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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돌파 작전
제 1절 작전 개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그리고 낙동강전선에서의 반격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말까지 38선 남쪽의 북한군을 격멸하고 사실상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전쟁 전의 분계선이었던 38선으로 접근함에 따라 38선 돌파 영부가 최대의 관심사항으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유엔의 궁극적인 목적인 한국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북진을 주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제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위험성으로 인해 북진을 반대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한국정부는 이 기회에 북한 공산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유엔의 결정과 상관없이 북진통일을 완성하겠다는 공식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9월 29일 모든 부대에 진격을 멈출 것을 명령했지만 , 이승만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정일권 총장은 제8군사령관에게 전술상으로 동해안 전선에서 38선 북쪽고지의 점령이 필요함을 역설해 동의를 얻었다. 그 결과로 선두부대가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전세의 호전으로 고무된 미국은 유엔의 최초 참전 목적인 한반도의 원상회복이 아닌 유엔군의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며, 유엔 회원국 다수의 국가들이 미국의 북진결정을 지지하게 되었다.
10월 7일 유엔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38선 돌파 및 북한의 수도 평양을 목표로 하는 진격작전이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리고 각 군단 및 사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은 앞서 38선을 돌파한 미 제1기병사단보다 한발 앞서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하였다. 한편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명령에 다라 국군 제2군단의 제7사단도 동북방에서 평양으로 입성한다.
한편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후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며 일일 평균 26km라는 놀라운 속도로 진격을 계속하여 10월 10일 동해안 최대의 군사요충지인 원산을 탈환하였다.
제 2절 작전 준비
1. 미국과 유엔의 38선 돌파 결정
38선 돌파 문제가 한.미 양국정부에 의해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 외교적 현안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7월 중순, 국군과 유엔군이 대전으로 물러나며 지연전을 벌이고 있던 때부터였다.
미 국방부와 일부 국무부 일부(동북아과 중심)가북한군 격멸 후 먼저 38선을 돌파하고 북한을 점령한 후 유엔 주도 하에 한국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한 반면 국무부 일부(정책기회국 중심)가 중. 소의 개입이 없을 때에만 유엔 결의로 북진하되 개입여부에 대한 정보가 확인될 때가지 최종결저을 유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검토배경에는 7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이 미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먼저 침공한 이상 38선은 없어졌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7월 19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6.25일 새벽에 북한은 38선으 유지를 요구할 권리를 잃었으며,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으며 한국정부와 국민은 지금이 통일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반면 공산진영에서는 주로 대만문제에 집착해 온 중공이 8월 20일 주은래가 한국문제 토의에 중국대표 참석을 요구하는 전문을 유엔에 보냈고, 9월 25일에는 주중 인도대사에게 "중국은 미국이 38선을 돌파하는 것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였다. 또한 8월 1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 복귀한 소련대표 말리크도 전쟁이 "최초 자신들이 계획한대로 진행되지 않고 비관적인 전망이 떠오르게 되자, 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하고 조기종결을 주장하며 8월 22일에는 "만일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은 전쟁을 불가피하게 확대할 것이다"라고 경고하면서 38선 돌파 문제를 사전에 봉쇄하려는 책략을 구사하였다,
이러는 일련의 상황변화에서 미국 합동참모부는 9월 27일, 맥아더 사령관에게 훈령을 내려 "유엔군은 38도선을 돌파하되작 전의 목표는 북한군의 격멸이라는 군사목표에 엄격히 한정하고, 특히 중.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소의 어떠한 이유로도 군사적 개입이 없는 조건하에서란 단서를 달았다.
2. 국군의 38선 돌파 결정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9월 29일 오전 중앙청에서 거행된 환도식이 끝난 후 맥아더 장군에게 "지체없이 북진을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총참모장에게 명령서를 주었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고, 이에따라 정일권 총참모장은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에게 연락하여 38도선 북쪽의 어느 요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아군의 진격이 큰 어려움에 봉착할 만한 곳이 없겠느냐고 물었고 바로 지금의 하조대부근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제8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이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입는다며 설득하여 워커장군의 승낙을 구했다.
이리하여 9월 30일 제1군단을 찾아가 구두명령에서 성문화된 작명으로 하달하여 10월 1일을 기하여 역사적인 38도선 돌파작전이 시행되게 된다.
제 3절 38도선 돌파
1. 작전계획
가. 북한군의 38선 방어계획
국군거ㅘ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패주를 거듭하던 북한군은 9월 말까지 약 25,000~30,000여 명만이 38도선을 넘었을 뿐 나머지 3만여 명이 퇴로를 잃고 지리산과 소백산맥, 태백산맥 일대에 잠입하여 유격활동을 하거나 38도선 이북으로 북상을 시도하고 있었다.
북한군 최고 사령부는 최용건이 지휘하는 서해안 방어사령부는 배천-개성-고랑포-사미천 지역 일대에 새로 편성된 제19. 27. 43사단과 제17기갑사단을 배치하였다.
또한 김책 전선사령관이 지휘하는 동부전선에서는 사미천에서 동해안까지의 지역 일대에 낙동간 전선에서 패주하여 북상한 제5. 12. 15사단과 후방지역 예비대들을 투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사단별 병력수준이 20%수준에 불과하고 전투를 위한 최소한의 장비나 보급이 제대로 ㅇ원활하지 못해 전력이 거의 소진한 상태였다.
나.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계획
9. 27 훈령에 의거 맥아더 장군은 10. 2일 작전명령을 하달 하였다.
"미 제8군은 주공으로 38도선을 돌파, 개성-사리원-평양의 축선을 다라 공격하고, 미 제10군단은 주공이 공격을 개시하면 1주일 이내에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원산-평양 축산을 따라 서북으로 진출하여 미 제8군과 연결, 적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하며 유엔군은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연결하는 선(맥아더 라인)까지만 진격하고 , 그 이북지역은 한국군에 전담케 한다"
2. 동부지역 돌파
동부지역 돌파작전
함흥
흥남
영흥
평원선 고원
원산
쌍음
안변 패천 국3-26연
수도사
신고산 황룡산 국수도-기갑-1대대
경
도납리 통천
수도사(-) 수도사(-)
화양 화천
원 말휘리 금강산 고성
국3사
평강 수도18연 간성
대우산
금화 수도18연
선
철원 원통
양구 설악산 양양
수도18연 인제 38선 국수도사 국3사
의정부 춘천
국군1군단 강릉
가. 국군 제3사단의 양양-통천 진격전
(1) 양양-간성 진격전
국군 제3사단은 1950. 10. 1일 08: 10분에 제23연대 제3대대를 선봉으로 인구리 북쪽에서 38도선을 넘어 양양으로 진격했다. 이시간 제26연대는 삼척에서 LST로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차후 작전 준비중이었고, 제22연대는 강릉일대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이 사실은 주한군사고문단 정기보고서에 "이날 제3대대의 선두가 08:10분에 38선을 넘어서 양양 남쪽 약 3마일 지점까지 북상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수도사단 제18연대 수색대 소대원들은 이보다 먼저 양양에 들어가 훈련소를 점령하고 시가지를 수색하면서 국군 제3사단을 만났다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이 18연대가 백골연대로써 차후에 3사단 소속이 되면서 이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제3사단은 제23연대가 10월 2일 14:00시에 양양에 진입하였다. 같은 시간에 서림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수도사단도 제18연대를 선두로 양양을 점령했다.
10월 3일 제26연대가 초월 공격으로 간성을 점령하였고, 수도사단은 제18연대가 간성으로 진출하는 동안 동해안 도로를 다라 북상 중이었다.
(2) 고성-통천 진격전
10월 3일 간성 방어마저 실패한 북한군은 고성-통천-고저선에서 축차저항을 하는 한편, 오대산. 설악산 등으로 잠입한 일부 병력이 유격전을 전개하게 된다.
제3사단은 제22연대가 4일 마달리를 출발 고성을 점령한 후 5일 장전에 진입했으며 북한군 1개 중대를 포로로 하였다. 뒤이어 제23연대가 3km후방에서 후속하고 제26연대는 간성에서 후방을 경계하며 고성으로 이동 중이었다.
육군본부는 10월 5일 추가 명령을 하달 하였다.
제1군단은 제3사단이 통천-구계리를 거쳐 원산을 점령하고, 수도사단이 화천-안변을 거쳐 원산을 제3사단과 협조하여 공격하라는 것과 제2군단은 제6사단이 화천-김화-창도리를 점령한 후 계속 공격하고 , 제7사단은 제6사단과 협동으로 김화를 점령하고 동시에 제2군단으로부터 해제되어 육본의 직접 통제를 받으며, 제8사단이 철원-평강을 점령한 후 제6사단과 협동으로 용지원리를 점령하라는 것이였다.
이 명령에 따라 수도사단의 진격로는 군단 좌측으로 우회하게 되는데, 제18연대가 진부령-원통-인제-양구-말휘리-화천-회양-신고산-안변-원산(1개 대대는 화천-황룡산-안변)으로 진격토록 하고, 본대는 통천에서 화천-신고산-안변선으로 진출토록 한다.
제3사단은 10월 6일 장전을 출발하여 통천을 제22연대가 점령하고, 제23연대가 제22연대를 추월하여 고저를 점령한다.
(3) 통천-남대천 진격전
제3사단은 10월 8일 07:00에 행동을 개시하여 제23연대는 자산리 일대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여 제압하고 15:00시에 송현링에서 적 110명을 사살하고 56명을 포로로 하였다. 내륙으로 우회 명령을 받은 제26연대는 괴화리에서 방향을 전환해 패천리를 경유 안변으로 향하고 제22연대는 제23연대를 후속 하였다.
10월 9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최후 항복문이 발표된 가운데 제23연대는 월봉산 일대에서 북한군 500여 명을 제압하고 지경리까지 진출하여 원산 공략의 최후거점을 확보하였다.
한편 제3사단의 좌측에서 공격중인 수도사단 제18연대는 신고산-남산리-방화리를 거쳐 지경리 부근까지 도달했고, 제1기갑연대가 도납리를 경유하여 안변에 이르고, 제1연대가 회양에서 신고산으로 진출하여 경계에 임하였다.
나. 수도사단의 서림-안변 진격전
(1) 서림-간성 진격전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속사-광원-서림의 지세가 험하여 우선 선두에 진출중인 제18연대로 서림-양양간 기동로를 따라 38서을 돌파를 하게 하고 제1기갑연대를 후속시키기로 하였다. 제1연대는 속사리-진부리-대관령-강릉을 경유해 동해안 도로를 따라 양양 방면으로 우회토록 하였다.
10월 1일 제18연대는 연대 지휘소를 서림리리에 추진시키고, 이날 새벽에 제1대대가 38선을 돌파한 후 다음날 2일 14:00시에 양양에 진입한다.
양양을 점령한 수도사단은 제3사단을 후속해 10월 3일 선두로 제18연대가 간성으로 진격하고 이하 연대들이 후속한다.
(2) 간성-화천 진격전
동해안에서 제3사단을 후속하던 수도사단은 10월 4일 군단으로부터 1개 연대를 간성에서 진부령 방향으로 진격시키라는 명령이 하달 되었다. 이에 수도사단은 사단의 선두인 제18연대를 원통-양구 방면으로 우회 시키고, 제1기갑연대와 제1연대는 계속하여 동해안으로 진격시키기로 하였다.
※인제 군청의 금고를 지고가는 국군 아저씨
제18연대는 30대의 차량에 약 2주간의 보급품을 싣고 이날 간성을 출발하여 진부리로 진출했다. 연대는 10월 5일 광치령에서 북한군 300명과 교전하여 격퇴하고 10월 6일에 양구를 점령한 후 문등리 계곡을 타고 회양으로 북진하였다. 수도사단의 2개 연대는 제3사단의 뒤를 따라 북진하던중 통천에서 7번국도에 5개 연대가 집중되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수도사단은 10월 7일 통천에서 내륙으로 태백산맥을 횡단해 화천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이에따라 제1기갑연대는 태백산맥의 추지령을 넘어, 화천 북방에서 재편성중인 북한군 1개 대대와 격전을 벌이며 화천으로 진출하고 그 뒤를 이어 제1연대는 추지령에서 내금강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는 북한군 400여 명을 생포하였다.
(3) 화천- 안변 진격전
화천에서 안변으로 진출하는 수도사단은 반드시 넘어야할 철령이 있었다. 신고산 바로 앞에 685m의 철령은 고개만 88개에 달하는 험준한 산악지대로써 북한군이 천연적인 요새를 이용하여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제1연대가 주간공격을 했으나 실패하고 물러나자 제18연대가 임무를 받았다.
"패차량을 이용한 미군 탱크진입으로 위장하여 돌파하다"
제18연대 제1대대는 "북한군이 미군의 전차만 보면 극도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도주한다"는 포로들의 진술에 노획한 소련제 트럭 5대와 기타 차량 40여대로 배기통을 떼어 요란한 소음을 내도록하여 밤 22:00시경 전조등을 켜고 진출시키자 북한군이 철령 방어를 포기하고 신고산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10월 9일 신고산을 점령하였다.
10월 9일, 철야작전으로 철령을 넘어 신고산으로 진출한 수도사단은 그 일대를 수색하여 북한군 1개 사단의 장비와 물자를 노획하였다. 포장된 다발총 3,000여 정, 전차 6대, 야포 4문, 중기관총 30정, 경기관총 500정, 1개 화차분의 의약품 등 개전 이래 수도사단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다.
수도사단의 최선봉 제18연대 제1대대는 연일 계속되는 철야 돌파작전으로 장병이 극도로 피로하였으나 동측방에서 20km를 앞질러 진격중인 제3사단에 원산진입의 선두를 뺏기지 않으려 휴식도 없이 다시 차량으로 원산을 향해 진출하게 된다.
사단의 우측방에서 진출중인 제1기갑연대는 제1대대가 화천에서 도납리를 경유하여 9일에 안변에 진출한다. 반면 제2 / 3대대는 철령을 넘어 신고산으로 진출한 후 신고산 후방 터널고지에서 북한군 200여 명을 사살하고 남쪽 과수원 창고에 야적딘 소총 1,500정, 탄약 20만발을, 양곡 3트럭분을 노획 하였다. 제18연대를 후속하는 제1연대도 신고산으로 진출하여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이로서 수도사단도 10월 1일부터 10월 9일까지 38선을 돌파하여 안변북족까지 진출하여 원산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다. 참전용사의 증언 및 관련된 이야기
지난 20여년간 전후방을 누비면서 북진작전에서 중공군과 대작하기 전까지의 증언이 미흡하다. 또한 우리가 탐사를 할 수도 없기에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 '15년부터 참전용사 증언록 제작을 위한 사업계획을 반영하여 예산사업으로 매년 전국을 대상으로 몇군데씩 선정하여 증언을 청취하지만 실제 그 결과는 미흡하다. 내가 직접 2년간은 북한지역을 위주로 통제하여 작성하였고 지금은 남북한을 망라하여 작성중에 있지만 유해매장 지역에 관한 증언을 청취하기는 쉽지않다. 문제는 이것마저도 1~2년이면 끝이 난다는 안타까움이다. 이제 용사님들이 연세가 90이 넘었기 때문이다.
(1) 인제 군청의 금고를 지고가는 국군 아저씨(제18연대 수색 중대 전기풍 용사님의 증언)
전사에 수도사단 제18연대가 간성에서 진부령을 넘어 양구-화천-신고산-원산 방향으로 진격했다는 것은 알아보았다. 양구에서 문등리 계곡을 넘어가는 것인데 산새가 내금강지역으로 상당히 심하다.
※북으로 피난가는 지역주민
제18연대 수색중대가 맨 선두에서 진부령을 넘고 용두리를 지나 인제읍에 도착했다. 진격하는 아군의 기세에 눌린 북한군과 지역 프락치 대부분이 산으로 올라서 북으로 도망치고 부역자들도 안절부절 짐을 싸들고 북으로 피난을 간다. 이것은 당연히 북한군과 그 끄나풀들이 국군이 진격하면 다 요절을 낸다고 선전선동하여 사실은 끌고 올라가는 것인데 워낙 국군이 빨리 쫒아오니 길 양쪽으로 들고 이고 소가 끌고 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인제군청에서 금고를 만나다
인제 내무서원도 가보니 아무도 없고 모두가 텅비어 있다. 군청에 들어가니 지저분한데 금고가 남아 있다. 열어보니 열리지가 않는다. 묵직한 모습이 돈이 있는지 금괴가 있는지 뭔가 있긴 있다.
그런데 한 전우가 본인이 먼저 봤다며 가져가겠다고 큰소리다. 모두가 그러라고 했더니 밖에서 지게를 구해와서 지게에다 묶어서 지고 나갔다. 때로는 걸어야 하고 때로는 트럭에 올라타고 가는데 여간 귀찮은 존재가 아니였다.
그래서 이걸 총으로 쏴서 돈다발을 꺼내서 일부 나눠갔고 본인 지게에 대부분 싣고 문등리 계곡을 걸어서 가니 얼마나 미칠지경이겠는가. 그래도 철령입구까지 왔다. 오는 도중에 민가에 얼마를 집어주고 먹을 것과 바꾸기도 했다.
※결국 모두를 바람에 날려버렸다.
그런데 철령 산속에 잔적들이 많다고 하여 차량으로 진출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죽을 힘을 다해 지게를 지고 오는 전우가 참 불쌍해 보였다.
"야~ 너 제발 그거 버려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이 그걸 언제 쓸거니?"
"괜찮아, 나 이거 가지고 제대해야 우리집 밥 먹고 살거야. 논도 사고 밭도 사고, 나도 머슴살이좀 면하자 안되니?"
"그래 너 끝까지 가지고 다녀라, 그 희망이 꼭 이루어지도록 우리 모두 빌어주자!" 저만치서 중대장이 말을 보내고 있었다.
철령을 어떻게 넘어서 신고산지역에 왔는데 지게 위의 돈다발이 별로 없다. 밤새 적들의 기습을 받고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전우는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을 주변에 모두 뿌렸다.
※수천명의 민간인 희생자, 그리고 흐르고 있는 핏물~~~
우리는 안변을 거쳐 원산에 들어가지 직전에 한 과수원에서 엄청난 비극을 목격했다. 아니 몇백명이 아닌 몇천명은 되어보이는 시민들이 무자비하게 총살 당하여 죽어 있다. 그 속을 밟고 지나며 뒤져보니 군인도 있고 경찰도 있고, 남녀노소 다 얽히어 있는데 얼마되지않은 듯 피가 낭자하게 쏟아져 내려 과수원에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짓인지~~~
(2) 패차량을 이용한 미군 탱크진입으로 위장하여 돌파하다
수도사단의 선발대로 나선 제18연대 제1대대는 신고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철령이라는 88고개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북한군 패잔병들이 요소에 저지 진지를 구축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몇번의 주간공격에도 끄덕도 않는다.
연대장과 대대장은 고심끝에 묘안을 냈다."북한군이 미군의 전차만 보면 극도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도주한다"는 포로들의 진술에 노획한 소련제 트럭 5대와 기타 차량 40여대로 배기통을 떼어 요란한 소음을 내도록 했다. 10월 8일 야간 공격으로 22:00시경 전조등을 켜고 진출시키자 북한군이 철령 방어를 포기하고 신고산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10월 9일 신고산을 점령하였다. 정말 북한군은 미군 탱크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남쪽의 잣고개 전투시에도 있었다.
개전초 후퇴를 계속하던 국군은 금강-소백산맥선을 지켜서 시간을 벌어야 미군의 참전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50. 7월 초에 진천 잣고개 전투시 새로 부임한 김석원 수도사단장이 사용한 사례가 있다.
시동이 걸리는 패차량을 전수 청주에서 진천에 이르는 길가에 배치하여 밤새 라이트를 켜고 시동을 걸어놓으므로써 대병력이 지원되고 있는 상황을 연출하여 진천 문안산-봉화산선 전투에서 1주일을 버텨줌으로써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지역으로 진출하고, 임시정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는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시 귀환한 한 북한군 병사 수기에 보면 북한군은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을 가장 두려워 했다. 그리고 무법천지로 휘젖고 다니는 탱크를 보면 바로 도망쳤다도 한다. 이유는 무자비하게 포탄을 갈겨대니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다만 지뢰지대에 봉착한 탱크는 육탄공격을 불사하며 파괴시키려, 지휘자들이 독전대가 되어 앞으로 수류탄을 들고 나가라고 겁박했다.
(3) 소련군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1권 238P)
" 당시 북한군은 10월 1일 전부대를 38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후퇴는1950년 10월 5일 완료되었다. 서울 지역으로부터 후퇴한 부대들은 그 곳에서 방어하고 있던 제26 및 제27교육여단과 함께 방어로 전환하였다.
낙동강 선으로부터 후퇴하는 제1 및 제2군단 부대들은 유엔군의 강력한 항공공격 때문에 야간에만 이동할 수 있었다.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는 도보로 이동하였다. 당시 유엔군과 국군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않은 채 주간에 도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진격하였다. 그 결과 남쪽으로부터 진격한 부대들은 1950. 10월 8일 38선까지 육박해 들어와 있었던 반면, 북한군 부대들은 38선으로부터 50km내지 100km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 국군은 서로 먼저 관심있는 지역에 먼저 가려 경쟁함으로써 내륙으로 숨어든 잔적을 소탕하지 못했다
실제 북한군 제2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2개 보병 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총퇴각시 최고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적 후방에 남아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였다.(245p)
3. 중동부지역 돌파
국군 재2군단의 중동부지역 돌파작전
양덕 국6사 10.19
강동 원산 국6사 (10.6)
평양
율리
국7사
곡산 국8사
수안
신계 국7사 이천
평강 국8사
철원 김화 국6, 7사
화천
국8사 동두천 포천 국7사 춘천 국6사 (10.8)
가. 국군 제6사단의 춘천-신고산 진격전
(1) 춘천-화천 진격전
중부지역의 38선 돌파 및 진격작전은 국군 제2군단이 담당하였다. 제2군단은 10월 5일자 육본 명으로 제6사단이 화천-회양-지경리(원산 외곾)로, 제8사단이 철원-평강-용지원리로, 제7사단이 제6사단과 협조하여 금화를 점령한 후 예비로 후속하게 하였다.
10월 3일부터 8일 사이에 38선에 도달한 부대들은 제6사단이 3일에 춘천 북방 모진교에 도달하고, 제8사단이 7일에 동두천 북방 초성리에진출하며, 제7사단이 8일 포천 동북방 양문리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제2연대를 선두로 38선을 돌파게 되며 후속하는 제7연대는 차량편으로 춘천을 출발해 진출 중에 제2대대가 명에 따라 구만리 발전소로 이동해 적 1개 대대를 격파하고 200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
한편 후방 경계를 맡고 있는 제19연대는 10월 5일, 제1대대가 가평지구에서 , 제2대대가 홍천지구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제3대대와 연대본부는 춘천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했다. 10월 6일 제19-1대대는 1개 중대로 가평읍 일대를 경계토록하고 대대 주력이 청평쪽으로 남진하여 서울 쪽에서 올라오는 미 해병대와 합세하여 청평댐과 주변을 경계하였다.
이후 제6사단은 북진을 계속하여 10월 8일 오후 늦게 화천을 점령하였다. 이날 사단 좌측의 제8사단도 초성리를 돌파하여 전곡에 진출했다.
(2) 화천-원산 외곾 진격전
38도선을 돌파한 제2군단은, 10월 8일 육본 명으로 원산에서 제1군단과 교대하여 미 제10군단 또는 육본 명에의하여 교대 받을 때까지 원산을 경비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이 명령은 제2군단을 원산에서 제1군단과 교대하여 경비토록 하고, 제1군단은 그곳에서 평양을 목표로 서측에서 공격하게 하여 미 제1군단과 연결하도록 하는 작전이다. 그러나 이날 밤 20:00시에 다시 명령이 바뀌어 내려왔다.
"제2군단은 가능한 신속히 원산으로 계속 전진하라. 육본 명이 있을시 담당지구 내 양덕-장림리-강동 축선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을 하여 미 제1군단과 합세하라. 전진 축선상의 도로 교차점 및 기타 주요 도로를 학보한 다음 적의 남진 및 북진 행동을 저지함에 충분한 병력을 잔류시켜라."
이 명령에 따라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신고산-원산을 경유하여 양덕-강동선으로 진출키로 결심하고 제2연대를 선두로 신고산을 향해 10월 9일 북진을 계속하여 당일 금성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육본에서는 제1군단이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자 제8군과 협의하여 수정명령을 추가 하였다. 강동 축선에서 평양을 향하여 공격 전진 하며 필요시 제1군단 지구를 통과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6사단은 10월 11일 금성을 출발 12일에 회양에 도착하며 이때 제7연대는 이천 방면으로 북한군을 추격하면서 13일 야간에 신고산에 도착한다. 예비인 제19연대는 회양에 집결하였다.
(3) 신고산- 성천 진격전
제6사단의 선두 부대인 제2연대가 13일 밤 신고산을 출발, 14일 덕원까지 진출한 후에 하루를 정비하고 뒤이어 제7연대가 들어오고 제19연대는 회양에서 신고산으로 집결하였다.
이에 따라 제6사단은 15일 덕원을 출발하여 태백산맥의 마식령고개를 넘어 19일 양덕에 진출하게 된다. 이때 곡산 방면에서 진격중인 제8사단 제10연대도 양덕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양 연대 사이에 서로 양덕을 선점하는 문제로 언쟁을 벌이게 되며 이후에도 제6-7연대와 제8-10연대는 경쟁이라도 하듯 성천을 향해 진격하고 제2연대는 19일 22:00시에 성덕에 진출한다.
나. 국군 제8사단의 연천-곡산 진격전
국군 제8사단은 10월 8일 사단의 선두인 제10연대가 초성리에서 38선을 돌파하고 전곡에 진출하였다. 10월 9일에 연천, 10일에 철원원을 탈환하고 평강으로 도주하는 적을 뒤쫒았다.
철원을 점령한 제8사단은 10월 11일 평강으로 진입하여 부대정비를 하며 서북방의 이천-신계-평양선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같은 날 11일에 제6사단(춘천-화천-김화-평강-원산)과 제7사단(포천-김화-철원/평강-신계-율리)도 김화를 경유하여 평강에 진입하였다.
제8사단은 13일 이천을 완전 점령하고 신계를 경유 곡산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군단장으로부터 평양은 국군 1개 사단만 진격할 수 있다는 통제를 받고 분개하면서 명령에 따라 곡산에서 양덕-성천-강동선으로 진격한 후 평양을 동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다. 참전용사 증언 및 관련된 이야기
"사단별 경쟁을 벌이는 진격, 드리워지는 검은 구름"
소련군사고문단장의 보고서에 의하면 국군과 유엔군은 별 저항없이 길을 따라 진격하고 북한군은 그 뒤를 따라 산악통로를 이용하여 북으로 패주하였다.
묘한 것은 우리 각 사단별 진출로가 정말 자동차 경주하듯 겹쳐 있었다는 것이다. 동부전선의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그랬고, 중동부전선의 제6사단과 7사단, 제8사단이 그렇다.
제3사단과수도사단은 38선 돌파를 서로 먼저했다고 자랑하고 양양에서도 으르렁거리더니 원산진격시는 양호 오인사격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제18연대 수색중대에 있던 전기풍 용사님와 왕선배님의 증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전기풍 용사님 : "아니 복장이 군인도 있고 학생도 있고 민간인도 있고 북한군 복장도 있으니 구별하기가 쉽지않았다. 우리 수색중대는 모두 북한군 복장을 하고 진격했다"
왕선구 용사님 : "북한군은 도망가는데 군복입은 군인이 별로 없어요. 포로라고 잡고 보면 잡부야. 나이도 어려서 학생이고. 나도 어린 나이에 개성에서 공부하다 군인을 따라서 내려와 학도병이 되었는데 9월부터는 군복을 입었지. 북한군은 아예 군복이 없어요. 집에서 입고 있던 옷이 그대로인데 아마도 현지에서 붙잡아 입당시켜서 끌고 다닌 것 같아"
이런 현실에 그들은 도주하면서 많은 무기를 땅속에 유기하고 지역일대의 산악에서 근거지를 확보하여 차후 명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들어와 기습을 할때는 아군의 배후에서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북한군 제2군단은 처음부터 38선 이북으로 깊게 철수한 것이 아니고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재편성하여 아군 후방을 교란하고 병참선을 차단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무려 4~6개 연대 규모가, 그것도 거의 80%이상의 전투력을 가지고 주요 장소에 집중적으로 몰려들어 서로 먼저 입성이라는 웃지못할 해프닝을 만들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전기풍 용사님 : "우리가 양양에 들어가 있는데 3사단 애들이 들어오더라고. 그러더니 우리 지휘관을 찾는데 계급이 다르잖아. 우리는 대위이고 저쪽은 중령인데 마구 물러나라는 거지. 그런데 우리 중대장이 연대장 명령없이는 못물러난다고 하니까 어떻게 되겠어. 우리는 양양 시내 중앙 길에서 서로 마주보고 겨누고 있었다니까"
그러니 이곳 6사단과 제8사단도 사실은 윗선에 의지가 다 평양을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의 경쟁이었다. 이미 미 제1군단의 제1기병사단이나 국군 제1사단이 진격하고 있음에도 그 원거리를 트럭을 이용하여 달려서 동쪽에서 치고 먼저 들어가 태극기를 달겠다는 불타는 경쟁심이 사실 북한군을 완벽하게 무력화 시킬수 있었음에도 시기를 놓치고 만것이다.
4. 서부지역 돌파
미 제1군단의 서부지역 돌파작전
숙천 순천
성천 양덕 온정리
강동
적17사, 적32사
평양 국1-15연 삼동
서 대동강(10.9) 국1사(-) 신평
대
영27여-3대대(호주) 미1기-5연 상원(10.17) 율리
흑교리(10.18) 곡산
동 수안(10.16)
진남포
황주(10.17) 능리 국1-11연 국1사(-)
해 대 동 강 미1군단=국2군단
신계 이천
미24-19연 사리원 영27여 서흥(10.16) 예
재령(10.17) 재 성
령 남천점
강 시변리(10.13)
미1기-5연 강 한포리 (10.14)
장연 신원(10.17) 미24-19연
국1사(-) 국1-15연
예 금천(10.14)
미1기-7연 , 미1기병사(-) 미1기-5연
해주(10.17) 미24-19연 백천 예 개성(10.9)
미1기병사 국1사
가. 미 제1기병사단의 금천-황주 진격전
(1) 미 제1기병사단의 38선 돌파 준비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미 제1군단(국군 제1사단,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사단, 영 제27여단)은 1개 사단 이상의 부대로써 임진강 서쪽 일대의 집결지를 점령할 것. 현 임무를 신속하게 미 제9군단에 인계하고 집결지에 집결할 것. 그 후 군단은 의명 미 제1기병사단을 주공으로 북진공격을 실시할 것. 이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24사단은 군단의 양측방을 엄호하거나 군단예비가 된다.
미 제9군단(미 제2사단, 미 제25사단))은 미 제1군단의 지역경계임무를 인수하고 경부국도상의 주보급로를 확보할 것. 동시에 한국 경찰과 협조하여 후방지역에 잔존하는 적 패잔병을 소탕할 것.
국군은 10월 5일까지 신편 1개 사단(제11사단)을 후방지역 경계를 담당한 제9군단에 배속할 것."
이 명령에 따라 미 제1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개성에, 미 제24사단과 국군 제1사단을 각각 임진강 서안과 북안의 고랑포 부근으로 이동, 집결하도록 하였다.
10월 7일 유엔에서 북진관련 결의안이 통과 됨에 따라 10월 9일, 미 제1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선두로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 개성-평양에 이르는 1번국도를 따라 진격하게 하였다.
제1기병사단장은 3개 연대를 모두 병진 배치하고 영 제27여단을 예비로 두었다. 이에 다라 제8기병연대가 중앙에서 개성-금천간 도로를 따라 금천을 공격하고 그 우측에 제5기병연대가 고랑포지역에서 금천을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해 우회기동을 준비하고, 제7기병연대가 좌측에서 예성강을 도하하여 백천을 거쳐 금천 북방 10km로 진출토록 하였다. 그리고 사단의 예비인 영 제27여단이 이날 대구에서 김포비행장으로 공수되어 개성으로 이동하였다.
(2) 개성-금천 진격전
10월 9일 북진 공격을 개시한 미 제1기병사단은 사단 좌측의 제7기병이 예성강 대안상에서의 북한군의 간헐적인 저항을 극복하고(78명의 사상자 발생)도하작전에 성공하여 금천 북방 한포리로 진격하여 적의 퇴로 차단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중앙의 제8기병은 국도에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공병이 이를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며 우익의 제5기병은 장단에서 동북쪽으로 크게 우회기동하게 된다.
제7기병은 백천도로를 따라 진출간 계속적인 적의 지뢰매설과 측방에서 적의 역습이 이어져 한동안 대대장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하지만 후송을 마다한 허프 대대장의 탁월한 지휘능력에 10월 10일 오후 백천일대를 점령했다.
제8기병은 중앙에서 진격중 개성 서쪽 7km,인 토성리에서 경의선을 따라 진출하며 도로에 매설된 대전차 지뢰에 진격이 간간히 저지되게 된다. 여기에 북한군 제19사단의 강력한 방어거점인 봉명산(411m)이 있는데 이를 제3대대가 탈취하였다.
제5기병은 우측에서 개성 동북방에서 5번도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북한군 제27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했으나 별 저항없이 진격을 계속하였다.
10월 13일, 미 제1기병사단은 한포리에서 제7기병이 퇴로를 차단한 가운데 그먼 동쪽에서는 제5기병이, 남쪽에서는 제8기병이 금촌을 포위하게 되며 도로상에서는 계속적으로 적의 지뢰지대에 봉착하여 시간이 지체되는 가운데 제5기병은 북우일대에서, 제8기병이 경의가도를 따라 진격중 두석산일대에서 강력한 적의 저항에 부딪친다. 하지만 근접지원하는 공군과 포병, 전차의 화력지원에 극복하며 제8기병 지역인 두석산 일대에서 제70전차대대 B중대가 북한군과 전차전을 벌여 북한군 전차 T-34를 8대 파괴하고 미군은 피해를 입지않았다
이렇듯 간헐적인 적의 강력한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제7기병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한포리 일대로 북한군 철수병력이 우마차 등을 이용하여 금천을 빠져나와 1번국도를 이용하여 북으로 후퇴하던 중에 제7기병에 걸려들어 항공폭격을 받는 등 500여 명이 사살되고 201명이 포로가 되었다.
10월 13일, 자정에 금천을 확보하게 되며 북한군 약 2,400여 명은 산악지대로 도주하여 작전개시 5일만인 14일에 금천진출은 종결 되었다.
나. 국군 제1사단의 구화리-시변리 진격전
※ 한강다리에 모여든 수많은 국군"
제1사단은 속리산에 패잔병을 소탕하면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10월 6일, 걷고 차량을 타고 10월 8일에 영등포에 도착했다. 임시 한강다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기에는 다른 부대들도 먼저 건너려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 6월 27~28일 행주나루에서, 이포나루에서 그랬던처럼~. 서울 서쪽 은평구 녹번동을 거쳐 10월 10일에 고랑포에 도착했다.
국군 제1사단은 좌인접 부대인 미 제1기병사단이 38선을 돌파하고 금천포위작전이 진행 중이던 10월 10일 저녁 임진강의 고랑포 일원에 집결을 완료한 후 11일 북진 길에 나섰다.
사단은 좌에서 제11연대가 춘양리-구화리-위천리-황계치-시변리로, 우익의 제15연대는 마전리-삭령-토산-시변리로 원거리 우회기동(제1대대는 고랑포-마전리-전곡위 탑거리-삭령)을 하게했다. 예비인 제12연는 사미천 계곡을 따라 제11연대를 후속토록 하였다.
※적으로부터 노획한 화기배치와 지뢰지대를 극복하는데, 1~3km 진출에 1일이 소요되다.
하지만 이런 진지는 점령해 보면 공격도 하기전에 북한군은 화기를 유기하고 도주하거나 후퇴해 버렸다. 그들은 신병이고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마저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다. 바로 엊그제 우리 국군이 38선에서 한강-낙동강으로 후퇴해 가는 과정과 다를바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고랑포 면사무소에 있는 사단 지휘소에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은 미군보다 먼저 평양을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가운데 사단을 지원하는 미 제10고사포단의 단장 헤닉 대령이 보.전.포 협동작전을 받아들여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건의하여 미 제6전차대대 C중대(전차 21대)를 배속받아 제12연대에 임무를 부여하여 구화리로 진출시켰다.
국군 제1사단은 진출로상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는 등의 시간적 소비를 제외하고는 큰 저항을 받지않고 13일 시변리에 도착하며 다시 미군으로부터 전차 1개 중대(제6전차 대대 D중대)를 지원받아 제12연대를 선두로 신계까지 급속 진출하였다.
다. 참전용사 증언 및 관련된 이야기
(1) 한강다리에 모여든 수많은 국군"
제1사단은 속리산에 패잔병을 소탕하면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10월 6일, 걷고 차량을 타고 10월 8일에 영등포에 도착했다. 임시한강다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기에는 다른 부대들도 먼저 건너려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 6월 27~28일 행주나루에서, 이포나루에서 그랬던처럼~. 서울 서쪽 은평구 녹번동-봉일천을 거쳐 10월 10일에 고랑포에 도착했다.
반격 작전간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후속하여 9월 25일 낙동리에서 도하를 완료, 상주-보은을 거쳐 미원/청주-진천-안성-수원(제11연대와 사단사령부는 수원-소사)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그 당시에 한강은 이미 미 해병1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과 미 제7사단(국군 제17연대 배속)이 서을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이에따라 몇군데의 도하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 제1군단 예하의 전투근무지원 부대 등 모든 부대들이 한강이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 주공이 아닌 제1사단에 우선권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 많은 병력이 모여들어 완전히 돗데기 시장처럼 우굴우굴거리며 한강에 가설된 공병교를 따라 올라 서울 서쪽 녹번동으로 해서 봉일천으로 올라 고랑포로 갔다.
※ 고랑포에는 가을이 왔다.(참전용사 특무상사 황대형, 박종우 예비역 대령 등 3인)
나는 유해발굴 작전을 계획하면서 사실 두가지의 가장 큰 어려움이 하나는 어디를 발굴할 것인가였고, 하나는 어떤 절차로 발굴하여 처리할 것인가였다.
첫번째 문제인 어디를 발굴할 것인가에 확신을 준 참전용사님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황대형 용사님이었다. 황선배님은 아마 살아계시던 '09년부터 '19년까지 20년 동안 아마 1년에 1달 이상을 함께했다. '00년부터 '02년까지는 약 3개월을 같이 했다고 봐야 한다.
바로 첫번째 발굴지역인 다부동의 328고지를 선정하게된 것이 황선배님의 증언에서였다. 황용사님은 창군멤버로 국군 제13연대소속으로 고랑포에서 전쟁을 맞이했다. 그 당시 연대장이 김익렬 대령이다.
전날 체육활동으로 막걸리 한잔씩을 걸치고 일부는 외박을 일부는 그대로 부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전쟁이 나서 펜티만 입고 고가초소에 올라가니 적이 저 앞에 오고 있었다.
최초 남으로남으로 철수할 때는 파란 들판이었는데 10월 초에 올라서니 가을걷이를 하고 있었다. 전쟁은 전쟁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나는 선배님외 3인의 같은 13연대 소속 용사님을 모시고 최초진지를 3회에 걸쳐 탐사했다. 경순왕릉이 있는 고랑포리와 자작리에 가서 당시의 면사무소(진격시 사단 지휘소)나 방앗간이나 다 찾아보았다. 지금은 모두 논으로 변하여 그 위치만이 있을 뿐인데 눈시울이 불거졌다.
"이과장 저기가 내가 기관총을 들고 처음으로 사격을 하던 곳이요.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쏴 죽이던 진지요"
※소대장의 고향 친구를 포로로 잡다
당시 소대장이 고인식 중위였다. 고향이 신의주인데 월남하여 육사 8기생으로 임관했다. 10월 13일 토산을 점령하는데 북한지역에 진입하여 처음으로 포로를 잡았는데 바로 소대장의 학교동창이었다.
"소대장님 쏴 버릴까요?"
"아니다. 좀 기다려봐" 소대원들은 몰랐지만 소대장은 벌써 한 눈에 알아보았다. 무기가 없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45년 11월 23일 있었던 신의주학생의거에 함께 참여하여 공산주의와 소련군에 반대 시위를 벌였던 동창이다.
※기관총 탄약수가 된 소대장 동창인 포로"
소대장은 소대원을 모아놓고 양해를 구했다. 이 포로는 북한군이 아니고 북한군에 강제로 끌려간 피해자란 것이다.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대원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한다.
"죽야야 한다에 찬성하는 사람 손들어?' 아무도 없다
"포로로 대대 정보과로 보내야 한다는 사람 손들어?" 서로가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본다. 사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전쟁이란 것이 원칙가지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손발이 너무도 부족하기에 지역에서 우리도 강제로 노무자를 데려다 탄약을 나르게 하고 고지로 밥을 추진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북한군도 한강 이북에서 포로로 한 많은 국군을 그들의 보급대로 전선에 투입하였고 우리는 그들의 일부를 전선에서 만나 원대복귀하기도 하고 일부는 사상검증을 받다 정말 포로가 되어 버린 적도 많다.
"소대장님 잠깐만 시간을 주십시요?"
저 뒤에서 가장 선임인 이 일둥상사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우린 소대장이 없는 상황에 밀담을 주고 받아 탄약수로 쓰기로 입을 모았다. 만약 포로 한 명에 특진이 걸리고 포상금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 포로는 귀찮은 존재였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부족한 마당에 하루에도 수백명의 포로가 잡혀서 처치 곤란이라 해당 부대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는 국군이 되기도 하고 일부는 정말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죽여버렸다.
이렇게 하여 기관총 탄약수가 된 포로는 더이상 포로가 아니라 현지에서 군에 들어온 학도병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제1사단이 진격하는데 길을 안내받게 되고 포로를 잡으면 포로를 교육시켜 쓸데없는 짓을 못하도록 하는 등 많은 역활을 했다. 그러다 추천에 의하여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그는 장교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임동원 전 안기부장도 북한군 학도의용군이었다?"
여기 내용은 육사 7기생인 이종록 용사님이 나에게 말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경례를 안한 육사교장으로 유명한 백 장군님이 직접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임원장은 낙동강 전선에 내려와 전쟁에 참여하다 북으로 패주해 올라갈 때 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당시에 너무 어리고 귀엽게 생겨서 포로로 처리하지 않고 데리고 다니다 바로 장교교육을 받게 하여 국군이 되어 준장까지 진급하였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시 동행하여 김정일의 앞에서 "야 동원아?"라고 부르는 소리에 "네 하고 종종 걸음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그대로 공개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그의 친형이 북한에 어느 직위에 있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 진위는 확인하지 못한다.
(2) 미군과 국군 제1사단의 밀월
"고랑포 면사무소에 있는 사단 지휘소에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은 미군보다 먼저 평양을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가운데 사단을 지원하는 미 제10고사포단의 단장 헤닉 대령이 보.전.포 협동작전을 받아들여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건의하여 미 제6전차대대 C중대(전차 21대)를 배속받아 제12연대에 임무를 부여하여 구화리로 진출시켰다."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공에 대한 평가가 한참이다.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구국의 전투라하며 최대의 업적으로 전사는 평하고 있다.
그럼 과연 다부동 전투를 제1사단이 가져온 승전보인지 그 속을 한번 들여다 보면 꼭 그러하지는 않다고 생각이 된다. 국군 제1사단이 '50. 7월 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여 8월 12일 다시 방어선이 조정되어 왜관-다부동선을 방어한다.
왜관에는 미 제1기병이 있고 그 우측 328고기-수암산-유학산-가산면 석우리를 연한느 선에서 방어작전을 한다. 8월 29일부터는 다시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미 제1기병사단이 왜관에서 다부동을 책임지고 제1사단은 가산-팔공산 우측을 담당하게 된다.
※가장 치열한 9월공세에 다부동은 미 제1기병사단이 담당
같은시간대에 신녕의 제6사단, 영천의 제8사단, 안강.기계의 수도사단, 포항의 제3사단은 미군의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군의 독자적 전투지대였다. 다부동-유학산 지역은 대구-부산에 이르는 축선이 갔는 의미로 미군의 전ㅊ차와 포병, 그리고 공군력이 총 동원된 전투현장으로 연합작전의 의미가 크다.
반격간에도 미 제1기병이 선두, 후속이 제1사단이며 38선 돌파도 그렇고 고랑포에서 토산-시변리로 진출간에도 미군의 전차대대에서 2개 중대가 지원하였다. 하지만 다른 국군 사단에는 이런 지원은 없었다. 아마도 수도사단이나 제3사단에 그런 지원이 갔다면 원산에서 서쪽으로 기동하여 평양을 탈환하는데 몇일은 빨라졌을 것이며 중공군이 압록강으 건너와 은거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제1사단은 백선엽 장군 재임기간내 항상 미 제1군단장 밀번소장과 접촉을 유지하며 미군의 화력을 원활히 지원받았다는 측면에서는 칭찬할만 하지만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했다기에는 조금 어색하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
평양 진격도 이런 특혜(?)속에 미 제24사단이 오를 것을 제1사단이 갔다. 하지만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만약 후속하며 경계부대로 뒤를 따랐다면 운산에서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한다면 너무 심한 가정일까!"
제 4절 원산 - 평양탈환전
1. 원산 탈환전
국군 제1군단의 원산 탈환작전
국3-26연 갈마반도
송정리
원산비행장
국23-3대대 국3-22연
적 국3-23연 국3-22연 원산 국수도기갑-2대대
적 적 적
용주리 국수도-1연 적
관풍리
국수도-18연 국3-22연
여항산 적 국3-22연 국수도-기갑연
적 적
국수도-18연 국3-26연 한물
소재봉 적 국3-26연 국3-22연
봉동산
지경리
국수도-1연 연산봉 안변역
수도-18연
용연리
수도-1연
원산은 북한 동반부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로써 북한군은 원산을 요새화하고 각지에서 호퇴한 패잔병을 합류시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지상으로부터 진격하는 유엔군과 해상으로 상륙하는 유엔군을 소멸하기 위해 원산 동남쪽 25~30km를 연하는 선에 제1방어선을, 10~15km 지점을 연결하는 지역에 제2방어 계선을 설정하여 시가지 방아준비를 하였다.
이를 위해 제249여단으로 원산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제42사단 신편 제12사단 재편(제5삳란 일부 병력 포함), 패잔병 3,000명 석왕사 주변에 집결 재편, 함흥의 증원부대 원산에 집결, 기타 강릉여단 약 2,000명, 제947독립대대 약 1,000명, 해.공군 일부 등이다.
국군 제1군단의 원산공격작전은 10월 10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원산을 점령하기위해서는 2개의 고지군을 점령해야만 했다. 하나는 동쪽 끝의 189고지를 비롯하여 136고지, 73고지 등 일련의 고지군이고, 다른 하나는 서측방에서 시 중앙까지 뻗어내린 여왕산(355m)으로부터 북망산(143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이러한 지형상 특성을 고려하여 군단장 김백일 준장은 우일선의 제3사단이 시 동단의 고지군을, 좌일선의 수도사단이 여왕산을 공격토록 공격목표로 부여하였다.
※양개 사단의 불협화음 발생
하지만 공격작전이 진행되면서 양개 사단의 전투지경선이 불명확하고 원산시를 먼저 점령하려는 경쟁심으로 양 사단은 시가지에서 두번씩이나 교차진출하면서 상호간 불협화음이 노출되었다.
먼저 제3-23연대가 원산조차장-73고지-원산비행장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격파하고 시가전에 돌입하였다. 이시간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제3사단 제23연대의 진격로를 횡단하여야만 진출할 수 있는 갈마 반도의 원산비행장을 목표로 접근하였다. 마침 189-136고지군 일대의 적이 직사포를 사격하는 것을 발견하여 제3-22연대가 제압하면서 기갑연대는 진출을 재개하였다. 이에 일제 토요타 트럭으로 장갑차량 기동타격대로 가장하여 적진을 돌파해온 제1기갑-제1대대가 원산비행장으로 돌진하고 연대(-)는 제3사단 제23연대를 후속하여 시가전을 전개한 후 원산시 동반부를 확보하였다.
한편, 내륙으로 우회기동한 제3-26연대는 수도사단 책임지역인 여왕산을 목표로 진격하였으며 , 이때 수도사단 제18연대로 여왕산을 목표로 진격하여 수도사단장과 제26연대장이 지도를 펴놓고 옥신각신하다 제18연대가 여왕산을 공격하기로 했다.
제18연대는 제10포병대대의 지원하에 3개 대대를 다 투입했으나 진출이 좌절되고 수도사단을 지원하던 미 해병비행단의 비행편대가 공중공격으로 격퇴하고 10:00시경 시가에 돌입하였다.
이러다 보니 양 사단은 수색대들이 들어가면 백묵으로 점령한 시간을 표시하기도 하며 서로 먼저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군단장이 개입하여 " 양 사단 공히 10일 10:00시에 동시에 점령하였다"고 선언하여 불필요한 마찰을 해소하는 해프닝도 있다.
그러나 10월 10일 22:00시경 10대의 북한군 76밀리 자주포를 앞세운 적 기갑부대가 역습을 가해와 양 사단은 병력을 일시적으로 외곾으로 철수시켰다. 이 중 3대의 자주포는 원산비행장가지 들어와 시설물을 파괴하고 도주하였으며 양 사단은 11일 까지 잔적을 소탕하고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날 10월 11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 등이 원산비행장을 시찰하였고 수송기 22대가 국군 제1군단이 필요한 긴요보급품을 긴급 공수하였다. 북진을 명령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10월 12일 원산을 직접 방문하여 제1군단 전 사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수여하였다.
2. 평양탈환 작전
가.미 제1군단의 황주-율리 진격
(1) 미 제1기병사단의 사리원 진격
10월 9일과 14일 사이의 6일 동안에 걸쳐 3중으로 구축된 북한군의 38도선 방어진지가 미 제1군단의 금천-시변리 포위작전에 돌파되고 국군 제2군단이 신계-이천-덕원선에서 평양을 향해 압박해 들어갔다. 이에 군단장 밀번 소장은 예비인 미 제24사단을 군단 좌측방으로 투입하여 개성 서측방으로 해서 해주를 점령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기병사단은 10월 15일 07: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7기병연대가 서흥을 점령하면 그 뒤를 후속 중인 영연방 제27여단이 초월공격으로 사리원을 정면에서 공격한다.
제8기병연대는 서흥에서 신당리로 우회기동하여 사리원 북방 황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일부병력을 남진시켜 사리원을 북에서 공격톡 하고 미 제5기병연대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남천점-청석두리-신원-재령-사리원선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폭우와 북한군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진출이 더디자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제1군단장 밀번 장군은 예비인 제24사단을 제1기병사단 좌측으로 기동시켜 사리원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평양을 향해 계속공격하라 명령하였다. 이에따라 제1기병사단은 배속중인 영연방 제27여단에게 제7기병을 후속하다 동 연대가 서흥을 점령하면 초월하여 사리원을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10월 16일 금천-남천점 국도는 미 제7기병연대, 영연방 제27여단, 그 뒤를 후속한 제5기병연대, 미 제24사단 제19연대가 뒤엉켜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밀번 군단장이 "사리원을 먼저 점령하는 군대에 먼저 평양입성의 기회를 준다"는 말이 나돌아 사단간의 경쟁이 붙었다. 이러다 보니 17일 새벽에 서흥 남쪽에서는 미군끼리 오인사격도 벌어졌다.
10월 17일, 제7기병연대는 제1대대가 황주를 목표로 공격하던중 사단장의 긴급 통신문을 받아 연대주력은 계속하여 황주로 공격을 하고 제1대대는 사리원으로 남진시켰다. 제1대대는 평양-사리원 국도를 따라 남진하다 군마 37필로 편성된 기마분견대를 생포하여 이들 본대가 지금 도로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전투대형으로 은밀 이동중에 적의 사격을 받았다.
※ "너희들이 대적하고 있는 부대는 소련군이다" 1,700명을 포로로 하다!
이에 대대장은 한국인 통역관으로 적진 가까이에 접근하여 외치게 하자 적 1개 분대가 다가왔으며 이들을 생포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적들이 일제히 투항하기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제1대대는 1,700여 명의 북한군 병사와 13명의 간호사를 포로로 하였다.
이날 제1대대장은 사리원 북쪽에 있는 영연방 제27여단 호주군 제3대대장에게 남진중이라는 연락을 취하고 22:00시에 사리원을 먼저 점령하여 미 제24사단을 제치고 평양 공격의 선봉을 맡게 되었다.
이날, 17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는 해주를 점령였고 제19연대는 사리원 입구까지 진출했다(이미 영 제27여단이 점령)가 진남포 방향으로 전환하여 진격하게 되었다.
(2) 국군 제1사단의 율리 진격전
국군 제1사단은 10월 15일 07:00시에 공격을 재개하여, 제12연대를 우익으로 신계-수안-율리 축선으로, 제11연대를 좌익으로 신계-능리-상원 축선으로 진격토록 하고 제15연대를 예비로 하였다.
진격간 요소에 북한군이 저항하였지만 크게 문제가 없어서 10월 17일, 제1사단은 38선 돌파 이후 일일 진출거리로는 최고 기록인 42km를 진격하여 평양 동남쪽 26km지점인 상원-율리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므로서 평양탈환작전의 최종단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다라 미 제1기병사단보다 2일 늦게 출발한 사단은 먼저 평양 공격을 목전에 두게 되었으며 군단에 건의하여 다시 제6전차대대 D중대를 배속받아 2개 중대 50여 대의 전차가 집결하여 평양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ㅛ쇼ㅛㅕㅓㅛㅕㅕㅛㅛㅕ
나.미 제1군단의 평양탈환
(1) 작전준비
미 제1군단은 10월 17일 현재,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우익의 국군 제1사단이 황주-율리선까지 진출함으로써 평양까지 불과 40km를 앞두고 있었다.
이에 군단은 18일 평양을 공격하기로 하고, 미 제1기병사단이 남쪽에서 정면공격을 국군 제1사단이 동측방으로부터 측면공격으로 평양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이때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이 원산-평양선으로 서진하여 동양까지 진출하고 있었으며, 제8사단은 평강으로부터 3번도로를 따라 양덕 남쪽 3km까지 진출하였다. 육군 예비로 있다 10월 14일부로 제2군단에 배속된 제7사단이 국군 제8사단을 후속하여 마식령산맥을 넘어 예성강 상류의 곡산으로 진격하였고, 그중 제8연대가 17일 오후 늦게 율리에 진출하였다.
평양 탈환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7일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정일권총참모장은 곡산에 있는 국군 제2군단으로 가 군단장 유재흥 소장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제7사단 사령부로 달려가 신상철 준장을 대동하고 율리의 제8연대장(김용주 중령)를 만나 평양을 미군보다 먼저 탈환하라는 구두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2군단 3개 사단 중 제6사단을 제외한 제7사단과 제8사단이 평양탈환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2) 미 제기병사단의 평양 공격
평양탈환전은 10월 18일에 포위망을 압축한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그리고 국군 제2군단에 의해 젅재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황주에서 경의선 철도와 국도를 따라 북으로 진출하여 평양 남쪽에서 미 제7기병연대를 주공으로 18일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흑교리에서 미 제7기병연대를 초월 공격한 제5기병연대 F중대가 19일 11:02분에 평양 서남단에 진입하여 대동강 남안의 동평양을 점령하였다.
이 때 미 제1기병사단의 우익에서 역시 평양을 목표로 진격 주이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가 이미 10분 전에 동쪽 100m 거리인 선교리 로터리에도착하여 도섭장소를 찾고 있었다.
이와같이 국군 제1사단의 선봉부대와 미 제1기병사단의 선봉부대가 상호 연결되어 감격의 환호성을 올리고 있을 때, 대동강 상류 쪽에서 도하하여 본평양으로 진격 중인 국군 2개 연대가 있었다. 그 주의 1개 연대는 평양을 배후로 진출하기 위해 우회 기동한 제1사단 제15연대였으며, 1개 연대는 국군 제2군단의 제7사단 제8연대였다.
(3) 국군 제1사단의 평양공격
국군 제1사단의 평양탈환 작전
봉황산 대
대성산 적 동 봉도리
국1-15-1대대 국1-15-1대대
삼산리
강 동 대 강 삼산동 국1-15-3대대
적 국1-15-2대대
대
동 범수리 국1-15-2대대 대성리 국1-15연
남 강
강 남
미림리 적 국1-15-직할대대 입석리 국1-15-직할대대
양지리
강
국1-11연
적 양합리 국1-12연
국군 제1사단의 평양탈환 작전
아미산
국1-15연 동
적 대대
능라도 대
강
모란봉
대 평양비행장 적 국1-11연
국1-11연
국1-12연 동 국1-12연
선교리
대동강철도 대
양각도 동
강 적
장진리 미1기-5연
(가) 국군 제1사단의 평양 외곾진출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의 우익으로 율리 북방 초귀동에서 평양 동측방을 향해 공격을 재개하게 되었다. 사단은 10월 18일 07:00시를 기해 평양탈환을 위한 마지막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12연대를 주공으로 보.전 협동으로 대동리-선교리 대동교 축선으로 진격하고, 율리의 제15연대가 조공으로 삼등-강동- 축선을 따라 평양 동북방으로 우회기동을 하고 제11연대는 제12연대의 초월을 지원한 후에 예비로써 문산리에 집결토록 하였다.
제12연대는 미 제6전차대대의 2개 중대와 협동으로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북한군의 저항으로 진출이 지연되면서 18일, 당일 23:00시에 도섭으로 상원강을 도하하고 북한군의 진지가 있는 능선 하단부가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의 저지선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한편,전날 10월 17일 밤 율리를 출발한 제15연대는 18일 07:00시에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연대는 당일 22:00시경 평양시내에 있는 대동교로부터 서쪽 11km 지점에 있는 대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쌍강포 상류쪽 남안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19일 있을 도하준비를 하게 되었다.
(나) 국군 제1사단의 평양 점령
국군 제12연대는 19일 여명을 기해 보전협동으로 돌진하게 된다. 저항하던 적은 점차적으로 패주하고 마지막 방어선을 점령하면서 제12연대는 약 300명의 북한군을 살상하였다.
북한군의 3번째 평양 방어선을 돌파한 제12연대는 동평양까지 순조롭게 진격을 하여 11:00시에 동평양의 선교리로타리까지 진출하였다. 제12연대는 진천-선교리 진격간에 적 사살 1,381명, 포로 387명의 전과를 올리고 손실은 2명이 전사했다.
한편 제12연대의 우측에서 미림 비행장과 문수리 비행장(일명 평양 비행장)을 목표로 진격한 제11연대는 빠른 속도로 진격했으나 전차없이 가는 관계로 더디었고, 미림비행장 점령도 제15연대 직할대를 후속해 12:35분에 점령한다. 제11연대는 계속하여 문수리비행장을 14:40분에 점령하였다. 이날 제11연대는 진격도중 민족보위성 및 북한군 총사령부가 있는 추을미 일대에서 퇴로가 차단당한 적 3,000여 명이 투항해 옴으로써 이를 처리하는데 많은 애로를 겪어야 했다. 이들 포로의 1/3이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의용군'이었으며 이들을 간단한 심시를 거쳐 바로 귀향조치하였다.
평양의 동북방으로 우회기동한 제15연대는 18일 늦게 대동강 상류로 진출하여 도하지점을 학보하고 19일 05:00시에 도하를 완료하여 모란봉과 동평양을 목표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연대의 예하대대들은 대대별로도 평양입성에 대한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 제3대대가 김일성대학 구내로 19일 12:00시에 진출한다. 여기서 연대 예비로 있는 제1대대가 원래 제2대대가 모란봉을 점령하면 제2대대를 초월하여 평양시에 진격토록 되어 있었으나 제2대대의 진출이 늦어지자 제1대대가 제3대대 우일선으로 김일성대학에 진입하게 되었다.
김일성대학을 무혈 입성한 제3대대는 당일 14:50분경 모란봉을 점령하였으며 제1대대는 모란봉 서측을 점령하였다. 제15연대는 바로 본평양으로 진격하여 19일 16:45분에 본평양을 점령하게 된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가 동평양을 , 그리고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하여 성공적으로 임무완수 하였다.
(4) 국군 제7사단의 평양공격과 점령
국군 제7사단의 평양탈환작전
아미산 국7-8연 대성산 국7-8연 대
삼산리
동
국7-8연 대 강 삼산동
대 강 동
김일성대학
모란봉 동
평양 광천리
강 삼등
국7-8연
제1군단이 서부전선에서 평양으로 향하고 있을 때, 중부전선의 산악지대로 북진 중이던 국군 제2군단에 10월 10일부로 육본 명으로 평양탈환 작전에 합류하게 된다.
국군 제2군단의 우측 공격부대인 제6사단은 선봉부대인 제2연대가 10월 13일 밤에 신고산을 출발하여 원산을 경유, 원산-평양간 도로를 따라 14일에 덕원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군단의 좌측부대인 제8사단은 평강에서 13일 밤에 이천을 점령한 후 다음날 평양을 향해 신계방향으로 진출 중 진격로를 곡산으로 전환해 평양 동북방으로 진출하라는 명으로 곡산으로 향했다.
이 무렵 육본의 예비로 평강일대에서 잔적소탕작전을 하던 제7사단이 10월 14일 12:00시부로 제2군단에 배속되었다. 제7사단은 평강에 제5연대를 남겨두고 15일에 제8연대가 추동, 제3연대가 지하리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7사단의 선두가 수안에 도달할 무렵 군단장을 통해 "국군이 먼저 미군보다 평양을 점령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하달되었다. 따라서 평양에 가장 근접한 제8연대가 18일 아침 율리를 거쳐 20:00시경 삼등에 도착하였다.
국군 제7-8연대는 삼등에서 화천-승호리를 거쳐 대동강 상류 삼산리에서 석탄운반선 3척을 이용하여 도하하거나 도섭으로 대동강을 건너 노산리로 진출하였다.
※ 평양은 우리가 먼저 들어갔다.
하지만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은 17일 평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18일 오전에 평양에 들어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제8-3대대장 박관영의 증언 : "18일 오전에 제9중대와 제11중대가 대동강을 도하해 오후에 김일성대학에 들어갔다"
제8-9중대 중대장 대리 김호규 소위 : "나는 제3대대의 첨병중대로서 강동을 목표로 공격하던 중 17일 평양을 공격하라는 대대장의 구두명령을 받고 방향을 전환해 대동강을 도하 했다"(전사에 기록됨)
당시 부대별로 평양지리에 밝은 인원을 활용하여 정찰대를 조직, 운용하였으며 제8연대장은 노산리에서 지체없이 평양으로 진격하고 그곳에 평양입성을 표시해 두라고 하였다. 많은 부대들이 20:00시경 김일성대학을 탈환하고 계속하여 모란봉으로 진격해 기림역(서평양역)선가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동평양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본평양의 외곾에 차단 및 요란사격을 집중함으로써 모란봉 일대가지 포탄이 날아와 이쪽으로 진출한 부대들의 진격에 많은 애로사항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 진격이 둔화된 상황에서 연대장은 주요시설을 점령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제8-3대대는 평양시내로 진출해 입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때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선두가 본평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제1사단장이 사단의 작전지역임을 강조하며 시가행진을 중지시키고 물러나라 하여 제3대대는 시가행진을 중지하고 모란봉 강변에 있는 부벽루로 철수 하였다.
1950. 10. 20일 오후에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과 제7사단장 신상철 준장이 화신백화점 3층에 마련된 연대지휘소를 방문하고 노획한 군마를 타고 평양시 중심가를 순시한 다음 군단 지휘소로 돌아갔다. 이후 제7사단은 10월 23일부로 맥아더라인 이북에 대한 작전에 대비하여 미 제1군단에 배속전환 되었다.
북한의 수도인 평양탈한작전은 10월 9일 38선을 돌파한 이래 11일 만인 10월 20일 국군 제1사단의 제11연대와 제12연대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국군 제7사단 제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정부와 유엔군사령부는 10월 30일 평양시청(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입성 환영행사를 개최하였다.
3. 참전용사 증언 및 관련된 이야기
가. 원산, 양개 사단의 불협화음
전사내용 : 〔공격작전이 진행되면서 양개 사단의 전투지경선이 불명확하고 원산시를 먼저 점령하려는 경쟁심으로 양 사단은 시가지에서 두번씩이나 교차진출하면서 상호간 불협화음이 노출되었다.
먼저 제3-23연대가 원산조차장-73고지-원산비행장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격파하고 시가전에 돌입하였다. 이시간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제3사단 제23연대의 진격로를 횡단하여야만 진출할 수 있는 갈마 반도의 원산비행장을 목표로 접근하였다. 마침 189-136고지군 일대의 적이 직사포를 사격하는 것을 발견하여 제3-22연대가 제압하면서 기갑연대는 진출을 재개하였다. 이에 일제 토요타 트럭으로 장갑차량 기동타격대로 가장하여 적진을 돌파해온 제1기갑-제1대대가 원산비행장으로 돌진하고 연대(-)는 제3사단 제23연대를 후속하여 시가전을 전개한 후 원산시 동반부를 확보하였다.
한편, 내륙으로 우회기동한 제3-26연대는 수도사단 책임지역인 여왕산을 목표로 진격하였으며 , 이대 수도사단 제18연대로 여왕산을 목표로 진격하여 수도사단장과 제26연대장이 지도를 펴놓고 옥신각신하다 제18연대가 여왕산을 공격하기로 했다.
제18연대는 제10포병대대의 지원하에 3개 대대를 다 투입했으나 진출이 좌절되고 수도사단을 지원하던 미 해병비행단의 비행편대가 공중공격으로 격퇴하고 10:00시경 시가에 돌입하였다.〕
제18연대 수색중대 전기풍 용사님 증언 : 당시 누가 먼저 들어갔다 아니다는 말단에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당시에 지휘관들이 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나이차이도 없었다.` 우리 연대장 임충식 대령은 사리판단이 분명한 연대장 이였다. 당시에 3사단장이 욕심이 넘쳤다. 우리들은 38선 돌파문제로 기분이 상해있었다. 분명 우리가 서림에서 하루나 먼저 넘었다. 양양도 먼저 들어가 우린 아직 도망가지 못한 북한군을 분명 사살도 했다. 우리는 3사단 아이들이 강을 건너는 것 다 보았다. 그런데 와서는 '너희가 왜 여기 왔느냐며 물러나라 했다'. 우리가 서림에 있을 때에 정일권이 와서 지시로 넘었다.
※ 원산병원에서 X-레이 필름을 한 트럭분을 실어 서울로 보내는 중대장
우리가 시내 곳곳을 정찰하면서 원산 큰병원에 들어갔다. 당시에 부상병이 있는지 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북한군은 모두 도주하기전 바로 병원에서 멀지않은 과수원일대에 부상병도 다 모아놓고 총살하고 도망갔다. 원산시내나 주변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 병원 창고에 X-레이 필름이 엄청 있었다. 이걸 이동하는 차량에 실어 간부 한 명이 타고 서울로 보내졌다. 그 당시에 필름값이 엄청 비싸다고 들었다.
이러다 보니 양 사단은 수색대들이 들어가면 백묵으로 점령한 시간을 표시하기도 하며 서로 먼저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군단장이 개입하여 " 양 사단 공히 10일 10:00시에 동시에 점령하였다"고 선언하여 불필요한 마찰을 해소하는 해프닝도 있다.
●갈마반도
← 제3-22연대
← 제3-23연대
●원산
● 원산비행장
▲ 소재봉 ▲ 여왕산 ↖
제3-26연대 수도사-18연대 제3-23연대
↓ ↖ 수도사-기갑연대
↖ 소도사-18연대 ←
● 지경리 제3-22연대
수도사-1연대
마전리
↓ ↖
수도사-1연대 ● 안변역 수도사-18연대
나. 무자비한 포로 획득 : 사살 1,600여 명, 포로 3,400여 명~!
전사 기록 : "국군 제12연대는 19일 여명을 기해 보전협동으로 돌진하게 된다. 저항하던 적은 점차적으로 패주하고 마지막 방어선을 점령하면서 제12연대는 약 300명의 북한군을 살상하였다.
북한군의 3번째 평양 방어선을 돌파한 제12연대는 동평양까지 순조롭게 진격을 하여 11:00시에 동평양의 선교리로타리까지 진출하였다. 제12연대는 진천-선교리 진격간에 적 사살 1,381명, 포로 387명의 전과를 올리고 손실은 2명이 전사했다.
한편 제12연대의 우측에서 미림 비행장과 문수리 비행장(일명 평양 비행장)을 목표로 진격한 제11연대는 빠른 속도로 진격했으나 전차없이 가는 관계로 느렸고, 미림비행장 점령도 제15연대 직할대를 후속해 12:35분에 점령한다. 제11연대는 계속하여 문수리비행장을 14:40분에 점령하였다.
이날 제11연대는 진격도중 민족보위성 및 북한군 총사령부가 있는 추을미 일대에서 퇴로가 차단당한 적 3,000여 명이 투항해 옴으로써 이를 처리하는데 많은 애로를 겪어야 했다. 이들 포로의1/3이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의용군'이었으며 이들을 간단한 심시를 거쳐 바로 귀향조치하였다."
우리가 개전 초기에 한강을 도하하면서 병력의 거의 2/3가 한수이북에 남겨졌다. 당시 사단의 병력을 10,000명으로 본다면 한 3,000명이 한강을 도하했다고 높은 점수를 주어보자, 그럼 여기 평양에서의 국군 제1사단이 동평양으로 들어가면서 획득한 포로가 3,400여 명이다. 당시 북한군은 사단 병력이 5,000명 내외였을 것이다.
따라서 숫자의 진위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당시에 포로를 사단에서 귀향조치 했다는 사실에서 유추되는 것은 그 병력이 전부 군인이 아니라 보급품을 지고 메고 가는 노무자나 부역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추측이 가는 이유다
다. "너희들이 대적하고 있는 부대는 소련군이다" 1,700명을 포로로 하다!
10월 17일, 제7기병연대는 제1대대가 황주 목표로 공격하던중 사단장의 긴급 통신문을 받아 연대주력은 계속하여 황주로 공격을 하고 제1대대는 사리원으로 남진시켰다. 제1대대는 평양-사리원 국도를 따라 남진하다 군마 37필로 편성된 기마분견대를 생포하여 이들 본대가 지금 도로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전투대형으로 은밀 이동중에 적의 사격을 받았다.
이에 대대장은 한국인 통역관으로 적진 가까이에 접근하여 외치게 하자 적 1개 분대가 다가왔으며 이들을 생포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적들이 일제히 투항하기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제1대대는 1,700여 명의 북한군 병사와 13명의 간호사를 포로로 하였다.
다-1 : "유엔군의 금천-한포리의 함정, 북한군 금천 두석산을 14일 밤까지 반드시 확보하라"
영연방 제27여단은 천마산 줄기를 거쳐서 금천 동측으로 진출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항공 정찰장교가 천마산에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도로가 있다고 보고를 했다.그러나 당시의 지도는 일본시대에 만들어진 지도로 도로망이 부정확했다. 그래서 항공정찰로 확인하고 진출하게 되는데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실제 길은 우마차도로보다 조금 넓은 편인데 산중에서 끊기는 것인데 몇번이고 반복하여 확인하려다 지체되어 금천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12일 저녁 미 제1군단은 금천 포위망을, 제1-8기병연대로 두석산을 공격하여 북한군 2개 사단을 견제하고 있었고 제5기병연대가 북우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금천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제7기병연대가 한포리에서 그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동측은 국군 제1사단이 시변리를 향해 급진전 중에 있었고 서측에는 미 제24사단 제21연대가 백천으로 진출하여 북한군 제43사단을 격퇴하고 그 일부로 제7기병연대 후방을 엄호하고 있었다.
13일, 금천 주변 두석산에서의 제8기병연대의 전투는 처참했다. 연대는 항공지원하에 포사격을 집중시킨 후에 두석산을 공격했으나 1개 사단 이상으로 판단되는 북한군은 전차. 야포. 박격포의 탄막과 기관총 사격으로 저항했고 몇번의 쟁탈전이 반복되면서 큰 희생을 치르고 점령했다. 북한군 지휘부는 여러 부대들의 금천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14일 밤까지 반드시 확보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평양 ← 상동 ●국 제1사
율리
진남포 흑교리 ↖
황주← ●미 제1기병 능리 수안
↑●영 27여 신계 ●국 제1사
사리원 ●영 제27여 서흥 ↖ 이천
재령 ↖ ●미 제1기병
↖ 남천점 시변리
신원 한포리 ↑
↑
↑ 금천 ● 국 제1사
↖
해주 개성
●미 제24사 ●미 제1기병
"1 : 1 전차 데스 매치"
13일 아침, 안개속으로 북한군 T-34전차 한대가 도로상에 경계하고 있던 드루어리 중사의 M-26퍼싱전차를 습격했다. 중사는 거리 50m에서 초탄을, 20m거리에서 제2탄을 모두 포탑부근에 명중시켰으나 북한군 전차는 끄덕도 없이 돌진해 와 부딪쳤다. 미군전차는뒤로 후진중이라 충격력을 흡수하며 이제는 양전차는 서로 주포로는 사격할 수 없는 상태로 서로 꼬리잡기 식으로 빙빙 도는 모습이 정말 멋지게 보였다. 그런 순간 일정 거리가 되자 미군 전차가 불을 뿜어 제3탄이 주포에 명중하여 폭발했다.
하지만 미친 것인지 귀신이 조종하는 것인지 T-34는 계속 돌진하고 제4탄이 명중하면서 승부는 끝났다. 이런 상황이 몇번이고 반복되면서 T-34는 8대가 파괴되고 미군의 M-26전차는 피해가 없었다.
그 물렵 약 1천명 정도가 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트럭과 달구지 종대가 금천에서 북상하여 한포리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미 제7기병연대는 공군과 협동하여 섬멸전을 전개하여 약 500명을 살상하고 210명을 포로로 잡았고 약 300명은 북동쪽 산중으로 도주했다.
라 . 사리원의 밤
10월 16일 국군 제1사단이 수안을 탈취한다. 평양까지는 불과 50km의 거리다. 이 싯점에 미 제1기병사단은 서흥을 탈취하였고, 미 제24사단은 각각 해주 동북방과 청석두리까지 진출하여 17일에 있을 사리원 공격을 준비하였다.
"사리원에 제일 먼저 돌입한 사단에게 평양 입성의 영예를 부여한다"
이러한 군단장의 포고문이 알려지자 각 사단은 물론 연대간에도 경쟁적으로 앞으로 나서다 보니 부대간의 협조가 잘 되지않고 감정의 대립현상이 벌어졌다.
10월 17일 03:00시, 서흥을 경계하고 있던 제7기병연대 F중대는 어둠 속으로 전진해 오는 종대를 발견하고 적인지 우군인지 충분히 확인도 없이 사격을 가했다.
중대는 이미 연대장으로부터 "날이 밝기전에 진전에서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는 사격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이 종대는 청석우리에서 서흥으로 전진해 오는 제5기병연대로 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중대장 당신은 왜 쏘았나?"
"난 5기병이 온다는 통보도 받지 못했고, 연대장님의 명령으로 밤에 움직이는 것은 쏘았다"
"제7기병 연대장, 먼저 사리원 점령하려 그런 우발상황을 예단하면서 모른체 한 것 아닌가?"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마라. 나는 미국의 대령이다. 나도 통보받은 사실이 없다."
"그러면 작전주임, 당신은 전혀 아무런 조치가 없었는가?"
"아닙니다. 나는 제5기병연대 연락장교에게 분명히 연대장의 지시가 무차별 사격 명령을 받고 있다고 귀대하여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는데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고는 군단에서 제1기병사단의 좌측에 미 제24사단을 투입하면서 제5기병연대의 목표를 사리원에서 서흥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이 발단이고 이 내용을 연대참모가 연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사건이었다. 물론 너무 경쟁적이었다.
마. 포로 1,700여 명을 사로잡다"
제7기병연대가 황주를 탈취하면서 제1대대를 사리원쪽으로 남하시켜 영국군과 연결작전을 수행키로하였다. 대대가 도로를 따라 남진하자 전방고지에서 사격을 받았다. 제1대대는 바로 응사했다.
"잠깐 사격을 멈추시오. 내가 나서겠소"
한국인 통역관이 위험을 무릎쓰고 북한군 진지앞으로 나갔다.
"사격을 중지하라, 우리는 급히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 소련군이다"
정말 짜고치는 것처럼 1개 소대병력이 대대장 앞으로 왔다. 그리고 이들은 무장해제되고 그중에 2~3명이 저항할 기세를 보였으나 소대장이 날쌔게 그중 한 명을 때려 눕히자 모두가 양손을 들었다. 그러자 인근 고지에서 모두들 내려와 투항하는 바람에 무려 1,700명의 포로가 생겼다.
바. 북한군이 한국군, 영국군이 소련군~~!, 그리고 1,982명의 포로"
10월 18일, 영국여단 주력이 사리원을 점령하고 있는 그날, 좌측방의 미 제24사단은 해주를 탈환하고 신원리-재령=사리원 가도를 딸라 북상하고 있는데 영연방군이 사리원을 점령했기에 충돌을 우려하여 전진을 중지시켰다.
한편 국군 제1사단은 전속력으로 17일에 40km를 달려 평양까지 20km밖에 남지않은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18일 밤, 날이 저물어가는데 병력을 가득태운 북한군의 차량행렬이 시가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입하다 북단에서 저지되자 다시 남쪽으로 분산하여 도주했다.
영연방 아아길 대대장이 짚차로 사리원에서 남하하고 있는데 도로 양쪽에 북진하고 있는 도보부대와 마주쳐 전속력으로 4km를 캄캄한 밤에 달려서 빠져나왔다.
이 부대들은 북한군 제34사단 주력으로 재령에서 미 제24사단에 포착 섬멸되어 사리원이 함락된 사실을 모르고 북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사리원에서 일대 혼란이 야기되었다. 영국군은 분산 도주해 오는 북한군을 미 제24사단에 편성되어 있는 한국군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북한군이 영국군을 소련군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영국군의 복장이 미군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북한군 병사는 아아길부대 병사들에게 "동지"라고 소리치며 악수를 하기도 하고 병사의 등을 두드리며 담배를 권하고 기념품으로 모자의 붉은 별을 주기도 했는데 곧 서로가 적이란 걸 알고 각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 소대장이 모퉁이를 돌았을 때 북한 병사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아차"하고 생각하는 순간 기지로 "나는 소련사람이다"라고 손을 내밀자 북한군은 그의 손을 두세 번 두그리며 노고를 위로해 주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 북한군 대부대가 시가지로 진입했다. 바로 아아길 대대장이 마주쳤던 북한군이다. 시가지 북단에 대기하고 있던 호주대대의 중대장이 어둠 속의 전차 위에서 "포위되어 있다. 총을 버려라"고 소리치자 선두부대가 총을 벌렸다. 이어서 그 뒤의 부대들도 총을 버려 호주 대대가 포획한 포로의 수가 1,982명이었다. 영국군이 이날 밤 사살한 북한군도 150여 명이었다. 영국군 전사자는 단 한 명이었다.
사. "평양 탈환의 선봉 부대는?
전사의 기록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탈한작전은 10월 9일 38선을 돌파한 이래 11일 만인 10월 20일 국군 제1사단의 제11연대와 제12연대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국군 제7사단 제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되었다.
하지만 국군 제1-15연대 소속으로 평양에 입성한 황대형님과 박종우 등 15연대 소속 용사남들은 전사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10월 19일에 본평양을 점령한 것으로 되었지만 본인들이 점령한 시기는 하루전인 18일 3시경이라고 한다.
황대형 참전용사(예, 특무상사) : "우리는 동평양 또는 본평양을 우회하여 본평양의 북쪽 김일성대학에 10월 18일 오후 3시경에 들어갔다. 그런데 모란봉을 점령하고 19일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데 국군 제1사단의 본대와 미 제1기병사단의 본대가 본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준비사격을 무차별 실시하여 우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변에 북한군이 파놓은 개인호나 함정에 몸을 숨겨야 했다.
〔※여기서 제7사단 인원의 증언내용이 일부 일치하는 대목이 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동평양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본평양의 외곾에 차단 및 요란사격을 집중함으로써 모란봉 일대가지 포탄이 날아와 이쪽으로 진출한 부대들의 진격에 많은 애로사항이 발생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비슷하다. 모란봉일대가 얼마나 지역이 큰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같은 상황하에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제7사단 제8연대도 비슷한 시기에 입성했다고 보거나 제7-8연대가 하룻밤 먼저 들어왔다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판단은 독자에게 맞긴다.
박종우 참전용사님(예, 대령) : 맞어요. 우리가 모란봉에 갔을 때 저 멀리 강안에 도하준비를 하고 있던 제1사단과 미군을 볼 수 있었지. 그래서 서로 '야 우린 벌써 왔다'하며 쾌재를 부르는데 엄청 퍼부어대니 모두 숨었다고.
황대형 참전용사(예, 특무상사) : 맞아요. 그러다 우리가 잘 보이는 곳에 대공포판을 올렸는데 그래도 계속 포사격이 끊이지 않게 계속 되는 가운데 도하를 시작하니까 그때서야 멈춰서 밖으로 나왔어요. 우리는 그걸 명확히 기억하는데 전사의 날짜는 제12연대나 본대가 들어온 날이고 이미 우리는 하루전(18일)에 들어와 19일은 평양시가지를 점령했어요.
※ 제7사단이 먼저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만난 제7사단 참전용사님들은 제7-8연대가 먼저 들어왔고 나중에 제1사단장이 나가라고 윽박질렀다 한다.
전사에는 국군 제7사단의 선두가 수안에 도달할 무렵 군단장을 통해 "국군이 먼저 미군보다 평양을 점령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하달되었다. 따라서 평양에 가장 근접한 제8연대가 18일 아침 율리를 거쳐 20:00시경 삼등에 도착하였다.
국군 제7-8연대는 삼등에서 화천-승호리를 거쳐 대동강 상류 삼산리에서 석탄운반선 3척을 이용하여 도하하거나 도섭으로 대동강을 건너 노산리로 진출하였다.
※ 평양은 우리가 먼저 들어갔다.
전사책에 언급된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은 17일 평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18일 오전에 평양에 들어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제8-3대대장 박관영의 증언 : "18일 오전에 제9중대와 제11중대가 대동강을 도하해 오후에 김일성대학에 들어갔다"
제8-9중대 중대장 대리 김호규 소위 : "나는 제3대대의 첨병중대로서 강동을 목표로 공격하던 중 17일 평양을 공격하라는 대대장의 구두명령을 받고 방향을 전환해 대동강을 도하 했다"(전사에 기록됨)
당시 부대별로 평양지리에 밝은 인원을 활용하여 정찰대를 조직, 운용하였으며 제8연대장은 노산리에서 지체없이 평양으로 진격하고 그곳에 평양입성을 표시해 두리고 하였다. 많은 부대들이 20:00시경 김일성대학을 탈환하고 계속하여 모란봉으로 진격해 기림역(서평양역)선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동평양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본평양의 외곾에 차단 및 요란사격을 집중함으로써 모란봉 일대까지 포탄이 날아와 이쪽으로 진출한 부대들의 진격에 많은 애로사항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 진격이 둔화된 상황에서 연대장은 주요시설을 점령 학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제8-3대대는 평양시내로 진출해 입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때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선두가 본평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제1사단장이 사단의 작전지역임을 강조하며 제3대대의 시가행진을 중지시키고 물러나라 하여 모란봉 강변에 있는 부벽루로 철수 하였다.
1950. 10. 20일 오후에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과 제7사단장 신상철 준장이 화신백화점 3층에 마련된 연대지휘소를 방문하고 노획한 군마를 타고 평양시 중심가를 순시한 다음 군단 지휘소로 돌아갔다. 이후 제7사단은 10월 23일부로 맥아더라인 이북에 대한 작전에 대비하여 미 제1군단에 배속전환 되었다.
나는 전사책에 나오는 제7사단 제8연대의 평양입성 증언자를 모두 2001년 10월에 다 만나 보았다. 평양입성 기념행사에 부대에 초청되어 와서 화천 칠성회관에서 지휘관과 식사하는 장소에 나도 초대되어 자리를 같이하며 관련내용을 들었다. 본인들은 제1사단보다 하루 먼저 들었다고 하며 당시에 부대에는 북한출신들이 많아서 대동강을 본인 손금 보듯이 잘 알고 있는 간부나 사병들이 많았다 한다. 그러면서 전사가 너무 1사단이 마치 신인 것처럼 되어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 "평양 여인을 사랑한 이 중사"
국군 제15연대 제1대대는 10월 18일 모란봉 기습작전간 북한군 짚차를 노획하여 중대 공용차량으로 활용하였다. 그 때 중대의 병기계를 이규선 일등중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평양에 입성하면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황대형 하사 : 선배님 이거 큰 문제되는 것같은데 빨리 정리하셔야지요"
"이 중사 : 야 내가 알아서 한다 "
"한인성 중위(대대 정보장교) : 어이 이 중사 잘 생각해. 끝까지 갈 수 있겠어?"
하지만 이 중사는 짚차에 그 여자와 그 가족을 실어 서울로 보냈다. 그러니 바로 사실이 들통나 현지 군법회의에 붙혀져 사형이 언도 되었다. 어제의 동지를 쏴 죽여야 하는 냉정한 현실이 벌어졌다. 정보과 선임하사 홍상사를 포함하여 사형 집행관까지 선정되었다.
전쟁을 하다말고 전우를 죽여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어느 산 계곡에 들어가 총살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모두의 전우다. 그래서 총을 쏘되 실제 맞추지 않고 사형수는 죽은 시늉을 하고 그 자리에 누워 있으면 집행관들이 떠나고 이 중사는 살며사 어둠을 타고 도망쳐 숨어서 살기로 약속했다
"사형수는 마지막 할 말이 있느냐?"
"아니요. 잘못했습니다."
"우리를 미워하지 말거라, 거총?"
"탕탕 탕탕~"
하지만 죽은척 해야할 이중사가 홍상사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살려달라 외쳤다.
"홍상사님, 정보장교님 살려주세요?" 하지만 바로 탕하는 소리와 함께 이 중사 머리에서 피가 쏫았다. 죽은 것이다. 약속을 어기고 못믿어워서 살려달라 한 것이다. 그리고 집행관들은 혹시나 비밀 약속이 탄로나면 큰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누군가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