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옹정제[雍正帝, Yongcheng]
양력 : 1678년 12월 13일
음력 : 1678년 10월 30일
시 일 월 년
丁 壬 甲 戊
寅 酉 子 午
78 68 58 48 38 28 18 8
壬 辛 庚 己 戊 丁 丙 乙
申 未 午 巳 辰 卯 寅 丑
진사공망, 임수당령, 1735년(을묘년, 58세) 사망.
옹정제[雍正帝, Yongcheng]
(병)Yongzheng (웨)Yungcheng.
1678. 12. 13 베이징[北京]~ 1735. 10. 8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5대 황제(1722~35 재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윤진(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행정기구가 확립되고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었던 옹정제는 제위를 계승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황태자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자 제위를 계승할 기회를 노려 다른 형들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다룬 일부 연대기에는 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나와 있다. 어쨌든 아버지인 강희제가 죽자 베이징에 있던 군대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초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여 자기 형제들 중 일부와 그들의 지지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가 만든 첩자조직은 아주 치밀해서 관리들의 모든 행동이 그에게 보고 되었다고 한다.
강희제 말년부터 자신의 재위 초년까지의 황실 기록조차 변조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적들에게 유리한 기록이 있으면 모두 없애도록 했다.
황제 권력의 강화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조치는 친왕(親王:皇族)들이 청조의 핵심적인 군사조직인 팔기군(八旗軍)을 지휘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옹정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8기 가운데 3기는 황제 직속으로 되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친왕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위에 오를 때처럼 친왕들이 이와 같은 군사력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야심을 채울까 우려했으므로 모든 친왕들을 궁정 내 특별학교에 다니게 하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교육시켰다.
그 결과 팔기군은 청조 내내 황실에 대해 충성을 다했다.
1729년 옹정제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최고행정기구였던 내각(內閣)을 없애고 이전의 비공식 기구였던 군기처(軍機處)를 두었다.
5, 6명의 군기처 대신들이 황제와 함께 일했으며, 황제는 매일 이들을 만나 정사를 논했다.
그들의 일은 신속하고도 비밀리에 처리되었으므로 황제는 모든 중요한 정사(政事)에 대해 친히 검토하고 지시를 내렸다.
정사(正史)의 기록으로는 그가 자연사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는 일생 동안 적을 많이 만들었으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 처형된 어떤 사람의 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유능한 통치자였던 그는 관료의 부정을 감찰할 관료기구를 만들어 후세에 남겨주었으며, 제국의 법률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또한 재정을 재정비하여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켰다.
세속적인 업적 외에도 종교연구를 꾸준히 해서 선(禪)불교에 관한 광범위한 저술을 남겼다.
옹정제 [雍正帝, 1678.12.13~1735.10.8]
청(淸)나라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
성명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胤禛). 묘호 세종(世宗). 시호 헌제(憲帝). 재위 연호에 따라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 ·윤당(允禟)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 ·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중앙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혀 잘 처리되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마음을 써서, 지방대관에게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보고 주필(朱筆)로 주비(硃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훈계를 내렸다. 뒤에 이것을 편찬한 것이 《옹정주비유지(雍正硃批諭旨)》이다.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하였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에 베끼도록 하고, 지방에 남은 천민의 호적을 제거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苗族]이 토사(土司)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하였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칭하이[淸海] ·티베트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p.s 애신각라는 '신라를 사랑하라' 란 뜻이다. 자체적으로 신라의 후손임을 이름에서 명시하는 바가 많은 것과, 왕족이 신라계라는 문헌기록도 있다.
옹정제(雍正帝)의 내치
강희제(康熙帝)는 자식 부자로 아들 35명을 두었는데, 만년에 이르러 황제의 심신이 쇠약해짐과 더불어 황자, 조신(朝臣)이 붕당(朋黨)을 만들어 세력다툼을 하는 폐해가 일어났다.
황제가 69세로 죽은 뒤 넷째 아들 옹정제(雍正帝)가 뒤를 이은 것은 다행이었다.
당시 옹정제는 45세로 그때까지 상속권이 없던 오랜 기간 중 얻은 경험과, 천성의 영민한 자질에 의하여 강희 말년의 방종으로 흐른 정치를 긴장시켜 기강의 숙정을 꾀했다.
옹정제(雍正帝)는 명(明) 이래의 내각(內閣)제도가 불편함을 보고 이를 형해화(刑骸化)하고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따로 군기처(軍機處)란 최고기관을 설치했다.
청(淸) 초의 내각은 천자와 그 측근이 만주인(滿洲人)이기 때문에 제 1 공용어를 만주어로 하고 중국에 관계된 한문 문서도 일일이 만주어로 번역해야만 했다.
그러나 실은 청조는 순치제(順治帝)이후 적어도 천자는 중국어를 잘하고 중국인 이상의 문화인이었으므로 결재를 위해 한문 문서를 번역할 필요가 전연 없었지만 정복자의 체면으로 중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합리주의자인 옹정제는 그것을 어리석은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서북국경에서 준가르부와의 전쟁이 있었을 때 그는 궁중에 군기처를 설치하여 몇 사람의 군기대신(軍機大臣)의 손으로 옮아갔다.
그 아래의 군기장경(軍機章京)에는 민완의 젊은 정치인을 발탁했는데, 이 임무를 감당함에는 무엇보다도 빨리 문장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군기처에는 예외적으로 서이(胥吏)의 폐해는 역대에 지적된 것이지만 청조에 이르러 점차 그 중추부에 이러한 신식의 기관이 설치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조의 명맥이 타 왕조에 비하여 오래 지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옹정제(雍正帝)의 정치방식은 예컨대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합리주의였다.
원래 중국에서는 관리의 봉급이 극히 낮게 억제되어 그것으로는 생활할 수 없으므로 조세에 사(私)적인 부가세를 화모(火耗)라 하여 징수하고 이를 제멋대로 반분하고 있었다.
옹정제는 이를 고쳐 제한을 두어 부가세를 공(公)적으로 징수하도록 지시하고 그 가운데서 관료에게 양렴은(養廉銀)이라 하여 증급(增給)을 했다.
옹정제(雍正帝)는 또 지방 고관과의 사이에 공문서 이외에 사(私)적인 친전서(親展書)(친히 펴보는 사신(私信))를 교환하고 지방의 실상을 숨기지 말고 보고하게 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홀로 이 태접(泰摺)을 열람하고 거기에 주필(朱筆)로 답신, 주비유지(주批諭旨)를 기입하여 돌려보냈다.
이 문서는 다시금 천자에게 반납되지만 이 주비유지가 붙은 문서가 궁중에 산적되어 낭하에까지 쌓였다고 한다.
옹정제와 같이 정력적인 노력가에게나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군주독재의 근세에 들어간 중국에서도 이만큼 전형적인 독재군주는 달리 없었다.
청조 특유의 중국지배체제는 옹정제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좋다.
중국 군주의 특권 중에는 후계자 지명권이 포함된다. 그도 그럴 것이 몽고(蒙古), 만주(滿洲) 같은 북방민족의 군주는 유력자의 집회에서 선거되어야 할 것이니 바꿔 말하면 군주는 1대에 한한 것이었다.
청조에서도 태종(太宗)까지는 후계자를 예정해 두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세조(世祖)때에 와서 점차 중국식의 천자가 되었지만 그런데도 사후의 유조(遺詔)에
의하여 강희제를 지명했던 것이다.
완전히 중국식이 된 것은 강희제 때였으니, 그는 아직 젊을 때에 적장자를 황태자로 책립했다.
그런데 황태자의 불초함을 이용해 장래의 투기에 큰 뜻을 둔조신(朝臣)들이 황태자에게 아첨하여 당파를 만들고 마침내는 부황(父皇)을 시역(弑逆)하려하는 음모까지 발전했으므로 강희제는 황태자를 폐한 채로 마침내 태자를 세우는 권리행사를 체념해 버렸다.
그리고 임종시에 옹정제를 후사(後嗣)로 지명했던 것이다. 옹정제는 이 실패를 목격했으므로 자신도 태자를 세우지 않고 이른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란 것을 고안했다.
그것은 후사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상자에 넣고 궁중의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쓴 액자 뒤에 숨겨 두고 만일 천자가 지명을 하지 않고 죽은 경우에는 대신들이 입회한 가운데 상자를 열어 유지에 따라 새 천자를 세운다는 방법이다.
그런데 옹정제도 실제로는 즉위 13년째 임종시에 넷째 아들 고종(高宗)을 지명하여 대신들에게 준행시켰던 것이다(1735년).
고종 건륭제(建隆帝)는 치세 60년에 아들 인종(仁宗)을 황태자로 세우고 다음 해 정월에 양위하여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조부 강희제의 재위 61년의 기록을 깨서는 미안하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태자밀건법이라는, 면목이 안서는 방법에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당당하게 중국의 독재군주답게 후계자 지명권을 발동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
주) 옹정제(雍正帝)의 통치기간 중에 두 가지의 중요한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천민신분의 폐지이고 다른 하나는 지정은제(地丁銀制)의 완결이다.
지정은제는 명말의 일조편법(一條鞭法)을 계승하여, 인정수(人丁數)를 단위로 은납시키던 요역(요役)인 정은(丁銀)을, 토지를 단위로 한 지은(地銀)에다 통합시킴으로써 세역(稅役)을 전부 단일 지세(地稅)로 묶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불필요해진 리갑제(里甲制)는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그 대신 치안유지조직인 보갑제(保甲制)가 적용되어 민중을 파악하게 되며, 농촌은 자연촌락 단위로 편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편이 옹정제 때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명말부터 진행되어 오던 것이 강희제(康熙帝)의 성세자정은 (盛世滋丁銀)을 거쳐 이제 완결된 것이다.
출처 : 하이텔 무림동에서 발췌 요약
내용출처 : [기타] http://www.newmurim.com/main1-1/d/d8.htm
(출처 : '옹정제의 내치' - 네이버 지식iN)
옹정제(雍正帝) :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황제(憲皇帝)
황후 : 효경헌황후(孝敬憲皇后) - 옹정제의 정실
계후 :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원래는 옹정제가 친왕이었을 때 맏아들의 첩. 효경헌황후가 죽자 황후가 되었다.
옹정제의 아들
장남: 화석 영친왕 홍경(寧親王 弘暻/1697-1731) ----효경헌황후 소생
후계자로 유력했으나, 옹정제의 의심을 받아 자살했다고 하네요..ㅡㅡ;;
차남: 화석 유친왕 홍석(裕親王 弘晳/1700-1744) ----효경헌황후 소생
효경헌황후 아들 중에는 그나마 천수를 누림..
삼남: 화석 살친왕 홍시(薩親王 弘時/1704-1736) ----효경헌황후 소생
자신이 후계자가 되려다가 반역죄로 옹정제에게 사사되었다네요.
사남: 화석 보친왕 홍력(寶親王 弘曆/1711-1799) ----> 건륭제(효성헌황후 소생)
오남: 화석 화친왕 홍주(和親王 弘晝/1715-1765) ----효성헌황후 소생
사냥과 술에 미쳐 살았다는 황족.
육남: 안친왕 홍승(安親王 弘昇/1716-1781) ---- 경민귀비 소생
칠남: 화석 유친왕 홍민(裕親王 弘旼/1718-1779) ----효성헌황후 소생
건륭제가 가장 아끼던 동복동생, 건륭십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움
팔남: 항친왕 홍효(恒親王 弘曉/1723-1776) ----돈각귀비 소생
구남: 숙친왕 홍만(淑親王 弘晩/1726-1765) ----경민귀비 소생
십남: 자친왕 홍금(者親王 弘昑/1732-1796) ----양비 소생
옹정제의 딸
장녀: 정현화석공주(貞顯和碩公主/1702-1760) ---효경헌황후
차녀: 정안화석공주(貞安和碩公主/1707-1754) ---효경헌황후
삼녀: 정희공주(貞禧公主/1710-1738) ---영복궁 소생
사녀: 정효화석공주(貞孝和碩公主/1713-1762) ---효성헌황후
오녀: 정인화석공주(貞仁和碩公主/1716-1748) ---효성헌황후
육녀: 정양공주(貞陽公主/1718-1791) ---경민귀비
칠녀: 정화공주(貞和公主/1719-1735) ---돈각귀비
팔녀: 정소공주(貞昭公主/1721-1762) ---돈각귀비
구녀: 정선공주(貞璿公主/1723-1801) ---혜비
10남 9녀를 낳았네요.
일에 대한 집중도를 잘 보여 주는 것으로 청나라 옹정제(雍正帝)의 일화가 유명하다. 옹정제는 강희제(康熙帝), 옹정제, 건륭제(乾隆帝)로 이어지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강희제가 왕자들과 사냥을 하고 돌아 와서 네 명의 왕자들에게 차례로 금번 사냥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물어보았다.
첫째 왕자는 “저는 초원, 밀림, 푸른 하늘, 흰 구름 등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둘째 왕자는 “저는 여러 형제들과 군마들을 보았습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셋째 왕자는 “저는 형제들의 날렵한 사냥 솜씨와 씩씩하고 늠름한 자태를 보았습니다. 장차 대청나라의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넷째 왕자는 “저는 오로지 제가 목표로 하는 사냥물만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강희제는 한껏 소리 내어 웃으면서 “하하하! 아주 좋아. 너는 일에 전념할 줄 알고, 딴 마음을 품지 않았구나!”라고 넷째 왕자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 넷째 왕자가 바로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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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옹정제[雍正帝]-청
도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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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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