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이야기, 효와 제를 강조한 유자(有子), 타당할까
효와 제를 강조한 유자(有子), 타당할까
유자가 말한다.
효제로운 사람은 윗사람을 범하는 사람이 드물다. 윗사람을 범하지 않는 사람이 난을 일으킨 경우는 아직 없다. 군자는 근본적인 일을 위해 힘써 노력한다. 근본이 확실히 서면 도가 생긴다. 효와 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有子曰 其爲人也孝弟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而好作亂者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유자왈 기위인야효제이호범상자 선의 불호범상이호작란자 미지유야 군자무본 본립이도생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유자의 이름은 유약인데 유자라고 높여 불린다. ‘자’는 스승이나 어른 즉 영어로 master 정도의 뜻이다. 유약 말고도 ‘자’가 붙어 불리는 공자의 제자로 증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증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정자를 비롯한 후대의 논어 주석자들이 그렇게 한 것일 뿐, 유자나 증자 두 사람이 유달리 학문의 경지가 높았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이는 유자나 증자가 훗날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세속적인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효와 제의 개념에 있다. 효는 부모 자식 간에서 자식이 취하는 효도이고 제는 형제간의 관계에서 아우가 취하는 공손함이다. 그러므로 효는 종적(縱的)이고 제는 횡적(橫的)이다. 이 구절은 유학의(아니면 유자의) 가족주의를 실감하게 한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효와 제가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것이 공자의 말이 아니고 유자의 말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자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자식의 도리만을 말하고 있으며 형제간의 관계에서 아우가 취해야 할 태도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랫사람이 해야 할 바만을 말하면서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라고 하면, 이는 계층적인 가치관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느 면에서 인간 평등 정신에도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윗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취해야 할 바 못지않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취해야 할 도리나 태도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구절에는 벌써부터 유학의 근본 취지가 타락하고 있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유자의 말은 후대 학자들에게 가장 많은 비판거리를 제공한다.
도올과 증자의 맹점
공자가 말씀하셨다.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표정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이가 거의 없다.
이런 취지의 말은 공자의 어록에 여러 번 나타난다. 그만큼 공자가 중시했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 대해 김용옥은 다소 거창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저 <트락타투스>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Whereof one canot speak, thereof one must remain silent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지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기의 궁극적 관심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데에 있다.’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주장에는, 심오하고도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또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오로지 심오하고도 궁극적인 진리에 있다는 것이다.
김용옥은 공자가 말(교언영색)을 혐오한 것은, ‘인이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깊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데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단 김용옥은 교언영색에서 ‘교언’만 언급했을 뿐 ‘영색’의 해석을 편의적으로 누락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공자가 비트겐슈타인처럼 그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사물의 핵심을 읽는 가장 날카로운 방법은 사심을 제거하고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공자는 사심이 없고 단순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말 그대로 꾸미는 말과 표정을 경계했다고 본다. 결국 공자는 자연스러운 언행을 유달리 중시하여 강조했을 뿐이다. 이런 구절을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부터가 공자가 경계한 교언영색이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김용옥의 해석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증자가 말한다.
나는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함으로써 내 몸을 살핀다. 남을 위해 일하는 데 충성스럽지 않았는가? 벗을 대하는 데 믿음이 있었는가? 그리고 새로 배운 것을 잘 익혔는가?
曾子曰 吾日三省吾身-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앞서 말했듯이 증자의 이름은 증참이다. 그는 유자와 함께 자(子)가 붙어 높이 불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높여 불리게 된 것은 그들의 세속적 영향력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실 유자는 물론 증자에게서도 학문적 수준이나 인격적 경지가 다른 제자보다
효(孝),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맹자는 ‘부모를 섬김이 섬김의 근본이고 자신을 지킴이 지킴의 근본’이라고 말하며 스승 증자의 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공자의 제자가 증자이고 증자의 제자가 맹자이다. 또한 공자의 제자 중에 자하가 있는데 자하의 제자가 순자이다.)
孰不爲事(숙불위사) 事親事之本也(사친사지본야)
孰不爲守(숙불위수) 守身守之本也(수신수지본야)
그 어느 것이 섬김이 아니겠냐만, 어버이 섬김이 섬김의 근본이요, 무엇이 지킴이 아니겠냐만, 자기 몸을 지킴이 지킴의 근본이다.
옛날 가정에서는 큰 방에서 온 식구가 다 함께 식사를 했는데, 이때 아버지만은 진짓상을 독상으로 따로 받았다. 대개 아버지 진짓상에는 다른 가족상에는 없는 귀하고 맛있는 반찬이 오르는 수가 많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식사를 다 마치고 진짓상을 물릴 때에는 가족들 사이에 약간 미묘한 심리적 갈등이 빚어지곤 했다. 가족들 중에 아버지가 잡수시다가 남긴 귀하고 맛있는 반찬에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사 관습은 당대 중국도 흡사했던 모양이다. 증자는 아버지 증석의 진짓상에 으레 술과 고기를 올리는 효자였다. 그런데 아버지 증석이 식사를 다 마치고 상을 물리게 될 때, 증자는 상을 들고 나오며 꼭 아버지에게 공손히 물었다고 한다.
“아버님, 남은 반찬을 누구에게 줄까요?”
그러면 아버지 증석은 아들 증자에게 되묻곤 했다.
“아직도 더 먹을 여분이 있느냐?”
이때 증자는 비록 남은 음식이 거의 없는 상황일지라도 반드시 "네.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증자가 아버지를 모시며 아버지의 기분과 주변 상황을 고려했다는 뜻이다.
한 세대가 지나간 후 증석은 죽고 이번에는 증자가 진짓상을 받게 된다. 증자에게는 아들 증원이 있었다. 증원도 아버지 증자의 진짓상에 술과 고기를 올렸다. 하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증자의 아들 증원은 상을 물릴 때 남은 반찬이 있어도 아버지 증자에게 묻는 일을 하지 않았다.
증원은 한 술 더 떠 아버지가, “혹시 먹을 만한 반찬이 남아 있느냐?”고 물어도 증원은 한사코, “남아 있는 반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이런 정황은 이 증원이라는 놈이 묘한 데가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증원은 왜 남은 반찬이 있는데도 없다고 부인했을까? 이는 증원이 반찬을 남겨 두었다가 다음 진짓상에 또 올릴 계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증원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시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몸뚱어리를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증자의 아버지 모심은 아버지의 뜻까지 헤아리는 정신적인 것에 바탕을 둔 데 반해, 증원의 아버지 모심은 단지 몸뚱이만을 먹이려 한, 즉 물질적인 것이었다는 뜻이다.
<논어> 위정 편에 자유가 공자에게 효에 대해 묻는 대목이 있다.
“효를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요새 효라는 것은 잘 먹이는 것만 능사로 아는데, 개나 말도 먹이기는 매한가지 아니냐? 효를 실천하는 데 경(敬)함이 없다면 도대체 이와 뭐가 다르겠느냐?”
이런 이야기들은 효를 물질적인 것으로만 행하며 내심 자부하는 요즘 사람들이 꼭 새겨들을 만하다고 본다.
선제적인 실천과 능동적인 고침
공자가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이여, 집에서는 효를 다하고 밖에서는 공손하게 하라. 말을 삼가되 자신이 한 말에 따라 믿음성 있게 행동하라. 많은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여력이 있거든 학문을 하라.
子曰 弟子 入則孝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則以學文
자왈 제자 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이친인 행유여력즉이학문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이 경구의 핵심이 마지막에 있다고 본다. 공자는 인격적 실행을 하고 여력이 있거든 학문을 하라고 말한다. 이는 행함과 배움 중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행함은 배움에 선제하는 덕목이라는 것이다.
이는 행함이 없이 배우기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바꿔 해석해 보아도 무방하다. 왜냐 하면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는 무겁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을 하더라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충심과 신실이 주가 되어야 하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하지 않으며 잘못이 있을 경우 즉시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군자부중즉불위(君子不重則不威) 학즉불고(學則不固) 主忠信(주충신) 무우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나는 이 가르침의 핵심도 역시 마지막에 있다고 본다. 잘못이 있을 경우 즉시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알렉산더 포우프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
잘못은 인간의 몫이고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사업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서양 시인의 경구보다 단순한 것 같지만 한결 높은 수준이다. 잘못이 사람의 몫이라는 말은 맞지만 그것을 신이 용서함으로써 해결된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신의 용서에 의해서 우리의 잘못이 해결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신의 사업이 아니다. 잘못한 당사자의 사업이다. 공자에 의하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부터가 우리의 실존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유학은 신에게 곤란한 일을 떠맡기지 않는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법이다. 그리고 알게 되었을 때 즉시 고치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도 고치기를 꺼려하는 인간, 그가 곧 찌질이(소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에 허물이 되었다고 자각하는 순간 그 허물됨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고쳐야 한다. 이때 고치기를 꺼려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배움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일단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