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여자, 런웨이를 걷다
길이 무대가 되는 순간이 있다. 특별한 조명이 없어도 좋다. 누군가 박수를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 오래 걸어온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평범한 길도 런웨이가 된다.
늦가을의 오후,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석양이 오래된 건물의 벽을 어루만지고, 카페의 창마다 노란 불빛이 피어난다. 돌바닥에는 햇살이 잘게 부서져 있다. 바람이 코트 자락을 흔든다. 나는 걸음을 늦추었다가 다시 걷는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발걸음이 가볍다. 어디에 도착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약속도 없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길 위에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걸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지켜야 할 약속도 많았다. 아침이면 서둘러 문을 나섰고 저녁이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거울 앞에 오래 서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예쁜 옷을 입고 싶은 날에도 편한 옷을 골랐고, 마음에 드는 구두를 신고도 발이 아플까 먼저 걱정했다. 그 시절의 나는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딸이었고, 아내였으며, 어머니였다. 나를 위한 자리는 늘 맨 끝에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여자가 낯설었다. 눈가에는 잔주름이 내려앉았고, 머리카락 사이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바라보다가 웃음이 났다. 저 얼굴로 얼마나 많은 날을 살아냈던가. 울음을 삼킨 날도 있었고, 기쁨을 감추지 못해 혼자 웃던 날도 있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그 모든 시간을 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입고, 오래 신지 않았던 구두를 신었다. 머리를 매만지고 립스틱도 발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뒤로 미루어 두었던 나를 만나고 싶었다.
크림색 코트를 입고 거리에 나선 날이었다. 부드러운 옷깃을 여미자 마음까지 환해지는 듯했다. 베레모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저렇게 웃는 여자가 내 안에 있었구나.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소녀를 그 거리에서 다시 만났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날에는 조금 다른 마음이 들었다. 단정한 옷깃과 길게 뻗은 선이 나를 꼿꼿하게 세워 주었다. 젊은 날에는 검은색이 무겁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 깊이가 좋다. 화려하지 않아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말이 많지 않아도 존재감이 있다는 것을 세월이 가르쳐 주었다. 오래된 건물 앞에 서니 돌기둥에 새겨진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비바람에 닳은 자리가 오히려 아름다웠다. 사람도 오래 살아야 비로소 갖게 되는 무늬가 있는 모양이다.
버건디색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걸을 때는 마음이 조금 들떴다. 짙은 붉은빛은 젊은 날의 열정을 닮았다. 이제는 가슴 뛰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새로운 길 앞에서는 여전히 설레고, 처음 보는 풍경 앞에서는 발길이 멈춘다. 글 한 편을 완성한 날이면 혼자 웃기도 한다. 오래된 심장에도 봄은 다시 찾아오는 법이다.
갈색 코트를 걸친 날에는 가을나무가 생각났다. 햇살을 오래 품은 나무의 껍질처럼 갈색에는 깊은 온기가 있다. 낙엽이 떨어진 길을 걸으며 문득 지나온 사람들을 떠올렸다. 함께 웃다가 멀어진 사람, 끝내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사람, 지금도 마음속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내 삶의 어느 모퉁이에 서 있다. 나는 그 길을 지나며 조금씩 깊어졌다.
옷은 달라져도 그 안에 있는 여자는 하나다. 때로는 수수하고, 때로는 화려하며, 어떤 날에는 당당하다가도 혼자 있을 때면 여전히 마음이 여리다. 그런 나를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쓰던 때도 있었지만, 세월은 모자란 모습까지 끌어안을 줄 아는 마음을 주었다. 런웨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모델은 정해진 길을 걸어 나와 잠시 멈추었다가 돌아선다. 사람들은 옷과 걸음걸이를 바라보지만 나는 그 짧은 동선에서 인생을 본다. 앞으로 걸어가는 일, 멈추어 서는 일, 뒤돌아 다시 걸어가는 일. 우리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다.
다만 인생의 무대에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걷지 못한다. 발을 헛디디기도 하고, 가야 할 길을 지나치기도 한다. 남들이 모두 앞서가는 것 같아 마음이 급했던 적도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잘하고 싶어서 더 바빴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무리했다. 그러다 어느 날 발걸음을 멈추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걷는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고, 창가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읽는다.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미고, 햇살이 좋으면 잠시 멈추어 선다. 오래 걷다 보니 발걸음에도 저마다의 표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쁜 날의 걸음과 슬픈 날의 걸음은 다르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과 홀로 돌아오는 길도 다르다. 발은 같은 길을 걷지만 마음은 언제나 다른 풍경 속을 지나간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길에서 만난 풍경을 마음에 담고, 돌아와 문장으로 옮긴다. 어떤 날은 나무 한 그루가 오래도록 나를 붙잡고, 어떤 날은 낯선 사람의 뒷모습이 한 편의 수필이 된다. 길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건넨다. 그래서 나는 길을 좋아한다. 걷고 있으면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시니어 모델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조금 쑥스러웠다. 이 나이에 무슨 모델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를 이유로 마음속의 문을 닫을 필요는 없었다. 젊은 날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 지금은 가능할 수도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망설였던 일을 이제는 웃으며 시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세상과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얻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대 위에서 누군가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살아온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자로 서고 싶다. 주름을 지우기보다 웃음을 더하고, 지나간 젊음을 그리워하기보다 오늘의 나를 사랑하고 싶다. 오래된 나무가 봄마다 새잎을 틔우듯 사람도 마음먹기에 따라 새로운 계절을 맞을 수 있으리라.
석양이 거리를 붉게 물들인다. 카페의 불빛이 하나둘 선명해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선다. 바람이 코트 자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저 길 어딘가에 젊은 날의 내가 서 있을 것 같다. 늘 바빴던 여자, 자신을 돌볼 줄 몰랐던 여자, 그래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냈던 여자. 그 여자에게 말해 주고 싶다. 참 애썼다고. 조금은 쉬어도 괜찮았을 텐데, 무엇이 그리 급했느냐고.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보여주고 싶다. 보아라, 우리는 이렇게 다시 웃고 있지 않으냐고.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졌다. 돌바닥 위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다시 걷는다. 세월이 내게 남긴 것은 주름만이 아니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작은 것에도 기뻐할 줄 아는 여유,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이 있었다. 인생에는 정해진 퇴장 시간이 없다. 누군가는 일찍 무대를 떠나고, 누군가는 늦게서야 자신만의 무대에 오른다. 중요한 것은 언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느냐일 것이다.
오늘도 길 위의 여자는 걷는다. 크림색의 부드러움도, 검은색의 깊이도, 버건디의 설렘도, 갈색의 온기도 모두 자신의 것으로 품고 걷는다. 걸음마다 지나온 시간이 묻어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옷자락에는 아직 살아갈 날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누구의 박수도 필요하지 않다. 발밑에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갈 두 발이 아직 건강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다시 모자를 고쳐 쓰고 어깨를 편다. 그리고 조금 더 당당하게 발을 내딛는다. 세월은 나를 무대 밖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걸어온 나에게 비로소 나만의 무대를 내어 주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저녁, 길 위의 여자는 오늘도 런웨이를 걷는다. 이번에는 누구를 위한 걸음도 아니다. 오직 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나의 인생을 향해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