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어령 교수였어. 아직 이십대의 천재 선생이 칠판에 두보의 시를 써 놓고 해설을 하는데 황홀했었지.”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그는 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되고 대한민국의 지성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돌아가신지 거의 일년이 됐다. 말하던 그 선배가 덧붙였다.
“그 양반은 낮았던 대한민국의 정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거야.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나라마다 민족의 나침반이 된 천재들이 있다.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 무렵 일본의 방향을 서구화와 민족주의로 잡고 교육에 헌신했었다.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인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고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남겼었다.
이어령 교수도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어령 교수가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할 무렵의 짧은 소감을 담은 시사잡지를 보고 메모를 해 둔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면 빨리 줄기에서 떨어져야 하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물러앉아야 해요. 새잎들이 돋는데 혼자만 남아 있는 건 삶이 아니죠. 갈 때 가지 않고 젊은 잎들 사이에 누렇게 말라 죽어있는 쭉정이를 보세요.”
그는 아직 윤기가 있을 때 가을바람을 타고 땅에 내려오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귀중한 철학이었다. 죽음에 적용해도 될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쩌다 화면에서 본 이어령 교수의 얼굴에 골깊은 주름이 생기고 병색이 돌았다.
어느날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그의 모습이 보이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병을 맞이했고 죽음 앞에서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자의 죽음은 많은 걸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가장 위대한 설교였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어령교수의 부인이 말하는 장면이 흘러나오는 걸 봤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거부했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안되는 데 항암치료를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남편은 남은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고 싶다고 했어요. 다른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남편은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남편은 컴퓨터로 글을 썼어요. 남편은 몽테뉴의 수상록처럼 날마다 일지를 썼어요. 그날그날 생각나는 걸 가장 자유로운 양식으로 쓴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손가락에 힘이 빠져 더블클릭이 안되는 거예요. 남편은 손글씨로 글을썼어요. 처음에는 글 사이에 그림도 그려놓고 했는데 점점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거예요. 그림도 없어지고 갈수록 글씨도 나빠졌어요. 건강이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거죠.”
그는 무너져 내리는 몸을 보고 어떻게 했을까.
그에 대해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걸으려고 애를 썼어요. 일어났다가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곤 했어요. 그러다 걸을 수 없게 된 걸 깨달았을 때 그렇게 펑펑 울더라구요. 그 머리가 좋던 남편이 기억이 깜빡깜빡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치매가 온다고 생각하고 또 펑펑 울었죠. 남편은 두 발로 서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중년의 미남이었던 그의 장관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위에 금가루라도 뿌린 양 번쩍거리는 느낌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녹이 슬고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순서인 죽음을 그는 어떻게 대면했을까.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은 보통사람보다 열배 스무배 예민한 예술가였어요. 죽음앞에 강인하지 않았어요. 고통과 죽음을 너무 민감하게 느꼈어요. 너무나 외롭고 두려운 심정을 자신의 글에 그대로 표현했죠. 남편은 노트에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라고 썼어요.
그 노트를 다 쓰고 ‘눈물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책을 내려고 했죠. 그런데 노트 스무장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갔어요.”
듣고 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물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못 찾은 거죠. 죽어봐야 알 것 같다고 썼어요.”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제목으로 정한 ‘눈물 한 방울’의 의미는 뭐라고 보시나요?”
“자기를 위한 눈물이 아니예요.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는 게 진정한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남편은 남긴 거예요.”
첫댓글 부인께서도 훌륭하십니다.배우자를 빛내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