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행복
원보숙
농장의 아침을 여는 맑은 새소리에 눈을 뜬다.
초록빛 산야가 시야에 들어오면 청량음료를 마신 듯 가슴속이 시원하다.
연보랏빛 수국이 햇빛에 반짝이며 상쾌함을 더해준다.
어제 내린 비로 채소들이 생기가 돈다.
“오늘은 어떤 친구들이 나를 기다릴까?”
소박한 기쁨을 주는 집 앞 채소밭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비를 맞아 쑥 자란 애호박, 오이, 가지, 토마토가 나를 반긴다. 이것저것 바구니 가득 수확했다. 내일 놀러 올 지인들에게 줄 채소이다. 봄에 뜯은 쑥으로 인절미도 하고, 찐 햇감자와 애호박부침개도 준비하였다. 그들과 함께할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누군가에게 주는 기쁨은 언제나 크다. 채소 가꾸며 흘린 땀이 순간 사라진다.
남편은 은퇴를 몇 년 앞두고 주말마다 땅을 보러 전국을 다녔다.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노년에 자연 속에서 채소, 꽃, 과일나무 가꾸며 음악 마음껏 듣고 살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다른 동료는 퇴직 후 직장을 옮겨 일하는 분도 많은데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전주 육회비빔밥 먹으러 갈까?, 순창 고추장 사러 가자, 옥천 도리뱅뱅이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라는 말로 시작해 나를 설득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노력으로 십 년 전 남편이 퇴직하며 세종과 공주 사이에 노후를 보낼 땅을 마련했다. 자연 속에서 채소를 가꾸며 지낼 생각이었다. 시골에서 자랐어도 농사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탐탁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남편이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농사는 경험이 최고의 힘이고 부지런하고 체력도 좋아야 한다. 그곳 주민들은 농사 박사였다. 남편이 그들에게 귀동냥과 인터넷만 의지하는 것도 불안하였다. 그런 남편에게 신뢰가 가지 않아 절대 그곳에 가지 않을 거라며 관심도 안 보이고 협조하기도 싫었다. 냉랭하게 대했다. 대화가 없으니 마음도 멀어졌다. 점점 상황이 심각해져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그런 마음이 생기면서 퇴직 후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외로운 노년에 부부가 함께 마음을 모아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남편을 이해하고 농장에 정을 붙이려 그곳에 자주 갔다. 그런데 가보면 풀이 가득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어 정이 가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선뜻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곳에 적응하려고 나름대로 무던히 애를 썼다. 남편도 나의 관심을 끌고자 농장에 내 취향의 꽃과 과일나무를 심고 채소는 먹을 만큼만 심었다. 노력이 가상하여 고마움에 마음이 서서히 바뀌고 남편을 응원하며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몇 년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으나 마음을 내려놓고 남편을 믿으며 기다렸다. 세월이 흐르며 경험이 쌓이자 채소가 우리 가족 먹을 만큼은 수확되었다. 차츰 농사의 기쁨이 느껴졌다. 경험 있는 지인들이 조언도 해주었다. 이웃에 세종과 대전에서 와 주말농장을 하는 두 분과 농사일을 공유하는 것도 큰 힘이 되었다. 농장에서 수입은 없지만 정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노년의 삶을 지낼 공간으로 계획했으니 욕심 없이 즐기는 생활로 만족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지난날과 오늘의 생각이 달라지고 편안했다. 그 후 작은 임시 숙소도 짓고 그곳에 더 자주 간다.
특히나 해질녁 잔디밭 의자에 앉아 차 한 잔과 음악을 들으며 나누는 담소는 꿀맛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남편은 종일 틀어 놓고 일할 때, 쉴 때 듣고 있다. 내 친구들이 놀러 와 “산속 카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근처에 집이 없어 크게 틀고 들으니 더 환상적이다. 젊은 시절 즐겨 듣던 음악을 들으며 추억 속에 빠진다. 옆에 비닐하우스는 남편의 사무실이자 형제, 친구, 지인들 모임 장소이고 삼겹살 먹는 곳이다. 이제 그곳에 아담한 *체류형 쉼터를 지어 가족 농촌 체험과 휴식 장소로 꾸미고 싶다.
‘앞으로도 당신 좋아하는 꽃 모두 심고, 과일나무도 잘 키워야지’ 말없이 다정한 남편의 사랑 담긴 이 한마디가 나를 감동하게 한다. 농장에 핀 알록달록 각종 꽃과 여리게 열린 과일을 보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요즘은 갖가지 채소와 앵두, 보리수, 오디, 블루베리가 한창이다. 어릴 적 먼 산 너머까지 가서 주전자에 따왔던 귀한 버찌가 땅에 떨어져 버려진 채 밟히는 게 아쉽다. 아침엔 새소리, 저녁엔 개구리 울음소리가 정겹다. 남편과 뜻이 같아진 소박한 내 마음이 고맙다. -25년 6월-
*체류형쉼터:
도시민의 농촌 체험과 장기 체류를 지원하는 대형 농막 형태로 가족이 머무를 수 있는 임시 숙소.
농림축산식품부에서 2024년 12월부터 허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