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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시낭송예술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혜정(나팔꽃)
국보문학시낭송대회지정시 35편
1.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랜덤하우스/ 2012]
2. 감꽃 피는 집 / 김재진
감나무가 있는 집에 살고 싶다
마당에 떨어지는 감꽃 실에 꿰어
눈 맑은 사람에게 걸어주고 싶다
행복이 가끔은 해맑음을 바라보는 그
가볍디 가벼운 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늦깍이로 배우며
산그늘이 내려와 서늘한 저녁 속을
느낌표 되어 있고 싶다
마당엔 싸리비 흔적, 마음 비우듯 가지런하고
산사같이 고적한 생의 한 순간을
한 모금 샘물로 적셔놓으며
감꽃 목걸이 걸어 누군가를 맞이하고 싶다
더러는 아련하게, 가끔은 해사하게
먼길 가듯 떠오르는 미소 하나
입가에 올리고 싶다
늦가을이면 가지 끝에 까치밥 하나 매달아 놓고
다 내어준 허전함으로 바람에 묻어 울고 있는
키 큰 감나무가 있는 집에 살고 싶다
하늘이 언덕 아래 키를 낮출 때
하얀 버선발 디뎌 찾아올
겨울이 아름다운
그런 집에 살고 싶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꿈꾸는 서재/ 2016]
3.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숩다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옹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 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 번씩 잡아주는 일,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어디에 상량을 얹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 떼 왔다 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따뜻한 외면/ 복효근/ 실천문학/ 2013]
4.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 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 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그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제12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김용택/ 문학사상/ 1998]
5. 그 길은 아름답다 /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담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뿔/ 신경림/ 창비/ 2002]
6.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한국대표명시선100/파꽃/ 안도현/ 시인생각/ 2016]
7. 그랜드 캐년 / 한석산
나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을 모르고 살았다
여기 서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처음 느낀다.
역사의 땅 그랜드 캐년 트레킹
나바호 인디언 성지 슬픈 길목
수천 년 삶의 애환이 서린 목숨 줄 같은 길에서
숨은 절경 은둔지 하바스 파이 인디언 마을
야성이 살아 숨 쉬는 원시의 숲
인디언 부족의 말발굽 소리
북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 빗소리
하바수 폭포 소리
우뚝 솟은 사암벽 둥지 튼 독수리 날갯짓이 걸작이다.
세상의 끝을 보는 것 같은 사우스림 절벽
구름과 바람 달과 별 태양의 고향
사라진 새끼를 찾는 어미 들개의 애절한
울음소리
뭇 생명의 영혼이 잠든 악마의 협곡
신이 빚은 장엄한 자연 예술품 장관이다.
그랜드 캐니언 얼마나 많은 피를 마셨나.
석양 녘 붉게 타는 사막 핏빛 물든 사암
흩어진 이야기가 흐르는 콜로라도강
감동 경악 거대한 산맥 그 위대한 풍치 앞에
인간은 난리인데 자연은 여전하다.
인생이 곧 여행인 거 같다
난 그랜드 캐년을 다녀온 후
세상에 볼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았다
인생 때론 길을 잃고 헤매지만
돌아보면 그랜드 캐년의 여행은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민족의 혼을 깨우다/ 한석산/ 도서출판 국보/ 2024]
8. 그리운 우체국 /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밝혀 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9.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10.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 함동선
또랑물에 잠긴 달이 뒤돌아 볼 때마다 더 빨리 쫓아오는 것처럼 얼결에 떠난 고향이 근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잠깐 일 게다 이 살림 두구 어딜 가겠니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오너라 마구 내몰다시피 등을 떠미시며 하시던
말씀이 노을에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창가에 초저녁 달빛으로 비칩니다 오늘도 해동갑 했으니 또 하루가 가는가 언뜻 언뜻 떨어뜨린 기억의 비늘들이 어릴 적 봉숭아물이 빠져 누렇게 바랜 손가락 사이로 그늘졌다 밝아졌다
그러는 고향 집으로 가게합니다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 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어 있었습니다 길 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가 이내 별들이 묻어올 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 쪽으로 기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동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마을 개가 짖는 소리에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 안 닿은 곳 없고 손 닿은 곳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11.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12. 땅 이야기 / 고두현
내게도 땅이 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상주중학교
뒷산
철 따라 고운 꽃 피지도 않고
돈 주고 사자는 사람도 없는
남해 상주 바닷가 언덕
한 평 못 차는 잔디 풀밭 거기
평생 남긴 것 없는 아버지의 유산이
헌옷으로 남아 있다.
저 눕고 싶은 곳 찾아
아무 데나 자리 잡으면
그 땅이 제 땅 되는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 대로 부터
사람들은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더욱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지만
중학에 들어가자 마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나는 학교 옥상에서 그 언덕배기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세우질 못했다.
철 들고 부끄럼 알 때 즈음
흙이 모여 돈이 되고
묘 자리도 잘라서 팔면 재산이 된다는 나라
시내버스로 휴일 한나절
쉽게 벌초도 하고 오는 근교 공원묘지
아파트처럼 분양을 받고
중도금 잔금 치러가며 화사하게
다듬은
비명들 볼 때마다 죄가 되어
나도 햇살 좋은 곳 어디 한 열두 평쯤
계약을 할까.
그런 날은 더 자주 꿈을 꾸고
잠 속에서 좁은 자리 돌아 누우며
손 부비는 아버지.
고향길 멀다는 것만 핑계가 되는 밤이
깊어 갈수록
풀벌레 소리 적막하고
간간이 등 다독이는 손길 놀라
잠 깨 보면
쓸쓸한 봉분 하나 저녁마다 내곁에 와
말없이 누웠다가
새벽이면 또 다시
천리 남쪽 길 떠나는
아픈 내 땅 한 평.
13. 마지막 산책 / 나희덕
우리는 매화나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쪽은 거의 피지 않았네,
그녀는 응달의 꽃을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삶을 바라보듯
입 다문 꽃망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땅은 비에 젖어 있었고
우리는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병실로 돌아왔다
통증이 그녀를 잠시 놓아줄 때
꽃무늬 침대 시트를 꽃밭이라 여기며
우리는 소풍 온 것처럼 차를 마시고 빵조각을 떼었다
오후에는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문장들 속으로 난 숲길을 함께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죽음,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응달의 꽃은 지금쯤 피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산책을 나가지 못했다
시간의 들판에서 길을 잃었는지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길을 잃은 것은 나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14. 목숨 / 조정권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
이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
버림받고 병들고 잊혀지는 일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꽃과 나무와 길들로부터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진 일은 내일이면 더 잊혀져 있고
그것은 세상일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일이라고 너는 말했다.
15. 바람의 언덕에서 / 신승희
살아가는 것은 다 바람이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람 속을 걷는 일이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로, 흔들리는 갈대의 몸짓으로
장대비 같은 폭우 속에서 휘 적이는 날개의 젖은 모습으로
가끔은 태풍에 쓰러진 잣나무의 굽은 등으로
때로는 해일이 스쳐 간 잔해 위에 아이의 울음으로
비틀대는 바람 속의 숨 가쁜 걸음걸음들
한때, 모국어도 바람에 쓸려갔다 되돌아오지 않았든가
민초에서, 천하의 진시황도 떠난 것은 바람이다
심산유곡 산새로 지저귀는 것도
바위 틈새 해풍을 먹고 사는 것도
한 잎 출렁이는 이파리같이 인연의 물결 따라 밀려왔다 밀려간다
우리 모두 냉정한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 구름들이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구름, 구름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바람, 바람들
저 하얗게 질색하는 절벽 밑 바위를 봐라
멋지고 잘생긴 수석의 볼을 철썩, 때리고도
그것도 모자라 흰 거품을 물고 사방을 흩트리며
성난 용의 몸부림처럼 꿈틀대며 달려드는 파도
이 세상, 바람으로 생기는 일이다
우리 모두 바람 앞에 돌아가는 언덕에 풍차일 뿐이다
16. 새벽비 / 공광규
새벽 잠결에 빗소리가 오락가락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과 스테인리스 난간에 부딪혀
실로폰 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날은 빗방울이 붉은 양철지붕을 두드리고 가던
시골집 생각이 난다
구름에서 내려온 빗방울은
엄나무 잎을 밟아보고는 대나무 잎을 밟고
칡덩쿨을 밟고
양철지붕으로 건너와 마구 두드려대곤 했다
토란잎을 쓰고 토방에서 헛간까지
마당을 건너다니는 놀이를 하다가
옷이 젖는다고 어머니에게 지청구 먹고 골이난
지금은 모두 시집간 동생들이 생각난다
이런 날 아버지는 장화를 신고 돌덤불 위로 가
여름이 쑥쑥 낳아놓은 애호박을 따오고
어머니는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들기름을 두르고
호박전을 부쳤다
가늘게 썬 애호박이 섞인 밀가루 반죽을 부으면
지붕에서 먼저 빗방울들이 호박전 부치는 흉내를 냈다
전을 부치는 빗방울 소리와 들기를 냄새가 좋아 마루에 나오면
빗방울들은
목련나무 잎을 밟고 나팔꽃 넝쿨을 따라 담장을 넘어
옥수수 밭 지나 청태산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이런 날은 새벽부터 텃밭에 모여 사는
고구마꽃 입술과 방울토마토 볼과 노란 참외 엉덩이와
고춧대와 가지를 파먹다 흙으로 내려간 달팽이와
구기자나무 울타리와 주근깨가 많이 난 밭둑 나리꽃이
맑은 빗방울을 맞고 있었다
17. 백발의 그리움 하나 / 홍윤숙
어디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일까
한 시대 에둘러 돌아와 후득이던
고향의 예감 같던 바람 소리
한 시절 바람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 몸 전체가 온통 한 포대의 바람이었다
나는 날마다 들끓는 바람이 되어
세상의 끝을 헤매다녔고
돌아오는 길은 고향 뒷산 밤나무 숲의
밤꽃 향기에 목이 메었다
그 시절 바람은 열이면 열 눈먼 장님이어서
분수처럼 산화하고 자폭했다
어디를 가도 꿈꾸던 나라, 도시는 없었다
인생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눈감고 돌아서는 뒷모습
그 등에 붉은 저녁노을 실의의 그림자
길게 멀어져 가고
젊고 푸르던 바람은 그렇게 이별했다
그 바람 언제부턴가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하늬바람 되어
내 가슴 시리게 후비고
밤새 눈뜨고 먼 하늘 중천에 길도 없이 떠돌고
한 주름 빗방울로 운명해 갔다 남은 생애,
이제 바람 한 점 없는 아득한 변경
어디로 갈까 길을 물어도
대답 없는 내 안의 산골짝에서
가랑잎 한 장 부서지는 소리로
귀를 씻는다
섬으로 쌓인 세월의 부피 키를 넘어 숨이 차고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아
가슴엔 길로 자란 백발의 그리움 하나
출구 없는 빈집 혼자 지킨다
18. 봄 / 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홀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 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랭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꾹뻐꾹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19.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 정호승
해뜨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갑니다
누님같은 소나무가 빙그레 웃는
새해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맑은 연꽃대에 앉은 햇살 하나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사랑하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다시 길을 가게 합니다
어두운 골목
무서운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제 더 이상 당신 혼자 떨지 않게 합니다
쓸쓸히 세상을 산책하고 돌아와 신발을 벗고
이제 더 이상 당신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합니다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과
편안함의 괴로움을 스스로 알게 합니다
때로는 마음의 장독대 위에 함박눈으로 내려
당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낮아지게 하고
당신을 낮아지게 함으로써 더욱 고요하게 합니다
당신이 아직 잠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무와 숲을 구분하지 못하고
바람과 바람소리를 구분하지 못할지라도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천개의 차가운 강물에 물결지며 속삭입니다
돈을 낙엽처럼 보라고
밥을 적게 먹고 잠을 적게 자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살아 있다고
20. 아내의 꽃 / 조남대
아내라는 꽃은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미와 수국과 국화가 있듯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젊음이 넘쳐나는 신혼 때는
싱싱하고 매혹적인 장미나 동백이 되어
진한 향기와 색채로
나의 눈길과 영혼을 온통 빼앗았다
중년의 커리어우먼이 되자
풍성하고 여유로운 모란이나 백합처럼
넓은 마음으로 나를 보듬어
채취에 취해 허둥거리게 했다
자식들을 짝지어 보낸 뒤에는
원숙하고 풍성한 수국처럼
풍만하고 여유로운 큰 가슴으로
이 세상의 풍파를 바람막이 해 주었다
이제는 다소 곳이 은은한 향기 풍기는
국화 같은 여인이 되어
작아져만 가는 나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는다
아! 아내의 꽃이 내 옆에 있어
외롭거나 위축되지 않고
작아진 가슴을 활짝 편 채
노을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헐헐 날갯짓하고 있다
21. 어느 비 오는 날의 포장마차 / 한석산
난 지금 사람이 그립다.
내 어린 날의 노래 눈물 젖은 빗소리
추억의 연탄불에 고추장 꼼장어 진한 냄새가 생각난다.
이런 날은 그저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땡겨야 하는데
요새는 포장마차도 잘 안 보이니 아픈 그리움이네.
도시 변두리 막다른 골목 한 지붕 다섯 가족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저녁 먹고
티브이보다 다 함께 자던 그때 그 시절
그땐 옆방 엄마가 우리 엄마같이
네 엄마 내 엄마 없이
아이들이 보이면 안고 밥 떠 먹여주던 시절
늦은 밤 아버지 귀갓길은 온 동네 똥개들이 뒤를 따랐다.
양념 묻은 손에 쥔 찢어진 봉지에 닭발 몇 개
거나한 취기에 서투른 애정 표현 투박한 아내 잔소리
자식들의 술 냄새 투정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나이 들고 살다 보니
그저 원망만 했던 아버지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나네요.
고단한 시대의 애환을 한잔 술로 풀어내던 포장마차
아버지는 술이 아닌 눈물을 삼켰다.
어릴 때 아버지 손잡고 따라가
처음 먹어본 꼼장어, 닭똥집, 오뎅 한 꼬치
아련한 카바이트 불빛
포장마차에 떨어지는 빗소리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22. 열하를 향하여 / 이기철
지원은 하룻밤에 아홉의 강을 건너
거친 모래 땅 열하에 도달 했다지만
나는 아홉의 밤을 불면으로 지새워도 한개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
마음 덮으면 없는 강이 마음 밝히며 열의 강으로 소리를 놓인다.
숱 많은 머리카락 날리며 바람은 어디로 불어 가는가
메마른 계절일수록 마음은 불타 올라
쓰라린 시대에는 쓰라린 정신만 남는다.
참말 뜨겁게 살아 보리라.
마음 다지면 맨살의 모래는 끓어오르지만
다가서면 열하는 마음 밖 백리에 피안으로 누위 있다.
아직도 멀었느냐 아픈 발 내리고 내 몸 잠시 쉬일 곳은,
내 발 디뎌 참새 발자국만한 흔적 남길수 없는 땅 위에
낙타의 발을 이끌고 오늘도 고삐를 죄는 세월이여
어제 상수리나무 아래 쉬던 사람들
오늘은 꿈이 어지러운 그들의 적막 위에 잠들었느냐
어제 아프던 사람들 오늘 새살 돋은 발을 이끌고
고원을 건넜느냐
바라보던 눈물겨운 것들 너무 많아
내 작은 가슴으로 그곳들의 아픈 꿈 다 끌어안을 수 없지만
눈물의 값짐을 아는 자만이 사람의 귀함도 알수 있다
가자 날 저물면 처마 아래 들고 날 밝으면 모래밭을 걸어
슬프고 작은 것 불러모아 그들의 등 다독이며 가자
고독도 손 잡으면 친구이리니
마음의 거친 물결 재우며 가자.
23. 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니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24.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 김현태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낙엽 하나 뒤척거려도 내 가슴 흔들리는데
귓가에 바람 한 점 스쳐도
내 청춘 이리도 쓰리고 아린데
왜 눈물겹지 않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은 만나야 한다기에
그저 한번 훔쳐본 것 뿐인데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매스꺼운 너울 같은 그리움
왜 보고 싶은 날이 없겠습니까
하루의 해를 전봇대에 걸쳐 놓고
막차에 몸을 실을 때면
어김없이 창가에 그대가 안녕하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내 마음의 편린들은 그 틈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데
왜 서러운 날이 없겠습니까
그립다는 말
사람이 그립다는 말
그 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저 달빛은 오늘도 말이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진정 사랑한다면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두고 두고 오래도록 그리워해야 한다는 말
어찌 말처럼 쉽겠습니까
달빛은 점점 해를 갉아먹고
사랑은 짧고 기다림은 길어지거늘
왜 그립지 않겠습니까
왜 당신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비라도 오는 날에는
기댈 벽조차 그리웠습니다
25.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어둠 깊어 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댄 농담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걷어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이 후려치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26.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 / 이채
깊어서 고요한 것이 있다면
바다만이 아닐 것이며
넓어서 편안한 것이 있다면
하늘만이 아닐 것입니다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눈빛이 그러하고 가슴이 그러하고
중년에 온화한 당신의
표정이 그러하고 생각이 그러합니다
세월의 오랜 정을 소중히 여기고
진실한 마음의 참됨을 알기에
문득 그리워지는 사람 하나
어둠 속 별이 되어 빛날 때
깊어도 때로는 외롭던가요
외롭다가 슬프기도 한 눈빛으로
흘러도 보이지 않는 가슴 속 눈물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입니다
떠나간 이름 하나
긴 하루로 남았던 기억
어느 날 너와 나의 만남이
엷은 꽃잎으로 다시 피어날 때
넓어도 때로는 그립던가요
타다 남은 불씨에
실바람이 불어오면
달래고 재우는 버들잎 손길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마음입니다
가고 오는 세월은 유수 같아라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나니
한줄기 노을빛이 더욱 아름다워
중년인 내 나이를 사랑하렵니다
27.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 김기택
잠깐 초록을 본 마음이 돌아가지 않는다
초록에 붙잡힌 마음이
초록에 붙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이
종일 떨어지지 않는다
여리고 연하지만 불길처럼 이글이글 휘어지는 초록
땅에 박힌 심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초록
나무들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초록
지금 저 초록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잔뿌리들이 발끝에 힘주고 있을까
초록은 수많은 수직선 사이에 있다
수직선들은 조금씩 지우며 번져가고 있다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흙이란 흙은 도로와 건물로 모조리 딱딱하게 덮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초록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잘리고 갇힌 것들이
자투리땅에서 이렇게 크게 세상을 덮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게 옮겨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28. 풀의 노래 / 이근모
살랑이는 바람 앞에
가녀린 촛불처럼
그렇게 태우고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고
그럴 때마다
몸을 눕혀야 했습니다
저만치 밀려오는
짓밟는 발자욱 소리 귀 세우며
뻗어야 할 뿌리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세레나데
너울거리는 하얀 순결은 꽃이 되어
감춘 뿌리, 더욱 튼튼 키웠습니다
길가에 터 잡아도
들판에 터 잡아도
절벽에 터 잡아도
궁시렁거림 없이 생을 빛냈습니다
스치는 쓸쓸한 발자욱
먼먼 당신님께 향하는
나만의 마음 피었다 지고
그리움에 울다가 지는
봄, 가을이 반복 되어도
계절 속에 빠진 별들을 건지며
긴 겨울도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봄에 피운 꽃, 겨울에 사위더라도
나의 뿌리 고이 맞아줄
그리움 깊이 안고 높이 안고
내 생의 풀씨, 민들레 홀씨처럼
그렇게 홀로 서서
기다림을 잉태한 망부초가 됩니다
망부초가 됩니다
29.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잠시 멈추고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온 길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달이다.
발아래 까마득히 도시가,
도시엔 인간이,
인간에겐 삶과 죽음이 있을 터인데
보이는 것은 다만 파아란 대지,
하늘을 향해 굽이도는 강과
꿈꾸는 들이 있을 뿐이다.
정상은 아직도 먼데
참으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벼랑을 끼고 계곡을 넘어서
가까스로 발을 디딘 난코스,
8월은
산등성 마루턱에 앉아
한번쯤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달이다.
오르기에 급급하여
오로지 땅만 보고 살아온 반평생,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아, 나는 지금 어디메쯤 서 있는가,
어디서나 항상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우러르면
먼
별들의 마을에서 보내오는 손짓,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오늘도 손으로
지폐를 세고 있구나.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 섶엔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 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케 하는 달이다.
30. 한 사람을 사랑했네 / 이정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31. 한강 아리랑 / 한석산
천년을 흘러도 한 빛깔, 물 파랑 쳐 오는
갈기 세운 물소리 조국의 아침을 깨운다.
한강 1300리 물길 하늘과 땅 이어주는
구름 머문 백두대간 두문동재 깊은 골
뜨거운 심장 울컥울컥 꺼내놓는 용틀임 춤사위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신을 가누는
민족의 젖줄 한강 발원지 여기 검룡소.
큰 물줄기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골지 천과 아우라지 조양 강 휘돌아 친 두물머리 이끈
한강 한복판에 떠 있는 선유도 갈대숲
물새 둥지 튼 그 속에서도 꽃 피웠네.
대한민국 서울 기적 이룬 한강
굴절된 역사의 아픈 눈물 삼키며 제 몸 뒤집는다.
이런 날에 우리 다 같이 부르는 가슴 벅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가버린 것들은 허망하게 아름다운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동기 문화를 세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선조
이 땅 순한 백성들이 원시생활 하던 시절부터
강에 안기던 사람 품을 내주던 강
세월이라는 깊은 강가에 서면
고요한 강물이 내 영혼을 끌고 가네.
먼 옛날 삼각산 소나무 아래 어매 아배 뼈를 묻고,
삽을 씻으며 민초의 한을 씻던 아리수
넓고 깊은 어머니 가슴 강물도 차운 날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젖가슴 여미는 어머니 가슴 헤집는 젖둥이
온갖 풀꽃 향기에 젖은 물가에 앉아 있어도 목이 마르다.
32.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 이준관
나는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 직장에 가고
다리를 건너 시장에 간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많은 다리를 건너왔다
물살이 세찬 여울목 징검다리를
두 다리 후들거리며 건너왔고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삐걱거리는 나무다리를 건너왔고
큰물이 지면 언제 둥둥 떠내려갈지
모르는 다리를
몸 휘청거리며 건너왔다
더러는 다리 아래로 어머니가 사다 준
새 신발을 떨어뜨려 강물에 떠내려
보내기도 했다
내가 건너온 다리는
출렁다리처럼 늘 출렁출렁거렸다
그 다리를 건너 도회지 학교를 다녔고
그 다리를 건너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험한 세상 다리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주지도 못했고
가족들이 건널 다리가 되어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건널 때면
성자의 발에 입을 맞추듯
무릎을 꿇고 다리에 입을 맞춘다
아직도 험한 세상 다리가 되고 싶은
꿈이 남아 있기에
33. 홍시 / 김시천
그리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물처럼 몸을 낮추어
조용히 흐르며 살아도 되는 것을
악다구니 쓰고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 한 마디 참고 물 한 모금 먼저 건네고
잘난 것만 보지 말고 못난 것들도 보듬으면서
거울 속 저 보듯이 서로 불쌍히 여기고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살걸 그랬어
잠깐인 것을, 세월은 정말 유수 같은 것을
흐르는 물은 늘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만 모르고 살았을까
낙락장송은 말고 그저 잡목림 근처에
찔레나 되어 살아도 좋을 것을
근처에 도랑물이나 졸졸거리고 산감 나무 한 그루
철마다 흐드러지면 그쯤으로 그만인 것을
무어 얼마나 더 부귀영화 누리자고 그랬나 몰라
사랑도 익어야 한다는 것을,
덜 익은 사랑은 쓰고 아프다는 것을
사랑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젊은 날에는 왜 몰랐나 몰라
나도 이제쯤에는 홍시가 되면 좋겠어 홍시처럼
내가 내 안에서 무르도록 익을 수 있으면 좋겠어
아프더라도 겨울 감나무 가지 끝에 남아 있다가
마지막 지나는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
34. 황옥黃玉의 사랑가 /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수로,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야소라는 남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신탁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이만 오천 리 뱃길 내내 초야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를 건너며 붉어진 내 몸보다
더 붉은 처녀의 피로 답할 것입니다.
내 배 안에서 하늘의 흰 피와 땅의 붉은 피가 섞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조의 피를 만들고
그 피 세세년년 붉게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한 남자로 곧추서서 저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아유타국에서 허許씨 성을 가진 황옥이
물고기 두 마리 문양을 증표로 수로, 그대에게로 갑니다.
35.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를 뽑아 던지던 지붕과
아장아장 마당을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몇 번씩 부서졌다 새로 지은 신흥 주택 창문으로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초승달처럼 걸려 있다
어디로 갔을까 그 세월의 바퀴는
장독대와 툇마루와 굴뚝을 싣고
아버지의 문패와 배호가 살던 흑백텔레비전을 싣고
초저녁별 지나 달의 뒤편 저 너머
어디쯤 살림을 풀어놓은 것일까
낯설어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어디선가 등불 하나가 켜지고 있었다
희미한 호박 등처럼 어른거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골목 맨 끝 집
등불 속에 살고 있는 것들
오, 어느새 그 속으로 이사와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라고 있는
세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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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시낭송예술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혜정(나팔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