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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5(김안로의 흥망)
1. (조광조) 1519년 12월 16일. 중종14년에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지면서 중종 한 명 만을 믿고 펼치던 조광조의 개혁은 끝이 났습니다.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열심만큼 이번에는 조광조의 개혁을 무효화하고 폐지하는데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폐지했던 소격서를 다시 부활시켰고, 현량과를 폐지했고, 공신개혁을 무효화 했습니다.
2. 결국 엄청난 재산과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공신들은 그나마 그들을 제어하고 있던 조광조와 대간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와 졌고, 이후 끝없는 재산증식, 궁궐같은 집과 같은 사치를 행사했습니다.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을 삶을 힘들게 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집을 떠나 도둑이 되는 현상을 만들었습니다.
3. 집을 떠난 백성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 만큼 세수가 줄어들고, 나라가 가난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라의 재정이 빈약해 지니 당연히 국방력이 약화되었고, 군인수가 줄어들수록 무기들 역시 녹슬어 가는데도 손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4. (사화) 기묘사화 이후 유생들은 더 이상 공부를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사화(士禍)가 무엇입니까?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이 사화입니다. 선비들이 왜 사화를 당합니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선비입니다. 선비들이 가지고있는 임금에 대한 충성은 임금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고, 임금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그 잘못을 감춰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는 것,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임금의 잘못을 떠넘겨 임금을 욕먹이지 않게하는 것이 아닙니다.
5. 良藥苦口忠言逆而(양약고구충언역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뜻입니다. 선비들의 충성은 바로 ‘충언역이’의 실천입니다. 그러기에 왕이 세종이나 성종같은 성군이나 현군이면 선비들이 인정을 받지만, 연산군같은 폭군을 만나면 화를 당합니다. 이것이 사화입니다.
6. 그런데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이젠 정말로 성인의 정치가 실현되는 세상이 올줄 알았는데 조광조를 비롯한 양심적인 선비들이 사화를 당했으니 이 시대의 선비들이 더 이상 경학을 공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괜히 공부했다가 목숨만 잃지 않겠냐는 생각인 것입니다. 물론 조정에서는 계속해서 학교 진흥책을 내놓았고, 수령들로 하여금 공부를 권장케하고 향교에 대한 재정을 늘렸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실제 정치에서는 선비들이 바른 말을 했다고 죽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7. 논어 <안연>편에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백성들에게 공자를 들먹이며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이야기 하면 뭐합니까? 본인은 상황에 따라 항상 ‘비례시 비례청 비례언 비례동’하면서 말입니다.
8. 기묘사화 이후에는 더 이상 왕과 대신들을 비판하고 감시하던 대간들도 더 이상 함부로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공신들과 대신들에게 힘이 모아져 결국 신하들이 권력있는 신화, 즉 권신화 되어갔습니다. 이처럼 중종은 조광조를 죽임으로써 조광조의 개혁을 실패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중종 자신도 실패한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9. (남곤) 조광조가 죽고 조정의 최고 실력자가 된 인물은 기묘사화의 설계자인 남곤입니다. 남곤을 뒷받침해주던 인물들이 심정, 이행, 이항, 김극픽 등으로 기묘삼흉 중인 1인인 홍경주는 일찍 죽었습니다.
10. (김안론) 그런데 조광조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곤 일파에게 경계심을 일으킨 인물이 갑자기 부각이 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바로 김안로입니다. 남곤이 김안로를 경계한 이유는 단순히 임금의 총애를 받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외척으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이 그에게 모아질 수 밖에 없는 구도를 알아기 때문입니다.
11. (가계도) 중종에게는 세 명의 중전이 있었습니다. 단경왕후(폐비윤씨), 장경왕후(파평 윤), 문정왕후(파평 윤)입니다. 장경왕후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장녀가 효혜공주이고, 효혜공주의 동생이 세자, 훗날의 인종입니다. 그리고 문정왕후에게서는 1남 4녀가 있었는데 4째인 아들이 훗날의 명종입니다.
12. 만약 중종의 두 번째 중전인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자 마자 죽지 않고 오래동안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은 임금에게 있지만, 세자에게는 임금보다 어머니인 중전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살았다면 수양대군이 권력을 쉽게 찬탈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행실을 조금만 바르게 해서 쫓겨나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연산군이 이렇게까지 폭정을 일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자 마자 죽었습니다. 새로운 중전인 문정왕후가 들어왔지만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는 순간 세자의 자리는 매우 위협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인 임금은 세자를 지키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세자를 지켜줄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임금이 그 역할을 맡길 사람은 외척밖에 없습니다.
14. 그러니 자연히 장경왕후의 오빠, 세자의 삼촌인 윤임과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김안로가 부각되는 것입니다. 김안로는 세자의 단 하나뿐인 혈육인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세자를 중심으로 윤임과 김안로 등이 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면서 권신들과는 대립양상을 뛰게 되는 것입니다.
15. (남곤의 평) 남곤이 김안로를 가리켜 “심성은 나쁜데 머리는 좋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것이 남곤이 생각할 때 매우 큰 문제였습니다. 과거의 박원종, 홍경주같은 인물들은 단순한 무인입니다. 조광조는 그 심성에 있어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남곤 역시고 조광조가 권력을 탐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안로는 달랐습니다.
16. (김안로) 김안로는 연산 12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초창기부터 주목을 받던 인재입니다. 어떤 자리에 가던지 항상 김안로의 의견이 해당 관청의 대표 의견이 될 만큼 군계일학같은 존재였는데 왕실과 사돈을 맺더지 임금의 총애가 커져감에 따라 조광조에 뒤지지 않는 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17. 조광조를 죽음으로 몬 것을 평생 후회한 남곤이었지만, 김안로에 대해서는 정말로 장차 화가 될 인물로 여겨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대신들을 다 동원하고, 대간들까지 합세하여 보름만에 김안로를 유배보내 버립니다. 이때까지는 남곤이 실세인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영의정인 남곤이 김안로를 탄핵해서 유배보낸 때가 1524년, 중종 19년 11월 16일입니다.
18. (남곤 졸) 그리고 약 2년 4개월이 흐른 중종 22년 3월에 그의 평생 동안의 초고(草稿)를 모두 불사르고,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 내가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하지 말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시호(諡號)를 청하여 비석을 세우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57세였습니다.
19. 이후의 역사를 보면 김안로는 정말 나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남곤이 김안로를 탄핵할 당시에는 김안로가 아직 권력의 중심도 아니었고, 그렇게 큰 과오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남곤이 볼 때 ‘장차 화의 근원이 될 인물’이라는 판단 때문에 탄핵이 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때 남곤이 조광조를 많이 염두해 두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자신의 과오로 조광조라는 참 선비를 죽게 했는데 그 자리를 김안로라는 간신이 차지해서 임근의 눈을 흐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조광조에 대한 죄의식이 김안로에 대한 맹렬한 분노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 (정광필) 남곤이 죽자 권력의 중심은 자연히 남곤 세력의 핵심이었던 심정, 이행, 이항 등 3인에게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이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했던지 영의정에는 자신들이 앉지 않고 명망있는 인물을 추천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다시 그나마 조정에서 유일하게 어른으로 평가받던 정광필이 영의정에 복귀하게 됩니다.
21. (작서의 변) 남곤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안아 궁안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세장의 생일날 동궁 바로 북쪽의 숲에서 죽은 쥐가 발견이 되었는데 꼬리가 잘리고, 눈, 귀, 입과 사지가 불로 지져진 쥐가 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자칫하면 큰 옥사로 번질 수 있었기에 처음에는 대비의 결정으로 이 일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며칠 뒤 왕과 문정왕후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박원종의 수양 딸이기도 한 경빈 박씨가 세숫물을 올릴 때 며칠 전 발견된 것과 똑같은 형태의 쥐가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신하들에게 알려지면서 공론화되고 시녀들을 대상으로 조사에 들어갑니다.
22. 하지만 조사 결과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중종도 별 수사 의지가 없었고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했는데 왠일인지 대신들과 대간들이 너무 강력하게 발발을 하면서 ‘지금 모후가 안 계신 세자를 보호하는 일은 오직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라며 압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동궁 작서의 변’(灼鼠의 變) 이라고 합니다. ‘작서’란 불에 탄 쥐를 뜻합니다. ‘불에 탄 쥐’가 발견된 사건이 갑자기 ‘세자 음해 사건’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23. (경빈 박씨)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처다본 인물이 바로 경빈 박씨입니다. 사람들이 경빈 박씨에게 주목한 이유는 우선 중종이 경빈 박씨를 총애했고, 장경왕후가 죽은 뒤에 경빈 박씨를 중전으로 세우고 싶어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광필이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24. 정광필이 경빈 박씨를 반대한 명분은 궁녀 출신이라는 그녀의 가문을 지적했지만 진짜 이유는 그녀에게는 이미 세자보다 6살 많은 아들 복성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된다면 상식적으로 세자가 무탈할 수 있겠습니까? 경빈 박씨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친자식을 세자로 세우려 할 것이고 앞으로 어떤 파란이 일어날지는 보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25. 실제로 경빈 박씨는 세자의 신상에 큰 변고가 생기길 기대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대놓고 ‘작서’사건을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제일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자신인데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대비로 지시로 범덕이라는 경빈 박씨의 시녀에게 수십 차례의 형신이 가해집니다. 이때의 형신을 가해서 범덕이의 입에서 거짓 실토라도 나오면 그것을 증거로 경빈에게 죄를 묻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범덕이는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경빈은 무고한 것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경빈과 복성군 모자는 폐서인되어 고향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26. 중종 말년에 가서 ‘작서의 변’의 전모가 밝혀지게 되는데 이 사건은 모두 유배지에 있던 김안로가 그 아들 김희(효혜공주의 남편)를 시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러니 남곤이 김안로를 제대로 본 것입니다. ‘심성은 나쁜데 머리는 좋다’
27. 김안로는 남곤의 탄핵으로 유배를 떠난지 6년 만에 정치에 복귀를 합니다. 당시 조정의 실세는 기묘삼흉중 마지막 남아있던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때 대간들 중에 일부가 심성을 비판한 적이 있어서 그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마침 김안로가 조정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대간들은 김안로와 결탁을 하게 됩니다. 조광조 당시의 대간들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 만큼 조정의 정치가 타락한 것이고, 선비정신이 변질된 것입니다.
28. (남곤파) 그러나 김안로는 정치에 복귀한 이후 약 1년간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물밑으로는 꾸준히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갑니다. 그러면서 어느정도 견고한 세력이 갖춰지자 자신을 탄핵했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타겟은 김안로가 탄핵을 받을 때 앞장섰던 이항입니다. 이항은 당시 ‘김안로가 돌아오는 날이 내가 죽는 날이다’라고 할 정도로 김안로 탄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김안로가 복귀하여 몸을 낮춰 핑계를 찾고 있을 때 이조년이라는 관료를 변호해주는 글을 썼다가 그것이 꼬투리가 잡혀 결국 대간들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이 됩니다. 아무도 그 배후에 김안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참 운도 없게 대간들에게 꼬투리가 잡혔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29. 그런데 이후 부제학 성세창을 비롯해서 최고 실력자인 심정까지도 대간들의 공격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죄명이 심정이 작서의 변 때 경빈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작서의 변 자체가 경빈 박씨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없는데 대간들은 경빈 박씨가 세자를 음해하기 위해 작서사건을 꾸몄고, 심정이 이와 연관이 있다는 식으로 문제를 끌고 간 것입니다. 결국 심정은 대신이니 가벼이 논할 수 없다던 중종이 심정까지도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조광조때와 똑같이 심정에게도 변명할 기회가 단 한번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30. 심정이 쫓겨난 이상 김안로 측 대간들은 심정의 세력에 있던 대부분을 탄핵하고 중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모두 파직합니다. 심지에 그를 왕좌에 앉힌 박원종의 유일한 서자 아들인 박운까지도 이항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죄로 유배를 보내는데 이때도 유일하게 정광필이 ‘박원종에게는 적자가 없어 박운이 제사를 받는데 종사에 지은 죄가 아니니 너그러이 용소하소서 그래야 원훈을 대우하는 도리에 맞습니다’라고 선처를 호소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단호했습니다. 이렇게 김안로는 정치에 복귀하여 약 1년 만에 그 반대파들을 대부분 조정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초고속으로 의호위 대호군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이 됩니다. 예조판서는 조광조가 최고 전성기 때 올랐던 정2품으로 외교와 문화 등의 수장을 가리킵니다.
31. 하루 아침에 조정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비록 실세였던 심정과 이항이 쫓겨났지만 조정에는 또 한명의 남곤파 실세인 이행이 있었습니다. 김안로를 6년간의 유배생활에서 풀어준 당사자가 바로 이 이행입니다. 이때와 와서 후회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대신들을 모두 모아 설득하고 다시한번 김안로를 탄핵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여기에는 삼정승과 판서, 참판, 참의 등 6조가 모두 한 목소리로 김안로를 탄핵한 것입니다.
32. 그러자 김안로도 대간세력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대응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대간들이 논리는 매우 간단했습니다. 김안로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모두 작서사건을 일으킨 경빈 박씨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왕의 의지입니다. 왕은 대간들의 말을 받아들여 김안로를 반대하던 자들을 국문하고 유배를 보냅니다. 그리고는 조작된 익명서 사건을 일으켜 심정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결과적으로 조광조에게 누명을 씌어 사약을 내리게 했던 심정 역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원수 김안로’라는 소리를 지르고 사약을 마신 후 최후를 맞이합니다. 조광조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33. (김안로 벼슬) 심정이 죽고 나자 중종은 아예 대놓고 김안로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그가 맡은 관직만 해도 동지경연사, 홍문과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사, 성균관사, 이조판서, 자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까지 겸하게 한 것입니다. 쉽게 정리하면 국방, 검찰, 인사, 교육, 외교, 언론의 수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조선 500년 역사 동안 이런 전무후무한 권력을 가진 권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34. (목패의 변) 남곤파를 모두 숙청하거나 쫓아낸 김안로는 이제 칼끝은 그동안 기다려왔던 경빈 박씨와 복성군에게 향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사건이 작서의 변이 있고 6년 후인 중종 28년에 발생한 ‘목패의 변’입니다.
35. 1533년, 중종 28년 5월 17일에 또 다시 동궁의 빈청 남쪽에서 팔, 다리가 없는 기괴한 나무인형이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 써있던 글귀가 문제였습니다. ‘이 같이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이 같이 부주(중종)의 몸을 교살할 것’, ‘이 같이 중궁을 참할 것’.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상은 5월 16일 병조 서리 한충보 등 15인이 행한 것임’이라고 적여 있는 것입니다.
36. 누가봐도 말도 안되는 조작사건입니다. 어떤 바보가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는 목패를 동궁전에 가져다 놓으면서 ‘내가 한 것’이라고 밝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한충보가 범인일리 없다며 한충보에게 원한을 산 이들을 묻고 그들을 데려다 조사를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충보를 대역죄에 빠트리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너무나도 순수하게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황당한 일은 이때 끌려온 한 여인이 ‘경빈 박씨를 위해 동궁을 해치고자 하였습니다’라고 묻지도 않은 죄를 자백한 것입니다.
37. (경빈 박씨 사사) 결국 이 여인의 고백을 핑계로 대간들이 경빈과 보성군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급기야 왕은 경빈과 자신의 골육인 복성군까지 사사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유일하게 경빈과 복성군 사사를 반대했던 이 역시 정광필 홀로 였습니다.
38. 생각해 보면 경빈 박씨는 정말 억울합니다. 작서사건과 관련해서는 증거도, 증언도 없었는데 폐서인이 되어 쫓겨났습니다. 목패사건은 그 자체가 조작의 느낌이 많이 날뿐 아니라 조작이 아니더라도 그 여인이 혼자서 한 일임에도 결국 경빈과 복성군이 사사까지 당한 것입니다. 단순히 김안로와 대간들의 의지 만으로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결국 중종의 마음과 부합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39. 이제 세상은 정말로 김안로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조정의 전권을 다 지고 있었고 자신의 수족들이 대간부터 궐내까지 포진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인사문제까지도 김안로의 허락이 필요했고, 김안로의 눈 밖에 나면 배제될 수 밖에 없었기에 조정의 모든 신하가 김안로의 눈치보기에 바빴습니다. 무능한 군주 밑에는 언제나 자신이 군주라고 착각하는 권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김안로는 권력자답게 집에서도 초호화 생활을 하면서 옥수동 가변에 화려한 정자를 지어 날마다 고관대작들을 불러다 잔치를 열었습니다.
40. 신하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습니다. 조선을 개국하면서부터 권력이 신하였던 정도전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세조때에는 한명회에게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었고, 중종초기에는 조광조, 후기에는 김안로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에게는 언제나 권력이 집중됩니다.
41. 그런데 이들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도전과 조광조를 역사는 간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명회와 김안로는 간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집니다. 도대체 이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했나를 보면 압니다. 정도전과 조광조는 권력의 정점에서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자신들의 권력을 더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는 낭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권력으로 백성을 생각했고, 어떻게 하면 조선이 더 나은 조선이 될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한명회와 김안로같이 ‘심성이 나쁘고 머리만 좋은’ 권신들은 술책을 부려 권력을 빼앗고 유지하는데만 능했지 조선을 더 나은 조선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만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더 후퇴시키고도 남았을 위인들입니다. 나쁜 신하들입니다. 나쁜 재상이고, 나쁜 2인자들입니다.
42. (송사) 『송사』 「유일지전」에 “천하의 다스림은 군자가 여럿이 모여도 모자라지만, 망치는 것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소인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가지지 않습니다. 교인 한명이 아무리 사고를 치고, 매주 피켓을 들고 있다고 교회가 망가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송사 유일지전에서 말하는 소인은 그냥 소인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 있는 소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명회와 김안로같은 이들입니다.
43. (문정왕후) 과거 권력의 최상위에 있던 남곤이 김안로가 신경쓰였듯이, 지금 권력의 최정상에 있는 김안로 역시 유난히 신경쓰이는 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중종의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입니다.
44. 사실 문정왕후는 김안로에게 그렇게 경계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1517년인 중종 12년에 중전이 되어서 17년간 아들이 없었습니다. 왕실에서 중전은 매우 중요한 위치이지만 그것은 세자가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 자신은 세자의 삼촌인 윤임과 함께 세력을 형성한 상태이지만 문정왕후는 중종 29년 가서야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세자가 나이가 17세입니다. 문정왕후의 아들과는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현재 세자는 중종뿐 아니라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그 인격을 감탄할 정도로 성군의 자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3살 때 이미 천자문을 뗀 영민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세자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품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비극적인 문정왕후의 시대를 열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45. (윤원형) 아무튼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문정왕후지만 중종 29년에 아들을 낳으면서 점차 힘이 실리게 되었고, 덩달아 그녀의 두 오라비인 윤원로와 윤원형의 움직임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김안로에게는 이게 괴장히 거북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초장에 그 싹을 잘라버릴 생각을 합니다.
46. 이를 위해 우선 김안로는 ‘중궁전에서 동궁을 박대한다’는 이야기를 은밀하게 퍼뜨립니다. 역사를 보면 간신들, 나쁜 놈들은 하는 짓이 항상 이렇습니다.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항상 음모, 모략, 술책입니다. 이런 소문은 곧 윤원형 형제에게도 들어갑니다.
47. 이에 윤원형 형제는 세자의 외숙부인 윤임을 찾아갑니다. 윤원형 형제도 대단합니다. 사실 김안로와 윤임은 같은 편이고, 특히 윤임은 누구보다도 세자를 끔직하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세자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 대놓고 윤임을 찾아가서 이것은 모함이다라며 왜 해명해 주지 않냐고 윤임에게 청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오히려 ‘김안로 대감이 중전 마마를 폐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김안로에게 들어갑니다.
48. 김안로가 노렸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김안로는 ‘김안로 대감이 중전 마마를 폐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라는 윤원형 형제의 말을 조금 바꿔서 대사헌 양연에게 ‘사림들이 중전마마를 폐하려 한다고 윤원형 형제들이 말하도 다닌다’라고 전합니다. 사림들, 즉 대간들을 이용해서 윤원형 형제를 없애려는 김안로의 묘략입니다. 결국 6조 당상들과 대신들, 거기다 대간들까지 총동원되어 윤원형 형제들을 탄핵하니 결국 중종은 이들에게 유배조치를 내립니다. 이때까지만 보면 김안로의 당연한 승리처럼 보입니다.
49. 그런데 유배조치를 받기 전에 윤원형 형제는 탄핵을 받자마자 임금을 만나 김안로의 음모와 세간의 평, 죄악들을 고해 받칩니다. 그러자 중종은 ‘그게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면서 윤원형을 탄핵했던 대사헌 양연에게 밀지를 보냅니다. 그러자 대사헌은 모든 대간들을 불러 왕의 밀지를 보여주고 양의 뜻에 딸 김안로를 죄주라고 탄핵하기 시작합니다.
50. 웃기는 일이 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김안로가 나쁜 신하라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종이 지금까지 그것을 몰랐다가 윤원형 형제의 고자질을 받고서야 처음 알았을까요. 더군다나 전권을 주고, 어제까지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김안로를 한번 만나보지도 않고 밀지를 내려 처단하라는 중종의 처사를 보면 조광종와 심정때와 똑같습니다.
51. 대간들도 웃깁니다. 대간들이 하는 일은 왕의 뜻에 따라 누구를 공격하고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건, 신하 건 잘못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대간입니다. 그들은 진작에 김안로를 비판했어야 했고, 그러지 않았으면서 왕의 뜻이라며 갑자기 김안로를 비판하는 것도 이상한 것입니다. 타락한 정치의 현장이 중종 말년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의 타락은 중종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52. 당시는 김안로 아들의 초례 날로 김안로는 좌의정이었고, 우의정 역시 김안로와 함께 있었는데 궁에서 사람이 나와 우의정을 불렀습니다. 김안로는 자기 아들의 초례 날이라 자신을 부르지 않는 임금의 배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우의정만 궁으로 들어왔는데 왠일입니까? 궁궐 분위기가 김안로를 탄핵하는 분위기이고 자신도 덩달아 김안로를 탄핵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우의정까지 합세해서 김안로를 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당일 김안로와 그 핵심 측근들이 모두 유배조치를 받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사약을 내립니다.
53. (김안로 최후) 김안로의 술책에 의해서 대사헌 양연이 윤원로, 윤원형 형제의 처벌을 청한 것이 10월 21일입니다. 그런데 겨우 3일 후인 10월 24일에는 중종의 밀지를 받아 오히려 김안로의 처벌을 청하고, 중종은 김안로를 유배보냅니다. 그리고 10월 27일 김안로에게 사약을 보내고, 다음날인 10월 28일에 김안로가 세운 법을 혁파해 버립니다. 언제나 똑같은 중종의 처신입니다.
54. (중종) 어떨 결에 왕이 된 중종에게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어 본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연산군의 폐위를 보면서 보위를 유지하는 것이 제일의 목적입니다. 신하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는 이가 중종입니다. 그리고 그 신하와 왕이 맞서면 자칫 보위를 잃을 수 있기에 자신은 항상 뒤로 숨고 신하들간에 싸움을 시키는 자신만의 처세술을 익힌 왕이 중종입니다.
55. 처음에 그는 반정 3대장들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박원종, 유순정, 성의안이 모두 일찍 죽고 나니 권력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정상적인 왕이라면 이때 권력을 되찾고 왕답게 나라를 통치해야 했지만 중종은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종에게는 자신의 몸을 보신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56. 그래서 주목한 이가 바로 남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조광조라는 인물이 혜성같이 나타났습니다. 중종은 자신을 대신해서 전면에 나설 사람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줍니다. 철저한 신뢰를 보이고, 철저한 지원과 절대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왕을 믿고 흔들림없이 일을 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조광조가 너무 세력이 커지면서 자신의 조광조를 위한 도구라는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광조를 버리고 남곤을 택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어떤 명분도, 의리도, 설명도 없습니다. 이것이 중종의 무서운 점입니다. 어저께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사랑한다면 그렇게 다정하게 웃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강도가 내 등에 비수를 꼽는 경우입니다.
57. 남곤이 죽고 남곤 세력이 권력을 잡았지만 중종이 보기에 이들은 역량이 약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김안로를 선택합니다. 김안로가 6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1년 만에 모든 정권을 장악한 과정을 보면 중종이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주고, 신뢰하고, 지지했던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안로를 버리고 죽이기까는 일주일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58. 중종 통치 기간이 39년입니다. 평소 중종은 비판에 귀를 기울일줄 알는 임금이었고,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과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독선적인 태도를 별로 보인적이 없습니다. 단 조광조, 심정, 김안로 등을 버릴 때는 단호했고, 잔인했을 뿐. 나름대로 국정에 대한 관심도 가지면서 국방, 민생, 인사, 교육, 출판, 의료 등등 많은 부분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이렇다할 진전이 없었습니다.
59.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종에게는 미래에 대한 비전도, 장단기 구상, 일의 선후도, 일관된 원칙, 책임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종은 본인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지만 대간들이 그렇게도 지적했던 자식들의 지나친 호화 사치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어려움과 병력의 감소를 걱정하면서도, 그 원인이 되는 공신개혁에는 손대지 않았고, 선비들의 공부하지 않는 풍조를 염려한다면서 사화를 주도했던 왕입니다. 폭군 연산의 시대를 정리하고 아버지 성종의 시대로 돌아간다면서 연산때보다 옥사로 인해 무고한 목숨이 훨씬 많이 죽었습니다.
60. 조선왕조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시대가 세종의 시대입니다. 세종의 시대는 내치는 황희가, 나라의 개혁과 비전은 세종이 담당했습니다. 중종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세종만큼 뛰어나지 않았더라도 정광필이 황희의 역할을 하고, 조광조가 개혁을 담당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61. 뛰어난 군주들 주변에는 언제나 인재들이 넘쳐 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인재들이 있으니 그 군주가 업적을 쌓은 거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세종이 아니었다면 세종 시대의 인재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 모릅니다. 인재가 없던 시대는 없습니다. 인재를 못알아본 시대가 있을 뿐입니다.
62. 1544년 중종 39년 11월 14일 중종이 세자에게 양위하시고, 다음날 환경전 소침에서 붕어하시니 향녁 57세였습니다.
63. 중종을 이어 그의 아들 세자 호가 보위를 이으니 그가 조선 제12대 임금 인종입니다. 중종이 39년간 통치하면서 제일의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세종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 평각받는 인종대왕을 낳은 것이고, 그의 최고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태종 이방원과 같이 세종을 위해 집안 정리를 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한 몸에 기대를 받던 인종은 보위에 오른지 겨우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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