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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32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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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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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BLaiDLCA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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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일컬어 사람들은 ‘불안의 시대’라고 합니다. 특히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저만 해도 요즘 각양각색의 다양한 유형의 두려움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고에 대한 두려움, 노화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또 다른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수도자로서 관구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 장애나 치매가 와서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그리고 탈모에 대한 두려움 ㅋㅋㅋ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찢어질듯이 가난할 때, 첨단 문명과 거리가 멀던 시절에는 걱정이나 불안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유가 많아지고 최첨단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걱정과 불안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불안 증세는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으로 발전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런 견해를 펼칩니다. 인생에 있어서 적당한 불안감, 적당한 두려움은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외에는. 다시 말해서 두려움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짓눌려 허덕이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요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요한 1서 4장 18절)
사랑의 사도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충만히 받았고, 사랑이란 단어를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로 삼았던 요한의 생애 결론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은 적당한 사랑, 인간적 사랑,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치유되고, 우리가 구원되기만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었기에, 우리를 위해 목숨바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보십시오.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 결과 불가능을 가능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사랑의 소유자는 아무리 큰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곤경속에서도 견뎌내고 이겨냅니다.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대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는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기도가 정답이라면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문제와 불안과 걱정에 대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 딱한 처지와 무기력을 그분께 내맡깁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변화됩니다. 우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내적 샘과 만나 위기에 다르게 대처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기서 성령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 이 고요한 내적 공간에서 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을 만납니다.”
“내가 고요 가운데 참 자아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 이웃의 판단, 내 강점이나 약점, 건강과 질병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참 자아를 만난다면 외적 일들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위기는 선물이다’, 안셀름 그륀, 바오로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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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로 산다는 것 = 지옥에 산다는 것>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NAZHZkRbq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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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보내시기 위해 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밤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호수 위에서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새벽녘에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로 생각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들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 사가가 독자들을 이끌고 가려는 곳이 ‘탈출기’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광야에서 빵을 먹이신 기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백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홀로 산에 올라 하느님의 법을 지니고 내려오신 ‘모세’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세상에 왔는데 하느님의 이름은 ‘나’(있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하실 때 하느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물 위를 걸은 것은 물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을 갈라 탈출시킨 모세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빵을 먹으면서, 혹은 하늘에서 오는 양식은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의 ‘나’라는 배에 타서 고생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란 결론입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유튜브 동영상 중의 하나는 어떤 교수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의 강의였습니다. 조회수가 거의 150만이 되는 것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용을 들어보니 역시 우려했던 대로였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나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존엄성을 누구도 건들지 못하게 하라’입니다. 타인의 의견이나, 책에 쓰인 이론들, 혹은 타인의 욕망에 아이 때처럼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나’로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이 어떤 의견을 자신에게 제시하면 술맛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나도 충고하지 않으니 타인도 자신에게 충고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장자』의 「천도편」에 나오는 제나라 임금 ‘환공’과 수레바퀴 장인 ‘윤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환공이 성인들의 책을 읽을 때 윤편은 그 책을 쓴 성인들이 이미 죽었다면 그 책을 읽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술 찌꺼기처럼 진짜 술도 아니며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윤편은 자신이 수레바퀴를 깎는데 그 기술은 글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타자의 이론은 그 자신이 지닌 체험을 바탕으로 성립된 주체적인 자아의 존엄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를 두고, 자기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고 합니다. 나의 존엄한 자기를 찾으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새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결국은 나 자신으로 살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로 산다는 것이 참 행복일까요? 지옥입니다. 아기는 왜 울면서 태어날까요? 울어야 호흡이 시작되고 그래야 뇌와 온몸에 산소가 공급되어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웃어도 우는 것만큼이나 산소가 공급되지 않을까요? 아기가 태어나서 우는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나’로 살게 되었을 때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생각해봅시다.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일까요? 그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라는 주체로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니 이제 나로 살아야 합니다. 불안해서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다시 ‘나’라는 자리를 부모에게 줍니다. 그러면 다시 편안해집니다. 엄마 품에서 아기는 울음을 멈춥니다. 아기는 그때 부모에게 억압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억압받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주는 은인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다시 ‘나’가 고개를 드는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때입니다. 바로 사춘기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자신도 부모가 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때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합니까? 부모가 볼 때는 자아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이것이 부모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녔던 ‘완고함’입니다. ‘나’라는 자아를 믿고 의지하며 그 지배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않으려는 완고함입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이 ‘나’란 주님의 이름을 지닌 참 부모가 주는 양식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으며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되려거든 당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아가 일으키는 모든 풍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분 뜻에 휩쓸려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나’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가 되니, 나는 곧 그리스도가 됩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 작지만, 또한 큰 신앙 체험을 하신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보내오신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찬미 예수님. 우선 하느님께,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을 통해서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주셔서 하느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는 큰 은총 주심에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줄었던 수입을 생각지도 않았던 곳을 통해 한꺼번에 채워주셔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큰 기적은 제가 평생 몸이 매우 아팠고 불안과 두려움에 힘든 삶을 살았고 영적, 육체적으로 아픈 가족들로 인해 암 수술을 받았고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겪고 있었는데 치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부님 많은 강론 계속 보면서 용기 내며 살아왔지만, 마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죽었다, 나는 하느님이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특히 한밤중에 두려움이 덮쳐 숨쉬기가 힘들 때면 수도 없이 되뇌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었으니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말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제 온몸의 기운이 빠지더니 경직이 되었던 몸이 풀리면서 무서운 공포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동안 별별 기도, 수 없는 미사, 안수기도, 병원 치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했는데도 벗어나기 어려웠고 체력이 떨어지니까 더 견디기 힘들었던 수많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 신부님 말씀을 통해 치유해 주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아픈 저보다 먼저 죽을까 봐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기도 안에서 제가 먼저 죽었고 또 죽으려고 하니 오히려 저를 힘들게 했던 가족들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나는 죽었다, 난 주님이다, 난 사랑이다’ 기도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 드리며, 신부님 좋은 말씀, 십일조 계속 강조해 주셔서 저처럼 힘든 영혼들 다시 살게 해 주시길 기도드리며 주님께서 신부님과 함께 해 주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
부모가 창조했기에 부모에게 ‘나’를 봉헌할 때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때처럼, 하느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느님께 ‘나’를 봉헌할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전에 섬기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섬기는 피조물에 불과한 또 다른 하느님입니다. 우상이란 뜻입니다. 절대 나를 믿거나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으로 내 안에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가장 큰 적입니다. 그리고 나를 지옥의 삶으로 살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나로 산다는 것, 이것이 곧 지옥의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구해주러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아라는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 배 밖에서 물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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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45-52 :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 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셨다. 낯선 사람처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시니까,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고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바로 주님께서는 도와주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치려 하신 것이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바로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또한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의 모습에서 그들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하겠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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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우리가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신 주님을 잊고 사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연약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마음이 연약한 것은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 살게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들은 호수 위에서 또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굶주림’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놓인 이들에게 희망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신 주님을 제자들은 그새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자신들의 지식만으로 판단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움으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하여 제자들의 마음에도, 그리고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도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떨쳐 냅니다. 우리의 주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현존은 또다시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삶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곁을 떠나 현실의 여정을 걸어간다면, 곧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두려움과 불안함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깨달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용기이며, 사랑의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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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마르 6,45-48)
물 위를 걷는 일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고, 그것은 자연법칙을 만드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욥 9,8) 따라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다고 증언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만물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뒤에 하신 일인데, ‘빵의 기적’은 ‘늦은 시간’에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이야기에서 ‘저녁’은 실제로는 ‘밤’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맞바람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모르시고 기도만 하셨을까? 아니면, 아시면서도 무시하고(외면하고) 기도만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내버려두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노련한 어부들이 네 명이나 있었고, 그냥 내버려 두어도 자기들끼리 노를 저어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제자들을 고생시키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은 상황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이야기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기를 간청했을 것입니다. 말로 간청하지는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라도.)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특별한 일은 아니고, 타고 갈 배가 없어서 그냥 걸어가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자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특별한 일이 됩니다. ‘물 위를 걷는 일’은 그동안 제자들이 직접 목격했던 일들, 즉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인 기적들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셨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탈출 34,6)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지나가시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마르 6,49-52)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물 위를 걸어서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했고, 그 유령이 무서워서 겁에 질렸습니다.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도 아니고, 맞바람과 파도를 무서워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은 유령이 아니라 바로 나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령 같은 것을 무서워한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려고 “내가 너희 곁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마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제자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긴 했는데, 부활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무서워했습니다.(루카 24,37) 예수님께서는 그때에도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루카 24,39-43).>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라는 말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을 멎게 하셨다.”입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보고 놀라서 넋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믿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그냥 놀라기만 했습니다. 제자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복음서 저자는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고 기록했는데, 이 말은, “그들은 빵의 기적을 보았으니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믿었어야 했고, 물 위를 걷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아직도 여전히 그들의 믿음은 부족한 상태였다.”라는 뜻입니다. 한 번의 체험으로 곧바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도들처럼 단계적으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합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온 마음으로 믿는 믿음을 거쳐서, 온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그리고 확신에 가득 차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은, ‘만물에 대한 숭배’의 반대쪽에 있는, 즉 우상숭배와 미신의 반대쪽에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은 모든 우상숭배와 미신을 배격하는 사람이고, ‘만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연 재난이나 전염병 같은 것도 주님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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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재형 [umbrella]
2021-01-05 ㅣNo.143424
가톨릭평화신문에 ‘프란치스칸 영성’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12월 13일에 연재된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그의 저서 ‘The Triple Way(삼중도)’에서 죄의 목록을 열거하는데 뜻밖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죄입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지구는 두 번의 큰 동결이 있었다고 합니다. 22억 년 전과 6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모든 땅과 바다는 얼음으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생명은 이 두 번의 동결과정을 거치면서 크기가 커졌고, 지금과 같은 다양한 생명으로 진화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던 긴 빙하의 시기가 생명의 다양성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어째서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을 죄라고 이야기했을까요? 우리는 누구나 꽃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열매를 맺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고, 비를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타락하여 하느님과 멀어졌을 때에 노아를 통하여 구원의 방주를 마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모세를 통해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악,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꽃길만 걸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모든 영광과 권능을 포기하시고,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누가 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의인 아흔아홉 명도 기뻐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예수님 복음의 빛은 가난한 이, 아픈 이, 병든 이, 외로운 이에게 골고루 비추어졌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큰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가시밭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시간을 믿음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과 사랑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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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오시건만 난 아직>
마르코 6,45-52 (물 위를 걸으시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사랑이 오시건만 난 아직>
채비할 틈 없이
거침없이
내게 오시는 사랑이
추스를 겨를 없이
너무나도 두려워
품을 수 없는 까닭은
아직은
내가 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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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경훈모 알렉시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호수와 날씨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날은 자신들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체험을 우리도 살면서 반복합니다. 주님보다 나를 더 앞세워 내 생각, 내 계획대로 진행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 되돌아보면 후회가 남는 때도 역시 많았습니다. “주님 뜻을 먼저 헤아릴 걸!”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앞일이 막막할 때, “주님! 믿고 맡깁니다.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할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 주십시오.” 이렇게 믿고 맡기면, 오히려 그 고민이 해소될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오고 새 힘이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시지 않을 때, 우리 신앙생활은 엉망이 됩니다. 자꾸 빗나갑니다. 그러니 주님 없이는 우리 삶의 목적도 가치도 추진력도 다 잃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일도 주님께서 무게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힘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중심에 계셔야 우리 땀과 노력도 신명이 납니다.
그때 비로소 보람도 얻고 많은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 일과 삶의 중심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판단기준과 행동의 척도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우리위해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목숨까지 바치신 바로 그 사랑을 내 삶의 중심에 두고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 닮은 사랑을 가지고, 주님 섬기듯 온 정성을 다해 내 주변 사람들을 대하겠다는 뜻입니다.
언젠가 어느 교우 집에 초대를 받아 갔었습니다. 그 집 문을 열고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는데, 왠지 ‘참 따뜻하다’ 하는 느낌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 집에는 갓난아기가 있었는데, 천진난만하고 평화스런 얼굴이 보는 사람마저 평화스럽게 했습니다. 온 가족이 그 아기를 중심으로 모여 웃음과 행복감이 떠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참 보기 흐뭇했습니다.
그 집에서 식사도 맛있게 했지만, 저는 그 가정의 사랑을 잔뜩 먹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 가정의 중심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성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 온 가족이 합심해서 꾸며 놓은 멋진 구유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유 앞에 온 가족이 모여 매일 가정기도를 바치며, 하루하루를 기쁘고 감사롭게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사일도 식구들이 모두 저마다 할 수 있는 역할을 분담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이런 분위기로 가꾸어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제 어디서나 “나다! 안심 하여라!”하시며 우리를 돕고자 주님은 늘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가장으로 모시고 산다면, 우리가정의 산적한 문제들이 봄눈 녹듯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또 다른 가정에서 본 그 집 <가훈>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1. 성부의 말씀으로 사랑하고
2. 성자의 이름으로 봉사하며
3. 성령과 함께 기도하자.
우리가 이 가정의 가훈대로만 산다면 우리의 가장이신 주님과 더불어 그 어떤 삶의 풍파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주님의 제자답게 바르게 나아 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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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정훈 스테파노 신부님]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강론을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먼저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눈으로 뵌 적이 있으십니까? 눈으로 본 적도 없는 하느님을 여러분들은 믿습니까?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느끼는지 고민하면서 복음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선교지에서 하느님을 열심히 전하는 선교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사랑의 삶을 살고자 노력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은 그 선교사를 싫어하고 그냥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루는 제멋대로 사는 그 사람이 선교사를 만나 이렇게 따졌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믿으라고 하는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본적이 있소? 만약 나에게 그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면 나도 당신이 말하는 하느님을 한 번 믿어 보겠소.”
선교사는 조금 당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던 꼬마 녀석이 그건 자신이 보여 줄 수 있다고 하면서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궁금해진 선교사와 그 남자는 꼬마 녀석을 따라갔습니다.
그 곳엔 그 남자의 아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꼬마는 그 남자에게 “아저씨, 아줌마을 사랑하시는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그 남자는 “당연히 사랑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아줌마를 사랑하는 사랑을 눈으로 보여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을 눈으로 보여 달라니,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분명히 사랑을 하지만 ‘사랑’자체를 보여 달라고 하니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그 남자에게 “아저씨가 보여 주지 못하는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독서 요한 1서의 말씀 중에는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을 너무 먼 곳에서 찾고 있는 듯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데, 사랑이 느껴지는 곳 어디에나 하느님이 존재하시는 데 너무 먼 곳에서만 하느님을 찾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하느님을 느끼면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느끼기 위해, 보다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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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기적과 일상의 조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 있었다. 한 끼의 식사를 이렇게 성대하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가득 찼을까?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고 군중은 또 어떠했을까?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에 대한 어떤 반응이나 효과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다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예수를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로 믿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산으로 피해 가셨다고 한다.(요한 6,14-15) 그런 다음에 요한복음도 마르코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요한 6,17-21)
마르코복음은 요한복음과 달리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 다른 어떤 효과가 개입되기 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호수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셨고, 모여 있던 군중을 흩어 돌려보내셨다.
우리가 복음서 전체에서 늘 볼 수 있는 장면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기적을 입은 사람들을
그 현장에 두지 않고 바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다.
게다가 자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태 9,22; 15,28; 마르 5,34; 10,52; 루카 7,50; 8,48; 17,19; 18,42 등)고 하시면서 기적의 원인을 예수님 자신보다 사람 편에 두셨다. 이런 점들은 기적의 성취가 예수님 편에서 행하시는 일방적인 행위라기보다 생산자와 소비자, 또는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쌍방적인 행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즉, 기적만이 능사가 아니라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의도하고 계신 것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기적을 놓고 이를 체험한 측이나 이를 베푼 측에 똑같이 있을 수 있는 감정은 만족감과 달콤함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쾌감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일상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적의 주도권을 잡은 예수에게도, 기적을 체험하는 인간에게도 같은 비중으로 적용된다. 그래서 기적은 상식을 벗어난 일상이탈로 소개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흩어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다음 선교지로 서둘러 보내시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꽤하시는 것이다. 기적과 일상을 특히 잘 조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그 요소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로 발견된다.
첫째는 기도이다.
예수께서 사람들과 제자들을 보내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신 것은 기적을 베푼 스스로의 성취감과 달콤함에서 벗어나 기적을 가능하게 하신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해서이다. 즉, 기도의 일상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둘째는 말씀이다.
곧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50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역풍을 만나 일상의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들을 향한 말씀이다.
“나다”(에고 에이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기계시적 말씀이며(탈출 3,14), 하느님 현존의 방식이다. 누구든지 기도하면서 “나다”라는 하느님 현존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되며, 기적 속에서 일상의 평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기도하지 않고 “나다”는 말씀의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없이는 아무도 기적과 일상의 조화를 바랄 수 없으며, 이를 체험할 수도 없다.
아무도 기적 속에서만 살 수도 없고 무미한 일상 속에서만 살 수도 없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을 함께하는 일상은 그 속에 기적을 태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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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정신없이 일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일이 없으면 실패자로 생각하고,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는 것 같습니다. 쉬지 못하고 일에 대한 압박으로 생기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을 강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도 ‘쉼’을 말하고 있습니다. 명상, 영상보기, 잡념, 목욕, 산책, 아무것도 안 하기, 음악 듣기, 혼자 있기, 자연에서 회복하기, 책 읽기를 쉼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쉼’을 매우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쉼 자체가 되어야 하는데, 쉬는 것도 하나의 일처럼 생각하면서 더 피곤함을 느낍니다.
일과 쉼이 조화를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일이 내 생활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제대로 가질 수가 있게 될까요? 어떤 것이 쉼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일만 하는 사람이 주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주님 안에서 쉬면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일에 대한 또 다른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호수 위에서 맞바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맞바람을 뚫고서 건너편 벳사이다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 중 많은 이가 어부 출신인데도 말이지요. 바로 예수님 없이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십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없기에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분이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겁에 질려 소리부터 지릅니다.
이 부분도 우리에게 큰 묵상 거리를 줍니다. 어렵고 힘든 삶을 경험하게 될 때, 주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때 주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냥 제자들처럼 소리만 질렀던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향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진정한 쉼이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세상의 일에서 주는 걸림돌에 좌절하지 않게 되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알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지 않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편안한 쉼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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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색깔>
우울한 마음이 생기거나, 생각할 것이 많아지면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성당이라고요? 성당에 갈 때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나는 곳은 ‘바다’입니다.
성소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었던 고등학교 때, 수업도 듣지 않고 몰래 도망쳤습니다. 저의 미래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지 않으면 무슨 사고를 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해 바다가 보이는 인천의 ‘월미도’에 갔습니다. 바다만 한 시간 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는 그냥 푸른색 한 가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햇빛에 의해서 계속 색깔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의 한 부분인 이 바다도 여러 색깔로 바뀌는 것처럼, 내 삶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만 바라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금의 삶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들면 바다로 갑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다가 보이는 강화도에 살고 있어서 더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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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름다운 마무리>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입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의 위치는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받는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환영받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총회장이나 구역장, 반장, 단체장은 봉사의 도구이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연장임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내려놓을 때 아름다워집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당당히 가야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 기도는 주님을 지켜주시는 힘입니다. 당신을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밝히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깨어있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는 산으로 가야합니다. 기도의 장소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마침 배는 호수 한 가운데에 있고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은 장애물입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성령을 상징하니까 맞바람은 ‘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제자들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맞바람을 잠재우셨습니다. 맞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곤경의 바다에서 헤매지 말고 그 한복판에 서 계신 주님을 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눈이 멀면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집니다. 모쪼록 거센 맞바람 안에서도 함께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살이에 바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도 당신이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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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기도와 사랑-
착각했습니다. 늦게서야 발견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를 어제 제1독서로 착각하여 오늘 내용을 어제 강론에 인용했던 것입니다. 참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어제 제1독서(1요한4.7-10)를 인용합니다. 사도 요한의 서두 말씀이 어제처럼 참 정답습니다. 여전히 ‘사랑’이란 말마디가 눈에 띄게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하여 어제 강론 제목처럼 믿는 사람들에게 평생공부는 사랑공부요 하느님공부일 수 뿐이 없습니다. 사랑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공부해야할 사랑이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기에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이 서로 하나로 이어지듯 같은 어원에서 기인하는 느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노래든 문학이든 영화든 가장 많은 공통적 소재가 사랑일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의 하느님이요, 이런 사랑의 하느님이 빠지면 그 인생은 허무와 무지의 어둠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제1독서 말씀도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오늘 예수님을 만나 살아난 복음의 제자들이며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하루하루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살게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 우리에게는 똑같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는 바로 기도와 사랑이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사실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살 때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삶은 단순투명하고 진실해집니다. 온갖 세속의 유혹에 눈멀지 않습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감미로운 유혹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떠날 때 무지와 탐욕에, 불안과 두려움에 눈멀게 되는 우리의 영적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사랑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했던 눈밝은 예수님은 절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의 예수님의 처신이 참 기민하고 신속합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할 유혹을 감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공성이불거功成以不居란 노자의 말마디가 떠오릅니다. 공을 세우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즉시 자리를 떠났고 군중을 돌려 보내십니다. 전광석화, 예수님의 집착에서 떠나는 이탈의 초연한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얼마나 멋진 떠남인지요! 이어 예수님은 삶의 중심에 기도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합니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살기위하여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삶이 없는 기도는 공허하고 기도가 없는 삶은 맹목, 맹신이 되기 십중 팔구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저절로 하느님 중심의 안정과 평화, 균형과 조화의 삶이 됩니다. 이는 우리가 절감하는 진리입니다.
즉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훌훌 떠나 보내고 홀가분한 몸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깊은 친교의 기도와 사랑의 시간을 마련합니다. 바로 평상시 기도가 이런 분별의 지혜의 원천이 됨을 봅니다. 예수님의 참으로 분주했던 일상의 삶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기도의 시간과 공간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진면목은 이어지는 복음 장면에서 빛을 발합니다. 외딴곳의 기도중 영안이 활짝 열린 예수님은 제자들이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지체없이 호수위를 걸어 곤경중에 있는 제자들을 향하십니다. 두려움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인줄 알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제자들을 격려하는 장면은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장면인지요! 이어지는 복음 말미의 묘사가 참 은혜롭고 담긴 의미가 참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우리 수도 공동체란 배에, 교회 공동체란 배에 주님을 모실 때 사면초가의 세상 위험 중에도 난파되거나 조난당하지 않고 안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아 인생 항해중 난파되어 조난당한 공동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의 말씀을 오늘은 물론 평생 화두로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수도원 십자로의 중앙에 위치한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윗판에 새겨진 말마디가 바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나다I AM’는 바로 하느님 이름이니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현이었던 것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너와 함께 있는 나(I AM with you)요, ’너를 위해 있는 나(I AM for you)’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으니,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무지에 눈이 멀어 마음이 완고했던 것입니다. 분명 제자들은 이런 기적을 통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렸을 것이고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해도 무지와 탐욕, 질투와 분노, 불안과 두려움으로 영혼의 눈먼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눈뜬 맹인들로 가득한 세상같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살 때 주님을 닮아가면서 점차 밝아져가는 심안心眼이요 영안靈眼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의 영적 여정은 영안이, 심안이 열려가는 ‘개안開眼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고맙게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심안을, 영안을 활짝 열어 주시어 하느님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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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과 함께할 때 일어나는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마르 6,47)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여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뒤, 제자들은 분부대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중이고,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 보내시고 나서 산에 가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홀로지만 아버지와 함께시지요. 제자들은 여럿이 한 배를 탔지만 예수님 부재 상태를 맞고 있습니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르 6,48)
복음사가는 앞서 일어난 빵의 기적이 "늦은 시간"(마르 6,35 참조)에 있었다고 전하지요. 배에 탄 제자들이 "저녁"(마르 6,47) 때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맞바람으로 곤혹을 치르는 그들 곁으로 가신 것은 "새벽녘"이니 꽤 긴 시간 동안 호수 위에서 고생을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은 그분이 자연의 원리를 넘어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유령이라 여겨 두려워하지요. 전날 겪은 빵의 기적을 통해 그들에게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에 대한 신뢰가 생긴 건 아니었나 봅니다. 오히려 세속적 영광을 보장할 메시아의 측근이 된 것에 대해 자만심만 더 커진 건 아닌가 싶네요. 이를 복음사가는 "완고한 마음"(마르 6,52)이라 표현합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르 6,51)
사실 진짜 기적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로 들어가시자 밤새 그들을 괴롭히던 바람이 멎었으니까요. 동시에 제자들 내면의 소용돌이도 잠잠해졌겠지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배에 발을 들이시는 순간 내외적으로 평화가 시작됨을 감지합니다. 주님의 현존은 이렇듯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랑과 머무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과 함께하지요. 하느님도 사랑하는 영혼 안에 당신 거처를 마련하시고 머무르십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와 하느님은 서로의 거처가 되어 서로 안에 거하지요. 이 '서로에게 머무름'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과 누리는 최고 절정인 일치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분의 겸손과 자비 덕분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속 제자들처럼 현상계에 익숙한 우리는 다가오시는 그분을 두려워하기 일쑤지요. 삶의 맞바람과 풍랑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도 주님의 새로운 현존 앞에 겁을 집어먹습니다.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부분에서건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사랑하는 일에 서툴고 겁을 내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과 누리는 완전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지요. 사랑한다고 하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인간의 욕정과 자기애일 뿐,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배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가 내외적 풍랑으로 두려움을 품고 있다면 어서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배에 오르시는 순간, 바람도 멎고 마음의 동요 또한 가라앉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면 '함께함의 기적'은 언제라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참 막막하고 힘겹지만, 그럴수록 주님께 희망을 둡시다. 그분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린 영혼에게 맞바람과 풍랑은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표징이니까요.
주님과 함께, 사랑에 머물러 세상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만 믿고, 우리 함께, 꿋꿋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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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問」 :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答」 :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천주교요리 문답-믿을 교리편 #제 1 문답)―새해의 다짐
2004년 종교와 종교의식, 한국 갤럽조사 현항 :
일반적으로 종교를 믿는 이유 : 57.9%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종교를 가졌다고 응답했습니다.
15.6%가 복을 받기 위해서 신앙을 가졌다는 응답이고 종교간 관계없이 나온 답(기복신앙) 죽은 후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 신앙을 가졌다고 응답한 사람은 7.8%(아마 그리스도인들)에 불과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만 따로 물었음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을 가졌다는 응답자가 무려 78%나 되었습니다. (죽은 다음 영원한 생명, 천국에 가는 것은 안중에 없고, 사도신경 말미에 “… 영원한 삶을 믿으며”는 알지도 못한 듯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알아 흠숭하며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구태여 마음의 평화만을 구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 없이 소위 ‘신심 단련 수련’이나 ‘심리요법 등’에 매진하면 될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평화 없이 마음의 평화란 뜬구름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014년 ; 같은 갤럽 조사 : 이 세상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가 만들었다. ‘그렇다’ ‘아니다’
*그렇다고 답변 천주교 신자 45%(50%도 안 된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성당에 다니는지! 반면 개신교 신자가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응답자가 59%로 천주교 신자보다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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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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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공현 후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건네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바람과 풍랑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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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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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50)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인 줄로 생각하며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일으켜 주십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는데, 복음은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인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진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억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기억도 잘 하지만, 망각도 잘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 체험을 한 제자들이 그 기적체험을 금방 잊어버리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실체가 없는 유령으로 바라보며 두려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임마누엘이신 주님도 보지 못하고, 장애물 앞에서 넘어지거나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4,18)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를 향해 있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이 사랑에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바라봅시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래야 장애물 앞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고,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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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72X5tO-jt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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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
애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위로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용기에서
비롯되는
우리들
일상이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용기를
필요로한다.
용기만큼
믿음도
자란다.
하느님께서도
용기를 내시어
여기 이곳에
오셨다.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삶의
용기가 되셨다.
밀려오는
시련도
용기로 헤쳐
나가는 것이다.
신앙은
용기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가장 오래된
믿음은
용기이다.
용기로
완고한
우리 마음을
성찰하는
시간이다.
모든
생명 자체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닫게 된다.
빵의 기적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우리들 일상이다.
하느님께
맡기고
내어드리는
것이
우리 삶의
용기이다.
불어닥친
맞바람까지
멎게 하신다.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이시다.
이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하시는 주님을
진실로 믿는다.
두려워하지
않고
이 시간을
모두
맡겨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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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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