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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출 25:1-9)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분명 ‘살아 계시다’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보여보라고 할 때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하는 말은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니까 우리가 증명할 수 없다’라고 얼버무리고 말게 됩니다. 즉 신자 자신부터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그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고 있다면 그 증거를 무엇으로 내세울 수 있습니까? 증거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믿는 자에게 믿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시고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모습을 꿈에서 본다거나 어떤 큰 기적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가장 큰 증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십자가를 말합니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큰 능력과 기적의 표적을 구했는데 그것이 곧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모습임을 책망하시고서 표적은 오직 십자가가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십자가를 표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으로 바뀐 것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삶은 버리지 못합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기심이 있는 인간이 자기를 도외시하고 누군가 제 삼자를 위해서, 그것도 보이지도 않는 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이 남기신 말한마디를 가지고 자기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십자가를 알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나의 변화입니다. 나의 삶이 주님을 알기 전과 주님을 알고 난후 변화되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이러한 증거를 안고서 세상을 사는 신자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렇게 바뀌어질 수 없는 내가 변화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다. 살아계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다스리신다. 나를 봐라 내가 그 증거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자가 신자 아니겠습니까?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냐? 악한 사람들이 잘살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받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냐? 라고 반문을 합니다. 또 신자들 가운데도 열심히 신앙생활했다고 자부하고, 남들보다 부지런히 앞장서서 신앙생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믿음을 살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살고,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발생할 때 당장 쏟아지는 불평은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한 사람을 더 잘되게 해야지 왜 더 힘들게 하시느냐?‘ 이러한 원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결국 신자라고 하지만 불신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좋게 만드셔야 하고, 참된 신자를 잘살게 만드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뭔가 자기의 일이 잘되어야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우리의 육신을 편안하게 만드시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세상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손으로 불태워 버릴 곳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가득찬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봐야 또 다시 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기 좋은 세상인 에덴을 만들어 주셨지만 인간이 그것을 파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세상에 악한 사람, 즉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사기 치고 하는 사람들만 없애버리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그 어떤 인간도 선한 인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선한 인간만 남기기 위해서 악한 사람을 없애버린다면 우리 모두가 다 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새하늘과 새땅에 있으며, 우리가 그 나라에 거할 참된 신자되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신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는 일이 발생해도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님의 길에 더 관심을 두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기뻐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우리에게 뭔가 영향을 입혀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게 하는 것입니까? 기도 열심히 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옛사람이 다 허물어지고 새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내 모든 인생을 맡기는 삶으로 변화된 모습, 그것이 곧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 증거를 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증거가 있습니까? 있다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낙심이 먼저가 아니라 그 일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여러분의 중심에서 일하시는 것, 그것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을 것을 명령하시는 내용입니다. 성소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삶속에서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장차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고,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들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을 우리가 정해서 그것을 기준 삼아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 아직까지 여러분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힘들 때 짐을 나눠져 주는 그런 함께 하심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를 때리고 힘들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바꿔놓고야 마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시도록 나를 내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뀌어진 인생입니다. 내 인생을 내 계획대로 내 뜻대로 못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끌어가시는 대로 감사하고 끌려가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신을 찾는 것은 자기 인생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찾는 것인데 오히려 포기하라는 말에 반발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목사님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야하는 인생인 것 다 아는데 또 힘들게 말합니까?’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신자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살아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여러분의 삶속에서 여러분을 다스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성막을 만들어서 그들을 다스리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삽니까? 여러분들 안에 성막이 세워져 있습니까? 성막의 규례를 보면 인간의 생각이 갈 수 없도록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져 있습니다. 크기, 길이, 재료의 종류, 갯수, 모든 부분에 걸쳐서 인간의 판단은 전혀 개입될 수 없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는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은 전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어느 것은 하나님께 양보하고 어느 것은 양보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나에게 별 손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께 양보하고, 손해가 될듯 싶으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종교행위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판단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해주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면서 책망하고 이 땅에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만드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는 오직 생명 되신 주님을 알리기 위해서 힘씁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모방하는 사람은 단지 사람을 좋게 할뿐입니다. 사랑을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할말을 하지 않아 버리고, 고쳐줘야 할 것을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에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해야 할 일, 주님을 전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일에 힘쓸 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말씀에 지배를 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은 내면서 어려운 자가 보이는데도 한푼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다는 것을 모르고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즐거운 일이 있으면 반대로 슬픔에 빠진 이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자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오전 설교대로 여러분의 종교적인 열심, 스스로의 믿음을 믿지 말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
출애굽기강해(1)
출 25: 10-22
조선왕조 시대에 정궁으로 쓰여졌던 경복궁에 가보면 왕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가장 관심있게 눈여겨보는 곳이 아무래도 왕이 앉는 자리, 용상일 것입니다. 용상에 앉아서 호령하던 왕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감개가 무량할 것입니다. 시대가 변했지만 그 당시의 상황들을 상상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고 그 중에 제일 먼저 성막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소의 법궤와 속죄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법궤의 길이는 2규빗 반, 넓이와 높이는 1규빗 반입니다. 1규빗이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를 의미하는데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50㎝ 정도를 기준으로 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용된 방주의 치수도 규빗으로 나와있습니다. 2규빗 반이라고 하면 그 길이가 1m 25㎝ 정도가 됩니다. 폭과 높이가 약 75㎝,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느냐 하면 성전 십자가 밑에 있는 성찬대의 규모와 아주 흡사합니다. 여러분이 성전에 오시면 저 촛대가 있는 성찬대를 보시면서 "아, 성전 지성소의 법궤가 저만하겠구나"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조각목으로 법궤를 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조각목이란 이스라엘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서 목재로는 쓸모가 없는 잡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향목으로 만들 수도 있고, 오동나무로 만들어도 좋을 것을 그 쓸모없는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을까?" 그런데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성소의 법궤를 놀랍게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한 후에는 안팎을 정금으로 싸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이 법궤만 금으로 안팎을 쌌습니다. 그만큼 법궤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조각목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나무, 재목으로도 쓸모없는 아카시아 나무 같은 조각목으로 법궤를 지으라고 하신 뜻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쓸모가 없던 조각목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금으로 안팎을 싸주셨습니다. 겉만 금이 아니라 안에도 금입니다.
외적인 변화도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문화적으로도 세련되어야 하겠고, 지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야 합니다. 문화 생활을 하면 외모는 달라집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분들을 처음 만나면 촌스럽지요. 촌스럽다고 하는 말은 시골 사람답다는 말인데 시골에서 살았으니까 당연히 촌스럽지요. 여러분들 다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 촌스러웠습니다. 제가 대놓고 얘기를 안해서 그렇지 머리 모양도, 옷 입는 맵시도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여러분들이 거울을 보실 때마다 그래도 꽤 세련돼 보인다고 흐뭇해하시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겉만 금으로 싸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안에도 금으로 싸라고 하셨습니다. 내적인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모도 세련되어져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닮아서 주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새로워지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져야 안팎으로 금을 싼 보람이 있는 줄 믿습니다.
법궤 속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모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의 돌판 둘, 우리는 그것을 십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광야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배고파했을 때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법궤 속에 있었습니다.
세 가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계명을 법궤 속에 두었다고 하는 것은 법궤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를 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인정하신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설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돈 많은 사람들이 와서 판을 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 바로 그들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의 봉헌 예배를 드리는데 국회의원이 단 위에 앉았어요. 장로나 권사로서 순서를 맡았는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순서도 없는데 국회의원이라는 이유로 그를 거기다가 올려 앉혔어요. 잘못된 것입니다.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국회의원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교회는 한가지 기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금은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각목 같이 쓸모없는 우리 인생들을 서로 서로 공동체로 엮어주셨습니다. 형제와 자매가 서로 연결되어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거기에 믿음으로 우리를 안팎으로 새롭게 하시니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주님은 당신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조건이 아닌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저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죄씻음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 나온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안팎으로 싸서 성전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14절에 보면 그 법궤를 이동할 때에 필요하도록 네 곳에 궤의 고리를 만들고 궤를 메는 나무도 조각목으로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이동할 때는 언제나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깨에 메도록 하셨습니다.
조각목 같은 성도들이 하나 둘 연합해서 몸된 제단을 어깨에 메는 심정으로 함께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내 눈물과 내 기도가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서먹서먹한 일인지 마치 남의 옷을 빌려입은 것처럼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법궤를 조각목으로 만든 채로 어깨에 메라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불행한 역사를 기억합니다. 삼상 6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벧세메스로 보낼 때 한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 둘에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실어보냈지만 거룩한 예배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 법궤가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나 해보자고 몰렸다가 70명이나 죽었습니다. 민수기 4장20절에 명시된 율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법궤는 무려 40년간을 그곳에 또다시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정성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는 고로 망한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해도 바로 알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바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옮길 때에는 반드시 궤를 어깨에 메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헌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끌고 가서는 안됩니다. 수레에 싣고 가서도 안됩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맡겨서 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로 성도라 칭함받은 백성들이 자신의 어깨에 메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속죄소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법궤를 만들 때는 길이와 높이와 넓이를 말씀해주셨는데 속죄소를 만들 때에는 길이와 넓이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크기는 똑같습니다. 왜 그래요? 속죄소는 법궤의 뚜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법궤의 뚜껑 위에 그룹 둘을 서로 마주 보게 하고 그 날개를 높이 펴서 법궤 전체를 덮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유일하게 법궤 위의 그룹 둘을 천사의 모양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에서 너희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곳이기에 그 자리를 속죄소, 혹은 시은소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법궤와 속죄소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는 곳입니다.
대통령을 만나려면 청와대에 가야 하듯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주님이 계신 성소로 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전에 나온다고 하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에 의해서 요청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것입니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리라" 물론 주님은 1.25m 밖에 되지 않은 그 작은 법궤에 갇혀 계신 분은 아닙니다. 주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고, 우주도 주님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으시고 크신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가 성막을 짓고 성막에 가장 중심이 되는 그 지성소에 법궤와 시은소를 만들어놓으면 내가 거기에서 너희와 만나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속죄소에서 여러 가지 은혜로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끝나는데 성막이 완성되는 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위에 구름으로 임했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먼 곳에서 보아도 성막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것을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내가 너와 만나리라" 여러분들이 주의 성전에 올 때마다 가장 중요한 관심은 "내가 오늘 주님과 만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만나기 때문에 우리의 외모나 내면의 모든 모습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할 모든 것을 네게 알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가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시간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러분들과 정해진 시간, 약속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선포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법궤가 있는 곳은 언제나 기적이 나타난 줄로 믿습니다. 대적들과 싸울 때에 거룩한 제사장들, 특별히 고핫 자손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성가대와 함께 앞장을 서면 언제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강을 들어갔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는 법궤를 맨 자들이 앞장서서 성을 돌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의 법궤를 모시고 산다면 언제나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적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속죄소라고 말하고 시은소라고도 말합니다. 죄인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조각목 같이 쓸모없는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법궤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조각목으로 법궤를 만드셨고, 안팎에 금을 싸듯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히브리서 9장에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단에 나올 때에는 죄인된 우리가 언제나 제물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소를 잡아야 하고 양이나 염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려야 하고 고기는 각을 떠서 번제단에서 불로 태워드려야 합니다. 그 피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마땅한 이 죄인을 저 짐승의 생명을 드리오니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이것이 제사의 중심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오늘날 우리의 예배의 중심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순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는 기간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무지목매해도 사순절만큼은 주님의 사랑을 더욱 뜻깊게 여겨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던 사람들, 주님의 사랑이 흐려졌던 사람들도 사순절 이 기간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강하게 들어와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내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넉넉히 살아가시는 평안의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조각목 같은 우리들을 백향목보다 더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고 안팎에 금을 발라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자들에게 구속함의 은총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시은소 앞에서 언제나 겸손하게 하시고 주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믿음과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강해(2)
출 25: 23-30
미쉬칸'이라고 하는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려 30회 이상이나 구약성경에 언급될 만큼 성막은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막 동편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을 지나면 놋으로 만든 큰 바다, 우리는 그것을 '물두멍'이라고 말합니다. 손과 제물을 씻는 곳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떡상'이, 왼쪽에 '등대'가 나오고 정면에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분향단 다음에는 휘장으로 가리워진 '지성소'가 있고 그 안에는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속죄소가 나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고 진설병을 그 위에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떡상의 규모를 보면 길이가 2규빗, 넓이는 1규빗,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 여러분 머리 속에 그 떡상의 규모가 짐작될 것입니다.
조각목으로 만들라는 것은 법궤를 만들 때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광야의 나무입니다. 그 조각목으로 엮어서 상을 만들고 금으로 덮으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네모난 상이 아니라 손바닥 넓이만큼 턱을 만들고 고리 넷을 만들어서 채를 꿸 수 있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떡상을 이동할 때 어깨에 멜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떡을 진설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음식점 입구 유리 케이스 안에 잘 진열되어 있는 음식 모형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냉면의 모양, 혹은 비빔밥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만들어놓고 가격과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에 들어가면서 오른쪽에 위치한 떡상 위에 진설병을 올려놓으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떡입니다. 그 떡을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47절 이하에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전도자 D.L 무디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말씀을 먼저 먹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게 하옵소서" "No Bible, No Breakfast"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먼저 취하기 전에는 육신의 양식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을 취한 후에 말씀의 양식을 취하겠습니다" 그렇게 순서를 바꾸고 사니까 육신의 양식도, 생명의 양식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요즘 유행가 중 가장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바꿔"라는 노래입니다. 우리의 삶의 잘못된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육신의 양식도 물질의 양식도 우리에게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떡상에 진열할 진설병은 어떤 것이 없어야 됩니까? 레위기 2장5절에 보면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15절에 보면 "너희 집에 누룩을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이라고 하는 의미는 '악'을 상징합니다. 순수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 때 불순물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그 순수한 재료에 세상의 악을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순수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진설병의 재료는 고운 가루이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고운 가루가 나옵니다. 성경 66권을 놓고 보아도 이 모든 말씀들이 '로고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다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로고스'인 말씀 중에서 여러분 심령 속에 분명하게 여러분의 것으로 들어올 때 그 말씀은 '레마'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나라의 자동차 대수가 1,000만대를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차가 여러분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키로 시동이 걸리는 그 자동차, 그것이 여러분의 자동차인 것처럼,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로고스'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날 예배 시간에, 어느날 기도시간에 그 말씀이 내 것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 시간 '은혜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진설병은 어떻게 나누어야 합니까? 떡상 위에 진설되었던 떡은 일주일에 한번씩 늘 새 것으로 교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교체된 그 떡은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아무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떡을 먹을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만이 그 떡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시간,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던 휘장이 갈라진 줄로 믿습니다. 히 10:19-20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을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제 누구든지 왕 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진설병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 진설병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왜 말씀의 자리에 혼자 달랑 옵니까? 그 좋은 자동차에 왜 빈 자리로 오느냐 그 말이예요.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태워서 오면 안됩니까? 그러면 기름이 더 들어갑니까? 세상 사람들은 직장 출근할 때 '카풀'이라고 해서 주변 사람들을 태워가지고 다니는데, 하나님의 말씀?함께 나누기 위해서 왜 '카풀'을 못하느냐 그 말이예요? 교회 버스가 성도들을 실어 나르는 시대는 70년대 얘기입니다.
그 대신에 가정 가정마다 있는 자동차에 자신과 가족과 이웃들을 태우고 와야 합니다. 떡은 혼자 먹으면 안됩니다.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46절 이하에 보면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개인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면 우선 먹어야 합니다. 먹는 장소에 은혜가 있어요. 화기애애한 선교회, 사랑 넘치는 속회를 보면 끊임없이 지도자의 가정을 회원들이 들락거립니다. 커피 한잔을 해도 전화해서 "커피 끓여 놓았는데 같이 마십시다. 부침개를 했는데 한번 맛 보겠습니까?" 그런 선교회는 생기가 있어요. 부침개를 먹고 커피 한 잔 마셨다고 생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생기가 나는 거예요.
그 떡은 몇 개를 준비해야 합니까? 12개 입니다. 떡상 위에 6개씩 쌓아 놓았습니다. 12개의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민족, 모든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떡은 특정한 나라, 특정한 민족만 먹어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떡을 먹이는 행위가 무엇이예요? 그것이 선교요, 그것이 전도입니다.
우리 기독교 계통의 수많은 단체들이 지금 연변을 중심으로 해서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들을 먹이고 입혀서 한국으로 데려왔지만, 선교 전략을 바꾸어 이제는 연변 지역에서 그들을 보호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훈련된 그들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변화가 되어서 선교사의 사명을 가지고 북한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그렇게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 가정이 발각이 되어서 공개 처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 모두를 강제적으로 다 동원시켜서 처형하는 장면을 보게 했습니다. 보통 극형에 처하는 사람은 세 발을 쏘는데 이 날은 놀랍게도 네 발을 쏘았습니다. 네 발의 총탄이 온통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망가뜨렸습니다. "너희들도 예수 믿고 전파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런 소식에 접하면 굉장히 마음이 부끄러워집니다. "내가 이 생명의 떡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 365일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는가? 아예 전도를 하지도 않고 1년을 지나가지 않았는가?"
12 개의 떡은 모든 민족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떡입니다. 그 진설느?순수한 떡입니다. 진설병 외에는 떡상위에 다른 떡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다른 복음은 안됩니다. 오직 예수의 복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안됩니다. 그 떡을 매 안식일마다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바꾼 떡은 제사장들이 성막안에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성막 안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사실 여러분들은 지금 말씀을 먹고 있는데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먹고 있어요. 제사장들이 떡을 먹을 때는 서서 먹었습니다. 서서 먹었다는 것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먹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집사님, 요즘 어떻습니까?" "밥이나 먹습니다" "밥이나 먹으려고 사업을 하시려면 아예 그만 두세요. 처자식, 마음 고생 시키지 말고 직장생활 하세요.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이나 먹으려면 사업하지 마세요" 여러분 스스로 매일 매일 양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내가 오늘도 먹는다" 사명 감당을 위해 일하시고, 사명 감당을 위해 사업을 하시고, 사명 감당을 위해 오늘도 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건강해야 돼요? 오래 살다가 손주들 결혼하는 것 보시려구요? 그것은 안봐도 괜찮아요. "사명 감당을 위해 하나님 내게 건강을 주옵소서. 사명 감당을 위해 내게 물질도 주시옵소서. 사명 감당을 위해 내게 지혜도 주시옵서. 아버지여, 사명 감당을 위해서 오늘도 내가 이 떡을 먹나이다" 왕 같은 제사장들인 우리는 이제 먹고 마시는 것도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떡은 얼마나 두어야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말씀 마지막 30절에 보면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곧 항상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떡이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픈 아이들이 부모에게 "엄마, 밥맛이 없어. 밥이 모래알 씹는 것 같아" 그러면 엄마는 "그래도 먹어라. 밥이 먹기 어려우면 죽이라도 해서 줄테니까 그래도 먹어라. 먹어야 그 병을 이기고 살 수 있어" 성도 여러분, 실패했으면 살기가 어려우면 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더 주께로 가까이 나아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365일 항상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 그것은 세상의 떡이 필요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떡의 우선순위가 생명의 떡이 우선이요, 그 다음이 육신의 떡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순서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 일 때문에 바빠서 하나님의 일을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일 때문에 먼저 바쁘셔야 합니다. 그 순서를 바꾸지 않고는 하나님의 복은 여러분의 삶에서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순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항상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 말씀을 함께 나누는 일에 부족함이 없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의 상을 준비하고 그 상위에 정성을 다한 말씀의 떡을 준비하기 원하는 평안의 공동체를 주님 기억해 주옵소서. 순서가 바뀌어 잘못된 삶을 살았던 저희들이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 생명의 떡을 세계 만방까지 나누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강해(3)
출 25: 31-40
필리핀의 '바기오'라고 하는 지역에 10여명의 감리교 선교사 가정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이 아주 선호하는 아파트가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외벽 도색 작업을 해서 멀리서 보면 새 건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20년이된 우리로 하면 재건축을 해야 할 만큼 오래된 건물입니다.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고 주변의 화산들이 연기를 내뿜는 화산 지대에 위치한 필리핀의 특성상, 해외에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만한 진도 2-3 정도의 지진은 늘상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얼마전에도 그 지역이 지진으로 인하여 잠을 자다가 대강 옷만 추려 입고 바깥으로 뛰어나오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파트가 인기가 있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잘 지었다는 것이지요. 시방서대로 제대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보니까 20년 전에 일본 사람들이 지었다고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떡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왜 일본 사람이 지으면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모든 사람이 선호하는 최고의 아파트가 됩니까?
제가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그 아파트는 일본 사람이 지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시방서대로 지었기 때문에 아직도 사람들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직성이라고 하는 내면적인 부분이 중요한 거예요. 40절을 보면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보인 식양대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떡상이 그리고 왼쪽에 등대가 있는데 오늘 말씀은 등대에 관한 말씀입니다. 법궤를 만들 때에도 조각목으로 만든 후 안팎을 금으로 싸라고 했고, 떡상을 만들 때에도 조각목으로 만든 후 금으로 싸라고 하셨는데, 놀랍게도 등대는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금으로 싼 것이 아니라 전체를 정금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단의 등대는 성막에 있는 등대와 그 틀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줄기가 하나 있고 양쪽에 똑같은 모양의 가지가 세 개씩 나와서 전체적으로 일곱 개의 불을 밝히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규모가 크다고 12개나 24개로 해서도 안되고, 교회가 작다고 줄여서도 안됩니다. 일곱은 신약의 의미로 보면 모든 세계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재료는 정금입니다. 금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수한 금처럼 순수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18금이나 24금보다는 99.9%의 금이 값어치가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화폐는 금에 의해서 화폐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라고 하신 것처럼 빛을 발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순수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정금 등대를 만들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해 봅니다. 31절과 36절에 보면 "부어 만들지 말고 쳐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부어 만든다고 하는 것은 어떤 틀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금형입니다. 거기에 금이든 은이든 아니면 납을 부어서 똑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금 등대는 부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쳐서 만드는 것입니다. 쳐서 만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수고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쉽게 쉽게 금형틀에 부어서 만들어내듯이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봉사하실 때에도 쉬운 방법만 생각하지 마세요.
얼마 있으면 지방 체육대회에 참가할 것입니다. 늘 수백명의 성도가 참석합니다만 설거이 하기 귀찮은데 일회용 그릇 쓰자는 주장도 간혹 있습니다. 설거지 한번 안하는 수고는 덜지만 얼마나 많은 환경오염을 일으킵니까? 그러나 환경오염 이전에 우리의 마음의 준비가 틀렸어요. 음식도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거룩한 일에 쓰임 받는 우리의 자세도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정성이 들어간다고 하는 얘기는 힘이 든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힘 들여서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법칙을 생각합니다. 고난은 '파테마'라고 하는데 '유익'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고난받는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 그 '고난'이라고 하는 단어 속에 '유익'이라고 하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을 바울 사도는 알았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 보면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터를 강하게 하심이라" 욥기 23장 10절에는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할렐루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온다고 그랬어요. 정금같이 나오기는 원하는데 단련받는 일을 원치 않는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 앞에 정금으로 등대같이 쓰임 받으려면 단련받아야 합니다. 고난을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더 핑크"는 "우리가 이 고난이라고 하는 승리의 언어를 우리의 것을 삼자"고 요청합니다. 고난은 실패의 단어가 아닙니다. 고난은 승리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세 번째 말씀을 생각합니다. 31절, 35절, 36절에서 5번씩이나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줄기와 연하게 하라" 줄기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을 떠나서는, 줄기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등대의 모양을 중심에 줄기를 하나 두고 좌우에 대칭으로 세 가지씩 해서 일곱 촛대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중앙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우의 가지는 우리 성도들을 말합니다. 연합의 법칙이요, 함께 하는 법칙입니다.
모세는 아론과 연합해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 혹은 바나바와 연합해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손을 잡고 일할 때에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계적인 부흥사 D.M 무디는 말씀 증거의 은사가 있었지만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도들의 심령에 문을 열어놓는 '쌩키'라고 하는 놀라운 찬송 인도자가 있었습니다. 무디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쌩키'가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안됩니다. 연합해야 합니다.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동역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부모와 자식이 동역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번에 바기오를 가보니까 얼마나 그 분위기가 좋은지 몰라요. 세계 여러 곳의 선교사님들을 만나보지만 주로 독립적으로 일을 하고 개별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바기오의 10여명의 감리교 선교사님들은 얼마나 은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는지 몰라요. 지난주 선교센타 부지 선정을 위해 그곳을 방문했다가 제가 너무 기뻐서 돌아오기 전날 저녁에 10가정 되는 선교사님 식구들을 한국 식당에 초대하여 아이들까지 다 모인 가운데 저녁식사를 대접을 했습니다. 얼마나 분위기가 화기애애 한 지 몰라요.
이번에 우리 P.P.M 선교센타를 준비하는 일도 신창규선교사님 혼자서는 그 방대한 지역을 컨설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선교사님들이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과 인간관계를 총동원해서 전부 도와주는 거예요.
거기에 9년 있은 김도봉선교사님께서 U.M.C 현지 교회에 목회자로 계신데 거기에 제일 어른이신 감독님과 아주 유대관계가 좋아요. 마닐라 지역을 시작으로 1,000㎞ 이상의 지역을 순방했는데 가는 곳곳마다 감리사님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바기오 지역의 감독님(아리체아)까지 만났을 때 이미 모든 것을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저는 이런 마음을 느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한 후 아닥사스다 왕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이미 그 왕의 마음을 바꾸어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왕에게 가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지으신 하나님께 부탁하는 차원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인간을 바라보고 부탁하지 마세요. 제 목회 철학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성도들을 이용하지 말자. 성도들 중에 어떤 지위, 어떤 위치의 사람들이 있어도 아무리 거기에 필요한 일이 생겨도 부탁하지 말자" 부탁을 하면 당장은 일이 쉽게 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네 번째는 사명의 법칙입니다. 이 등대의 불빛은 예배 드릴 때 잠깐 켜는 것이 아닙니다. 24시간, 365일, 그 불빛이 끊겨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아침과 저녁으로 순결한 감람기름을 등대의 등잔에 부어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속의 사명입니다. 성막에는 창이 없습니다. 등대에 불이 꺼지면 성막은 캄캄한 것입니다. 오직 등대에 불이 붙어야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서 예배도 가능하고, 기도도 가능하고, 하나님과의 만남도 가능하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았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출애굽기 27장 20절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라"고 하실 뿐만 아니라 21절에 보면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간검하라"고 했습니다. '간검하라'고 하는 말은 '끊임없이 간수하고 정리, 정돈을 하라'는 말입니다. 간검의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 헌신의 불이 식지 않았는지, 내 기도의 불이 식지 않았는지, 내 봉사의 불이 식지 않았는지, 내 전도의 불이 식지 않았는지, 에베소 교회처럼 사랑의 불이 식지 않았는지, 아니면 사데교회처럼 아예 죽어버렸는지 간검하라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여러분들 새벽 제단을 지키시면서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간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뒷감당의 사명도 있습니다. 순결한 감람유를 아침 저녁으로 공급을 하는데도 등잔 밑에 뭐가 생기느냐하면 불똥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도 불똥은 생기게 마련이예요.
이제 앞으로 5월달, 경로잔치를 할겁니다. 정성을 다해서 음식을 준비합니다. 넉넉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평안의교회 여선교회는 언제 보아도 음식에 정성이 있어" 지역 어르신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돌아갈 때 수고한 사람들이 보람이 있잖아요. 그저 사진 찍기 위해서 눈가림만 하는 그런 단체의 경로잔치와는 차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로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음식이 남을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수고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합니다. 떡이 남았으면 떡도 좀 나누어야 하고 잡채가 남았으면 잡채도 나누어야 합니다. "자, 김집사님 이만큼, 박집사님도 이만큼..." 그렇게 회장님이 나누어주다 보면 김집사님네 김치는 잎부분이 갈 때가 있고, 박집사님네 김치는 줄기부분이 갈 때가 있어요. "김치는 줄기가 맛인데 나는 왜 잎사귀만 주나" 그것을 들고 가면서 시험에 들어요. "회장이 언젠가도 그러더니 내가 미운 털이 박혔나보다" 불똥입니다. 아무리 순결한 기름으로, 아무리 제사장이 간검을 해도 그 등잔 밑에는 불똥이 생기기 마련이예요. 불똥이 없는 등잔은 없습니다. 불똥이 없는 공동체는 없어요. 어떤 분은 그럽니다. "나는 문제없는 교회만 찾아간다" 대한민국 아니라 전세계에 문제없는 교회는 없어요. 문제는 어떻게 지혜롭게 감당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 성소에 거룩한 등대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이미 불똥이 있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십니까? "불똥을 집는 불집게를 만들라" 불집게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불집게로 불똥을 집어내는데 동네방네 떠들면서 집어내면 안돼요. "김집사가 이번에 경로잔치하더니 예산은 어떻게 낭비하고, 떡은 몇 말을 해야 하는데 몇 말을 했고, 잡채는 몇 ㎏을 해야 하는데 몇 ㎏을 했고..." 동네방네 떠들면서 그 불똥을 들고서 난리를 칩니다. 불똥을 집으시려면 소리소문 없이 하셔야 합니다. 김집사님의 불똥을 박집사님이 조용히 거두어주셔야 합니다.
목사가 주의 일을 하다보면 불똥이 생깁니다. 그 불똥을 우리 장로님들이 조용하게 집어내주시는데 나중에 제가 그 사실을 압니다. 장로님들도 주의 일을 하다가 보면 불똥이 생깁니다. 제가 그것을 조용하게 감당해줍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의 약점과 부족한 부분들을 불똥을 집는 불집게로 집어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등대만 정금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불똥을 집는 불집게도 정금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 자세가 믿음으로, 사랑으로, 온유함으로 해야 한다 그 말이예요.
오늘 우리에게 등대를 만들라고 하신 이 귀한 사명,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들을 감당하지 못했던 부분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지 못했던 부분들, 즉 고난을 피하고 멀리했던 우리의 자세들이 파테마, 즉 고난이 유익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쳐서 정금이 되어지는 고난의 사역에 함께 동참하시고,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와 성도가, 목회자와 성도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온전히 감당해내는 평안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고백합니다. 아침 안개 같은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진정한 은혜는 모든 고난을 견딘 후에 증명된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정금 같은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시고 쳐서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고난을 피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고난 가운데 유익이 있음을 기억하며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욥의 믿음처럼 주님, 우리를 연단하시고 우리를 정금같이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