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의 체육관에서 인터뷰가 있다고 하자 복싱 담당기자가 말했다. “괴로울 텐데.” 그의 경험으로는 복싱 연습장이 가장 힘든 인터뷰 장소다. 우선은 온도. 체중 조절을 해야 하는 선수들 때문에 체육관 안은 찜질방만큼 후텁지근하다. 찜질방처럼 임의로 온도와 습도를 높인 것은 아니고 선수들의 땀과 체온으로 인한 것이니 당연히 쾌적하지 않다. 둘째는 냄새. 실내 온도가 떨어지면 선수들이 땀을 못 낼까 봐 환기를 잘 안 시키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땀 냄새가, 그것도 오래 두고 삭힌 듯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홍수환 체육관을 찾아 서울 대치동 골목을 빙빙 돌았다. 찾기가 힘들었던 이유는 오히려 체육관 같지 않은 외양 때문이었다. 카페처럼 통 유리로 된 창을 통해 체육관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마루는 반질거리고 깨끗했으며 링 바닥도 말끔하게 닦여 있었다. 운동 기구들은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다. 벽에는 1970년대에 찍은 듯한 복싱 관련 사진들이 액자에 걸려 있었고 공기는 쾌적했다. 복싱 대중화에 힘쓰겠다며 다시 글러브를 끼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홍수환의 바람이 잘 정리된 체육관 구석구석에 반듯하게 함께 놓여 있는 듯했다. 체육관 한쪽 구석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는 홍수환의 한 달 스케줄이 적혀 있었다. 원주, 마산 등 전국 각지 도시 이름이 3, 4일 간격으로 적혀 있었다. 강연 일정이었다.
홍수환은 전국을 돌며 4번 넘어졌다 5번째 일어나 승리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 아직 넘어지지도 않았는데 절망하려는 사람들을 일으키기 위해 그는 빡빡한 강연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용기를 내고 이겨 보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많은 분들이 나를 기억하는 것도 끈질기게 버티고 일어났던 그 모습 때문이 아닌가. 회사 초청 강연을 많이 한다. 신입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에서는 ‘우리나라에 저런 복싱 선수도 있었나’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친구들도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른 거지.” 그는 강연에서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굴곡진 그의 인생 이야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마음을 다잡을 힘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머리가 지끈거리던 고민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풀어 주는 힘으로 작용한다.
홍수환은 195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4남3녀 가운데 둘째 아들, 전체 순서로는 넷째였다. 장난꾸러기였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골목 대장을 도맡아 했지만 그렇다고 주먹이 뛰어나게 세지는 않았다. 복싱에는 관심이 없었다. 야구를 좋아해 동네에 야구 팀을 만들기도 했다. 복싱은 아버지가 좋아했다. 대학생이던 큰형 대신 어린 홍수환을 자주 복싱 경기장에 데려 갔다. 홍수환이 중학교 2학년이던 해,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홍수환에게 큰 충격이었다. 동네에 붙어 있는 복싱 경기 포스터만 봐도 아버지가 생각났다. 홍수환은 아버지가 좋아했던 복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살에 본격적으로 복싱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반대하셨을 거다. 나도 물론 별다른 계기가 없었으면 공부나 계속했지 복싱 선수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을 테고. 어머니에게는 공부를 잘하면 복싱도 남들보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근데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가 않았다. 학생선수권대회에 나가서 지고 아마추어 대회 나가서도 지고. 선생님이 프로로 나가라고 했는데 데뷔전에서 비기고. 어머니가 어느 날 ‘수환아, 한 번은 이기고 그만 둬라’고 하시더군.”
그가 온 국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World Boxing Association)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을 꺾고 세계 정상에 서면서부터다. “아놀드 테일러라는 선수에게 초청을 받은 경기였어. 내가 당시에 세계 랭킹 2위였는데 그쪽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세계 랭킹 2위에 오른 선수가 있다니까 허울만 좋은 2위라고 생각했나 봐. 1차 방어전은 쉽게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날 부른 모양이었어.”
해외에 나가는 게 쉽지 않았던 시절인 데다 홍수환은 일등병으로 군 복무 중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복싱을 좋아했기 때문에 홍수환은 관계 기관의 허락을 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갈 수 있었다. 경기가 열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까지 바로 가는 항공편이 없어 서울, 도쿄, 홍콩, 스리랑카, 세일추일스, 요하네스버그를 거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6번이나 갈아 탔다. 긴 비행에 지쳐 더반에 도착했을 때는 이겨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테일러를 이기고 세계 챔피언이 될 거라는 확신 같은 건 없었어. 그런데 세계 챔피언이 돼 돈 벌 욕심은 있었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미군 부대 식당에서 일하면서 고생하니까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려야겠다’라는 생각도 있었고. 지금 그때 경기를 한 동영상을 보면 정말 헝그리 정신 같은 게 주먹에 있더라고.”
당시에는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길이 전혀 없었다. 키가 큰지 작은지, 어떤 식으로 주먹을 쓰는지도 몰랐다.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공 소리가 울리면 링에 올라 때리고 라운드를 더해가면서 조금씩 상대 선수를 파악하는 식이었다. 이런 형편이었으니 극복하고 이겨야 하는 상대는 상대 선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홍수환은 경기 전 아놀드 테일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세계 챔피언이 된 아놀드 테일러가 트레이너를 바꾸면서 사이가 틀어진 전 트레이너가 홍수환을 찾아왔다. 그는 홍수환에게 계속 움직이라고 말했다. 아놀드 테일러가 스트레이트를 갑자기 뻗어 치니까 그래야 한다고. “그 말을 듣고 신나서 한국에서 같이 온 김준호 선생님에게 고급 정보를 얻었다고 얘기했어. 다 이긴 경기라고. 선생님이 무슨 정보를 얻었냐 길래 테일러의 전 트레이너가 찾아와 계속 움직이라고 했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인마, 계속 움직이는데 왜 맞냐’며 화를 내시더라고.”
홍수환은 1회부터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으로 전략을 짰다. 뚝심 있게 뻗은 주먹에 아놀드 테일러가 넘어갔다. 1회, 5회, 14회, 15회 4번이나. 그리고 홍수환은 승리했다. 15회를 마치고 이겼다는 것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홍수환의 귀에 중계방송용 이어폰이 끼워졌다. 이어폰에서는 “수환아”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승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홍수환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말했다. 홍수환이 이기고 3시간쯤 뒤 국내에 홍수환의 경기가 중계됐다. 아침 6시 무렵 버스를 타고 출근과 등교를 하던 이들에게 경기 중계는 물론 홍수환과 그의 어머니가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통쾌한 경기 결과만큼 모자의 대화도 시원했다. 챔피언이 됐다는 홍수환의 말에 어머니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답했다. 이른 아침 아직 잠에 취해 있던 이들을 깨우는 목소리였다.
그의 강연을 듣는 이들이 가장 흥미로워 하는 이야기는 1977년 파나마에서 벌어진 WBA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매치에 관한 것이다. 그 경기는 홍수환이 절치부심하고 나선 경기였다. 그의 복싱 인생에서 최대 적수인 알폰소 자모라에게 연이어 두 번이나 진 후였기 때문이다.홍수환이 1974년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자 자모라가 거액의 대전료를 제시하며 도전했다. 홍수환은 생애 첫 타이틀을 가진 지 1년도 채 되지 못해 타이틀을 빼앗기고 만다.
울화통이 터진 홍수환은 제대한 뒤 훈련에 매진하며 리턴매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타이틀매치에서 KO로 처참하게 진 탓인지 홍수환의 후원자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홍수환은 자비를 들여서 1976년 자모라를 인천의 선인체육관으로 불러들였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돼 주지 않았다. 결과는 판정패였다. 연이은 패배로 홍수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니어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리고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 정상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홍수환의 상대인 파나마의 헥토르 카라스키야는 11전 11KO승의 무시무시한 전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강한 주먹의 소유자였다. 1라운드를 근근이 버틴 홍수환은 2라운드에서 카라스키야에게 연이어 맞으며 4번을 쓰러졌다. “4번쯤 다운 당하고 나면 꿈꾸는 거 같이 멍하고. 링 줄이 막 움직이고 링 바닥이 쓱 나한테 올라오고. 그런데 그때는 뭐라 그럴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한 방은 날려야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경기장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카라스키야가 홍수환을 꺾으면 파나마는 동시에 4명의 선수를 세계 챔피언으로 보유하는 상황이었다. 총기 소유가 가능한 나라였기 때문에 관중들은 총을 천장에 쏴 대며 기뻐했다.
3라운드의 공이 울렸다. 승패보다 홍수환의 상태가 염려가 된 트레이너는 피투성이가 된 홍수환에게 1라운드만 더 뛴다는 마음으로 경기를 하라고 지시했다.
“선생님한테 욕 먹었지. 왜 그렇게 기다리냐고. 그냥 1라운드만 더 뛰고 말라고. 선생님은 마음이 아픈 거지. 만약 내가 가르친 녀석이 링 위에서 쥐어 터지다 4번 쓰러졌으면 난 그냥 타월 던졌을 거야. 근데 선생님은 내가 이길 수 있다는 걸 믿었고 나도 ‘에라 모르겠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편치를 휘둘렀는데 그게 제대로 맞은 거지.”
카라스키야는 홍수환의 원투 스트레이트를 맞고 흔들렸다. 기회를 잡은 홍수환은 휘청거리는 카라스키야를 쫓아가 짧은 라이트 어퍼컷으로 카라스키야의 턱을 들어올렸다. 2라운드까지 펄펄 날던 카라스키야는 홍수환의 강한 펀치에 충격을 받고 넋을 잃은 듯 로프를 등진 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기세가 오른 홍수환은 강력한 왼손 보디블로를 터뜨렸고 카라스키야는 한두 발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경기 상황이 순식간에 180도 역전됐지. 파나마는 경사 날 줄 알았는데 초상난 거고, 우리나라는 초상난 줄 알았는데 경사 난 거고. 파나마에는 내가 찬물도 보통 찬물을 끼얹은 게 아니지.”
4전5기의 신화를 쓰며 금의환향했지만 이후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로 홍수환은 이겨도 져도 팬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결국 1978년 리카르도 카르도나와의 타이틀 2차 방어전이 실패로 끝나자마자 한국권투위원회는 징계포상위원회를 열어 홍수환에게 2년 동안의 출전정지 징계를 내렸다. 그리고 홍수환은 1980년 은퇴했다. 그의 나이 딱 서른이었다. 홍수환은 링에서 내려와 제2의 삶을 준비했지만 그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수환은 미국 알래스카로 이민을 가 택시 운전을 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마약 운반책으로 누명을 쓰기도 했다. 다른 장사를 하면 좀 나을까 싶어 로스앤젤레스로 가 신발 장사를 하기도 했다. 달변의 홍수환이 인터뷰 도중 딱 한번 주춤했는데 미국 생활을 이야기 할 때였다. “인생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진정한 챔피언인 것 같아.” 10여 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홍수환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말이 좋아 귀향이지 생업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니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았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 그러나 돌아간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참 좋아하셨어. 그것만으로도 결정에 큰 힘이 됐고.”
홍수환은 귀국한 뒤 방송 해설과 강사 그리고 지도자로서 다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복싱을 할 때 나보다 키가 작은 선수들이 참 어려웠어. 나와 비슷하거나 큰 선수는 괜찮았는데 나보다 키가 작고 팔이 짧은 선수들은 힘들었지. 카라스키야도 나보다 키가 컸고 테일러도 키가 컸고. 자모라는 나보다 키가 작았거든. 복싱 선수들에겐 임자가 있어. 꼬리 없는 악어 본 적이 있나? 그게 수달한테 진 거야. 수달이 악어의 힘을 다 빼놓고 악어의 꼬리를 잘라 먹는다잖아. 임자는 다 있어. 그래서 복싱이 재미있는 거지.”
그리고 덧붙여서 그는 복싱이 인생을 닮아서 재미있다고 했다. 질 것 같은 상대에게 이기고 이길 것 같은 상대 앞에서는 무너지기도 하는. 늘 이기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항상 지라는 법도 없다. 진 경기를 하고 주저앉아 있다면 앞으로 이길 경기를 위해 다시 일어서면 된다. 그의 이야기에 녹아 있는 크고 작은 펀치와 잽들이 지쳐 있는 이들을 자극하는 힘이 되기를 홍수환은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