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루나 칼럼 >
대종교가 없었다면
내가 보기엔 사이비가 많은 것 같은데 얼마 전부터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른바 보수 아니면 진보를 자처한다. 그건 미주 한인사회도 닮았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험한 말로 서로 헐뜯기 일쑤인데 그 구업을 다 어찌할꼬?
보수라면 말 그대로 본래 자기 고유의 것을 지키자는 이들 아닌가? 그리고 진보는 좀 개방적이어서 이른바 리버럴(liberal)한 사람들이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른바 보수가 더 자유를 내세우며 외세에도 스스럼없이 기대려 하는 반면 진보가 오히려 겨레를 찾고 자주를 내세우는 것 같아 참 헷갈린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주제를 놓고 말싸움에 들어갈라치면 자기 성향이나 패거리에 따라 홍해가 갈라지듯 쫙 편이 갈린다. 가령 누구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리 성공(?)하였나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 주장이 극과 극이다. 누구는 그게 오로지 미국 덕분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 곧 기독교 덕이라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직 형편이 완전히 펴지질 않고 통일이 안 되고 혼란스러운 것도 다 하나님을 제대로 안 믿고 땅끝까지 못 퍼뜨려서 그렇단다.
반면에 누구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희생된 수많은 선열들과 열사들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긴가민가하거나 코웃음 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후손들의 엇갈리는 위상과 현실을 보고 들은 학습효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은 아예 대놓고 이게 다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를 지배해 준 덕분이라는 눈귀를 의심할 주장이 나왔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아주 무식한 부류가 아닌데도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치는 먹물 친구들이 제법 생겼다는 점이다. 이런 무리들을 학비(學匪)라고 해야 하나? 자갈논 팔아 뼛골 빠지게 우골탑 보내 헛공부 시킨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치들이 튼튼한 강둑에 쥐구멍을 내는 바람에 결국 둑이 무너져 혹시라도 장래에 고국이 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휩쓸리는 꼴이라도 볼세라 한 가닥 염려가 없지 않다.
아무튼 한국은 이제 여러 면에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섰다고들 하는데 그게 정말 누구 은덕이냐는 견해와 주장에 나도 한 마디를 보태자면 선진국 운운은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서도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명맥을 이어오게 된 것은 대종교(大倧敎) 덕분이라는 것이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처럼 뜬금없겠지만 말이다. 도대체 대종교가 뭣이간디? 들어 보기나 했간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부처님 하느님도 좋지만 저 중동에서 들어온 알라신까지 교당 지어놓고 기리는 마당에 이제 가끔은 단군 할아버지께도 인사를 챙기자는 것이다. 그 단군을 모시는 종교가 대종교이며 상대적으로 극소수이긴 하지만 아직도 단군을 아침저녁으로 받들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대종교인이 4천 명쯤은 남아 있다니 다행이다. 내가 미주에서는 아직 한 사람도 마주친 적은 없다만. 그래서 많은 이들에겐 대종교요 대종교도라는 게 일본의 아이누 족처럼 안중에도 없거나 혹 인지하고 있더라도 거의 사그라지는 종교요 종족이라고 여기기도 하겠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이 글을 내쳐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신도 수에 관계없이 대종교라는 종교로 표방되는 그 신앙과 문화의 집 속에는 앞으로 꽃 필 한국과 한국 사람들의 많은 가능성이 싹을 틔울 알찬 씨앗으로, 여러 귀한 실타래가 풀려나올 실마리들로 품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가 무엇이 됐든 어느 나라에 살고 있든 간에 한국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이 대종교라는 퇴락한 종갓집에 핏줄이 닿음은 물론이요 음덕으로 가려져 있는 큰 빚을 각자 지고 있음도 알게 될 것이다.
단군 한배검
그렇다면 대종교란 무엇이며 언제부터 있어 온 것인가?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가 창시한 동학(東學: 天道敎 )이나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의 증산교(甑山敎), 그리고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원불교(圓佛敎) 등과 함께 나철(弘巖 羅喆 1863~ 1916)의 대종교도 근세 민족의 고난기에 생겨난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창시자에 대하여 대종교에서 하는 이야기는 나머지 종교들과 좀 다르다. 단군을 모시는 신앙 내지 종교는 수천 년 전부터 면면히 이어오다 고려 중기 이후 몽고의 침략과 지배로 맥이 끊겼는데 그것을 나철 대종사(大宗師)가 1909년에 얼추 700년 만에 다시 살려내어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대종교에서는 중광(重光)이라고 하는데 해마다 음력 1월 15일을 대종교를 ‘다시 빛낸 날[重光節]’로 삼아 기념한다. 따라서 대종교는 나철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들어 낸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적혀 있나?
몹시 아쉽게도 한국은 그 긴 역사에 비해 사서가 참 귀하다. 특히 고대사가 그렇다. 외세의 침략과 자신들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료가 불타거나 감추어지다 사라졌다. 우리는 역사를 잃은 민족인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동북공정이며 일본의 역사왜곡에 더불어 철없고 눈먼 동포 광신도들의 견강부회며 날조며…. 하여 그나마 남은 역사마저 지금도 빼앗기고 뒤틀리고 있다.
지금 압록강 건너편 집안(輯安)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비[好太王碑]는 중국이 자기 조상들 것이라며 경내의 소수민족이 세운 변경국가의 유적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중국인 안내원이 손 마이크를 잡고서는 ‘한국놈[高麗棒子 가올리방쯔]들은 이걸 자기네 조상 것이라고 우긴다네요!’ 하고 빈정거리면 중국인 구경꾼들이 못 참고 ‘푸하하’ 웃음보를 터뜨리는 기가 찬 장면들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고구려는 이미 완전히 빼앗긴 것일까? 그러니 고조선과 연고가 깊어 보이는 요하 상류의 5,000년 묵은 홍산 문명(紅山文明)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못하는 것인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이나 한국에 남아 있는 몇몇 사서의 글줄에서 대종교의 주장이 헛말이 아님을 엿볼 수 있다. 단군 신앙은 참 오래됐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단군왕검 시대 때부터 하늘을 우러러 왔다. 주신은 상제(上帝·하느님)이고, 단군은 교조(敎祖)다. 어떤 이는 이를 초원의 길로 일찌감치 전해 받은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갖다 붙인다는데 혹시 거꾸로는 아니고? 아무튼 부여에서는 영고(迎鼓 맞이굿),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 백제에서는 교천(郊天), 동예에서는 무천(舞天), 그리고 신라와·고려에서 거창하게 벌어졌던 팔관회(八關會)같은 제천의식을 통해 단군, 곧 하느님을 모시고 기렸던 흔적이 있다. 이러다가 불교 도교 유교 등 외래종교가 위에서부터 젖어 내리는데다 국난을 당하자 단군은 본색을 잃고 한 동안 잊히다시피 하였지만 민중의 바다 저 깊숙이 살아남아 20세기 벽두에 시대의 부름에 따라 대종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떠오른 것이라고.
그런데 大宗敎가 아니라 大倧敎다. ‘마루 종(宗)’이 아니라 '상고 신인 종' 또는 '신선 종'으로 훈을 다는 ‘倧’자를 쓴다. 누가 신선인가? 이는 곧 ‘한배검[天祖神]’을 가리키는데 이 세상을 만든 한인[桓因, 造化神], 이 세상을 가르친 한웅[桓雄, 敎化神],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린 단군[檀君, 治化神]이라는 세 신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 세 신은 결국 한 몸으로서[세검한몸 三神一體] 이를 ‘한배검’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떠올리게 하지만 좀 다르다. 이 사라졌던 한배검을 다시 불러 모셨으니 대종교 초대 종사인 나철은 교주가 아니라 ‘다시 불러 모시어 빛나게 만든 큰 스승’, 곧 ‘중광(重光)의 대종사(大宗師)’라 불린다.
누구는 말한다. 대종교를 알지 못하면 한국 철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대종교는 단순하게 종교가 아니고 한국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이론화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대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詁)>라고.
또 어떤 이는 이렇게 일갈한다. 우리가 통일을 하지 않으면 지구상에서 사라질 운명이지만 통일을 하면 세계적인 혁명을 한 번 할 수 있다면서 그런 판갈이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상적 에너지가 바로 한국의 민족주의이며 그 튼튼한 기반이 바로 대종교라고. 왜냐면 대종교는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았고 외래종교는 종으로 살았기 때문이란다.
어떠신가? 이런 귀띔들을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가실 건가?
홍암 나철
중광의 대종사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 벌교의 나주 나씨 양반 가문에 태어났다. 본 이름이 두영(斗永)이었는데 나중에 고쳐서 인영(寅永)이 되었다가 다시 철(喆)이 되었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여 스물아홉에 문과 병과(丙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를 지내다 서른세 살인 1895년[고종 28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한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하찮은 구실아치 자리에 연연할 만치 마음이 겨르롭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1916년 구월산에서 자결할 때까지의 한살이는 오로지 항일투쟁과 종교를 통한 구국운동이 다였다.
그의 구국 행적을 볼작시면 첫머리에는 일본의 신의를 기대하며 외교전을 펼치다 그들의 정체를 깨닫고 실망하여 테러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깨닫고는 종교에 호소하여 인간과 사회의 궁극적인 변화에 바탕한 이 세상의 근본적인 사태해결을 꾀한다.
나철은 나이 마흔한 살이 지난 1904년, 강진의 오기호(巽菴 吳基鎬 1863~1916), 부안의 이기(伯曾 李沂 1848~1909), 최전 등 호남의 우국지사들과 비밀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며 구국운동에 시동을 건다. 그리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직전인 1905년 6월에 오기호, 이기, 홍필주(洪弼周 1857~1917) 들과 일본에 건너가 한ㆍ청ㆍ일 세 나라가 친선동맹을 맺고 착한 이웃이 되어 서로 돕자고 일본 정객들에게 호소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왕의 궁궐 앞에서 사흘 동안 단식 농성도 했다. 제국주의자들의 선의를 기대한 순진함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맺는다는 소식을 듣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없애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단도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응징의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대문역 근처에서 자신을 불러 세운 백전(佰佺)이라는 늙은이가 있었는데 이 도인은 훗날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를 전해주고 사라진다. 그러나 나철의 주의를 크게 끌지는 못했는지 받은 채로 그냥 간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인 1906년, 나철은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넌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맞서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 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역시 별무소용이었다. 그는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죽이려 하였으나 방도가 없었다.
나철은 1907년 1월, 을사오적 처단을 위하여 단독이 아니라 암살단을 꾸렸다. 3월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의치 못해 단원인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 지도(智島)에서 유배 중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선생에 대한 사형집행 중지와 함께 고종(高宗, 李載晃 1852~1919)이 드물게 잘한 일이다.
1908년, 특사로 풀려난 나철은 동지의 권유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마지막으로 외교전을 펼쳤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런데 아주 생각지도 못한 큰 소득이 있었으니 동경에서 어느 한국 노인을 만난 것이다. 백두산의 백봉(白峯)이라는 신사가 보낸 단군교 신도 두일백 (杜一伯)이라고 하였다. 이미 단군교 소그룹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철은 그에게서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받았으며 단군교 입교의식도 받게 되어 추후 자신이 단군교를 중광하여 교단을 조직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철은 노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외교를 통한 이때까지의 독립운동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나라는 망해도 도가 살아남으면 된다[國亡道存]’는 두일백 노인의 말대로 단군교를 널리 펴는 일이 자신에게 떨어진 마지막 사명이요 기회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저번에 서대문역에서 만난 백전 도인도 그렇고 이 두일백이라는 노인은 어찌 알고 일본에까지 나철을 찾아왔을까? 이런 이야기는 모두 허구일까 아닐까? 이제 와서 백프로 고증할 수는 없지만 정말 백두산이나 개마고원 어디 비밀스러운 장소에 단군의 가르침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줄곧 단군의 중광을 꿈꾸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다 언론에도 이름이 비치며 큰 재목이 될 가능성의 인물을 멀리서 알아보고 메신저를 보낸 것일까?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전혀 그랬을 가능성이 없는 공상만은 아닌 것 같다. 하기야 어느 종교에나 초창기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게 마련이지 않나!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후에 펼쳐지는 대종교의 파노라마를 바라볼작시면 일단 이런 줄거리를 받아들여야 역사의 순리랄까 당위성이랄까, 이런 저런 아귀가 얼추 맞아들어간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나철 선생 생가
아무튼 이리하여 1909년 음력 1월 15일, 나철은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謨 1868~1943), 이기,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檀君敎)를 공표하였다. 이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며 이로써 단군의 가르침은 명실공히 700년 만에 다시 섰다. 그리하여 서기전 2333년(戊辰年),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개천절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개천절은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환웅(桓雄)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날인 상원 갑자년(上元甲子年 BC 2457) 음력 10월 3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환웅이 하늘을 열고 내려와 단군을 낳고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까지 124년이 걸린 것이고 두 날짜가 모두 음력 10월 3일이란 뜻이다.
이기
단군교의 중광과 함께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된 홍암 나철 대종사는 밀계(密誡)와 5대 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다듬어 간추리고 교단의 얼개를 짬으로써 교세를 펼치도록 애를 썼다. 흰옷 입은 뭇 사람들이 이를 기꺼이 반겨 1910년 6월 현재 서울에서 2748명, 지방에서 1만8791명이 교인이 되어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군교가 중광된 한 해 뒤 나철은 단군교의 이름을 대종교로 바꾸는데 이는 동지였던 정훈모의 친일과 등돌림 때문이었다. 정훈모는 나철이 거세게 항일 하는데다 시교(施敎)의 눈길이 나라밖으로 쏠리는 것을 꺼리더니 패거리를 모아 단군교란 이름에 매달리며 따로 나가 살림을 차렸다. 그는 나라안에 남아 일제에 빌붙으며 구구히 목숨을 이어갔지만 훗날 마침내 그 일제의 해산령으로 인해 발붙일 종단 자체가 없어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철은 꿋꿋이 항일의 자세를 지키지만 국내는 점차 일제의 억누름이 더해가자 설자리가 줄어든다. 그런 서슬에도 1911년 1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세검한몸[三神一體]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펴내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둘러보고 만주 화룡현(和龍縣) 백두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를 이룩한다. 그리고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1914년 5월, 마침내 총본사를 청파호로 옮기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를 펴기에 힘쓰는데 짧은 기간 안에 30만 명의 교인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교세의 빠른 퍼짐에 놀란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한다. 대종교는 이제 노골적인 말살작업의 대상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다다르자 나철은 마지막 결심을 한다. 1916년 음력 8월4일, 나철은 뒷날 북한의 초대 국가수반이 된 김두봉(배못, 白淵 金枓奉 1889~1961)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여섯 명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세 시부터 사흘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이고는 수도에 들어간다. [自今日上午三時爲始 三日間絶食修道 切勿開此門]
그러나 16일 새벽 인기척이 없었다.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홍암 대종사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殉命三條]를 남기고 8월15일(양력 9월 12일) 폐기법(閉氣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스스로 숨을 멈추다니! 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죽음이었다. 유언에 따라 청파호 언덕에 묻었다. 홍암 대종사가 조천(朝天)한 날[嘉慶節]은 대종교의 4대경절의 하나로 기려지고 있다. 1962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나철이 적어 밝힌 바 스스로 죽는 까닭은 이러하다.
첫째,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 능히 한배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겨레의 망케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혀 오늘의 없우임을 받는지라. 이에 한 오리의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음이라. [喆 罪惡甚重 材徳菲薄 不能普光 天祖之大道 不能弘濟神族之胥淪 反致有今日之侮辱 玆決一縷之命 以殉于倧敎者]
둘째, 내가 대종교를 받든 지 여덟 해에 빌고 원하는 대로 한얼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 번 입어서 장차 뭇 사람을 구원할 듯하더니 마침내 정성이 적어서 갸륵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할지라. 이에 한 오리의 목숨을 끊음은 한배님을 위하여 죽음이라. [喆 敬奉八載 禱輒靈應 屢蒙神眷神慈 默契默佑 若將溥救衆生 而精誠微賤 不能報答萬一之恩 玆決一縷之命 以殉于天祖者]
셋째, 내가 이제 온 천하의 많은 동포들이 가달길에서 마침내 괴로움에 떨어지는 죄를 대신 받을지라. 이에 한 오리의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음이라. [喆 今代普天下同胞兄弟姉妹 迷眞沈妄 竟墮苦暗者之罪 玆決一縷之命 以殉于天下者](*가달길: 妄道)
이상이 홍암 나철의 일생을 따라 전개한 대종교의 들머리 역사이거니와 내가 여기까지 글을 끌고 온 이 자리에서 앞에 놓인 두 갈래의 길 가운데 어느 쪽을 먼저 살펴볼 것인가가 머뭇거려진다. 지금 우리는 대종교라는 종교 이야기를 시작했으므로 창시자 내지 중광자의 삶이 얼마큼 이야기가 되었으면 마땅히 그 가르침의 속살을 들쳐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하지만 대종교인 경우, 우리는 그 갈림길에서 내쳐 그 피비린내 나고 처절하며 이 세상 무엇보다도 끈질기게 버티고 거스르다 사그라져 간 항일의 발자취부터 따라가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든다. 왜냐면 잠시라도 두고 떠나기 없을 만치 이쪽 갈래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장엄한 동시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한스럽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 우리 자신 부끄럽고 안타깝게도 기억 속에서 어느덧 시나브로 지워진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침략의 촉수를 뻗치면서 능란하게 앞잡이들을 부리던 잔혹하고 간특한 일본 제국, 어리석고 만만하며 아둔한 조선 왕조와 온 백성을 냉큼 삼켜 버린 그들의 야비하고 끔찍한 폭정 앞에서 이 땅의 종교인들은 어떻게 몸을 사려 살아남았던가? 비록 조선 5백 년의 유례없는 짓밟음을 견뎌 왔다손 치더라도 합방 당시 그나마 최대의 종교다운 세를 지닌 채 민중 속에 뿌리박고 있던 불교는 어떻게 처신했던가? 일제에 일부 저항도 타협도 하였으나 끝내 왜색불교로 거의 떨어지고 말았으니 물러나 숨어 입을 다문 채 때를 기다리던 몇몇 뜻있는 스님들 말고는 거의가 살기에 급급하거나 일부는 앞장서 협력하였으며 아니면 현실과 동떨어진 혼자만의 세계에 푹 잠겨 세상만사 나몰라라 하였단 말이던가!
이는 유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저 콧대 높고 쟁쟁하던 이 땅의 유학자들은 몇몇 한말 의병장들과 목대 꼿꼿한 나홀로 선비들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힘 한 번 못 써 본 채 대동학회(大東學會) 등 사이비 어용단체에 휘둘리며 가뭇없이 지난날의 영광을 퇴색시켰다.
일제하 대구신정장로교회 주일예배 순서
2대종사 김교헌과 서일 종사
기독교라고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서구의 뒷배를 믿음인지 구교든 신교든 한 동안은 제법 버티기도 거스르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지조를 지킨 이는 소수였고 이들은 불교와는 달리 해방후에도 끝내 주류에서 밀려난 모양새가 된다. 일제 당시 많은 하느님의 사제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제에 꺾여 들며 동방요배(東方遙拜)를 예배순서에 끼워넣는 등 협력하였으며 일부는 심지어 신도들에게 일제에 복종함이 하느님의 권위에 순종함과 마찬가지라는 요설을 베풀기까지 하였다.
차라리 이런 기성종교들이 미신시하며 얕보던 민족종교들이 그나마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친일로 돌아선 이용구(李容九1868~1912)의 시천교(侍天敎) 때문에 애는 먹었지만 천도교(天道敎)는 주어진 조건에서 힘겨운 저항을 하면서 차차 개량주의로 나아갔다. 증산교는 풀씨처럼 흩어져 메마른 흙더미 속에서도 깡그리는 죽을 수 없는 잡초가 되었다. 그리고 대종교는 아예 본진을 나라 바깥으로 옮겨 본격적인 싸움, 그것도 총칼을 맞부딪었으니 막강하고 잔악한 제국주의 군대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그 참담한 희생을 말해 무엇하리요?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를 무모한 도전이었다고만 감히 비웃을 수 있는 자 없으리라. 대종교는 그 염원과 정신을 살리고는 팔다리 몸통까지 잘리며 몸을 거의 죽였으니 비록 짓이겨지고 버려졌으나 그 생명은 살았다. 그리하여 다시 내려받아 살 몸마저 빌려 바꾸고 꿈마저 옮겨실을지언정 그 입혀지는 이름과 꼴을 상관 않고 오늘날까지 무수히 우리 가슴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음에랴! 이 모든 저항과 희생의 장엄한 이야기를 넉넉지 않은 글 속에 추리고 또 추려 실으려 해도 이는 마치 알라딘의 작은 등잔 속에 천태산 마고할미를 거꾸로 우겨 넣으려는 것과 같으리니, 다른 것 다 두고 우선 나철이 하늘로 돌아간 후 2세 교주가 된 김교헌(茂園 金敎獻, 金獻으로 개명 1868~1923)과 다시 그의 사후 3세 교주가 된 윤세복(檀崖 尹世復 1881~1960) 종사만 따라가며 이야기를 더듬어 간추릴까 한다.
1916년, 홍암 나철 대종사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된 무원 김교헌 종사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었다. 본래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까지 오른 구한말의 선비였으나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한 후 쉰여섯 해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그 가르침의 펼침과 항일구국운동에 한 몸을 바쳤다. 대종교인이 되기 전에는 한 때 친일 단체에도 이름이 오르는 등 황망 간에 흠 잡힐 일이 있었으나 한 번 제 길로 들어선 후로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으로 옮긴 뒤 제2회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여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기르기에 힘쓴다. 서일(白圃 徐一 1881~1921)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후원하여 1918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킴으로써 적극적인 무장독립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지었다.
그는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이 서명하여 1919년 2월1일에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곧 무오독립선언서에 앞장서 서명하였다. 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독립지사 중 25명이 대종교 출신이었다. 이 무오독립선언은 1919년 국내의 3·1독립운동에 앞서 도쿄(東京)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보다도 더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선언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분명히 명시했다는 점에서 기미독립선언서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서명한 39인 가운데 ‘이탁’ 한 사람만 빼고는 끝까지 아무도 변절하지 않은 점도 대조를 이룬다. 해외독립 운동가들은 이 선언서에서 밝힌 대로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위의 예에서도 보듯이 당시의 항일독립투쟁에 있어서 대종교가 얼마나 정신적, 인적, 물적으로 등뼈의 구실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 남아 극렬히 저항할 수 없었던 사정으로 3·1 독립선언에는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는데 만약 직접 참여하였더라면 그 선언서의 일견 맥 빠지는 무저항주의 기조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대종교의 개천절은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국경일로 채택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국무원들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고 독립운동의 가장 큰 인적 물적 기반이 대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은 이를 이어받아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식 제정하고 그때까지 경축식전에서 부르던 대종교의 <개천절 노래>를 요즘 부르는 노래로 바꾸었다.
1921년 제2회 상해 임시의정원 위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으며 이동녕을 비롯하여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송병조 등이 그 핵심 인물들이었다.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한 일제의 마지막 몇 해를 빼면 1910년대부터 1940년대 광복 때까지 해외에서 강력하게 무장독립항쟁을 펼쳤던 각 단체들마다 평균 70~80%를 대종교 출신이 채우고 이끌었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던 이상설, 이회영, 정인보, 주시경, 지청천, 홍범도, 김좌진, 신채호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이 모두 대종교인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 글을 마저 읽지 않더라도 이쯤해서 직감이 오지 않으신가? 대종교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없었으리라는 직감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위에 열거한 몇몇 인사들의 이름만 대충 들어 알고 정작 대종교는 모른다.
아를롱의 레오폴드 2세 동상
거국적인 3·1운동의 결과, 그 이전까지 해외 각지에서 저절로 생겨났던 임시정부들이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었는데 각지의 무장단체들도 일단은 임시정부에 소속되어 형식상이나마 일정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북간도의 경우 김교헌 종사의 의지에 힘입어 무장투쟁이 조직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일찌감치 중광단을 만들어 이끌며 지도력을 발휘한 또 하나의 인물 서일의 공로가 아주 크다.
서일은 함북 경원에서 나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0년 동안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교육 사업에 투신하는 한편 1911년 비밀 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여 서른한 살에 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1912년 나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였는데 짧은 기간에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인물로 아주 열성적으로 신앙하고 시교(施敎)하여 수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며 대종교의 핵심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김교헌은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고자 했지만 서일은 항일무장투쟁에 전념하기로 해서 5년간 미뤄 두었다고 한다.
중광단은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했으며 1919년 군정부로 개편되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고쳐 불리며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의 기지가 된다. 북로군정서 총재로 부임한 서일은 총재부를 담당해 그 사령관 김좌진이 지휘한 청산리 전투(1920.10.21~26)를 지원하여 대첩을 이룬 것이다. 북로군정서를 주축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몇몇 무장 단체가 연합한 독립군의 군사는 5,000명이 채 안 됐는데 30,000 명 이상의 왜적을 맞아 싸운 이 싸움에서 아군 피해는 사망 9명에 부상 6명, 적군 피해는 자그마치 사망 1,200명에 부상 3,300 명이었으니 대첩이란 말이 절대 무색하지 않다.
일제는 청산리전투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1921년 ‘경신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대종교도들이 다수인 수많은 조선인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만주 한인촌들은 그야말로 눈 뜨고 못 볼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었다. 김교헌은 통분한 끝에 병이 나서 1923년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 1881~1960) 종사에게 교통(敎統)을 넘기고 나이 쉰여섯에 숨을 거두었다. 항일투쟁과 더불어 김교헌의 종교적 업적은 시교와 저술을 통하여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그 역사를 고증하여 확립시킨 데 있다.
이렇듯 저항세력을 뿌리뽑고 그 텃밭이 되는 민간인 촌락의 가옥이며 인축까지 싹쓸이하는 일제의 수법은 몇 해 후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잡는 간도특설대로 전수되는데 여기에 자원입대한 어느 조선청년은 뒷날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이라 일부의 칭송을 받으며 논란 속에 국립묘지에 묻히는 촌극이 연출된다.
한편 서일은 북로군정서를 소만국경지역인 밀산(密山)으로 이동시킨 뒤 다시 연해주로 옮겨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하지만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는 묘하게 돌아가 각지에서 모여든 독립군들 사이에 의견일치가 안 되는 등 혼선이 있더니 일시 통합된 부대에서 지도부가 밀려나 떠나가게 되었다. 남은 부대원들은 노령인 이만(일명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自由市)으로 건너갔다가 공산계열의 한인 무장세력들 사이에서 알력이 빚어져 어처구니없는 동족상잔의 전초전이 일어나니 이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6.28)으로 만주의 항일 무장세력들은 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대타격을 받아 궤멸된다. 뿐만 아니라 이 참담한 기억은 추후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있어도 괜찮을 법한 사상적 차이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더욱 틈을 벌리며 서로를 믿지 못하게 작동한다. 이는 결국 겨레의 열망을 갈라치고 틀어 민족분단의 막다른 저수지로 흘러 들어가게 떠미는 작지만 돌이킬 수 없는 궂긴 물꼬가 된다.
어쨌든 서일은 다행히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아 변을 피했었는데 밀산으로 돌아와 참변 소식을 듣고서는 몹시 낙담했지만 따르는 군사를 추슬러 재기를 위한 군사훈련을 하던 중 번히 눈 뜨고 마지막 참화를 겪는다. 1921년 8월 26일 난데없는 토비(土匪, 마적단)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진중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청년병사들이 어이없이 학살당하고 마는데 서일은 동지와 부하를 일시에 잃은 죄의식과 함께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보고 어느 골짜기를 찾아가 홍암과 마찬가지로 조식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대교주 윤세복 종사
1924년에 3대 교주가 된 단애 윤세복 종사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대구에서 교편을 잡다 1910년 서울로 올라와 대종교인이 되었다. 입교한 다음해 수천 석의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사재를 들여 환인현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만주 각지에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다.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대종교를 모태로 하는 흥업단(興業團), 광정단(匡正團), 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몸바친다.
윤세복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 일본 군부의 압력을 받은 만주의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5~1928)은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을 체결하는데 그 부대조항에 의해 대종교 시교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겨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상해임시정부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한 번 해제되었으나 다음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곧 대종교 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쳤는데 1932년 본거지인 만주에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오족협화(五族協和: 만주족ㆍ한족ㆍ일본족ㆍ조선족ㆍ몽고족)라는 낯간지러운 슬로건을 걸고 기어코 세워지고 만 것이다. 이리하여 다시금 수많은 대종교인이 죽고 갇히고 쫓겨 다녔으며 대종교 자체도 비밀결사화했다. 만주군도 잇따라 창설됐는데 상당수의 조선 청년들도 여기에 가담하여 동족말살을 훈련받아 총칼을 들고 앞장섰으며 훗날 그 중에서 한국의 대통령도 나오고 국무총리도 나왔다.
만주국 성립에서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대종교는 그야말로 직접적인 완전박멸의 대상이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간신히 남아 있던 남도본사마저 문닫히는 등 극히 어려운 처지에 떨어졌다. 그러나 윤세복은 이를 무릅쓰고 초인적인 힘으로 교세 확장을 위해 떨치고 일어섰다.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한배검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으며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敎籍) 간행사업을 밀어붙이는 한편 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1942년, 일제는 대종교를 마저 죽이기 위해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의 임오교변(壬午敎變)을 두 달 사이로 일으켰다. 민족혼 교육과 조선어 교육을 말살해야 조선독립운동의 뿌리를 자를 수 있다는 판단으로 조선말과 한글을 지키는 지사와 학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영악한 일제는 한글과 조선어에 체계를 세우는 자들은 주로 대종교인이라는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한 달 뒤 일제는 대종교를 조선의 독립군 단체로 지목하고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교주 윤세복 등 25명의 핵심인물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치안유지법을 걸어 실형을 선고한 뒤 대부분을 만주의 액하 감옥에 가두었다. 단애 윤세복 종사는 무기형을 받았다. 대종교 간부들은 이곳에서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에 시달리다 죽어나갔다. 임오교변이다. 대종교에서는 이때 고문으로 숨진 열 명의 간부를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기리는데 삼가 작은 예를 지키고자 그분들의 이름을 여기에 올리자면 다음과 같다.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 나철의 맏아들)·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銕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 나철의 둘째 아들)·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囿)
홍암 나철 기념관 보성군
나철의 두 아들과 더불어 이 가운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가 들어 있다. 경남 의령 출신으로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무역으로 큰돈을 모은 거부로 독립운동에 비밀 자금을 대며 유학생들을 키웠는데 이들 중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왔다. 자금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거금을 지원해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 부근에 발해농장을 개발하고 1931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인이 되었다. 발해학교를 세워 학생들이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민족정신을 키우도록 했다. 하지만 일제의 마수를 피하지 못해 임오교변의 희생자가 되어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난 지 한 해 만에 쓸쓸히 목단강을 바라보며 숨을 거둔다. 일찍이 솔가하여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ㆍ이시영(省齋 李始榮 1868~1953) 일가와 함께 혜택 받고 가진 자의 베풂과 되갚음을 잘 보여준 전형이다.
이쯤 해 놓고 숨을 돌려 이제 대종교의 가르침에 대해 알아보자.
대종교에서는 절대신인 한얼님[하느님]을 믿는데 조화신인 환인, 교화신인 환웅, 치화신인 단군, 이 세 신이 결국 한 몸이라고 한다. 세검한몸[三神一體]인 한배검[天祖神]이 지닌 권위는 절대적이다.
인류기원론을 보면 태초에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라는 남자와 여자가 있어서 한울가람[松花江]에서 만나 짝을 지어 그 자손들은 황·백·흑·홍·남색의 오색인종으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황색인종이 가장 커서 4개의 지파를 이루는데 인류창조의 중심인 송화강 상류 지역에서 낳고 자란 한민족이야말로 이 모든 인류의 종가인 셈이다.
구원론이다. 사람과 만물은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라는 삼진(三眞)을 받고 태어난다. 이것이 사람의 본바탕이다. 그러나 몸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동안에 마음[心]·기(氣)·신(身) 이라는 삼망(三妄)이 생기게 된다. 삼망이 삼진을 흐리니 욕심이 생기고 병이 나고 죄를 짓게 되어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삼망을 억누르고 삼진으로 돌아가는 대종교의 가르침에는 자력적인 방법과 타력적인 방법이 있다.
내세관으로는 삼계(三界)·삼부(三府)·육옥(六獄)이 있다. 순선(純善)한 것은 신도(神道)라 하고 순악(純惡)한 것은 마업(魔業)이라 하며 사람은 이 두 경계에 있어서 사람 사는 일[人事]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대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지향해야 한다.
대종교의 사상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본적인 원리는 삼일원리(三一原理)이다.
삼(三)이라는 숫자는 순환무궁하며 무진하기 때문에 신성한 수다. 대종교는 유·불·선의 3교가 합일되어 나타난 것으로 불교의 묘법과 유교의 역학, 도가의 현리(玄理)가 완비되었다. 삼일지리(三一之理)에 의한 큰나[大我]를 발견함으로 각각의 폐단인 염세와 이기, 그리고 문약을 극복한다.
이유립
대종교에서는 ‘삼법수행’이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이다.
눈을 감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무념무상하게 마음을 비우는 지감법이 출발이며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통일하여 기도하며 깊이 호흡하는 것이 조식법의 기본이다. 그리고 경전을 소리 내어 읽거나 외우는 금촉법을 행한다.
대종교의 경전[한얼글]에는 한배검의 계시로 된 계시경전과 종사들의 깨달음과 해석을 적은 도통경전이 있다.
계시경전으로는 <삼일신고(三一神誥: 세 한얼 말씀, 敎化經)> <천부경(天符經, 造化經)> <참전계경(參佺戒經, 治化經)> <신사기(神事記)>가 있고
도통경전으로는 <신리대전(神理大全: 한얼 이치 책)> <회삼경(會三經: 셋을 모은 글)> <삼법회통(三法會通: 세 법 모두 틈)> <신단실기(神檀實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일신고>가 가장 중시되며 강단 사학에서 위작 논쟁이 있는 <천부경>은 정훈모의 단군교에서 먼저 채택됐었는데 나중에 대종교에서도 받아들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크게 불붙고 있는 위서(僞書: 가짜 책) 논쟁이다. 이른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간의 다툼인데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의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하여 출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천부경>을 비롯한 몇몇 전적들에 대해 양 진영의 확신에 찬 듯한 주장과는 달리 우리가 아직은 분명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고 나는 본다. 그리고 대종교와 증산교 등 민족종교들과 이들 재야 사서들은 종종 깊이 얽혀 있는데 이는 신비로움과 동시에 우리 역사의 불행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관찬이든 민찬이든 역사상 많은 전적과 사서들을 제대로 못 챙기고 대부분 잃어버린 결과다.
단군 계통의 재야 사서로 이름만 남아있는 것을 보더라도 <대변설(大辯設)>, <삼성밀기(三聖密記)>, <삼한비기(三韓秘記)>, <조대기(朝大記)>, <진역유기(震域遺記)>, <표훈천사(表訓天祠)> 등 여럿이 있고 비록 책은 있으나 진위를 의심받고 있는 <규원사화(揆園史話) >나 <단기고사(檀奇古史)> <환단고기> 같은 것들도 있다. 아, 내 살아생전에 이들 중 하나라도 진본을 찾아 읽어 볼 수 있으려나!
대종교에서는 포교나 전도란 말 대신 시교(施敎)라고 한다. 단군의 상을 모신 곳을 천전(天殿)이라 하고 종단의 최고 책임자를 총전교(總典敎)라 한다.
지금 대종교의 총본사는 서울 홍은동 산자락에 있는데 소박하다. 외형으로 전체를 지레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전남 보성의 지자체에서 세운 홍암 나철 기념관이 오히려 번듯해 보인다. 전국에 22개의 시교당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교인들끼리는 서로 형제·자매로 부르며 성직자로서는 선도사(宣道師)·시교사(施敎師) 등이 있다.
의식으로는 집단적으로 행하여지는 선의식(䄠儀式) 및 경배식(敬拜式),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행하는 삼법수련(三法修練)과 독송수행(讀誦修行)이 있다.
선의식은 대종교의 4대경절인 개천절(단군 개국: 음 10/3)·어천절(御天節 단군 승천: 음 3/15)·중광절(단군교 부활: 음 1/15)·가경절(嘉慶節 나철 대종사 조천: 음 8/15)에 천진전 내에서 거행되는 제천의식이다. 경배식은 일상적인 의식으로서 일요일 낮에 전체 교인이 모여 행하는 의식이다.
깨닫는 말씀, 천부경, 삼일신고 순으로 독송하는 것을 천경신고라 한다. 기도문으로는 “세검 한 몸이신 우리 한배검이시여,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듣고 보시며 나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라는 짧은 것을 주로 한다.
봉우 권태훈
이상이 대종교 신앙과 신행의 간략한 기술이거니와 만주의 북풍한설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한얼님의 종교가 웬만한 일탈도 봐주며 종교의 자유를 만끽한다는 대한민국에서는 왜 그리 위축돼 있을까?
해방후 대종교 종단의 행적부터 살펴보자.
8.15 광복 후 북한에서는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천도교와 더불어 비교적 호의적으로 대접받았으나 천도교 계통의 청우당에 비해 위상이 낮으며 남한에서는 근근이 명맥을 잇고는 있으나 어느덧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에 밀려 현재는 이슬람교보다 신도가 적은 군소종교로 떨어졌다.
3대 종사 윤세복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이듬해인 1946년 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곧 교당을 세우고 교단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전국에 단군전 봉안운동을 벌이고 교적을 간행하며 인재양성을 위해 홍익대학을 설립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체제를 바꾸어 전임 교주로부터 교통을 전수받는 대신 2년제의 총전교를 선거로 뽑아 뒤를 잇게 하였으며 자신이 초대 총전교로 추대된다. 소설 <단>으로 유명했던 권태훈(鳳宇 權泰勳 1900 ~1994)은 13대 총전교였다. 2018년에는 나철의 종손 며느리인 박민자 전교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총전교에 추대되었다.
교육대계를 위해 대학도 설립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다 남의 손에 넘어갔다. 국학대학은 초대 이사장부터 초대교장, 초대학장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까지 모두 대종교 관련 인물이었다. 1967년 우석대학교에 흡수되었고 우석대학교도 고려대학교에 흡수되어 없어졌다. 홍익대학교는 대종교 지도자요 독립운동가인 이흥수(松巖 李興秀 1896~1973)가 사재를 털어 설립하였으나 자금난으로 재단이 바뀌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대종교를 떠났다. 단국대학교는 대종교인이며 원로원참의를 지낸 독립운동가 장형(梵隱 張炯 1989~1964)이 조희재 여사와 공동으로 설립했는데 한참 전부터 대종교 색은 거의 바랐고 교명에만 남았다.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이어서 설립된 것으로 설립자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 역시 당시에는 대종교 인사였지만 경영난으로 재단은 조영식(美源 趙永植 1921~2012) 박사에게 넘어갔고 교명도 바뀌었다. 이들 대학교의 연혁에도 대종교 관련 기록은 희미하게 숨어 버렸다.
미군정 때 대종교는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과 함께 5대 종단의 일원으로 등록되었으며 정부 수립 뒤에는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한뫼 安浩相 1902~1999) 박사의 노력으로 천주교를 포함한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었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 받았다. 당시에는 살아남은 쟁쟁한 대종교 인사들이 정계와 학계 등에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그런데 왜 대종교는 머지않아 이렇게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을까?
무릇 무엇이 잘못된 원인은 그 무엇의 안에서부터 먼저 찾음이 바른 길이므로 대종교 쇠잔의 까닭은 대종교 안에서 찾음이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대종교인들의 몫이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들에게 일단 맡겨 두자. 바깥에 한 발 떨어져 대종교를 쭈그러뜨린 시대적 사회적 조건을 관찰한 내 나름의 판단은 이러하다.
장군봉 마루에서 대종교 관련 유물이 발굴된 위치
첫째, 대종교는 항일무력투쟁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하였고 너무 희생이 컸다는 것이다. 비록 일부 지도급 인사들이 살아남아 환국했지만 특히 풀뿌리 민중의 희생이 막심하였다. 만주에서의 기반은 물론 초토화되었고 국내에는 어디에도 당장 발붙이고 성장할 만한 최소한의 근거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은 정계와 재계에서의 밀려남이다. 혼란한 해방후 정국에서 친일인사들이 부활하여 이승만(雩南 李承晩 1875~1965) 정권과 결탁하여 부정부패로 부와 권력을 차지해 간데 비하여 대종교 인사들은 위험한 잠재적 경쟁자로 간주되어 일회용 간판으로 정권에 이용당하고는 권력에서 일거에 밀려났다. 적수공권으로 돌아와 맞은 아수라장 같은 천민자본주의 태동기에 그 흔한 적산 하나 못 챙기고는 물적인 토대가 될 폭넓은 민중의 지원이나 스스로 재력을 키울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좌우대립과 한국전쟁 때문이다. 많은 인사들이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그 나마의 인적 물적 토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냉전세력의 뒷받침을 받은 정권은 특히 민족주의자들을 경원시하여 국가보안법 등으로 좌우 이념투쟁의 애꿎은 희생물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급속한 서구화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 특히 새로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동양적인 것, 우리 고유의 것은 뒤떨어진 볼품없는 것으로 각인되도록 제도교육과 대중문화, 외래종교에 의하여 지속적인 세뇌를 당하였다. 이는 대종교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지금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바는 없다. 비록 70년대를 즈음하여 복고적 민족주의가 일부 되살아나기는 했으나 그 국격을 살리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황금 같은 시간을 물흘려 보냄으로 생긴 세대차, 인식차의 골짜기는 여전히 메우기 버겁게 남아 있다.
박민자 총전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종교가 애써 간직하여 표방하고 있는 그 무엇은 우리의 듬직한 바탕이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토굴은 움집이 되었다가 다시 띠집으로, 초가로, 기와집으로 바뀌고 이제는 한국인의 다수가 고층 아파트에 피곤한 몸을 누이듯이 종교도 시대에 따라 번지며 갈바들었다. 공기와 햇빛처럼 보편적이고 은혜로운 진리로서의 세계종교와는 말뜻에 조금 단층이 지는 우리의 문화현상으로서의 종교도 옛 넝쿨이 맥을 이어 뻗어가거나 시들곤 하면서 새로운 줄기가 번갈아 감아 들어와 꽃피었다. 불교가 안방을 차지하는가 싶더니 유교가 대청마루로 들어오고 이윽고 가지각색의 기독교가 따라 들어와 거실과 주방을 눈부시게 꾸미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풍성하고 편리하게 하며 때로 번거롭게도 난감하게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것은 이 모두가 땅을 딛고 피어나고 그 위에 얹혀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 홍은동 대종교 총본사
대종교를 위시한 민족종교들의 얼과 몸은 우리의 건물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이요 집밑자리와 같다. 아니 마당이요 집터, 울안터와 같다. 그리고 더 깊숙이는 우리의 지반을 떠받치는 샤마니즘의 암반이 있다.
비록 전망 좋은 고층 아파트에서 이 땅의 고마움과 중요성을 잠시 잊고 공중에 걸려 산다고 할지라도 만약 이들이 꺼지고 없다면 우리는 그대로 허물어져 시도 때도 없이 거적데기를 말아 지고 떠돌아야 하는 정신의 유랑민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송곳 꽂을 자리도 없이 모질게 죄다 발라 버리지 말고 자투리라도 흙땅을 남겨 두자. 편리와 이재도 좋다마는 이제는 웬만하면 터 넓고 마당 밝은 집에서 부처님 예수님을 비롯한 동서양 성현들의 맑은 바람 쏘이며 손수 호미 들고 뜰을 가꾸는 나날도 그려 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