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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0일(목)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으신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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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 인 명 | 영 어 명 | 축 일 | 신 분 | 지 역 | 연 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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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성 | 레오비질도 | Leovigild | 8월 20일 | 수도승,신부,순교자 | +852년 | |
2 | 성 | 루치오 | Lucius | 8월 20일 | 원로원 의원,순교자 | +311년 | |
3 | 성 | 막시모 | Maximus | 8월 20일 | 수도원장,설립자 | +470년 | |
4 | 성 | 베르나르도 ** | Bernard | 8월 20일 | 수도원장,교회학자,신학자 | 클레르보(Clairvaux) | 1090-1153년 |
5 | 성 |
톨로메이 ** |
Bernard Tolomei | 8월 20일 | 설립자,수도원장 | 1272-1348년 | |
6 | 성 | 사무엘 ** | Samuel | 8월 20일 | 구약인물,예언자 | +11세기BC | |
7 | 성 | 아마둘 | Amadour | 8월 20일 | 은수자 | +연대미상 | |
8 | 성 | 오스윈 | Oswin | 8월 20일 | 왕,순교자 | 노섬브리아(Northumbria) | +651년 |
9 | 성 | 크리스토포로 | Christopher | 8월 20일 | 수도승,순교자 | +852년 | |
10 | 성 | 필리베르토 | Philibert | 8월 20일 | 수도원장 | 608-685년 |
총 10 성인 |
▶베르나르도(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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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셸랭 소렐과 몽바르드 영주의 딸 알레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는 부르고뉴 디종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4월 17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성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랑그도크에 파견하여
알비파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란 칭호를 얻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한 그는 117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8세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이다. |
▶베르나르도 톨로메이(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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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에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성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이는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8월 20일)를 흠모한 그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베르나르두스로 바꿀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성인이 수도생활에 입문하는 것을 방해하였고, 결국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행정관이자 황제의 기사가 되었다.
신심이 매우 깊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거의 시력을 잃은 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간구하여 시력을 회복한 후에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은둔소로 피신하였다.
그는 1313년 두 명의 다른 시에나 출신 동료들과 함께 시에나 남쪽에 있는 아코나광야에 들어가 은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암브로지오 디 니노 피콜로미니와
파트리치오 디 프란체스코 파트리치가 그들이다.
그들은 초기 수도승들처럼 침묵과 단순한 생활로 관상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들의 거룩한 생활이 알려져 제자들이 모이자 성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이는 몬테 올리베토에
수도원을 세우고 1319년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그는 이때 자신의 수도명으로 베르나르두스를 정하였다.
그는 페스트에 걸린 형제들을 돌보다가 1348년 8월 20일 그 자신도 페스트로 선종할 때까지 수도회 형제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원장으로 봉사했다.
그가 설립한 ‘베네딕토회 몬테 올리베토의 성모 마리아 연합회’는 관상생활을 지향하지만,
시대와 환경의 요구에 따라 활동적인 사도직에도 참여하고 있다.
1634년(또는 1644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그는 2009년 4월 26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8월 20일)와 함께
시에나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
▶사무엘(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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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르인들이 판관 시대의 느슨한 동맹 체제에서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기원전 11세기에 활약한 성 사무엘('하느님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은
하느님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당시 유대인 남자가 맡을 수 있는 지도자 역할,
즉 제사장 · 판관 · 예언자 · 군대 지휘관 등을 모두 맡은 인물이었다.
사무엘 상권 1-16장에 나타난 사무엘의 활동은 주로 사울 왕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사는 라마다임 출신의 수브 사람 엘카나와 그의 아내 한나는 야훼께 빌어서
아기를 얻었는데(1,1; 1,20), 이렇게 태어난 아기를 한나는 나지르인의 서원으로 실로 성소에서
봉헌하였다(1,11. 28; 2,11; 3,1). 엘리 사제 밑에서 야훼를 섬기던 소년 사무엘은 어느 날 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불경한 아들들을 둔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다
(3장). 이 계시는 사무엘이 ‘야훼의 예언자’로서 활동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4-6장은 히브리인들이 블레셋군에게 패하여 계약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가문이 멸망하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내용이다. 블레셋에게서 계약의 궤를 돌려받은 후에 사무엘은 판관이 되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였고,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였다(7장).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으로서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해마다 베델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한 후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두루 다스리며 야훼께 제사드릴 제단도 쌓았다(7,16-17).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지자 자신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판관으로 임명하고 브엘세바를 다스리게 하였다(8,1-2).
이어 서로 다른 왕정 설립 설화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사무엘은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그중 하나(9,1-10. 16)이다. 한편
또 다른 성서 구절(7,3-8,22; 10,17-19; 12,1-25)에서는 백성들이 직접 투표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였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무엘은 왕정 설립 요청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요 왕인
야훼를 변절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마지못해 왕정 설립에 동의하였다.
사무엘은 특히 고별사에서 백성들에게 야훼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12장).
15장에 보면 사무엘과 사울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갈라진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고, 야훼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던 것을 후회한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였다(15,34-35). 이러한 내용은 앞선 성서 구절(13,13-14)에 이미 나와 있다.
다윗과 함께 나욧으로 내려가 있던 사무엘을 찾아간 사울이 그 앞에서 예언 황홀경에 빠져 버린
이야기(19,18-20)를 비롯하여, 사무엘은 죽은 후(25,1; 28장)에도 혼백으로서 계속해서
사울의 왕정사에 등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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