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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 67- 울릉도 2, 독도
바다와 섬과 어울려져 보이는 풍경이 절경입니다.
안용복이 받아낸 문서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강원도에 속한 조선의 영토'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시마네현 오키섬 무라카미 가문(村上家)에 소장.
조선의 천민으로 민간 외교관 같은 활약을 했는데 관직에 머문 바 없는 일개 사노비였습니다. 능로군(能櫓軍)[1]에서 복무하여 동래에 주재했던 왜관(倭館)을 자주 왕래하고 일본인과 대화를 했던 영향 때문에 일본어에도 능통한 편으로 일본어 통역도 맡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건 당시에는 평범한 어획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울릉도에 몰래 불법으로 입항한 일본 어선이 정박한 것을 본 후에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1693년(숙종 19년) 그는 울릉도로 올라가서 다른 어민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불법으로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고 일본까지 가게 됩니다. 다수의 논문과 동북아역사재단 웹사이트는 안용복이 납치되었를 설명할때 흔히차 도일' 이라는 표현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잘못된 용어 사용입니다.
안용복은 오키 도주 앞에서 "울릉도는 명백한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인이 불법으로 남의 땅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멋대로 고기잡이를 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오키 도주는 그를 상위 기관인 호키슈(백기주) 태수. 옛 오다 가 출신 무장 이케다 츠네오키의 후손입니다. 돗토리 번은 석고 32만석으로 도자마 다이묘 중에서는 비교적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었습니다 에게 보냈고 호키슈 태수는 다시 에도 막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에도 막부는 "그런 작은 섬을 무력으로 빼앗는 일은 지극히 쉬운 일이지만 그깟 섬 하나 때문에 이웃 나라와의 교린을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가문들에게는 일본 동해안으로 어장을 옮길 것을 지시하고 다시는 일본인이 울릉도로 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써서 안용복에게 준 다음에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도중에 대마도주가 수하들을 보내 시모노세키에서 안용복 일행을 잡아 그를 고문하고 쇼군이 준 편지도 빼앗았다고 하는데 물증이 사라진 셈. 그런데 대마도주는 조선 측에서 자기네 백성을 고문했다고 항의할까봐 안용복과 박어둔을 2년간 동래 왜관에 두고 약과 밥을 주어 회복시킨 다음에 조선에 표류한 어부를 구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풀어준 다음 "조선에서는 이들이 일본 땅인 죽도에 함부로 들어오는 일이 잦으니 그걸 막아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이 주장하는 죽도(다케시마)가 울릉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작은 섬 때문에 싸우기 싫어 울릉도는 우리 땅, 죽도는 너희 땅이라고 대충 마무리 짓기 위해 "우리가 어민들이 먼 바다로 못 나가게 하고 심지어 우리 땅인 울릉도도 못 가게 하는데 하물며 니네 땅인 죽도에 들어가게 하겠니?"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애매한 표현으로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하면서도 울릉도가 조선 땅임은 확실히 한 것입니다. 대마도주가 보낸 사신 귤진중(다치바나 마코토)은 울릉도 내용을 빼달라고 옥신각신하다가 소득이 없자 열받아 조선에서 제공한 체재비도 받지 않고 돌아가버렸습니다.
2년간의 구금이 끝나고 풀려나온 1696년에 울산에서 순천 송광사의 승려 뇌헌의 배를 포섭하고 11명을 모집하여 다시 울릉도로 출항을 나서게 되는데 이는 고기잡이 출항이 아니라 일본에 다시 항의하려고 작심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아직도 여럿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일본 어부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고 결국에는 독도까지 도망가는 일본 어선을 쫓아간 끝에 일본으로 가서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벼슬이라고 자칭하고 다시 호키슈 태수를 만나 항의한 후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에도 막부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및 월경(越境)을 금지시키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한편 안용복이 쫓던 일본인 어부들은 호키슈 태수에게 붙잡혀서 월경죄로 모조리 사형당합니다. 이 때 안용복은 에도 막부에 대마도주가 자신을 구금하고 쇼군의 문서까지 빼앗았다고 항의했다는데 대마도주의 아비가 아들이 죽을 것을 염려하여 밀사를 안용복이 있던 호키슈와 중앙 정부가 있던 에도에 보내는 등 이 일이 공론화되는 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렇게 호키슈로 가던 대마도주의 밀사는 도중에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안용복은 시모노세키를 거쳐 느긋하게 돌아가려 하다가 또 대마도주의 술수에 걸릴까봐 호키슈를 통해 조선의 강원도로 귀국합니다. 그러자 강원 감사는 안용복을 붙잡아 뭐하다 왔는지를 캐물었고 일본에 갔다왔다고 하자 허가를 받지 않은 월경죄로 하옥 후 다시 의금부로 보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논의가 벌어졌는데 울릉도 영유권을 확실히 하고 일본 정부에게까지 확언을 받아온 점 등은 대다수 관료들입니 다 공(功)으로 삼을 만한 일로 보았다. 특히 에도 막부의 월경 단속 약속이 들어오자 남구만은 아예 이는 역사적인 쾌거라고 칭찬했고 대소 신료들이 공이 "능히 죄를 덮을만 하다"고 주장했으나 윤지완이 "하지만 그렇다고 안용복의 공무원 사칭죄와 무단 월경죄를 처벌하지 않으면 흉내낼 이들이 많을테니 처벌을 아예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하여 사형은 면한 대신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언제 사망했는지 등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출신이 관직과 아무 연관이 없는 평민이었던만큼 유배 기간 중에 조용히 살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용복 사건 이후 숙종 대에는 울릉도 인근에 대한 감찰이 강화되어 원칙적으로 3년에 1번씩은 울릉도 인근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안용복 이후 조선에서는 고종 때까지 울릉도 인근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이사부(異斯夫)입니다. 혹운(或云) 태종(苔宗)이라고 하여 '이사부'를 '태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고대 한국어인 신라어는 오늘날의 일본어처럼 음(소리)과 훈(뜻)으로 쓰고 읽는 두 가지의 방법이 존재했으므로 같은 고유어 이름을 하나는 음차, 하나는 훈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태(苔)'는 이끼를 뜻하므로 고대에 이것을 음이 아니라 훈으로 읽었을 때는 대략 '잇/is/'으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되며 종(宗)은 '부(夫, 남자)'에 대응하는 말이다. 고로 널리 알려진 이사부는 신라어의 음을 따서 쓴 이름이고 태종은 신라어의 뜻을 따서 쓴 이름이 됩니다.. 의미는 울보, 먹보와 같은 '이끼보'. 성이 김(金)씨이므로 본명은 '김잇부'라고 읽고 쓸 때는 '김이사부' 또는 '김태종'이라고 한자를 빌려서 쓰는 셈이다. 비슷한 예로 금천(소나)이 있습니다.
동해 먼 바다에 외따로 떨어진 울릉도가 최초로 한반도 왕조의 영역에 포함된 사건. 단순한 무력 정복이 아니라 가짜 맹수를 이용한 책략을 사용해 항복시켰다는 점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505년 2월에 지증왕은 신라에 주, 군, 현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지증왕은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軍主)로 삼았습니다. 이사부가 역사 기록 속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군주라는 직위의 명칭이 이로써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사부는 50여 년이 지난 562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는데 이사부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지만 그가 평균 수명을 크게 웃돌지 않았다면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아직 새파란 젊은이의 나이로 한 지역의 군주직을 맡은 셈입니다.
7년 뒤인 지증왕 13년(512)에 실직주 근처인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 군주로 임명받았고 우산국 정벌을 개시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했습니다. 정벌 과정은 삼국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여권으로는 절대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곳에 내려 20여분 관람하고 배가 승선신호를 울리면 타고 울릉도로 갑니다.
삼성그룹에서 울릉군 도동리에 독도박물관을 지었다.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독도에 대한 정보와 삼국접양지도 같은 유물로 반박 자료 및 독도가 대한민국령이라는 증거를 자세히 소장하고 있습니다.
해발고도 440m 내수전일출전망대. 울릉도 개척당시 김내수라는 분이 화전을 일구어 많은 농지를 확보했으나 죽음에 이르러 주변사람들에게 그농지를 다 내어주는 선을 베풀어서 그이름을 기려 내수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의 풍광도 아름답습니다. 계곡 사이로 구름이 머물고 있습니다.
독도새우 몸은 날것으로 먹고 머리부분은 튀겨서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