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호 목사
부자(父子)간이든, 부부(夫婦)간이든, 사람간의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데 있습니다. 대화는 있어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불행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심정을 알고 느낄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인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심정의 극히 일부라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30장에는 이스라엘의 암울한 역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패역한 자식”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패역한 자식’은 ‘불순종한 자식’입니다.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기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답답해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패역하게된 이유는, 2절에 “그들이 바로의 세력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강한 법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등지고 꾀를 내어 바로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은 당시, 막강한 군사 대국인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입하려고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스라엘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마땅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였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꾀를 내서 다른 강대국인 애굽을 찾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의 행위는 국가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용하려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불신앙의 행위였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애굽은 결코
돌아가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선조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곳에서 구원을 받은 나라입니다.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면 죽든 살든 가나안땅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간의 어려움 때문에 옛날을 그리워하며 애굽의 품에 안기는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패역한 자식”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피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결론은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3절>입니다.
이스라엘의 계획은 애굽의 도움으로 앗수르를 무찌른 이후의 안전보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수치와 욕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애굽에 피하는 것이 지혜롭고 위대한 일 같지만 하나님은 애굽을 아무것도 아닌 “무익한 민족”<6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9절>
사랑하는 새로남교회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출발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 그 자체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남은 인생을 주님이 주신 은혜와 특권을 허랑 방탕하게 낭비하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고,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이 주시는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건의 기록이 여기서 끝나면 우리는 아파하고 안타까운 눈물로 끝나지만, 하나님은 “그러나”의 은혜를 주셨습니다.<18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도망가 실패하여 하나님께 근심거리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건에 하나님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그러나’를 ’but’가 아닌 ‘yet’로 표현했습니다. 아직까지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추적하시고 기다리신다는 의미를 강하게 표현해주는 단어입니다.
* 당신은 ‘그러나’의 은혜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1.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18절>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는 자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은 우리를 떠날때가 있습니다.
돈도 날개를 달고 떠날때가 있습니다. 건강도 지위도 사라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성공할때뿐 아니라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현장에서도 주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희망입니다.
2.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9절>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응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독백(Monologue)이 아닌 대화(Dialogue)입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 먼저 행동을 취하시고, 나도 주님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대화가 단절되면 남편이나 아내나 반응은 없고 일방적인 독백만이 있고 그 결과는 불행입니다. 우리 신앙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사방이 어려움으로 꽉 막혀 있을 때 우리에게 응답하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구체적으로 우리 사정을 아뢰어야 합니다.
3.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21,21절>
우리 삶이 때로는 칠흙같이 어두울때도 있고, 어느쪽에 서야할지 어느쪽으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내게 응답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을 주셨다면 연이어 구름 기둥의 인도와 불 기둥의 인도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믿는 자들만이 경험할수 있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이 있어서 다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풍성한 삶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단계 더 나아가 주님의 인도하심에 열려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할 때 환난의 떡을 먹고, 고생의 물을 마시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앞에서는 환난과 고생도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고난 그 자체도 하나님의 전체적인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의 도구요 과정이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위치가 환난의 떡을 먹는 자리이거나, 고생의 물을 마시는 자리일지라도 하나님께 마음의 초점을 맞추기만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응답을 체험하는 은혜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응답하시고 인도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마다 우상을 버리고 이길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22절> 그때 이스라엘의 우상이었던 애굽이 우리의 동일한 우상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앞에 정직하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자아(自我), 물질(物質), 과거의 아픈 상처(傷處), 탐심(貪心)이 오늘의 우상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예외없이 이런 우상을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허무와 무질서가 기승을 부리는 때에, 하나님의 심정과 접촉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능력으로 유형, 무형의 우상을 깨뜨리며 성도답게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 우리에게 놓여있는 우상들을 버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