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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마 3:13-17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3-17 /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다;막1:9-11,눅3:21-22] 그 무렵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오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사양하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할 사람입니다.' 1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 침례를 베풀었다.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7)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이 사람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3-15)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사실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해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 하십니다(15).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세례 사역을 위임받았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준비로써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시대를 마무리 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16-17)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생애가 시작되는 그때에 하나님의 아들임이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선언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나타난 현상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를 더 명확히 드러내 줍니다. 마태는 비둘기를 순결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 위에 임한 성령을 비둘기처럼 순결한 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이처럼 순결한 사역이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전개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선언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침묵을 깨고 하늘로 부터의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은 시편 2장 7절의 “너는 내 아들이라”와 이사야 42장 1절의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시편 2편은 왕의 즉위식 때 사용되는 시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서 만왕의 왕으로 기름부음받고 승인받으신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42장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집니다. 이사야 42장 1절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을 고난 받는 종과 연결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인 동시에 고난 받는 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드러냅니다.
적 용 : 여러분이 처음 세례 받았던 순간을 회상해봅시다. 어떠한 마음으로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세례 받은 후에 삶은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정체성은 배의 엔진과도 같습니다. 엔진을 갖춘 배는 사나운 파도에 출렁이면서도 자기가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은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더라도 결코 자기가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정체성이 인생의 엔진이 되어 내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없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돛단배처럼 줏대 없이 흔들리다 결국 나를 잃어버립니다. 내 정체성을 알면 나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므로 자신감이 생깁니다. 남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엄정한 사실에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 설 교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오늘의 교회력은 예수님 수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매년 주현절이 지난 처음 맞이하는 주일을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주현절이란 하나님이 인간으로 나타나시고 드러내시고, 찾아오신, 즉 현현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주현절이란 영어로 "Epiphany" 라고 하는데 나타남, 현현이라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현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주현절은 기독교 초기부터 부활절 오순절과 더불어 기독교 3대 절기의 하나였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세상의 달력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또 목회도 그렇게 하다보니 주현절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매년 1월 6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탄절을 지키고 연말연시라고 하여 떠들썩하니 지나다보니 주현절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탄절보다는 주현절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림절에서 성탄절, 그리고 주현절까지 이어지는 것이 주님의 탄생에 관한 절기입니다. 지금도 서방교회는 성탄절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으며, 동방교회는 주현절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동방박사들의 방문,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그리고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을 기억하는 절기로 지켜왔습니다.
아무리 교회들이 주현절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해도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없고,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현절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주현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까지 현현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 동방의 박사들에게까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내시고 현현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주현절에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것과 첫 번째 이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 되게 하신 것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바로 나타내셨다는 말이 "에피파니"라는 말입니다. 주현절기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예수님의 세례와 처음 이적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주현절을 지키면서 서방교회에서는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은 것을 강조하고, 동방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현절기에는 세례를 많이 베풀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기에 주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와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므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고, 어둠의 세상에 밝은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설 때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과시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선언이요,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와 시간에 따라 행동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본질상으로 같으신 분이신 데도 낮아지고 또 낮아진 중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종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니, 좌충우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높이 들어 쓰고 계속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같이 죄가 없으신 분이 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해석을 내어놓을 사람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좀 생각이 있는 교인이라고 하면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고 세례요한의 세례를 어디까지 인정하여야 하며 그 세례가 우리 신앙에 무슨 도움을 주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으면 일상 생활에서 지은 죄를 모두다 용서받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1. 세례요한은 회개를 위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였습니다. 자기의 죄에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죄를 버리고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새롭게 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말하지만, 죄사함까지의 회개의 세례라고 하여, 죄사함으로 인도하는 세례라는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해주는 사죄는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죄를 아파하고, 죄의식을 예리하게 가지고, 회개하라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율법의 역할처럼 구원받을 곳은 은혜의 집으로 가는 것이라고 인도하는 몽학 선생과 같습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요한은 어디까지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요, 우리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은 세례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다보니 한 청년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성령은 세례요한에게 알려주시기를 지금 네게 오는 분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분이요, 지금까지 네가 기다리던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오신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당신이 내게로 나아오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왔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살아온 세례요한은 지금 말씀하시는 주님은 자기가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능력 많으신 분이요, 성령과 불로 세례주실 분이신 것을 확신하면서 순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안이 열리고 보니, 자기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예수님이 받으시려는 세례는 지금까지의 단순한 회개를 위한 세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예정하신 의식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요청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서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기에 "모든 의를 이룬다"는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 되는 것입니다.
1. 회개의 세례 이상의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에서 요청하셔서 이루어진 것이요, 세례 요한이 베풀던 이전의 세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세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가 아니며, 오히려 예수님 편에서 요청하신 것으로 전에 요한이 베풀던 세례와는 완전하게 구별되는 세례로, 그 이상의 큰 뜻이 포함되어 있는 세례입니다. 그 깊은 뜻을 다 측량하지 못합니다.
2.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어떠한 죄가 있어서 받는 세례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보통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옛 사람의 옛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전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결단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사적인 생활을 이제 그만하시고 공적인 생애,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을 그 동안의 사생활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공생활로 들어가시는 것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30년 간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이제부터는 공생애로 들어가시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3. 수세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예정되어 있는 한 과정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꼭 있어야 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건과 생애의 정점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시는 것입니다. 모든 의를 이룬다고 하는 것에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세례 요한의 세례까지 포함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포함되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증언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도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준비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4.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는 단호한 의지입니다.
성경을 읽어가다가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이 나오면 "십자가"라는 마스터키로 열어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단호하게 지시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그 인간을 대표하여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의지로 인간과의 "동일시"하는 순간입니다. 이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은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회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동일시", 또는 "동일화"라는 말은 죄지은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이요, 그런 인간의 심정으로 가는 것입니다. 죄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세례를 받으러 가시고 있습니다. 그런 죄인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죄인의 입장에서 죄를 지시고,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로 나아가시겠다고 하는 단호한 결의로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표적인 사건으로 세례 받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10:38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혀달라고 할 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고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잔이나 세례는 다 같은 의미로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단순히 죄에서 회개하라는 목적이 아니라, 장차에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시는 단호한 의지로 받으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도 바른 그런 차원입니다. 단호하게 죽음으로 새 생명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절차입니다.
모든 의를 이루신 세례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대한 승인 절차로서의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승인의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는 결정적인 시작인데, 하나님의 보내시는 아들로, 또 그리스도로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세례의식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의 위에 임하셨으며, 하늘로부터 큰 소리가 있었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승인 절차요, 성령이 임하시는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이제부터 하늘이 열리는 순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승인하는 절차요, 하나님은 이 일과 우리 주님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세주일로 지키지만, 그동안 2000년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의 수세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세례 받은 것을 감사하고 기억하는 절기로 지켜왔습니다. 예수님의 수세가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생애에 있어 우리가 받은 세례도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으로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 앞에 하늘 문이 열려지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위에 강림하시고, 하나님의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내려 주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함께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형식적인 세례가 무엇이 소중하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형식이 없이는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막16:15-16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진정한 바른 믿음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있음을 알게 하는 분명한 근거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4문에서는 세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성례의 하나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가지고 씻는 예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음과 은혜의 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다는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를 주고 말씀을 가르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았으니 당연히 기계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세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는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 주님이 먼저 받으신 것이요, 당신의 이름으로 새롭게 제정하셨고, 세상으로 나가서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기에 세례는 우리의 구원의 과정에 있어 인치시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만다면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 감격 속에서 받고, 세례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 세례 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 세례 교인이라는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최종적인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세례에 대하여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결단도 얼마나 비장한 결단인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죽어야 하는 세상이 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 받으신 노춘경이라는 사람이 한문 서적을 읽어가다가 서양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교(敎)라고 하는 비난의 말을 읽었습니다. 세상의 부모도 모르고 임금도 없다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양 종교이니 서양인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헤론 의료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에 관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구하였으나 그러한 책이 준비된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 알렌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의 책상 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만주에서 죤 로스와 죤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백홍준 서상륜을 비롯한 의주 청년 4인과 함께 번역한 복음서였습니다. 노춘경은 그 책을 양심의 가책이 없이 옷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잘 읽었습니다. 노춘경은 드디어 언더우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언더우드 목사님에게 자세히 전해듣게 됩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회고하기를 노춘경의 눈초리는 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유교의 진리보다 생명을 주는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노춘경은 외국인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신앙을 고백하고 언더우드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국법으로 금하고 있었고, 외국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었으니, 드러나는 날에는 어떠한 형벌도 각오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는 앞으로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겠다는 서약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날이 1886. 7. 11일이었습니다. 다음 해 1887년 봄에 황해도에서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세 사람이 언더우드를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이미 구원의 확신이 있었고, 세례 받기 위하여 서울로 내려온 이들이었습니다. 이 때 세례를 주던 자리에 헐버트라는 선생님이 대문에 가서 망을 보는 중에 세례를 주었으니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나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하신 분들 중에 세례를 하나의 형식이고 의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은 친히 요단강으로 내려가셔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비콕스 (Harvey COX)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 내가 어려서 받은 세례가 성장한 후에도 늘 힘이 되어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장해서 보니까 어려서 받았던 그 세례가 두고두고 힘이 되어 주었고 신앙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한 번의 체험은 평생을 좌우하는 것으로 바로 세례의 힘인 것입니다.
세례 받은 것은 나의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내가 받은 세례는 나를 구원하신 인침이었구나"하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