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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5:1-3 다윗의 시 : 여호와여
사울이 다윗의 원수였던 동안 귀족들과 당시 권세가 항상 왕궁에서 널리 횡행하던 비굴한 정신에 따라 죄없는 한 사람을 멸하려고 열심히 공모하였습니다.
그들은 증오와 잔인성에 일반 백성들을 참여하도록 유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서 비천한 사람들까지 모두 다윗을 대적하는 무자비한 증오의 불길을 태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 모두가 생각 없이 잘못과 어리석게 맥진하는 실상을 알았습니다.
또 그들이 그 일의 참 사정을 모르는 채 설친다는 사실을 다윗이 성령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고의적인 적의와 악으로 사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사울을 기쁘게 하려고 애썼던 자들만을 자신의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 원수들에 대한 원한을 다윗은 하나님께서 복수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먼저 다윗은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순결을 하나님 앞에 진술합니다.
다음에 그들이 부당한 형벌을 과하려 하였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들의 사악한 잔인성에 대하여 불평을 한 후에 다윗은 그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그들에게 내리도록 기구합니다.
더우기 사무엘의 의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할 때와 거룩한 기름부음을 신뢰할 때에 다윗으로서는 더 좋은 결과를 소망하였습니다.
시편 전체를 통하여 다윗은 자신의 감사에 대한 증거들을 군데군데 넣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구원을 받은 후 전 생애 동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겠다고 말함으로서 이 시편을 끝맺습니다.
1. 본문 1 절은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입니다.
원수들이 공공연히 다윗을 제거하려 할 뿐 아니라 중상과 오해로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에 대한 배상을 위해 변호합니다.
먼저 다윗은 자신의 사건을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합니다.
이로서 다윗은 악인들과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께 무장하시도록 부탁합니다.
이로서 다윗은 자신이 비참하게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 35 편
이 거룩한 사람 즉 선행이 뛰어나고,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악의가 없으며 그의 예의와 온유에 의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총애를 받을만한 사람이 악인들의 비난과 중상을 피하지 못하게 된 사실은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며 또 대단히 유익한 본보기로 제시됩니다.
다윗까지도 악인들의 악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그 악인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헐뜯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놀랍거나 이상한 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악인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상해는 참혹하고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를 위하여 개입하시고 또 악한 비난에 대해 옹호해 주시는 데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로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비록 비방자들이 사악하게 우리를 비난할지라도 우리를 갈기갈기 찢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여 우리의 변호를 맡으신 한 동요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절의 둘째 구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그의 원수들의 무장한 폭력을 격퇴하여 주십사고 탄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전체 내용의 요지는 악하게 비난을 받으며 잔인하게 박해를 받으며 또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할지라도 다윗은 자신의 생명과 명예의 보존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2. 본문 2절은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입니다.
이 말씀은 엄격하게 창과 방패가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숨 한번 내쉬거나 고갯짓 한번으로 모든 원수들을 다 멸하십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런 비유들이 조잡한 것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한 이해에 적응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하여 나타나신다는 확신을 우리의 마음 속에 더욱 효과적으로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걱정, 근심과 위험이 닥칠 때 공포가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쌀 때 심지어 죽음이 우리 눈앞에 다가왔을 때 모든 염려와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밀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유는 땅의 것에 기울기 쉬운 성향을 가진 둔하고 세속적인 우리 이해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점차로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이해하는데 이르도록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방법과 같이 창과 방패로 무장하신 것으로 소개됩니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곳에는 ‘전쟁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묘사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의 불완전성에 대한 적응임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35 편
우리의 마음이 제한된 능력으로 인하여 그 자체에 모든 형태의 도움을 다 포함하고 게시며 어떤 곳에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 그 무한하신 능력의 범위를 다른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은밀하시고 또 하나님만이 가진 능력을 행사하시어 하나님만이 불신자들의 모든 힘과 권세를 섬멸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사용된 הנצ(치나)라는 히브리어가 ‘던지는 창’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어떤 다른 무기의 일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 5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을 방패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여기에서 왜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른 곳에서 방패와 손 방패로 자주 나타난 것처럼 모순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 사용된 표현이 던지는 창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거나 혹은 비슷한 무기를 나타내려 한 것이었다면 그것이 다음 절에 언급된 창과 연관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의 공격을 막으시고 격퇴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제일 먼저 방비용의 무기에 대해 언급합니다.
‘칼집에서 뽑다’를 나타내는 קיד(리크)라는 히브리어를 우리는 다만 ‘뽑아내다’ 혹은 ‘낳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반대하다’로 번역한 דוגס(쎄고르)라는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 ‘닫다’ 혹은 ‘닫히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의도가 하나님이 친히 담과 성벽으로 자신을 제시하시면서 원수들이 그에게 접근을 막아달라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성실하게 번역하였다고 봅니다.
동시에 만일 어떤 사람이 ‘닫다’ 혹은 ‘그 길을 닫다’ 또는 ‘어떤 장애물로 그것을 방해하다’로 번역한다 해도 그 뜻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그것을 명사로 주장하려는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3. 본문 3절은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곧 ‘은밀한 영감(靈感)으로 내게 선포하소서’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참으로 나로 하여금 나의 구원이 당신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느끼게 하소서’라고 해석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다윗이 그의 마음 속에 그 구원을 철저히 붙들고 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됩니다.
시편 35 편
다윗이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이것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반해 우리는 잠들어 있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무지할 정도로 깨닫지 못하며 또 우리의 본성이 우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실감나게 깨달을 수 있는 감성의 방패로 무장하고 그가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대적하는 장애물을 극복하여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다윗은 대단히 강력한 표현방법을 사용합니다.
예를들면 다윗이 “주여 그 무엇이 나를 실망시킬지라도 나의 구원이 분명히 주님에게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여 주십시요,
또 많은 유혹이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닐지라도 나의 구원의 소망은 내가 노출될 모든 위험을 초월한다고 생각하게 하소서,
아니 그보다도 더욱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의 은혜로 제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35 편
시35:4-7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다윗은 계속해서 원수들의 패망을 간구합니다.
1. 본문 4-6절은 “(4)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 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5)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6)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입니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여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의 계획을 실망시키고 패하게 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받을 보수만큼 그들에게 보복하여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께 그들이 그들 자신의 기대와 소원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혼란에 빠지고 또 수치를 당하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더 나아가 그들이 스스로 확고하게 서고 또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들이 왕겨나 혹은 그루터기와 같이 되도록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즉 다윗은 왕겨가 바람에 날려가듯이 그들도 주의 사자들의 은밀한 자극으로 불안하게 되어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저주는 더 무서운 것입니다.
곧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그들은 흑암과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곳을 만나게 될 것이며 또 그들의 의혹과 혼란 속에서 주의 사자가 그들을 추적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무엇을 계획하든지 또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지 간에 모든 의논과 계획이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도록 해달라고 그는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의 사자들 때문에 추방되도록 다윗이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아무도 좇아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신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경악의 영(靈)으로 그들을 내리치시며 또 그들이 무서워 떨고 고통을 당하는 공포로 그들을 괴롭히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다윗은 다음 절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곧 주의 사자가 그들을 어둡고 미끄러운 곳으로 추방하면 그들은 그 이유를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어디로 가야할는지 어떻게 될는지 그들은 미처 숨쉴 겨를도 없이 황급히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 사역(事役)이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인 사자들에게 맡겨졌다는 데 대하여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시편 35 편
동시에 이 구절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를 갖춘 거룩한 사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악마들에 대해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마가 유기자(遺棄者)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게 허용된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이 악신을 부려서 사울에게 힘있게 내렸다’(삼상18:10)는 말씀에 묘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악신들을 부리기 원하실 때 그분이 강요하시지 않는다면 악신들은 결코 순응하지 않기에 성경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거룩하고 선택받은 사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하고 버림받은 천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선택받은 사자들에게 더 큰 탁월성을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선한 사자들만이 정당하게 “정사들”(엡3:10, 골1:16)이라 불리웁니다.
만일 은혜와 구원의 사역자들이요, 또 성도들에 대한 지정된 보호자들인 사자들이 유기자들을 심판하는데 사용되는 일이 없다고 반박한다면 그 설명은 간단합니다.
곧 사자들은 싸움을 하지 않고서는 성도들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원수들을 대적하지 않고서 또 그들이 원수들을 대적하게 된다고 선포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도움으로 성도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시편기자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저주의 형태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말한 다윗이 다만 그의 사정을 변호한 것도 아니고 열정의 명령을 경솔하게 털어놓는 것도 아니며 분별없는 격정으로 그의 원수들의 멸망을 갈망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둠으로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도 아래 그는 고도의 절제로 특징지어진 것과 같이 소원으로 그 버림받은 자들에 대적하여 생각하며 표현하는 것이며 또 이것은 강력한 복수심이나 증오심에 불타는 과도한 육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2. 본문 7절은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일컫는 것도 아니며 또 정당한 이유 없이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는 것도 아니라고 진술합니다.
다윗은 결백을 공공연히 주장할 뿐만 아니라 또 자기가 어떤 죄를 범하거나 혹은 자신의 원수들에게 어떤 근거를 준 것도 없이 가혹한 괴로움을 당하였다고 하소연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선한 양심의 확신과 증거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경솔하게 돌진할 수 없고, 또 하나님께 복수를 의뢰할 수도 없다는 것을 주의깊게 지적해 줍니다.
다윗이 모략, 사기, 그리고 악인들의 악행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 속에 그 자신의 성실에 대한 무언의 칭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시편 35 편
시35:8-10 멸망으로 졸지에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실패와 멸망을 희구(希求)합니다. 이렇게 원수의 멸망을 희망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합당한가?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답됩니다.
① 여기 관설된 다윗의 원수는 개인 관계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이며 천국의 공적(公敵)이었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신약시대에도 그런 원수가 실패하기를 기원함이 옳습니다.
② 다윗이 그의 원수의 실패를 위하여 기도하기는 신정국(新政國)의 대표자, 또는 하나님의 대언자의 처지에서 그리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특수한 처지는 비범(非凡)한 권위(權威)를 가집니다.
신약시대에도 사도들은 이러한 권위를 가졌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무서운 천벌을 선언하였습니다(행5:5,10).
사도 바울은 바예수라는 박수에게 그런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원수의 실패와 멸망을 기원(祈願)한 것은 그의 처지에 합당합니다.
1. 본문 8절은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깨닫지 못하는 혼돈이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혼돈으로 그중에 빠지게 하소서 - 칼빈) 입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그의 원수들의 머리에 그들이 정직하고 악의없는 사람에게 대적하였던 그 악이 되돌아가게 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주제가 논의되고 있을 때, 히브리어에서는 복수에서 단수로의 변화가 아주 흔히 있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되는 한 사람이 만일 사울이나 혹은 그의 귀족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모든 다윗의 원수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사울의 머리에 대적하여 드리는 기도는 전체 몸뚱이에까지, 즉 모든 사울의 추종자들에게까지 확대되는 것이 틀림없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האוש(샤오)라는 히브리어는 때로는 ‘혼돈’ 때로는 ‘파멸’을 의미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파멸’ ‘황폐’ ‘멸망이 그에게 임하게 하소서’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돈’이 더 적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혼돈으로 그 중에 빠지게 하소서’(칼빈) 라고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번역 ‘그가 그 멸망 속에 빠지게 하소서’ 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시편 35 편
그러나 다음의 기도를 다윗의 기도로 보면 그 구절의 의미는 대단히 적절할 것입니다.
곧 악인들이 찌꺼기가 든 포도주처럼 현재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두려움을 모르고 마치 그들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즐기고 있을 때 그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재난이 폭풍우처럼 갑자기 몰려와 그들을 뒤엎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들의 술책, 간계, 악한 행동, 또 스스로 모든 올가미를 고안하여 선하고 순결한 사람들에게 씌웠던 것이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는데 이 파멸이 그들에게 잠깐 동안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들이 숨긴 그물에 그들이 스스로 잡히기 바라는 것은 타당한 것으로 뜻밖에 갑자기 재난이 올 때 그들이 놀라움과 공포에 휩싸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형벌을 받지 않고 피할 수 있으리라는 헛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서 멋대로 터무니없이 기뻐 날뛰는 사람들일수록 갑자기 재난이 그들에게 다가올 때 더욱더 경악하고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거의 예상 밖이고 놀라운 재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면 “그에게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혼란’이 닥치도록 해주십시오. 그가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스스로 확신하려 할 때, 또 그의 거짓 환상 속에서 스스로 화평을 다짐하고 있을 때, 유례없던 두려움으로 그의 마음을 치시며 또 그의 격양된 공포로 그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깨닫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2. 본문 9절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기원법(祈願法)으로 ‘나의 영혼이 여호와를 기뻐하며 그의 구원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그의 소원을 계속 설명하는 대신, 우리 생각은 다윗이 이 구절에서 오히려 그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주 높이 찬양하고 있는 다음 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윗은 그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면서 찬양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찬양을 운(運)으로 돌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기술로 돌리며 극히 극소수만이 구원에 대한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데 반하여 다윗은 여기서 자기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않을 것으로 선포합니다.
다윗은 나의 영혼은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 의한 구원은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만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문제를 더욱 강한 조명 안에 두기 위하여 다윗은 자신의 뼈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시편 35 편
다윗은 자신의 혀가 이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자신의 몸 모든 지체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합니다. 물론 다윗이 사용하는 화법은 과장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이 매우 강렬하여 그의 근육과 뼈들이 그의 헌신의 실체와 진실성을 선포하는데 소비하기를 원하였다고 거짓없이 보여줍니다.
3. 본문 10절은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력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기쁨의 본질이 자기가 얻은 구원을 완전히 하나님께 돌리는데 있다고 보여주면서 자기가 말한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는 그의 기쁨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될 십일조만 번 것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모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다윗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모든 영광을 당연히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한다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또한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에 맡기면서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둘 때에만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선하심을 우리 마음대로 갈기갈기 찢는다면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찬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윗은 참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특수하신 의무는 불행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라고 자기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와 방어자이시며, 또 궁핍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높이 찬양합니다.
우리는 역경 속에서 더욱 선한 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원수들의 힘과 재력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확신을 잃을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강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대적하실 목적으로 분명히 통치하신다고 우리에게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약한 자들을 상해(傷害)하고 압박하는데 저희 힘을 사용하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최소한의 건전한 분별력을 가졌다면 그것이 그들의 안하무인격인 오만을 절제할 것이며 또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촉구하는 것을 제지할 것입니다.
시편 35 편
시35:11-15 불의한 증인이
본문에는 다윗의 원수들이 취한 행동원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악인이면 모두 다 자기의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도 자신도 일변 죄인이 아닌가!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 함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원수가 될만한 정도의 악인은 어떤 자입니까?
그 악인은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도 무가내하한 자로 보시고 내버리실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리신 자면 성도도 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악인이 그런 자인지 우리가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아래 몇 구절에서 그 악인이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은 거짓 증거로 의인(義人)을 해롭게 하는 자입니다(11절).
그 악인들은 선을 악으로 갚아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12-16).
1.본문 11절은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입니다
히브리어는 ‘그들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 시제로 다윗은 자기가 오랫동안 당한 고통을 말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너무 억압받고 있었기에 자신을 방어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고 하소연합니다.
정직과 양심에 가책될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이 이상 비참하고 고통스런 일은 없습니다.
그밖에 다윗은 사악하게 비난을 받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맹렬하게 자기를 대적하여 거짓 입증하는 사람들의 파렴치함과 오만함을 비난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라고 덧붙입니다.
그때 다윗은 그의 세속적인 재물을 약탈당하고 비천하게 추방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정의의 핑계 아래 악평으로 비난받고 또한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비탄 속에서 다윗은 그의 결백 유지를 희망하면서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가 높은 곳에서 그들의 순결을 주장하고 선포할 때까지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을 통과하여야 하며 참을성 있게 그 비난을 견뎌내야 합니다.
전에 ‘선한 양심보다 더 아름다운 장면은 없다’는 속담이 이방인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 말로 그들은 고결한 감성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자기 양심의 순결에 의하여 유지되고 또한 지탱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편 35 편
2. 본문 12-14절은 “(12)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저희가 내게 선을 악으로 갚되 나의 영혼을 빼앗기까지 하나 -칼빈)
(13)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 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4)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 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입니다.
다윗은 다시 원수들의 악의가 대단히 악화된 특질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윗이 무죄이며 그들에게 범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자기를 부당하게 억압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으로부터 많은 기쁨과 많은 은혜를 받았던 그런 사람들이 매우 예상외의 배은망덕한 방법으로 그에게 보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수치스런 행위는 착한 사람들의 마음에 아픈 상처를 주며 견딜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원수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하였으며 또 비록 그들이 탐욕스러운 잔인성으로 우리의 상처를 짓밟으려고 덤벼들어도 우리가 온유하게 머리를 숙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증거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잔인하고 야수적인 배은망덕이 형벌을 받지 않고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잔인성은 그들이 온유하고 화평한 사람의 영혼을 빼앗으려고 애를 썼다고 기록되었을 때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혼에게서 위로를 빼앗고 또 그 영혼이 절망으로 압도당하도록 황폐시키며 또한 멸망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다윗이 나중에 자기가 그들에게 행하였던 친절한 행위를 자세히 열거하고 있는데 만일 그들이 공정과 인간애(人間愛)에 대한 어떤 감성을 가졌다면 다윗의 행위는 그만큼 상호간의 사랑에 대한 거룩한 유대가 이루어졌어야 될 것들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돈으로 혹은 물질로 그들을 도왔다거나 그들에게 관대함을 베풀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자기가 물질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손이 자선을 베풀 때에라도 마음이 닫혀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의 증거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곧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불행을 슬퍼하였으며 또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그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았다고 서술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그들이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에게 동정심과 관심을 가졌다고 서술합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그렇게 지대한 은혜를 베푼 이래 그가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들이 다윗을 대적하여 증오를 퍼붓는 일보다 더 비열하고 배은망덕한 죄가 있겠는가?
시편 35 편
용어를 설명한다면 우리는 ‘병들다’라는 용어를 여기서 은유적으로 어떤 형태의 근심이나 슬픔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의 뜻은 어떤 불행이 그들에게 닥칠 때마다 자기가 그들의 슬픔에 동반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좋은 증거는 다윗이 ‘그의 품으로 돌아왔도다’ 라고 기도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표현의 적절한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진실로 느끼는 것보다도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듯이 가장하는 것처럼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과장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고 은밀히 기도함으로서 또 세상이 그것을 몰래 들어서 알고 있도록 하지 않음으로서 다윗은 자신이 신실하였고 또한 진정으로 그들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였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은밀하고 내적(內的)인 그의 마음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채, 혼자 그의 마음 속으로만 즐기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듯이 눈물과 기도를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 쏟아놓지 않고 가슴속으로만 울거나 기도하면서 그의 마음의 격정을 감추고 자신의 증거에 대하여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화법에서 시편기자가 말한 것처럼 그의 몸을 숙이고 그의 머리를 늘어뜨리면서 기도하고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이 곧잘 그런 것처럼 팔장을 끼고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 속에 위선이 없었다는 그 의미를 우리는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의 말에 저주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여 ‘주여 만일 내가 그들의 번영을 원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불행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 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 해석입니다.
이보다 그럴듯한 다른 해석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서 아무런 유익이 없었으므로 나의 기도의 열매가 나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목적에 더욱 부합되고 선지자의 말씀에도 일치되는 의미는 ‘내가 마치 나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나이다’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시편기자의 은밀한 애정에 대하여 말했던 것이 분별있는 신자들에게 만족을 주기를 바랍니다.
‘굵은 베옷’과 ‘금식’은 다윗이 기도를 위한 도움으로서 곧잘 사용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기도를 할 수 있으며 또 기도를 위하여 매일 금식이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으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베옷을 입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전 사람들은 절박한 필요성이 그들에게 임박하였을 때 이렇게 하였습니다. 공적인 재난이나 위험이 닥쳤을 때 그들은 베옷을 입었으며 또한 금식을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겸손히 하고 또 그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시편 35 편
같은 방법으로 어떤 사람이 특별히 고통받게 되면 스스로 더욱 기도에 전념하도록 그 자신을 격려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표징으로서 베옷을 입고 금식을 하였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베옷을 입었던 것은 원수들이 모두 힘을 합쳐 그를 파멸시키려고 애쓰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간청하기 위하여 다윗이 스스로 그의 원수들의 죄를 짊어졌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베옷을 착용하는 것과 재 속에 앉아 있을 것을 무수한 율법적인 의식 중 하나로 여길지라도 금식은 다윗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우리들이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싫어하시는 징조를 우리에게 보이심으로 우리를 회개하도록 부르실 때 우리가 일상 방법으로 기도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겸손을 촉진시키기에 적합한 방법을 적용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마치 그의 형제들인 것처럼 그들을 대하고 또 행동했습니다.
3. 본문 15절은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나의 절뚝거림을-칼빈)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 아니하도다”입니다.
우리는 왜 주석가들이 ‘절뚝거림’이라는 말을 걱정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발을 다쳤다고 추측하며,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어떤 질병으로 절뚝거렸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체 구절을 주의깊게 고찰할 때 다윗에게 내려진 그 재난에 대한 표현을 통하여 다윗이 언급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마치 다윗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우리가 비틀거리기 시작하고 또 넘어지려는 것을 그들이 보자마자 그들은 우리를 대적하려고 함께 모이고 또한 완전히 우리를 덮치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 속에는 우리가 ‘병들다’는 말에서 이미 살핀 것과 동일한 은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원수들의 불행을 보면서 때때로 가엾게 여겨 이미 비참하게 되어 버린 사람들을 증오하거나 박해하는 일을 그칩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전 친구들은 다윗이 넘어져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격렬하고 무례한 자극으로 공격했다는 것은 대단히 잔인하고 격렬한 마음의 증거였습니다.
처음에는 다윗이 약간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즉시 자기에게 가해진 모욕이 더욱 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윗은 일반사람들의 비열함과 천함을 추가합니다.
시편 35 편
모두 같은 비난이 아니라 사방에서 그를 공격하는 더 쓰라린 적의(敵意)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선동자들로 각처의 백성들로 일어나 다윗을 멸망시키게 하고, 또 서로 이 모의에 분투하도록 사방에서 다윗을 대적하는 증오의 불길을 붙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대적하는데 얼마나 결의하고 결심하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저희가 서로 모임이여’ 라는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 말들을 그렇게 하는데 대한 어떤 구실을 갖고 있는 자뿐만 아니라 가장 비천한 백성들까지도 함께 모였다라고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 히브리어 םיכנ(네킴)은 문자 그대로 ‘채찍을 맞은 자’나 ‘두들겨 맞은 자’를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열하고 평판이 나쁜 사람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해설가들은 그것을 ‘슬프게 하다’를 의미하는 האכ(카아)라는 단어에서 파생시키며 또 그것을 능동적으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앞의 해석이 다윗은 그 백성들 중의 ‘가장 비천한 찌꺼기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치욕스런 대우를 받았다’는 문맥의 의도에 더 잘 부합됩니다.
“나의 알지 못하는” 말은 그 사람들 뿐 아니라 원인을 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곧 ‘내가 그들을 공격하였거나 혹은 그들에게 어떤 해(害)를 끼쳤다고 불평할만한 어떤 이유가 있기는커녕 우리는 도무지 그들을 알지도 못한다’ 입니다.
동시에 이 말들은 다윗 쪽에서의 하소연이 암시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이유 없이 자기에게 노했다는 것으로 자기가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자기를 향해 맹렬히 증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절의 하반절에 대하여도 역시 주석가들이 다른 견해들을 가질지라도 우리가 참되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그들이 베었고 또 그치지 않았다’가 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은유적인 것임은 의심할 여지없습니다. 또 ‘베다’라는 말은 마치 다윗이 ‘그들이 오만하게 그들의 열린 입으로 나를 대적하는 조롱과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이 입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 “마지 아니하도다”(또 그치지 않았다-칼빈)라고 추가된 것은 히브리어에서 흔히 있는 반복입니다.
또 다윗의 원수들이 그를 대적하려는 격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악한 말에는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처음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그들의 크게 벌린 입으로 계속 지껄인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35 편
시35:16-18 저희는 연회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 악인들은 연회 석상에서도 그 은인(恩人)을 한 개의 조롱거리로 여기고 언제든지 해하려고 이를 갑니다. 연회는 원수되었던 것도 풀어버리는 좌석인데 거기서도 그 은인을 질시(疾視)하고 해하려 함은 극히 굳어진 불의한 심령입니다.
1. 본문 16절은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어 조롱하는 자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위선자들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로는 다윗이 다만 그의 원수들의 결합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에는 속임수에 탐닉되었으며 또 그 결과로 모든 수치심을 상실한 교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이 생각하는 유일하고 계속적인 주제는 ‘어떻게 하면 그들이 이 고통 당하는 자를 멸망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라는 취지가 있습니다.
다윗의 묘사는 모든 불행이 일어나게 한 원흉인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되돌아갑니다. 또 다윗의 묘사는 권세를 잡은 자들에게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 묘사는 오히려 생각없이 충동에 의해 행동했던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에게 적용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특히 통치자들과 이와 유사한 인물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그들이 마치 사나운 야생 동물들처럼 자기를 향하여 이를 갈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잔인성을 비난합니다.
다윗은 먼저 그들을 ‘망령된 자’라고 부름으로서 다윗은 마치 자기가 극도의 비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과 원조를 더 쉽게 얻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그들을 ‘농담하는 사람’ 혹은 ‘조롱하는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서 그들이 그런 뻔뻔스러운 사람이며 또 모든 수치심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에게는 못할 짓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히브리어 גועמ(마오그)의 뜻은 주석가들에게 의견 일치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타다 남은 불 위의 난로에서 구운 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문맥에 적절한 의미를 추출해 낼 수 없었기에 그것이 수다스러운 농담이나 혹은 무익한 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공상에 더 광범위한 범위를 허용한다고 가정하면서 시편 기자의 뜻은 그들이 조롱하고 농담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그런 사람들의 조롱이 그들에게는 빵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시편 35 편
우리에게는 그것이 동시에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되기에 우리가 그 말에 대한 적절한 의미를 보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גועמ(마오그)를 ‘과자’ 혹은 ‘타아트’(파이의 일종)로 받아들이는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다윗이 우리가 왕궁에서 흔히 발견하게 되는 훌륭하고 맛좋은 식사를 요구하고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아주 적은 보수 때문에 그들의 혀를 놀려 다른 사람들을 욕하는 비굴하고 야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대든지 한 조각 빵을 위해 자기 혀를 파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윗이 그의 원수들의 본질과 성격에 대하여 묘사하는 다른 구절들을 주의깊게 살펴볼 때 우리는 연회석에서 농담을 지껄이고 조롱하면서 탐닉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잔을 들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사람들이 언급된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의 잔치와 연회(宴會)가운데서 모든 수치를 다 팽개쳐버린 악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제거할 방법을 심사숙고한다고 하소연합니다.
2. 본문 17절은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까지’로 번역한 히브리어의 의미는 명료하지 않습니다.
라틴어는 ‘어느 때까지 주께서 보실 것이며 또 얼마동안 한마디 말씀도 없이 참으시겠나이까’ 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신 후에 어느 때라야 마침내 주께서 보시기 시작하겠습니까’ 라는 다른 주석도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악인들이 모두 난폭하게 덤비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묵인하시며 진노하시기를 너무 오랫동안 지체하고 계신다고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하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록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그것을 적절하게 심판하실 그때가 올 때까지 성도들이 조용히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그들의 의무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 자신의 지연으로 경험하는 슬픔에 눈물 흘리며 기도할 것을 허락하십니다.
동시에 다윗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만 소원의 재촉으로 인하여 무모하게 처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도의 비탄으로 인하여 부득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기의 생명을 제거하려고 돌풍같이 덤벼든다고 말합니다.
또 다윗은 그들을 ‘사자들’에 비교합니다.
시편 35 편
또 다윗은 자기 영혼을 ‘외로운 것’ 혹은 ‘유일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일한 영혼’이라는 표현이 ‘귀하고 소중한 것’ 혹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편 22편 21절에 언급된 다윗의 의도를 충분히 고려치 않은 것입니다.
3. 본문 18절은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다시 모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일에 전념합니다.
우리가 시편 116편 17절에서처럼 감사의 제사보다 더 큰 보답으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가 격렬한 공포와 위험에 에워싸였을 때라도 다윗은 이미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은 것처럼 감사드리고 있으며 이것으로 다윗은 용기를 가지고 견고히 되어 자신의 요구를 얻게 될 확신을 가지려 했습니다.
이 감사로 우리는 정복할 무적(無敵)의 용기에 뚜렷하고 결정적 증거를 구별합니다.
비록 다윗이 결국 모든 도움이 끊어져 자신의 일이 큰 곤경과 절망의 상태에 있는 버림받은 자와 망명객이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을 생각합니다.
또 죽음의 어둠 속에서 다윗이 분명히 빛나고 있는 구원을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장엄한 제사를 맹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개인적으로 감사 드림을 말할 뿐 아니라 큰 위험들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 율법의 규정에 의한 공적(公的) 집회에서 곧잘 드렸던 그런 감사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반절을 ‘강하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번역을 적합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교회가 큰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교활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엄숙한 집회를 갖기 위하여 성전으로 자주 올라갔던 많은 군중과 또 많은 백성들을 의미하였기에 우리는 다윗이 ‘폐회’에 대하여 말하고 다음에 ‘많은 백성들’에 대해 말할 때 다윗이 그의 습관을 따라 같은 것을 두 번씩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35 편
시35:19-23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다윗은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1. 본문 19-21절은 “(19)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 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20)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21)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다윗의 패배와 멸망을 볼 것을 기대하여 기뻐 날뛰었으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악한 소원을 실현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소송에 호의를 베풀어주시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은 자기에게는 아주 잘못이나 이유도 없는데 그들이 자기를 미워하였으며 또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잔인하게 자기를 대적하도록 한 것은 그들 자신의 악의였다고 항의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그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하게’라고 번역한 דקש(셰케르)라는 히브리어를 어떤 사람들은 마치 다윗이 그의 원수들이 숨어서 그를 기다렸다고 생각한 것처럼 ‘속여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교묘하게 추론한 것입니다.
곧이어 나오는 반복은 그들이 공격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친구였으며 또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그들이 자진하여 또 고의적인 의도로 박해했기에 다윗은 그들의 악한 증오에 대해 하소연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ץדק(카라츠)는 여기서 ‘조롱하면서 흘긴 눈으로 눈짓하다’를 의미하며 그것은 시편 22편 7절에서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라고 나타냈던 것과 같습니다.
다음 절에서 다윗은 계속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마음 속에 간직하기 위하여 자기가 화해할 수 없는 성품의 원수들, 그리고 완전히 잔인하게 되어버린 원수들을 상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 선포합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더욱 비참하게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구원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은 오직 폭동과 살인만을 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의 의미는 עגד(리게)라는 단어의 모호한 의미 때문에 약간 애매모호합니다.
시편 35 편
이 말을 파생시킨 단어는 때로는 ‘베다’ , ‘쉬게 하라’, ‘조용히 평화로운’이라는 의미가 있기에 그것을 ‘땅 위의 온유하고 화평스러운 자’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땅 위의 평온하고 안이함을 가진’이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부(富))와 풍요 속에서 살며 또 조용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억지 해석같이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악한 사람들의 악하고 거짓된 계획이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 말을 ‘동굴 속’이나 혹은 ‘은밀한 곳’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땅 위의 갈라진 곳’이라고 매우 적절하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온유는 비참히 고통받은, 깨어지고 상처받은 자들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어떤 열린 틈을 보자마자, 어떤 재난이 다윗에게 일어나자마자 즉시 자기를 파멸시키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단언합니다.
다윗이 번영하고 또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감히 대적하는 말을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다윗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을 때에 그들이 다윗의 파멸을 획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악인들은 대부분 노예근성과 비굴한 성품을 갖고 있어 착하고 순전한 사람들이 역경에 빠졌을 때처럼 유리한 기회가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오만한 어조를 가장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러하기에 다윗은 다음 절에서 그들에 대해 표현합니다.
그들은 열린 입으로 아! 아! 라고 부르짖으면서 또 그들이 다윗을 이긴 것을 보고 기쁨에 겨워 박수를 치면서 그들이 크게 기뻐하였던 광경, 곧 다윗이 진흙 속에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박수 치고 있는 것이라고 다윗은 묘사합니다.
2. 본문 22-23절은 “(22)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 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23)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여기서 보신 것으로 나타나는 모습과 또 우리가 앞 절에서 본 것과 같은 악인들이 기뻐하는 광경 사이에는 함축된 대조가 들어있습니다.
다윗의 말한 취지는 ‘너희는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몹시 기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며 만족해하는 자들의 잔인성과 악을 보시며 주목하시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시편 35 편
다윗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기는 원수들과 논쟁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고 있으며 또 자신의 믿음을 뒤흔들려고 하는 자들과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려는 자들의 모든 맹렬한 공격에 대처하는 방어물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두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원수들의 조롱과 조소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여기에 적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간과하고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우리의 걱정들을 그 아버지가 알지 못하시는 일이 없게 실제로 보시도록 그 아버지에게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악인들이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모든 기회를 열심히 찾고 있다는 것을 보실수록 그 아버지는 더욱 신속하게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은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떨치고 깨소서’와 같은 여러 표현방식으로 나타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돌보시며 또 그들에게 가해진 모든 악을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확신하였기에 다윗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를 바르게 가지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신앙이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 속에 비취게 해야 합니다.
순서상으로 이것이 모든 우리의 소원에 가장 앞서야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제지하고 통치하여야 합니다.
시편 35 편
시35:24-28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이여
이 말씀을 보면 이 시인은 신자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무조건적으로 그의 원수들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도니 만큼 그 이름에 합당한 의(義)를 소유하였고, 그 소유한 의대로 판단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그의 종교가 윤리를 생명처럼 여긴 증표입니다.
1. 본문 24-25절은 “(24)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 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25)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 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며, 또 자신의 의로운 소송을 변호하실 것이라는 앞 절의 기도를 확증합니다.
다윗은 잠시동안 마치 버림받고 잊혀진 사람처럼 고통 당하였습니다.
다윗은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의’를 자신 앞에 둡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의이시므로 선한 이유에서 종들을 보호하심으로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를 바라서 하나님께 하는 진지한 호소입니다.
또한 분명히 우리가 버림당하고 모든 도움을 빼앗긴 것처럼 보일 때 우리의 구원이 달려있는 하나님의 의는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다는 이 생각보다 시험을 이기는데 사용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인 치유책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인내하도록 권유하면서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라고 말씀합니다(살후1:6).
이제 다윗은 다시 이곳에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또 다윗은 원수들의 오만을 제지하심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나타내시도록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 원수들이 더 오만히 우리를 공격할수록 하나님은 더 우리를 도우시려 하십니다.
다윗은 다시 그들을 화법형식으로 소개함으로서 그들의 소원의 잔인성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또 다윗은 이 말로 모든 일들이 그들의 소원대로 된다면 그들은 사악함을 제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악인들이 더욱 뽐낼수록 그들은 더욱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므로 다윗이 이것을 자기 소망을 격려하는 논증으로 사용하며 또 그것을 기도의 호원과 확신으로 사용하고 있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35 편
2. 본문 26절은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입니다.
이 저주는 ‘함께’ 혹은 ‘동시에’라는 표현 속에 특별한 강조가 들어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윗을 대적해 싸우려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군중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다윗은 자기가 두려움 때문에 굴복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드시자 곧 그들을 모두 일격에 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악한들이 ‘다윗에게 해로운 것만을’ 찾고 또 다윗이 해를 당하는 그것을 ‘기뻐한다’라고 기록된 것은 그들이 다윗에 대한 잔인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들’이라고 쓰여진 것은 그 악한 자들의 교만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악행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더욱 증오스러운 것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그들을 교만과 잔인성으로 가득찬 자들로 표현합니다.
이 기도의 형태가 성령의 인도로 다윗에게 지시된 것인 만큼 교만한 자의 말로(末路)가 여기 예언된 그대로 부끄러움과 수치로 멸망되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원된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됩니다.
3. 본문 27-28절은 “(27)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하게 하소서
(28)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입니다.
기원법으로 표현된 이 두 표현이 미래 시제로 번역되어 온 것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우리는 그것을 미결인 채로 남겨둡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하나님께 구한 구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그것으로부터 틀림없이 나올 결과를 무척 기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반적인 기쁨과 선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송축하도록 모든 성도들을 고무할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의로운 소송이 결백한 사람으로 옹호되도록 그 소원의 신용을 모든 성도들에게 돌립니다.
다윗이 자기에 관한 잘못되고 부당한 소문에 편승된 소박하고 의심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거의 일반적인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시편 35 편
그러나 그 사람들 가운데 다윗에 대한 공정하고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또 다윗의 덕행이 너무나 잘 알려진 거룩한 사람이 그렇게 부당하게 또 악하게 억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몹시 슬퍼하였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또한 분명히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은 사람들이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또 괴롭힘을 받는 것을 볼 때에 만일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없는 입장에 있다면 최소한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동정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는 말을 할 때 다윗의 의도는 자기가 앞에서 언급한 악인들의 교만에 반대하여 이 말을 넌지시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악한들이 자신들의 교만한 마음 속에서 또 그들의 오만하고 건방진 행동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이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의 위엄 속에서 빛을 발하시며 또 바로 그 행위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그의 종들을 특별히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시며 또한 신자들의 화평 속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기쁨을 누리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다시 이 시편의 결론으로 자기가 보호를 받고 또한 구원받았던 그 의로우심을 적절하게 찬양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구원행위의 최후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 난관에서 건짐 받은 뒤에도 하나님을 찬송할 것 뿐 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갚아 드리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행위를 송영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히13:15).
“주님 자신의 무한하신 의”를 매일, 또 종일, 평생에와 영원토록 찬송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시36:1-4 악인의 죄얼이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심에 있어서 자기를 비열하게 경멸하는 악한 자들을 참으시기에 본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놀라움과 경탄을 총괄적으로 표명하고 있다는 생각에 일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견해는 약간 다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선지자가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에 의하여 심히 괴로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선지자는 그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의 악행을 하소연합니다.
둘째로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각별하고 특이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그분의 무한한 선하심 안에서 피할 곳을 찾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호의적이시므로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위안과 쉼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실은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아래서 안전함을 회상함으로서 악인들의 온갖 공격에 대항하여 스스로 무장하여 강하게 하는 이 시의 결론에서 분명해집니다.
1. 시편 36편 주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입니다.
제 18편과 이곳에만 “여호와의 종”이란 칭호가 다윗에게 붙여진 이유는 분명합니다.
극히 어려운 모든 투쟁 가운데서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의 눈에 다윗이 용감한 투사요, 불패의 전사임이 증명되었다는 사실 외에 명확하게 확인될 수 없습니다.
불경건이 억제되지 않고 우세하며 그 불경건의 희미한 그늘이 우리 영적 시력을 어둡게 할 때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갖고 우리 마음에 참을성을 주어 우리로 계속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본다는 사실은 얼마나 드물고 독특한 미덕입니까?
2. 본문 1절은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입니다.
1) 본문 1절 상반은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입니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의 해석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글자대로 번역은 ‘죄악된 말’ 혹은 언사, 또는 ‘죄악이 악한 자들에게 이르기를’입니다. 그러나 ל(라멧)이 히브리어 중에서 때로는 ןמ(민)을 대신하여 쓰이기에 어떤 사람들은 ‘불경건 도는 죄악이 내 마음에 있는 악인들에 관하여 이르기를’이라고 번역합니다.
시편 36 편
이는 마치 이 선지자가 ‘나는 악인들이 범하는 악으로부터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 감화를 받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바른 의미에서 멀어져야 할 필요는 없기에 우리는 이 선지자가 한 말이 ‘악한 사람들의 악의가 숨겨져 있고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으나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크게 말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 악의가 말하거나 암시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인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함에서 다른 이들과 일치합니다.
첫째로 선지자는 외부로 나타나는 과오를 말하지 않고 그 근원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은 ‘악한 자들이 그들의 악의를 간교하게 모르는 체하고 있지만 나는 그 악을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악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과 악인이 마치 자기들의 행위에 관하여 헤아림을 받지 않을 것처럼 갖가지의 악을 향하여 무모하게 덤비고 있기에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심판이 그들의 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녕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종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부패를 명백하게 알아본다고 말했을 때 다윗의 말은 더욱 강조적입니다.
다윗은 일반적인 악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멸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악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윗이 여기에서 비참할 정도로 열심히 책망하고 있는 것에 무감각한 자가 많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데 완강해지면 불경건은 마침내 그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자신의 부패된 욕망이 충동하는 대로 두려움 없이 온갖 죄를 범하는 중에 갖는 무모한 확신이 모든 거룩한 권면을 멸시하고 비웃는 행위와 결합될 때 이는 사단에 의한 마법이며 이와 같은 사람의 상태가 실로 절망적임을 말해 줍니다.
참된 신앙은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이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힘을 갖고 있고 그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을 몰아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악인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들이 무서울 만큼 격심하게 마음의 동요를 느끼는 것을 그 경건한 자들이 볼 수 없게 하거나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2) 본문 1절 하반은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입니다.
다윗은 이 짤막한 말 가운데서 모든 악이 암시하는 것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란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이 파괴되고 짓눌려 하늘에 만인의 심판자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렵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불경건이 악한 자를 극히 광분하도록 충동하여 하나님께 대한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범죄하는데 빠지도록 하면서 우리 마음 안에서 그 악인에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시편 36 편
위선의 허울 아래에 자기들의 가증스러운 악의가 숨어 있고 깊이 묻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위선을 드러내기 위한 목격자 또는 재판관으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는 악인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상상하고 있는 것을 잘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범죄를 그치지 않으면 그들의 총명은 부패되고 어두워져서 그들은 이성없는 짐승처럼 각종 극한 방탕을 감행하는데 이 사실은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눈은 현재의 생에 있어서 사람의 안내자요 지도자이며 이 눈으로 말미암아 다른 감각이 좌우되고 있기에 두려움이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사람들이 향하고 있는 사방으로 그 두려움을 나타냄으로서 욕망과 열정을 어거하기 위한 억제의 역할을 할 때 사람들은 자기 목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반대되는 표현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악인들이 전혀 하나님은 존중하지 않고 온갖 방탕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부패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소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절은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미운 것으로 발견되기까지 하는도다 - 칼빈)” 입니다.
여기서 이 시편 기자는 그들이 가진 성격의 열매, 혹은 표적에 의하여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행악자들은 악한 행위를 자행하는데 크게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이 행위를 다른 사람들이 미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악한 자들은 마음 속에 있는 그 본래의 고집을 세우고 악한 길에서 고의적으로 자신을 강퍅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첫째로 그들이 자긍함으로 자기들의 악을 더하게 하고 있어서 그들은 범죄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들의 죄악이 미운 것으로 발견되기까지’(칼빈)라고 말했을 때, 이 말로 다윗은 그들의 단호한 고집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들이 거짓으로 아부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그들의 죄악이 모든 사람에게 미운 것이 될 때까지 악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그리하여 그는 자기 죄가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번역하여 악한 자들은 주저없이 죄악 속으로 무모하게 돌진하기를 고집하여 그들의 부패된 욕망으로 방종하여 충족되고 싫증이 나자 죄악을 싫어하게 된다고 이해합니다.
가장 부패된 자들도 때로는 자기들의 죄악의 행위로 인해 불만족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해석이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시편 36 편
즉 악한 자들은 일단 발각되면 일반적인 불쾌감을 일으키는 그들의 죄악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만 그들은 그들에 대한 어떤 싫어하는 감정에도 아랑곳없이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들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악을 미워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자신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지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부끄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을 상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전혀 깨닫지 않고 악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을 정죄합니다.
그들은 선과 악의 모든 구분을 철폐하고 있으며 양심이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회개의 충동을 개의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 양심을 무감각한 상태로 만듭니다.
분명히 여기 설명되는 악에 대한 열정은 우리들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주제입니다.
열정이란 버림받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스스로 미운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범하는 죄악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고 있다는 사실로 나타납니다.
4. 본문 3절은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입니다.
본 절의 상반 하반은 동일한 한 가지 사실, 즉 궤휼과 헛된 것에 빠진 악한 자들은 지식의 빛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의도입니다.
다윗은 악한 자들이 간계와 술책으로 다른 이들을 함정에 빠뜨릴 뿐 아니라 특히 그들이 정직과 신실성을 갖고 있지 않는 사실을 책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은 갖고 있는 죄인과 악한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는데 온전히 자신을 몰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경멸하는 자들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이 그의 입에 항상 진지하지 않은 변명과 헛된 핑계들을 갖고 이 변명과 핑계로 모든 바른 파문을 배격하고 조롱하는 일에 용기를 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이 현재의 자신들 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의욕이 없기에 선과 악의 구별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고의적으로 억누르고 있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행하도록 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제 다윗은 악한 자들이 이 총명을 회피하고 애써 이것을 제거시키므로 부득이 그들의 악을 회개하고 그들의 생활을 고치는 일이 없도록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때든지 바른 길에서 떠난다면 이 경우에 유일한 구제책은 우리의 총명에 대한 눈을 뜨는 것인 사실을 이 말씀으로부터 배웁니다.
이는 우리가 선과 악을 바르게 판단하여 방황하는 곳에서 옳게 인도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대신에 사람이 가르침을 거절한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절망적인 타락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36 편
5. 본문 4절은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입니다.
거룩한 다윗은 악한 자의 악이 은밀하고 극히 단호한 성격을 지닌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기치 않던 경우가 갑자기 나타나기에 악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많은 사람들이 과오를 범하고 죄악에 빠지는 일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하는 악인들이란 사람들이 보는데서 떠나 있을 때와 외진 곳에 있을 때 악행을 계획하며 그들 앞에 어떤 유혹이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악한 실례가 그들을 자극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스스로 악을 꾀하며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충동을 당하지 않아도 악을 행하려고 스스로를 충동하는 자들입니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라는 말로 다윗은 버림받은 자들이 가진 성격의 특성을 묘사하므로 참된 신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에서 모든 악한 생각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혼자서 여러 가지를 묵상할 때 스스로를 연단시키고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볼 수 있게 되기를 이 말씀에서 배워야 합니다.
다음에 다윗은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라고 하여 그들의 완고함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려는 목적으로 한사코 자신들을 강퍅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를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들은 고의로 눈을 감고 무모히 돌진해 자신들을 악의 노예들에게 내줍니다.
이제 앞절에서 나타낸 악인들과 하나님의 백성간에 대조를 간략히 논합시다.
악인들은 아부함으로 자신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엄격히 절제하며 엄밀한 반성으로 자신들을 살핍니다.
악인들은 고삐를 늦추고 악을 향해 무모하게 돌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스스로를 억제합니다.
악인들은 자기들의 범죄를 궤변으로 가리거나 변장하여 빛을 어둠으로 바꿉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스스로 인정하고 솔직한 고백을 함으로 회개에 이릅니다.
악인들은 모든 건전한 판단을 배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밝은 낮의 빛에 나아옴으로서 해명하고자 합니다.
악인들은 잠자리에서 악을 행하는 갖가지 방법을 고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 속에 어떤 죄악된 욕망을 궁리하거나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부지런히 자신들을 경계합니다.
악인들은 심각하고 확고하게 하나님을 경멸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항상 싫어하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품습니다.
시편 36 편
시36:5-9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다윗은 하나님만이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 백성의 구원이신 사실을 역설합니다.
1. 본문 5절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구름에까지 미치나이다 - 칼빈)” 입니다.
주석가들은 다윗이 세상의 어디에나 충만되어 있는 심한 부패와 비행을 말한 다음에 사람들이 비록 죄악과 범죄에 빠져 있을지라도 그들을 향하여 사랑과 선한 뜻을 계속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심을 열광적으로 찬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갖습니다.
이 선지자는 사람들의 극히 심한 부패를 말한 후에 그 부패에 감염되거나 마치 홍수에 의해서처럼 그 악인들의 행위에 끌려들까봐 이 주제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다른 주제를 깊이 생각함으로서 정신을 가다듬습니다.
악인들을 정죄함에 있어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진 악의가 우리 마음 속에 감염되어 들어오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악의를 불평한 후 자신을 참으로 경건하고 순전하며 깨끗하게 지키는 사람은 백 명 중에 한 사람도 있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크고 깊은 구덩이처럼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삼킬 것 같은 슬프고 두려운 혼란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세계가 하나님의 선과 의로 충만하며 하나님께서 극히 엄격한 공평의 원리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고 계심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있는 부패로 우리들 마음이 충격을 당하고 크게 놀라움을 당할 때 모든 것을 뒤엎고 혼란시키는 사람들의 악만을 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알 수 없는 혼동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밀하신 설리를 심사숙고하는 데까지 경탄과 놀라움으로 우리의 생각을 드높이는 것은 우리에게 마땅한 일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네 가지 기본 속성을 열거합니다.
다윗은 제유법적 표현으로 이 네 가지 속에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들을 포함합니다.
이 제유법에서 다윗이 암시하는 것은 세계가 되는대로 움직이고 우연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다고 우리 육신의 이성이 우리에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항상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와 연합되어 있는 사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36 편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다’는 말에서 다윗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마치 하늘같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의미로 다윗은 ‘주의 성실하심은 공중에 사무쳤으며’(칼빈)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에 쓰인 성실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심에서 보여주신 성실하심이든지, 하나님의 통치의 올바르고 잘 규정된 성격을 나타내는 데에 그의 정직하심이 순전하고 모든 궤휼에서 떠나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 어기지 아니하시고 성취하심에 있어서 항상 신실하신 약속에다 우리가 이 말을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유사한 다른 성구들이 많습니다.
2. 본문 6절은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입니다.
본 절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찬사가 입니다.
이 거룩한 작가는 하나님의 의를 높은 산에다 비교합니다.
‘하나님의 산들’이란 표현처럼 사실 히브리인들은 훌륭한 것은 무엇이나 ‘신성한’ 혹은 ‘하나님의’ 라는 호칭으로 다른 것들과 구별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산들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분명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반절에는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했습니다.
이 말로 다윗은 우리가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지, 우리가 위를 보든지 아래를 보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에 의해 배열되고 정돈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하나님의 판단이 우리의 한정된 능력을 훨씬 능가하며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신비롭다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의미에 있어서 심연에 대한 비유적 의미가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장의 앞뒤 내용을 볼 때, 다윗의 말은 더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의미는 사람들 중에 있는 악이 아무리 심하고 그것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온 땅에 넘쳐 흐르는 홍수와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가지신 섭리의 깊이는 더욱 커서 이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은 만물을 배열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사건에 의한 혼동과 무질서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이 혼동과 무질서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설명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에 대한 판단은 하늘과 땅을 채울 수 있는 아주 깊은 심연에 비교가 됨은 지극히 정당합니다.
그것의 무한한 위대함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황홀지경에 이릅니다.
또 우리의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슬픔은 멀리 떠나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 절의 끝에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니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성이 없는 피조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섭리적인 배려를 확대하고 계시므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얼마나 더 많이 공급해 주시지 아니하겠는가라는 취지를 갖습니다.
시편 36 편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우리들 마음에 어떤 의심이 생기면 우리는 들짐승들을 위해서도 음식을 마련하시고 현재의 상태와 같이 그들을 보전하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중단하지 않는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함으로서 우리를 강건케 하고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3. 본문 7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하나님의 자비는 고귀하며 또 그 자비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고귀하다’ 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문맥과 너무 동떨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자비가 신들, 곧 천사들과 인생들에게 극히 크다’ 고 이해하고 있으나 이 의미는 지나치게 미묘합니다.
우리는 또한 유대의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에 관한 새롭고 미묘한 설명을 얻고자 아무 이유없이 염려하고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고 있습니다.
이 선지자가 한 말의 의미는 완전히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란 인생이 하나님의 자비의 그늘 아래 피하는 것은 그 자비가 크고 또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찬양을 논하기에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향해 나타내시는 특별한 호의를 다윗이 말한다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의 견해는 대단히 정확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인생들을 전부 가리킨 것처럼 보이지만 곧이어 나오는 말씀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성실한 자들에게만 적용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갖는 위대함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다윗은 일반적인 말로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아담의 후손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으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시편 8편 4절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악인들이 지나치게 악을 향해 달려갈지라도 이러한 유혹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의지하고 그의 아버지로서의 돌보심에 자신들을 맡기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36 편
또 반면에 정신이 타락되고 마음이 더러워진 악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믿음으로 인도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날개의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즐기는 선하심의 감미로움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는 은유적 표현인 ‘날개’는 성경 안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 말로 하나님은 암탉이 그 날개 아래 자기 새끼들을 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 아래 안전하게 보전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에게로 돌아오도록 친절하고 큰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4. 본문 8절은 “저희가 주의 집의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입니다.
우리는 “주의 집의 살찐 것”이란 말을 통해 이 선지자는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곳간에 쌓아놓으신 많은 좋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영적인 은혜에 국한시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말이 영원한 하늘의 행복을 포함하는 복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행복과 위안에 필요한 온갖 복을 포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선지자가 여기서 사용하는 어법 속에는 지상의 복의 용도가 믿음의 은혜로운 체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의 행복에 합당하고 올바르게 지상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실컷 배를 불릴 때 그들의 몸은 실로 소나 돼지의 몸처럼 살이 찝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항상 비어 굶주립니다.
자기들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만족한 자들은 오직 신실한 자들입니다.
그 선하심은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살찐 것’ 과 ‘마시다’ 라는 표현은 온전하고 완전한 충만을 의미합니다.
‘강수’ 라는 말은 흘러넘치는 풍성을 의미합니다.
5. 본문 9절은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앞 절의 가르침을 확증합니다.
이것에 관한 지식은 극히 유익하여 어떠한 말로도 이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시편 36 편
악인은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은사들까지도 그들의 악한 남용에 의해 더럽히고 있기 에 우리가 그 구별을 고찰하고 보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선하심으로 풍성하게 배부름을 얻는 것보다는 수백 번 굶주려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기들이 살고 움직이고 존속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상상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와 반대로 여기서 경건한 자들의 경험으로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이름을 통해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로 다윗은 하나님 밖에서 발견되거나 또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생명은 한 방울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본 절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광명’이란 은유적 표현은 암암리에 극히 강조적이어서 주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지 않는 한 사람들은 전혀 빛을 갖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생에 있어서 빛이 진정 이러하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밝혀주시지 않는 한 우리가 어떻게 세계의 빛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본래 사람이 가진 이해의 분량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또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은사에 의해서만 깨우침을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경건한 자들만은 하나님께로부터 빛을 얻습니다.
또 그 빛이 없는 자들은 계속 흑암에 묻혀서 숨이 막힌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편 36 편
시36:10-12 주를 아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게 가장 큰 선물로 하나님 자신을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아 모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아는데서 더욱 자라가게 하십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신 구원 역사가 놀라운 사실을 말한 뒤에 자기 자신이 그 은혜를 “계속” 받기 원합니다(10-12).
1) “주를 아는 자”와 “마음이 정직한 자”는 동일한 사람입니다.
창조주와 구속의 주님을 아는 자만이 정직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를 안다 하면서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치 않으면 외식 자입니다.
또 “마음이 정직한 자”는 무엇이나 주의 뜻을 따라 행하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또 “마음이 정직한 자” 는 실수한 것은 정직하게 시인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성도가 하나님의 인자하신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2) “교만한 자”와 “악인”과 “죄악을 행하는 자”란 모두 동일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또 회개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신 구원이 이런 사람에게는 임하지 않으므로 패망을 당할 뿐입니다.
자기를 믿고 주를 인정치 않는 자는 주의 인자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정직하게 자기는 할 수 없는 죄인인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이 은혜를 받습니다(10절).
1. 본문 10절은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입니다.
다윗은 지금 기도 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전반적으로 주께서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계속 자비 베푸심을 구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원수들을 대항할 주의 도움을 애원하면서 자신을 위해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늘 위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 자비를 연장하시거나 확대하신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너무 미숙한 말의 형식에 구애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앞 절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 말했을 때 다윗의 의도는 ‘내가 이미 말한 것같이 하나님의 자비가 하늘에 갇혀 있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비는 온 세상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려 는 것’ 이었습니다.
시편 36 편
여기서 다윗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비를 자기 백성에게 끝까지 나타내주시리라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를 하나님의 의와 연결 짓습니다.
다윗은 이 두 사실을 원인과 결과로 결합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변호하시고 무죄를 입증하시며 그들의 잘못을 회개 시키사 보증하시고 원수들을 막으시며 그들을 공격하는 모든 자들과 대항해 그들의 복리와 행복을 보전하심으로 자신의 성실하심을 스스로 증명하신 일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그의 백성들에게 값없이 해주셨기에 다윗은 합당한 이유를 대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언급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첫째로 취급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선하신 뜻(호의)에 온전히 의존하기를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참으로 믿는 자들을 설명하는 구절들을 눈여겨 보아야 됩니다.
첫째로 다윗은 “주를 아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마음이 정직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에서 우리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데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믿음의 빛은 반드시 우리에게 정직한 마음을 갖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존귀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2. 본문 11절은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드렸던 기도를 자신의 상황에다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앞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포괄해 말하면서 다윗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 중에 한사람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를 받고자 한 사실을 보입니다
다윗은 “교만한 자의 발”과 “악인의 손”이란 표현을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악한 자들은 선한 사람들을 밟기 위해 자기 발을 들고 그들에게 악을 행하기 위해 손을 준비하고서 그들은 선한 사람들의 멸망을 향해 담대히 돌진하기에 다윗은 하나님이 그들의 손과 발을 억제하여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이 오셔서 자기를 돕지 아니하시면 자기는 그들의 무례와 욕설과 폭력을 당할 위험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자의 기도입니다.
시편 36 편
3. 본문 12절은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구한 것을 이미 얻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기도에서 확신을 얻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확신있는 믿음이 신자를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안에서 확신과 희망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 다윗은 악한 자들의 틀림없는 멸망이 아직 장래의 일로 숨겨져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거기’라는 부사가 쓸데없이 붙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이 자기들의 행운을 자랑하고 세상이 그들을 칭찬하고 있을 때 다윗은 믿음의 눈으로 마치 망대에서 바라보듯이 그들의 멸망을 보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그 멸망의 실현을 이미 본 것처럼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확신을 얻기 위해 기억해야 할 점은 악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보복을 바라는 자들이 그들의 욕망에 따라서 그 보복의 시기를 조급하게 서둔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그 지혜대로 심판하시려고 일어나실 시기를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엎드러지고’ 라는 말씀은 악한 자들이 의심에 마음이 동요되어 미끄러운 곳에서처럼 비틀거리기에 그들이 현실에서 번영할 때에도 아무 안전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 악인들은 완전히 멸망하여 다시 일어날 만한 기대를 결코 갖지 못한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으로 인을 치듯이 첨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다윗과 다윗 안에 있는 옛 백성들에게 하셨듯이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12절 말씀과는 반대로 주의 자녀들은 넘어지고 엎드러지나 다시 일으키십니다.
또 10절 말씀에서처럼 주의 자녀들에게는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고 주의 의를 영원토록 베푸십니다.
시 37:1-6 행악자를 인하여
박윤선의 주석은 이 시편의 시제를 “악인의 일시적 행복을 보고 불평하지 말아라”로 표시합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 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에 의해 지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주 유익한 교훈입니다.
신실한 자들은 이 땅에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일생동안, 세상의 일들이 야릇하게 혼동되어 있는 것을 보기에 더 좋은 결과에 대한 소망으로 슬픔에 달래지 않는 한 그들의 용기는 곧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더욱 대담하게 하나님을 경멸하고 극한 악독 가운데로 돌진해 나아간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더욱 행복스럽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번영은 악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표인 것처럼 나타나기에 세상은 우연에 의해 지배되고 행운이 지배권을 갖다 주거나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분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외에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이와 같은 유혹적인 공격에 대해 이 시편에서 우리를 확고히 해주고 힘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악한 자들이 잠시동안 누리는 번영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들의 행복은 일시적이며 사라지기 쉬운 것이므로 그들은 불행하다고 다윗은 말합니다.
이와 반면에 경건하고 헌신적인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이 당하는 가장 큰 재난 속에서도 행복이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계시며 반드시 때에 맞추어 그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실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역설적이며 모순입니다.
사실 선한 사람이 때로는 극한 가난에 시달리고 많은 어려움 아래서 고달픈 생활을 보내며 비난과 부당한 대우를 당하나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들과 방랑자들이 승리를 거두고 쾌락으로 큰 기쁨을 누리고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에 무관심하시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시편의 가르침은 그만큼 더욱 유익합니다.
이 교리는 우리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실들에서 우리의 생각을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 손을 펴시고 하나님의 관대와 아버지로서의 선하심을 부정하게 악용하는 도적과 강도 같은 악인들에게 자기들의 생활에 대한 엄격한 심판을 내리시기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것을 명하기 때문입니다.
시 37 편
2. 본문 1-2절은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 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입니다
다윗은 악한 자들이 크게 기뻐하는 그 번영은 곧 사라질 것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것으로 괴로워하거나 불안하면 안 된다는 일반 원칙을 정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잠시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결과는 자기들의 운명에 대해 만족할 만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세계는 의와 진리 안에서 지배된다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곧 비틀거릴 것이며 결국에는 완전히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두 가지 죄악된 마음의 감정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가깝게 연합되고 있고, 그 둘 중에 하나는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납니다.
첫째로 다윗은 악한 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 것을 신실한 자들에게 분부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그들을 향하여 투기하는 정신을 갖지 말라고 명합니다.
첫째로 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일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되기가 쉽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버리고 믿음으로부터 떠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또 다른 시험, 곧 그 악한 자의 행위의 영향은 신실한 자들의 마음 속에 자기들도 그들과 함께 같은 악에 참여하고 자 하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감정입니다.
“불평하여 하지 말며”라는 우리가 번역한 히브리어 דחתת־לא(알 팃하르)를 어떤 사람들은 ‘너는 .......과 함께 섞이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너무 무리하여 문맥으로 볼 때에 맞지 않습니다.
8절에 ‘분’과 ‘노’에 관한 명백한 언급이 있는데 이 두 말을 1절에서와 같은 의미와 같은 목적으로 사용된 동사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확실히 불합리할 것입니다.
둘째로 다윗이 하고 있는 명령은 극히 타당합니다.
악한 자의 번영은 우리 마음에 자극을 주며 우리는 곧 그들의 행복과 평안을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다윗은 덧없는 상상적인 행복이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하라고 권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부러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하지 않도록 우리가 경계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다음 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시 37 편
악한 자들이 오늘은 들에 있는 풀같이 무성할지라도 내일은 베임을 당하고 말라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가 성경에 자주 나타나 있는 사실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비유는 극히 적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풀의 생기가 얼마나 빨리 약해지는가를 알고 있으며 사람의 손으로 베지 않더라도 돌풍에 쓰러지거나 태양열에 마를 때에는 시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의 손에 들린 낫같이 악한 자들을 벨 것이며 그들은 급히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 본문 3절은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입니다.
1) 본문 3절 초두는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입니다.
이제 성령에 감동된 이 저자는 계속하여 의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에 그들에게는 결과적으로 모든 일이 좋아질 것을 두 번째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육과 보호를 위한 보살피심을 얻는 것보다 더 좋고 바람직한 것도 없기에 다윗은 의인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과 진리를 좇으라고 권면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교훈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많은 변동이 있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어떤 불안한 두려움에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고 평화롭고 조용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악한 자들이 부당한 수단으로 부유하게 되고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범죄를 거리낌없이 저질러서 세력을 얻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경건하고 덕스러운 생활을 착실하게 해나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매우 열심히 일반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들을 경시하는 것만으로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고대의 어떤 철학자들은 상당히 고상한 마음을 갖고 부당하게 얻어진 부를 경멸하며 속이는 것과 훔치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부럽게 바라보는 허세와 실속없는 장려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들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존귀를 빼앗고 있었으며 참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모든 선의 주인이심과 하나님의 복에 의해서만 번영되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믿음을 첫째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 믿음을 거룩한 생활과 연결짓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의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두어 자신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도록 하는 사람은 바르고 죄없이 살 것이며 선을 행하는 데 헌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37 편
2) 본문 3절 후반부는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들이 그 땅에서 안전하게 살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보다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시고 땅을 얻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로 다윗은 그들이 그 땅을 오래 향유하게 될 것을 선언합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다만 나그네들이요, 잠시동안 머무르는 자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을 펼치사 그들을 보호해 주시므로 그들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삽니다 다윗은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는 곧이어 기록한 말로 이 사실을 다시 확증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그리고 의심없이 신뢰할 것을 권합니다.
성경주석가들이 이 말씀을 억지 해석하고 그들이 정하는 다른 의미로 이 구절을 망쳐버리고 있음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을 삼다’가 능동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인정하여 ‘믿음으로 식물을 삼다’(to feed on faith)라는 말을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 속에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이 우리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우리 형제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서 믿음으로 그들을 살찌게 할 것을 권하고 있다는 견해도 갖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말을 ‘성실’이란 의미로 바꿉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식물을 삼다’라는 말은 사람들 중에서 바르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도와 연관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히브리어의 본질에 의해서 볼 때, 동사 העד(레에)는 ‘먹여줌을 당하다’ 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갖는 의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는 견해가 다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충족시키고 우리가 그 약속들로 만족할 경우에 우리는 믿음으로 식물을 삼게 된다는 해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것이므로 ‘진리가 너희의 음식이 되게 하고 너희 이웃과 더불어 신실하고 솔직하게 담화하는 것보다 너희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약간 다르지만 앞에서 말한 해석과 비슷한 또 하나의 해석이 있습니다.
시 37 편
‘탈취물로 생각하지 말고 합당한 음식, 즉 합당하게 얻은 것으로 만족하라. 학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극히 명백하고 확실한 사실에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수치스러운 일이며 명예롭지 못하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새로운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에 끌려가고 있지 않다면 이 선지자는 즉시 너희가 확실하고 영구적인 평안을 누리면서 그 땅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거기서 살라는 참되고 합당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הנומא(에무나)는 ‘진리’ 나 ‘믿음’ 또 ‘오랫동안 지속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그 땅에 소유권을 갖게 되었으므로 ‘오랫동안 지속하라’는 말이 설명의 방식으로 부가되었음을 알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4. 4절은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 속한 헛되고 거짓된 매력과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적인 매력은 악인들로 심히 도취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복을 멸시하면서 당장 그들의 눈앞에 보여지는 행복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꿈꾸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에 미혹을 당하는 이 헛되고 변하기 쉬운 기쁨과 경건한 자들이 누리는 참된 안식과의 대조는 주의 깊게 고찰되어야 합니다.
만사가 우리를 향해 미소를 보내든지, 주께서 역경으로 우리를 연단시키시든지 우리는 언제나 원칙을 붙잡아야 합니다.
곧 주님은 우리가 받는 기업의 몫이 되시므로 우리가 시편 16편 5, 6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분깃은 아름다운 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기는 어렵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으로부터 얻게 되는 기쁨은 세상의 온갖 쾌락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이 명령에는 하나의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위에 우리가 소원하는 모든 것을 후하게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 입니다.
이는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의 망상대로 온갖 것들을 지체없이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헛된 욕망을 허락하시는 것도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같이 나태하고 경박한 망상을 따라 배회하는데 우리의 정신을 쓰지 아니하고 우리 마음을 온통 하나님께만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들을 적당한 시기에 우리에게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시 37 편
5. 본문 5절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앞 절이 갖고 있는 교리를 설명하고 확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우리의 염려를 그분께 맡기므로 소망과 인내를 단련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근심, 위험, 그리고 홍수와 같은 고통 중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평온히 보전할 것인가를 배웁니다.
‘길’이라는 말이 여기서 ‘일’이나 ‘사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일에 대한 결과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탄한 일이든지 역경이든지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는 것을 받고자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염려와 짐을 하나님의 품에 맡기는 사람으로 자기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자기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 소망과 신뢰를 두는 의무를 “저를 의지하라”고 거듭 말씀합니다.
이 말씀으로 다윗은 우리가 생활을 다스리고 인도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한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존귀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이렇게 다윗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염되기 쉬운 병폐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한 자들을 부러워하고 자주 고생과 당황에 부딪치며 지나친 슬픔에 빠지고 때로는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절제하게 끝없는 근심에 자신을 몰두하고 어떤 욕망을 너무 열렬히 품은 나머지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 않게 됨으로서 깊은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거나 큰 근심의 짐을 쌓아올림으로서 마침내 그 근심 밑에 가라앉고야 말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악에 대한 구제 수단을 마련하고자 다윗은 우리가 생활의 지배권을 우리에게 두고 마치 우리가 큰 짐을 감당할 수 있기나 한 듯이 모든 일들을 위해 대비하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한다면 크게 속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만을 주시하고 그 섭리로부터 우리의 온갖 슬픔에 대한 위로를 얻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이 충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저 무서운 미궁에서부터 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우리의 일에 대한 경영을 손에 잡으시면 우리에게 번영이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대한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제로 가진 지혜와 총명보다 더한 것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거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고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해드리기만 하면 그분은 하실 일을 다 하실 것이며 우리의 기대를 결코 실망시키시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주께서 우리의 기대에 실망을 주심은 우리의 불신앙에 벌로 정당합니다.
시 37 편
6. 본문 6절은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고 우리 이웃을 정직히 대함에도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보일 때 우리의 정직이 악한 자들의 비방을 받게 되거나 사람들로부터 손상당하는 기회가 될 때 우리를 종종 괴롭히는 불안을 예방하기 위해 이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를 중요하게 보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가 항상 어둠 속에 숨겨져 있게 하시지 않고 이 의를 지속시키시고 빛으로 이끌어내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는 보상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새벽으로 말미암아 곧 쫓겨나게 되는 밤의 어둠을 암시합니다.
이는 마치 다윗이 말한 것처럼 우리들이 간혹 심하게 억압당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을 덮고 있는 밤의 어둠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변화가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할 수 없는 것은 날이 밝아온다는 기대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 37 편
시37:7-11 여호와 앞에
박윤선은 7절에 근거하여 고난당한 성도의 자세를 가르칩니다.
(1) 왕적 침묵은 미천한 자리에서도 진리를 파수하며 필승의 시기(時期)가 올 줄을 확 신하는 왕적 권위를 무언 중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예언적 침묵은 그가 처한 역스러운 환경 가운데서도 진리의 음성을 조용히 탐색하 는 태도입니다. 그는 부절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3) 제사장적 침묵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제물 같이 신앙 정절을 위하여 수난자로서 희생됨을 말함입니다.
1. 본문 7-8절은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릴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입니다.
시편 기자는 같은 교리를 계속 설명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안과 투쟁의 이유들 중에서는 큰 인내가 필요하기에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들을 우리는 참을성 있고 온유하게 견뎌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문서에 자주 있는 ‘잠잠’이라는 말로 다윗은 신앙의 본질을 가장 적절히 말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반항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이 믿음은 우리가 겸손하고 평온한 순종의 상태로 돌아가게 해서 우리 마음의 온갖 소동을 진압시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말로 우리가 신앙이 없는 사람 같이 영혼의 격심한 격정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세 앞에 성급하게 나서지 말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고요한 중에 일하시도록 온화하게 하나님께 순복할 것을 우리에게 명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לוח(홀)이 ‘애곡하다’ 때로는 ‘기다리다’를 의미하기에 ללוחתה(힛홀렐)이란 말이 여기서는 ‘잠잠히 애곡하다’ 혹은 ‘끈기 있게 슬픔을 참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슬픔에 대한 증인이 되시도록 ‘하나님 앞에서 애곡하다’라고 더욱 단순하게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힐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불만을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대항하여 수군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우리를 소망과 인내로 권면하고 있다는 내용의 번역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우리는 이 번역을 지지합니다.
선지자 이사야 역시 이와 같은 의미로 소망과 침묵을 연결시킵니다(사30:15).
시 37 편
다음으로 다윗은 1절에서 한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곧 ‘자기 길이 형통한 자’ 혹은 자기 길이 행복한 결과에 이르도록 하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또 ‘악을 행하는 자 또는 자기의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해 불평하여 말지어다’ 입니다.
하반절에 대한 두 가지 번역 중 두 번째 번역이 시편의 의도에 더욱 부합됩니다.
우리는 תומזמ(메짐못)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기’나 ‘책략’과 같은 좋지 못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공언합니다.
그러나 םמז(자맘)이 때로는 ‘명상하다’를 의미하므로 히브리어의 특성을 고려할 때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다’라는 말은 자기가 목적했던 취지와 같은 의미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의 욕망을 따라 자기의 길을 정하다’ 혹은 ‘자기 길이 형통하다’라는 말과 ‘자기의 꾀를 이루다’라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을 인정해 주시는 것처럼 그들에게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우리가 볼 때 이는 우리에게 매우 감당키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사실은 우리들의 격노와 의분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짧은 권면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를 조금 길게 논합니다.
다윗이 8절에서도 마치 재갈을 먹이듯이 분노를 억제시키고 격분을 진정시키고 격정을 달래고 있는데 이러한 반복적인 언사는 불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필요할 뿐 아니라 고치기 어려운 병폐에 대한 많은 치료법을 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다윗은 우리가 자신의 격앙된 감정에 힘 있는 억제책을 써서 이 감정을 다스리지 않으면 쉽게 분을 내고 실족하게 됨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신실한 자들이 참기 어려울 때, 많은 고통과 수고가 없이는 육신의 정욕을 굴복시키기가 어렵겠지만 여기에 나타난 이 반복된 말씀은 우리가 끊임없이 씨름해야 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끈기 있게 참는다면 우리의 노력이 결국 헛되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8절 하반을 설명할 때 우리는 다른 주석가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마치 다윗이 우리의 분노가 악을 행하는데로 유도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이 구절을 ‘최소한 악을 행함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최소한’으로 번역한 불변사 ךא(아크)가 히브리어에서 긍정적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으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다윗이 여기서 가르치는 바는 악인들이 번영할 때 우리가 내는 분노를 재빨리 점검하지 않으면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일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시125:3)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 37 편
2. 본문 9절은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이 같은 것을 반복하여 가르치는 사실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악인이 누리고 있는 행복과 번영은 가면 또는 환영(幻影)에 불과합니다.
언뜻 보기에 그것들은 우리의 감각을 현혹시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하여 바른 예상을 하지 못하지만 오직 결과에 의해서만 우리는 지금까지 진행된 사실들에 대한 가치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구절의 대조를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로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라고 말함으로서 다윗은 그들이 멸망할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왕성하게 번성할 것을 암시합니다.
둘째로 경건한 자들에게 땅을 주면서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라 하는데 이는 주의 복이 무덤까지 따르는 방법으로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현재 상태는 그들의 삶이 끝나는 상태로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드러내고 있는 그 형용 어귀를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믿음의 시련을 위하여 혹심한 투쟁으로 연단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의롭다’ 또는 ‘경건하다’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무거운 짐 아래서 신음했다는 사실 외에 기대한다는 이 말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하는 땅의 소유는 언제나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들처럼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님은 그들에게 이 땅에서 어떤 정해진 거처를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더욱 간절하게 하늘에 있는 영원한 거처를 바라게 되도록 자주 어려움을 주셔서 그들을 시련시키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항상 이 땅에서 영구적인 보금자리를 세우고자 하는데 만일 우리가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고 고통당하지 않고 안식한다면 우리는 점차 하늘과 영원한 기업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불안 중에서도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땅의 소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정당한 후사들이라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침착한 양심으로 음식을 취하며 궁핍을 당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악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파멸시키려고 애쓰며 이 땅위에서 그들의 생존을 가치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손을 펴서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매우 강하게 붙잡고 계시므로 악한 자들이 애착심을 갖는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보다 이 경건한 자들은 방랑 중에서도 더욱 안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시 37 편
그러므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이 복은 부분적으로 은밀히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극히 둔하여 우리가 땅을 얻는다가 무엇인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이 약속이 자기들에게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습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의 닻을 하나님께 매어두고 그들은 매일 매일의 생활을 평화로운 가운데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자기 손에 의한 보호가 그들을 보호하는데 충분함을 그들의 경험 속에서 분명하게 하십니다.
3. 본문 10-11절은 “(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입니다.
이 말씀은 앞 절에 대한 확증입니다.
악인들은 쾌락가운데 떠들며 하나님의 백성은 병과 가난으로 약해지기에 이 세상에 있는 사건의 실상은 여기서 다윗의 말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가 경솔하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게 하려고 주께서 악한 자들을 완전히 없애버리시고 자기 백성을 향해 은혜의 힘을 보이시기까지 잠시동안 잠잠할 것을 권합니다. 다윗이 참된 신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때까지 잠시동안 판단을 멈추고 모든 사소한 일마다 관여하지 말며 하나님의 섭리를 숙고하는데 지혜를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로 묘사하는 대신 “온유한 자”로 말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놀라운 방법으로 보전하심을 믿지 않고 마치 그들이 이리가운데 있는 양처럼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항상 힘으로 대항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게 하는 것은 오직 소망에서 일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자들은 이 소망에 의해 육신의 성급한 행동을 억누르고 그 격렬함을 진정시킴으로서 마음의 평정과 참기를 연단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장 5절의 말씀에 인용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화평’이란 히브리어에서 일의 형통하고 행복한 결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의미가 더 잘 어울립니다.
악인들은 마음 속에 불화로 요동되고 하나님이 두려움으로 그들을 포위하시지만 한편 신실한 자들은 충만한 평강으로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실한 자들이 고통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이 마음의 평정을 얻어 지금 참고 견디는 모든 시련을 단지 잠정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 약속해 주신 안식에 대한 소망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시 37 편
시37:12-15 악인이
본문 앞부분은 “온유한 자”가 “풍부한 화평”을 누리는 이유를 말씀합니다(12-13).
본문 뒷부분은 12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설합니다.
1. 본문 12-13절은 “(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13)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앞 절에 대하여 생길 수 있는 반대를 미리 막습니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격노하고 온갖 악행을 계획하는데 마음의 평정과 기쁨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망의 근거들이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때 미래에 대한 좋은 소망을 어떻게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경건한 자들의 생명이 많은 위험으로 공격을 받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 안에서 안전하며 악한 자들이 그들을 향하여 아무리 많은 흉계를 꾸밀지라도 그들은 계속 보전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의 의도는 우리들의 두려움을 제거하여 악인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해하는 힘을 가진 것처럼 그들의 악의가 자나치게 우리를 무섭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라는 말에서 다윗은 그들이 속임수로 가득하고 속이는데 능란할 뿐 아니라 분노와 악을 행하려는 강한 욕망에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공언합니다.
이러한 말을 한 뒤에 다윗은 즉시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것을 덧붙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우리의 슬픔에 대한 위안을 극히 냉담히 하는 듯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단순히 ‘웃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높게 평가하신다면 우리 원수들의 격노에 스스로 저항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맹렬히 대적하지 아니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패주시키기 위하여 무장을 갖추고 즉시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잠시동안 묵인하고 손을 거두고 계실 때, 이는 시편 2편 4절에 말씀한 것과 같이 우리의 인내를 위한 바른 시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 오래 지체하신다고 지각하며 이로부터 하나님은 너무 태평히 계시며 사람들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계시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웃고 계심을 볼 수 있다면 이는 결코 작은 위로가 아닙니다.
시 37 편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일을 우연에 맡기심으로서 하늘에서 한가하게 앉아 계시거나 눈을 감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인들의 헛수고와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어 호통치고 경멸하시므로 일부러 지체하시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계신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향해 웃기만 하시고 그들에게 보응을 내리지 아니하시는가를 육신이 여전히 중얼거리고 하소연하지 않도록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라고 하여 하나님이 그들이 당할 멸망의 날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첨가합니다.
신속한 보응이 내리지 않을 때 우리가 더 나은 일의 상태를 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악에서 입는 손상에 우리가 그처럼 괴로워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응보자가 칼을 빼들고 손상을 입힌 자의 뒤에 계신 것을 보는 사람은 자기가 보복하려고 하지 않고 신속한 보응이 임할 것을 바라보면서 몹시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한 자의 멸망이 임박한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같이 격노하고 안타까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사실로 세상의 고생과 혼란 가운데서 악한 자들이 벌을 받게 될 날이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하고 근심과 두려움에 억눌려 웃을 수도 없고 오히려 보응이 지연되기에 성급히 하소연하고 초조해진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명백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물이 순종의 제물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웃고 계실 때 우리가 참을성있게 우는 것을 익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께서 자신의 빛으로 우리를 밝혀 깨닫게 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셔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웃으심을 바라보고 우리 역시 슬픔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웃음에 동참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다윗이 신실한 자가 극히 행복하게 생활하기에 악한 자들이 그들을 부러워한다고 말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이 두절을 다른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설명이 선지자의 의도와 거리가 먼 사실을 알 것입니다.
2. 본문 14-15절은 “(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 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15)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악인들이 칼과 활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말합니다.
다윗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말을 해주지 않을 경우에 그들을 압도하게 될 시험에 대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 37 편
하나님의 약속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때에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우 가혹한 투쟁 중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할지라도 그들은 다윗이 조금 전에 말한 그 평강을 잃지 않게 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구절은 ‘악한 자들이 의인들을 멸망시키려고 칼을 빼고 활을 당길지라도 그들의 모든 노력은 그들의 머리로 되돌아가고 자신들의 멸망을 불러온다’고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을 도와주시기까지 의로운 사람들의 불행한 상태가 설명되는 상세한 표현을 주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그 의로운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로 불립니다.
둘째로 그 의로운 사람들은 파멸에 맡겨진 양들에 비교됩니다.
그들은 자기 원수들의 폭력에 맞설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발 아래 누운 채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즐거움의 상태가 약속되지 않고 불행과 고통 가운데에 있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러한 상태에 대한 복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도 그들의 악 때문에 미움을 받고 가혹하게 취급되는 사례가 간혹 있기에 시인은 그처럼 고통당하는 자들은 ‘행위가 정직한 자들’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말로 다윗은 그들이 이유없이 고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앞서 다윗은 그들을 ‘마음이 정직한 자들’로 묘사해서 내적 정결을 칭찬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이웃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행위의 정직을 칭찬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자기들의 원수들에게 악을 행하지 않았고 공격해 올 어떤 이유도 주지 않았기에 그들이 박해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이 해를 입음으로 분개하고 있으나 의무의 길에서 떠나지 않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1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웃고 계심을 말하지 않고 제2편 4절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같이 악인들에 대한 보응을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을 묵인하심으로 그들이 잠깐동안 환락에 빠지고 방탕하도록 내버려두시지만 분노 가운데서 그들을 타도하시겠다는 사실을 마침내 말씀하십니다.
본 절 말씀의 내용은 악인들이 횡행하는 것은 극히 보잘 것 없어서 그들이 뺀 칼은 자기들의 배를 찌르게 되고 그들의 활은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시 37 편
시37:16-19 의인의 적은 소유가
“의인”은 악인에게서 쫓기는 수도 있습니다(12-15).
또 그 때문에 물질이 궁핍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적은 힘과 소유가 오히려 복스러운 생활입니다.
그 이유는
(1) 그 사소(些少)한 소유라도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인 만큼 그것이 부족해지면 그가 또 주시기 때문입니다(17, 18).
(2) 그것은 불의하게 얻은 것이 아닌 고로 유쾌하고 복된 생활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고(눅12:15) 의(義)를 소유함에 있습니다.
의가 사람에게 요긴하기는 고기에게 물이 요긴함과 같습니다(마13:43).
1. 본문 16-17절은 “(16)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17)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입니다.
본 절은 어떤 충분한 이유없이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풍부함’으로 번역된 ןומה(하몬)이란 말은 사람들의 큰 무리를 의미할 때도 있고 물건이 많은 것을 의미할 때도 있으며 단수 명사에 결합된 복수 형용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은 의인들이 큰 무리의 악인들보다 낫다는 의미로 이 말을 왜곡하는 자들은 그 의미를 손상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전체 문장의 의미를 그르치고 있습니다.
또 의로운 사람이 가진 적은 소유가 악한 자들이 가진 매우 풍부한 소유보다 낫다는 다른 사람들의 설명 역시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법을 어기면서, ‘풍부함’을 의미하는 ןומה(하몬)이란 말을 ‘악한’을 의미하는 םיעשד(레샤임)과 연결시키지 않고 ‘많은’ 또는 ‘큰’을 의미하는 םיבד(라빔)이란 말과 연결시킬 어떤 필연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한 명의 의인이 가진 제한된 소유와 많은 악한 사람들의 부와 재산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은’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םיבד(라빔)은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악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우월하고 매우 풍부한 소유물로 부유하게 될지라도 의로운 사람들이 가진 적은 소유가 그들의 모든 보화보다 훨씬 나음을 의미합니다.
시 37 편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윗이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부에 관해 말하지 않고 진실로 의인들을 풍요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밀한 복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만 그들은 만나로 하늘로부터 양육을 받는 반면 악인들은 항상 주리거나 그들의 풍부한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쇠약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붙잡아주시지 않는 한 이 세상에는 확고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이유가 다음 절에 첨가되는데 이 이유도 역시 앞서 말씀한 이유와 같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주께서 붙들어주시고’ ‘악인들의 힘은 소멸될 것’이 분명 말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참된 행복에 대한 바르고 적합한 평가를 하기 위해 우리는 미래를 기대해야 하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은혜와 감추어진 심판을 숙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처럼 주께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양육하심을 우리가 믿음으로 확신하지 않으면 우리가 당하는 가난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본문에서 악한 자들에 대하여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라고 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들의 현재 상태를 지나치게 좋은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의존하는 것을 배우는 순간 이 교훈이 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면 그들이 가진 적은 소유로 인하여 경험하게 될 기쁨과 즐거움은 마치 높은 직위에서 낮은 직위를 무시하는 것처럼 악인들이 자랑하는 큰 재화를 무시하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경건치 않은 자들이 자기들의 힘을 믿고 그 힘을 교만하게 자랑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들의 팔을 부러뜨리실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권면을 받습니다.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에서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위안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강건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본문18절은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들의 필요물을 공급하시기에 그들은 복을 받는다는 교리를 자주 가르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불신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지나친 염려와 조심 때문에 얼마나 심하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 이유 없이 장래를 너무 염려함으로 또 다른 과오에 빠집니다.
또 그들이 계획을 세우는데 아무리 적극적이고 부지런해도 그들은 자기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자주 실망하며 성공하지 못하고 온전히 실패하는 일이 간혹 있습니다.
시 37 편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계속 주목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장 잘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즉 하나님은 완전한 자들이 당하는 위험을 모르시지 않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우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위협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온갖 변동에 대한 위로의 샘으로 인정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매순간마다 우리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많은 위험으로 괴로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의 날들을 헤아리실 뿐 아니라 땅위에서 우리의 온갖 변천 역시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생각이 우리에게 충분한 위로의 근거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육신의 부친이 주신 집과 유산을 갖게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과 이익을 지속시키시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므로 우리의 나그네 길에서 평강과 만족을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하게 여기고 계시므로 다윗은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기업이 영원한 것이라고 단정하여 말씀합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들을 조심스럽게 보호하고 계심을 선언하면서 우리가 진리와 정직을 신실하게 구할 것을 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아래 안전하게 거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온유한 성품을 기르고 ‘늑대들 가운데서는 울부짖어야 한다’는 흉측한 격언을 증오하고 배격해야 합니다.
3. 본문 19절은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입니다.
이 구절이 또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신자들은 육신이 원하는 만큼 고통과 시련에서 면제받을 것을 기대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으나 최종 구원을 확신 한다는 점입니다.
또 구원을 얻되 이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두 가지 것을 분리하지 못하고 연결된 것으로 주시해야 합니다.
곧 신실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과 섞여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근과 환난도 양쪽 사람들에게 공통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부류 사람들의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은 돌보아주지 아니하시고 버리시지만 반면에 자기 백성이 궁핍을 당할 때면 그 손을 펼쳐주신다는 점입니다.
시 37 편
만일 누가 신실한 자들이 가난과 궁핍으로 짓눌림을 당하는 반면 악한 자들은 종종 기근의 날에 사치스럽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킬 때가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본 절에서 말씀한 ‘풍족’이란 의미는 주로 신실한 자들이 겨우 살아가고 생계의 수단을 얻기 위해 종종 어렵게 고생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양육을 받는데 이는 그들이 세상의 갖가지 풍성한 좋은 것들을 게걸스럽게 삼키면서도 결코 만족하지 않는 악인들보다 더 큰 세상 재물의 풍족을 누리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답변합니다.
또 우리가 성경의 다른 구절을 설명할 때 말한 것같이 이 잠정적인 복은 항상 하나의 획일적인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가진 불신앙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가로막는 큰 방해물이 되기에 우리의 소망이 제한되고 한정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부패된 본성이 거침없이 지나치게 터져 나오면 나올수록 하나님은 더욱 인색하게 우리를 대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큰 응석받이로 그릇되게 하지 아니하시려고 우리가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에게 넘치도록 후하게 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색하게 주심으로서 우리를 검약하게 연단시키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호색과 쾌락에 빠져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하나님이 가난과 궁핍으로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시는 사실에 대해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족을 얻기에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기근과 궁핍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스럽고 관대하게 양육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할 것입니다.
시 37 편
시37:20-22 악인은 멸망하고
본문에서도 악인과 의인이 잘 대조되고 있습니다.
1. 본문 20절은 “악인은 멸망하고(이는 악인이 멸망하고 - 칼빈)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로다” 입니다.
여기 ‘는’이라는 불변화사 יכ(키)는 이 문장을 훨씬 높은 의미로 설명하지 않는 한 마치 반대 의미로 사용된 것처럼 ‘그러나’ 혹은 ‘.....이지만’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해석은 악인들은 그들의 풍부 중에 망하는 반면 의로운 자들은 기근 중에도 만족하게 된다는 사실 사이에 대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자기들의 풍족함을 믿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은밀하고 보이지 않는 방법을 쓰셔서 그들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여호와의 원수’ 라고 부름으로서 우리에게 다윗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보응에 의하여 그들이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악인들은 자기들의 악으로 멸망을 자초합니다.
다윗이 그들은 ‘어린양의 귀한 것처럼 타서’(칼빈)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어린양의 기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דקי(야카르)는 우리가 성경의 다른 구절을 설명할 때 말한 것같이 ‘뛰어남’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이 말이 어린 양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이를테면 특별하게 살찐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여기서 적용하는 대조법에 극히 적합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악인들은 도살의 날을 위하여 살찌웠다 하는 다른 한 선지자의 말씀과 비슷한 교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치스럽게 살면 살수록 그들의 멸망은 더욱 급히 임하게 됩니다.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라는 말씀은 ‘급히 사라진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는 마치 그 악인들 속에 확고한 것이나 본질이 없다고 말씀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דקי(야카르)라는 말이 ‘기름’을 의미한다고 아는 사람들은 하반절을 악한 자들은 기름이 녹거나 닳아 없어지는 것같이 연기가 되어 없어진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첫 번째 해석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 37 편
2. 본문 21-22절은 “(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22)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입니다.
여기서 악한 자들이 사기와 거짓으로 다른 사람들의 물품을 빼앗는 악한 행위 때문에 책망을 받는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항상 도와주려고 하기에 칭찬받는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본문을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지자는 오히려 경건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칭송합니다.
선지자가 다른 한편으로 악인들은 결코 넉넉하게 갖지 못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주께서 자기 백성들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관대하게 대하시지만 악인들은 항상 궁핍해져서 사기와 강탈의 수단에 호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몰지각과 무관심으로 우매한 자들이 되지 않는다면 매일 볼 수 있는 이 사실에 대한 많은 증거를 몰라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악인들이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욕심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이므로 강도들처럼 이곳저곳에서 약탈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이와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필요로 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그들의 채권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사기하여 낭비를 일삼는 방종에 빠지고 있기에 책망을 받고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대하신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기에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의 의도는 하나님의 복이 지닌 높은 가치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복과 저주에서 생기는 결과들을 말하는 다음 절에서 확증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궁핍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에게 후하게 인심을 쓰는데 악인들은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는 빚을 지게 되는가?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께 칭찬을 듣고 악인들은 주의 저주를 받아 극한 파멸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ויכדבמ(메보라카이브)라는 말을 마치 그 구절이 ‘의로운 사람들을 축복하는 자들은 ........ 얻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능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무리이며 불합리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단순히 우리가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푸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하늘이나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호의와 복으로부터 오고 있으며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일단 거두어 가시면 온 세상에 있는 충만한 것도 우리를 만족케 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 37 편
시37:23-26 여호와께서
본문에서는 의인의 행실이 잘 관설되고 있습니다.
1. 본문 23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다음 두 가지 내용을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곧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는 정당하고 바른 것을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이 인도해 주셔야 하므로 첫째로 경건한 자들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도되며, 둘째로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그들을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실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복을 계속 칭송합니다.
이 신실한 자들은 무엇을 계획하든지 항상 유리하고 복된 결과를 얻게 된다는 사실은 특별히 기억할 만한 가치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생동안 우리의 모든 노력에 번영과 성공으로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절의 둘째 구절에 있는 접속사 ‘그리고’가 이유를 의미하는 불변화사 ‘왜냐하면’ 대신에 사용되었다고 간주하여 본 절을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의 길을 용납하시기에 그들의 발걸음이 행복한 결과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이 양심적으로 행동하고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노력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말하고 여기에서는 신실한 자들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확실하므로 그 하반절은 상반절을 설명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길’이란 말은 그들의 생활 방식과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마치 다윗은 경건한 자들이 자기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걸음’이란 말이 눈에 보이는 성공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2. 본문 24절은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주로 속담처럼 해석되어 왔습니다.
또 의로운 자가 죄를 지어도 그의 범죄는 치명적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경건한 자들의 행복을 논하는 선지자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 37 편
이 말씀의 단순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심한 고통을 주실 때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9절에서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선언하는 것같이 고통에 못 견디어 쓰러지지 않도록 고통을 누그러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자들이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 이유를 어떤 무거운 짐이 그들을 내리눌러도 용기를 잃지 않고 굽힘이 없는 정신으로 참아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주 엎드러짐을 당하지 않는 이유를 그들이 그 짐 밑에 가라앉아버릴 만큼 약하거나 가냘프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넓은 의미로 이해하여 ‘경건한 자들이 당하는 불행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 자비에 의하여 누그러져서 그들은 그 무거운 짐 아래서 약해지지 아니하며 넘어졌을 떼에라도 멸망당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흠없는 생활을 보내려고 애쓰는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머물러 있으므로 고통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시험에 의하여 자주 고난을 당하고 기운이 꺾일 때가 있는데 그들과 불신자들 사이에 있는 꼭 한가지 다른 점은 그들은 넘어진다 하더라도 치명적인 타격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버림당한 자들을 치신다면 극히 약할지라도 이 매질은 그들의 최종적인 멸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솔로몬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24:16)라고 하여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이 말로 경건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자주 고통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매일같이 시험을 당하지만 주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우리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붙잡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스스로 넘어졌을 때 온전히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됩니다.
3. 본문 25절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습니다.
다윗은 늙어서 노인이 되었는데 의인들 중 어떤 사람이나 그들의 자녀들 가운데 그 누구도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씀의 내용에 관하여 약간 어려운 의문이 생깁니다.
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자기 체험의 결과대로 선언하는 것은 모든 세대에 적용됩니다.
다윗은 여기서 모세의 기록을 인용합니다.
시 37 편
신명기 15장 4절에 걸식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며 율법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걸식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의인들 중에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말씀하셨으니(눅16:20) 의인들 중에 누구도 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떻게 모순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주께서 자기 백성 위에 내리시는 그 잠정적인 복에 관해 어떤 분명하거나 획일적인 규칙이 확정될 수 없다고 우리가 앞서 말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답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자기 은총을 보여주지 아니하시는 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소중히 여기시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의 은밀한 병을 고치시면서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두십니다.
그들에게는 같은 치료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굽힘이 없는 정신을 주셔서 그들의 인내력을 연단시키시며 그들을 모범으로 내세우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자기의 진노를 나타내심으로서 모든 자를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이는 은밀한 경고를 내리심으로서 그들이 회개하는 데 이르도록 하실 목적입니다.
또 사람들이 천국 생활을 묵상케 하려고 갖가지 고난을 주셔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에 나타나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향하신 은혜의 증거로 그들에게 땅의 복을 주시는 것은 공연하거나 상상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바는 땅의 풍성한 복이 모든 필요를 공급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경건한 자들에게 헛되고 무익하게 약속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익하다고 생각하실 때에 이 복을 내리신다는 한계를 염두에 두면서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은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모두 임하면서도 경건한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가난으로 괴로움을 당하는데 이는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 중에 누가 걸식하는 일이 생기면 그는 이 덧없는 인생의 복에서 당하는 궁핍에 주께서 크게 갚아주실 그 복된 상태를 마음에 그려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만일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가진 동일한 병폐에 신실한 자들이 감염된 것을 보시고 그 신실한 자들을 때로 악인들과 같이 보응하신다는 데에는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악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자기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지도 않고 악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자기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지도 않고 악한 자들처럼 죄의 힘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신실한 자들은 책망을 전혀 면할 수 없습니다.
시 37 편
그러므로 그들이 때로 잠정적인 형벌을 받게 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쓸 것을 주시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결코 궁핍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바울이 “내가 ....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라고 말한 것같이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서 언제나 모자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4. 26절은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푸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기서 그가 앞서 말한 것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마르지 않는 복의 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의 샘물이 신실한 자들을 향하여 흐를 때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서도 이 복을 충분히 받게 됩니다.
다윗이 말한 “그 자손”은 여러 가지로 설명됩니다.
다윗이 경건한 자들의 자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 앞 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복을 받는도다”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마치 다윗이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사역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해합니다.
이 해석자들에게 이 말씀은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 관대함을 실행하면 자기 아버지의 훌륭한 모범을 따르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명이 지나치게 다듬어진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또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경건한 자들의 자녀들을 향해 매우 현저히 나타나므로 사람들이 번영과 성공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이름이 기도에 사용될 것을 의미한다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해석 역시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는 것은 이 표현이 성경 여러 구절에서도 같이 이해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의견은 여기서 다윗이 아버지로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계속 내리심을 칭송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치 ‘하나님의 복은 그 의로운 사람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고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연장된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그의 아버지로서의 은혜 안으로 받아들여 자기가 베푸시는 복에 참예할 수 있게 해주실 때보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이을 더욱 확실한 유업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부모가 하나님 그분을 참된 유업으로 받았듯이 그의 자녀들도 그들의 부모가 받았던 그 하나님을 유업으로 받은 사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시 37 편
시37:27-29 악에서 떠나
이 구절들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자의 받을 복이 확실함을 보여줍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이것은 3절 말씀 내용을 다시 꺼냅니다.
곧 성도는 악인의 사이비한 행복을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죄를 떠나 선을 행하는 생활처럼 행복된 것은 없습니다(시1:1).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는 땅에서 불의한 수단으로 잘되어 나가는 듯이 보이는 악인들의 형통 때문에 성도가 그 마음에 불평할까 하여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면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심같이 땅을 차지하며 거기 영구히 거하게 됩니다.
1. 본문 27절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며 영영히 거하리니”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말한 그 복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악에서 떠나 인간의 본분을 이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교훈은 부패된 인간 본성의 명령과는 모순됩니다.
그러나 온 인류가 당하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은 각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불공평과 속임수, 강탈과 바르지 못한 교제, 또 주의 복을 멸시하고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얻지 못하고 각 사람이 자기 위치에서 자기가 소유해야 하는 평안과 안정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길에 놓는 방해물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앞서 말해 온 교리에서 이런 권면을 끌어내는 것은 타당합니다.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한다면 그때 모든 사람이 자기 복과 평화를 중요하게 여기기 에 바르게 행하도록 노력하고 덕스러운 행위에 전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 두 가지, 즉 첫째로 신실한 자들이 엄격하게 선을 행하고 둘째로 악에서 떠나야 할 것을 연결시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34편에서 알아본 것같이 어떤 사람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친절히 행동할 뿐 아니라 관대한 손길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기까지 하지만 언제나 타인의 것을 약탈하고 강탈함으로서 자기의 관대함을 베풀기 위한 재원을 축적하기 때문입니다.
시 37 편
그러므로 자기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고자 하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을 도와주려는 사람은 그들을 돕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손상시키지 말 것이며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거나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이 두 마디 말로 율법의 둘째 판에 기록된 의무들을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첫째로 경건한 자들은 모든 악행에서 손을 거두고 어떤 사람도 불안케 하면 안됩니다.
둘째는 자신들을 위해서나 자신의 유익만을 증진시키기 위해 살지 말고 기회가 오는 대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유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로운 자들에게 약속된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복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균등하게 실현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들 중에 위대한 의의 실례를 찾아볼 수가 없고 가장 온전한 사람도 자신의 과오에 의해 많은 불행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전에 주셨던 복 가운데서 최소한 어느 정도를 거두어 가신다 해도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주께서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이 얼마나 지나친 소란을 일으키게 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동기에 의해 충동과 격려를 받지 않는다면 신성한 생활을 기꺼이 묵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법관들이 그 말을 정의하고 있는 것같이) 반드시 그들이 그 땅 안에 정주하고 안전하게 정착하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그들을 괴롭히는 불안과 고통의 많은 요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약속하는 것이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나 상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매일의 경험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직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마르지 않는 샘이 계속적으로 흐르는 것같이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효력이 있는가를 우리는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들을 자기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붙들어주시는 상급을 그들이 현재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진실로 소경보다 더 우매합니다.
시 37 편
2. 본문 28절은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앞 절에 있는 교훈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주께서 의와 진리 안에서 기뻐하신다는 더욱 높은 원칙이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말은 불완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은 모든 신실한 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 할 사실을 제시합니다.
즉 다윗은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결론은 칭찬할만합니다.
첫째로 인류의 상태는 우연에 이끌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이끌려가고 지배되기 에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모든 일의 결과를 조정하시고 그 능력으로 만사를 다스리심을 인정해야 됩니다.
둘째로 이 사실에다 의와 진리는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 부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고 흠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면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든 것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하는 그 약속은, 곧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을 보전하실 때는 한가하고 평안한 가운데에 계속적으로 보전하시지 않고 잠시동안 십자가 아래서 연단시키신 다음에 마침내 그들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하는 “여호와께서 .........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라는 말은 분명히 매우 강조적인 언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애 중에 경건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인내의 연단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자들은 이 시편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라는 말씀같이 악한 자들의 후손에게 형벌을 내리심으로서 그 악한 자의 죽음이후에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시기까지 누구도 성급하고 경솔하게 심판을 선언하지 않도록 이 선지자는 신실한 자들이 즉시 판단하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악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 위에 즉시 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더 좋아질 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연장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다윗이 다시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가 즉시 그들 위에 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에게 은혜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잠깐 동안 지체하실지라도 우리가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시 37 편
3. 본문 29절은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입니다.
같은 교훈이 반복되는 이유는 이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복을 구하면서 백명 중에 한 사람이나 그 복을 하나님께 찾을 정도입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자기 스스로를 위해 대비함으로서 마치 고의적인 것처럼 하나님의 보응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이러한 행동에 서로 경쟁을 일삼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자들은 사기와 거짓 증거로 자신들을 더럽힙니다.
어떤 자들은 강도질과 강탈을 일삼습니다.
어떤 자들은 온갖 잔인한 행위를 자행합니다.
또 어떤 자들은 칼과 독약까지 가지고 폭행과 난폭한 짓을 행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여기서 의로운 자들에게 약속된 이 땅 위에서 얻게 되는 영구적인 거처에 관한 의미가 이해됩니다.
즉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말썽과 변화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날개 아래 보전하십니다.
또한 하늘 아래에는 지속적이거나 확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마치 그들이 안전한 하늘에 피해 있는 것처럼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렇게 되는 것 외에도 백번 사는 것보다 더 나은 마음의 내적 평화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내적 평화는 가치와 중요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특전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시 37 편
시37:30-33 의인의 입은 지혜를
본문은 의인의 어떠함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의인에게 행하실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30-31절은 “(30)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31)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입니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의로운 자와 정직한 자에 관하여 선언하시는 것을 모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뻔뻔스럽게 이끌어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요망하시는 의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그 정의를 세 가지 중요한 부분들로 나눕니다.
그들의 말은 신실하고 진실해야 하고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다스리고 있으며 그들은 대화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상반절을 우리가 설명한 것과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들은 의로운 자들이 타인들을 잘 살도록 가르치고 그 길을 인도함으로서 교사와 안내자로서 봉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말하고” 와 “공의를 이르며” 라는 말은 그들의 견해로는 거룩한 교훈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훈련시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이 해설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제한적일까 염려됩니다.
여기서 ‘지혜’와 ‘공의’는 간교함과 사기,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계책이나 속임수와 반대가 되는 만큼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제하려는 불경스럽고 더러운 언사와 반대되고 있으며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위협과 두려움과도 반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첫째로 의로운 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외심을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바르고 공손하게 말합니다.
둘째로 자신들의 일과 다른 사람들의 일에 있어서 바르고 합당한 것은 겉치레나 속임없이 옳다 하고 그릇된 것은 궤변적인 색채와 눈가림으로 정당화시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진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이에 온전한 마음이 부가돼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라고 말했습니다.
시 37 편
순서로는 온전한 마음이 앞서야겠지만 두 번째로 놓인 것이 불합리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이 미덕과 악덕을 열거할 때 정확한 순서 배열에 면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온전한 마음이 생겨나는 원천은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훌륭한 생활 규범을 정하고 온갖 부패된 감정과 정욕을 억제하며 사람들에게 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항상 변함없이 의의 생활에 헌신하고 자신의 이익에 앞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애쓰며 욕심을 버리고 교만을 억누르며 자신의 본성과 지속적인 싸움을 계속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음은 외적 행위에 관한 것인데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하나의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이 구절에서도 의의 정의를 말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범하는데서 갖가지 방법으로 유혹을 받고 충동하는 많은 일들이 생겨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만 있으면 악의로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하도록 애쓰고 있지만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다스리고 그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그들은 실족함이 없이 확고하고 단호한 결심으로 목적을 버리지 아니하며 최소한 바른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본문 32-33절은 “(32)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33)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입니다.
다윗은 앞서 말한 “땅을 차지함”에 대한 성격을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들에게 둘러 쌓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보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교훈을 얻습니다.
지금까지 계속된 말씀 가운데서 신실한 자들이 평온한 생활과 온갖 말썽과 괴로움을 떠난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말씀은 서로 모순될 것입니다.
첫째로 신실한 자들이 기업을 얻어 안식과 즐거움을 누립니다.
둘째로 그들은 양처럼 매일 이리들의 입에서 구원받고 있다는 이 두절에는 신실한 자들은 갖가지 위험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를 피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보전된다는 위안의 특별한 근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신실한 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시 37 편
곧 그들의 원수들이 자기들을 잡으려고 숨어 기다리며 자기들을 괴롭게 하고자 힘을 다하여 모든 수단을 쓰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유복함에 얼마나 깊이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들을 안전하게 보전하시려고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계시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다윗은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멸망시키고자 잔인한 계획을 세워서 그들에게서 소유물을 빼앗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명까지 빼앗고자 하는 계책은 그 자체가 무서운 것임을 공언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와 방어자가 되실 것을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으로 약속하고 계신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확고하고 꺾이지 않는 용기를 계속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런 형편,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구원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죽음의 순간에 다달았다고 보일 때까지 구원을 지연시키심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한 이 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선한 사람들이 아무도 실족시키지 않으려고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모든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자 노력하며 말다툼과 싸움을 피하더라도 거짓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세상의 칭찬을 받고 그들의 미덕은 당연한 만큼의 칭찬을 받으면서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신실한 자들을 격려합니다.
그들이 재판자리에 끌려올 때, 말하자면 중상하는 자들에게 압도되어 이미 정죄를 받은 자들과 비슷하게 되었을 경우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 안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의 결백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의 옳지 않은 재판에 맞서서 그 결백을 지속시키십니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받은 후 잔인하고 가혹한 죽음을 당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한 보응자가 하늘에 계신다고 답변합니다.
그리스도는 가장 잔인한 형태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또 가장 심한 치욕의 상황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가 53장 8절에서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라고 말씀한 것같이 하나님은 자기의 지체가 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동일하게 행하십니다.
만일 계속해서 반대하여 다윗은 다가올 생애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애에 있어서 경건한 자들의 상태를 말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 주장에 대하여 앞에서 했던 설명, 곧 이 땅에서의 복은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제된다는 말을 다시 반복해야 하겠습니다.
시 37 편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복을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분량대로 내려주시지 않고 친히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대로 자신의 지혜를 좇아 일하십니다.
때로는 그 복을 전부 혹은 그 한 부분을 거두시고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복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순교자들이 정죄를 받은 다음에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처럼 죽음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더 좋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그들의 잔인성을 자행하도록 허락하시는 분은 자기 종들의 의를 계속하여 주장하지 않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 의를 인정하심을 자기 천사들과 전체 교회 앞에서 공공연하게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그것에 관하여 알아볼 것을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숨겨져 있었던 어두움으로부터 그들을 들어 올리셔서 그들의 사후 명예가 감미롭고 상쾌한 냄새를 발하게도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께서 그들이 부끄러움과 폭력에 의하여 짓눌림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 다음에 심판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심판으로 주님은 악한 중상과 거짓된 비난으로부터 그들의 의로움을 옳은 것으로 입증하실 것입니다.
시 37 편
시37:34-36 여호와를 바라고
본문에서는 의인에 대한 권고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도 제시됩니다.
1. 본문 34절은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다시 권면으로 돌아갑니다.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으로 굳게 서서 비뚤어지고 죄악된 방법에 의한 시험을 받고 이리저리로 끌려가도록 자신들을 방임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견고히 버티어 나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첫째로 다윗은 그들이 소망과 인내를 갖도록 권합니다.
이는 마치 다윗이 인생의 소란과 어려움 중에서도 잠시동안 그 얼굴을 숨기신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다시 나타내 보이실 때까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하기를 원했던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로 권면은 그들이 여호와의 도에서 떠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소망과 인내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잘 어거되어 합당치 않고 악한 어떤 것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악한 행동으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이유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행운이 급히 자기를 향하여 미소를 보내지 않을 경우에 공평과 정직을 실천하면서 견디는 것을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선하고 의로운 자들 중에서도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장기간의 고통과 시련의 생활을 보낸다 해도 그들은 공정하게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거름더미 같은 곳에서 들어올리실 뿐 아니라 그들의 무덤으로부터라도 이끌어내시는 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정당한 직임이며 하나님의 권한인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한 백명 중에서 한명도 참을성 있게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며 바른 길에서 끈기있게 계속하여 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들어올리다’ 라는 말을 사용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이 심한 재난 때문에 압도된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그 손을 펴고 계심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경건한 자들이 보는 앞에서 악인들이 멸망하게 될 것으로 말씀합니다.
시 37 편
만일 그들의 종말이 의로운 자들의 종말과 매우 다르지 않다면 버림당한 자들이 지금 잠시동안 즐기고 있는 상태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까지 쉽게 악으로 유인시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매일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광경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우매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악에 정당한 보응을 내리고 계시는데 그들을 너무도 사적으로 형벌하시기에 우리가 우둔하여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2. 본문 35-36절은 “(35)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 함 같으나
(36)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방금 말한 사실을 자기의 경험에 근거하여 확증합니다.
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번영에 도취되었고 그 번영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지만 그들의 행복은 잠시요, 덧없는 것이어서 단순히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35절에서 다윗은 악인들이 자기들이 얻는 번영으로 득의양양해지고 자기들의 세력을 멀고 넓게 펴며 순진한 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거나 드문 일이 아님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또 다윗은 놀라운 것으로 인정된 그들의 위대함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고 덧붙입니다.
‘무서운’(칼빈; 큰 세력)으로 번역한 ץידע(아리츠)라는 말은 ‘강한’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나온 어원이 때로는 ‘무섭게 하다’ 또는 ‘강하게 하다’를 의미합니다.
הדעתמ(미타레)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푸르른’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히려 ‘발견하다’ 또는 키가 크고 넓은 가지를 가진 나무가 그 가지를 펼치고 있는 것같이 ‘자신을 펼치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절제없이 뽐내고 있는 자들의 무례함을 책망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36절에 있는 ‘지나다’라는 말은 ‘사라지다’를 대신하여 쓰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잠시동안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권합니다.
악한 자들의 번영 중에 세상이 칭찬하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그것은 단지 안개와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 자체가 보여주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 37 편
시37:37-40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본문에서는 의인의 결국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1. 본문 37-38절은 “(37)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 국은 평안이로다
(38)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입니다.
1) 먼저 박윤선의 짧은 해설을 살펴봅니다.
여기 있는 두 가지 명칭, 곧 “완전한 사람”, “정직한 자”는 동일한 사람(성도)을 가리킵니다. “완전함”(ם -탐)은 순전하여 간사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정직함”(ד -야솯)은 하나님 앞에서 가리움이 없이 바르게 나타남을 가리킵니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이 말의 히브리어 םוֹלשׁ יאּ תי אַ 는 “그 사람의 결국은 화평이로다”라고 직역될 수 있습니다(calvin).
2) 다음은 칼빈의 해설입니다.
다윗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도록 말씀합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모든 경우를 열심히 숙고할 것을 신실한 자들에게 권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다윗은 사울의 첫 모습을 보고 사울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헛되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정하신 시간을 참고 묵묵히 기다리지 않는다면 믿음은 소멸되는 일이 생깁니다.
또 사람들이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성령으로 집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또한 믿음과 함께 없어져버리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다윗은 우리가 이 일에 관하여 살피고 깊이 생각하도록 권합니다.
우리 마음이 일단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미친 그 시험에 의해 선입관을 갖게 될 때에 이 성급한 판단은 우리를 속이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만일 사람이 망대에서와 같이 시야를 멀리 연장시킨다면 마침내 버림당한 자의 ‘결국’과 의로운 자의 결국은 대단히 다르다는 말씀이 진실된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갖게 될 결과가 제시될 때는 우리를 경계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즉시 성취하지 않으실 경우에 우리가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 37 편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정욕으로 참을 수 없게 된다면 끝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과 또 하나님께서 혼동된 일들의 질서를 회복하시도록 시간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4) 다윗은 여기서 단지 악인들과 의로운 자들의 결국이 다른 점만을 말씀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심하게 연단시키시고 그들의 인내력을 훈련시키십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악인들의 환락을 울음으로 바꾸십니다.
반면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역경을 복으로 바꾸십니다.
2. 본문 39-40절은 “(39)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 시로다
(40)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 로다” 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의인들은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의인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크게 고통받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요10:29)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하나님은 자기 능력으로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므로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그 구원은 변함없다는 확신으로 버티어 나가야 합니다.
또 실제로 역사 선상에 두신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의인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기에 하나님이 자기 신실한 종들을 버리신다거나 도우심을 거절하시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계속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참된 신자들이 자기들이 소원대로 모든 일이 잘 될 때만이 아니라 오히려 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권합니다.
이 말씀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종들이 괴로움으로 심한 고통과 억압을 당할 때 이에 못이겨 실신하지 않게 하고 가혹한 고생으로 신음할 때 이로 인해 그 무거운 짐 밑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에게 힘을 주시는 것으로만 충분하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다윗이 마지막 절에서 두 번씩 사용하는 하나님께서 ‘건지실 것이라’는 말씀 역시 참을성 있게 견디는 것을 배우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지연시키신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인내력을 시험하신 다음에 마침내 자기들을 구원하실 것을 자주 회상하도록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