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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을 영적 스승으로 모시고
좁고 험한 길을 따르고 있다.
2002년 의식혁명을 처음 접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2006년 의식혁명이 내 마음안 깊숙이 들어왔다.
이후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의 모든 책을 정리하고, 되새기고, 인생에 적용하고, 환자와 함께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되었다.
2016년 8월 9일!!
깊은 곧고 좁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2019년 1월 16일
2021년 2월 8일 ... 9월 21일
2024년 12월 21일..
비이원성에 대한 앎이 찾아왔다.
두달 전 문득 '분노, 미움'이 다시는 이 마음안에서 자리잡고 확장되지 않을 수 있을 수 있다는 앎이 왔다.
그리고 두달여 동안 한번도 분노, 미움은 자리잡고 확장되지 않았다.
그리고 비 이원성 언어 사용에 대한 앎이 찾아왔다.
그 앎을 단단한 지지대로 삼기 위해 오늘부터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의 모든 책을 다시 읽고 묵상 시작!!
의식혁명 편집자의 말
함께 상상해봅시다.
묻고 싶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단순한 '예/아니오식의 답에 이르는 통로가 나한테 있다면' 어떨까요?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입증할 수 있게 진실인 답 말입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명백한 것들이 있습니다.
제인은 남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예/아니오).
자니는 학교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아니오).
이런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르는 작은 걸음입니다.
이것은 안전한 투자입니까? (예/아니오).
이 직업은 내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예/아니오).
만일 모든 사람에게 그런 통로가 있다면 어떨까요?
당장에 압도적 함의가 떠오릅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존도우는 고발대로 유죄입니다라는 명제에 대해 명확하고 확증가능한 답(예/아니오)이 있다면 우리의 비대하고 결함투성이인 사법제도는 어떻게 될까요?
모후보는 정직하게 이 선거 공약을 지키려고 합니다. (예/아니오)라는 질문을 모두가 던질수 있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같은 답을 얻는다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정치는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광고는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에게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점 커지고 빨라집니다.
민족주의는 어떻게 될까요? (모 국가는 정말로 민주주의를 뒤엎는 일에 골몰하고 있습니다(예/아니오).
정부는요?(예/아니오).
이 법안은 실제로 시민권을 보호해줍니까?(예/아니오).
그 편지속에 수표가 들어있습니까는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 말대로 인간이 말을 배운지 한시간뒤에 거짓말을 배웠다면 우리가 지금 토론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은 사회가 시작된 이래 인간 지식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의 발생일 겁니다. 이것이 가져올 변모는 의사소통에서 윤리에 이르는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에서 일상적 존재의 모든 세부에서 너무도 심원하여 이어지는 진실의 새 시대에서 삶은 어떠할 것인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세계는 그 뿌리까지 돌이킬 수 없이 바뀔 것입니다.
"신체 운동학 kinesiology'
명사. 근육과 근육의 움직임에 관한 특히 신체 컨디션 조절에 응용되는 바와 같은 것에 대한 연구"
신체운동학 연구는 금세기 후반 조지 굿하트 박사의 저작을 통해 최초로 과학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굿하트 박사는 양호한 물리적 자극 예컨대 영양 보충제같은 것은 일정한 지표 근육군의 강도를 증가시키는 반면, 해로운 자극은 근육군을 갑자기 약화시키곤 한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 "응용신체 운동학 applied kinesilolgy"이라 직접 명명한 분야를 개척했습니다. 그러한 발견의 함의는 개념적 의식 훨씬 밑에 있는 어떤 수준에서 육체는 자신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인지 인식할수 있고, 근육테스트를 통해 그에 관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 인용된 고전적 사례는 화학 감미료앞에서 지표근육군의 약화가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동일한 근육군이 건강에 이로운 자연 첨가물 앞에서는 강화됩니다.
1970년대 후반 존 다이어몬드 박사는 이 분야를 새로운 학과목으로 발전시키고 그것을 행동신체운동학 behavioral kinesiology라고 명명했습니다. 다이어몬드 박사의 놀라운 발견은 지표근육군은 물질적 자극은 물론이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적, 지적 자극앞에서도 강화되거나 약화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소는 우리에게 강한 반응을 이끌어 낼 것입니다. '난 네가 미워"라는 진술은 약한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좀더 들어가기 전에 정확히 어떻게 테스트하는지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틀림없이 직접 해보고 싶을테니 말입니다. 다음은 다이어몬드 박사의 1979년 저서 "당신의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개요입니다. 다이어몬드 박사는 H,O 켄달의 '근육 :테스트와 기능"에 나오는 고전적 설명에서 이 방법을 각색해 냈습니다.
신체운동학 테스트를 시행하는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테스트를 위해 친구나 가족중 한 사람을 선택한다. 우리는 그를 피험자라고 부를 것이다.
1. 피험자는 똑바로 서서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왼팔은 팔꿈치를 편채 바닥과 평행하게 든다.
2. 피험자를 마주보고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왼손을 피험자의 오른쪽 어깨에 움직인다. 그 다음에 오른 손을 피험자가 들고 있는 왼팔 손목바로 위에 위치시킨다.
3. 피험자에게 팔을 누를테니 팔에 힘을 주라고 말한다.
4. 이제 아주 신속하고 확고하고 균등하게 상대의 팔을 누른다. 핵심은 팔의 탄력과 반동을 테스트하기에 충분한 정도로만 누르는 것이지, 근육이 피로해질 정도로 세게 누르는 것이 아니다.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누가 더 센가가 아니라 팔 근육이 누르는 압력에 맞서 어깨관절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가이다.
피험자의 팔 근육에 아무 이상이 없고 피험자가 외부자극을 받지 않은 정상적이고 편한 마음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이러한 이유로 해서 시험자는 미소를 짓는다거나 다른 식으로 피험자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근육은 강한반응을 나타내어 팔을 계속 들고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부정적 자극을 주고 테스트를 반복하면 "앞서보다 세게 누르지 않는다 해도, 근육은 누르는 압력을 버티지 못할 것이고, 피험자의 팔은 아래로 떨어질 것'입니다.
다이어몬드 박사의 연구가 갖는 인상적 측면은
피험자들이 나타내는
반응의 일관성입니다.
결과는
예측가능하고 재현가능하며
공통적이었지요.
자극과 반응사이에
아무런 사리에 맞는 연관이 없을때조차
그랬습니다.
전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일정한 추상적 상징은
테스트에서 모든 피험자에게 약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상징은 정반대의 반응을 일으켰지요. 일부 결과는 당혹스러웠습니다. 명시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내용이 없는 그림들이 모든 피험자에게 약한 반응을 일으키곤 했던 반면, 다른 중립적 그림들은 모든 피험자에게 강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일부 결과는 상당히 중요한 추측을 위한 재료가 되어 주었는데, 실질적으로 모든 고전음악과 대부분의 유행음악이 공통적으로 강한 반응을 일으킨 반면 1970년대 후반에 최초로 수용된 "하드" 록이나 메탈 록은 공통적으로 약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다이어몬드 박사가 잠시 주목했으나 그것의 비상한 함의에 관해 깊이 분석하지 않은 또 다른 현상이 있습니다. 기만으로 알려진 진술이 담긴 테이프를 듣는 피험자들은 비록 화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 같고, 그 말이 설득력있게 들린다하더라도 테스트에서 약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입증가능한 참된 진술이 담긴 녹음을 듣는 동안에는 피험자들은 공통적으로 강한반응을 나타냈지요.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이자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 데이비드 호킨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975년
호킨스 박사는 진실과 거짓에
대한 신체운동학적 반응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험자는 시험하는 물질(혹은 쟁점)에 관해 의학적으로 알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중맹검연구에서 그리고 강연에 참석한 청중 전체가 참여하는 대중 시연에서 피험자들은 아무 표시없는 인공감미료가 들어있는 봉투에는 공통적으로 약한 반응을 보였고, 똑같이 생긴 인공감미료가 들어있지 않은 봉투에는 강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동일한 순진한 반응이 지적 가치들을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습니다.
작용하는 듯한 것은
일종의 공유의식인 '스피리투스 문디 Mundi' 혹은
융의 뒤를 이어 호킨스가 명명한 바와같은
의식의 데이터베이스입니다.
다른 사회적 동물에게 아주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그 현상(무리의 한쪽 끝에서 유영하던 물고기가 400미터 떨어진 곳의 동료가 포식자를 피해 도망칠때 즉각 방향을 바꿉니다)은 또한 어떤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인간 종과도 관련됩니다.
먼곳의 이방인들이 경험한 정보를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처럼 알게 된 개인들에 관한 기록은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우리는 이성적 의식으로 얻는 것외에 다른 공유지식의 형태가 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혹 어쩐면 보다 단순하게 건강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내면의 똑같은 비이성적 지혜의 불꽃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 현상에서 대단히 암시적인 한가지 요소는 그 반응의 이진법적 본성입니다. 호킨스는 켜지지 않으면 꺼지는 신경 시냅스처럼 지식의 가장 기본적이고 세포적인 형태처럼 첨단을 걷는 물리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우주 에너지의 핵심적 본성처럼 답이 아주 명백하게 예 아니면 아니오로 나오도록 질문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어떤 원초적 수준에서 인간 뇌는 우주의 에너지 장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경이로운 컴퓨터가 아닐까요? 그건 그렇다 칩시다.
호킨스 박사의 연구에서
가장 결실이 큰 발견은
상대적 진실의 등급을 측정하는 수단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 수단을 이용하여
1에서 1,000에 이르는 범위에서
지적위치, 진술, 이데올로기의 서열을 매길 수 있습니다.
시험자는 이 항목(책, 철학, 교사)은 200으로 측정됩니다. (예/아니오) 250으로 측정됩니다.(예/아니오)라는 질문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데, 그러다 마침내 일반적으로 약한 반응이 나와서 측정치가 정해지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측정치가 갖는 엄청난 함의는
인간 역사상 최초로 이데올로기의 유효성이
그 모든 대상속의 내재적 성질로서
감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호킨스 박사는
20년에 걸친 비슷한 측정을 통해 인간의식수준들의 스펙트럼 전체를 분석하여
인간 경험의 지형에 관한 매혹적인 지도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의식의 해부학은
인간의 전상태에 대한 소묘이며,
개인과 사회와 인류 일반의 감정적 영적 발달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심원하고 너른 시야는
우주에서 사람의 여정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해주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와 우리 이웃이 영적 깨달음의 사다리 어디쯤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존재가 되기 위한
개인적 여정의 어디쯤에 있는지에 대한 이정표를
우리 모두에게 제시해줍니다.
이 책에서 호킨스 박사는
수십년에 걸친 연구와 통찰의 열매에
고등입자 물리학과 비선형동역학 분야의 혁명적 발견이라는
눈부시게 환한 조명을 비춥니다.
그는
서양의 지적 기록에서는 최초로
과학의 차가운 빛은 신비가와 성인들의 자신과
신과 실상의 본성에 관해 항상 말해온 것을
확증해준다는 걸 보여줍니다.
존재, 본질, 신성에 관한 그 통찰은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그림을 내놓는데,
그것은 영혼과 이성을 다함께 만족시키는 능력에서
대단히 각별합니다.
이 책에는
풍요로운 지적, 영적 수확이 담겨 있으니...
독자들은 많은 것을 거둘 수 있고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자신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세요.
지금 미래가 시작됩니다.
E, 휠렌(바드 출판사 편집자)
"의식혁명 서문"
이 책에 보고된 진실은
과학적으로 도출되고 객관적으로 조직되었지만
모든 진실이 다 그렇듯
맨 먼저 사적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작된
앎의 강렬한 상태의 평생에 걸친 연쇄는
처음에는 이 책에서 마침내 형태를 취한
주관적 각성 과정을 향한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그 다음에는 그 과정을 안내했습니다.
"세살적에 존재에 대한 갑작스러운 충만한 의식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나는 있다'의 의미에 대한
비언어적이지만
완전한 이해였지요.
연달아
나는 아예 존재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공포스러운 각성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망각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식적 앎으로서의
찰나적 깨어남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적인 자기가 태어났으며 '있다와 있지 않다'의 이원성이 나의 주관적 앎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린 시절 사춘기를 통틀어 존재의 모순과 자기의 실상에 대한 의문은 계속 되풀이된 관심사였습니다.
때로
사적인 자기가
더욱 크고 비개인적인 나로 빠져들기 시작하면
애초의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
무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이
다시 치밀어 오르곤 했습니다"
깨어나는 현존
1939년 나는 27킬로미터의 배달구역을 담당하는 위스콘신 농촌의 신문배달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어두운 겨울밤, 나는 집에서 몇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눈보라를 만났습니다. 영하 30도의 기온에서 얼어붙은 눈덮인 들판위로 자전거가 넘어졌습니다. 거센 바람에 바구니 속에 든 신문은 들판으로 산산이 날아가 버렸고, 나는 좌절감과 피로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옷은 뻣뻣하게 얼어붙었고 집은 멀었습니다. 나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높이 쌓인 눈더미의 얼어붙은 표면을 깨고 굴을 판 다음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오한이 멎고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지더니 그 다음에 어떠한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평화로운 상태가 찾아왔습니다. 거기에 함께 한 것은 넘쳐 흐르는 무한한 빛과 무한한 사랑의 현존이었습니다. 그것이 시작과 끝이 없었고, 나 자신의 본질과 구별되지 않았지요. 앎이 온전히 지금뿐인 그 밝아진 상태와 융합되면서 육체와 주변환경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음은 점차 침묵에 들었고
생각은 완전히 그쳤습니다.
무한한 현존이 있었거나 있을 수 있는 전부였는데,
그것은 시간 너머에 있었으며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뒤 누군가 무릎을 흔드는 바람에 나는 어떤 앎으로 돌아왔습니다. 뒤이어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육체와 그에 따른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게 영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했으므로 그분의 고통으로 인해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초연한 방식으로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두려움에 동감했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우스꽝스럽게 비쳤습니다. 그 주관적 경험에 대해선 어느 누구와도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맥락이 없었지요. 나는 그 전에 영적 체험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뒤에 받아들여진 세계의 실상이 그저 임시적인 것으로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 종교의 가르침은 의미를 상실했고, 역설적으로 나는 불가지론자가 되었지요.
전 존재를 적시는 듯이 느꼈던
신성의 빛에 비하면
전통적 종교의 신은 정말이지
둔한 빛을 발했습니다.
나는 종교를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영성을 발견했습니다.
2차 대전기간 나는 해군 소해정에 배치되어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죽을 뻔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동료 수변들과는 달리 내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마치 죽음이 그 확실성을 상실한 것 같았지요.
종전이 된 다음에는 의대에 진학하여 학비를 벌며 공부했는데, 나는 마음의 복잡성에 매료되었고,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정신분석의 과정을 밟을때 칼럼비아대 교수였던 내 지도교수 또한 불가지론자였는데, 우린 둘다 종교를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정신분석은 잘 되었고, 의사로서의 이력 또한 잘 풀렸으며, 나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직업생활에 조용히 안주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어떤 치료법에도 반응하지 않는 치명적인 진행성 질환에 걸렸지요.
서른 여덟이 되었을 때
나는 죽게 되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육체에 대해선 상관하지 않았으나
영은 극심한 고통과 절망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을때 불현듯
생각이 마음을 스쳤습니다.
"혹시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만약 신이 계시다면
지금 저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거기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신에게든 자신을 내맡기고 무의식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깨어나보니 엄청난 변형이 일어났고 나는 경외심으로 말문이 막혔습니다. 전에 있었던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적인 자기인 에고는 남아있지 않았고 그저 무제한의 힘을 가진 무한한 현존 뿐이었습니다. 무한한 현존 그것이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 현존이 나였던 것을 대체했고, 이제 육체와 육체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은 오직 현존의 무한한 의지뿐이었습니다.
세계는
무한한 하나임의 명료함으로
환히 밝혀졌고
측량할 길없는 아름다움과 완벽함 속에 드러난 일체로서
그 자체를 표현했습니다.
아홉달동안 그 멎어있음을 지속되었습니다.
내게는 자신만의 의지가 없었습니다.
육체적 실체는 명령받지 않아도
무한히 강하지만 절묘하게 부드러운 현존의 의지에 안내에 따라
제 할일을 해 나갔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어느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진실은 자명했지요.
개념화는 필요하지 않았거니와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경계는
그 회고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에너지를 나르고 있는 것처럼
극도로 과부하가 걸린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 불안과 더불어
평상시의 모든 동기부여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구할 것이 없었는데
그것은 전부가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명성, 성공, 돈은 무의미했습니다. 친구들은 나더러 실용적으로 진료를 재개하라고 촉구했지만 그렇게 하고자 하는 유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격밑에 있는
실상을 지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감정 질환의 기원은
자신이 곧 성격이라는
사람들의 신념에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진료를 재개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미국전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1년에 1,000명의 신규환자를 치료했습니다.
결국에는 50명의 치료사와 기타 직원을 두게 되었지요. 외래환자는 2,000명에 달했고 25개 진료실, 연구실, 뇌파실험실이 생겼습니다. 라디오 방송과 TV에서 출연 요청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맥닐/레러 뉴스아워" "투데이 쇼', '바바라 월터 쇼'가 있었지요.
1973년 나는 분자교정 정신의학 Orthomolecular pshychiatry treatment of schzophrenia이라는 책을 통해 내가 하던 연구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그 책은 수많은 이들에게 자극이 된 듯했습니다.
사랑, 광휘, 기적
신경계의 전체적 상태는
서서히 개선되었고,
그 다음에도 다른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감미롭고 기분 좋은 에너지 띠가 쉴새없이
척추를 따라 올라가 머릿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거기서 강렬하고 지속적인 쾌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공시성으로 일어나 완벽히 조화롭게 진화했으며
기적적인 일이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기적이라고 부를 일들은
사적인 자기가 아닌
현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적인 나에서 남은 것은
그런 현상에 대한
어떤 목격자뿐이었지요.
나 자신보다 혹은 그것이 전에 했던 생각들보다
더욱 깊은 곳에 있는
더욱 큰 나가 벌어지는 모든 일을
결정했습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전한 바 있으므로 나는
붓다, 황벽선사, 다른 깨달은 현인들을 포함하여
라마나 마하리쉬와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같은
근래의 스승들의 영적 가르침을 탐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런 경험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는 게
확증되었지요.
불현듯
바가바드 기타(측정 수준 910)가
완전히 이해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스리 라마크리슈나와 기독교 성인들이 전한 것같은
영적 황홀경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모든 것
모든 사람이 다 환했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빛을 뿜게 되었으며
그 광휘를 멎어있음과 장려함속에서
표현했습니다.
전 인류가
사실상 내면의 사랑을 동기로 하지만
그저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에 대한 지각이 깨어나지 않은
잠자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이들이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으나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침에 한시간 그리고 저녁 식사전에 다시 한시간씩 명상을 하는 습관을 버릴 필요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복을 강화시키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눈더미 속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 되곤 했고,
그런 상태를 떠나
보통의 삶으로 복귀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모든 것의 믿기 힘든 아름다움이
완성된 상태에서 빛을 발했고,
세상이 추함을 보는 곳에서
나는 오직 무시간적 아름다움을 볼 뿐이었습니다.
영적인 사랑이
나의 모든 지각에
스며들었습니다.
'여기와 저기,
그때와 지금,
나와 너'사이의
모든 경계는 사라졌습니다.
그 세월은 내면의 침묵속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그 사이에 현존의 강도는 더 강해졌지요.
내게 사적인 삶은 없었으며
사적 의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한한 현존의 도구였고,
그 현존의 의지대로 돌아다니고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존의 오라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구도자들은 내게서 답을 구했지만
데이비드와같은 그런 개인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고 있었던 것은
나의 것과 다르지 않은
그들 자신의 자기에서
답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사람을 바라보건,
나 자신이 그의 눈을 통해
빛을 발하는게 보였습니다.
"어떻게 내가 저 모든 육체속에 들어간 걸까?"
나는 의아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여러해 동안 앓아온
많은 고질병이 사라졌습니다.
시력은 저절로 정상으로 돌아왔고 오랫동안 써왔던 이중 초점안경은 더이상 필요없었습니다. 이따금씩 형언할수 없는 지복의 에너지, 무한한 사랑이 불현듯 가슴에 솟구쳐 어떤 재난현장을 향해 뿜어내지곤 합니다.
한번은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는데, 그 경이로운 에너지가 가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막 자동차 사고가 나 있는게 보였습니다. 사실 전복된 차량의 바퀴들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지요. 그 에너지는 맹렬한 기세로 나한테서 차에 타고 있는 이들에게 전해졌고 그러다가 저절로 멈췄습니다.
또 한번은 어느 낯선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에너지가 앞쪽 블록을 향해 흘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깡패들이 막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현장에 닿았습니다. 싸움꾼들은 물러서서 웃음을 터뜨렸지요. 그러자 에너지는 다시한번 그쳤습니다.
그럴수 있을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지각의 심원한 변화가
예고없이 일어났습니다.
롱아일랜드의 어느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고 있는데
현존이 갑자기 강렬해지더니
보통의 지각에서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던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무시간적 보편성과 하나임안으로 녹아들었습니다.
움직임이 없는 침묵속에서
나는 아무런 사건도 일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데,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는
태어나고 죽는 분리된 나라는 환상이 그런 것처럼
지각의 가공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한한 거짓 자기가
그것의 참된 기원인 보편적 참나속으로 녹아들면서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
절대적 평화와 안도의 상태로 귀향한 것같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괴로움의 기원은
오직 개별성의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곧 우주이고 완전하며
있는 전부와 하나이고
끝없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더이상의 괴로움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존을 치유에 이용하다.
환자들이 세계 전역에서 찾아왔습니다. 일부는 가망없는 이들중에서도 가장 가망없는 이들이었지요. 이송용 방수포로 몸을 감싼 채 꿈틀거리는 기괴한 형상의 환자들이 먼 곳의 병원에서 실려왔습니다. 그들은 진행된 정신분열증과 치유 불가능한 중증 정신질환의 치료에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긴장증 환자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수년간 무언증을 나타내고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어느 환자든
불구가 된 겉모습 뒤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빛나는 본질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보통사람의 눈에는 너무도 희미해서,
또는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전혀 사랑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날 말문이 닫은 긴장증 환자가 구속복에 몸이 묶인 채 병원으로 실려왔습니다. 그녀는 중중 신경질환을 앓고 있었고 똑바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환자는 경련을 일으키더니 두눈이 뒤로 돌아갔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에 옷은 갈가리 찢긴 채, 그녀는 그저 목쉰 소리만을 토해낼 수 있었을 뿐이었지요. 그녀의 가족은 대단히 부유했습니다.그래서 그녀는 여러해동안 세계 곳곳의 유명한 전문의를 비롯한 의사들을 숱하게 찾아다녔지요. 온갖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의료진은 결국 그녀의 상황에 대해 가망없다고 말하고는 포기하곤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물었습니다.
'신이여,
이 여성이 어떤 일을 겪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그때 내가 할일은 그저 그녀를 사랑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녀 내면의 자기가 두눈을 통해 빛을 발했고 나는 그 사랑하는 본질과 연결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치유되었습니다.
마음이나 몸에서 일어난 일은
더이상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본질적으로 그와같은 일이 무수히 많은 환자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일부는 세상의 눈으로 볼때 회복되었고 일부는 그렇지 않았지만 임상적 회복이 일어났는지 여부는 환자에게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의 고뇌는 끝났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내면이 평화로워질 때
고통은 그쳤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현존의 연민이
환자 개개인의 실상을 재맥락화하여
그들이 세상과 세상의 외관을 초월한
어떤 수준에서 치유를 경험했다는 이야기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 안에 존재했던 내적 평화는
시간과 정체너머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나는 온갖 고통과 괴로움은 신이 아니라
오직 에고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환자들의 마음으로 말없이 전해준 진실이었지요.
여러해 동안 말문을 닫고 있던 또 다른 긴장증 환자에게서 그런 정신적 차단을 직관했을때 나는 마음을 통해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에고가 자신에게 한 일에 대해
신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벌떡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고
현장을 목격한 간호사는 놀랐습니다.
그러나 일은 점차 과중한 것이 되었고 결국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내가 관계했던 병원에서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병동 하나 더 늘렸지만 환자들은 줄지어 병상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번에 한 환자밖에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인간고의 밀물앞에서 엄청난 좌절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컵으로
바닷물을 퍼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았지요.
왠지 모를 권태감의 원인, 그리고 영적 번민과 인간고의 끝없는 흐름의 원인을 다루는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체 운동학(근육 테스트)을 접했을 때
나는 그 잠재력 앞에서 곧장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두 우주,
즉 물질 우주 및 마음과 영의 우주사이의 웜홀이었고,
차원들 간의 접점이었습니다.
자신의 근원을 잃어버린 채 잠자는 이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높은 실상과의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시켜주고
그것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입증해주는 도구가
여기에 있었지요.
나는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물질, 생각, 개념을 테스트하기 시작했고, 제자들과 연구 조수들도 같은 작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이상한 일에 주목했습니다.
모든 피험자들이
부정적 자극(형광등, 살충제, 인공 감미료같은)에 약한 반응을 보인 반면,
자신의 앎의 수준을 발전시킨 영적 훈련생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피험자의 의식속에서 뭔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바뀌었습니다.
명백히 그들은
자신이 세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믿는 바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 깨달음을 향한 진보 과정 바로 그 자체가
존재의 무상함에 저항하는
인간능력을 높여준다는 걸 보여주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만으로
세상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하여
나는 점점 더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사랑아닌 것을 대체할때마다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가 보였습니다.
그 사랑의 힘을 특정 지점에 집중하면
문명의 전 체계가 현저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때마다
역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중대한 통찰이
세상에 전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시적으로 반박의 여지없이
입증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간 삶의 큰 비극은
항상 심령이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화와 반목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인류의 무능함과 불가피한 귀결이었지요.
하지만
근본적 딜레마에 대한 답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본성자체를 재맥락화 해주는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저 추론할 수 있을 뿐인 것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방식이었습니다.
영의 여정
5번가에는 아파트가, 롱아일랜드에는 큰집이 있었던 뉴욕에서의 삶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보다 중요한 어떤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세상과 그 속의 모든 것을 떠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고,
그후 7년간 명상과 연구를 하며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수 있으려면
그러한 의식상태를
하나의 도구로 완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하지 않았는데도
압도적 지복상태가 되돌아오곤 했고,
결국 나는 신성한 현존속에 있으면서
사회에서 여전히 기능하려면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와 저술을 위해 모든 수행을 중단하고 형상세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지요. 나는 세상사를 따라잡기 위해 즉 누가 누구이고 요즘 사회적 대화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위해 신문을 읽고, TV를 시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가 공직에 출마했는지, 누가 다이애나비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요즘 뉴스를 다시 알게 되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진실의 예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
(이는 신비가의 영역인데,
신비가는 자신의 수준이 갖는 에너지를 집단의식으로 보냄으로써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이해 불가능이며
따라서 구도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한정된 의미를 갖습니다.
나는 이제 평범해지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평범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절로 신성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자신에 관한 진실은
일상생활의 도를 통해 찾아낼 수 있습니다.
평범함과 신은 다르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관심과 친절로 살아가는 일 뿐입니다.
나머지는 적당한 시기에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멀찍이 돌아온 영의 끝에
나는 가능한 많은 동료존재들이
내 삶을 바꾼 현존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일로 복귀했습니다.
현존은 침묵하며 평화로운 상태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무한히 부드럽지만 바위와 같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적 기쁨이 설명하기 힘든 황홀경의 고요한 수준에서 일어납니다.
시간 경험이 그치므로
걱정, 후회, 고통이나 기대는 없습니다.
기쁨의 근원은 끝이 없으며 항상 존재해야 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고, 상실이나 슬픔, 욕망도 없습니다.
해야 할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냐하면 일체가 이미 완전무결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멎을때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문제란
지각의 한 지점이 빚어낸
가공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존이 지배할 때
몸이나 마음과의 동일시는
더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점차로 침묵할 때
'나는 있다'는 생각 또한 사라지고
순수 앎이 빛을 발하여
사람이 무엇이고 무엇이었으며
항상 무엇일지를 모든 세계와 우주(무한한 그리고 시간 너머에 있는) 너머에서
환히 밝혀줍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앎의 상태에 도달하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뿐인데,
그 단계를 따르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 단계를 따르는 이들이 드문 것은
그것이 아주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외를 두지 않고
일관되고 차별없는 용서와 부드러움으로
행동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포함하는 모든 것에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기꺼이 욕망을 정지시키고
매순간 사적 의지를 내맡기고자 했습니다.
모든 생각, 느낌, 갈망 혹은 행위를
신에게 내맡기자
마음은 점점 더 침묵에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속 모든 이야기와 논평을,
그 다음에는
관념과 개념을 신에게 넘겼습니다.
생각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놓아버리면
생각은 더이상 그런 정교함에 이르지 못하고
겨우 반쯤 형성되었을때 조각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생각이 되기도 전에
생각자체의 배후에 있는 에너지를 넘기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단 한순간도 명상상태에서의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확고부동하게 초점을 고정시키는 일을
일상생활 중에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 같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습관적이고
자동적이며 힘들지 않은 것이 되었지요.
그 과정은 마치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엄청난 힘이 요구되지만 로켓이 지구의 중력장을
벗어나면 힘이 점점 덜 듭니다.
마침내 그것은 그 자체의 관성으로 우주공간을 나아가지요.
아무런 징후없이 앎에서 문득 어떤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현존이 거기에 있었지요.
그것은 명료했으며 전부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죽는 동안 잠시 불안의 순간이 있었고
그 다음에 현존의 절대성이 순간적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돌연한 비약은 장관이었으며 이전에 경험한 어느 것보다 더 강렬했지요.
일상적 경험에는
그에 비견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뒤이어 일어난
격심한 충격을 완화해준 것은
현존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지지와 보호가 없으면
사람은 소멸할 것입니다.
에고가
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존재에 매달릴 때
공포의 순간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에고가 죽자
무가 되는 대신
그자리에는 일체임, 전부로서
참나가 들어섰습니다.
그속에서 일체는
자신의 본질의 완벽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고
자명합니다.
비국소성과 더불어
사람은 항상 존재해왔고
혹은 존재할 수 있는 전부라는 앎이 왔습니다.
사람은 모든 정체와 성별을 넘어서
심지어는 인간존재 자체를 넘어선 전체적이고 완전합니다.
다시는 괴로움과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육체에 벌어지는 일은 비물질적입니다.
영적 앎의 일정수준에서
육체의 질환은 치유되거나 저절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절대적 상태에서 그러한 고려는
무관한 것입니다.
육체는 예정된 경로를 밟을 것이고
그 다음 그것이 온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사람은 그것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육체는 나라기보다는 그것으로
방안의 가구같은 또 다른 물체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육체가 개별적 인간인 것처럼
여전히 그것에 말을 거는 모습이 우스워보일 수도 있지만,
자각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앎의 상태를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일을 해나가고
섭리가 사회적 적응을 맡도록 버려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지복에 이를 때
그렇듯 강렬한 황홀경을 감추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집니다.
그 지점에는 그 상태를 타인과 공유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이롭도록 이용하고자 하는
일반적 욕구가 있습니다.
세상 역시 경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동반되는 오라속에 있기 위해
사람들이 멀리서 널리 찾아옵니다.
형이상학적 구도자들과 영적 호기심이 있는 이들이
기적을 찾아 이끌릴 수 있으며
중병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그들에게 자석이자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 동반되는 황홀경은 절대로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큰 고뇌의 순간들도 있다는 걸 유념하십시오.
그 상태가 요동하다가 명확한 이유없이 갑자기 그칠때
가장 격렬한 순간인 벌어집니니다.
그런 때는
깊은 절망의 시기, 현존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추락은 길을 힘겹게 만드는데
반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이 수준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
안그러면 견디기 힘든 은총에서의 추락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마침내 자명해집니다.
그 다음에
이원성을 초월하는 힘겨운 과업에 들어설때
활홀경의 영광은 포기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모든 대립물과
그러한 대립물의 상충하는 잡아당김을 넘어설때까지의 일입니다.
그런데
황홀한 기쁨의 황금사슬을 버리는 것은
마치 신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수준의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절대고독에 대한 최후의 공포입니다.
나의 경우에는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무시무시했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되풀이해서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제야 고뇌의 목적, 영혼의 어두운 밤의 목적이 명확해졌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견디기 힘들고
그 격렬한 고통은 그것을 넘어서는데 필요한
극한의 노력을 다하도록 사람을 몰아붙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오가는 것이
견딜 수 없어질 때
존재 자체에 대한 욕망은 내맡겨져야 합니다.
오직 그렇게 할때야
사람은 마침내 전부임이냐 무냐,
존재냐 비존재냐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내적 수행의 정점이
가장 어려운 국면이자
궁극적 분수령입니다.
사람은
여기서 초월하는 존재의 환상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압니다.
그 단계에서는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데,
그 돌이킬 수 없음의 유령이
마지막 장벽을 모든 것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선택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사실 자기의 최종적 종말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원성(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 즉, 정체 자체)은
보편적 신성속에서 녹아버리고
선택할 개별의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걸음은
신께서 홀로 옮겨 놓으십니다.
이 흥미진진한 깨달음의 여정을
따라가십시오.
당신은 자신의 의식을 force 수준이 아닌
power의 수준까지 상승시키는 것이
얼마나 쉬울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각성한
아는 이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은
분명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의식혁명 서론
모든 인간의 노력에는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일반적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목표를 위해 사람은
도덕, 철학, 심리학 등의 체험에 근거한
분석적 학문을 여럿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 동향을 예측하려는 시도에서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을 데이터 수집과 분석에 투자합니다. 그러한 열광적 추구에는 어떤 궁극적 답을 찾는데 대한 기대가 내재되어 있지요.
일단 답을 찾기만 하면
그것은 경제, 범죄, 국가보건, 혹은 정치상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거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믿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그 문제들 중 어느것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정보의 홍수속에 있습니다.
장애는 데이터의 의의를 해석할
올바른 도구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아직 맞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는데,
그것은 질문의 타당성이나 정확성을 재는
적당한 측정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항상 그렇지만,
사람의 딜레마는
자신의 지적 가공물을
실상으로 오인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위적 가설은
지각의 임의적 지점의 산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얻는 답의 불충분함은
질문자의 관점속에 함축되어 있는 한계의
직접적 귀결입니다.
질문 작성에서의 사소한 오류가
이어지는 답에서
엄청난 오류로 귀결됩니다.
이해는
단순히 데이터를 검토하는데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해는
특정한 맥락에서
데이터를 검토하는데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까지는
정보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데이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꼭 맞는 질문을 하는 것만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데이터를 추리고 기술하는 유의미한 과정에서
그 데이터를 측정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 역시 필요합니다.
모든 사고방식의 치명적 결함은 주로 이렇습니다.
첫째, 주관과 객관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둘째, 기본적 설계와 용어에 내재된 맥락의 한계를 무시하는 것
셋째, 의식 자체의 본성에 대한 무지
넷째, 인과의 본성에 대한 오해
이러한 결점의 귀결은
우리가 새로운 전망에서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인간 경험의 주요 영역을 답사하는 동안
명확해질 것입니다.
사회는 원인 대신
결과를 바로잡는데 끊임없이
노력을 소모합니다.
그것은
인간의식의 발달이 그토록 느리게 진행되는
한가지 이유입니다.
인간은 진화의 사다리에서 첫번째 발판을 간신히 디뎠습니다. 우리 세계의 기아같은 그런 원시적 문제조차 아직 해결하지 못했지요. 사실 여태까지 인류가 성취한 것은 거의 눈이 먼채 시행착오를 거쳐 이룬 것으로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해결책을 향한
마구잡이 탐사는
당황스러운 복잡성이라는 미로로
귀결되었습니다.
반면에
참된 답은
항상 단순성이라는 특징을 갖지요.
우주의 기본법칙은 경제성입니다.
우주는 단 하나의 쿼크도 낭비하지 않습니다
.
일체가 어떤 목적에 기여하며
어떤 균형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주에 외생적 사건이란 없습니다.
사람은
외견상의 원인 너머를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을때까지
자신에 대한 지식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기록으로부터
답은 세계속의 원인을 확인하는데서 나오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도 있습니다.
우린 세계속의 원인 대신
표면적 원인의 저변에 있는 조건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들은
사람의 의식자체 내에만 존재합니다.
사건들의 연쇄를 고립시키고
그것에 인과라는 정신적 개념을 투사하는 것으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결정적 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관찰 가능한 세계내에는
원인이 없습니다.
앞으로 입증하겠지만
관찰가능한 세계는
결과의 세계입니다"
살펴보면
효율적 수단을 발견하는데서의 어려움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문제로 환원됩니다.
강력하고 효율적인 해결책과
약하고 비효율적인 해결책을
구별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이론은 여태껏 없었습니다.
우리의 평가수단 자체에는
현실적으로 사정할 수 있는 능력이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사회의 선택은
대개 편의주의, 통계상의 오류, 정서, 정치적 압력, 대중매체 압력
혹은 사적인 편견과 기득권의 결과입니다.
전세계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이
실질적으로 실패를 보증하는 조건에서
이루어집니다.
효율적 문제해결책의 수립에 필요한
현실적 기초가 결여되는 까닭에
사회는 매우 경제적인 힘의 행사 대신
비용이 많이 드는 위력(전쟁, 법, 세제, 규칙, 규정같은 다양한 표현을 갖는)에의 의존으로
자꾸만 후퇴합니다.
사람의 조작능력의 두가지 기본 유형은
'이성과 느낌'입니다.
이성과 느낌은
불안정했던 우리의 개별적 집단적 생존역사가 증명해주는 것처럼
둘다 본래부터 믿을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이성에서 나온다고 보지만,
사실 사람은 주로 패턴인지에서
행동합니다.
데이터의 논리적 배열은
주로 어떤 패턴인지 체계의 강화에 기여하고
그것은 그 다음에 진실입니다.
결과적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문제가
인식의 어려움에서 비롯된다고 추론합니다.
궁극적으로 마음은 인식론에 이릅니다. 인식론은 사람이 대상을 어떻게 어느정도로 인식하는가의 문제를 고찰하는 철학분야입니다. 이 분야의 철학적 담론은 박식하게도 혹은 무관한 것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거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 경험의 핵심에 놓여있습니다.
인간지식에 대한 고찰 어디서 시작하든
우리는 항상 앎이라는 현상과
인간의식의 본성을 바라보게 됩니다.
결국 우린 동일한 각성에 이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태가 더 이상 발전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인식의 검증가능한 기초가 요구된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사람의 발달을 가로막는 주요 장애는
의식자체의 본성에 대한
지식결핍입니다.
자신 안에서 마음의 시시각각의 과정을 바라본다면 마음은 그것이 인정하는 그것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 금방 눈에 띌 것입니다.
행위가
사려깊은 결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관념은
큰 착각임이 분명해지게 됩니다.
의사결정은
의식자체의 기능입니다.
마음은
수백만개의 데이터와
그 데이터의 상호작용관련 및 투사를 바탕으로
선택합니다.
선택은
의식적 이해를 훨씬 뛰어넘어선 곳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지요.
그것은 비선형적 동역학이라는 신과학의 끌개로 명명한 에너지 패턴들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전역적 기능입니다.
의식은 자동적으로
그것이 순간순간 최고라고 여기는 것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데이터에 부여되는 상대적 비중과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개별 마음이나 집단적 마음안에서 작동하는
우세한 끌개 패턴입니다.
끌개패턴은 감별하고,
기술하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 정보로부터
인간 행동과 역사에 관한
그리고 인류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인간문제의 본성을 탐사하는 동안
역사과정에서 인간의 동기와 경험을 측량하고 해석할 믿음직한
실험적 척도는 결코 없었다는 점이 분명해지게 됩니다.
신체 운동학은
지금 실무율 근육반응 자극에 대한 테스트를 기반으로하는
기초가 탄탄한 과학입니다.
긍정적 자극은
강한 근육반응을 유발하지만
부정적 자극은
시험 근육의 입증가능한 약화로 귀결됩니다.
진단기법으로서 임상신체운동학의 근육테스트는 지난 25년간 폭넓게 검증받았습니다. 존 다이어몬드 박사는 이 주제에 관한 조지 굿하트 박사의 원래 연구를 폭넓게 적용했지요. 존 다이어몬드 박사는 긍정적이지 않으면 부정적인 이 근육테스트 반응은 물질적 자극과 정신적 자극 둘다에 대해 일어난다고 단정했는데 그러한 주제는 그의 책을 통해 대중적 관심을 얻었습니다. 이 책에 반영된 연구는 다이어몬드 박사의 기법을 몇단계 앞서서 취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근육 테스트 반응은
긍정적 자극과 부정적 자극뿐 아니라
동화적인(생명을 고양시키는) 것과 이화적인(생명을 소모시키는) 것을 구별하고
가장 극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인간 유기체의 능력을 반영한다는
발견이었습니다.
테스트 자체는
간단하고 신속하며 비교적 확실합니다.
긍정적 근육반응은 명백하게 참된 진술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고
부정적 반응은 피험자에게 거짓진술을 제시할 경우에 일어납니다.
그런 현상은
주제에 대한 피험자 자신의 의견이나 지식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데,
근육반응은 어떤 인구집단에서든 문화를 초월하여 유효하고
세월이 흘러도 일관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인간 역사상 최초로
이 기법은 진실과 거짓의 식별을 위한 객관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무작위로 선정한 순진한 피험자들을 상대로
언제든 온전히 검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시험가능한 현상이
인간의 의식수준을 측정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과
그 결과 자연수로된 임의적 로그척도가 출현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척도는
인간 경험의 전분야에서
의식수준이 갖는 상대적 힘을
층층이 나눕니다.
철저한 연구결과
의식에 대한 측정된 척도가 유도되었는데
그 척도에서는 1에서 1,000에 이르는 자연수들의 로그가
인간 앎의 가능한 모든 수준이 갖는 힘의 정도를
측정해줍니다.
이러한 발견을 확증한 수백만 차례의 측정을 통해
나아가 인간사에서
힘의 수준들의 층상이 노출되며
힘과 위력의 뚜렷한 차이 및
각각의 성질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차례로
인간행동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들을 감식하기 위한
인간행동에 대한 종합적 재해석이 이르렀지요.
측정된 척도는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에 나오는 위계수준들과 부합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곧장 사회학, 임상 심리학, 전통적 영성 안의 감정적 지적 현상과의 상호관련을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이 책에서 측정된 척도를 고등이론 물리학 및 카오스 이론이라는 비선형동역학의 요즘 발견들에 비추어 고찰합니다. 우리는 측정수준이 의식영역자체 내의 강력한 끌개장들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끌개장은 인간존재를 지배하고
따라서 내용, 의미, 가치를 규정하며,
인간행동의 광범위한 패턴에 대해 조직화 에너지 노릇을 합니다.
끌개장의 이 층상은
의식의 부합하는 수준에 따라
전시대에 걸친 인간경험을 재맥락화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합니다.
실용적 측면에서
우리 방식은 여태껏 접근할 길이 없었던
데이터에 접속함을 통해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동시에 인류의 장래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리라고 약속합니다.
연구 도구로써 이 기법의 가치를 강조하려는 시도에서 폭넓은 인간활동 영역에서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예를 들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예술, 역사, 상업, 정치, 의료, 사회학, 자연과학, 실용적으로는 마케팅, 광고, 연구개발, 경험적으로는 심리적, 철학적, 종요적 탐구. 그밖에 범죄학, 정보부, 중독학, 자기계발같은 그런 다양한 분야에서의 특수한 적용을 제안했습니다.
단순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때로 거의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한가지라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주와 생명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크게 확장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것을 명백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태반을 할애 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제는
사실상 비상히 단순하기 때문에
복잡성에 매료된 세상에서는
그것을 내놓기가 어렵습니다.
평이함과 명료함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지요.
그것은
믿는 이와 못믿는 이입니다.
못믿는 이에게,
일체는 진실임이 증명될때까지는 거짓입니다.
믿는 이에게
굳은 믿음 속에 있는 일체는
그렇지 않다는 게 증명되지 않는 한 십중팔구 진실입니다.
냉소적 회의론이라는 염세적 위치는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반면에 정보를 수용하는 보다 낙관적인 태도는
자신감에서 생겨나지요.
어느 쪽 스타일이든 작용하며 각각 찬반이 나뉩니다. 따라서 나는 두가지 접근법을 모두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제시한다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모순어법의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이 이른바 좌뇌적 이해와 우뇌적 이해를 다함께 촉진하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실제에서 인간은 패턴인지를 통해 어떤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전혀 새로운 개념을 파악하는 가장 쉬운 길은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이해는 완결을 특징으로 하는 서술양식으로 조장되지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빈약한 형용사나 사례들만을 이용하는 대신,
반복을 통해 개념들은 동나고 완료됩니다.
관념은 그 다음에 종료되고 마음은 홀가분해지지요.
그런 접근방식은 3장을 읽는 마음이 1장을 읽는 마음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합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1장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차근차근 읽어야 한다는 관념은 고정된 좌뇌적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한정되어 있고 그리고 한정하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뉴턴 물리학의 걸어가는 길입니다. 거기서는 모든 사건이 A--> B --> C순으로 일어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 근시안적 형태는 시대에 뒤떨어진 실상의 패러다임에서 생겨납니다. 보다 폭넓고 훨씬 더 종합적인 우리의 관점은 최첨단 물리학, 수학, 비선형 이론의 정수를 이용할뿐 아니라 누구든 경험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직관을 이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자료를 제출하는데서의 난점은 비선형적 개념을 선형적인 문장의 나열구조로 이해한다는 모순에 있습니다.
데이터를 양산한 과학분야들은
그것 자체로 충분히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예를들면
고등이론물리학과 그에 관한 수학, 비선형 동역학, 카오스 이론과 그 수학,
첨단 행동신체 운동학, 신경생물학, 난류 이론뿐 아니라
인식론과 존재론의 철학적 고려들이 있습니다.
이것들 외에도
과학이 그 경계선에서 뒷걸음질 친 미답의 영역,
즉 인간의식 자체의 본성을 다룰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주제를 순수하게 지적인 관점에서 결론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한 평생 연구를 요하는 엄청난 과업일 것입니다. 그런 가공할 과제에 착수하는 대신, 나는 매 주제에서 핵심을 뽑아내고자 (그리고 그것만을 가지고 연구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근간이 되는 테스트기법(그것은 처음에는 알려진 우주법칙들을 초월하는 듯이 보이는데)의 작동을 설명하려는 초보적 시도조차 불가피하게 우리를 고등이론 물리학, 비선형 동역학, 카오스 이론의 지적영역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나는 그런 주제를 가능한 한 비전문 용어로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소화하기 위해
고도의 지적능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주변 개념을 그것이 독자들에게 자명해질때까지 반복해서 맴돌 것입니다. 어떤 사례에 대한 해설로 돌아갈때마다 더욱 큰 이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학습은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지형을 조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 지나갈때는 모든 것이 낯설어 보입니다.
두번째 무렵에는 어떤 기준점이 분간되지요.
세번째는 이해되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단순한 노출을 통해 마침내 친숙해집니다.
나머지는 마음의 천부적 패턴-인지 기제가 처리합니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이 책의 핵심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나 자신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그것을 미리 말해 두고자 합니다.
개별적 인간의 마음은
어떤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 단말기와도 같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는
인간의식 자체이고
그것에 대해 우리 자신의 지식은
개별적 표현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개별적 표현들은
전 인류의 공통 의식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는 천재의 영역입니다.
인간이란
그 데이터베이스에 참여한다는 것이므로
만인은 자신의 탄생 덕분에
천재에 접속되어 있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있는 무한한 정보는
누구든 어느때 어느 장소에건 몇초만에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금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발견인데,
그 속에는 개인과 집단이 아직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정도로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들어있습니다.
그 데이터 베이스는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개인의식의 모든 한계를 초월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미래 연구를 위한 독특한 도구로 우뚝서고
덕분에 아직 꿈도 못꾸는 영역들에 대한
탐구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 행동, 신념체계의 객관적 기초 확립에 대한 가망을 제시해줍니다.
이 방법으로 얻어진 정보는 인간 행동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맥락을
그리고 객관적 진실을 실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 기법자체는 누구든 어디서든 어느 때건 이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관찰가능하고 검증가능한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경험의 신기원을 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이 주제는 강연이나 비디오를 통해서는 가르치기 쉽다는 것은 증명되었지만
내게 주어진 과제는
그것을 읽을 만한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증거서류는 복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연은 초간단합니다.
아이들은 곧바도 알아듣고 즐겁게 따라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놀라운 것은
거기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그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그걸 잊어버렸을 뿐이지요.
아이의 타고난 천재는 표면가까이에 있습니다.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다는 걸 알아본 것이 아이들인 것은 바로 그때문입니다.
천재란 그런 것입니다.
진실과 거짓, 작용하는 것과 작용하지 않는 것,
선의를 가진 것과 악의를 가진 것
우리는 그런 것을 정확히 구별하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태껏 간과되어 온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숨은 위력들을 조명할수 있습니다.
미해결의 개인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수단이
우리의 처분에 맡겨져 있습니다.
더이상
거짓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게 놔둘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은 엄청난 약속을 합니다. 이제껏 독자에 대한 약속으로 이것보다 큰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자신이 오도되고 있는지 여부를 탐지해 낼
수단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먼저 테스트해보지 않고 책을 읽거나 그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지나치게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 개정본의 진실수준은 810으로 측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 우리 문화에서는 비상히 높은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나의 약속의 부분적 이행이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 연구팀들은 모든 장, 절, 문장의 진실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책에서 묘사한 테스트법을 이용했습니다. (예를들면 테스트 결과 명성의 귀결로 자살한 명사들의 명단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모든 단어를 점검했고, '존레논"이라는 이름이 틀렸다는게 밝혀졌지요. 그는 암살범에게 저격당했으므로 자살한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삭제하자 그 문장의 진실수준 따라서 그 절과 페이지의 진실 수준이 그장의 나머지 부분과 엇비슷하게 올라갔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관찰되었는데,
테스트한 개인들의 수치가
이 책의 내용을 접한 뒤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데이터에 노출되기만 해도
대상자의 의식수준은 상승한 듯 합니다.
이 연구의 함의와 실용적 적용은 대단히 다양하기 때문에 내용의 어떤 측면이든 독자의 관심에 따라 확대할 수 있고,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연구 일부는 다양한 특수 이익집단을 위한 발표에 임상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상세히 묘사한 연구법에 관한 더 이상의 이용과 외삽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 책에서 기술한 결과는 20년간 여러 연구팀이 수천가지 대상에 관해 조사하고 수백만 차례측정한 산물이기는 하지만 "의식혁명"은 모든 예술과 과학 분야의 지식을 제고할 수 있는 근육테스트법의 잠재력에 대한 탐구의 시작을 나타낼 뿐입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의식의 가장 앞선 수준들과
심지어 깨달음 자체에 이르는 영적 성장과 성숙에서
하나의 도구가 되리라는 약속일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이해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드러남이
의식의 생리, 인간 신경계의 기능,
우주 물리학 간의 어떤 우연한 연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우리가 결국은 만유와 만유가 연결되어 있는
우주의 일부임을 상기할 때 하등 놀랍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우리가 그 모든 비밀에 접근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디를 어떻게 볼것인지를 안다면 말입니다.
사람은
자력으로 자신을 들어올릴 수 있을까요?
왜 안되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자신의 부력을 높이는 일일 뿐입니다.
사람은 힘들이지 않고 더 높은 상태로 올라갈 것입니다.
위력으로는 그런 위업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힘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단히 그렇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위력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드러나 있지 않은 근원에서 나온 자신이 아무런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한 힘에 지배당합니다. 힘은 노력이 필요없는 까닭에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게 움직입니다. 위력은 감각을 통해 경험되지만 힘은 내적 앎을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가동시킨 엄청나게 강력한 끌개 에너지 패턴과 정렬함으로써 현상태에 묶여 있습니다.
사람은
순간순간 force의 에너지에 구속당하고
power의 에너지는 추진되면서
현재의 진화상태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개인은 의식의 바다에 떠있는 코르크와도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며
그리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끝없는 의문속에 헤매고
세기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의식의 양자 도약을 이루지 못한채
그렇게 계속될 터인데
맥락과 이해의 그러한 갑작스러운 확장의 한가지 표식은
안심, 기쁨, 경외의 내적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모든 이들은
나중에 우주가 자신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었음을 느낍니다.
사실은 노력을 통해 축적되지만
진실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납니다.
독자들이 이 책을 덮을때 쯤 "난 항상 그걸 알고 있었어!"라고 외친다면 이 책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 책에 들어있는 것은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데도 자신이 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그것의 한 반영일 뿐입니다. 여기서 시도하는 것은 숨은 그림이 드러나도록 점과 점을 연결하는 일뿐입니다.
이 연구(의식혁명)가
고통, 괴로움, 실패의 근원을 해소하는데,
그리고 우리들 각자의 인간 의식진화가 기쁨의 수준까지 오르는데
보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인간존재의 경험의 본질은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이 그런 개인적 드러남에 관해 이해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위한 조건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의 모험입니다.
데이비드 R 호킨스, M.D., Ph D
에리조나 주 세도나, 고등 영성연구소 2002
첫댓글 단순히 상상하는 것만으로 세상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하여 나는 점점 더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사랑아닌 것을 대체할때마다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가 보였습니다. 그 사랑의 힘을 특정 지점에 집중하면 문명의 전 체계가 현저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때마다 역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연구가 고통, 괴로움, 실패의 근원을 해소하는데, 그리고 우리들 각자의 인간 의식진화가 기쁨의 수준까지 오르는데 보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인간존재의 경험의 본질은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이 그런 개인적 드러남에 관해 이해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위한 조건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호킨스 박사는 20년에 걸친 비슷한 측정을 통해 인간의식수준들의 스펙트럼 전체를 분석하여 인간 경험의 지형에 관한 매혹적인 지도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의식의 해부학은 인간의 전상태에 대한 소묘이며, 개인과 사회와 인류 일반의 감정적 영적 발달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 연구가 고통, 괴로움, 실패의 근원을 해소하는데, 그리고 우리들 각자의 인간 의식진화가 기쁨의 수준까지 오르는데 보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인간존재의 경험의 본질은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이 그런 개인적 드러남에 관해 이해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위한 조건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의 모험입니다.
2019년 1월 16일
흥미롭게 다시 읽다 !!!
단 한순간도 명상상태에서의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확고부동하게 초점을 고정시키는 일을 일상생활 중에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 같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습관적이고 자동적이며 힘들지 않은 것이 되었지요. 그 과정은 마치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엄청난 힘이 요구되지만 로켓이 지구의 중력장을벗어나면 힘이 점점 덜 듭니다. 마침내 그것은 그 자체의 관성으로 우주공간을 나아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