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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히 12:1-3)
19세기 설교자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의 간증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850년1월6일 세찬 눈보라가 치는 주일이었습니다. 젊은 스펄전은 예배에 참석하고자 나섰지만, 세찬 눈보라와 많은 눈으로 마차를 움직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근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머리와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들어가니 교인이 10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그날 눈 때문에 오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이 오지 않자 그 교회 집사 한 사람이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초라한 옷차림에 얼굴은 창백해 보였습니다. 예배를 시작한 그 집사는 이사야서 45장22절을 읽었습니다. 사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이어 발음이 분명치 않았지만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듯 하였습니다.
“여러분, 간단한 말씀입니다. 주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바라보는데 무슨 힘이 듭니까? 손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는데 지식을 가져야 합니까? 무식한 자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라보는데 기간이 필요합니까? 나이가 많아야 바라 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린아이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매우 단순한 설교였지만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설교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여러분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피를 흘렸노라. 나를 보라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보라. 내가 무덤에 묻혔느니라. 나를 보라. 내가 부활하였노라. 나를 보라. 하늘로 올라가노라. 나를 보라.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있노라. 죄인들아!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으라.”
30여분 동안 그렇게 말씀을 외치던 집사님이 젊은 스펄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청년이여! 힘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 순간 성령님이 스펄전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죄인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스펄전은 예수께서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귀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는 스펄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붙잡혀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이것을 '바라봄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앞에 서는 그 날까지,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모든 무거운 것과 얽메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1절).
1절,"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마치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경주자와 같습니다. 수많은 관중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메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무거운 군화를 신고 두꺼운 옷을 입고 경기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근심과 염려, 걱정입니다. 이 감정들로 가득한 자는 하나님의 대사로서 사명의 길을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염려한다고 해서 자신의 키를 한 자라도 자라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걱정과 염려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내 영혼의 짐이 되고, 독이 됩니다. 사도바울도"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b)고 했습니다.
근심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신앙의 경주자인 우리는 인생의 염려를,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환난과 박해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또 신앙의 경주자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얽매이게 만듭니다. 성경은 죄를 품지 말고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는 중독성이 있어 매임을 당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둣가의 배를 보십시오. 묶여 있는 배는 아무리 노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죄에 매여 있으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죄악의 줄을 끊어 버려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기도의 응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듯 버려야 합니다. 미련을 갖지 말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 역시 완전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다윗같은 믿음의 조상들도 우리처럼 죄를 지었고, 넘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끊어 버렸습니다. 이렇듯 우리 역시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지금 내 신앙의 경주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전처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깊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아집입니까? 우리의 자존심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앞에 다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앞에 서려면 이렇게 우리를 거추장스럽게 하고 얽메이게 하는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거룩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 마음에 새길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b)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경주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경주하는 자는 인내가 능력입니다. 마음이 무거울 때도 참아야 합니다. 할 이야기 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 주예수께서 내게 맡긴 사명, 그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것입니다. 사람은 몰라줘도 주님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내할 때 인내가 연단을 만들어 냅니다. 연단이란 거룩한 믿음입니다.
신앙의 경주자인 우리에게 종종 불숙불숙 튀어나오는 육신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까지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의 주요 나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종종 도중에 '포기해 버릴까',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의욕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만사가 귀찮고, 열정이 사라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피곤하여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만약 힘들다고 포기해 버리면 신앙의 경주를 마칠 수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자가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모교 졸업식에 참석해 어린 학생들 앞에서 연설한 외침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학생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2절에서 우리 예수님도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히 12:2b).소망이 있는 반드시 인내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내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곤욕당해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에도 인내하셨습니다. 희롱을 당하고 발가벗김을 당하면서도, 짓밟힌 장미꽃처럼 채찍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예수님은 인내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경주를 중간에 포기하도록 유혹할 것입니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아니면 역경과 시련으로 인해 우리의 생각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하려고 공격합니다. 인간관계로 아픔을 겪게 하고 갈등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 때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끝까지 붙잡는 자가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부모의 영혼과 자식의 변화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고, 한계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결승점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 개입하실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2.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2절).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보고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주실 때에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시고 너희 후손이 이와 같이 많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그러나 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만 바라보면 한 때는 잘 나가는 것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부딛칩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부닥치면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12명 중에 10명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민수기 13장 31-33절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높은 성벽, 거대한 거인들이 사는 것을 자기들의 제한된 능력으로 보니까 자기들은 메뚜기 같았습니다.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환경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고 계산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계산을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어린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친구들은 자신의 주머니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먹고 싶은 것을 마구시켰습니다. 얼추 계산해 보아도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어린 학생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만 바라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내 대신 계산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애굽을 떠나 나오는데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 사면초가(四面楚歌)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불평하며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모세는 홍해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대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애굽의 병거와 군대들을 뛰어 넘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출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 대하여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나님 안에서 꿈과 환상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입으로 시인하면 우리 가슴 속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신약의 우리들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겨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마음속에 용서의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거룩하고 성령 충만의 꿈을 꾸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치료받고 건강하게 되는 꿈을 꾸게 됩니다.
또한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면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 꿈을 꾸게 되고,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면 사망과 음부를 극복하고 영생복락을 얻는 꿈을 마음속에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경주자는 나의 믿음의 시작이요, 내 믿음으로 온전히 완성케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바보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을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3절).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늘 돈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연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 즐길 곳이 없나 생각하고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좋은 신앙인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이유는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 하늘 보좌까지 내놓으시고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왕관을 버린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한 영국의 윈저공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 국왕에 즉위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의 이혼경험이 있는 미국 국적의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혼녀도 문제가 되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영국의 왕비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윈저공은 영국의 국왕 자리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런 사랑에도 사람들은 감동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런 세기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가장 낮고 천한 마굿간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죄없으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자기 몸을 찢으시고 물과 피를 쏟아주셨습니다. 그 고통의 십자가에서 절규하며 고통하지만 하나님도 외면하셨습니다.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으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에 다 이루셨다고 외치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내셨습니다. 3일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고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 보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어려운 일 당하기도 합니다.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말씀을 주의해서 다시 한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각하라”는 말은 “비교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고통을 당하거나 피곤하여 지쳐 쓰러질 때 예수님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과 낙심을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므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를 몹시 핍박하였습니다. 그 때 호테미아라는 예수 믿는 소녀가 끌려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은 아무 죄 없는 어린 소녀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그녀에게 친절히 대했습니다. 드디어 호테미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어린 소녀는 마지막 화형대 서서 자신에게 친절해 대해 주었던 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기뻐하세요. 제가 주님께 가면 당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게요. 아저씨는 구원받을 거예요. 기뻐하세요. 제게 잘해 주신 것 고마워요.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소녀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집행관은 그날 이후 3일간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화형을 당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에 계신 예수님만 생각하는 소녀의 담대한 모습에 감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항상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는 항상 자식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무엇을 해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생각 속에는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이 시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목표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는
1)모든 무거운 것과 얽메이기 쉬운 죄를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앞에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항상 어디에 있든지 에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태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3)예수를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무덤의 문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속에 예수로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런 때 어떻게 선택하고 결단하셧을까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서는 그날까지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