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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3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출애굽기 2장 1절-10절
우리들의 삶 속에서 가장 많은 경우의 수가 적용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바둑이랍니다. 바둑만큼 많은 경우의 수가 적용되는 것이 없기때문에 이번에 알파고(Alpago)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 바둑이고 그 상대가 우리의 이세돌 9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알파고(Alpago)를 통해서 이 바둑에 적용되는 경우의 수는 수치상으로 얼마나 되겠습니까?
무려 10의 170 승이랍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1억은 10의 8승, 1조는 10의 12승, 1경은 10의 16승입니다. 그러니 10의 170승이라는 것은 우리의 머리로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대단한 수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파고(Alpago)는 이세돌 9단과 바둑을 두면서 이세돌 9단이 한 수를 놓을 때 10의 170승의 경우의 수를 따져서 얻은 결론으로 대국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인공지능 알파고(Alpago)로도 최대의 경우의 수는 10의 170승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10의 170승의 경우의 수로도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우리들 자신에게 나타났다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까?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해 보십시오.
모세라는 아이는 위기 상황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이를 받는 산파들에게 히브리인의 사내아이는 낳는 즉시 죽이라고 바로가 명령했기 때문에 그런 와중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때의 두 사람의 산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명령을 받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바로는 곧 바로 그녀들을 불러 들여 심문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내 명령을 어기고 사내아이들을 살려주었느냐?”
그 말에 산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장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사실 ‘기운이 좋다’는 말속에는 위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는 달리 ‘기운이 좋아’라는 말은 히브리 여자들은 이집트 여인과는 달리 짐승들이라서 우리가 당도하기도 전에 애기를 낳아 버립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힘든 노동에 단련된 여인들이어서 아이를 짐승과 같이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 같은 사람들을 굳이 탓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 말은 바로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들에게도 직접 명령을 내렸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성경에 나온 산파는 두 사람뿐입니다.
그렇지만 애굽에는 더 많은 산파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 중에는 ‘십보라’와 ‘부아’와 같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산파들이 있었는가 하면, 분명히 그렇지 못한 산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산파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면 그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아슬아슬한 일입니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집에 두고 기른다는 일은 온 식구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물론 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본능입니다만, 모세의 부모들이 이 아이를 기르는 데까지 기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경우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 준수함을 보고” 한마디로 아이가 너무 잘생긴 것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는 “하도 잘 생겨서”라고 기록되었는데 좀 더 본문에 가까운 번역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도 잘 생겨서’ 라는 이 말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 아이를 보는 순간 아이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황을 히브리서 11장 23장에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 아이는 3개월이 지날 때까지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살벌하여서 아이 생명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감시하에서 어떻게 아이를 집에서 기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이의 부모는 마침내 왕의 명령대로 아이를 나일강에 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갈대 상자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신기한 것은, 모세를 띄울 갈대 상자를 만드는 방법이 마치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방주를 만들 때 역청을 발랐습니다. 모세 부모도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를 더 발랐습니다.
“역청을 칠한 데다, 나무진을 칠했습니다.”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를 히브리어로 tēvāh라고 합니다.
그런데 갈대 상자 이름도 똑같은 tēvāh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영어로는 'Ark'라고 하는데 방주와 갈대 상자도 같은 ‘Ark’로 표현하였고,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벱궤도 ‘Ark’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그 부모들이 방주를 만들던 노아의 심정과 같이 갈대 상자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닐까요?
또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믿고 만들지 않았을까요?
모세를 나일강에 띄운 것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버리라는 바로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 인들이 아이들을 낳는 족족, 나일강에 던졌다면, 나일강에 버려진 아이가 꼭 이 아이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아이가 나일강에 버려졌을까요? 그런데 공주가 만난 아이는 오직 한 아이, 바로 이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꼭 그 시간에 공주가 목욕하려 나일 강에 나왔을까요? 또 버려진 히브리인의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기르고 싶었을까요?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공주는 바로의 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필이면 이 아이는 공주를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바로의 명령을 어길지 몰라도, 바로의 딸인 공주만은 세상이 변해도 그 명령을 지켜야 하는 여인입니다. 더군다나 신분이 높은 분들이 낮은 사람들을 돌보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공주는 자기 신분도 잊어버린 채 이 아이를 살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히브리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살려 주었고, 키우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 공주가 이 아이를 발견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누나인 ‘미리암’이었습니다.
목욕하던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아이를 건져 내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공주에게 달려가서 물었습니다. “제가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이 아이를 잘 기르고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
그렇다면 미리암은 히브리사람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어찌하려고 공주에게 히브리 여인을 들먹인 것일까요? 그런데도 공주는 히브리 여인이란 말도 개의치 않고 미리암의 말을 그대로 받아드렸습니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모세는 자기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나아준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애굽의 공주는 이 아이를 유모 집에 보내어 영아기와 유아기를 보내게 한 다음에 자기 아들로 삼았고, 이름을 “내가 물에서 건져 내었다” 즉 ‘모세’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위험한 순간, 순간들을 넘기며 40년이나 궁궐에서 자라고,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신비하게 생각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애굽의 공주가 어찌하여 히브리 아이를 보고 기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까요?
또 공주가 히브리 유모를 데려다 준다고 했을 때, 어찌하여 마음이 변화가 없이 그저 받아 주었을 까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그가 불쌍히 여겨” 즉 ‘Compassion’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아버지인 바로의 명령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에게 그런 마음이 일도록 했을까요?
이처럼 모세는 태어난 순간부터 물에서 건짐을 받기까지 수 없는 위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어떻게 보면 도저히 살 가망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살았습니다. 그것도 사자의 굴 속 같은 바로의 궁에 들어가서 가장 안전하게 도리어 왕자의 대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이야기 속에서 느끼는 게 무엇입니까? 관통하는 하나의 사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과 2장에서 은혜란 단어는 산파들에게만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태어난 순간부터 되어진 일들을 하나, 하나 살펴볼 때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간에 ‘은혜’라는 말은 대단히 진부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입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나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은혜로 잘 지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뜻도 모르는 채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막연하게 “은혜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은혜란 말이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 분명하지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모세의 이야기 속에서 은혜란 말이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의 행동이고, 베풂이고, 함께 하심이고 위대한 사랑’이란 사실을 모세 이야기를 통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이를 산파들이 살려준 것, 공주가 아이를 기르고 싶어 한 것은 특별한 섭리요, 특별한 은혜가 그 아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경우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실패 할 수밖에 없을 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데 이뤄졌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그 순간 그 사람에게 특별히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비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상식을 뒤엎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10의 170승의 경우의 수를 뛰어 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은혜란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보다 더 크게 역사하고, 어려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은혜는 더 풍성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일어난 일들이 모두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인간 상식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님의 비상한 간섭으로 이뤄진 일들입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는 곳에 반드시 소망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해방의 싹이 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잠언 29장 26절 말씀입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이사야 30장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은혜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 지금, 이 순간에도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오직 한마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누구보다도 우리들이 은혜를 받도록 기도하십시다.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는 ‘룻기’ 서를 읽으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였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 와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마음에 걸린 것은 두 며느리였습니다. 당시 모압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며느리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에 간들 사람대접도 받지 못할 텐데, 남편도 없는 것들을 데려다가 그 멸시를 어떻게 받게 할까 생각하고 그녀들을 고향에 남도록 권유합니다.
룻도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룻이 베들레헴으로 시모와 같이 갈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남편이 있는 것도, 그 가정에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 가 봐야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따라 가겠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만류하는 시어머니에게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놓고 맹세하기까지 합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을 들은 ‘나오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 죽을지 모르고 왜 그처럼 고집만 부리니?”
마침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한 그녀는 먹을 것이 없어서 험한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하나님은 룻에게 은혜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나간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이 왜 하필 보아스의 밭으로 나갔을까요?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길이면 그 때부터는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한다고 그 즉시 환경이 변화되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부터는 은혜가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하고,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평안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 힘과 지혜가 결코 만능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저와 여러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고, 은혜 안에 사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은혜받은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은혜 받은 자는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 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잊지 마시고 더욱 은혜를 간구하십시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교회 위에, 우리에게 더욱 충만하게 내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부터는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우리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풍성하게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