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향교(三陟鄕校.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2호.강원 삼척시 향교길 34 (교동))
삼척의 향교는 태조7년(1398)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그 이전의 삼척지방 교육기관에 관해서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내용을 알 수 없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의 학교다. 이름 높은 성현을 제사하는 임무와 지방의 유생을 모아 강학하는 교육적 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향토사회의 문화를 향상시키고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순화하는 교육적 임무도 있어 유교정신을 진작시키는 중심체 역할을 했다.
삼척시 교동 삼척초등학교 뒷편에 자리한 삼척향교는 조선 태조7년(1398) 지금의 고사리재 동쪽 기슭인 고사음곡에 처음 건립하였다가 ,태종7년(1407) 부사 권전이 현재의 당저동에 해당하는 옥서동으로 이전했으며, 세종21년(1439)에는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碑)를 세웠습니다. 세조14년(1468) 현 위치인 교동으로 이전하면서 먼저 학생들의 기숙사격인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지었습니다. 성종 원년(1470)에 대성전을 건축하고, 다음 해에는 생도를 40명에서 70명으로 증원했습니다. 원래 삼척도호부에는 생도의 정원이 40명이었다.
성종3년(1472) 남루인 명륜당을 세웠으며, 선조9년(1576) 부사 김효원이 제물(祭物)창고인 자성고를 짓고, 선조13년(1580) 부사 황정식이 명륜당의 출입구(南樓戶爽)와 들창(齋廚)을 만들었다. 현종6년(1665) 동무 서무를 건립하고, 효종7년(1656) 부사 이지온이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碑)를 세우고, 망료석함(望燎石函)을 만들었다.
숙종8년(1682) 부사 유송제는 향교를 중수한다면서 건지동으로 이전하였다가 유림들의 반발로 상부에 발각, 체포되고 간사 최동흘은 강릉에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숙종26년(1700) 부사 심단이 현 위치로 다시 옮기려고 터를 닦아 다름 해 이건하였으며, 1710년 부사 이성조가 대성전이란 현판을 쓰고 명륜당을 중수한 후 주자필을 모사하여 명륜당이란 현판도 게첨하였다. 그 당시 대성전 터를 삼화사에 머물던 연총섭이란 스님이 잡았는데 양반들이 득세하면 중이 행세를 못하므로 삼척향교 양반들이 득세못하도록 대성전의 터를 석자 세치 낮추게 했다한다. 그래서 향교의 안산격인 봉황산이 중의 삿갓처럼 보이게 하고, 건물 전체를 땅비둘기 형국으로 만들어 향교 양반들을 파멸하도록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문묘는 유교의 성현을 봉안하고 봄 가을로 제사올리는 곳으로 향교 안에 있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를 가리키는데 현재 대성전은 14칸, 동서무는 각각 4칸으로 되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5성위와 공문 10절철 송나라시대 6현을 봉안했고, 동서무에는 한국의 18현인을 봉안했었는데 1975년 9월 성균관례에 따라 한국 18현을 대성전에 모시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순종2년(1908) 삼척향교에 처음으로 직원(直員)제도(전교)가 실시되었고, 1918년 군수 심의승이 죽장사 자리에 있던 삼척공립보통학교(삼척초등학교의 전신)를 향교 명륜당 앞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68년 명륜당과 부속건물이 불에 타 전소하였는데 1970년 명륜당을 중건했다. 1976년 묘정비를 세웠고, 1979년 본당 중수·홍살문·조감도·안내판을 설치했으며, 1985년 지방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받았다. 석전봉행은 춘추중월상정일 즉 음력 2월과 8월 첫 정일(丁日)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