년 6월 29일이었다. 그녀에겐 이탈이아가 초해이었다. 그리고 베로나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칼라스는 메네기니를 만났던 것이다. 당시 52세의 독신이었던 메네기니는 12개의 공장을 베로나에 소유한 이탈리아 굴지의 사업가로 오페라계에선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열광적인 오페라 애호가였던 그는 극장 관리인과 지휘자, 가수들과 친한 사이였고 사실상 오페라계에 유형 무형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아레나 극장의 스텝진들이 공연 기획에 대한 협의를 할 때면 대부분 그도 한몫 끼곤 했다. 또한 그는 재능이 있는 무명의 젊은 가수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기도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중의 누구도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레나 극장의 실무를 맡고 있던 친구 포마리가 경영하는 레스토랑 페다베나의 위층에 살고 있던 메네기니는 칼라스가 도착하던 날 밤 아레나의 친구들에게 붙들려, 이들이 칼라스와 더불어 식사를 하고 있던 식탁에 합석하게 되었다. 마에스트로 세라핀이 두 사람을 소개했는데,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첫 인상을 보고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처녀를 바라보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아주 당당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은 대단히 둥글고 가슴이 풍만했으며 어깨가 당당했다. 그리고 검은 머리에 강렬한 눈을 하고 있었다"
칼라스는 미국에서 함께 온 로시-로메니가 그녀와 계약한 오페라의 흥행사며 변호사인 리처드 마가로지의 부인과 동석하고 있었는데, 메네기니는 이들에게 다음날 베니스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메네기니가 칼라스를 향해 진정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은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그녀가 앉아 있었을 때는 비록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긴 했어도 그렇게 커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서자 나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녀의 다리 아래 부분은 기형이었다. 장딴지가 너무 굵어 발목이 부어 있었고 몹시 힘들게 걷는 모습은 꼴사납기까지 했다. 나는 일행 중 몇 사람이 경멸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곁눈질하며 웃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녀는 그걸 눈치챘는지는 모르나 한켠에 비켜서서 눈을 내리깔고 걷고 있었다"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한 '사업상'의 흥정
다음날 메네기니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초대에 응할 수 없다는 칼라스를 강권하다시피 해서 일행과 더불어 베니스로 데려갔는데 여행 중 줄곧 침묵을 지키던 칼라스는 산 마르코 광장의 야경을 보자 사람이 확 달라졌다. "아...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녀는 소리쳤다. 눈은 빛나고 온몸이 눈앞의 풍경에 도취된 것 같았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녀의 과묵은 사라지고 말이 많아졌다. "당신이 옳았어요. 이것만으로도 이 도시를 여행할만한 가치가 있어요. 내게 이토록 비할 데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그녀는 거듭거듭 메네기니에게 감사했다.
베로나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두 사람만이 타고 있었다) 마리아는 딴 사람이 된 듯 그날 저녁 자신이 본 모든 것에 관해 쉴새 없이 얘기를 늘어 놓았다. 그리고 이윽고 화제는 자기자신에게로 옮아가 자신의 어린시절과 가족관계, 그 동안의 이력과 뉴욕에서의 쓰라린 체험,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마리아는 훌륭한 인격자인 아버지를 숭배했으나 어머니는 증오했다. 그녀의 모친은 남편이 딸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면서 그와 이혼할 결심으로 아이들을 혼자서 그리스로 데려가 자기식으로 교육했는데, 마리아보다 4세 위인 언니를 극도로 편애해서 두 딸을 마치 콩쥐팥쥐식으로 대했다.)
"그녀가 자신의 이력과 미래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엔 젊은 사람들의 특징인 '열광'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슬프고 비관적이었다. 그녀의 말은 냉랭하고 약간 비통해하기도 했다. 그것은 환멸과 희생과 수치에 익숙해진 사람의 말이었다"라고 메네기니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칼라스는 자신이 어째서 베니스에 오기를 거절했던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털어 놓았다. 그녀는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었던 것이다. 그 전날 저녁에 입었던 블라우스를 다시 입고 가기가 창피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옷을 살수도 있었겠지만, 제겐 돈이 한푼도 없었거든요"
그들은 새벽2시에 비센차에 도착했으나 차 속에서 얘기를 더 계속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말이오?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말이오" 메네기니는 물었다.
그녀는 이 물음에 약간 당황해서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쳐다 보았다.
"이런 꼴의 내게 대체 누가 관심을 갖겠어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요"하고 메네기니는 위로하듯 말했다. "저는 자신을 속이는 데 습관이 돼 있지 않아서요" 이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이 순간 메네기니의 마음 속에선 칼라스를 도와주려는 결심이 확고해졌다.
"나는 이 처녀를 도와 주고 싶었다. 그리고 오해를 사지 않고 내 뜻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무엇일까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오페라에 관심이 있어요. 이미 나는 다른 젊은이들을 도와준 적이 있소. 나는 당신이 재능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해요. 그러니 만약에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 역시 도와주고 싶어요. 생각해 보시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나는 당신이 날 신뢰해줬으면 해요' 그녀는 감동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정하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베로나로 돌아왔다"
이것이 세기적 소프라노와 위대한 매니저와의 역사적 관계가 시작된 '진상'이었다.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오페라의 여신
메네기니는 약속대로 다음날 마리아에게 공식적인 편지를 보냈고 마리아는 전화로 이에 답했다. 그리고 이틀 후 메네기니는 마리아를 가르다 호반으로 데려가 식사를 하면서 정식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새해까지는 6개월이 남았소. 이 기간 동안 나는 필요한 모든 것-호텔, 레스토랑, 의상실 등을 주선하겠소. 당신은 오직 내가 당신을 위해 선택한 마에스트로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공부만 하면 돼요. 이 해의 마지막에 우리는 결산을 해보는 거요. 만약에 우리 둘다 만족한다면 장래 우리의 직업적인 관계를 전반적으로 규정할 계약을 체결합시다"
마리아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바로 같은 날 메네기니는 마리아 칼라스를 위한 오페라 작품들을 오케스트라용으로 관현악화하기 시작했고, 아레나 극장의 오페라 코러스 매스터인 페루치오 쿠지나티를 마리아의 성악교사로 초빙했다. (엘비라 히달고는 칼라스에게 노래의 테크닉을 가르치고 그녀에게 음악의 세계를 열어줬지만, 칼라스의 모든 오페라 레퍼토리를 가르친 사람은 구지나티였다. 칼라스의 어떤 전기에서도 이 이름은 취급되지 않고 있지만 칼라스 자신도 공언했듯이 쿠지나티는 그녀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사실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사업상 협정은 완벽한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되었다. 숱한 그릇된 전기들에 의해 형성된 칼라스에 관한 전설은 칼라스의 베로나 데뷔 공연에서 제나텔로나 메네기니가 그녀를 '발견'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칼라스를 발견하지는 않았다. 칼라스의 노래를 한마디도 들어 보기 전에 메네기니는 오직 그녀의 '이야기'에 감동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젊었고 필사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했을 뿐이다"
'오페라의 디비나' 칼라스는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가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명성을 획득했을 무렵에 처음으로 그녀를 본 사람들은 이 날씬하고 우아한 몸매의 프라마 돈나가 한때는 대단한 뚱보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오페라 극장의 제왕격인 라 스칼라를 정복한 1951년까지도 그녀는 210파운드(약95kg)가 넘는 거구였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은 아무리 살이 쪄도 매력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움을 유지했지만, 두 다리는 기형적으로 뚱뚱했고 발목은 과중한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언제나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에게 첫 성공의 길을 열어 준 베로나의 <라 조콘다> 공연 때도 그녀의 부은 발목 때문에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기가 힘들어 무대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같은 결점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체중 30kg 감량의 비밀
사실 마리아 칼라스는 1937년(14세),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가기 위해 미국을 떠났을 때만 해도 날씬한 소녀였다. 아테네에서 달걀 요법에 근거한 의학적 치료를 받은 후부터 그녀는 살이 찌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또 일종의 선 질환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나는 체중을 감당할 수 없어 자주 차 한잔만으로 식사를 대신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칼라스의 비정상적인 비만에 대해 사람들은 그녀가 치즈와 과자류를 엄청나게 탐식했기 때문이라고들 말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이 자주 기사화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칼라스의 '게걸스런 식욕'이 애정의 결핍으로 인한 보상 심리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심리학적 해석을 내리기까지 했지만, 이야말로 멋대로 상상한 환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자주 차 한 잔밖에 마시지 않고 외출했기 때문에 아침마다 친척 한 사람이 계단 꼭대기까지 내 뒤를 따라왔던 것을 기억한다"라고 한 칼라스 자신의 고백이 이를 증언했다.
1945년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자 칼라스는 엄격한 다이어트를 실천했는데, 자전적인 스케치에서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218파운드(100kg)에서 170파운드(80kg)로 떨어졌다. 후에 이탈리아에 갔을 땐 155파운드까지 내려갔는데, 이때가 베니스에서 <투란도트>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플로렌스에서 <노르마>를 노래하고 있을 때였다. 맹장염 수술을 한 뒤에 다시 22파운드 더 늘어나더니 1950년과 51년 무렵엔 어떤 명백한 이유도 없이 자꾸 체중은 자꾸자꾸 불어났다'
칼라스의 체중이 최고로 불어났을 즈음 브라질에서 있었던 한 사건은 그와 같이 엄청난 거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 참으로 흥미있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또한 칼라스의 성격상 특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에 특기할 만한 것이다.
1951년, 라 스칼라의 공식적인 데뷔를 석 달 앞둔 9월에 칼라스는 스칼라의 단원들과 더불어 브라질 순회 공연길에 올랐다. 그녀는 상 파울루와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여러 오페라의 아리아로 구성된 8회 공연을 계약했는데, 칼라스와 그녀의 적수 레나타 테발디는 같은 배역을 교대로 노래하게 돼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라 스칼라 입성은 다른 가수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중대한 위협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시작된 온갖 음모와 책략에서 최초의 결실을 본 것이 칼라스와 당시 라 스칼라의 지배적인 여신이었던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적대관계였다. 이같은 적대관계는 두 소프라노의 광적인 팬들까지도 원수같은 양대 진영으로 갈라놓아 온갖 소동을 일으키곤 했다. 어떤 의미로 두 사람은 광적인 팬들의 음모에 말려든 희생자라 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해서 탄생한 유명한 '칼라스-테발디 불화'는 거의 10년 동안 전세계의 신문에 끊임없이 기사화되었고 오늘날까지 오페라를 이야기하는 책에서 다루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적대관계'가 최초로 표출된 것이 바로 브라질 순회공연에서였다.)
그런데 테발디가 상 파울루로 가고 없는 동안 아직도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몇 번의 공연을 앞두고 있던 칼라스는 <토스카>를 성공적으로 공연하고 두 번째 <토스카>에 출연하려고 했을 때 아무런 이유나 예고도 없이 자신의 이름이 출연자 명단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라 스칼라의 단원을 브라질에 초청한 사람은 브라질 5대 부호의 하나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던 바레토 핀토였다. 작은 체구에 대단한 추물이었던 핀토는 브라질의 여러 극장의 디렉터로서 원칙도 미학도 없이 그저 기분내키는대로 마치 독재자처럼 오페라 시즌을 운영하곤 했다. 오페라 레퍼토리와 출연자들을 결정하는 것도 그의 마음대로였고, 아무도 감히 그에게 반대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그날의 포스터에 자신의 이름만 캐스트에서 빠진 걸 보자 곧장 핀토의 사무실로 달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있던 남편이 말릴 새도 없었다. 그녀는 스칼라의 다른 가수들에 둘러싸여 책상 뒤에 앉아 있는 핀토 앞으로 돌진해가서 소리쳤다.
"이것봐요. 어째서 나를 교체했죠?"
"지난 밤 당신은 형편없었기 때문이오"
"아, 당신 의견으론 내가 형편없었다고?"
그녀는 불같이 화가 나 으르릉거리며 핀토의 책상 위에 있는 20파운드되는 거대한 청동 잉크 스탠드를 들고 소리쳤다.
"방금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해봐요. 당신에게 그럴 배짱이 있따면, 나는 당신의 골통을 으깨어버릴테니"
그녀의 남편과 주위사람들이 당황해서 말리는 사이, 핀토는 겁에 질려 의자 속으로 기어들며 말했다.
"경찰을 불러 당신을 협박죄로 체포하도록 하겠소"
눈 깜짝할 사이에 칼라스는 사람들을 밀치고 황소처럼 핀토에게 돌진해 무릎으로 그의 가슴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리쳤다. 핀토는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메네기니는 황급히 칼라스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메네기니가 극도로 불안해 한 것과는 반대로 칼라스는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골통을 깨부수지 않은 게 유감일 뿐이에요. 나는 그 작자가 싫어요. 이 나라에선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겠어요"
얼마 뒤 과연 걱정한 대로 호텔로 사람이 왔지만 경찰은 아니었다. 핀토가 보낸 사람이었는데, 그는 칼라스의 아직 남아있는 공연까지 포함한 출연료 전부가 들어있는 봉투를 전했다. 핀토는 얼마나 혼이 났던지 칼라스 부부를 위한 비행기 표와 자동차까지 다 준비해 뒀으니 제발 브라질을 떠나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100kg의 거구에서 날씬한 여인으로 변신
이처럼 과중한 체중이 때로는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이점도 있지만,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이란 관점에선 확실히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누구보다도 미적 감각이 예민한 칼라스 같은 예술가에겐 자신의 꼴사나운 자태는 일종의 저주였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게 불어나는 체중은 그녀를 때때로 절망에 빠뜨렸으며, 그에 반비례해서 그녀는 거의 처절할 만큼 엄격한 다이어트에 집착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가장 혹독한 다이어트의 노예였다. 케이크 종류는 절대로 입에 대지도 않았고, 구운 고기나 익히지 않은 야채를 양념이나 기름을 전혀 치지 않은 채 먹었다.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고 단지 극소량의 와인만 취했으며 디저트류 또한 입에 대지도 않았다.
다만 쇠고기 안심과 스테이크만은 그녀를 미치게 했다. 고기를 다 먹고 나서도 마치 고양이처럼 뼈다귀까지 핥아 먹었으니까. 어느 땐가 라 스칼라에서 노래하고 있던 기간에 저녁 7시 쯤 극장 식당에서 칼라스 부부가 식사를 했을 때, 마리아는 무려 28온스(약800g)의 스테이크를 먹어 치운 일도 있었다. 이걸 본 사람들은 눅나 그녀가 위 속에 그처럼 엄청난 양의 음식물을 넣고서 어떻게 노래를 할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 같은 예외를 빼고는 수년 동안 치열하게 고수해온 다이어트에도 불구하고, 칼라스의 체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이력이 쌓일수록 높아가는 명성도 자신의 보기 흉한 몸매에서 오는 칼라스의 슬픔을 해소해 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수수한 옷만을 입었고, 보석이나 악세사리를 피했다. 뚱뚱한 몸에는 어떤 옷도 맵시있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디다 또 그녀는 항상 다양한 피부질환에 시달리곤 했다. 언제나 부어있는 다리, 쓰라린 발목, 끊임없는 피부병, 그리고 지속적인 피로... 이 모든 것이 실은 그녀의 과중한 체중에서 온다고 생각한 메네기니는 아내를 데리고 여러 전문의들을 찾아 다녔으나 효과가 없었다. 기적을 행한다는 소리를 듣는 저명한 의사 코파 박사는 칼라스를 정밀 검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건강합니다. 당신에겐 아무런 병도 없어요. 그러니 치료할 필요가 없지요. 당신이 앓는다면 그건 당신의 머리 속에서만 앓는 겁니다. 당신네 예술가들은 모두 약간은 미쳐 있거든요. 게다가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뛰어난 예술까이니 딴 사람들보다 약간 더 미쳐 있을 수 있지요."
사실을 말하면 많은 의사들이 칼라스에게 약을 처방해 주거나 다이어트 충고하는 것을 두려워 했는데, 그것은 그러한 처방이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알지 못했던 까닭이다. 다소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약들을 갖고 있었지만, 어떤 전문가도 이 유명한 가수에게 그것을 실험해 보기를 꺼렸던 것이다.
칼라스의 예술성에 대한 평판이 높아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그녀의 뚱뚱한 몸은 점차 더 그녀를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녀는 더욱 자주 신문에 나타나고, 중요한 인사들과 만나며 리셉션에 초대되고, 우아한 여인들과 어울리게 되니, 이 때문에 자주 실제로 앓기까지 했다.
삶과 예술 활동에 결정적 영향 미친 체중 감소
또한 그녀는 주로 실제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어두운 색깔의 옷만을 입었으며, 어떤 경우에도 사진 찍히기를 극력 거부했다. 여행을 할 때면 호텔에 체중계가 없거나 정확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 항상 자신의 체중계를 짐 속에 넣고 다녔다.
이러던 그녀가 1953년 말쯤엔 갑자기 살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1951년 12월에 그녀의 몸무게는 210파운드였는데, 1954-54년 시즌이 시작될 무렵엔 144파운드까지 내려갔다. 정확하게는 1953년 말 그녀의 체중은 전혀 예기치 않게 뚝 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1954년쯤에 그녀는 완전히 날씬한 여인이 돼 있었다.
칼라스의 이같은 '변신'은 신문과 잡지에서 다투어 논쟁거리가 되었으며, 의사들과 영양학자들이 그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중반엔-특히나 여성들 사이에선-마리아 칼라스는 그녀의 노래보다도 신비스런 체중감소 때문에 더 유명했다. 매일처럼 그녀는 그녀의 비밀을 밝혀 달라고 애걸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여성들로부터 받곤 했다.
여러 가지 제품들을 제조하는 보건소와 상회들은 '칼라스 처방서'에 대한 배타적 특허를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금액을 그녀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칼라스의 신비스런 체중감소를 재빨리 광고에 이용한 경우가 유명한 '판티넬라 제분회사 사건'이었다. 1954년 2월 두 개의 주간지에 마리아 칼라스가 '판티넬라 제분회사의 제과요법'에 의해 체중이 줄었들었다는 광고를 실었는데, 거기엔 바로 이 요법을 칼라스에게 시행했다는(사실이 아니었다) 의사(메네기니의 매제) 조반니 카지롤리 박사의 서명이 있었다. 본인에게 어떤 사전 양해도 승낙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상업적 광고에(그것도 허위 사실로) 이용한 이같은 횡포에 미칠 듯이 화가난 칼라스는 당장 광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사건을 법정으로 몰고 갔는데, 소송은 5년이나 질질 끌었다. 판티넬라 회사의 사장인 파켈리 공은 법률까로서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12세의 조카였던 관계로 교황을 비롯해서 수많은 고위층 인사들이 이 사건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이 죽은 후 5년 만에 마침내 사건은 칼라스의 승리로 끝났다)
사실 남편인 메네기니조차 어떻게 그녀가 그런 변신을 했는가를 정확하게 알아내고자 했을 정도였다. 신문들은 별별 희한한 이론과 부조리한 가설들을 창안해 내었는데, 완벽한 몸매에 대한 필사적인 열망 때문에 칼라스는 끔찍한 단식과 야수같은 다이어트, 그리고 비밀의 요법을 실천했다고들 떠들었다. 심지어 어떤 필자는 칼라스가 스위스의 저명한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 의사는 칼라스에게 촌충을 섭취할 것을 권고했다는 얘기를 쓰기까지 했다. 그래서 칼라스는 그의 충고를 따라 샴페인 잔 속에 '체중을 줄이는' 기생충을 넣고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마리아 칼라스가 일종의 꼴사납고 거추장스런 한 마리 고래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여인으로 '변신'시킨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53년 말 메네기니 부부가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베르디가 운명한 방의 바로 옆방)에 묶고 있었을 때 라 스칼라의 공연을 보기 위해 메네기니는 혼자 외출했는데, 이런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극장에서 30분쯤 지났을 때 수위가 그에게 와서 마리아에게서 즉시 호텔로 돌아와 달라는 전화가 왔다고 전했다. 그가 혼자 외출할 때면 이런 일은 항다반사였으므로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극히 하찮은 일을 가지고 걸핏하면 그녀는 이같은 전화를 하곤 했다. 먹을 것이 생겨 함께 먹고싶다든가 혹은 '그저 함께 있고 싶으니 곧 돌아와 달라'는 따위의 순전히 어린애 같은 충동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는 두말 없이 그녀의 청에 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긴급한' 전갈은 혹시 베로나에서 당시 병중에 있던 그의 노모에게서 무슨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그는 객석을 빠져 나왔다. 그가 전화를 했을 때 마리아는 몹시 흥분한 상태에 있었다. "뭐라구요? 아직도 극장을 안 떠났단 말예욧?" 그녀는 고함을 쳤다. "날 혼자 내버려 두면 안돼요. 바티스타, 제발 곧장 와요. 나는 그걸 죽였어요!"
"뭐라구?" 그가 물었다. "와요, 빨리, 빨리" 그리고는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아내의 격렬한 기질을 익히 알고 있던 메네기니는 그녀의 '죽였다'는 말에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실은 칼라스가 목욕을 하다 촌충을 죽였던 것이다. "걱정 말아요. 그건 극히 흔한 기생충인 걸. 당신처럼 날음식을 상식하는 사람에겐 흔히 있는 일이야" 그리고 그는 밀라노의 의사에게 연락했고, 의사는 나머지 촌충도 박멸해야 한다면서 약을 처방해 주었다. 이틀 후 촌충은 완전히 구제되었다.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된 줄 알았는데, 다음 몇 주 동안 마리아는 자기 속의 무엇인가가 깜짝 놀랄 만큼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생활은 전처럼 계속되었으나, 자신이 전적으로 다른 인간이 된 것 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녀를 정기적으로 괴롭히던 여러 가지 질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녀느 한층 더 기민하고 자유로와졌으며, 기적과도 같이 1주일 만에 체중이 무려 6파운드나 떨어졌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칼라스 부부는 의사의 도움을 얻어 이 모든 변화가 촌충을 제거한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촌충은 체중을 떨어뜨리는데 반해, 마리아 칼라스에겐 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세기적 소프라노를 보기 흉한 뚱보로 만든 원흉은 바로 촌충이었던 셈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일단 그것이 제거되고 나니 체중은 저절로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섭생규칙은 전과 같이 지켰다. 빵과 케이크는 안 먹고, 구운 고기와 스테이크, 양념 안친 다량의 채소, 소량의 물, 그리고 와인 한 모금. 그외 그녀는 매일 마사지를 계속했다. 수년 동안 이같은 일과는 어떤 특별한 성과도 못 거두었지만, 이제 그것은 경이로운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녀는 1년 만에 90kg에서 60kg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따금 메네기니가 아내의 체중이 너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할 때면 칼라스는 불같이 화를 내게 되어 곧잘 부부는 대판 싸움을 하기도 했다.
체중이 줄어듦에 따라 칼라스의 기질도 변했다. 그녀는 한층 더 침착하고 쾌활해졌다. 정력은 배가 되고 더 이상 피로나 노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보통 뚱뚱하던 사람이 갑자기 살이 많이 빠지면 피부에 탄력성이 없어지는데, 칼라스에겐 그같은 변화가 안 일어났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팽팽하고 부드러우며 빛이 났다. 그녀는 우아한 옷차림을 하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훨씬 더 대담하게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마리아 칼라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인격의 여인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한 예술까의 육체적인 변모가 그의 전 삶의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와 같이 흥미있는 예는 사실 그리 흔치 않다. 칼라스의 신체적 변모는 그녀의 삶과 예술 활동에 근원적인 요인이었으니, 진실로 그녀의 체중이 90kg에서 60kg로 떨어진 1953년은 칼라스의 삶과 예술의 분기점이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오페라의 역사에서 한 장을 장식하게 된 획기적인 발단이기도 했다.
토스카니니와의 만남
마리아 칼라스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오페라에는 한번도 출연한 적이 없지만, 칼라스의 이력에서 토스카니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 것이다. 1947년 베로나 데뷔 이래 칼라스는 승리에서 승리로 나아가며 거의 이탈이아의 전역을 정복했지만, 오직 최고의 오페라 전당인 라 스칼라만은 그녀에게 마치 밀봉된 문처럼 닫혀 있었는데, 칼라스를 위해 이 밀폐된 문을 활짝 열어 준 것이 토스카니니였기 때문이다.
칼라스의 평생에 걸친 가장 원대한 꿈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봉 밑에서 노래하는 것이었다. 칼라스는 이 위대한 지휘자를 숭배했으며, 단순히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은 환히 빛나곤 했다. 훗날 그녀는 토스카니니와의 짧은 만남을 자주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사실 칼라스는 뉴욕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하고 있던 소녀 시절부터 토스카니니를 숭배했다. 그녀는 라디오를 통해 그가 지휘하는 음악을 들었고, 그가 지휘한 옛날 레코드도 몇 장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찬탄이 정점에 달한 것은 이탈리아에 건너와 그녀의 중요한 이력이 시작되고부터였다. 자신의 레퍼토리가 확장되고 새로운 마에스트로들과 작업하게 됨에 따라 그녀는 점차 더욱 광적으로 완벽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든 지휘자들이 저마다 그녀에게 제공하는 최선의 것을 흡수했지만, 아무도 전적으로 그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좀 더 나은 무엇인가를 열망했다. 그리고 오직 '숭고한 노장'인 토스카니니만이 이같은 그녀의 열망을 채워 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뉴욕에 있을 당시 칼라스는 토스카니니를 위해 노래하고 싶은 갈망에 못 이겨 친구인 베이스 가수 니콜라 모스코나에게 토스카니니와의 오디션을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칼라스의 사촌으로 그녀의 전기를 쓴 스티븐 리나키스에 의하면, 그 때 모스코나는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무명의 소프라노는 토스카니니와의 오디션을 청할 수 없는 거요" 라고 그녀의 청을 일소해 부쳐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문제를 그는 완전히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칼라스의 필생의 꿈은 오랫동안 망상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전혀 예기치 않게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더니 그것은 곧 현실로 되었다. 이것은 칼라스의 삶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 장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었다.
1948-50년에 걸쳐 마리아 칼라스가 승승장구의 이력을 쌓는 동안 공연이 끝날 때마다 예외없이 그녀의 분장실은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이 쇄도했고, 꽃다발을 가져오거나 단순히 그녀의 손에 키스하고 싶어 몰려드느나 찬미자들로 붐볐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칼라스를 거의 종교적으로 따라다니는 열광적인 숭배자가 있었는데, 그는 파르마 출신의 지주며 사업가인 루이지 스테파노티였다. 가수인 아내를 수년 전 사별한 그는 열광적인 오페라광으로 음악계 인사들과 교분이 넓었으며, 특히나 토스카니니 집안에 무시로 드나드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칼라스 부부는 스테파노티와 곧 친구가 되었는데, 마리아를 토스카니니에게 소개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이었던 것이다. 스테파노티는 토스카니니에게 자주 마리아 칼라스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언젠가 메네기니 부부를 토스카니니에게 소개할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1950년 9월에 마침내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즉 1951년은 베르디의 사망50주기가 되는 해로서 토스카니니는 베르디의 고향인 부세토에서 라 스칼라에 의해 공연되는 그의 오페라를 가지고 경축행사를 치르고 싶어 마땅한 예술가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스테파노티는 이 사실을 메네기니에게 편지로 알렸고, 그로부터 1주일 뒤에(9월22일) 토스카니니의 딸 왈리가 서명한 전보가 마리아 칼라스 앞으로 도착했다.
"저의 아버지는 밀라노의 둘리니가 20번지의 자택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떠나시는 28일 이전에 당신이 편리한 어느 때든지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해 칼라스는 27일 오후 내내 시간을 내겠다는 전보를 보낸 후 메네기니와 함께 밀라노로 갔다.
"마리아는 여행 동안 줄곧 신경과민이 돼 있었다. 이것은 그녀에겐 전례가 없는 현상이었다. 나는 많은 중요한 약속에 수많이 그녀를 동반했지만 언제나 그녀는 완전히 느긋하고 침착했었다. 그런데이번엔 몹시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토스카니니를 위해 노래한다는 것뿐 아니라 단순히 그녀가 무한한 찬찬을 바치고 있는 이 희유한 예술가를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극히 불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메네기니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토스카니니는 그 때 이미 83세였지만 정력은 조금도 감퇴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정중히 맞아 들여선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주로 메네기니를 향해 칼라스의 이력에 관련해서 꼬치꼬치 질문을 했는데, 사실 토스카니니는 그 모든 것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어째서 칼라스가 여태까지 라 스칼라와 계약을 하지 않았는가를 이해 못했다. 1950년, 칼라스는 라 스칼라의 <아이다>에 테발디의 대역으로 출연해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스칼라의 독재적인 관리인 안토니오 기링겔리는 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냉담했으며, 이탈리아의 모든 지역에서 그녀의 성가가 날로 올라가고 있었음에도 그에겐 마친 '칼라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라 스칼라의 여왕격인 레나타 테발디의 절대적 지지자로 지독한 쇼비니스트였던 기링겔리는 뒷날 문자 그대로 칼라스에게 무릎을 꿇게 되지만, 칼라스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한 페이지를 차지할 만큼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부유한 피혁 가문의 귀족으로 1945-72년에 걸쳐, 건강 때문에 은퇴했을 때까지, 기링겔리는 라 스칼라를 전제 군주처럼 지배했다. 그는 음악엔 무식했으나 경영엔 천재였다. 그가 라 스칼라를 관리한 시기에 이 오페라 극장은 너무나 영광을 누렸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오페라를 이야기할 땐 '기링겔리 시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당신은 내가 그처럼 오랫동안 찾고 싶었떤 인물이요"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메네기니가 기링겔리의 칼라스에 대한 냉담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노골적으로 경멸해서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식사가 끝난 뒤 토스카니니는 비로소 마리아를 초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생전에 한번도 베르디의 <멕베스>를 지휘해 보지 않았소. 레이디 멕베스의 배역을 해석할 수 있는 소프라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이 배역은 베르디에겐 특히 소중한 것이었소. 그 자신 그의 레이디 멕베스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편지에서 <나폴리인 대본가 살바토레 카마리노에게 쓴) 밝히고 있어요 - "나는 레이디 멕베스가 못생기고 사악하기를 원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무겁고 짓눌린데다 어두운 것이어야 하오'라고 - 나는 이와같은 자질을 지닌 소프라노를 결코 찾아내지 못했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신은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일 것 같아 직접 당신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이곳으로 청했던 거요. 만약에 당신이 그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말한대로라면 우린 <멕베스>를 공연할 수 있소. 나는 이 오페라를 지휘하지 않은 채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그는 피아노 앞으로 가 <멕베스>의 스코어를 펼쳐 연주하기 시작했다. 칼라스는 그의 곁에서 서 노래했다. 그녀의 얼굴은 목소리와 더불어 가사의 내용을 기가 막히게 반영했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1막 거의 전부를 내리 연주했다. "주의를 온통 그와 같은 자력으로 가득 채우는 이처럼 강렬한 기분을 나는 정녕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거의 두려움에 싸여 구석자리로 움츠려들고 말았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하찮은 것처럼 보였다" 라고 동석했던 메네기니는 쓰고 있다.
토스카니니는 돌연 노래를 중단시키고는 말했다. "당신은 내가 그처럼 오랫동안 찾고 싶었던 여성이오. 당신 목소리라면 이용할 수 있겠소. 나는 당신과 함께 <멕베스>를 공연하겠소. 내일 나는 기링겔리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그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리다" 마에스트로는 거침없이 만족을 표시했다. 그의 얼굴은 환히 빛났고 칼라스는 거의 황홀해 했다. 그런 다음 토스카니니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미 플로렌스에서 <멕베스>를 공연하는 관계로 시실리아니와 만났다는 걸 알아요. 나의 제의는 그 계약을 받아들이는 걸 배제한다는 걸 이해하겠지요?"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어떤 계약도 거절할 용의가 돼 있어요" 칼라스의 대답이었다.
베로나로 돌아오면서 칼라스는 남편에게 말했다. "과연 <멕베스>가 공연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건 문제가 아네요. 오늘 나는 밀라노에서 체험한 일 때문에 무한히 행복할 뿐이에요.
칼라스가 염려한 대로 과연 토스카니니의 <멕베스>는 공연되지 못했다. 토스카니니의 <멕베스>는 공연되지 못했다. 토스카니니는 약속한 대로 곧장 기링겔리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했고, 기링겔리는 곧 칼라스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는 않았다. 뉴욕에서 토스카니니는 밀라노의 딸과 아들을 통해 <멕베스>의 공연계획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써보냈으묘, 공연의 재정적 뒷받침도 확보되었지만, 부세토의 <멕베스>계획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마리아 칼라스와 토스카니니는 모종의 라 스칼라를 둘러싼 음모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회유한 예술가의 필생의 꿈 - 멕베스를 죽기 전에 반드시 지휘하겠다는 토스카니니의 꿈과 생전에 어떻게든 토스카니니의 지휘봉 밑에서 노래해보겠다는 칼라스의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서 정식 데뷔한 1952년의 두번째 시즌에 빅토를 데 사바타의 지휘로 칼라스는 <멕베스>에 출연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상대역인 멕베스는 엔조 마케리니였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토스카니니의 열띤 관심은 밀라노의 음악계와 대중 사이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결국 머지 않아 기링겔리는 칼라스 앞에 '엎드려' 라 스칼라의 문을 활짝 열어 주게 되었으니, 칼라스의 삶에서 토스카니니와의 만남은 정녕 위대한 은총이었던 셈이다.
1955년 4월에 라 스칼라에서 공연된 칼라스 출연의 <라 트라비아타>는 오페라의 역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기념비적인 공연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마리아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서 비올레타로 출연하기 위해선 믿을 수 없을만큼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라 스칼라의 데뷔는 반드시 <라 트라비아타>라야만 된다'는 일념을 가진 칼라스가 그토록 완강하게 밀고 나가지 않았던들, 적어도 라 스칼라에선 칼라스의 비올레타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라 스칼라의 전제적인 관리인 기링겔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칼라스에게 비올레타 역만은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리아 칼라스와 라 트라비아타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에서 대부분의 승리는 라 스칼라의 무대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녀 자신이 이 극장을 자신의 예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마리아 칼라스는 1951년 12월 7일, 베르디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로 라 스칼라에 데뷔한 후, 1962년 <메데아>에 최후 출연을 했을 때까지 만10여년 동안 총 182회 공연에 23개 배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라 스칼라의 디렉터 기링겔리와 칼라스의 관계는 애초부터 기링겔리의 칼라스에 대한 거부감이 기초가 돼 있었다. 칼라스가 자신의 오페라단에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거의 3년 동안 그는 칼라스를 객원이 아닌 정식 단원으로 계약하기를 거부했다. 칼라스의 어떤 전기 작가도 기링겔리의 이같은 적의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것은 순전히 이탈리아 가수들을 선호한 그의 광적인 애국주의(쇼비니즘)의 발로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죽기 얼마 전 기링겔리는 어느 인터뷰에서 1950년 4월 마리아 칼라스가 레나타 테발디 대역으로 라 스칼라에서 <아이다>에 객원 출연했을 당시, 자신이 칼라스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며 공연 뒤 그녀를 식사에 초대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1950년은 레나타 테발디가 라 스칼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칼라스의 공연을 실패로 이끌려는 적의에 찬 시도를 암시하는 일들이 있었지만(이틀테면 칼라스가 분장실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특별주문한 아이다의 의상을 발견했는데, 가발은 겨우 어린 아이에게나 맞을 만한 것이었다. 다행이 암네리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페도라 바르비에리가 아이다의 의상 두벌(하나는 자신의 것, 하나는 극장 소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한벌을 빌려 위기를 모면했다.), 그같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공연은 훌륭했고 관객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리아 '오, 나의 조국이여'가 끝날 즈음 관객들이 마지막 박수를 치기 시작했을 때 칸막이 좌석 어디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고함을 쳤다. 이 경고는 감히 오랫동안 갈채를 계속할 수 없게 했다.
게다가 공연이 끝난 뒤 극장측에선 아무도 칼라스를 축하해 주기 위해 무대 뒤로 오지 않았으며, 기링겔리는 명백한 악의로써 그녀를 무시했다. 마리아의 분장실에서 기링겔리를 기다리고 있던 메네기니는 틀림없이 그가 올 것이라면서 "그가 뭐라고 말할지 두고 봅시다"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이따금 나는 문으로 가서 바깥을 엿보았다. 마침내 그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의 방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방 앞을 지나면서 그녀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바로 곁방인 바리톤 데 팔키의 분장실 앞에 멈추어 서서는, 마리아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좋아, 좋아, 그대는 다시 한번 훌륭하게 해치웠어'라고 떠들어댔다'라고 메네기니는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칼라스에 대한 라 스칼라 디렉터의 적의
기링겔리의 칼라스에 대한 거부감은 1951년 1월에 메노티의 오페라 <집정관>을 라 스칼라에서 상연하기로 결정했을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메노티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토스카니니는 그에게 칼라스를 추천했다. 메노티는 밀라노에 가서 칼라스를 포함한 여러 소프라노들을 오디션한 뒤 칼라스가 가장 적임자라는 판단을 했다. 그는 기링겔리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소프라노를 찾아 냈는데 그 이름은 마리아 칼라스라고 했다.
기링겔리의 대답인즉 이랬다.
"마리아 칼라스라고요? 오, 하나님! 안돼요. 절대, 절대로, 안돼요!"
"하지만, 들어봐요. 당신은 약속하기를 내가 할 수 있다고...."
메노티는 항의했다.
"당신이 선택하는 어떤 가수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지요. 하지만 이 극장에선 마리아 칼라스는 안돼요. 오직 그녀가 객원 예술가로 올 때만 가능해요"
그래서 메노티는 칼라스에게 이 뜻을 전했다.
"정규 단원이 아니고는 결단코 라 스칼라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어요"
칼라스의 대답이었다.
메노티는 칼라스를 설득하려 했으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헤어지면서 칼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메노티씨, 당신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즉 나는 라 스칼라에서 노래할 것이고, 기링겔리는 그의 여생동안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칼라스의 예언이 들어맞았음을 이후의 사실이 증명하게 된다.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 입성한 바로 첫날부터 두 사람 사이엔 무시무시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것은 기링겔리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가 예술적 명성이 더이상 움직일 수 없게 확고해진 1951년 중반쯤엔 기링겔리도 칼라스의 예술적 자산으로서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즉 그녀와 부딪히든가 그렇지 않으면 오페라계의 주류에서 단절되는 위험을 감수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는 칼라스와 제휴하는 것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길리 되리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후원해 온 몇몇 예술가들을 탈락시키고, 칼라스 앞에 달려가 마침내 "꿇어 엎드리기로' 결심했다.
"라 트라비아타없는 라 스칼라엔 흥미 없어요"
기링겔리는 냉정하고 유능한 책략가로서, 그의 가장 탁월한 재능은 가장 상서로운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가를 알아 내서 그 방향으로 곤두박질치듯 내달리는 것이었다. '만약에 기링겔리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면 그는 가장 헌신적인 구두닦이 소년이 된다. 만약에 그에게 당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다면 그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무자비하게 당신을 내팽개쳐 버린다. 만약에 전쟁 후 라 스칼라를 거쳐간 그 모든 예술가들이 말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폭로되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칼라스는 기링겔리의 인간됨을 가차없이 단죄하고 있다.
이러한 기링겔리였으니 만큼 바람이 바야흐로 칼라스 쪽으로 가장 상서롭게 불고 있음을 안 이상 그녀를 놓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1951년 5월 플로렌스에서 칼라스가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 출연한 후 기링겔리는 칼라스를 찾아와 라 스칼라의 다가오는 1951년-52년 시즌을 칼라스의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로 개막하자는 제의를 했다. 또한 그는 같은 시즌을 위해 <노르마>와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및 <돈 카를로>도 제안했다.
이 당시에 이미 칼라스의 <노르마>는 특히 명성이 있었고, 사실상 노르마 역엔 그녀에 필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비올레타 역시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배역임을 알고 있었다. 1951년 1월에 플로렌스에서 <라 트라비아타>로 대성공을 거두었던 칼라스는 바로 이 오페라로써 라 스칼라에 데뷔하기를 원했다. 소프라노에게 지극히 매혹적인 비올레타 역은 사실 극도로 까다로운 배역이기도 한데, 참으로 이 역을 훌륭히 해내려면 세 가지 다른 목소리를 능란하게 구하해야 하는 것이다. 칼라스의 가장 유명한 적수인 레나타 테발디조차 라 스칼라에서 이 오페라로 전적인 성공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칼라스가 특별히 <라 트라비아타>로써 라 스칼라에서 자신의 명성을 확립하고 싶어하는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테발디를 후원해 온 기링겔리로선 테발디가 많은 어려움을 겪은 이 오페라를 칼라스에게 제시할 수는 없었다. 칼라스는 자기가 가장 흥미를 갖는 오페라는 <라 트라비아타>라는 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장기인 <노르마>를 포기하더라도 그대신 비올레타 역으로 출연하고 싶어할 정도였다. 요컨대 칼라스는 <라 트라비아타>가 없다면 라 스칼라의 시즌은 그녀에게 별 흥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첫번째 회동에선 명백한 합의를 보지 못했는데, 10월 2일 기링겔리는 라 스칼라의 행정관인 올다니와 변호사를 대동하고 다시 칼라스를 방문해서 정식 계약을 하고자 했다. 기링겔리는 우선 돈 얘기로 회담을 시작했는데, 칼라스는 즉각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당신의 제의는 정말 반가워요. 라 스칼라에서 노래하는 것은 나의 목표중 하나였어요. 그러나 <라 트라비아타>가 없다면 흥미 없어요. 적어도 이번 시즌엔 그래요. 따라서 다른 문제들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라 트라비아타>문제부터 해결합시다"
기링겔리는 너무나 놀라 벙어리처럼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스칼라 시즌의 개막일 밤을 포함하는 계약 제의에 가수 측에서 특별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최초의 경우였을 것이다. 칼라스의 태도는 기링겔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이 예술가는 감언이설로 속여 넘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에게 경고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짧은 침묵 뒤에 기링겔리는 어떻게든 칼라스의 <라 트라비아타>를 포기하도록 칼라스를 설득하려는 대화를 계속했고, 동석한 올다니도 이에 합세했다. 칼라스는 두 사람이 지칠 때까지 역설하도록 조용히 경청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안하고 있는 것이 매우 드문 기회이며, <라 트라비아타>없이도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좋아요. <라 트라비아타>가 불가능 하다면 이 얘기는 내년에 계속하기로 해요. 여러분은 밀라노에서 할 일이 많을텐데 나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기를 원치 않아요"
이렇게 칼라스는 결론 지었다.
그들 셋은 일어섰다. 기링겔리 일행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혼란된 얼굴로 칼라스를 따라 문 앞으로 가 작별을 고하고는 거의 비틀거리며 떠났다. 메네기니는 둘만 남자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이 기회를 붙잡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생각해"
"나는 내 식으로 라 스칼라에 가기를 원해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중단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10분도 되지 않아 벨이 울리더니 기링겔리와 두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숙고해봤는데 아무래도 우리극장에서 이 시즌을 열 사람은 당신이 돼야 할 것 같소. 우린 최선을 다 하겠소. 물론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링겔리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아 다시 계약 조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4년 후에야 무대에 오른 라 트라비아
그러나 기링겔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를 리허설 하고 있는 동안 줄곧 칼라스는 <라 트라비아타>문제를 꺼냈으나, 기링겔리는 단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개막 공연 날(1951년 12월 7일)엔 밀라노 사교계의 모든 인사가 라 스칼라에 출석했다. 미국과 유럽의 도시에서도 팬들과 전문가들이 달려왔다. 성공은 폭발적인 것이어서 칼라스는 대번에 라 스칼라의 새로운 여왕이 되었다. 기링겔리는 이 눈부신 성공으로 칼라스가 <라 트라비아타>건을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칼라스는 1952년 1월이 되자 메네기니에게 <라 트라비아타>가 없다면 <노르마>에도 출연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기링겔리에게 보내도록 했다. 편지를 받은 기링겔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위기를 적당히 넘기려고만 했다. 참다 못한 칼라스는 마침내(1월 13일) 메네기니를 동반하고 기링겔리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우스꽝스런 핑계를 대며 어물어물 넘어가려던 기링겔리는 할 수 없이 진심을 털어놓았다.
"이 문제를 계속 얘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오. 우린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할 수 없어요"
칼라스의 화가 폭발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애초부터 나를 속인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전적으로 기링겔리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우리집을 방문했던 10월에도 확실히 당신은 이 오페라를 상연하지 않을 작정이었던 거죠.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어요. 나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서 노래하도록 하기 위해 내게 거짓말을 했던 거예요"
기링겔리는 얼굴이 하얗게 되어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고정하세요. 제가 실수를 했어요. 제발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내게 말해주세요"
<노르마>의 공연은 대대적으로 예고되었으며,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이후 칼라스가 출연하기로 예고된 다른 오페라에 대해서도 극장측에선 엄청난 광고비를 지출한 터였다. 다행히 메네기니가 끼어들어 사태를 무마시켰다.
"잘못은 당신에게 있으니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제시해 보시죠"
그래서 기링겔리는 칼라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다음 시즌에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어울리는 장대한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하기로 약속하지요. 금년에 이 오페라가 공연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정규적 출연료를 지불하기로 하겠어요"
그는 <라 트라비아타>의 '공연되지 않은 4회 출연료'로 40만 리라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당시 칼라스의 1회 공연 보수는 35만 리라였다).
이렇게 해서 칼라스는 예정대로 <노르마>에 출연했고, 말할 것도 없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와 그 외의 오페라들도 잇따라 공연되었으며 마침내 칼라스는 숙망의 라 스칼라를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가 비올레타로 스칼라의 무대에 서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였다. (<라 트라비아타>는 1955년 봄 시즌 때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루키노 비스콘티 연출로 공연되었는데, 알프레도 역엔 스테파노, 제르몽 역엔 에토레 바스티아니니가 출연했다. 프랑코 제피렐리는 이 공연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칼라스를 주연으로 <라 트라비아타>를 영화할 계획을 품고 수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설득했으나, 결국 실현을 보지 못했다.)
한 어리석은 디렉터의 농간으로 하마터면 세계는 오페라사에 빛나는 역사적인 <라 트라비아타>를 영원히 볼 수 없게 될 뻔했던 것이다.
수수께끼의 죽음
마리아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아직도 비교적 젊은 나이인 54세에 타계했다. 그녀의 죽음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보다 불과 몇 년 앞서 1973-74년에 걸쳐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세계 순회연주를 했을 때 그녀의 노래를 들었던 팬들에겐 칼라스의 갑작스런 죽음은 더욱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게다가 이 세기적 소프라노의 급사를 알리는 텔레비전에선 무척 이상한 보도를 했던 것이다. 즉 칼라스의 사망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갔지만 아무도 그녀의 유체를 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칼라스와 가장 가까웠던, 가장 오랜 친구인 스테파노조차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칼라스가 파리의 아파트에서 죽었을 당시, 남편 메네기니는 심장병으로 입원했다 퇴원한 후 요양 중이었는데, 의사들의 만류로 장례식에 갈 수 없게 되자 칼라스에게 대단히 헌신적이었던 자신의 하녀 엠마의 친한 친구였던 칼라스의 하녀 브루나는 파리에서 전화로 엠마를 오지 못하게 했다.
"유체를 보는 건 불가능해. 오지 말아요. 살았을 때의 그녀를 기억하도록 해요"
후에 파리로 간 메네기니는 브루나로부터 칼라스가 죽게 된 경위를 자세히 들었다. 마리아는 목욕을 한 뒤 침실로 가려고 애쓰다가 갑자기 죽었다. 그날 아침 마리아는 아침식사를 했는데, 나중에 목이 탄다면서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했다. 브루나는 욕실로 주스를 갖다 줬고 마리아는 그걸 단숨에 마셨다. 브루나가 부엌으로 돌아왔을 때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달려와 본즉 마리아는 의식을 잃고 마루 위에 쓰러져 있었다. 브루나는 다른 하인, 즉 페루치오를 불렀다. 그리고 둘은 함께 주인을 침실로 옮겼다. 그들이 그녀를 침실로 눕혔을 때, 이미 그녀의 숨은 끊어져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의문투성인 칼라스의 죽음.... 칼라스는 자살했는가?
칼라스의 죽음은 의문 투성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검시가 있을 법했지만, 친척 중 아무도 그걸 요구하지 않았고, 하물며 검시조차 없었다. 장례식은 9월 19일 화요일이었다. 시체는 파리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로 운반되었다가 거기서 공동묘지로 갔는데, 장례식을 어찌나 서둘러 처리했던지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인 듯 했으며, 누구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는 노여움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시체는 매장하지 않고 화장으로 처리했다. 후에 마리아 칼라스의 무덤을 방문한 메네기니는 묘지 관리인에게 대체 누가 화장을 지시했냐고 물었다. 그는 당시의 기록이 있는 장부를 메네기니에게 보여 주었다. 마리아의 관을 들고 온 사람에게 당시 관리인은 의례적인 질문을 했다.}
"어느 편으로 할까요?"
"화장으로 해주시오"
이게 대답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장 루앙 이라고 합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친척 중에서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통상 시체가 도착한 다음날 화장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마리아의 시체를 즉각 화장했다는 것이었다. 관이 묘지에 도착한 지 30분만에 그녀의 시체는 재로 변했다고 관리인은 설명해 주었다.
메네기니에 의하면, 마리아 칼라스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았다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칼라스는 극도록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생활의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조직적으로 영위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메네기니와 함께 살 동안 그녀는 자주 그에게 만년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과 매장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그녀는 당시 두 사람이 가장 아늑한 둘만의 생활을 즐겼던 별장이 있는 북이탈리아의 휴양지 시르미오네의 관청에 가서 두 사람의 무덤을 위한 땅을 사두자고 끊임없이 졸라대었다.
그렇게 해서 죽은 뒤에도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있자고 했다. 메네기니가 일에 쫓기느라 바빠 그녀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부부싸움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녀의 유언에 관해서 말하자면, 생전에 그녀는 지극히 뚜렷한 생각을 토로하곤 했다. "우린 아이가 없으니까 우리의 재산을 암연구협회에 기증하면 근사할 거예요. 이 무서운 병은 어느 날엔가는 의사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정복될 거예요. 그러니 나는 이들의 투쟁을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편에게 말했던 것이다.
1974년 칼라스가 스테파노와 더불어 세계 순회연주를 했던 기간에도 그들이 밀라노에서 암 치료협회의 환자들을 위한 사적 연주회를 가졌던 걸 보면 칼라스가 옛날에 품었던 계획이 변치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그녀의 사후 어떤 문서상의 유언도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에 관련해서 메네기니는 참으로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느 날 밤 마리아가 꿈 속에서 나를 찾아와 말했다.
"바티스타, 유언을 기억하세요"
그녀는 이 말을 세번 되풀이했다. 마치 내 마음 속에 새겨 두고 싶어하는 듯이. 나는 잠에서 깨서 꿈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게 말하려고 했던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자문하고선 별별 추측을 다 해보았다. 마침내 나는 수년 전에 있었던 어떤 일이 기억났다. 마리아와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떤 서류에 서명하기 위해 우리의 변호사(당시는 트라부키였다) 사무실로 갔는데, 트라부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끊임없이 여행을 하시지요? 혹시 두 분은 각자가 다른 쪽을 수익자로 지정하는 유언을 만들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나요? 물론, 당신들에게 무슨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어떤 사고가 생긴다면 적어도 살아 남은 사람은 어떤 재정적 걱정은 없어아지요"
"당신 말이 맞아요" 라고 마리아는 말했다.
"우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좋은 생각이예요. 지금 아예 일을 처리하지요"
나는 한 장의 백지에다 트라부키가 부르는대로 받아 썼다.
'내가 죽게 되면 모든 것을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에게 남긴다'
그리고 서명했다. 마리아 역시 그렇게 하고서 우리는 두 장의 서류를 트라부키에게 맡겼다.
이일을 기억하자 나는 마리아가 말한 유언이 바로 이것일 것이라고 깨달았다. 만약에 다른 유언장이 없다면 이것은 아직도 효력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낸담? 벌써 20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러나 다행히 아무리 하찮은 일도 전부 기록해 두는 '메모광'이었던 메네게니는 혹시나 해서 다락 속에 있는 많은 서류 뭉치를 뒤지다 어떤 마분지 상자 속에서 기적적으로 당시의 기록을 찾아냈다. 그것은 1954년 5월 23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트라부키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는데다, 생전에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리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의 사후 그에게 속한 모든 서류는 그의 동업자들이 나누어 가졌는데, 메네기니는 54년 당시의 트라부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한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 서류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확신하지만 찾아는 보지요"
변호사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이 또한 기적적으로 그가 아무 생각없이 옛날 서류더미 가운데 무턱대로 집어올린 첫 번째 서류 속에 마리아 칼라스의 유서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메네기니는 마리아가 죽은 지 한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서류를 지참하고 파리로 가게 된다.
프랑스에서 유언 검인이 끝난 후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유산을 전부 차지하려는 그녀 모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6개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통렬한 법정 투쟁이 계속되었는데, 1978년 5월 마침내 쌍방은 유산을 동등하게 나누어 갖는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 뒤 한 달만에 조지 5세 호텔에서 파리 소재 칼라스의 아파트에 있는 가구, 잡기 등의 경매가 이틀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 때 메네기니가 터뜨린 감정의 폭발은 여러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이같은 경매는 정말 치욕이요!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을 모욕하고 있소. 이런 일은 결단코 허용돼서는 안되는거요"
따라서 이틀 간의 경매에서 가장 많은 물건을 매입한 사람은 바로 메네기니였다. 그는 자신이 칼라스와 함께 살던 시절 그녀에게 선물했던 대부분의 그림들을 포함해서, 그녀의 침대와 18세기 실크 카펫 등을 구입했다. 그는 마리아의 재산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녀의 추억을 간직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여생을 바치려고 했다. 메네기니의 꿈은 그들 부부가 마지막 결혼생활을 영위한 시르미오네에다 마리아의 기념물을 전시해 두는 '칼라스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계획을 완수하기 전에 그는 타계하고 말았다.
메네기니는 결국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한채 죽었다. 그가 마리아의 모친과 유산을 나누어 갖게 됐을 때, 그는 아내의 서류들을 갖게 해달라고 했다. 혹시 그 속에서 아내의 죽음에 대한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였따.
그러나 거의 모든 것이 칼라스의 스튜디오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법원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남은 몇 가지 물건 가운데 칼라스가 항상 침상 곁의 나이트 테이블 위에 두고 보던 기도서가 있었다. 그런데 이 기도서 속 어떤 페이지에서 메네기니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키는 기록을 발견했던 것이다.
죽기 전 자살 암시하는 메모 남겨"
그것은 런던 사보이 호텔리의 머리 글자가 찍힌 푸른 종이었는데, 거기다 마리아는 연필로 몇 줄 적어놓고 있었다. 오른쪽 위쪽 구석에 이탈리아어로 '77년 여름'이라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이란 걸 뜻했다. 날짜 아래쪽엔 'A T'라 적혀 있었고 이것은 '티타(Titta)에게'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 T는 마리아가 남편 메네기니에게 편지를 쓸 때 통상 사용하던 약자였다(바티스타 메네기니의 애칭은 티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엔 다섯 줄로 된 다음과 같은 시구가 적혀 있었다.
이 끔찍한 순간에
내게 남은 건 그대뿐
그대만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그것은 내 운명의 마지막 부름
인생의 노상에서 마지막 건너야 할 길>
이것은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조콘다>의 제 4막에서 조콘다가 부르는 자살을 결심하는 극적인 작면을 보여 주는 이 아리아는 '자살(Suicidio)!'이란 한마디로 시작되는데 칼라스는 이 단어를 적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너무나 의미심장한 다섯 줄의 메모에 함축되어 있음직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추측을 하도록 유혹하는가? <라 조콘다>는 칼라스와 메네기니에겐 운명적인 의미가 있었다. 30년 전 그녀가 이탈리아의 무대에 처음 출연한 것이 이 오페라였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튼 것도 바로 이 오페라의 리허설 때였다. 또한 그녀가 1959년 9월초에 남편을 버리고 오나시스를 따라가기로 결심했을 때도 역시 <라 조콘다>를 레코딩하고 있을 때였다.
칼라스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적어도 그녀는 여러 번 자살을 '생각'했음에는 틀림없다. 만년에 칼라스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절망적인 고독 속에서 살았다. 오나시스가 죽은 뒤로 그녀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았다. 때로 위대한 예술가들이 고독을 즐기는 것과는 달리 마리아 칼라스는 천성적으로 고독을 두려워했다. 메네기니와 함께 살 당시에도 칼라스는 혼자 있는 걸 싫어해서, 언제나 남편을 침실 바로 곁 방에서 일하도록 설득했고, 공연 때 절대로 관객 석에 있지 말고 무대 뒤에서 자기와 가까이 있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같은 그녀의 기질을 볼 때 만년의 고독은 진실로 그녀에겐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칼라스의 운전수 페루치오에 의하면 그녀는 그가 휴일인 일요일에도 자기 곁에 있게 하려고 온갖 책략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의 휴일계획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고 한다.
죽기 며칠 전 칼라스가 메네기니와의 공동의 친구 한 사람에게 털어 놓았다는 '진심'은 참으로 가슴을 치는 바가 있다.
"나는 시르미오네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모릅니다. 평생 나는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많은 과오도 저질렀어요.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거죠"
이 말을 전해 주면서 친구들은 메네기니에게 먼저 행동을 취하라고 다그쳤다.
"마리아가 자존심이 강한 여잔줄 알지 않소? 그녀가 먼저 화해를 청해 오리라곤 기대 말아요. 전화를 해요. 가서 그녀를 만나요. 두 사람은 다시 결합하게 되리란 걸 알게 될테니"
그러나 메네기니 역시 노인의 완고함을 가지고 버티었다.
"이 집을 뛰쳐 나간 것은 그녀였소. 먼저 행동을 취해야 하는 쪽도 역시 그녀라야죠"
만약에 두 사람 중 어느 하나라도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단순히 마음 속 진실의 명령의 따랐던들, 파국은 방지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오페라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세기적 소프라노도 인간적 외로움에는 그렇게 약했던 것이다.
from 박태영의 오페라 리뷰 - http://beowulf.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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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칼라스님 덕분에 더 칼라스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잘 읽고 글 옮겨갑니다
인생무상!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