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1941년~2022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토지’를 저술한 소설가 박경리의 사위이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저항하여 투옥됐다. 1980년부터는 동서양의 철학과 한국의 전통 사상을 아우르는 '생명 사상'을 제창하였다. 시집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시삼백』 등이 있고 회고록 『흰 그늘의 길』과 저서 『김지하 사상전집』이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입금리에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다. 증조부 김영배(金永培)가 가족을 데리고 당시 동학 대두령이었던 사촌 형 김인배(金仁培)가 살고 있던 옛 고향 김제로 이주하였다. 이후,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면서 살았다.
목포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했다.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하여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4·19혁명과 5·16 군사 정변을 겪었고, 6·3사태 등을 접하면서 그는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66년 서울대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 동참하였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필명은 '지하'(地下)였는데, 이것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되면서 이름을 지하(芝河)라 하게 되었다.
1970년 정치인과 재벌,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를 오적 필화 사건이라 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 체포되고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같은 해 3월 13일 서울에서 원주 집으로 가려고 나오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 다시 구속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고 다시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대 이후, 각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수용하고 생명 운동을 벌이는 데 힘썼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생명에 대한 그의 존중심에서 나온 비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부를 돕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많은 이들의 비난과 원성을 사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박두진, 고은의 시, 황석영, 최인훈, 이청준, 박경리 등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도 유럽과 미국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70년대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이었던 김지하는 80년대 이후, 그리스도교 사상과 불교의 미륵 사상, 화엄 사상, 유교, 선불교·기(氣)철학 등의 여러 가지 사상들을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재해석하고 이를 모두 융합, 수용하여 생명사상을 제창했다. 대표작으로는 《오적》, 《새》,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