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 집필 동기?
무엇보다도 지나친 천사 숭배를 막고자 묵시록을 집필합니다. 특히 영지주의(Gnosis)자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만을 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 눈에 예수님은 그리 중요한 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어 여느 사람처럼 육체를 지니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영적일 뿐 몸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천사들을 예수님보다 훨씬 더 큰 숭배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천사 과잉 숭배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고자 묵시록을 씁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를 경시하거나 부정하니까?
그들은 당연히 육신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에 달리시어 속죄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송두리째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서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의미도 없어지게 되고, 그들 눈에는 그리스도교가 설 터전을 찾기 힘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묵시록 첫 구절부터?
천사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천사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분 심부름꾼 노릇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주신 계시입니다.”(1,1) 한마디로 천사는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꾼일 뿐입니다. 저자 요한은 묵시록 맨 끝에 가서 다시 한 번, 천사가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 서야 할지 그의 자리 매김을 명확히 해줍니다. “이 일들을 본 사람은 나 요한입니다. 나는 이 일들을 듣고 또 보고 나서, 나에게 이것들을 보여준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너의 형제 예언자들과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22,8-9)
영지주의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역할은? 영지주의에서 천사들은 천상 권력을 쥐고 인류역사를 좌지우지하며 주관하는 존재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천사들은 인류구원을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영지주의에서 천사들은 죽은 이를 살리든가 부활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하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천상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에 반해 묵시록 저자 요한은 앞서 본 대로 다음처럼 천사들의 위치와 역할을 자리 매김 해줍니다. “나는 그[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같은 종이다.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너의 형제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 하느님께 경배하여라. 예수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19,10) 천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한계 지어주는 말씀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천사 자신도 묵시록 저자 요한과 다름없는, 나아가 성서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은 주님의 종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안에 천사들의 등장은?
신약 27권 전체 안에서 천사는 191차례 등장합니다. 그 중에 72차례는 요한 묵시록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72회라는 압도적으로 많은 천사의 등장 숫자만 보아도 묵시록 저술 당시에 ‘천사의 존재와 역할’을 올바로 깨우쳐줄 필요성이 급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묵시록에 나오는 세 단계 표현?
묵시록에는 세 단계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1]지금도 계시고 [2]전에도 계셨으며 [3]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1,4; 참조: 1,8) 이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분, 곧 영원으로부터 지금을 거쳐 앞으로 영원무궁토록 계시는 하느님 이름 ‘야훼’를 삼 단계에 거쳐 그리스말로 풀이한 구절입니다. 구약의 아람어 역본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야훼’가 세 단계 표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계실 분>으로 늘어납니다.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1,4)은 충만함을 뜻하는 상징 수로써 사람들에게 충만한 축복과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영을 지칭합니다.
성실한 증인……?
이어지는 세 단계 표현을 살펴봅니다. “또 [1]성실한 증인이시고 [2]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3]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5) 그리스말로 ‘성실한(pistos)’에 해당되는 히브리말 ‘에멭(emed)’은 첫 자와 가운데 자와 끝 자[모두 세 문자]를 합친 문자로서 처음에나 중간에나 끝에나 변함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증인이시고’는 메시아를 지칭하는 구약 사상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보라, 내가 그를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민족들의 지배자와 명령자로 만들었다.”(이사 55,3-4)
이 세 단계 표현(1,5)의 뜻은?
“[1]성실한 증인이시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을, “[2]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3]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오른편에 좌정하시어 온 누리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이르는 표현입니다. 바오로 서간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콜로 1,8)
이러한 세 단계 표현에서?
우리는 이미 초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확신이 신앙 고백문 양식으로 정착되어 전해오고 있었음을 봅니다. 그러한 내용을 우리는 특별히 <천상 예루살렘 예배>(묵시 4-5장) 장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 단계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단계를 봅니다. “[1]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4,1ㄱ)” 하늘에 문이 열려 있음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해줍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연상해볼 수 있습니다.
둘째 단계를 봅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곧 나팔 소리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4,1ㄴ-ㄷ) 이는 어두움과 절망 상태에서 신비로운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구원의 여행을 암시해줍니다.
셋째 단계를 봅니다.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4,2)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말은 이미 천상 영역으로 발들 들여놓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구원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pneuma) 믿는 이들을 주님 품안(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