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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의 감사의 영 안에서 삼위일체와의 깊은 일치
강사 : 에드워드 신부님(일본 선교사)
번역 : 김희일 신부님 (꼰벨뚜알 수도회)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는 기쁨을 맛들임]
이번 피정은 예수탄생 2000년을 축하하는 해에 가지게 되기에 특별한 은총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예수는 지금도 언제라도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더욱 강하게 깊이 체험하고 싶다. 이는 예수의 구원의 기쁨을 한사람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체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말한다. “마음을 돌려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30,15)
바오로는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로마 1,1),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 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로마 1,11) 라고 말한다. 피정의 효과는 우리의 겸허한 신뢰와 조용한 바램에서 나오게 된다. 리지에의 데레사는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정도에 따라 은총을 받는다.”
바오로는 인생의 목적을 확실히 지적한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로마 14,7). 이를 위해 우리는 안수에 의해 얻게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다시금 불살리도록 불리우고 있다. 이미 얻은 사랑과 힘과 사리분별의 성령을 새롭게 불살리도록(2디모 1,6-7).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사랑 가운데 볕을 쬔다.
“Abba, 아버지, 당신 앞에서 살아갈 때, 저는 당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세례 받은 예수께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도 들려주십시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야 43,4)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엽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고 너 시온의 성벽은 항상 나의 눈앞에 있다.”(이사야 49,15-16)
“두려워 말라...내가 분이 복받쳐 내 얼굴을 잠깐 너에게서 숨겼었지만, 이제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자비를 베풀리라...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이사야 54,4;8;10)
“그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낸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세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3)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곳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호세아 11,3-4)
“이제 나는 그를 꾀어 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아 2,16;22)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으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이사야 55,1-3)
“나의 외아들을 너에게 보낸 것 같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나의 뜻에 따라 너를 위하여 하찮은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당한 사형을 받을 때까지 순종의 생활을 하고, 너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피를 흘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너에게 아끼지 않고 매일 내어주고 있다.”
“그는 항상 너와 함께 있고, 너를 위해 중재해주고 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성령의 의해 너의 마음 가운데 나의 사랑을 부어준다.”(로마 5,5)
“그는 너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6,27;14,23)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라고 그 때의 기도를 끝없이 계속한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1요한 4,10;19.)
“눈으로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9.)
이러한 끝없는 사랑 안에 있는 우리는, 그 훌륭함에 감동 받고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까? 아버지와 예수께 짝사랑을 시키지 않도록!
나는 먼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것을 함부로 하거나, 충분히 감사하지 못한 것을 통회한다. 예수 앞에서 자신의 깊은 죄와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조용하게, 침묵가운데 아버지의 위대한 자비에 의지하며, 예수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을 부담 없이, 풍부하게 받고, 그리고 찬미/감사/사랑을 가지고 응답하도록 불리움 받고 있다. 나는 지금부터 더욱 신중하게 주의 사랑에 응답하고 싶다. 주는 나의 마음 밖에 서서 계속해서 두드리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끝없이 나에게 바쳐라.”(요한 묵시록 3,20). 이러한 주의 부르심에 대한 알맞은 응답은 매일의 회심이다. 매일 한층 더 예수께로 마음을 돌리며 매일을 보내는 일이다. 나는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를 한층 깊이하고, 강하게 하고 싶다. 나는 예수를 항상 기쁘게 해드릴 것을 결의한다. 마리아님, 그 결의를 실천 할 수 있도록 중재해 주소서.
묵상의 씨앗; 요한 15,1-19을 맛들이며,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 사랑에 응답하는 나의 매일의 기도/생활/행동/봉사를 바라시는 예수를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시편 139;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시편 136; “어지신 분, 야훼께 감사 노래 불러라.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아버지는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아버지는 성령을 부어주셨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아버지는 신앙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주는 나를 택해 친구라 불러주신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주는 당신의 사제직을 맡겨주신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주는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주는 나를 파견해 주신다. 그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쇄신의 기쁨을 맛들임]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모든 것이 새로워 질 수 있도록”(시편 104,3) 이라는 기도를 교황이 처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1979) 드리면서, “이 땅에, 이 나라에”라고 덧붙였다. 20년 후에 이 나라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는 세계가 잘 알고 있다. 사회와 교회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매우 나쁜 변화가 있다면, 훌륭한 변화도 있다. 그 훌륭한 변화를 쇄신이라고 부르고 싶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에 있어서 요한 23세는 “주님, 새로운 성령강림을 우리에게 주시어 당신의 훌륭한 업적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도록 권고했다. 이 공의회는 “교회가 보다 잘 현대인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쇄신(Aggiornamento)을 목표로 하였다.” 교회일치교령도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교회의 쇄신은 모두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소명에 대한 충실의 확대에 있다...이 쇄신은 성서운동/전례운동/하느님 말씀의 선교와 교리교육/신자의 사도직/수도생활의 새로운 형식/결혼의 영성/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활동을 통해 이미 행해지고 있다.”(6조)
그러나 이는 부족하고 성령은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움직여 주셨다.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2년이 채 되지 않은 1967년, 미국의 Duquesne대학의 몇 명의 학생과 교수들이 [성령의 충만]이라는 새로운 체험을 했다. 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로 퍼져갔다. 그러나 창립자도 없었기에, 이는 새로운 조직이나 단체를 발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 전체의 쇄신에 공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오로 6세는 이 성령에 의한 쇄신을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챤스”로써 승인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비슷한 말로 그 쇄신을 인정하고 있다.
Congar신부는 1936년에 이미 “교회는 성령강림의 계속이며 성령의 끝없는 파견의 표시이다”라고 단언했다(Revue Sc. Phil. Theol. 1936, p.766). 바티칸의 복음선교성성은 선교지에서 활약하는 사제들에게 보내는 사목지침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제에 있어서 서품은 성령강림의 끝없는 계속의 시작이다”(10조).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령을 “교회의 모든 사명의 주요한 주역이다”라고 부르며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다. “교회의 선교는 예수의 선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업적이다. 곧, 루가가 종종 말하듯이 성령의 활동이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사도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변화되는 강렬한 체험을 했다. 그것은 성령강림의 체험이다... 성령은 용감히 예수를 증거할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한다... 오늘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와 여러 선교사를 배출한 것과 같은 용기,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과 같은 마음씀을 가지도록 요청되어지고 있다(redemtoris Missio, nr.21, 24, 30).
Pentecost파는 [성령에 의한 세례]를 발명한 것은 아니다. 신약성서와 초대교회가 밝혀주듯, [성령에 의한 세례]는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입문에 포함되어 있다(Christian Initiation and Baptism in the Spirit, Kilian Mc Donnel and George Montague, Collegeville, 1991). 베드로는 신앙입문의 주요한 요소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 바오로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9;14). St. Serafim of Sarov(1759-1833)는 말했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인생의 목적은 성령을 모시는 것이다.” 복음선교지에서 활약하는 교구사제들에게 보낸 지침 가운데에서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사제에 있어서 서품은 성령강림의 끝없는 계속이다”(2조).
나는 프라도회 사제로서 이전부터 성령강림의 부속가를 바치고,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매번 바라며, 그 재촉에 따라 살아가려고 해왔다. 그러나, 성령에 의한 쇄신에 대해 경계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계속해서 거부할 것인가 라고 자문했다. 무슨 권한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움직임을 계속 거부하는가. 바로 그 무렵, Tardif신부가 일본을 방문해 피정을 지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1973년 초에,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성심전교회의 관구장이었으며, 성령에 의한 쇄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당시 신학교나 성당/선교촉진 센터/교리교육 센터 등의 건설을 위해 모금활동에 쫒기고 있어 기도할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과로의 결과 그는 급성 폐결핵으로 진단되어 1년간의 치료가 필요하게 되었다. 입원해서 얼마 있지 않아 몇 명의 신자가 그에게 병문안을 와서 기도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들이 그에게 안수하며 기도하자 그의 병은 몇일 안에 완전히 나아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입원해야할 1년간을 장상의 허락을 얻어 [성령에 의한 쇄신] 연구에 사용했다. 그 후 그는 세계를 돌며 자신이 받은 은총을 알리고 그 증거를 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지도자임을 알고 나는 자신의 의문을 그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의 피정에 참가했다. 그의 덕으로 여러 가지 것을 배우고 발견했다.
12명의 사도들은 예수께 불리워져 일/가족/고향을 버리고 3년간 예수와 함께 생활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자각한 예수를 따랐다.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의 훌륭한 치유를 보았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았다. 최후의 만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예수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고, 예수를 기념하여 그 예식을 거행할 권한을 받았다. 예수께 반해 죽을 각오로 따를 것을 그들은 약속했다. 그러나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그들은 도망가거나 선생을 부인했다. 부활의 밤에 예수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요한 20,22). 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제자들 안에서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성령이 보내어 졌지만 받아들이는 측의 여러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지지 못함이 지금도 자주 있다. 술에 취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예수를 배신한 죄를 인정하고, 몇번이고 예수를 만나고, 마리아와 함께 10일간 동안 기도할 필요가 있었다. 성령강림의 날에 제자들은 처음으로 성령의 사랑에 충만되어 당당히 예수의 위대한 업적을 찬미하며 예수를 증거했다. 교회가 탄생했다.
우리들은 세례/견진/성체성사/서품/화해의 성사를 받음으로 인해 아버지의 영/예수의 영/성령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부어져 있는 성령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Abba로 부르게 하고 싶어하고, 예수를 인생의 유일한 주님으로 인정하게 하고 싶도록 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하고 싶도록 하고, 술에 취한 인상을 줄 정도로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워 찬미하고 싶도록 하고, 당당히 예수를 증거하도록 하고 싶게 한다. 우리는 [성령의 궁전](1고린 6,19)이나, 성령이 우리를 자유롭게 사용하시지 못하게 하는 한 우리는 [성령의 형무소]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 하실 수 있도록 성령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을 석방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를 자신의 인생의 주님으로써 다시금 선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사정, 자신의 계획, 자신의 취미 등을 먼저 정하고 “주님 이것을 죽복해 주십시오”라고, 자신의 희망이 그대로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기도하려 한다.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루가 6,46) 라는 예수의 가련한 외침이 들려 온다. 예수를 자신의 인생의 주님으로써 선택하려는 이는, “주님,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라고 계속해서 묻는다. 그리고 떠오르는 일체의 희망이나 계획이 정말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가 계속해서 식별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기도의 효과를 믿고(마태 18,19-20) 친구들에게 기도를 의뢰한다.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13)는 약속을 신뢰하며 [성령의 충만]을 위한 기도를 청한다. 만약 그후 자신의 신앙생활에 전혀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성령의 석방을 방해하는 것이 남아 있는 증거이다. 그 방해라는 것은 예를 들어, 누구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라든지, 예수를 유일의 주님으로써 다시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관해 Chevrier신부는 말한다.
“하느님의 성령을 기도 안에서 청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참다운 바램을 가지고, 이에 충만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성령을 받을 수 없으며 하느님도 그것을 주실 수 없다(VD. 391). 그리고, 하느님의 성령을 받기 위하여 그는 말한다. ”성스러운 복음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기도함으로써 받을 수 있다. 먼저 복음을 읽고, 다시 읽고, 몸에 익히고, 공부하고, 암기하고, 각 말씀과 각 행동의 의미를 자신의 생각과 행동 가운데 살려야만 한다. 매일의 기도 안에서 그러한 공부를 하고 자신의 생활방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야만 한다. 로사리오를 바치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매일 성령의 빛을 찾아 드러내고, 점점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생활방식을 하게 된다“(VD. 171).
기도; “아아, 성령이시여, 사랑하는 분이시여, 나는 당신을 경배합니다. 저를 비추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소서. 제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성령으로의 충만의 기쁨을 맛보자]
우리들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아버지의 아들, 예수의 형제, 성령께서 머무시는 궁전, 교회라고 하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신품성사를 통해서, 예수의 참다운 제자가 되고, 증거자들을 양성하며, 신자 공동체를 확장시켜 나가도록 선택되었다. 우리들은 예수의 구원사업에 협력해주고, 악령을 쫒아내도록 불리워졌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온 것처럼 너희들을 보낸다.”(요한 17,18;20,21).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랑, 힘,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는 그 영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려고 항상 바라고 있다. 이미 성령을 받아들인 우리들도 아직은 충분히 성령에로 인도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성령의 사랑을 우리 안에 다시금 불살릴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바로「성령으로의 충만」을 기도 안에서 구하는 일이다.
1, 성령 충만의 체험은 교회역사 안에서 잘 알려져 있다.
때때로 그것은 제2의 회개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로서의 새로운 출발로 묘사되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의 30일 영신수련은 이러한 체험을 가능케 하고, 주님과의 더욱 더 친밀한 관계에로 우리를 인도한다. 쉐브리에(chevrier)신부는, 1856년의 크리스마스 저녁에, “더욱 더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예수를 더욱 더 충실히 따르고, 더욱 친밀해 질 것을 결의한다“고 약속했고, 이러한 체험은 자신의 일생을 방향지워주는 회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2. 세례, 견진, 서품은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의 충만」은 몇번이라도 받을 수 있다.
3. 이상의 성사는 보통은 부제/사제/주교에 의해 받게되지만, [성령의로의 충만]은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은총이다. “구하라 얻을 것이다.” 바로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이다.(루가 11,5-13).
4. 세례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ex opere operato). 물론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은총을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령으로의 충만」을 기도를 통해 얻는다 하더라도, 그 효과가 반듯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들의 열심한 협력을 필요로 한다(ex opere operantis). 기도를 통해 그 은총을 받은 후에,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충만을 실제로는 얻지 않았다고 판단 할 수 있다.
T. Aquinas에 의하면, 성령을 받고 파견되었을 때, “그 성령은 우리들을 완전히 혁신시키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 머무신다. 완덕에로의 현저한 진보나 은혜의 증가가 있는 곳에서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성령의 파견이 있다. 이러한 볼 수 없는 성령의 파견의 있음을 아는 것은, 은총이 사람들을 강화시키고, 어떠한 새로운 행동이나 은총의 상태로 인도 할 때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기적이나 예언의 은총을 받았을 때, 또는 하느님에로의 사랑에 불타 순교자처럼 생명을 바치거나, 모든 재산을 포기하거나, 또한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어려운 일에 도전하거나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ST, 1-9, 46 art.6). 이러한 것은 교회와 사회의 최선을 위해 주어지게 되는 카리스마이다.
또한 우리를 새롭게 하는 성령은, 보다 열심히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고, 예수의 음성을 따르는 기쁨, 죄의 사함, 회복의 기쁨, 성체를 받아 모시는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 아버지와 아드님과 우리의 유대를 더욱 친밀하게 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성령은 우리가 예수의 참다운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의 부족한 기도와, 연약한 생활 방식을 강하게 하도록 도와준다 (로마 8,26). 「교회 헌장」에 의하면, “성령은 성사와 교직을 통하여 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인도하시며, 여러 가지 덕행으로 꾸며주실 뿐 아니라, 교회의 쇄신과 보다 폭 넓은 건설을 위하여 유익한 여러 가지 활동과 직무를 맡기기에 적합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이러한 은사는 이례적인 것이건 혹은 보다 단순하고 일반적인 것이건 간에 모두 교회의 필요에 적합하고, 유익한 것이니 만큼 감사와 위안을 느끼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례적 특은은 경솔하게 청할 것도 아니고, 사도적 활동의 결실을 이런 특은에서 얻으리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다. 특은의 진실성과 온당한 행사에 관한 판단을 교회를 다스리는 분들에게 속하는 일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모든 것을 분간하여 좋은 것을 보존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nr. 12;1; 데살전 5, 12 ;19-21).
바오로는 1고린 12-14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성령의 활동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유일한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건설하기 위한 은사가 서로간에 이익을 위해 다투거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은사보다도 뛰어난 은총이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이 없다면 모든 은사는 껍데기에 불과 하다. 이것은 중요한 식별이 기준이 된다. 따라서 “사랑을 구하십시오” 또한 성령의 은사 특별히 예언의 다른 은사들을 살리기 위한 입구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바오로는 말한다.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는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이상한 언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 드립니다.”(1고린 14, 4 - 5 :18) .
우리들의 자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될게 걱정하는 자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좌우되는 자아, 바보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은 자아는 성령의 은사를 살려 가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우리들은 조용히 기도하는 이의 믿음을 보고 계시는 아버지의 눈길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생활 방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상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을 해방시키고, 성령에게로 인도되기 쉬운 이로 만들어 준다.
대성년인 요벨의 해에 사람들은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다. 그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은 이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유비루스”(환희의 외침)를 노래했겠는가. 예수는 요벨의 해를 알리기 위해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 죄의 용서 그 자체인 성령으로의 충만을 느낀 신자들이, 죄 많은 자신이 용서받고, 얼마나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가를 느끼고, 이 세상의 모든 말과 멜로디로 그 찬미를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된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냥 침묵할 것인가. 침묵도 때로는 훌륭한 찬미의 하나이다. 그러나, 침묵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시편 32편의 “환희의 외침으로 노래하다”를 주석한 Auqustinus의 설교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당신이 인간의 말로써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침묵 할 수 없다면, 그냥 환희의 외침을 노래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가능한가, 이 노래를 통해 너의 마음은 말을 떠나, 음절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환희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런 즉흥적인,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찬가를 노래하는 습관은 그리이스, 라틴 양 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그리고, 교부시대가 끝났어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9C 까지, 부활절의 알렐루야의 마지막 음절을 즉흥적인 멜로디로 부르는 것이 전례의 한 부분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 유비루스(환희의 외침)는 그후, 부속가로 대치되었다. ‘환희의 외침’으로 노래하는 습관은, 중세 후기의 교회사 안에서는 별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그에 관한 증언을 일관되게 전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곧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적인 기쁨의 표현으로서, 말에 의존하지 않는 즉흥적인 찬미가 개인적으로 행해졌던 증언이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체험을 알고, 그것을 “유비로‘라고 부르고 있다.』 바오로가 말하는 ‘이상한 언어’, “성령에 의한 찬가”는 이 유비로와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Sullivan을 말한다.
성령은 우리들의 마음을 끝없이 하늘의 아버지께로 향하게 해, Abba라고 친근하게 부르도록 합니다.(로마 8,15 : 마르 14, 36)
성령은 예수님을 사람들의 인생의 주인으로서, 끝없이 선택하도록 인도합니다. (1고린 12,3 : 로마 10,9)
성령은 고통받든 이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게 합니다.(루가 4,16 - 20)
성령은 찬미의 영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을 계속해서 찬미시키려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를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서 선택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