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같은 학자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라고도 하며 일명 사코(酒勾)본이라고도 함. 이 탁본은 현재 도교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육군참모본부는 1882년 이미 임나고[任那考]를 편찬하면서 고대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이미 조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코가 가져온 태왕비 탁본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육군참모본부는 태왕비 탁본에 의거 일본서기의 허구성이 밝혀지자 태왕비를 비밀리에 조작하기 시작했다.
참모본부는 5년 간 비밀스럽게 태왕비 여러 곳을 3차례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조작 작업을 마친다. 참모본부는 1889년 국수주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5집에 태왕비 해독의 중심 인물인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및 ‘비문지유래기(碑文之由來記)’ 등을 통해 내용을 공개했다.
공개된 내용 중에서 오늘날까지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제1면 8행째부터 9행에 걸친 신묘년(辛卯年) 기사이다. 즉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이라는 내용이다. 참보본부와 요코이는 이 기록을 ‘………신묘년에 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임나,신라를 격파하여 속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은 고대일본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 간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고 조작된 일본서기에 나타나 있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의 결정적인 또 하나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본열도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라는 자는 '이 비문에 의해 일본이 조선남부를 지배했음이 확실해졌다며 광개토태왕비를 일본에 가져와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일제는 조작한 태왕비를 영원히 역사를 조작하기 위하여 러일전쟁 후 일본 도쿄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907년 5월 압록강변에 군함을 배치시키고 오자와(小澤德平) 육군대좌를 만주로 파견 지안현(集安縣) 지사 우광궈(吳光國)와 협상을 벌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때부터 태왕비는 칠지도. 일본서기와 더불어 삼각편대를 이루어 임나일본설을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제는 왜가 고구려에 패함으로써 대륙 진출에 실패한 교훈을 삼아 한반도 강점을 위하여 더욱 분발하도록 독려했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 비(碑)을 현지 답사한 단재 신채호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만주인 영자평(英子平)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비가 오랫동안 풀숲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榮禧)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빼앗은 글자는 중국인들이 모두 도부(刀斧)로 쪼아 내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적(眞的)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이 첨가된 것 같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이 조작했음을 최초로 암시하고 있다.
조작된 역사는 진리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자 태왕비에 대한 재해석과 조작된 사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비에 대한 재해석 불을 지핀 것은 1955년 정인보(鄭寅普)의 논문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다. 그리고 1966년 북한의 박시형(朴時亨)의 <광개토왕릉비>, 김석형(金錫亨)의 <초기 조일관계연구>가 뒤를 이었다.
이들은 이 논문에서 來와 渡海 사이를 끊어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고, 이에 대항해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넜다"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이 비가 광개토태왕의 훈적비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태왕을 주체로 삼아 해석한 것으로 도해의 주어는 왜가 아니라 고구려라는 주장이다. 또 破와 百殘 사이를 끊어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고 해석했다. 그 아래는 백제를 주어로 삼아 왜와 통했던 백제가 신라를 토벌했다고 해석했다.
어쨌던 그 동안 임나일본부설을 굳게 믿고 있던 일본역사계와 동아시아 역사 전반에 걸쳐 핵폭탄 투하와 같은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4월 22일 일본 요미우리신문 사회면은 ‘광개토왕의 비문 바뀌치기?:육군참모본부가 위조하여 가져오다(廣開土王の碑文すりかえ?: 僞造して陸軍持ち歸る)’라는 헤드라인으로 광개토태왕비문이 조작되었다는 재일사학자 이진희(李進熙)씨의 <광개토왕릉비의 수수께끼>라는 연구 논문이 실렸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영혼이 조작된 일본역사에 의거 살인과 피로 물들게 했던 또 하나의 증거로 제시됐던 것이다. 인류역사상 용서할 수 없는 일본의 죄상이 세상에 밝혀진 것이다.
재일사학자 이진희씨가 비문조작설을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사코가 가져온 최초의 탁본은 선명하지만 그 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탁본들은 선명하지 않아 해독하기 어렵다. 1900년경 이후에 뜬 탁본은 다시 읽기 쉽게 선명하다.
2. 1913년 실시됐던 첫 학술 조사 결과 비석에 석회가 마구 칠해져 석회가면(石灰假面)을 둘러쓴 듯한 상태였다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보고에 착안해서 볼 때 사코의 탁본은 석회를 바른 뒤에 탁본을 떴기 때문이고, 그 후의 탁본은 석회가 벗겨져 떨어졌기 때문에 선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석회를 발라 선명한 탁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3. 1905년 최초로 민간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실물을 조사하기 이전까지 현장을 조사했던 일본인들은 모두 군 관계자였다는 점.
4. 사코의 위조가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군은 석회 도포 작전을 벌인 것이라 추측했다.
5. 그리고 이진희씨는 일본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편년체(編年體)로 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가. 비문이 재발견된 것은 통설과는 달리 1880년이며 비문에 붙은 이물질은 1882년 9월에서 12월 사이 소거작업에 의해 비면이 노출되었지만 표면이 벗겨지고 떨어져나가 비문이 선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 최초에는 일본 밀정 사코 가케노부가 쌍구가묵본을 만들고 1887년 처음으로 탁본(拓本)이 작성되었다.
다. 탁본된 원석탁본(原石拓本)이라는 수곡(水谷)탁본에는 ‘도해파’라는 글자가 없다. 1900년경 비 전면에 석회가 칠해져 쌍구본을 보강하여 비문이 재현되었다.
라. 석회를 칠한 직후의 탁본은 북경의 금석학자 양수경(揚守敬)本과 나이토(內藤)本이다. 사코가 가지고 온 것 이후에 만들어진 탁본들의 글씨체가 각각 일정하지 않다.
마. 1907년 4월 프랑스 동양학자 샤반느(Eduard Chavannes)가 봉천에서 입수한 탁본은 비문의 일부가 수정되거나 새로이 추가되어 탁본된 1905년 이전 작성된 탁본이다.(샤반느 탁본에는 양수경 탁본에 없는 "安羅人戍兵" 뒤에 나오는 "滿"자가 추가된다)
바. 이는 일본참모본부는 3차례에 걸쳐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고, 1930년 후반에 들어 석회가 벗겨져 떨어지기 시작하자, 신묘년조의 래도해파(來渡海破)의 해(海)가 다른 글자로 변하는 등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진희씨의 태왕비 조작설 주장은 동아시아 학계에 그야말로 메가톤급 핵폭풍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주장은 석회를 칠한 것은 자획이 선명한 탁본을 만들기 위한 탁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물에 보존 처리를 위한 조치도 아닌 왜의 활동을 조작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대한 중대한 범죄 행위다.
일제가 석회 도부를 했다 안 했다에 대한 진위여부를 떠나 석회를 바르고 나서 작성된 것으로 의심되는 탁본에 의거 이뤄졌던 연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하여 동아시아 역사 학계에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가 거세게 진행되었다.
단국대학 윤내현교수는 사코본과 이후에 발견된 탁본을 비교했다. 신묘년조 첫 글자 왜는 원래 後자이고, ‘래도해’는 ‘不貢因’ 이였으며, 지워진 부분의 글자는 왜구신(倭寇新)이라고 했다. 해석을 하면 ‘그 후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이자 서예가인 김병기는 글씨체를 통하여 조작 행위를 밝히고 있다. 그는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라는 저서를 통해 ‘渡海破’의 글씨체가 태왕비에 나오는 또 다른 ‘渡’, ‘海’, ‘破’의 글씨체와 다르다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의 글씨체는 기본적으로 정사각형꼴의 예서체이다. 그러나 문제의 세 글자는 획의 선과 위치, 글자의 기울기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渡海破’의 세 글자를 비문의 다른 글자들과 중첩시켜 비교한 결과 원래 ‘入貢于(입공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럴 경우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줄곧 조공해 왔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백제와 ○○와 신라에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일본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한편 이진희씨의 주장에 이어 일본에서는 1972년 일본학자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참모본부의 밀정이었다고 방위청 자료를 통하여 폭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사 연구의 대가인 하타다 타카시(旗田巍) 동경都立大 명예교수는 1972년 6월 3일자 요미우리신문에 ‘위조의 사상적 의미’라는 글을 통해 광개토태왕비문에 관한 사상사적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1974년 10월 <古代朝鮮と日本> ‘광개토왕릉 비문의 여러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쟁의 상황을 보면 새로운 불안이 일어난다. 원래 광개토태왕릉의 비문 문제는 고대 조.일 관계사에 대한 일본 학회의 전통적인 시각.조선 침략을 긍정.지지한 일본 근대 사학의 체질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진희씨는 일본 근대 사학의 체질을 비판하면서 광개토태왕릉비의 변조 문제를 추긍하였다. 그런데 이진희씨에 대한 반론에는 그런 기본 문제에 대한 배려가 없다. 다만 변조의 유무에 한해 반대를 외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쌍구본. 탁본.석문.사진 등의 편년 체계야말로 문제의 초점이다. 이것은 누구든 인정하는 것이고, 이진희씨의 연구가 가장 높이 평가받는 점이기도 하다. 비판하는 측은 그런 점에 대한 추궁에 소홀했다고 생각한다. 편년체계의 타당성, 더욱이 편년체계와 사코가 바꿔치기 했다는 주장간의 논리적 관련성에 관해 더욱 깊이 파고들어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에마 마사아키는 <대왕의 세기(大王の世記) 1973.12월>에서 “ 3,4세기 ‘임나’가 일본의 속령이 되어 거기에 ‘일본부’를 두고, 군사 및 외교상의 총독부가 있었다는 이제까지의 많은 견해 또한 반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일본인 연구자에 의한 비문의 해석에서 왜를 논증없이 야마토조정(大和朝廷)으로 간주하고, 이 비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가 확실히 존재했다고 해석하는 것 또한 지나친 해석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나오키 코지로(直木孝次郞) 大阪市立대학교수는 1974년 1월 21일 요미우리신문 ‘호태왕비의 수수께끼(好太王碑の謎)’에 대한 서평을 통해 “사코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과 참모본부가 석회를 칠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도 이렇게 지적했다. “의문을 품을 여지가 있는 각종 탁본의 검토를 게을리 해온 일본학회에 대한 이진희씨의 비판은 창피하지만 솔직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의식 저변에 이진희씨가 말하는 왜곡된 조선관이 조금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조.일 관계사는 많이 잘못되었고, 기기(記紀)비판이 불충분하게 끝났다는 이진희씨의 지적은 올바르다. 일본고대사에는 근본적으로 다시 고쳐 써야 할 부분이 있다. 나는 이런 오류가 일본인이 지닌 역사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 學習院大學 교수는 <역사와 지리(歷史と地理) 1973.12월>에 기고한 ‘호태왕비를 둘러싸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진희씨도 말한 바와 같이 일본측에 의해 석회가 발라져 새롭게 비석 문자가 새겨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비석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조선.중국.일본 등 적어도 3국 학자들에 의한 국제적 학술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淸) 京都大學 명예교수는 1974년 3월 ‘현대의 눈(現大の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고대사학자는 거의 모두 당신의 위조설을 비난하고, 그렇게 위조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이데올로기적 예단을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 무리하게 추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논자도 참모본부의 군사 밀정이 비문을 일본에 가지고 온 것, 참모본부에 의해 해독이 극비리에 이루어진 것, 그리고 그것이 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다는 것, 또 지금 일본에 있는 많은 종류의 탁본과 가묵본이 원래의 비문이 아니라는 것, 이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탁본들이 원래의 비문과 다른 것을 탁공의 실수라고 추론합니다. 물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간접적인 상황 증거도 없습니다. 단지 참모본부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든가, 일개 군인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없다고 독단적으로 말할 뿐, 당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습니다.”(삼인출판사 ‘해협’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