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5) 전통 상장례 (하)
십자가와 성경 든 복사단과 사제 뒤엔 성당 묘원으로 향하는 행상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상여’,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상주의 지위에 따라 상여 모양 달라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전통 상장례에 지관(地官)의 역할이 큰 것에 놀라워한다. 지관은 음양오행설의 풍수에 기반해 집터와 묘터를 정하거나 길흉을 평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시대부터 활동했고, 조선 왕조에서는 지관을 과거로 선발해 전문적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모든 계층에 풍수가 성행했으며 과거를 통해 선발 양성된 이를 지관이라 했고, 민간에서 생업을 겸하며 풍수를 보는 이를 지사(地師)라 구분했으나 일반적으로 지관이라 통칭했다. 풍수가·풍수·풍수장이는 지관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장례일을 잡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을 고려한다. 첫째는 친족 초대 의무다. 그들이 올 수 있는 날로 장례일을 잡아야 한다. 둘째는 지관이다. 지관이 먼저 묏자리를 정해야 날을 잡을 수 있다. (⋯) 유족이 부른 지관의 임무는 막중하다. 그는 패철 등을 활용해 묏자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선산을 소유하고 있다. 부유한 문중의 선산은 꽤 멀다. 보통 망인을 선산에 묻는 것이 관례지만 이때도 지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동의하든 다른 묏자리를 찾든 결정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이는 어려운 일이라 오래 걸릴수록 지관의 몸값이 치솟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4~325쪽)
지관이 정해준 장례일이 되면 여섯, 여덟, 열여섯 혹은 스물네 명의 상여꾼이 집 앞에서 붉고 푸른 색색의 종이로 상여(喪轝)를 장식하며 출상 채비를 한다. 고인을 장지까지 운구하는 도구인 상여는 크게 거(車)와 여(轝)로 나뉜다. 거는 바퀴를 달아서 이끄는 방식이고, 여는 어깨에 메는 방식이다. 거에는 말이 끄는 윤거(輪車)와 소가 끄는 상거(喪車)가 있다. 왕의 종친이나 사대부가 죽으면 주로 윤거를 사용했고, 장지가 멀어 상여꾼을 구할 수 없을 때 상거를 사용했다. 민가에서는 소여(小轝)만 상여로 사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고 인지하는 상여다.
상여는 상주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모양이 달랐다. 지위가 있는 이들은 상여를 다층화하고 그림과 각종 장식물을 빈자리가 없을 만큼 빼곡하게 붙이고 달아 꽃상여를 만들었다. 상여가 크고 화려할수록 유교적 효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상여에 십자가와 성경 구절을 새겼고, 불자들은 만(卍)자를 넣어 외부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알 수 있도록 표현하기도 했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행상’,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 황해도 청계리 출상 직전 상여 촬영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출상 직전 상여를 촬영했다. 건장한 10명의 상여꾼이 상여를 멨다. 상여 뒤에는 기품있는 상주와 상주 가족들, 일가친지들이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상여를 뒤따를 채비를 하고 있다. 상여는 소박하다.<사진 1>
“장례 행렬이 출발한다. 청홍색 종이 초롱이 선두에 서고, 향도 격인 상복 차림의 주례자가 지휘봉을 들고 우뚝 솟은 상여 앞에서 걸어간다. 상여는 휘장으로 둘렀다. 관은 그 아래 있다. 상여꾼들은 관대 아래 횡목에 매단 끈을 어깨에 걸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상엿소리의 리듬을 타면서 춤추듯 걷는 걸음이다. 때로는 숫제 춤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갈 길이 멀다. 요령잡이와 상여꾼들은 최대한 에둘러 먼 길을 잡는다. 장례 소요 시간으로 견적을 내기 때문이다. 장지가 너무 가까워 큰 벌이가 안 되겠다 싶으면 별짓을 다 해 시간을 끈다. 개울을 건널 때마다 상제들에게 돈을 요구한다. 힘들면 멈추고 돈을 주면 다시 간다. 장지까지 당일에 못 갈 때도 많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8쪽)
베버 총아빠스는 장례 행렬을 1911년 황해도 청계리<사진 2>와 1925년 함경남도 내평<사진 3>에서 촬영했다. 둘다 가톨릭 교우의 장례 행렬을 촬영했지만 1911년 청계리 사진은 우리 전통 풍속을 잘 보여주고, 1925년도 내평 사진은 당시 교회풍의 장례 행렬을 보여준다. ‘사진 2’는 상여가 양편 초가를 빠져나와 마을 어귀에 당도한 장면이다. 주민들이 마을 어귀까지 나와 떠나가는 상여를 지켜보며 고인을 위해 기도하고, 상주들과 문상객들을 위로한다. 상여 맨 앞에 올라탄 요령잡이가 종을 치며 구슬피 노래하며 앞길을 인도한다.
“노상에서 부르는 상엿소리는 실로 통절하다. ‘저승길이 힘들구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이 산 헐면 다시 오나?’ 요령잡이 둘이 요령을 흔들며 관 앞을 춤추듯 돌다가 이렇게 앞소리를 메기면, 다른 사람들이 뒷소리로 응답한다. ‘두 번 다시 아니 오네’. 다시 앞소리가 ‘바닷물 마르면 다시 오나?’라고 물으면 뒷소리는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두 번 다시 아니 오네.’ 이런 창의적 소리 메김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8쪽)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행상’, 유리건판, 1925년 함경남도 내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5년 내평 사진, 교회풍 장례 행렬 보여줘
‘사진 3’은 ‘사진 2’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 상여 맨 앞에는 십자가를 든 복사단 행렬이 자리한다. 성경을 든 복사가 뒤따르고 그 뒤에는 중백의에 영대를 두른 카누토 다베르나스 주임 신부가 걸어가고 있다. 주임 신부 뒤에 자리한 상여는 고인이 그리스도인임을 알리는 십자가 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상여가 내평본당 공동 묘원으로 들어섰음을 많은 나무 십자가 묘비가 알려준다. 상주들을 비롯한 행렬 참가자들이 무거운 침묵 속에 상여를 뒤따른다. 그리스도인이 죽음 앞에 오열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완전히 한몸이 되는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1)라고 기도한다.
하관(下棺)은 집안에 따라 관 채로 안치하는 경우도 있고, 탈관해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인의 머리를 북향, 발을 남향으로 반듯하게 안치한 후 흙으로 메우는 것은 어디든 같다. 지방에 따라 하관 역시 지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다. 지관은 하관 시간을 정하고 하관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할 띠를 미리 알려준다. 이 띠에 해당하는 사람이 만약 하관 장면을 보게 되면 살을 맞아 병을 얻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해서 하관을 마칠 때까지 뒤돌아 서 있게 한다.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하관’, 유리건판, 1925년 함경남도 내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는 ‘사진 3’의 하관 예식을 필름에 담았다.<사진 4> 상여에서 막 내려진 관에는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상여꾼들이 하관을 위해 광목 천을 감싸고 있다.
“벽을 친 묘혈에 하관이 진행되는 동안 인부들은 천천히 주위를 돌면서 땅을 밟아 다진다. 이때 지관이 다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방법을 꿰고 있다. 관은 정확하게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 지관은 끊임없이 납추로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면서 그 방향으로 관을 움직인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측정하여 수평을 잡는다. 마침내 지관이 작업을 끝낸다. 종이를 바른 나무판에는 망인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것을 관 위에 놓는다. 관을 묘혈 석벽 사이에 정중히 모시고 그 위를 각목으로 덮은 다음 흙을 붓는다. 묘혈이 완전히 메워지면 인부와 상여꾼들이 땅을 밟아 단단히 다진다. (⋯) 원무를 추면서 흙다지기를 오래 거듭하는 동안 어느덧 높고 견고한 봉분이 쌓인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30~331쪽)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6) 혜화문
백동수도원 숙소에서 손 내밀면 닿을 듯한 한양도성 ‘혜화문’ 성벽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혜화문’, 유리건판, 1911년,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일제 강점기 한양도성 성벽과 성문 훼손
한양도성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 1396년부터 쌓기 시작해 세종 임금이 1422년 중수했다. 처음에는 돌과 흙을 섞어 성을 쌓았으나 세종이 전부 돌로 개축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보수되고 또 새로 쌓아 시기와 지형에 따라 성벽 모양이 다양할 뿐 아니라 높이도 5~10m까지 차이가 난다.
한양은 8개 산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안쪽 동편에는 ‘낙산’으로 불리는 타락산이, 서편에는 인왕산이, 남편에는 ‘남산’으로 더 알려진 목멱산이, 북편에는 ‘북악산’이라고도 하는 백악산이 감싸고 있다. 그 바깥으로 동쪽에 용마산, 서쪽에 덕양산, 남쪽에 관악산, 북쪽에 북한산이 있다.
조선은 안쪽 4개 산의 능선을 따라 18.6㎞에 달하는 한양도성을 쌓았고, 성곽에 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숙정문(북대문) 사대문과 혜화문(동소문)·소의문(서소문)·광희문(남소문)·창의문(북소문) 사소문을 냈다.
안타깝게도 한양도성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훼손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를 두고 요시히토 황태자 방문을 이유로 숭례문 성벽 철거를 시작해 서대문·서소문 등 여러 성문을 허물었다. 첫 번째로 성벽 철거의 수모를 겪은 숭례문은 그나마 임진왜란 때 왜병이 이 문을 통해 한양을 입성했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2월 22일 서울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붉은 겨울 해가 수도원 동쪽 정원과 손 내밀면 닿을 듯한 성벽 위로 서서히 떠오르며 내가 묵은 집 위로 인사를 하더니,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을 건너 옮겨간다. 산들은 당당하게 반원을 그리며 발아래 수도를 감싸 안았다. 나는 한국에서의 첫 밤을 이 집에서 달게 보냈다. 멀리 서쪽으로 북한산이 구름 속에 솟아 있다. 성벽은 북한산을 감돌아 북으로 뻗었다가 다시 남으로 이어진 봉우리들을 따라간다. 돌밭은 산기슭에서 위쪽으로 힘겹게 펼쳐지고 작은 소나무 숲들은 민둥산을 내려온다. 잔가지 덤불들이 아침 햇살로 붉게 타오르며 이 사이를 가른다. 언 나뭇잎들이 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떨었다. 사이사이로 검은 초가집들이 겨울잠에 빠져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61쪽)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혜화문’, 유리건판, 1911년,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성 베네딕도회, 1909년 백동에 수도원 세워
베버 총아빠스가 수도원 숙소에서 손 내밀면 닿을 듯하다고 적은 성벽이 바로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 성벽이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교사와 기술자 등 고급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수도자들은 백동(현 혜화동성당과 가톨릭대 신학대학)에 수도원을 세웠다.
1396년 한양도성 축조 때 흥덕동 뒷산과 타락산 사이 고개에 세워진 혜화문은 한양의 북쪽 관문이다. 한양에서 혜화문을 빠져나와 미아리 고개를 지나 양주·포천을 거쳐 강원도와 함경도로 갔다. 이 문으로 동북 지역 사람들과 여진족이 주로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 이름 지어졌는데, 1483년 성종이 창경궁을 짓고 정문인 동문을 홍화문이라 불러 1511년 중종이 혼란을 막기 위해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혜화문 문루는 소실 152년 만인 1744년 영조의 명으로 재건됐다. 혜화문 문루는 안타깝게도 1928년 일본군에 의해 또 한 번 허물어졌다. 일제가 동소문 고개를 잘라 새 도로를 내면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 겸재 정선, ‘동소문’, 1754년께, 비단에 채색, 고려대 박물관 소장.
한국 여행 기간 겸재 화첩을 매입한 이유로 베버 총아빠스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겸재 정선은 한양 진경으로 말년에 문루가 없는 혜화문 전경을 그렸다. 높다란 능선을 따라 성 안쪽 왕솔이 우거진 타락산(낙산) 봉우리가 지금의 가톨릭대 신학대학과 혜화동 자리다. 곧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한국에 왔을 때 그가 묵었던 백동 수도원 자리다. 1794년 정조 21년 4월 「일성록」에는 타락산에 심은 소나무가 하백동(혜화동 남쪽) 뒷산에는 잘 뿌리가 내렸으나 상백동(혜화문 북쪽) 뒷산에는 역군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소나무를 심지 않고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다 던져둬 땅이 많이 비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겸재 그림의 혜화문 남면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지만 북면에는 별로 없다.
베버 총아빠스, 한양도성 성곽 길 산책 즐겨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혜화문을 주제로 세 장면의 사진을 남겼다. 하나는 한양도성 밖에서 혜화문을 찍은 사진이다.<사진 1> 사진은 주 전경으로 찍힌 동소문과 문루에 ‘혜화문’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현판, 담쟁이 덩굴로 휘감긴 성벽, 그 벽 아래 초가로 지은 가게를 담고 있다. 오른쪽 성벽 아래에는 가게 주인인 듯한 한복 입은 남성이 햇볕을 쬐고 있고, 그의 아들인 듯한 한 아이가 지루함을 달래듯 무심히 뛰놀고 있다.
또 다른 사진은 한양도성 안쪽에서 촬영한 혜화문이다.<사진 2> 혜화문으로 가는 길 양옆으로 초가들이 즐비하다. 이색적인 것은 초가들이 흙벽이 아니라 모두 돌벽이다. 산과 산을 이은 고갯길 성문이어서 그런지 제법 가파르다. 경기 동북부와 강원도·함경도로 가는 관문답게 왕래가 잦다. 장옷을 입은 여인뿐 아니라 인력거에 막 오르는 젊은 아낙, 등짐을 진 말을 끌고 가는 마부들과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지게꾼, 머리에 한가득 짐을 이고 있는 장년, 중국식 복장을 한 청년들, 혼자 무언가를 찾는 듯 땅바닥을 보고 있는 어린 소녀와 대문간에 걸터앉아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평화롭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혜화문과 성곽’, 유리건판, 1911년,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마지막 장면은 혜화문 성곽에서 촬영한 사진이다.<사진 3> ‘혜화문과 성곽’이란 제목의 이 사진은 아마도 베버 총아빠스가 혜화문 남면 성루에서 북면을 향해 촬영한 듯하다. 굽은 형태의 성곽 오른편이 혜화문 바깥쪽이고 그 반대편이 한양도성 안쪽이다. 일성록 기록과 겸재의 그림처럼 혜화문 주변으로 소나무가 제법 무성하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민둥산이다. 원경의 산세로 보아 북악산 줄기와 삼각산인듯하다.
문제는 혜화문 안쪽을 촬영한 <사진 2>를 보면 성벽까지 초가가 즐비한데 <사진 3>의 성곽 안쪽 부분은 초가 대신 수풀로 우거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제목과 달리 ‘혜화문과 성곽’을 촬영한 것이 아니다. 누가 이 사진의 제목을 달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북대문인 ‘숙정문’ 성루에서 촬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베버 총아빠스는 ‘숙정문’에 올라가 “고갯마루를 타고 앉아 좌우 능선으로 톱니 모양의 성벽을 뻗어 보낸다”라고 기록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88쪽)
베버 총아빠스는 혜화문을 중심으로 한양도성 성곽 길을 산책하는 걸 무척 좋아한 듯하다. “오후에 성벽 앞을 잠시 산책했다. 초가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그 뒤로 어두운 총안이 뚫린 오래된 화강암 성벽이 어른 키 높이로 지형을 따라 뻗어 있다. 무너진 성벽이 보수되어 시든 단풍나무의 불타는 갈색 사이로 푸르게 빛난다. (⋯) 뒤쪽 먼 언덕 위로 다시 성벽이 보였다. 성벽은 소나무 숲 너머 북쪽으로 계속 나타났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68쪽)
베버 총아빠스가 묵었던 백동수도원, 곧 가톨릭대 신학대학은 2018년 교황청이 승인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순례지다.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따라 이곳까지 순례해 보길 추천한다. 이 길에서 낙산 성곽 길을 만날 수 있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7) 북한산
1925년 홍수로 유실된 북한산 ‘산영루’ 마지막 모습 사진에 담아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크뤼거 독일 총영사와 함께 1911년 6월 5일 북한산 산행을 하다 잠시 쉬고 있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독일 총영사 크뤼거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6월 5일 독일 총영사 크뤼거 박사의 초청으로 북한산 산행을 했다. 크뤼거는 1907년 6월 6일 부임해 1914년 서울 주재 독일 영사관이 철수할 때까지 총영사로 활동했다. 그는 고종과 순종 황제 등 대한제국 고위층과 친분을 쌓으며 순종이 영사관 직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외교 업무보다 자국의 통상 이익을 챙기는 데만 앞장섰다.
그 단적인 예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6부에 나온다. 극 중 인물들이 고종의 중국 상해 덕화은행 예치금 증서를 찾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고종은 황실의 통치자금을 일본에 뺏길 것을 예상해 1903년 12월 2일 덕화은행 책임자 부제(J. Buse)를 비밀리에 불러들여 총 51만 8800마르크에 해당하는 16.3㎏ 금괴와 현금 21만 8500엔을 예치했다. 덕화은행은 고종의 통치자금을 독일 베를린에 있는 디스콘토 게젤샤프트 은행에 ‘대한제국 국고 유가증권’이라는 이름으로 거치했다.
이후 2년 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자 고종은 1907년 6월 15일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강제 침탈을 고발하고 국제 사회에 대한제국의 자주권 회복을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일제의 조선통감부는 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1907년 7월 20일 고종을 퇴위시켰다.
조선통감부는 고종이 어떻게 유럽까지 상당한 비용을 들여 특사를 보낼 수 있었는지 수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의 비밀 통치자금이 외국 은행에 숨겨져 있는 사실을 알아내고 부채 상환 명목으로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도 서둘러 예금 환수를 시행했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 주동자 중 한 명인 미국인 호머 헐버트에게 1909년 8월 예치금 서류와 함께 전액 인출 위임장을 써줘 돈을 찾게 했다. 헐버트는 곧장 상해 덕화은행에 찾아갔으나 이미 한발 늦었다. 덕화은행이 일본에 돈을 넘겨주고 일본의 나베시마 외무총장이 서명한 영수증만 남아있었다.
이토록 일제와 조선통감부가 고종의 비밀 통치자금을 발 빠르게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은 크뤼거 총영사 때문이었다. 크뤼거가 고종의 비밀 자금을 조선 통감부에 알려줘서다. 일제는 헐버트가 덕화은행을 찾아가기 1년 6개월 전에 이미 고종의 통치자금 전액을 찾아갔다. 조선을 사랑했던 베버 총아빠스는 크뤼거의 이러한 만행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촬영한 북한산 중성문. 북한산성 대서문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이중 방어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중성문 · 산영루 · 중흥사 거쳐 문수봉 오른 듯
어쨌든 베버 총아빠스는 카시아노 니바우어 신부 등과 함께 아침 7시 서울 정동의 독일 영사관저(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크뤼거 총영사를 만나 인력거를 타고 창의문을 빠져나와 북한산으로 향했다.<사진 1> 니바우어 신부는 한국에 첫 번째로 진출한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 중 한 명으로 빌렘 신부에게 우리말을 배워 문답식 우리말 교리서와 청소년 잡지를 출간하는 등 청소년 사목에 열의를 보인 사제였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크뤼거 총영사와 함께한 북한산 산행 구간은 기록에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기행문과 사진으로 보아 북한산성 중성문에서 산영루·행궁터·중흥사·대성문을 지나 문수봉에 올랐다가 대남문으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싶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大西門)’이 없기 때문이다. 베버 총아빠스의 북한산 산행 구간 또한 겸재 정선의 ‘노적봉’ 그림에서 만날 수 있다.
북한산은 부아악(負兒岳)·횡악(橫岳)·화악(華岳)·화산(華山)·삼각산(三角山)으로 불러왔다. 베버 총아빠스는 제일 먼저 북한산성 성벽을 만났다. 중성문(中城門)이다.<사진 2> 중성문은 북한산성 대서문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이중 방어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이 문 안쪽이 북한산성의 내성(內城)인 셈이다. “이 성벽은 북한산을 견고한 요새로 변신시켜, 유사시 성내 사람들의 피난처 구실을 했다. 협소한 지세와 비탈의 급경사 덕분에 산성이 읍성보다 방어와 안전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북한산의 험준한 뾰족바위 뒤편 산곡에 안전한 방어망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궁궐도 이곳에 지었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93쪽)
- <사진 3> 북한산 중흥사. 1915년 홍수로 유실됐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중흥사 사진은 유실 이전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4> 북한산 산영루. 이 사진 역시 1925년 홍수로 유실된 산영루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 하겠다. 유리건판, 1911년 북한산,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구간별 안내판에 베버 총아빠스 사진 소개
중성문을 통과해 26기의 북한산성 선정비를 지나면 중흥사(重興寺)가 나온다.<사진 3> 북한산성의 모든 길은 중흥사로 통했다고 한다. 겸재가 그린 노적봉 바로 아래에 있는 절이 중흥사다. 지금은 1915년 홍수로 유실돼 그 터만 남아있고 그 옆에 새로 지은 사찰이 있지만,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다행히 고려 말 때 중수한 유서 깊은 중흥사를 볼 수 있었다. 중흥사 앞에는 무기와 식량을 관리하던 중창(中倉)이 있었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중흥사 계곡 산영루(山映樓)에서 잠시 머물렀다.<사진 4>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지은 산영루에서 계곡 물에 비치는 북한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베버 총아빠스가 사진에 담은 산영루는 1925년 홍수 때 유실됐다.(경기도 기념물 223호. 2015년 고양시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복원) “골짜기의 솟은 바위가 멋진 풍광을 연출했다. 그런 곳이면 꼭 기와로 지붕을 이은 정자가 있었다. 크뤼거 박사는 그중 한 곳을 택해 정성껏 음식을 차렸다. (···) 각지고 모난 북한산 봉우리들은 오를수록 험한 급경사의 암벽군을 형성했다. 풍우에 검어진 성벽이 산을 휘감고 부서진 성가퀴가 비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저 아래 누른 들판이 넘실거렸다. 들판 사이로 황톳빛 언덕이 두더지가 파낸 흙더미처럼 솟아올랐고, 나지막한 지평선에는 푸른 산안개가 아련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94~495쪽) 드디어 솔숲을 지나 문수봉에 올랐다. 해발 727m의 문수봉은 북한산 남쪽 중심 봉우리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대남문 가까이에 있는 문수봉에서 북한산의 모든 봉우리와 능선을 조망하고, 대남문을 통해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하산했다.
북한산에 가면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의 흔적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산행 구간별 안내판에는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진이 소개되고 있다. 혹 북한산 산행을 한다면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베버 총아빠스의 발자취를 느껴보길 바란다.
|
|

첫댓글 이 시절에 사진이 있어서 말로 전해오는것 보다 더 구체적인 사실을 보게 되네요
역사는 기록의 장 임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