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은 질투심을 극복하고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질투심과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커 보여도 작은 사람이다. 사울은 남들보다 어깨 하나쯤 더 올라오는 큰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는 작은 사람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다윗의 존재는 사울에게 처음에는 큰 고마움으로 다가왔지만, 전쟁에서 돌아오는 승전 군을 맞이하는 여인들의 노랫말 하나에 금방 돌변하고 말았다.
(삼상 18: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삼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 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삼상 18: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아마 다윗의 인기가 사울 자신보다 약간이라도 부족했더라면 사울은 평생 다윗을 아끼고 좋아하고 잘 대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윗에게 만만을 돌리고 사울에게 천천을 돌리면서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경쟁자로 보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였다. 여기서 “주목하다”라는 말은 “아완”이라는 말로 의심의 눈으로 늘 지켜본다는 뜻이다.
“거기까지만”이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마지노선으로 그어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친구도, 가족도, 우정도, 인정도 그 선을 넘어서면 모두 물거품이 되고 공격적으로 돌변하는 사람이다. 꽤 많은 사람이 시기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친한 친구였던 사람도 마구 공격하고 원수 취급해버린다.
반면 요나단은 진정 큰 인물이었다. 그는 침례 요한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의 등장에 요한이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요나단은 다윗을 보고 그의 인물됨과 위용 앞에서 너는 첫째가 되고 나는 그 다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어쩌면 가장 많은 경쟁심을 가질 법도 한데 요나단은 질투심과 시기심을 극복하고 오히려 대범하게 다윗을 인정하는 여유를 보였다. (삼상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러나 큰 사람 같았던 사울은 오히려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윗을 죽이려고 매번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삼상 18: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삼상 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사울은 자신이 왕좌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지만 자기의 신하인 다윗을 두려워하였다. 하나님이 이미 사울을 떠났고 다윗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시기하고 질투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만 초라하고 처량해질 뿐이다. 시기심에 무너진 자존감은 계속해서 거꾸러지고 마침내 완전히 그 질투심에 지배당하고 만다. 이런 미움의 마음에서 돌아서고 내리막길에 브레이크를 잡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길만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지 못했다. 한 번 시기심의 길을 가기 시작한 사울은 최후의 순간이 올 때까지 결국 다윗이라는 큰 산에 막혀 평생을 다윗과 싸우는 일로 인생을 마감하고 결국은 원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삼상 18: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하지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울의 가문을 오히려 선대하고 스스로 큰 사람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되기 원합니다. 여인이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던 요한처럼 저희도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겠다는 양보의 미덕을 소유한 넓은 마음을 가지게 도와주소서 오늘도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라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엮어 매는 하루를 살게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