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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흥(慶復興)의 초명(初名)은 천흥(千興)이고, 청주(淸州)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경사만(慶斯萬)으로 성품이 소박하였으나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질녀(姪女)에게 장가들어 궁궐[禁掖]에서 친숙하게 모시는 것이 환시(宦寺)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기롱(譏弄)하였다. 관직이 우대언(右代言)에 올랐고, 일찍이 임금의 명령을 받아 마리산(摩利山) 참성(塹城)에서 초제(醮祭)하였더니 공중에서 마치 “경대언(慶代言)은 불행하게도 명이 짧으리라.”고 하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다. 돌아와서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더니, 얼마 안 되어 과연 죽었다.
경복흥의 성품은 청렴하고 곧았으며, 여러 번 옮겨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임명되었으며, 판추밀원사 참지문하정사(判樞密院事 叅知門下政事)를 역임하였고,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로 승진하였다. 그때 경성(京城)의 수축(修築)을 의논하였는데, 경복흥이 정세운(鄭世雲)·유숙(柳淑)과 함께 말하기를, “지금 사방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 민(民)이 상처받고 굶주리고 있는데, 만일 성곽을 쌓게 되면 민이 장차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역사(役事)를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기철(奇轍)을 벤 공(功)으로 1등에 녹선(錄選)되었고, 참지중서성사(叅知中書省事)에 올랐다. 어사대(御史臺)에서 황상(黃裳)과 양백연(楊伯淵)이 판밀직(判密直) 신귀(辛貴)의 아내 강씨(康氏)를 간통한 것을 탄핵하였더니, 경복흥이 말하기를, “강씨가 절개를 잃은 것은 남편이 유배되어 무료함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신년(丙申年, 1356) 이래로 유배된 자가 참으로 많아 그 아내들 가운데 공허함을 원망하여 절개를 잃은 자가 많으니, 청컨대 모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더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경복흥을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았다가 곧이어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다. 병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주둔하였는데, 적(賊)을 두려워하여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왕이 노하여 군법(軍法)으로 논죄하고자 하니, 홍언박(洪彦博)이 말하기를, “경복흥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조심스럽고 성실하지만 장략(將略)에는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은 등용한 자의 허물입니다.”라고 하니, 왕의 노여움이 풀렸다. 적이 퇴각하자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고, 곧이어 평장사 수문하시중(平章事 守門下侍中)에 임명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359)에 홍건적을 격퇴한 것과 신축년(辛丑年, 1361)에 왕을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모두 1등에 녹선되었다.
최유(崔濡)가 원(元)에 있으면서 황제에게 참소하여 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요양성(遼陽省)의 병력을 일으키자고 하였더니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고, 이가노(李家奴)를 파견하여 왕의 인장(印章)을 거두려고 하였다. 왕이 경복흥(慶復興)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삼아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고, 이순(李珣)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이성(泥城)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우제(禹磾)와 박춘(朴椿)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아 강계(江界)와 독로강(禿魯江)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였다. 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홍선(洪瑄)·지용수(池龍壽)를 여러 주(州)에 나누어 주둔시켰는데, 모두 경복흥의 지휘를 받게 하였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 정찬(丁贊)을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로 삼았다.
박춘이 이가노가 장차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두어 병졸 수천 명과 갑사(甲士) 200여 명을 거느리고 노루 2마리를 산 채로 잡아 이가노의 막사로 가서 말하기를, “저는 모처(某處) 만호(萬戶) 관할의 천호(千戶)인데, 왕이 저로 하여금 왜구(倭寇)를 막으라고 해서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왕을 폐립(廢立)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러합니까? 저는 장차 우리 왕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노루를 잡아 대접하니, 이가노가 탄식하면서도 또한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박춘이 또한 지름길로 휘하의 군사를 이순의 둔소(屯所)로 보내 이순으로 하여금 이가노를 만나 그 역시 그와 같이 하라고 하였다.
정찬은 휘하의 병마사(兵馬使) 목충(睦忠)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해처(要害處)에 주둔하게 하였다. 목충은 곧 재상(宰相) 목인길(睦仁吉)의 사촌동생인데, 〈사촌형의〉 세를 믿고 정찬의 지휘를 따르지 않아 정찬이 제압할 수 없었다. 목충이 정찬을 원망하면서 정찬이 덕흥군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고 무고(誣告)하고, 이에 둔소(屯所)를 버리고 정찬의 진영 가까이까지 가서 그를 습격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정찬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버리고 경복흥의 진영으로 달려가서 그의 무고함을 밝히려고 하였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정찬을 순군(巡軍)에 가두고 목충을 불러 대질시켰는데, 사실을 증명할 것이 없었으므로 정찬이 울분에 차서 죽었다. 정찬의 성품은 너그러웠고 무예(武藝)가 있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경복흥이 덕흥군을 따르는 자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부로(父老)들과 그 자제(子弟)들은 혹은 공명(功名)을 위해 혹은 황제에게 조회하기[朝覲] 위해 빈객(賓客)이 되어 중국(中國)에 갔다. 체류한 시일은[久近] 같지 아니하나 객지의 밥을 먹으며 늙었으니 어찌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길은 멀고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돌아갈 길은 더욱 멀어진다. 부모와 처자들을 밤낮으로 꿈꾸고 생각하여 말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지만 겉으로는 저들을 공경하는 것 같이 한다. 곡식[粟]을 한 움큼 쥐고 점을 쳐보고는 망령되게 기뻐하고 또한 슬퍼하며 ‘어느 달 어느 날에 내가 돌아갈 것인가?’라고 한다. 어찌하여 이제 또한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가? 다른 사람의 교묘한 말을 듣고 가짜 왕을 좇아 몸을 보호하기 위해 궁시(弓矢)와 갑인(甲刃)을 두르고 도적떼를 곁으로 불러 망령되게 같은 패거리[羽翼]라고 부른다. 바람 몰아치는 들판에서 자고 먹으면서 정해진 거처도 없이 멍하니 세월만 보내고 있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도모해서도 안 될 일을 도모하며,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무턱대고 말하기를, ‘우리 일이 혹시 이루어지기만 하면 이로써 삼족(三族)을 만나고 내 자신도 영달(榮達)하여 우리 마을을 크게 빛나게 하고 조상의 묘소[松楸]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것이 어찌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고[緣木求魚], 배를 타고 산에 오르는 것과 다르겠는가? 다만 스스로 고생만 하고 미쳐서 날뛰다가 죽을 뿐이다.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고 배를 타고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이미 미쳐서 날뛰는 것이라 해도 오히려 재앙은 없다. 그러나 너희가 받을 재앙은 차마 입에 담고 말할 것이 못된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 주상(主上)께서는 지극히 인자하여 너희들의 잘못을 고쳐주고 너희들의 삼족을 보존하고자 하여, 비록 법리(法吏)가 형벌을 의논하고 군사를 선발하여 토지를 몰수하자고 해도 또한 굳이 허락하지 않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였다.
또한 연전(年前)에 변방의 장수들이 용맹을 믿고 홍건적(紅巾賊)을 대비하지 않다가 적이 도성(都城) 가까이 침략하자 그제야 허둥지둥했는데, 주상께서 스스로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같이 보호하여 지켜줄 이 없는 자를 먼저 피난시켜 적의 예봉(銳鋒)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다. 또 남행(南幸)해서는 자식처럼 은혜를 베풀어 너희의 삼족들이 목숨을 보존하게 하고, 또한 궁핍하지 않게 한 것은 이제나 예전이나 똑같았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오히려 몸을 바쳐 은덕 갚을 줄을 알지 못하고 그릇되게 백가(白家)의 자식을 따라 스스로 반역의 그물에 걸렸도다. 반드시 삼족을 멸하고, 분묘(墳墓)를 없애며, 집을 웅덩이로 만들고, 토지와 가솔들을 몰수한 연후에야 그만둘 것인가? 어찌 나라 사람들만 너희들을 도륙할 뿐만 아니며, 사직(社稷)과 귀신(鬼神)도 은연중에 크게 주살(誅殺)을 내릴 것인데, 너희들은 어찌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이와 같이 하느냐? 그러나 너희들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또한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이제 다시는 하지 말고 다만 불러서 달래려고 한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 누가 친구가 아니며, 관직에 있는 인사들 가운데 누가 친척[姻親]이 아니겠는가? 옛날을 회복하게 되면 진실로 다른 뜻을 품지 않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호월(胡越)과 같은 원수지간이 되지 말 것이며, 유령[鬼蜮]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말라. 또한 옛날 소무(蘇武)가 양(羊)을 먹이면서도 오히려 사신의 절개를 지켰고, 관중(管仲)은 창을 던졌지만 마침내 환공(桓公)을 섬겼으니, 두 사람의 일을 잘 살피도록 하라. 주상과 재신(宰臣)들이 협의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돌아오는 자는 가짜 왕에게서 받은 관작에서 1급(級)도 강등하지 않고 그대로 벼슬을 줄 것이라고 하였다. 아아! 사방의 산에는 눈이 가득 찼고, 큰 들판에는 바람이 부는데, 수레 아래에서 담요를 덮고 우러러 별을 보면 그때 고향 생각이 얼마나 나겠는가? 월(越)의 새는 남쪽 가지에 깃들고 여우나 오소리도 죽을 때면 머리를 제 보금자리 있는 언덕에 두는데, 너희들은 사람으로서 짐승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 글이 너희들의 부중(部中)에 도착해서 3일 안에 너희들의 무리들을 잘 타일러 신속하게 투항해 오면, 물고기가 물을 얻는 것과 같이 하고 새가 수풀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하리라. 아아! 이것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과 영원히 결별하리라.”고 하였다.
이순이 또 글을 보내어 최유·나영걸·유인우(柳仁雨)·황순(黃順)·홍법화(洪法華) 등을 설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태조(太祖)께서 삼한(三韓)을 통일한 이래로 신성한 자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왕씨(王氏)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은 너희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성(異姓)인 백가의 자식을 세워서 왕을 삼고, 도리어 부모의 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가? 너희들이 향토(鄕土)를 떠나고 친척을 하직하고 몸과 마음을 괴롭히면서 1,000리(里)나 먼 곳에서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몸을 부귀하게 하고 향당(鄕黨)의 친척들을 입신출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가? 이제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오고자 하면 너희의 삼족은 종자(種子)도 남김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비록 들어오더라도 누구와 함께 영화(榮華)를 누리겠는가? 또한 사람의 자식이 되어 난적(亂賊)이라는 이름을 면하지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겠는가? 마땅히 각각 몸을 던지고서 강(江)을 건너오라. 오면 죄(罪)가 가벼워질 것이고, 오지 않으면 〈오히려〉 죄가 무거워질 것이다. 가히 삼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최유가 덕흥군을 모시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는데, 최영(崔瑩)·안우경 등 여러 장수들이 이를 격퇴시키자 최유가 강을 건너 달아났다. 경복흥이 녹사(錄事) 김남귀(金南貴)를 보내어 승첩(勝捷)을 알리자, 왕이 김남귀에게 은(銀) 1정(錠)을 하사하였으며, 사람을 보내어 경복흥에게 술을 하사하고 좌시중(左侍中)에 임명하였다. 개선하자,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왕을 영접하는 의례와 같이 하게 하고, 백관(百官)들로 하여금 국청사(國淸寺)의 남교(南郊)에서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는 적신(賊臣)의 토지와 가옥 및 재물을 하사하였다.
신돈(辛旽)이 권력을 장악하자, 경복흥(慶復興)이 비록 재상(宰相)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政事)에 참여할 수 없었고, 신돈에게 배척당하여 파직되어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뒤에 오인택(吳仁澤) 등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杖刑)에 처해지고 흥주(興州)로 유배되었으며, 〈집안이〉 몰락하여 노비가 되고 그 집은 적몰되었다. 〈그러나〉 신돈이 처형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左侍中)에 임명되었고 정방(政房)을 제조(提調)하였다.
왕(王,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자, 경복흥은 종실(宗室)을 세우고자 했지만 이인임(李仁任)이 우왕(禑王)을 세웠다. 우왕이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열었다가 다음날에 병을 핑계로 강론(講論)을 중지시키자 경복흥이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글은 비록 읽지 않더라도 항상 손에 있으면 또한 스스로 유익함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우왕이 이에 강론하였다. 한략(韓略)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말재간은 있었지만 재주와 행실은 보잘 것 없었다. 처음에 사헌령사(司憲令史)가 되었다가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는데, 우왕의 외척(外戚)이므로 관등(官等)을 뛰어넘어 임명되었다. 또 우왕의 유모[乳媼]와 환시(宦寺)에게 청탁하여 지평(持平)에 임명되기를 요구하였는데, 우왕이 어느 날 한략을 대관(臺官)에, 김선(金瑄)을 중방(重房)에, 한충(韓忠)을 전법(典法)에 임명한다는 소첩(小帖)을 써서 정방(政房)에 내렸는데, 김선과 한충 또한 우왕의 외척이었다. 경복흥이 말하기를, “전주(銓注)를 내리는 것은 이미 끝났으므로 다시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우왕이 말하기를, “종이와 먹이 있는데 고치는 것이 무엇이 어려운가?”라고 하였다. 경복흥이 다시 말하기를, “옛날부터 외척은 언관(言官)에 제수(除授)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다른 관직을 내리십시오.”라고 하였더니, 우왕이 말하기를, “어찌 명령을 쫓지 아니하느냐?”라고 억지를 부렸지만, 경복흥이 힘써 간쟁(諫爭)하여 마침내 임명하지 못하였다.
경복흥(慶復興)이 이인임(李仁任)·최영(崔瑩)·지윤(池奫)과 함께 관리를 임명[注擬]하였는데, 지윤이 말하기를, “마땅히 군공(軍功)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경복흥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목(都目)이니 마땅히 군공을 뒤에 〈고려〉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때 지윤과 이인임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자 온 나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아부하였는데, 경복흥은 청렴결백함을 스스로 지켰다. 비록 그들의 탐욕스러움을 미워하였으나 막을 수 없음을 알고,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경복흥은〉 전주(銓注) 때마다 번번이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여 뇌물을 쓰려는 무리들을 억제시키려고 했지만, 두 사람에게 제지되어 자기의 뜻을 실행할 수 없었고, 혹은 먼저 나가버려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도당(徒黨)에서 장차 행성(行省)에 보낼 글을 의논하려고 하는데 경복흥이 술에 취해서 오지 않자 최영이 당리(堂吏)를 불러 말하기를, “가히 금주(禁酒)하라는 방문(榜文)을 철회해야지, 으뜸 재상(宰相)이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재상(宰相)들이 마침내 경복흥의 집에 갔더니 경복흥이 무안해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약(藥)을 먹고 취했기 때문에 나갈 수 없었소.”라고 하였다. 일찍이 친구와 함께 밤에 술을 마시면서 시(詩)를 주고받았는데, 전객령(典客令) 김칠림(金七霖)이 말하기를, “제가 최근에 외방(外方)에서 왔는데 백성들의 초라하고 수척함이[憔悴] 이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찌 시나 주고받으면서 즐길 때겠습니까?”라고 하였더니 경복흥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또 일찍이 최영과 함께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에서 크게 사냥하였는데, 그때 한창 가뭄과 병충해가 들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우왕〉 6년(1380)에 국가에서 명(明)의 요동군(遼東軍)이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을 치려고 한다는 정보를 듣고, 그들이 우리의 국경을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사람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그가 돌아와서 요동총병(遼東摠兵)이 이미 출병했다고 말하자, 도당에서 급히 회의를 열었으나 경복흥이 술에 취하여 또 오지 않았다. 이인임과 임견미(林堅味)가 경복흥의 청렴하고 곧은 성격을 미워하여 왕에게 그가 술을 좋아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는다고 참소하여 청주(淸州)로 유배시켰다. 또한 문하평리(門下評理) 설사덕(薛師德), 밀직부사(密直副使) 표덕린(表德麟), 판사(判事) 정용수(鄭龍壽)·배길(裴吉)·이을경(李乙卿)·왕백(王伯), 상호군(上護軍) 설회(薛懷), 총랑(摠郞) 설군(薛群)·설권(薛拳), 중랑장(中郞將) 나흥준(羅興俊) 등을 유배시켰는데, 모두 경복흥의 술친구들이었다. 설사덕과 이을경은 도중에 죽고, 경복흥은 유배지에서 죽었는데 시호(諡號)를 정렬(貞烈)이라 하였다.
창왕(昌王)이 즉위하여 제문(祭文)을 하사하여 이르기를,
“아아! 나의 선조 공민왕(恭愍王)은 주(周) 선왕(宣王)처럼 중흥(中興)의 뜻이 있었고, 한(漢) 고조(高祖)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총명함이 있었다. 즉위한 처음에는 좌불안석하면서[側席] 현명한 사람을 구하셨고, 정사에 바빠서 끼니를 늦추면서까지[旰食] 다스림을 도모하셨다. 그러던 중에 그대를 모든 관료 가운데서 발탁하여 헌사(憲司)에 두고 침전(寢殿)까지 불러들여 밤새도록 자문을 구하셨다. 잠저(潛邸)의 원종공신(元從功臣)들도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무릇 백성(百姓)의 괴로움과 즐거움, 사대부(士大夫)의 충성스러움과 간사함을 총명함으로 꿰뚫어 알고 있었고, 이익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하였으며, 현명한 자를 등용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물리치셨다. 마침내 안으로는 기철(奇轍)을 베고 밖으로는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시어, 문덕(文德)과 무열(武烈)이 천하에 알려졌다. 원(元) 말엽에는 동남쪽에서 할거하던 방국진(方國珍)과 장사성(張士誠) 같은 무리들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우리 선조께서 중흥(中興)하신 공적이 조종(祖宗)에서 밝게 빛나게 된 것은 경(卿)의 힘이었다. 계묘년(癸卯年, 1363)에 이르러 적신(賊臣) 최유(崔濡)가 기철의 일당에 빌붙어 추악한 얼자(孽子)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조(元朝)에 병력을 요청하여 압록강(鴨綠江)으로 쳐들어왔다. 우리 선조께서 그대에게 절월(節鉞)을 주어 최영(崔瑩) 등과 함께 격퇴시켜 우리 사직(社稷)을 보존하게 하였으므로 공로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녹권(錄券)을 하사하고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역적 신돈(辛旽)이 그릇된 말로[左道] 우리 선조를 유혹하여 영첨의사(領僉議事)가 되자, 삼한(三韓)의 경대부(卿大夫)들이 헛된 생각으로 허리를 굽실거리거나 밤으로도 찾아갔는데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그의 대문은 물이 끓듯 하였다. 신돈 또한 경의 청렴하고 충성스럽고 곧은 절개를 흠모한 나머지 그대를 굴복시켜 자기의 문하(門下)로 삼아 기대보려는 마음이 깊어 여러 번 자기 사람을 보내어 정중한 뜻을 경에게 보냈으나 경은 한 번도 그의 집에 가지 않았다. 신돈이 이에 경을 참소하였고, 우리 선조께서는 바야흐로 신돈에게 정사(政事)를 맡겨 그 말을 어기기가 어려웠다. 경이 이에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明夷之行], 삼한의 사람들은 알든 모르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신돈의 음모가 발각되어 처형되자, 우리 선조께서 매우 후회하여 그날로 경을 불러 좌상(左相)으로 복직시켰다. 우리 상왕(上王)이 왕위를 물려받자 적신(賊臣) 이인임(李仁任)이 그 틈을 타고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관직을 팔고 옥사(獄事)로 뇌물을 받았으며, 우리 선조의 엄숙하면서도 삼가고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사대(事大)의 예(禮)를 무너뜨렸다. 그래도 그대가 조정에 있었던 5~6년간에 힘입어 사직(社稷)이 그나마 편안하였으나, 이인임이 그대를 꺼려서 그의 한없는 욕심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석(朝夕)으로 눈을 흘겼다. 다만 우리 왕모(王母) 명덕태후(明德太后)께서 그대를 깊이 믿었으므로 감히 드러내지 못하다가, 명덕태후께서 승하하심에 따라 이인임이 여러 흉악한 자들을 부추겨서 그대를 쫓아내었다. 이에 이인임이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는데, 산천(山川)을 경계로 전(田)을 삼고, 양민(良民)인 줄 알면서도 노예(奴隷)로 삼았으니, 원한이 천지에 가득 찼고 추한 소문이 상국(上國)에도 알려졌다. 마침내 천자(天子)가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하여 사직(社稷)이 거의 전복되려 했으나 최영이 충성을 다하여 흉악한 무리들을 숙청하였고, 상왕께서 나에게 명령하여 국사(國事)를 맡겨 서정(庶政)을 일신(一新)하게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급암(汲黯)이 한에 있었기 때문에 회남(淮南)의 음모가 실행되지 못하였고, 공부(孔父)가 송(宋)에 있었기 때문에 화독(華督)의 악행이 감히 일어나지 못하였다. 경이 상왕(上王)의 조정에 있을 때 왕실(王室)의 안위(安危)와 조정(朝廷)의 경중(輕重)이 경의 몸에 달려 있었으니, 경은 진실로 당(唐)의 곽분양(郭汾陽)·배진공(裴晋公)과 짝을 이룰 사람이었다. 아아! 경의 지위는 신하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나 경전(京甸)에 밭 한 이랑[畝]도 없었고, 집 항아리에 한 말[斗]의 곡식도 없었다. 〈그대는〉 소쿠리에 담은 밥과 물을 마시고[簞食水飮], 떨어진 갓옷을 입고 여윈 말을 탔으니, 1,000년의 역사에서 구한들 경과 같은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경의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정의로움은 삼한의 모범이 되고 만세토록 공경할 것이다. 이제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원정(柳爰廷)을 보내어 경의 묘(墓)에 제사를 올리니 영령(英靈)이 〈이를〉 안다면 나의 특별한 은총을 흠향하고 나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려 우리 왕가(王家)를 영원히 도울지어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경보(慶補)·경진(慶臻)·경의(慶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