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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난 한민족 문화유산
이정희
‘선생님을 해외로 -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신한은행이 후원하는 이 행사를 지난겨울 500 여명이 여객
선을 타고 후쿠오카 - 벳부 - 오이타 - 오사카 - 나라 - 교토를 1주일간 탐방했다.
이 곳은 우리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 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며 그 옛날
조선통신사가 갔던 뱃길을 따라가게 되어 감회가 깊었다.
탐방 프로그램은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선내에서 숙식은 물론 밤에는 대강당의
선상대학에서 사학자 정호영 교수, 손승철 교수, 그리고 정호승 시인의 강의가 있었
다. 낮에는 배에서 버스로 이동하며 차 안에서 역사 비디오를 보거나 여행사 안내원
의 일본 생활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유적지에서는 생생한 현장 강의가 있었다. 선
내에서 개인적으로 자유시간이 생기면 도서실에서 일본 고대미술대백과사전을 보
았다. 이렇게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결과 탐방 내내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겨울 추
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이 드는지도 몰랐다.
( 첫째 날 )
서울역에서 경부선 KTX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영도 국제 크루
즈 터미널에 갔다. 그곳에서 조별로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탑승 안내를 받으
며 후지마루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배에 올랐다. 이 배는 초대형 전용여객선으로
대강당과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선실에는 2층 침실이 있어 난생
처음 배에서 잠을 자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조선 산업 1등인 우
리나라에서는 왜 이런 배를 만들지 않는지 의구심이 들었고 이왕이면 우리가 만든
배를 타고 가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선내 식사는 뷔페식으로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었으나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김
치와 쌈 종류 장과 채소였다. 저녁 식사 후에는 선상대학에 모여 정호영 교수의 강
의를 들었다. 고대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알기 위한 대마도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강의였다. 나는 강의 내내 배 멀미로 고통을 받다가 끝나기가 무섭게 의무실
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멀미로 복통이나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들로 넘쳐났다. 약을
먹었으나 속이 울렁거림이 계속되어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깐 잠을 잘 수 있었다.
오후 6시에 부산항을 출발한 배는 대한 해협을 건너 밤새 달렸다.
( 둘째 날 )
12시간 항해 끝에 오전 6시, 일본의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의 후쿠오카에 있는
하카타항에 입항했다. 큰 가방은 숙소에 두고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나와 입국 수
속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뱃길이 닿지 않는 곳은 버스를 이용하는데 대형버스
15대가 탐방단의 플래카드를 달고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오늘 일정은 규슈탐
방이다.
규슈(九洲)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섬으로 고조선 이후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많은 개척자들이 상륙하여 한반도 관련 유적이 많다. 또한 민속에도 우리 것과 닮
은 것이 많다. 천지신이라는 여신의 춤은 우리나라 무당춤과 흡사하고 산 이름도
태백산, 묘향산, 고조산으로 우리 이름과 똑같은 것들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 규슈
에는 우리나라 충청남도에 있는 당진(唐津)과 똑같은 이름의 가라쓰(唐津)가 있다.
이곳 슈퍼에서 구입한 생수병에는 제조원이 당진협동조합(唐津協同組合)이라고 적
혀 있어 우리나라에 온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혹, 한국계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고 말을 걸어 보기도 했으며 그 생수 병
에 물을 보충하여 탐방 내내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가라츠에는 일본이 조선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한 나고야성(名濩屋城)터와
진영터가 남아 있고, 나고야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서 발행한 박물관을 소개하는 글
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이전까지의 일
본 열도와 한반도의 긴 교류를 일시적으로 단절시킨 불행한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
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밝힐 뿐인데 이 글을 쓴 양식 있는 일본인에 대해 감동했다.
더구나 조선침략을 반성한다는 뜻에서 나고야 박물관을 건축해 한국과 일본의 교류
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는 글을 읽고는 그동안 한, 일 양국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한, 일 관계가 이 곳
에서처럼 만 되기를 기대하며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에 있는 후나야마
고분으로 발길을 옮겼다.
후나야마(船山)고분은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근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으로 봉
토 부분을 걷어낸 집 모양의 석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고분에서 나온 것
과 같은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금동제관모, 금동제 신발은 익산 고분에서
출토 된 것과 비슷하고, 청동거울은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며, 금귀걸이
는 우리나라 삼국 초기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다고 한다. 일본은 이 고분이
발견되자 대단한 발굴임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나 이는 발굴 즉시 공개되지 않고
뒤늦게 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일본
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라 하여 교과서 까지 소개 된 큰 칼은 만든 도공과 글
을 쓴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는데 결정적인 부분은 글자가 마모된 것처럼 되어 있
다고 한다. 나는 광개토대왕비나 칠지도와 같이 의도적으로 글자를 훼손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어 최인호 소설 ‘잃어버린 왕국’을 떠올리며 이번 연수의 유
일한 관광 코스인 뱃부로 이동했다.
뱃부(別府)에서는 노천탕이 있는 대형호텔에 투숙하여 모든 일정이 일본식으로
진행됐다. 호텔 안에 있는 식당은 외국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본 복장인
유카타을 입고 나와 시끌벅적했다. 우리 일행도 그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모여 서로에게 일본 사람들보다 더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늘어놓으며
각종 생선회를 맛있게 먹었다. 한참 그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일본 사
람들로부터 모진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우리 선조들이 떠올랐다. 그들
이 우리들의 이 모습을 본다면 우리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서글퍼지기도 했다. 식사 후 노천탕에 가서 시내야경과 밤하늘을 보며 온천
욕을 하고 일본식 다듬이 방과 침대로 꾸며진 호텔 방에서 잠을 잤다.
(셋째 날)
이른 아침부터 온천 관람을 했다. 뱃부 시내 곳곳은 온천 수중기가 마치 불이 난
것처럼 피어오르고 있어 온천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지하에서 분출하는 열탕과 분
탕의 모습이 마치 지옥을 연상케 하는 온천 지옥순례가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온천
물로 목욕하고 온천지를 관광하는 것은 물론 온천수로 만든 상품까지 만들어 팔고
있었다.
일본 관광은 외국인에게 일본 옷을 입게 하고 일본 음식을 먹게 하며 일본식 주
거 공간에서 잠을 자게 하는 등 이 모든 것들이 관광수입을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를 홍보하는 지극히 일본다운 관광산업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온천 관
광을 마치고 오이타로 이동하여 마애석불로 유명한 우스키로 갔다.
우스키는 석불이 많아 석조미술의 보고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석불의 특징은 화
산재가 굳어 생긴 암석으로 산 표면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마애불과 다른 점은
석불이 한 두 점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 흩어져 있으며 그 표정도 다양했다. 특히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 마애불보다는 표정이 어두워 보였으나 석불이 주는 온
화함으로 오이타항으로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여객선은 규슈에서 하카타항으로 다시 오이타항으로 이동하여 우리를 태운 다음
밤새도록 항해하여 다음 날 아침 오사카항에 입항했다. 이제는 선내 식사가 입맛에
맞을 뿐만 아니라 잠도 잘 잘 수 있어 육지 보다는 여객선 안에서 생활이 더 편했
다. 새벽에 오사카항에서 다시 입국 절차을 받고 일본 고대 역사가 시작된 도시 나
라로 향했다.
(넷째 날)
나라(奈良)는 우리나라 말로 국가를 뜻하는 ‘나라’가 이곳의 지명이 됐다. 이곳
은 794년 교토로 천도할 때까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 최초
의 국가를 세웠으며 많은 사찰과 불교문화의 귀중한 예술품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곳이 동대사라는 사찰이다.
동대사(東大寺)는 우선 그 크기에 놀랐다. 세계에서 제일 큰 단일 목조 건물인
대불전의 높이는 52m이며 대불의 높이는 14.5m로 이는 처음 건축했을 때의 3분의1
규모밖에 되지 않는 다니 그 규모가 실로 놀라웠다. 동대사는 크기도 하지만 국보
급 건축물과 불상이 많고 한반도 건축 양식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사찰을 추진하고 완성시키는 데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한다. 불상을 설계하고 제작한 양변 스님은 백제계 씨족의 후손이며
행기 스님은 왕인의 후손으로 일본 민중 신앙의 창시자라고 한다. 대불전 문 바로
옆에 있는 행기 스님의 목상을 보고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아 같은 민족으
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세계적인 사찰을 뒤로하고 일본 불교의 시작인 법륭사
라는 사찰로 발길을 옮겼다.
법륭사(法隆寺)는 607년에 쇼토쿠(聖德)태자가 창건한 사찰로 수많은 국보급 문
화재가 있다. 하지만 이 문화재들이 모두 창건 당시의 것들이 아니고 670년에 소실
되었다. 본래의 법륭사 터에서 발견된 건축양식은 부여의 군수리 절터에서 볼 수 있
는 양식이며 친 백제계의 소가(蘇我) 씨가 세력을 떨쳤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백
제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법륭사의 안중궁사에 보
관되어 있는 쇼토쿠태자의 모습을 그린 ‘천수국만다라수장’ 의 밑그림은 고구려 출
신의 화공집단이 그렸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담징의 벽화가 있는 것으로 그 유명한 금당 안에는 불상이 몇 구 있
고 사방 벽과 천장에는 다양한 형태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실물은 1947년에 불타
없어지고 현재에는 패널에 그려진 모조벽화만 남아 있으며 그나마도 실내조명이 어
두워 제대로 볼 수 없어 매우 안타까웠다.
쇼토쿠태자의 덕을 기릴 목적으로 737년에 건립한 몽전에는 비불(秘佛)인 구세관
음이 안치되어 있다는 데 공개하지 않았다. 그 비불은 쇼토쿠태자의 실물크기라는
설도 있고, 백제의 성왕이라는 설도 있어 궁금증을 더했다.
1988년 새로 건립한 백제관음당(百濟觀音堂)에는 백제 관음입상이 있다. 이 관음
입상은 평소에 보아온 불상과는 사뭇 달랐다. 서있는 자세로 2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우아한 손끝으로 휘날리는 옷자락을 살며시 들고, 고개를 살짝 숙인 모습이
다. 그런데 이름이 백제관음입상이라 하여 의문이 생겼다. 나중에 알아보니 옛날부
터 그렇게 불러왔기 때문에 그렇다고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반도 관련 표
시가 전혀 없는 다른 유물과는 달리 이름이나마 백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만으
로도 위안이 됐다. 나라에는 볼 것이 너무 많고 시간은 부족해서 점심은 버스 안에
서 도시락으로 대충 때우고 일본의 고향이라는 아스카로 발길을 옮겼다.
아스카(飛鳥)는 6~7세기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으로부터 여러 문물을 받아드려
일본의 문화를 꽃피웠던 고장으로 고문화 지구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낮은 산들로
둘러 싸여 있고 들판 곳곳에 고분들이 흩어져 있어 고문화 지구가 실감 났다. 대표
적인 고분은 이시부타이 고분과 다카마스고분이 있다.
이시부타이(石舞臺)는 거대한 화강암 여러 개를 횡혈식으로 만든 무덤으로 무덤
의 덮개가 없어져 텅 빈 현실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 덮게 돌까지 흙으로 덮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그 위에서 춤을 추지 않았을까 해서 석무대 라고 한다. 석실 내부
는 우리나라 강원도 지역에서도 같은 형태가 발견되었다는데 고대 석실 공부를 국
내가 아닌 일본현장에서 하는 기분이 들어 조금은 들뜨기도 했다.
또한, 이 석실고분은 추리소설을 연상케 했다. 유물이 나오지 않아 피장자의 신분
은 물론 축도 연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당시 왕릉을 능가하는 대규모인데도 역
사에서 버림받은 채 수 백년을 내려왔다는 사실이 아스카시대의 정치사항을 짐작
케 할 뿐이라고 한다.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를 골똘히 생각하며 고구려 흔적이 확
실하게 나 있는 다카마스고분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카마스 고분(高松塚)은 1972년 발견 당시 일본 전후 최대의 발굴로 평가되어
전 일본열도가 흥분했다. 발굴 결과를 놓고 일본 학자는 물론 남북한 학자들까지
모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으며 고대사 해명에 귀중한 문화재로 해외에서도 널리 주
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대나무 숲에서 발견된 이 고분의 석실에서 채색을 한 아름
다운 벽화가 발견됐다. 이 벽화 속에 나타난 인물들은 고구려인들처럼 머리에 모자
를 썼고 바지 위에 긴 두루마기를 입었다. 또한, 4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머리카락
을 뒤로 묶었고 상의는 소매가 길고 허리띠를 매었다. 치마는 그 문양이 세로로 난
색동주름이며 땅에 끌릴 정도로 입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 덕흥리 고분과 수
산리 고분과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이 고분이 시대적으로 고구려보다 더 늦은 초기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쩌라 땅을 파면 고대 것으로 추정된 것들은
대부분 한반도의 유물이거나 영향을 받은 것이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석연치 않
은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오사카항으로 달렸다.
(다섯째 날 )
교토(京都)는 6세기경 한반도를 통해 전래된 불교영향으로 불교 문화유산이 많아
우리나라 경주와 비교된다.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로 정한 것과 많은 문화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비슷하다. 하지만 교토는 문화유산들이 전
쟁과 화재의 피해 없이 잘 보전되고 있으며 이런 문화재를 보기 위해 세계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나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박물관 같았다. 평소 경주를 불교문화
유산으로는 최고의 도시로 생각해온 나는 교토를 탐방하면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
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경주는 최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 만 보
더라도 교토보다 더 오래된 도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유물의 다양성과 예술성이 더
우수하다. 단지 경주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교토에 밀리는 이유는 국가 경제력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빨리 더 잘 사는 나라, 문화재를 아끼고 보존하
는 나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교토에 있는 광륭사(廣隆寺)라는 사찰은 평소에 가 보고 싶은 사찰이다 이곳에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라는 불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는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과 비교해 볼 만한 불상
이다. 나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기다려왔던 터라 사찰 입구부터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이 사찰 입구에 있는 석물을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이 석물은 광륭사 역사에 대한 안내 표지석으로 앞 글씨 일부가 지워졌다. 누군
가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 있는 불상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이
라는 내용이다. 일본에서도 이런 기록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불행 중 다
행인 것은 불상의 손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불상의 목재는 당시 일본에는 없
는 적송으로 신라에서 전해진 것임이 밝혀졌다.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 되었고 일본
이 자랑하고 있는 국보 1호가 한반도에서 전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은 일본사
람 한 개인의 소행이라지만 현재에도 역사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그들의 역사관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불상이 안치된 영보전으로
들어갔다.
영보전의 미륵반가사유상을 보는 순간 단박에 우리나라 불상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불상의 머리에는 관이 올려 져 있고, 오른손을 들어 살짝 얼굴에 대고, 잔잔한 미
소를 띠고 있었다. 가슴은 밋밋하며 한쪽 다리를 무릎에 걸치고 앉은 모습이 우리
나라 국보 83호인 불상과 닮았다. 구태여 다른 점을 찾는다면 만든 재료가 다른 것
에서 오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불상은 금동이지만 이곳의 불상은 적송에다 옻칠해
검붉은 빛을 띠고 있어 우리나라의 퇴색한 금빛보다는 더 부드러워 보였다.
이 불상을 본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예술품보다
진실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이
불상은 동양의 모나리자, 석가가 출가하기 전 고민 상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 불상의
미소가 세상사의 모든 번민을 넘어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만 같았고, 그 앞에 선
나의 잡다한 생각들은 일순간의 일이며 덧없음으로 다가왔다. 보면 볼수록 자애로
운 모습에 감동되어 나도 모르게 불상을 따라 빙그레 웃어보니 황홀하기까지 했
다.
나는 이 불상 앞에서 그동안 일본에 대한 반감이 많이 누그려졌다. 이 불상이 백
제에서 만들어졌든, 신라에서 만들어졌든 더 나가 한국 것이든, 일본 것이든 따지고
싶지 않았다.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와서 용케 화재를 피하고 고난을 극복하여 지
금까지 남아 있는 자체가 감사했다. 한결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광륭사를 나와 일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니조성으로 향했다.
니조성에서는 일본식 고궁 문화유산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성은 400여 년 전에 지어진 웅대한 건축물로 특별한 장치가 있다. 신발을 벗고
안채까지 들어가면 당시 상황을 화려하게 재현해 놓은 여러 개의 방이 있고 긴 내
청마루를 걸으면 끼익 끼익 소리가 났다. 이것은 무단 침입자를 경계하기 위해 소리
나게 만든 일명 나이팅게일 마루로 당시의 철저한 무사계급의 보안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고궁도 이곳처럼 좀 더 가까이 당시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는
관람 코스를 마련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교토의 얼굴인 금각사로 갔다.
금각사(金閣寺)는 다른 관광지와는 차별화 되어 볼거리가 많았다. 우선 이곳의
입장권은 부적으로 되어 있어 이를 받아든 외국 관광객들은 서로 이상하다는 표정
을 지으며 입장권 앞, 뒤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 가꾸어진 정원으로 들
어서면 연못에 황금으로 뒤덮인 3층 누각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연못가를 산책하면
서 여러 방향에서 화려한 금각사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일본식 정원도 볼 수 있었
다. 이곳은 원래 로크온지(鹿苑寺)인데 관광명소가 되어 금각사로 더 알려져 많은
사진사와 외국 관광객이 들끓었다. 고즈넉한 우리나라 사찰과 비교되었으며 사찰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람도 많고 볼거리
도 많은 교토를 벗어나 오사카의 최대의 번화가인 도톰보리로 이동했다.
도톰보리에서 저녁 자유 시간을 가졌다. 이곳의 밤거리는 많은 젊은 사람들로 생동
감 넘치고 북적거렸다. 나도 젊은 사람들 물결 속을 뚫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일본
음식인 다코야키를 사 먹어보고 현지인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그들과 함께 하다 보면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
한 여행이 끝나면 돌아갈 나라와 가정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어 감사한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밤늦게 호텔에 들어와 육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 여섯째 날 )
오사카(大阪)는 일본의 제1 상업 도시답게 활기차 보였다. 이곳은 4세기 한반도의
대륙문화가 들어온 관문이 되었던 곳으로 고대 일본의 중심도시로 번성해오면서 경
제적 발전을 거듭해 도시 문화의 첨단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곳에서는 오사카 역
사박물관과 오사카 성을 탐방했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은 오사카 지역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10층부터 올
라간 뒤 내려오면서 관람했다. 우선 오사카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박물관 오른쪽에
NHK방송국 있어 안쪽에서는 방송현장이 보이기도 했다. 전시장은 석기시대부터 현
대에 이르기 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인형이나 삽화로 친근감을 주었다. 우리
일행 사이로 일본 노인들도 줄을 따라가며 유물을 살피고 설명서를 꼼꼼히 읽고 있
었다. 그들도 우리나라 노인들처럼 전쟁의 참혹함과 경제적 어려움을 근면과 절약
으로 이겨낸 세대로 옛것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묻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오사카 성은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쌓았으나 소실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규모를 많이 줄여 다시 쌓았다고 하나 그 규모가 엄청났다.
일본의 성은 우리나라 성과 달랐다. 우리나라의 성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처럼 산
성으로 유사시 성 밖에 있는 사람까지 다 성내로 들어와 함께 적들과 싸우면서 생
사를 함께 한다. 그러나 일본성은 평지에 있는 평성으로 무사들만이 살고 있어 전
쟁이 나면 무사들만의 싸움으로 민간인의 피해는 적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성은
적의 공격과 침입을 1차 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큰 해자를 만들고 성벽도 방대하게
쌓아 마치 중세 서양의 성을 보는 듯 했다.
오사카성 천수각은 8층 전망대를 빼고는 마치 개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사관처
럼 화려하고 거창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는 일본 사람에게는 영웅으로 추앙을 받겠
지만 우리에게는 조선을 함부로 짓밟은 한낱 침략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처럼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실감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오스카 항으로 이동했다.
오사카 항은 환송행사가 한창 이었다. 선내에서는 부두에서 들려주는 밴드 악단
의 주악 속에 오색 테이프를 배 난간 아래로 늘어뜨리고 현지에서 수고한 사람들에
게 작별 인사를 했다. 후지마루호는 뱃고동을 울리고 해상 방재선은 환송인사라도
하듯이 물줄기를 하늘 높이 뿌려댔다. 잘 보아지 않을 때까지 서로 손을 흔들며
‘안녕, 굿바이, 사요나라’ 등 작별 인사말이 뒤섞여 들려왔다.
(마지막 날)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저녁 식사 후 각 지역 학교별 모임이 있었다. 처음 보
는 선생님 하고도 금세 친해 질 수 있었고 정보교환도 잘 되었다. 이것은 같은 주제
를 갖고 함께 생활한 결과라고 생각됐다.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려 했지만
잠은 오지 않고 탐방 중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간산처럼 스쳐 가고 후지마루호는 한
밤중에 세토대교를 지나고 새벽에는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번 행사에 참가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탐방하면서도 일본 고대사 부분에
많은 불만과 아쉬움이 남았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이 미개한 일본 열도에 우리의
선진문화를 전해주고 그들을 일깨워 주어 오늘날 선진국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고대 한반도 관련 문화유산에 국적 표
시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원래 일본 것 인양 둔갑해 버리기도 하고 중국
계 국적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여 반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하게 생
각하면 한반도 문화를 일본에 전수 한 것도 서로가 필요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더 나가 일본은 한반도의 문화를 전수 받아 발전시키고 보존하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겠다. 또한 일본 문화는 고대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의 문화를 전
수받았던 한반도가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부터는
대륙문화 대신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오늘날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됐다.
이번 행사는 나의 국가관이나 역사관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우리의 고대 역사를
일본에서 탐방하면서 우리 민족의 진취적인 개척 정신을 발견했으며 한민족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또한,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일본에도 같이 가진 것은 임진왜란이나
조선침략의 불행한 역사 이전의 두 나라의 긴 교류가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두 나라 간의 그 옛날의 친교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며 이런 탐방
기회가 교사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주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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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민족 해방 70주년에
'일본에서 만난 한민족 문화 유산'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뜻있는 학습여행을 하셨군요.
@운수재 재직 당시 가장 의미있는 탐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저의 국가관이나 역사관에 많은 변화를 준 계기도 되었지요,
해박한 지식으로 심도있는 탐방기를 쓰셨군요. 많이 공부하신 흔적이 보입니다.
글을 참 잘 쓰십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점심식사 후 쭉~호월님의 <취미 시인 길라잡이> 독파하고 있습니다.
@이정희 취미 시인 길라잡이가 조금이라도 시의 이해와 시작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호월 잡다한 시창작 입문서들 모두를 일격 할 수 있는, 저에게는 소중한 참고서 입니다.
소월 목월에 이어 호월 입니다. 쉽고 재미있고 생동감까지 넘쳐 달빛 어린 깊은 밤,
호수엔 문자들이 요리조리 헤엄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