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67/200118]노인학대전화번호를 왜?
아하, 우리 아부지 재밌다. 당신의 핸드폰지갑에 꽂아둔 큼직한 글씨의 ‘노인학대 신고전화 1577-1389, 129’. 아들하고 둘이 살면서 왜 적어놓았을까? 알고 보니, 이번에 적어놓은 게 아니고, 지난 1년 동안 여주 딸과 사위집에 사시면서 노인보호센터를 다닐 때 써놓으셨다는 거다. 이 쪽지번호를 발견한 여동생은 “아이구메, 누가 보면 우리가 아버지 학대하는 걸로 알겠네. 왜 써놓으셨어?” 호들갑(?)을 떨어, 온 식구가 한바탕 웃었다. 아마도 ‘노치원’에서 외부강사가 학대관련 교육을 하며 만약을 대비하여 꼭 적어놓으라고 한 모양이다. 딸은 더 뜬다. “자식들이 혹시 아부지를 학대하면 암말도 말고 이 전화번호만 자식들 눈앞에 들이대잉. 요즘은 신고만 하면 즉각 관계자들이 달려와 상담도 하고 방지조치를 취해중개잉”
하여 ‘노인학대’에 대해 찾아봤다. ‘노인에 대하여 △신체적 폭력 △정신적(정서적) 폭력 △성적 폭력 그리고 △경제적 착취 또는 △가혹행위를 하거나 방임하는 것’을 노인 학대라 하고, ‘노인복지법 제1조2 제4호’에 의거해 신고를 하면 보호를 받게 되어 있다고 한다. 각각의 항목에 대해 해설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 문제는 노인학대 발생률이 해마다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15482건이 신고됐는데, 이는 2015년(11905건)부터 해마다 20% 가까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신고건수에서 학대 판정을 받은 것은 5188건, 52%에 해당한다. 누가 이렇게 노인들을 학대하는가. 아들을 비롯한 친족들로 인해 가정에서 발생한 것이 74%, 배우자 20%이고, 노인복지시설이나 공공장소, 병원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고 한다.
노인의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초고령사회’라 한다는데, 우리나라도 지금 말하자면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21세기 백주대낮에 자신들이 부모를 학대虐待, 심지어 유기遺棄하는 사례가 빈번하니, 이 노릇을 어이 할꼬? 부자父子간의 재산관련 소송이 이제 재벌財閥들의 ‘특수한 가족’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미디어를 통해 듣고 있지 않은가. 효孝야말로 백행지원百行之源인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만고萬古의 진리眞理이거늘, 어쩌다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꼬? 지하에 있는 공자孔子님이 대성통곡大聲痛哭할 일이 아니던가.
안될 말이다. 절대로 안될 일이다. 차라리 귀를 덮고 싶은 뉴스들이 도처에 횡행한다. 언론도 이런 뉴스를 아침밥상에서 듣게 하지 않으면 좋겠다. 스님들이 평생 몰두하는 화두話頭와 공안公案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이지 않던가. 그것만 생각하면 답은 명약관화明若觀火, 불 보듯 뻔한 일인 걸.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그처럼 쉬운 질문의 답이 왜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대체 왜들 이러는 것일까. 누가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아니랄까봐, 부도덕, 부정의, 패륜悖倫, 부조리 등이 아예 지랄춤을 춘다. 그래서 2500여년전에 공자가 설파한 ‘사물론四勿論’이다.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고 또렷하게 제시했다.
예禮, 예의禮儀, 예절禮節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버릇’이고 ‘법’이지 않는가. 무례한 사람을 ‘버릇없다’고 말하고, 나쁜 일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을 보고 ‘그런 법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지 않던가. 실례失禮, 무례無禮, 결례缺禮, 비례非禮가 판을 치는 세상에 ‘주먹이 법보다 앞선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예절은 우리가 생활속에서 약속해 놓은 방식이다. 성문법이 아니고 누구든지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하나의 관습慣習이 되고 그 관습이 쌓여 약속約束으로 된 것이고, 일정한 생활문화권에서 오랜 생활관습을 통하여 하나의 공통된 생활방법으로 정립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계약적인 생활규범生活規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무너져 내린지 오래도 너무나 오래. 오호嗚呼, 통재痛哉.
3회째라던가,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 있다고 한다. 노인학대 예방 운동 캠페인 표어가 ‘나비새김’이라고 한다. 나비새김은 ‘도움이 필요한 노인을 잊지 않고 마음속 깊이 새기자’는 의미라고 한다. 어찌 노인들이 자신의 부모뿐이겠는가. 이런 시는 어떤가. <어버이 아니시면 내가 어찌 있을손가/편하고 즐겁도록 정성 다해 섬길지니/나 있음이 소중할수록 높고 넓은 조상은혜/어버이 가셨어도 나는 여기 그대로니/효도는 자기 평생 그칠 수가 없는 것을/어쩌다 사신 동안만 섬긴다고 하는가>. 사신 동안만 섬긴다고 해도 다행이다. 백퍼(100%) 공감 가는 시 구절이 아닌가.
그런데, 효녀인 여동생 셋이 날마다 아침에 아버지 문안전화를 해댄다. 어찌 보면 조금 지나친 듯도 하다. 혹시, 오라버니가 아버지를 학대하는 것 아닌가 싶어, 이렇게 자주 전화를 하는 건 아닐까, 슬그머니 근심도 되고, 성가시다는 느낌까지 든다. 원허니(그러지 않아도) 내가 잘 알아서 할까 봐. 아부지가 조심스럽게 출근하시며 말을 건넨다. “넷째야, 오늘 오후에 복지관 친구 두세 명 데리고 와 집 구경시켜 주면 안될까?” 헐, “아니, 무슨 소리예요? 복지관에다 모셔다 달라고 하세요. 막걸리도 있고, 사과 배, 막대기커피(맥심)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래요? 혹시 제 눈치 보는 거예요?”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이 집은 제 집이 아니고, 아버지 집이에요. 저는 관리하는 집사인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