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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일본민족과 반도민족의 혼교(混交)
제1절 일본민족의 반도 거주
일본 민족이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이미 조선 반도에 왕래하면서 거주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이들은 조선 반도에서 혼인을 통해 결국 조선 반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에서 성골(聖骨)·진골(眞骨) 중 1/3이 일본인의 피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일반 토착민 중에는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섞였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가라제국(加羅諸國)에 일본의 피가 가장 많이 섞였다.
가라제국에 체류하던 일본인 사인(士人)·병사(兵士) 대부분은 가라의 여인과 결혼했으며,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들의 아이들은 모두 가라에 머물면서 그 나라 사람이 되었다.
그 중에는 요직에 오르는 자도 있었다.
당시에는 이들을 한자(韓子)라고 불렀다.
이들 한자(韓子)의 이름이 남는 경우는 적서(嫡庶)를 구별하는 상류사인(上流士人)의 아들인 경우에 그치며, 대다수의
경우에는 특별히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래 동종(同種)의 민족이므로 한자(韓子)라는 명칭도 당대에 그친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권신(權臣)으로 백제
의 8개의 큰 씨족 중 하나인 목씨(木氏)의 선조로 추정되는 목만치(木滿致)도 일본인과 임나 부인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 때에 오우미노 게누노 오미(近江毛野臣)가 가라에서 저지른 실정(失政) 중 하나는 당시 가라제국에서 일본인과 임나인(가라인) 사이에 아이와 관련된 분쟁이 매우 많았는데, 이는 본래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분쟁으로, 신에게 맹세를 한 다음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가 진위를 가리는 서탕법(誓湯法)을 이용해 즉결심판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가 어떠 했는지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우미노 게누노 오미에게 살해된 나타리(那
多利)·시후리(斯布利)는 모두 한자(韓子)였다. 게이타이 천황·긴메이 천황(欽明天皇)시대에 가라에 세력이 미치던 좌증마진(佐曾麻津)도 아버지는 일본인이었다.
이 시대에 가라에 있던 일본인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가라인이었던 것이다.
고령가야(高靈加耶)가 멸망했을 때, 군사(軍使) 고모쓰누베노 오비토 도미(薦集部首登弭)가 아내의 집에 머물기 위해
군기(軍機)를 누설한 일 등을 생각하면 이 지방에 일본인의 피가 매우 많이 섞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에도 많은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양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분명한 사실이다.
목만치(木滿致, 목협(木劦)을 목(木)으로 바꿔 사용하였다)에 대해서는 앞에서 기술하였다.
백제 성명왕(聖明王) 시대의 일본과의 관계는 자세히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다소나마 분명해지는데, 일본인 또는 한자(韓子)로 성명왕의 아래에서 중신(重臣)으로 있던 인물로는, 일본의 시나노아히타(斯那奴阿比多, 가노(科奴)라고도
쓴다)·기노노 오미 나소치미마사(紀臣奈率彌麻沙)·세토쿠시나노시슈(施德斯那奴次酒)·모노노베노 무라지 요가타(物部連奈率用歌多)·고세 나소치가마(許勢奈卒歌麻)·모노노베 나소치가이(物部奈卒歌非)·도쿠소치카노시슈(上部德率科野次酒)·나소치카노시슈(上部奈卒科野次酒)·동방령(東方領, 오도독(五都督) 중 하나)·모노노베노 마가무노 무라지(物部莫哥武連) 등이 있었다.
한 시대의 일본 관련 사료의 단편(斷篇)인데도 이와 같으니, 전 시대 전부를 통틀어 살펴보면 그 수는 매우 많을 것이다. 또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던 일본인은 모두 백제인이 되어 그 피는 오늘날의 조선 반도인에게 남아 있다.
백제 위덕왕(威德王) 때에 히노 아시키타노 구니노미야쓰코 아리시토(火葦北國造阿利斯等)의 아들 일라(日羅)는 머리가 좋고 용감하여 백제에 중용되었다고 한다.
제2절40) 반도민족의 일본 귀화(歸化)
일본 홍인(弘仁) 원년(신라 헌덕(憲德) 7년 을미(乙未), 815년)에 칙찬(勅撰)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기내(畿內)
5국(五國)의 성씨(姓氏) 1,177개를 기록한 것 중에 조선반도 삼국에서 귀화한 씨족은 백제 121개, 고구려 41개, 신라
18개, 임나 10개, 모두 합해 195개 씨족으로, 김(金) 씨성이 16%를 웃돌아 강세를 보였다.
이 밖에 한인(漢人) 씨족 대부분은 몇 대에 걸쳐 한지(韓地)에 살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온 자들로, 한종(韓種)의 피를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종족(韓種族)으로 집단을 이룬 자들은 기외(畿外)의 공한지(空閑地)에서 거주하면서 지방과 혼혈을 이루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은 역사 기록상 가장 일찍 귀화한 귀화인으로, 귀화 이후 영원(榮元), 그 이후 손인 가쓰라기노 다카누카히메노 미코토(葛城之高額比賣命)는 가이카 천황(開化天皇)의 증손(曾孫) 오키나가노 스쿠네노 오키미(氣長宿禰王)의 비(妃)가 되어 진구 황후(神功皇后)를 낳았다.
40) 원문에는 篇으로 되어있으나, 節의 오기로 보인다.
황후를 천일창(天日槍)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체(國體)를 모르는 무식한 무리들이 쉽게 하는 말로, 그 어머니가 천일창의 후손인 것이다.
또한 백제 성명왕의 4대손인 다카노노 아손 오토쓰구(高野朝臣乙繼)의 딸인 니이가사히메(新笠姬)는 고닌 천황(光仁天皇)이 즉위하기 전 그 비(妃)가 되어, 간무 천황(桓武天皇)을 낳아 다카노 황후(高野皇后)로 불렸다.
사료에 나타나는 한인(韓人)의 귀화(歸化)는 매우 많았지만 그 중 불과 10여 건만이 기록되었을 뿐이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기록에 따라 대략적으로 추거(推擧)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일본인과 조선 반도에 살던 반도인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매우 많았던 것이
분명한데, 이들은 일본의 씨족 기록에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존재였다.
귀화인은 귀화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도망해 오자, 덴지 천황(天智天皇)은
2년 후에 백제관위(百濟官位)의 계급을 감안하여 그에 상응하는 관위를 하사하고 백제의 백성 남녀 400명을 오우미노 구니(近江國) 간사키노 고오리(神前郡)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승속(僧俗) 모두에게 3년 동안 관식(官食)을 제공해 토착하여 농사지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덴지 천황 8년에는 백제의 좌평(佐平) 여자신(餘自信)·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남녀 700명에게 오우미(近江)의 가모노고오리(蒲生郡)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덴지 천황 이후의 일들은 다음 편에서 이어갈 것이다.
제2편의 부기
-삼국의 문물·제도·풍속
개설
삼국의 문물은 모두 중국의 문물을 이식한 것으로서, 이에 종사하는 자 대부분은 중국 혹은 중국계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가장 일찍 중국과 교통을 시작하였고 또한 가장 지리적으로 편리한 위치에 있어 빈번하게 왕래한 고구려는 누구보다 먼저 한대(漢代)의 문물을 향유하였던 것이다.
3세기 중반에는 남중국(오(吳))과 교통을 시작한 반면, 북방민족의 침입 및 약탈 풍속을 고치지 않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동북아시아와 남중국 사이에서 통상(通商)을 담당하였다.
마침내 일본도 고구려를 경유하여 남중국 문물을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백제는 4세기 중반 무렵부터 중국과 국제 교통을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 문물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유행하면서 더욱 눈부신 문물의 발전을 이루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중국 문물을 접하였는데, 처음에는 고구려를 거쳐 중국 문물을 받아들였으나 나중에는 백제를 통해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점차 풍부해져, 6세기 초에 크게 발전하였고 불교를 국교(國敎)로 삼아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6세기 중반 무렵부터 직접 중국과 교통하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고구려나 백제의 뒤를 이었다.
이처럼 신라가 그 면목을 일신하기는 하였지만 삼국 중 가장 늦었던 만큼 삼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문물은 직접 중국에서 들여오는 것 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수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교통로 관계상 이 두 나라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이 두 나라는 단순히 중국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는 역할에 머물렀다.
삼국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결과, 다소나마 제도의 변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많은 변혁을 성취한 나라는 건국(建國)의 기초가 약했던 백제였을 것이다.
고구려·신라의 경우에는 국내 상황이 그리 쉽게 변혁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 모두 근본적으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제도로서 확정된 것은 삼국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풍속과 관련해서는 삼국의 풍속이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은 사대(事大)였다고는 하지만, 토속(土俗)은 백제·신라·가라 등 한종족(韓種族) 국가 고유의 풍속이 많이 존재하였으며, 따라서 고구려와는 다른 점이 많았고 일본과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최근 신라에서 일본과 같은 곡옥(曲玉)·관옥(管玉)을 달았다는 사실이 유물조사 결과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도·풍속에 대해서는 그 연구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 유감이다.
제1장 고구려
제1절 문물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漢)나라의 망명자와 함께 그 문물을 받아들여 2세기 초부터 이미 역사 연대(歷史年代)에 들어갔다.
그 풍속을 보아도, 그 주위의 상황을 보아도, 일찍부터 문자를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이미 기술하였듯이, 3세기 초기부터 남중국과 교통을 시작해 4세기에 들어와 한편으로 군국(軍國)을 이룸과 동시에
한편으로 상업국을 이루었다.
압록강은 남북 중국의 물자를 수입하고 동북아시아의 토산품을 수출하는 중요한 강이 되었다.
일본도 고구려를 경유해 남중국의 물자를 수입하거나 교통을 하였다.
불교 역시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일찍 전해져, 중국의 사료에 따르면 진(晉)나라 효무(孝武)·대원(大元) 말(소수림왕(小獸林王)·광대토왕) 간석담시(間釋曇始)가, 소수림왕 2년(372년)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부도순도(浮屠順道)를 파견해 불교 경문(經文)을 보내면서 국제적으로 전파되었다고 기록으로 전하는 내용이 최초의 것이다.
이 해 소수림왕은 대학(大學)을 세워 자제(子弟)들을 교육하였다.
귀화한 한인(漢人)이나 한인계(漢人系) 사람들이 거주하며, 문예·학문(學問)을 고구려 귀족의 자제에게도 가르쳤던 것이
다.
이듬해 율령(律令)을 처음으로 반포하는데, 소수림왕 4년에는 승려 아도라는 인물이 고구려에 오면서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 춘초문사(春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順道)를 머물게 하였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다.
이때부터 불교가 유행하면서 문예나 공예(工藝)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40년을 거쳐 장수왕(長壽王) 초기에는 유명한 광개토왕 능비(廣開土王 陵碑)를 건립하여 오늘날에 남아있다.
이 무렵의 능묘(陵墓)에 남아 있는 와당(瓦當)을 살펴보면 한대(漢代)의 모양에 인도식 문양이 섞여 조화를 이루어 웅대하다.
그 이면에 가끔 장인(匠人)의 메모와 같은 명문(銘文)이 남아 있기도 하다.
허다한 벽돌에는, 원컨대 대왕의 능이 산처럼 편안하고 산처럼 견고하기를 영원히 만세토록 굳건하기를 하늘과 땅처럼 서로 보존되기를 41) 등 전서(篆書)로 된 양문(陽文)이 남아 있다.
동서양한시대(東西兩漢時代) 특유의 문자로, 당대의 중국인이 사용하지 않는 문자가 있는 점을 보면, 그 문물의 유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분묘(墳墓)의 구조가 견고하고 정교한데다가 웅장하기도 하여 당시의 문물·공예가 예상외로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평양에 도읍을 정한 시대에는 문자가 널리 사용되고 있어, 그 결과 국어(國語)를 표시하는 한자(漢字)를 섞어 글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공예도 눈에 띠게 발달하여 오늘날 전해지는 고분(古墳)의 벽화는 중국 화공(畵工)이 그린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
로 당대 동양미술의 정화(精華)를 대표할 정도이다. 영양왕(嬰陽王) 11년에는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해 고사(古史)를 요약해 '신집(新集)' 5권(卷)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고구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유기(留記)'라는 제목의 기록 100권(卷)을 만들었는데 이때에 들어와 필요 없는 부분을 지우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41) 願大王陵安如山固如岳. 千秋萬歲永固. 保固乾巛相畢.
'유기(留記)'는 아마 소수림왕 때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따라서 '신집(新集)' 5권의 기록도 소수림왕 때로 그쳤을 것이다.
이문진은 중국인이지만 귀화한 사람일 것이다.
고구려 문예의 발달 정도에 대한 중국 사료의 기사를 살펴보면, 속학(俗學)을 좋아하고 형문시양(衡門廝養)의 집에 이르기까지 서로 아끼고 근면하며, 겨울에는 사거리에 큰 가옥을 짓고 이를 편당(扁堂)이라고 이름 붙여 자제들이 결혼 전에
밤낮으로 여기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연습한다.
읽는 글로는 오경(五經) 및 사기(史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晉)나라의 손성(孫盛)이 찬(撰)한 춘추(春秋),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이 있었으며, 문선(文選)도 있어, 이를 가장 아끼고 중히 여겼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 문장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국학(國學)을 세우자 고구려 및 백제는 자제들을 이곳에 입학시켰으며 유학을 하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더러는 당나라에서 세상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학문승(學問僧)이 중국으로 갈 때 유학생이 함께 중국으로 간 경우는 일찍부터 있어 수당 시대(隋唐時代)에 시작된 일은 아니다.
보장왕(寶藏王) 때에 집정자(執政者) 개소문(蓋蘇文)은 유석(儒釋)과 도교(道敎) 등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정족(鼎足)과 같은 것이어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며, 지금 유석(儒釋)과 함께 도교가 번성하지 않는 것은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당나라 황제에게 도사(道士)를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고구려 고유의 종교는 귀신교(鬼神敎)로, 사는 곳 주변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영성사직(灵星社稷)에 제를 올렸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 온 나라가 크게 회합을 가졌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불렀다.
영성신(靈星神), 일신(日神), 가한신(可汗神), 기자신(箕子神) 등이 있었다고, 국내성(國內城) 동쪽에 수혈(隧穴)이라고 부르는 큰 동굴이 있어 수신(隧神)이라고 하는 신이 살았다.
모두 이 달에 왕이 직접 제를 주관해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신묘(二神廟)가 있었다.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이라고 하여 나무에 새겨 부인의 모습으로 상(像)을 만들었고, 하나는 등고신(登高神)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관사(官司)를 두어 사람을 파견해 지키게 하였다고 전한다.
부여신(扶餘神)은 하백(河伯)의 딸인 유화(柳花)42)이며, 등고신(登高神)은 주몽(朱蒙)일 것이다.
이 신묘(神廟)의 소재지는 그 발상지 혹은 그 지명을 딴 졸본(卒本)에 있어서 역대(歷代) 제왕(諸王)들이 이곳에 와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제사 신앙(祭祀信仰)은 불교와 함께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삼교(三敎) 중 가장 번창을 하였지만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42) 원문에 ‘도화(桃花)’, 오기로 보아 수정하였다.
평원왕(平原王) 때 대승상(大丞相) 왕고덕(王高德)이라는 사람이 사문(沙門) 의연(義淵)을 업(鄴)으로 파견하여 전제(前齊)의 정국사(定國寺) 사문(沙門)법상(法上)에게 불교사(佛敎史) 및 경전(經典)에 대해 질문을 하게 하였다.
그 밖에는 간첩으로 다른 나라에 들어간 자 혹은 적국(敵國)으로 도주한 승려의 이름을 전할 뿐이다.
고구려의 불교 상황은 일본의 역사 자료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불교를 들여오기 위해 수행자를 구하였는데, 고구려의 환속승(還俗僧)인 혜변(惠便)이라는 자를 찾았다고
한다.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3년(고구려 영양왕 5년 기묘(己卯)), 고구려의 혜자(惠慈)가 일본에 귀화하여 머문 지 20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 해에 일본에 온 백제의 혜총(惠聰)과 함께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었다. 스이코 천황 10년 을축(乙丑), 승융(僧隆)·운총(雲聰)이 함께 일본에 내조(來朝)하였다. 스이코 천황 18년, 고구려 영양왕이 승려 담징(曇徵)·법정(法定)을 공상(貢上)하였는데, 담징은 오경(五經)에 능통하였고 기예(技藝)가 뛰어나, 맷돌을 만들었으며 채화(彩畵)에도 재주가 있었다.
스이코천황 33년에는 석(釋) 혜관(慧灌)을 공상(貢上)하였다.
혜관(慧灌)은 수(隋)나라에 가서 가상길장(嘉祥吉藏)의 삼론(三論)을 받아 승려가 되었으며, 승정(僧正)에 임명되어 삼론
종(三論宗)을 전파하였다.
석(釋) 도등(道登)은 어떻게 일본에 왔는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고구려에서 당(唐)나라로 갔다가 일본으로 온
승려로, 처음으로 우지가와(宇治川)에 대교(大橋)를 만든 고승(高僧)이다. 석(釋) 도현(道顯)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공사(貢使)를 따라 함께 왔으며, 칙(勅)에 따라 다이안지(大安寺)의 주지(住持)로 지내면서 '일본세기(日本世紀)' 몇 권을 찬(撰)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승석(僧釋) 교젠(行善)은 오랫동안 고구려에 머물면서 습학구법(習學求法)을 행하고 귀국하였다.
이상 일본 사료의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기록에 따라 고구려에서 불교가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고구려인의 저술은 현재 앞에서 언급한 승려 도현(道顯)이 남긴 '일본세기(日本世紀)'의 훌륭한 글뿐이지만, '삼국사기 열전(三國史記 列傳)'에 실린 「온달전(溫達傳)」과 같은 것은 고구려인이 만들어낸 소설에나 나올 법한 내용이다.
제2절 제도·풍속
고구려는 초기에 수많은 부족(部族)으로 구성되어 그 중 거대한 5개 부족이 있어, 연노부(涓奴部, 혹은 소노부(消奴部)라고 쓴다)·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가 그것으로, 처음 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약해져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고 하며, 태조대왕(太祖大王) 궁(宮)은 계루부의 시조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왕권이 커져 날로 중앙집권 형세가 갖추어짐과 동시에 부족의 조직은 점차 쇠퇴하여 장수왕(長壽王) 때에는
완전히 중앙집권 국가로 정착하여 귀족 사인(士人)의 계급을 왕도(王都)의 행정구획을 본뜬 5부(五部, 동(東, 상(上))
좌서(左西, 하우(下右)) 중남(中南, 전(前)) 북(北, 후(後))) 의 조(組)로 나누었다.
왕이 한성(漢城)을 백제에게서 빼앗아 왕도(王都) 평양 외에 옛 수도 국내성(國內城)과 한성을 합쳐 삼경(三京)으로 삼아(한성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나서 그 이름을 재령(載寧)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자격을 부여하였고 왕도 안은 앞에서 언급한 5부(五部)의 행정구획으로 나누어 기내(畿內)를 내평(內評), 기외(畿外)를 외평(外評)이라고 칭하고 이를 허다한 평나이보리(評那已保里, 군(郡))로 나누어 5부(五部)와 큰 성(城)에는 중국의 도독(都督)에 견줄만한 욕살(褥薩)을 두었으며, 여근지(閭近支, 도사(道使))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평(評)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다른데, 고구려 말기에는 60여 개의 평(評)이 있었다고 한다.
욕살(褥薩)·여근지(閭近支)는 군정(軍政)·민정(民政)을 모두 관장하여 관직에 문무(文武)의 구별이 없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나라가 탈취한 성(城)은 176개였다고 한다(전부인지 전부가 아닌지 알 수 없다).
즉 크고 작은 성을 합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욕살(褥薩)과 여근지(閭近支)의 관계는 명확하지가 않다.
아마 후자가 전자의 통제를 받지 않았을까?
고구려 후기의 지방제도는 군현제도(郡縣制度)라기보다는 성주제도(城主制度)라고 해도 사실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왕의 관(官)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가(古雛加)·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사자(使者)·
조의선인(皁衣先人)이 있었지만, 위직(位職)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한 직제(職制)도 없었을 것이다. 대로(對盧)를 두면 패자(沛者)를 두지 않았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친(宗親)인 대가(大加, 가장(家長))는 모두 고추가(古雛加)로 불렸으며, 연노부(涓奴部)는 본국주(本國主)의
부(部)라는 이유로 훗날까지 이 부의 장(長)은 고추가로 불렸다. 종묘(宗廟)를 건립하여 영성사직(靈星社稷)을 받들어
제를 올렸다고 한다.
절노부(絶奴部)의 장(長)도 고추(가)의 호칭을 받았다.
제(諸) 대가(大加, 왕의 종친 및 제부(諸部)의 장(長) 가운데 세력을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일까?) 역시 사자(使者)·조의선인(皁衣先人)의 관을 설치하고 이름을 왕에게 알리기는 하였지만, 왕가(王家)의 사자·조의선인보다는 등급이 아래였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가 있었고, 또한 기록에 따라 다르기도 하여 명확하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의 것을 바탕으로 대략적으로 추정해 보면, 관등(官等)의 으뜸은 토졸(吐猝)이라는 옛 명칭의 대대로(大對盧)로, 국사(國事)를 총괄하였으며 막리지(莫離支)는 이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태대형(太大兄), 세 번째는 울석(鬱析)으로, 주부(主簿)의 의미라고 한다. 네 번째는 태대부사자(太大夫使者), 다섯 번째는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으로(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전의 조의선인(皁衣
先人)이라고 한다.
이상의 5관(五官)은 기밀을 담당하고 정사(政事)를 도모하며 병마(兵馬)를 징발하고 관작(官爵)을 선발하였다('북사(北史)'에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는 힘의 강약에 따라 서로 빼앗아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 왕의 허락이 필요 없었다.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의 관(官) 중 거물을 대대로(大對盧)라고 불렀다.
중국의 1품(一品)에 해당한다.
국사(國事)를 총괄하였으며, 3년에 한 번 바뀌었다.
다만 직(職)에 따른 연한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교체일에 서로 공경을 다하지 않으면 모두 군사를 일으켜 서로를 공격하여 여기서 승리하는 자가 대대로에 올랐다.
왕은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를 지키며 섣불리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신당서(新唐書)'에 이러한 일이 대대로에서 조의두대형에 이르는 5관(五官)에 이른다고 기록한 것은 아마 오류일 것이다).
여섯 번째는 대사자(大使者), 일곱 번째는 대형(大兄), 여덟 번째는 수위사자(收位使者), 아홉 번째는 상위사자(上位使者), 열 번째는 소형(小兄), 열한 번째는 제형(諸兄), 열두 번째는 과절(過節, 소사자(小使者)?), 열세 번째는 불과절(不過節), 열네 번째는 선인(先人)이었다(중리소형(中裏小兄)도 있는데, 열 번째의 소형(小兄)과 같은 관(官)일까? 중리대형(中裏大兄)도 있는데, 일곱 번째의 대형(大兄)과 같은 관(官)일까?). 직(職)으로 장고추가(狀古雛加)가 있어, 빈객(賓客)을 담당하였으며 이 직은 당나라의 홍여경(鴻臚卿)과 같은 직이며, 대부사자(大夫使者)의 위(位)를 가진 자가 이 직에
올랐다. 그리고 국자박사(國子博士)·대학박사(大學博士)·사인(舍人)·통사(通事)·전서객(典書客)이 있었는데, 모두 소형(小兄) 이상의 관(官)을 가진 자만이 이 직에 올랐다.
이미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큰성(城)에 욕살(褥薩)을 두고 제성(諸城)에 여근지(閭近支)를 두었다.
무관(武官)으로 대모달(大模達)이 있었는데, 당나라의 위장군(衛將軍)에 해당하며,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이상의 관(官)을 가진 자가 이 직에 올랐다.
이어서 말객(末客)이 있었는데, 당나라의 중랑장(中郞將)에 해당하며, 대형(大兄) 이상인 자가 이 직에 올랐다.
그 다음으로 영천인(領千人)이 있었다고 한다('수서(隋書)'에 따르면, 태대형(太大兄)·대형(大兄)·소형(小兄)·대로(對盧)·의후사(意侯奢)·조장(鳥壯)·태대사자(太大使者)·대사자(大使者)·소사자(小使者)·욕사(褥奢)·예속(翳屬)·선인(仙人) 등 12관등(官等)이 있었다고한다).
그리고 '고기(古記)'에는 좌보(左輔)·우보(右輔)·대주부(大主簿)·국상구사자(國相九使者)·중외대부(中畏大夫) 등의 칭호가 보이는데, 좌보(左輔)·우보(右輔)·국상(國相)은 고구려의 관직(官職)을 한자어(漢字語)로 고쳐 적은 것이다.
한대(漢代)의 고구려에서는 대가(大家)는 밭농사를 짓지 않았으며, 하호(下戶)가 식량이나 소금을 담당하여 이를 공급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수서(隋書)'에 따르면, 한 사람당 세포(稅布) 5필(匹), 곡(穀) 5석(石), 유인(遊人)은 3년에 한 번씩 모아서 10명이 함께 세포(細布) 1필(匹)을 세(稅)로 내야 하였다. 조(租)는 호(戶) 1석(石), 그 다음 7두(斗), 그 다음 5두(斗)가 부과되었다. 반역자는 기둥에 묶어 화형(火刑)시키고 참수하여 그 집안을 몰락시켰다.
도둑은 10배를 배상하는 형벌을 내려 범법자를 엄중하게 처벌하였으므로 범법자가 드물었다.
한대(漢代)의 고구려인의 언어·제사(諸事)가 부여(夫餘)와 비슷하였으며, 그 기질·의복은 달랐다.
고구려 말기에 의상복식(衣裳復飾)은 오직 왕만이 오채(五綵)에 백라(白羅)로 관(管)을 만들었다.
백피(白皮)로 만든 소대(小帶)를 착용하였다.
왕의 관대(冠帶)는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고 관(官)이 높은 자는 청라(靑羅, 혹자는 자색(紫色)이었다고 한다)로 관(冠)을 만들었다.
그 다음의 지위에 있는 자는 비라(緋羅)를 사용하였고 이조우(二鳥羽) 및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옷은 큰 소매의 웃옷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고 가죽 혁대에 황색 가죽신을 신었다(大袖衫大口袴素皮帶黃革履). 고구려 백성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고깔을 머리에 썼으며, 부녀자는 머리에 장식 끈을 묶었다고 한다.
최근 고분(古墳)의 벽화(壁畵)가 발견되면서 이 방면의 연구가 한층 큰 진척을 보일 것이다.
의관차복(衣冠車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제2장 백제
제1절 문물
백제는 낙랑(樂浪)·대방(帶方) 문화의 영향을 받은 마한(馬韓)의 땅에 나라를 건국하여 대방의 옛 영토를 영유하여, 일찍부터 그 문화의 영향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과의 교통은 이미 4세기 초부터 시작되어,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진(晉)의 관직(官職)을 받아 들였다는 점에 대해서 이미 기술하였듯이, 근초고왕 대에 박사(博士) 고흥(高興)이라는 인물을 얻어 기록을 하게 되었다.
고흥은 한인(漢人) 혹은 한인계(漢人系) 인물일 것이다.
근초고왕이 일본에 파견한 아직기(阿直岐, 아치키시(阿知吉師))는 경전(經典)을 잘읽어, 태자(太子) 우지노와키이라쓰코(菟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아직리등(阿直吏等)이 그의 선조이다.
또한 구수왕(仇首王)은 칙(勅)을 받들어 일본에 박사(博士) 왕인(王仁, 와니키시(王仁吉師))을 바쳤다.
왕인은 논어(論語)를 가지고 일본에 와, 오랫동안 문학(文學)의 선조로 추앙을 받았다.
왕인은 중국인으로, 그의 조부인 왕구(王狗) 때 백제로 건너온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그의 자손을 후미노 오비토(文首)라고 부른다.
아직기도 중국계 인물일 것이다.
이 무렵 백제 왕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손왕(辰孫王)이 일본에 학문을 전하였으며 그의 자손은 여러 씨족을 남겼다.
이들의 여러 사람 가운데에는 이동(異同)이 있어 다소 의문을 갖게 하지만, 사실을 통한 추론으로, 당시 백제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백제에도 문사(文事)·예술을 담당하는 관직(官職)에 오르는 자 즉 박사(博士)는 색인(色人)이라고 불렀으며 그 대부분 은 중국인 혹은 중국계라는 점이다.
침류왕(枕流王) 때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晉)나라에서 백제로 왔다.
왕은 이를 맞이하여 궁 안에 머물며 예(禮)로써 환대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왕사(王寺)를 한산(漢山)에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출가시켰다.
백제인의 문장은 '위서(魏書)'에 개로왕(蓋鹵王)이 위나라에 상표(上表)한 글이 수록 되었고 '남제서(南齊書)'에 동성왕(東城王)의 상표문(上表文)이 기록되어 있다.
주로 한문(漢文)으로 기록되었으나 백제인의 손으로 썼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무령왕(武寧王)·성명왕(聖明王) 무렵에 백제의 문물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성명왕은 양(梁)나라에 사자를 보내 모시박사(毛詩博士)·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및 공장(工匠)·화사(畵師)를 청하였으며, 양나라는 이 요청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성명왕은 양나라에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하였고 이에 양나라는 육후(陸詡)라는 대학자(大學者)를 보내주었다.
육후는 어려서 최영은(崔靈恩)의 ꡔ삼례의종(三禮義宗)ꡕ을 배운 인물이라고 한다.
백제에서 보낸 사자(使者)가 양나라에 도착해 후경(侯景)의 난으로 황폐해진 성과 궁궐을 보고 서문(瑞門) 밖에서 한탄하며 눈물지었다는 것은 광경은 이러한 교육에서 나왔다고 할 수있다.
백제가 개로왕 때부터 일본에 여러 박사(博士)·약사(藥師), 그 밖의 각종 공인(工人)을 바친 것은 일본의 문화를 촉진시켰다.
무령왕·성명왕 때부터 불교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특히 성명왕은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마침내 일본 조정(朝廷)에도
이를 바쳐 전하였다.
다만 불교·공예 등 모든 것을 중국에서 수입한 그대로 일본에 전해준 점은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백제는 중국의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및 가라제국(加羅諸國)에도 전해주었다.
백제 후기의 문물에 대해서는 '주서(周書)'에, 경사(經史)를 좋아하여 뛰어난 자가 많았고 글을 엮어서 풀었으며 이사(吏事)에 능하였다.
또한 의약(醫藥)과 서점상(筮占相)의 술(術)을 풀었고 투호(投壺)·저포(樗蒲) 등의 놀이를 즐겼으며 무엇보다 바둑을
숭상하였다.
승니(僧尼)·사탑(寺塔)이 많았고, 도사(道士)는 없었다.
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구당서'에, 서적(書籍)으로는 오경자사(五經子史)가 있었으며, 또한 표(表)와 소(疏)는 중화(中華)의 법에 따랐다. 고 기록하였다.
조선 반도에 남아 있는 백제 문물의 유물은 적지만, 일본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미술공예품을 보면 백제 문물에 대해 알 수 있다.
성명왕 이후 불교에 대한 신앙은 한층 깊어져 백제는 완전히 불교국가가 되었다.
승려로는 혜현(慧顯)·진표(眞表)와 같이 중국의 고승전(高僧傳)에 이름을 남긴 승려도 있었다(다만 진표(眞表)는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완산(完山) 사람일지도 모른다).
일본으로 건너온 승려로는 성명왕 대에 담혜(曇慧)·도심(道深)이 있었고 무왕(武王) 대에 관륵(觀勒)이 있어, 역본(曆本)·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 및 둔갑술 관련 서적을 바쳤으며, 의각(義覺)은 백제가 멸망할 때 일본으로 도망해 왔으며,
그 밖에 도장(道藏)이라는 승려도 있었는데, '성실논소(成實論疏)' 16권(卷)을 찬(撰)하였다.
그리고 도령(道寧)·다상(多常)·방제(放濟) 등 유명한 승려가 있었다.
백제인의 저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으나,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紀)' 등의 역사서가
일본에 전해지고 있어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할 때에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지금은 그 훌륭한 글이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일본에 귀화한 달졸목소귀자(達卒木素貴子)·동답임춘(仝 答林春)·사택소명(沙宅昭明) 등은 오토모 황태자(大友皇太子)의 문학(文學)상의 빈객(賓客)이었다.
제2절 제도·풍속
백제 전기(前期)의 제도는 명확하지 않다. 좌보(左輔)·우보(右輔)·좌장(左將)·북문두(北門頭)·영군내두(領軍內頭)·갑배(甲背)(초(肖)인가?) 등의 관명(官名)이 보이지만 정제(定制)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에 들어서서 16품(品)의 관위(官位)가 있었다.
제1품 좌평(佐平), 제2품 달솔(達率), 제3품 은솔(恩率), 제4품 덕솔(德率), 제5품 간솔(杆率), 제6품 나솔(奈率) 이상은 관(冠)에 은화(銀花)를 장식하였다. 제7품을 장덕(將德)이라고 하였으며 자대(紫帶)를 착용하였다.
제8품을 시덕(施德)이라고 하여 조대(皁帶)를 착용하였다.
제9품을 고덕(固德)이라고 하여 적대(赤帶)를 착용하였다.
제10품을 계덕(季德)이라고 하여 청대(靑帶)를 착용하였다. 제11품 대덕(對德), 제12품 문독(文督), 모두 황대(黃帶)를 착용하였다.
제13품 무독(武督), 제14품 좌군(佐軍), 제15품 진무(振武), 제16품 극우(克虞), 모두 백대(白帶)를 착용하였다.
이와 같은 관제(官制)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고이왕(古爾王) 27년에 제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렇게 일찍부
터 존재했던 제도가 아니다.
성명왕 시대에 제정된 제도이다. 좌평(佐平)은 여섯으로 구분되었다.
(1) 내신좌평(內臣佐平)은 선납(宣納)의 일을 담당하였다.
(2) 내두좌평(內頭佐平)은 고장(庫藏)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3)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의(禮義)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4)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숙위(宿衛)의 병사(兵事)를 담당하였다.
(5)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옥사(刑獄事)를 담당하였다.
(6)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외병마사(外兵馬事)를 담당하였다.
성명왕 대에는 상좌평(上佐平)·중좌평(中佐平)·하좌평(下佐平)이 있었고, 수덕(修德)·도덕(都德) 등이 있었는데, 관위(官位) 제정 당시의 명칭을 종종 고친 것일까?
한편,'북사(北史)'에는 좌평(佐平) 5명, 달솔(達率) 30명, 은솔(恩率) 이하의 관직은 상설 관원이 없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렇지만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6좌평('당서(唐書)'에 따른다)이 있었으니 좌평이 5명이었다고 볼 수 없기는 하지만,
처음에 상중하(上中下)의 세 좌평이 있고 다음으로 5좌평이 있다가 결국 6좌평이 된 것일까?
'북사(北史)'에 따르면, 내신(內臣)으로 전내부(前內部)·곡내부(穀內部)·내경부(內部)·외경부(外部)·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後宮部)가 있었고, 외관(外官)으로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구부(司寇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주부(綢部)·일관부(日官部)·포부(布部)가 있어 여러 가지 일을 나누어 담당하였으며, 장리(長吏)는 3년에 한 번 교체되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성명왕 이후의 제도일 것이다.
백제의 행정구획에 대해서는 '양서(梁書)'에 무령왕(武寧王)부터 성명왕 초까지의 일들을 기록하여, 백제왕이 다스리는 성(城)을 고마(固麻)라고 하였고, 읍(邑)을 담로(擔魯)라고 하여 중국의 군현(郡縣)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22담로가
있어, 그들의 자제(子弟)와 친족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성명왕 때 사비(泗沘)로 천도할 무렵에 개혁하여 도하(都下)를 상부(上部)·전부(前部)·중부(中部)·하부(下部)·
후부(後部)의 5부(五部)로 나누고, 각 부를 다시 5항(巷)으로 나누었으며, 한 부에 병(兵) 500이 있어 5부를 합쳐 2,500명이 있었다.
지방에는 방성(方城)·대성(大城, 군)·소성(小城, 현)이 있었다.
방성(方城)은 5개 있었다.
중방(中方)을 고사성(古沙城, 지금의 고부(古阜)), 동방(東方)을 득안성(得安城, 지금의 은진(恩津)), 서방(西方)을
도선성(刀先城, 충청북도(忠淸北道) 서북쪽 지역을 말하는 것일까?), 북방(北方)을 구도웅진성(舊都熊津城)이라고
하였다.
이들 5개 성에는 방령(方領)을 두었는데 달솔(達率)로서 임명하였다.
그 밖의 대성· 소성에는 성주(城主)를 두었고 성주는 도사(道使)라고 불렀으며, 대성에는 군령(郡令)이 있었다.
방성은 부근의 대성을 통괄하였고 대성은 부근의 소성을 통괄하였지만, 5방(五方)이 전국을 나누어 통괄한 것은 아니었다.
명의상(名義上)의 자격에 그쳤을 것으로 보인다.
성명왕 때의 백제인 혹은 준백제인(準百濟人, 외국인계(外國人系)로, 준백제인에 들어가지 않는 자를 제외한다)은 왕도하(王都下)의 다섯 행정구획에 따른 부명(部名)을 관위(官位) 씨명(氏名) 위에 함께 붙여 사용하였다.
그 거주 관계에 따라 5조(五組)로 나뉘었다.
그러나 백제 말기에 5방(五方)은 동(東)·서(西)·중(中)·남(南)·북(北)의 5부(五部)로 개칭하였으며, 웅진성(동성(東城))·
왕도사비성(王都泗沘城, 서성(西城))을 중부(中部)라고 하고, 구획을 고쳐 행정구획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이를 백제인의 부명(部名)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멸망할 때 5부(部) 37군(郡) 200성(城)이었다고 한다.
백제의 귀인(貴人)들은 근초고왕(近肖古王)·근구수왕(近仇首王) 이후에 씨명(氏名)을 사용하였다.
자비왕(慈悲王) 이후에 특히 많은 씨명(氏名)이 생겨, 거주하는 곳에 근거하여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법을 살펴보면, 반역자는 주살(誅殺)하여 그 집안을 몰락시켰으며, 사람을 죽인 자는 노비를 세 명 바치면 죄를 갚을 수 있었으며, 뇌물을 받은 관리 및 도둑질을 한 자는 그 3배를 보상해야 했으며 종신토록 가두었다.
풍속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백제왕은 사중(四仲)인 달마다 천제(天帝) 및 5제(五帝)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시조묘(始祖廟)를 국성(國城)에 세워 1년에 네 번 제사를 지냈다.
백제는 여러 면에서 고구려를 모방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제3장 신라
제1절 문물
신라는 조선 반도 서남단(西南端)에 위치하여 진덕왕(眞德王) 대까지 중국과 직접적으로 교통을 하기가 어려워 문화의 개화(開化)가 삼국 중 가장 늦었다.
'양서(梁書)'에 6세기 초의 신라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당시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를 새겨 신(信)을 이루었고, 말은 백제를 기다렸다가 나눌 수 있었다 고 한다.
다만 이는 참으로 혹독한 기사이기는 하지만, 당시 신라가 삼국 중 문물이 가장 뒤처졌고 낮았다는 점에서 볼 때, 일본
보다 못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라는 백제와 연합을 이룬 시대에 백제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법흥왕(法興王)·진흥왕(眞興王) 대에 이르러 급격한 발전을 보였다.
특히 진흥왕 대에 한강(漢江) 하류 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과 직접 교통의 길이 열리자 그 면목을 일신하였다.
불교는 일찍부터 고구려를 통해 받아들였으나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國敎)로 인정하면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특히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흥수사(興輸寺)43)를 건립하였으며, 일반인이 출가하여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진흥왕 10년에는 양(梁)나라에 유학한 승려 각덕(覺德)이 불사리(佛舍利)를 받들어 귀국하였다.
진흥왕 26년에는 제(齊) 나라의 사자(使者)가 승려 명관(明觀)과 내빙(來聘)하여 '석씨경론(釋氏經論)' 1,700권을 보냈다. 기원(祇園)은 실제로 황룡사(黃龍寺)와 같은 사찰을 지어 표현하였으며, 진흥왕 33년에는 전사(戰死)한 사졸(士
卒)을 위해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외사(外寺)에서 7일 동안 개최하였다.
진흥왕은 말년에 삭발을 하고 승복(僧服)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사용하였으며 왕비(王妃)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진흥왕 6년,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의 주청을 받아들여 대아찬(大阿飡) 거사부(居斯夫) 등에게 명해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國史)를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당시 중국인계 박사(博士)도 생각보다 많이 이 신흥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법흥왕이 원호(元號)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들 박사들의 진언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진흥왕 22년 신사(辛巳)에 비자벌(比子伐, 창녕(昌寧))로 순행(巡行)을 하여 비(碑)를 세웠으며, 진흥왕 29년에는 황초잠(黃艸岑)으로 순행하여 비(碑)를 세웠으며, 그리고 이 무렵에 북한산(北漢山)에 가서 비를 세웠다.
이 비(碑)는 당시 육조풍(六朝風)의 한문(漢文)으로 왕자(王者)의 덕(德)을 노래하였고 왕이 어가(御駕)를 타고 순행하는 일에 대한 내용에서는 어가를 수행한 중신(衆臣)의 이름을 열거해 기재해 놓았다.
북한산비에는 중신들의 이름을 열거한 다음 주문장(主文章) 인 영사(詠辭)가 시작된다.
이 영사는 한자를 빌려와 표기한 국어(國語)가 섞여 있는데, 우리의 만엽체(萬葉體) 문장과 비슷하다.
이들 세 개의 비는 모두 현존하고 있다.
또한 진흥왕은 가야(加耶)의 악인(樂人) 우륵(于勒) 및 그의 제자 형문(兄文)을 초빙하여 악(樂)을 발흥시켰다.
진평왕(眞平王) 대에 이르러 진(陳)나라·수(隋)나라에 가서 구법(求法)을 하는 승려가 매우 많아, 전해지는 고승만 해도 지명(智明)·대세(大世)·구량(仇梁)·원광(圓光)·담육(曇育)·안홍(安弘) 등이 있다.
그 중에 원광(圓光)·안홍(安弘)은 가장 유명한 고승들이다.
원광은 당나라 고승전(高僧傳)에 그 이름이 올라가 있다.
원광은 진평왕 11년, 진나라로 들어가 진평왕 22년에 귀국하였다.
진평왕 30년에 수나라에 사(師)를 청하는 표(表)는 원광이 기초한 것이다. 안홍은 서역(西域) 호승(胡僧) 4명과 함께
신라로 귀국하였다.
이들 승려는 포교활동을 하여 선덕여왕(善德女王)·진덕여왕(眞德女王) 시대의 문화를 이끌었다.
이 두 여왕의 시대에는 당나라 문화가 도도하게 신라로 유입되었으며, 선덕여왕 대에는 지금의 경주(慶州)에 남아 있는 저 유명한 첨성대를 완성했다는 설(說)도 있다.
그러나 공예(工藝) 등 그 밖의 분야에서는 아직 백제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할 때에 백제에 공장(工匠) 아비지(阿非知)를 청해 백제에서 보내주어 이 9층탑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예 분야에서는 무열왕(武烈王) 대에 저
유명한 강수(强首)가 배출되었다. 강수는 본래 임나 가량(加良) 사람인데, 사량부(沙梁部))에 살면서 세외교(世外敎)인 불교를 배우기보다는 유학을 배우겠다고 마음을 먹고 '효경(孝經)', '전례(典禮)',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배워,
무열왕에게 등용되어 문한(文翰)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신문왕(神文王) 대에 세상을 떠났다.
43) 흥륜사(興輪寺)의 오기이다.
제2절 제도·풍속
신라는 특별한 사회조직을 가져 골품제(骨品制)를 정치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국정(國政)은 왕자(王者)의 전제(專制)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화백(和白)이라는 귀인(貴人, 아마 진골)의 회의가 있어서 중대사는 이 회의에서 결정하였는데,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으면 즉시 그 안건은 파기되었다.
예전에는 왕자도 이 회의에서 왕골(王骨) 출신 중에서 선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후기, 신라의 관위(官位)는 17관등(官等)이었다.
(1) 이벌찬(伊伐飡) : 이벌간(伊罰干)·간벌찬(干伐飡)·각간(角干)·각찬(角粲)·서발한(舒發翰)·서불사(舒弗斯)·소벌공(蘇伐公)·자분한지(子賁旱支)·일벌간(一伐干)·조부리지간(助富利智干) 등의 문자(文字)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2) 이척찬(伊尺飡) : 이찬(伊飡)·일척간(一尺干) 등의 문자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3) 잡찬(迊飡) : 잡판(迊判)·소판(蘇判)·잡간(迊干) 등의 문자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4) 파진찬(波珍飡) : 파진간기(波珍干岐)·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 등의 문자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5) 대아찬(大阿飡) 이상은 진골(眞骨)인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관직으로, 다른 사람은 받을 수 없었다.
(6) 아찬(阿飡) :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
(7) 일길찬(一吉飡) : 을길간(乙吉干)·일길간(一吉干)
(8) 사찬(沙飡) :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척간(沙尺干)
(9) 급대찬(級代飡) : 급찬(級飡)·급척간(及尺干)·급복간(及伏干)
(10) 대나마(大奈麻) : 대나말(大奈末) 중나마(重奈麻)에서 9중나마(九重奈麻)까지
(11) 나마(奈麻) : 나말(奈末) 중나마(重奈麻)에서 7중나마(九重奈麻)까지
(12) 대사(大舍) : 한사(韓舍)
(13) 사지(舍知) : 소사(小舍)
(14) 길사(吉士) : 계지(稽知)·길차(吉次)
(15) 대오(大烏) : 대오지(大烏知)
(16) 소오(小烏) : 소오지(小烏知)
(17) 조위(造位) : 선저지(先沮知)
이 위계(位階)는 유리왕(儒理王) 9년에 제정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결코 이처럼 일찍부터 제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들 명칭에도 와전되어 변한 것이 있다.
위계(位階)로서는 아마 법흥왕·진흥왕 무렵에 제정되었을 것이다. 이 밖에 대각간(大角干, 대서발한(大舒發翰)·대일벌간(大一伐干))·태대각간(太大角干) 등이 있다.
모두 최고위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전자는 백제를 평정한 후에, 후자는 고구려를 평정한 후에 논공행상에 따라 김유신을 위해 마련된 관직으로 전해지는데, 진흥왕 대부터 대각간에 오르는 자가 있었다.
신라의 최고위 관직을 상대등(上大等, 상신(上臣))이라고 하여 상대등이 정무를 총괄하였으며, 그 아래에 대등(大等)이 있었다.
관성(官省)으로는 집사성(執事省, 본래 이름 품주(稟主))이 있어 내외의 정무를 관장하였다.
병부(兵部, 법흥왕 3년에 설치)가 있어 군무(軍務)를 관장하였으며, 창부(倉部, 품주가 겸하는 곳으로 진덕왕(眞德王) 5년에 설치하였다)가 있어 재무(財務)를 관장하였다. 예부(禮部, 진평왕(眞平王) 8년에 설치하였다)가 있었으며 그 밖에 조부(調部) 등이 있었고, 제부(諸府)가 있었다.
왕기내(王畿內)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고 불렀으며 6탁평(啄評)이 있었다.
본래 신라는 연합을 통해 형성된 국가로, 급탁(及啄, 단순히 탁(啄))·사탁(沙啄)·점탁(漸啄, 연탁(年啄))·본피(本彼)·
한저(漢袛)·습비(習比) 등의 6부(六部)가 바로 그것이다.
탁(啄)은 예전에 녹(㖨)이라고 썼으나 나중에 탁(啄)·탁(涿) 등의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결국 자훈(字訓)에 따라 양자(梁字)를 사용하였지만, 마침내 음독(音讀)하게 되었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5년,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각 부(部)에 성(姓)을 내렸다고 하는데, 신라에는 진골(眞骨)
조차 진흥왕 때까지 성씨(姓氏)가 없었다.
중국인계(中國人系)나 유학생 등은 성씨(姓氏)를 가지고 있거나 붙였는데, 신라인은 진골을 제외하고 대부분 성씨를
붙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자기 집안과 관련이 있는 6부(六部)의 부명(部名)을 사용하였다.
법흥왕 대에는 읍(邑) 밖에 사는 자를 읍륵(邑勒)이라고 하였으며 52읍륵이 있었다고 한다.
진흥왕 대에는 이 지방의 대성(大城)에 군주(軍主)를 두었고, 읍(邑) 가운데 규모가 큰 읍은 주(州)라고 하여 이 주(州)에 행후행사(行侯行使)를 두었다.
그 다음으로 군(郡)에 군사(郡使)를 두었으며 아울러 이를 도주(道主)라고 불러, 지방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고, 한성(漢城, 광주)·비리(裨利, 안변(安邊))·감문(甘文, 개령(開寧))·비자벌(比子伐, 창녕(昌寧))에 있어 이를 사방군주(四方軍主)라고 불렀다.
나중에 주(州)에 군주(軍主)를 두었고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총관(總管)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요충지에는 정(停, 영(營)을 말한다) 혹은 당(幢)을 두어 군단(軍團)을 배치하였다.
'통전(通典)'에, 건장한 자를 선발해 모두 군봉(軍鋒)으로서 수라(戍羅)를 함께 하여 둔영(屯營)의 풍(風)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촌(村)에는 촌주(村主)가 있었다.
군주(軍主)·당주(幢主, 정주(停主)?)·도사(道使, 대등(大等)?)·촌주(村主), 이들이 외관(外官)의 중심이었다.
촌주로는 지방 사람을 등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풍속과 형정(刑政)은 고구려·백제와 대체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가지 기이한 풍속은 원화(源花)·화랑(花郞)이라는 것이다. 진평왕(眞平王) 때, 군신(君臣)이 인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고자 청년들을 유취군유(類聚群遊) 하게 하여 그들의 행동을 보고 나중에 이를 천거하여 등용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남모(南毛)·준정(俊貞)이라는 두 미녀를 간택하여 이를 원화(源花)라고 하였으며, 원화를 중심으로 귀족사인(貴族士人) 청년들의 사교집단(社交集團)을 만들었는데, 3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이 모였다.
그러나 두 미녀가 미모를 다투며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살해해 모임의 화합이 깨지면서 해체되었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들을 모아 이들을 치장하여 화랑(花郞)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중심으로 무리들이 모여들어 서로를 연마하고 도의(道義)를 지키며 서로 즐겁게 가무(歌舞)를 즐기며 산천을 유람하며 노닐었는데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사람의 정사(正邪)를 알게 되고, 그 가운데 선한 자를 선발해 조정(朝廷)에 천거하여 크게 활약을
하기도 하였다.
김유신이 바로 화랑 출신이다.
신라인은 일월신(日月神)을 숭배하였으며 산신(山神)을 모셨다고 한다.
무(巫)를 숭상하였다는 것은 신라 2대 왕인 남해(南解)의 왕호(王號)인 차차웅(次次雄, 자광(慈光))을 김대문(金大問)이,
차차웅(次次雄)은 방언(方言)으로 무(巫)를 말한다.
세인(世人)들은 무(巫)가 귀신을 섬겨 제사를 올리기 때문에 이를 경외시하여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칭하여 자광(慈光)이라 하였다. 라고 해석한 점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남해왕은 시조묘(始祖廟)를 건립하여 신매아로(新妹阿老)를 주제(主祭)로 삼았다.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모두를 합쳐 살펴보면, 신라의 풍속·형정(刑政)·의복(衣服) 등은 고구려·백제와 대략 같다.
조복(朝服)은 흰색을 숭상하고 식기(食器)는 유배(柳桮)를 사용하며, 동(銅)과 질그릇을 사용한다.
부녀자들은 긴 저고리를 입고 화장을 하고 눈썹을 그리지 않고 머리카락을 머리에 묶어 비단이나 진주로 장식하여 머리는 길고 아름다웠다.
남자는 바지를 입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육모흑포(鬻冒黑布)를 입었는데 사람을 보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대고 인사를 해야 하였다.
시장에는 모두 부녀자들이 거래를 하였으며, 겨울에는 부뚜막을 집안에 만들었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두었다.
고 기록되었다.
신라인들이 사용하던 질그릇은 일본의 동 시대의 질그릇과 동일한 형식이며, 곡옥(曲玉)을 찼다는 것은 최근 유물 조사 결과 명확해졌다.
분묘(墳墓)는 관곽(棺槨)을 덮고 적석(積石)을 놓고 그 위를 봉토로 덮은 원분(圓墳)이었다.
부(附) 가라
가라제국(加羅諸國)은 백제의 문화를 수입한 것으로 보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고분(古墳)은 돌을 쌓아 올려 장방형(長方形)의 광(壙)을 만들어 봉토를 덮었다.
그 유물은 일본과 같아 풍속이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출전 : '朝鮮半島史' 2편, 연도미상, 미국 하와이대학 헤밀튼도서관 소장>
3) '조선반도사' 3편 원고(‘통일신라’ 부분)
통일 후의 신라
개설(槪說)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적국이었다.
일본에도 임나 문제로 인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어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빠졌다.
마침내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당(唐)으로 찾아가 그 병사를 불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은 두 나라를 멸망시켜 이를 신라에게 줄 생각을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을 뿐더러 두 나라의 영토를 당나라의
직할령으로 두고 신라도 당나라의 하나의 도독부(都督府)로서 신라왕을 그 도독에 임명하되 단지 그 왕가로 하여금
도독을 세습하게 하여 국내를 다스리게 할 생각이었다.
이에 반해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일부를 자국의 소유 영토로 하여 반도를 통일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는 당과 충돌하게 되는데 당시 당나라는 이미 옛날과 같은 병력의 위력을 잃어가고 더욱이 그 경영 방침이 누누이 바뀌면서, 신라 문무왕은 백제의 땅과 고구려 남부의 일부를 영유하였고 당나라도 이를 묵인하게 되었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구려에 대해서는 불과 영토 일부분과 인민 극소수를 병합하는 것에 그쳤다.
고구려인은 영구히 반도와 관계를 끊고 말갈(靺鞨)이나 거란(契丹)이나 돌궐(突闕)에 들어갔다. 말갈에 들어간 자들은 만주땅에 발해국을 세웠다.
시대의 초기에는 당나라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당나라에 사죄하기도 하고 혹은 변명하기도 하며 당나라의 마음을 달래주려 노력하며 복속국의 예를 갖추었고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의 의사를 존중하려고 노력했고 이전의 전례를 지켜 매년 조공(朝貢)특사를 파견하여 사대의 예를 갖추었다.
자연히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에 문물에 큰 변화가 일어 났는데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당나라의 감정이 일변하여 신라는 총애를 받게 되었다.
신라도 마침내 이를 성심껏 받들었으며 한편 일본과는 소원해지게 되었다.
무열왕(武烈王)부터 혜왕(惠王)에 이르는 8대는 무열왕계통의 왕이 즉위하여 왕가도 마치 중국풍의 왕가인 것 같이 보이게 되었다.
문무왕(文武王) 중기 이후에는 국내에 전화(戰火)가 없어 태평성국을 이루고 당나라의 문물을 성대히 수입하여 정교(政敎) 모두 건전했고 말 그대로 신라의 융성시대를 이루었다.
이 8대(代)의 시기를 중대(中代)라고 부른다.
신라는 진골(眞骨)정치의 국가로서 왕위 세습 국가가 아니었다. 중대 말에 이르러 진골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나 내물왕(奈勿王)의 10세 손인 김양상(金良相)이 즉위한 이후 왕위 쟁탈전이 누누이 발생하게 되었다. 김양상 즉 선덕왕(宣德王) 이후를 하대(下代)라 칭하는데 신라의 쇠퇴기이다.
왕위 쟁탈은 신무왕(神武王)에 이르러 멈추었지만 진골정치는 외부의 적도 없어 협동하여 일체화하지 못하고 폐단만이 성행하였다. 이후 국력은 점차로 쇠퇴하고 퇴폐와 태만 등이 극에 달했다.
진성왕(眞聖王)대에 이르러서는 도적이 횡행하고 호적들이 할거하였다.
마침내 신라와 후고구려, 후백제가 경쟁하게 되고 신라는 병사를 일으킬 힘도 없이 개국 이래 이 땅에서 멸망하게 되었다.
하대에도 전대(前代)처럼 당나라에 예를 갖추고 복속국과 같은 예를 다했지만 일본과의 국제관계는 매우 소원했는데
남쪽 일본, 북쪽 발해와는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국제관계도 태평스러웠다.
이 기간에는 당의 문물을 수입하였지만 신라는 국체(國體)상 당(唐)의 제도는 일부분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당의 문예부문에서는 크게 성행하여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당에서 교양을 받은 많은 문사(文士)를 배출했지만, 불교가 점점 유행하여 국가, 인민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제1기 융성시대
제1장 신라와 당의 분쟁
제1절 백제의 옛 땅에 대한 당나라의 경영
'신라인전(新羅人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를 토벌하여 조선반도의 전부를 당의 주현(州縣)으로 만들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라가 이를 대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이것의 사실 여부는 의심스럽지만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후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를 조금이라도 신라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신라도 처음에는 이 땅을 얻으려고 하는 의사를 전혀 표시하지 않고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신라를 보호해 줄 것만을 요청했다.
현경(顯慶) 5년(신라 무열왕 7년, 백제 의자왕 20년) 의자왕(義慈王)이 당나라 군사에게 항복하자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과 대신 88명 그리고 백성 1만2천8백7명을 당나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백제의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 호(戶)를 나누고 웅진(熊津), 마한,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개 도독부(都督府)를 두어
각각의 주(州)와 현(縣)을 통치하고 백제인으로 당나라에 귀순한 자를 뽑아 도독(都督)자사(刺史) 현령(縣令)으로 임명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이후에 1도독부, 7주(州), 51현(縣)으로 개정하여 도독부를 웅진에 두고 전국을 통치함과 동시에 부와 주에는 현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인은 일본의 원조 아래 병사를 일으켜 국가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므로 당은 이의 진압에 고심하였다.
용삭(龍朔)3년에는 이전 백제의 대자(大子) 부여융(夫餘隆)도 웅진부에 파견되어 진압에 종사했다.
그해 겨울 백제는 모두 평정되었는데 이것은 신라군에 의한 평정이었다.
따라서 그 군대가 점령하는 땅은 신라의 손에 들어갔다.
이때 당나라는 백제의 통치가 매우 곤란함을 깨닫고 종래의 정책을 일변했다.
이 해 4월 당나라는 신라국을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칭하며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하여 표면상으로는 이를 백제의 옛 땅에 두고 웅진도독부와 병행했다.
당은 문무왕과 부여융을 회합하게 하여 신라와 백제의 옛 감정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임존성(任存城)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는 아직 평정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회합을 거부하고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먼저 중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얼마후 임존이 평정되고 11월에 이르자 당은 웅진도독을 폐지하고 유인궤(劉仁軌)를 도독부의 유수(留守)로 임명하여 유인원(劉仁願)을 소환했다.
이때 부여융도 당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인덕(麟德) 원년(문무왕 4년) 2월, 당은 유인원(劉仁願)을 유인궤에 대신하여 웅진도독부의 유수로 임명하고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하여 함께 웅진에 파견했다.
이때 부여의 풍(豊)은 고구려에 있었고 동생 부여 용(勇)은 일본에 있었다.
당은 고구려가 일본의 원조를 얻어 풍을 백제로 불러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융을 파견한 것이다.
따라서 부여 융은 단순한 도독이 아니라 백제의 제사 등을 지키고 그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인궤가 제왕에게 유진(留鎭)할 것을 간청하여 대방(帶方, 남경(南京))에 주둔했다고 전하는 것이 이때인가?).
이는 실로 웅진도독부와 도독의 이름으로 백제국을 부흥시킨 것으로써 당은 백제를 멸망시켰던 때의 정책을 완전히
바꾼 것이 된다.
당은 신라에게 엄격한 칙서를 내리고 작년에 서약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자 신라는 칙서 위반을 피하기 위해 2월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 이찬(伊飡) 천재(天在)를 파견하여 칙사 유인원 앞에서 부여 융과 웅진에서 동맹하였다. 그
러나 신라왕이 동맹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당은 다시 칙서를 내려 신라왕과 부여 융에게 신라와 백제가 오랜 기간 동안에 가졌던 숙적(宿敵)의 감정을 풀고 화친을 맺을 것을 서약, 맹세하게하였다.
신라왕도 웅진도독부에 가서 인덕(麟德) 2년 2월 웅진성에서 만나 백마(白馬)를 처형시키는 등 장엄한 의식 아래 동맹을 맺었다.
그렇지만 구백제 땅은 이미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고 도독부의 소유 영토는 구백제(舊百濟) 땅 전체가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유인원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 곽무종(郭務悰)을 일본 조정에 파견하여 편지와 헌물(獻物)을 진상하는데, 이해 재차 상주국(上柱國) 유고덕(劉高德) 등을 파견하였다.
일본 조정은 12월 수군대석(守君大石), 경부연석적(境部連石積)을 당의 유고덕이 귀국할 때 당에 파견하였는데, 유인궤는 이러한 일본으로부터의 사신 및 신라, 백제, 탐라(耽羅) 4개국의 사신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부여 융은 웅진도독으로, 유인원은 진장(鎭將)으로서 부에 머물렀는데 유인원은 일본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건봉(乾封) 2년(텐지천황(天智天皇) 6년, 문무왕 7년)에 전년 일본에서 온 사신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부의
웅산(熊山) 현령(縣令), 사마법총(司馬法總) 등에게 쓰쿠시(筑紫)44)까지 배웅하게 했다.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백제의 멸망 및 남은 무리를 평정한 때에 신라군이 점령하고 있던 땅은 신라 소유의 영토가 되었는데 부여 융이 웅진도독이 되어 사실상 백제가 부흥하자, 이들 백제인은 도독부에 복속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이를 매우 불안하게 느껴 총장(總章) 원년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에 유인원도 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종군하였지만 지체했다는 이유로 요주(姚州)45)에 유배되어 웅진도독부의 책임자가 없는 틈을 타서, 신라는 이 구백제 지방의
동요를 구실로 삼아 웅진도독부 땅을 침탈(侵奪)했다.
도독 부여 융이 당에 환송된 것은 이때이다. 당은 이것을 문제 삼아 신라에게 책임을 물었다.
신라는 다음해 총장(總章) 2년 각간(角干) 흠순(欽純), 파진(波珍), 양도(良圖) 등을 당으로 보내어 사죄하게 하였으나
양도는 감옥에서 죽고, 흠순만이 다음해 함형(咸亨) 원년에 돌아와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당에게 반환하라는 칙서를 전
했다.
6월에 이르러 고구려의 검모잠(劒牟岑)의 거병이 있었다. 왕이 이를 틈타 7월에 여러 장수들을 파견하여 백제 옛 땅의
80개의 성을 빼앗고 그 사람들을 내지로 이주시켜 2000 명을 참수하고(그 중에 당나라 병사는 없었을 것이다) 병사
7,000명을 베었다.
백제 땅을 대부분 병합했다.
이로써 웅진도독부의 남은 땅은 금강(錦江)하류의 약간에 불과했다.
당은 유인원을 용서하고 다시 그 진장(鎭將)으로 기용한 것 같다.
제2절 고구려 유민의 거병(擧兵)과 신라의 고구려 구원 및
소고구려(小高句麗) 왕국 건설
총장(總章) 원년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5부 평양 176개 성(城), 69만 여의 가구를 총괄하여 9도독부 42주 100현을 만들었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 두고 당나라에 귀순한 고구려의 장수 중 유공자를 선발하여 도독, 자사,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44) 현재의 후쿠오카현(福岡県)의 서부와 남부.
45) 중국의 장강성.
당나라 사람도 통치에 참여하여 대장군 설인귀(薛仁貴)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에 임명하고 2만의 병사를 주어 이를 진무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전부 평정하지는 못했다.
다음해 2년 2월에는 압록강 북쪽의 32개 성(城) 중 항복하지 않은 성이 11개였다고 한다.
신라는 당나라 병사를 끌어들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 땅을 전부 차지하고자 하였으므로 백제 땅에게 한 것처럼 고구려 땅에게도 당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당나라가 두 나라를 멸망시킬 때 신라는 당나라 병사에게 많은 의복 등 군수(軍需)를 공급하였고 국가의 전병력을 동원하여 당나라 군대에 참가했지만 이 시기에는 당나라 장수가 신라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
또한 신라로서는 당 소유지 땅과 근접해 장래에 큰 위험에 처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당나라의 총애를 받는 백제인에 의한 웅진도독부 성립과 같은 것은 신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신라는 영지(領地)의 획득을 원해 기회만오면 이를 놓치지 않았으므로, 당나라도 또한 청병 전의 신라와 그 태도가 다름을 알고 경계하게 되었다.
고구려멸망 후 이 방면에서도 얼마 안 있어 당과 신라와는 충돌하게 되지만, 신라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먼저 당나라
세력을 제거할 수단으로 당나라를 배신한 유민들에게 접촉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토지가 광대할 뿐 만 아니라 백성과 풍속이 숙신(肅愼), 선비(鮮卑),말갈(靺鞨)과 섞여 종족이 다르므로 자국이 전부 이 영토를 소유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자명하다.
신라는 자신들의 영토로서는 한족(韓族)에 혼화(混化)하여 한족의 피가 많이 섞인 남쪽을 획득함으로써 만족하려 하였다.
그러나 북방에서도 자국과 화친한 많은 고구려인의 소국(小國)들이 존립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불과 1년을 넘긴 함형(咸亨) 원년(문무왕 10년)에 신라는 이 지역에서 당에게 배신하는 행동을 취해 3월 신라의 사찬(沙飡) 설오유(薛烏儒)는 고구려 유장 태대형 연무(太大兄延武)와 정예병사 2 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 병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6월에 고구려인 검모잠이라는 자가 부흥을 꾀해 병사를 일으켜 궁모성(窮牟城, 알려지지 않음)에서 패강(浿江) 남쪽(대동강)에 이르는 당나라 관청 사람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당나라 병사의 토벌을 받아 신라로 숨어들어가려고 서해 사치도(史治島, 지금의 인천, 사세도(史世島))에 이르렀다.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 전해에 신라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당에 사신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의 아들 안승(安勝)을 보고 그를 맞이하여 한성(漢城, 당시 신라 영토)에
이르러 받들어 군(君)으로 모셨다.
소형(小兄) 다무(多武) 등을 신라에 파견하여 번병(藩屛)으로 삼는다면 영원히 충성하겠노라고 했다.
왕은 이들을 구백제 땅인 금마저(金馬渚) 익산에 두고 8월 1일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여 유민을 달래게 하였다(안승(安勝)에 대해서는 당나라와 신라가 전하는 내용이 다르다.
여기서는 신라의 전승을 취했다). 왕이 안승으로 하여금 구백제의 중앙의 좋은 땅에 소고구려를 세운 것은 웅진도독부의 80개성을 빼앗은 것과 동시적인 것으로 첫째는 고구려인을 회유하는 의미였고 둘째는 백제 유민을 제압할 목적이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도 이 나라 이름을 가지고 신라와 함께 일본에 교통한 것은 소고구려였다.
제3절 신라와 당의 전쟁
앞 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라는 당에서 이반하여 문무왕 11년(함형 2년) 정월에는 병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쪽을 점령했는데 당나라 병사가 와서 백제를 구원한다는 소문을 듣고 대아찬진공(大阿飡眞功) 등으로 하여금
옹포(甕浦, 확인되지 않음)를 수호하게 하고, 6월에는 장군 죽지(竹旨)를 파견하여 백제의 가림성(加林城, 임천(林川))을 지나 마침내 당나라 병사와 석성(石城, 지금의 석성)에서 싸워 머리 5,300두(頭)를 자르고 백제 장수 2명, 당나라 과의(果毅) 6명을 잡았다.
여기서 당의 계림도총관(鷄林道總管, 평양에 있었는지 아니면 신성(新城)에 있었는지?) 설인귀는 7월 26일 임윤법사(琳潤法師)에게 글을 보내어 문무왕을 책문했는데 왕은 답서에서 정관(貞觀) 22년 태종(太宗) 황제가 김춘추(무열왕)에게,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땅은 신라에게 주겠다는 칙서가 있다고 말하고, 두 나라를 평정할 때 신라의 공적을 말하며 사정을 진술했다.
그렇지만 신라는 점점 더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그 달에 소부리주(所夫里州: 부여)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정했다.
당시 고구려의 난리는 매우 심각했는데 이때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은 고구려의 남은 민중을 안시성에서 무찌르고 9월 병사 4 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이동했다.
10월 6일 신라는 당나라 배 70여 척을 침몰시켰다.
문무왕 12년(함형 3년) 정월 장수를 파견하여 백제의 고성성(古省城)(부여 북쪽의 금강의 고성진변(古省津邊)에 있다고 봄)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2월에 가림성(加林城)을 공격했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 이근행(李謹行)의 병사와 한번(漢藩)을 합쳐 4만이 한 번에 평양에 도착하여 주둔했다.
8월 당나라 병사는 한시성(韓始城),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병사를 백수산(白水山)아래에 진격시켜
신라, 고구려 병사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여 석문(石門, 황주(黃州)와 재령 사이)으로 퇴각하는 등 크게 두 나라의
병사를 격파했다.
문무왕은 이 달(月) 장산성(長山城, 광주 남한산(廣州南漢山))을 축조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9 월에 혜성이 북두칠성
방향에서 나타나는 일이 생겼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의 병선(兵船) 및 포로 군사 170명을 송환하고 표(表)를 올려 사죄하고 조공으로 은 3만3천5
백분, 동(銅) 3만 3천분 그 외에 여러 가지를 진상했다.
문무왕 13년(함형 4년) 당나라 장수 이근행, 고구려의 여상(餘象)을 호로하(瓠瀘河)서쪽(임진강의 적성(積城) 북변)에서 격파하고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9월 당나라 군사들이 말갈, 거란 병과 함께 신라를 침공하지만 신라군은 이에 응전하여 크게 승리하고 당나라 병사의
호로(瓠瀘)·왕봉(王逢, 한강의 고양, 양천 사이)의 두 강에 빠져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왕14년(상원(上元)원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왕이 고구려의 반란의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자 크게 노하고, 마침내 대토벌을 결심하였다.
이때 당나라에서 숙위(宿衛)하던 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督督)으로 책봉하고 유인궤를 대총관으로, 이필,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하여 병사를 일으켜 신라를 정벌했다.
다음해 15년(상원 2년) 2월 유인궤는 신라군을 칠중성(七重城, 적성)에서 격파하고 또한 말갈이 해상(海上)에서 신라의 남쪽 국경을 침략했다.
유인궤는 무슨 연유인지 병사를 거느리고 돌아갔다.
이근행이 안동 진무대사(鎭撫大使)가 되어 9월 병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 지금의 양주(楊州)에 주둔하고
같은 달에 설인귀가 와서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이득이 없었다.
신라인은 이근행을 공격하여 내쫓고 말 3만 380필을 획득했다.
왕은 안북하(安北河, 안변(安邊)의 남대천(南大川)을 가리키는가)를 따라 관성(關城)을 설치하고 철개성(鐵開城, 안변(安邊) 서남(西南) 철령(鐵岺))을 쌓았지만 말갈은 해상을 이용해 공격하여 아달성(阿達城, 미상, 강원도 고성(高城)인가?)을 약탈하고, 또한 적목성(赤木城: 강원도 회양(淮陽)의 남곡현(嵐谷縣)을 함락시켰는데 당나라 병사, 말갈병사는 신라칠중성을 포위했지만 이득이 없었고 석현성(石峴城: 미상)을 차지했다.
또한 신라병사는 당나라 병사와 약 18번을 싸웠는데 신라가 모두 승리하여 목 6,047수를 베었고, 말 200필을 획득했다.
이 기간 동안에 신라왕은 계속해서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사죄하고 동시에 물건들을 헌상하자 고종제(高宗帝)는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官爵)을 복귀시켰다.
김인문(金仁問)은 신라에 오지 못하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당나라 고종제 당시의 당나라의 군사력은 무덕(武德)과 정관(貞觀)46)시기의 옛 장수들이 있어 그 위력이 약간 남아있을 뿐 ‘오늘날의 관부(官府)는 옛날과 같지 않다.
사람들 마음 또한 다르다.
46) 무덕은 당고조, 정관은 당태종 당시의 연호이다.
과거에는 사람을 모집하면 다투어 정행(征行)하고자 하고 관물을 쓰지 않고 스스로가 의복과 식량을 변통하여 의로운 정벌(義征)에 몸을 바쳤는데, 지금은 주현(州縣)의 병사를 파견하여 사람을 모으면 몸이 건장하더라도 집에 돈이 있고 관부(官府)에 들어간 자는 동서(東西)로 숨고 피하며 탈출하려 한다.
돈이 없는 자는 늙고 약한 자라도 허리를 펴고 바로 온다’(유인궤의 상표(上表))라는 양상으로 고종의 시대는 저물어가는 해와 다를 바 없다.
군대는 이미 약해지고 절제가 없었으며 더욱이 정치방침을 여러 번 변경하였다.
무력을 사용해도 덕이 되지 못했고 덕을 베풀어도 위엄을 세우지 못했다.
마침내 신라의 손에 놀아나게 된다.
의봉(儀鳳) 원년(문무왕 16년) 2월에 이르러 당은 마침내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고성(故城)으로 옮겼다.
그전에 당나라 사람으로 안동의 관직에 임명된 자는 모두 파직했다.
웅진도독부를 건안(建安)고성(故城, 요동 지방 지금의 해성부근)에 옮겼다.
그리고 백제인의 가구(戶口)로서 앞서 서연주(徐兗州)에 이주시켰던 사람들을 다시 이주시켜 건안으로 옮겼다.
이해 7월 당나라 병사가 도림성(道臨城, 강남도 통주(江南道通州)의 남쪽 30한리(韓里))를 공격하여 이를 빼앗았다.
하지만 11월 신라의 해군은 설인귀와 소부리주(所夫里州)의 기벌포(伎伐浦)에서 22번이나 싸웠는데 크게 승리하였다. 다음해 의봉 2년(문무왕 17년) 당나라는 전 고구려왕 고장(高藏, 당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요동주(遼東州)도독으로 정하고 조선왕에 봉해 요동으로 돌아가 고려의 민중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여러 주(州)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인들을 모두 고장과 함께 돌려보냈다.
이전 백제의 태자(太子)이며 후에 웅진도독이었던 사농경(司農卿)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대방왕(帶方王)에게
봉해 돌려보내 백제의 남은 민중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즉 안동도호부를 요동 고성에서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이를 통치하지만 백제가 황폐하였으므로 융(隆)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와의 경계지역에 기거(寓居)하게 했다.
고장은 요동에 도착하였는데 4년 후 모반을 꾀하여 말갈과 밀통하였으므로 당나라는 그를 소환하여 공주(卭州)로 옮기고 사람들을 하남농(河南隴)의 오른쪽 여러 주(州)에 분산하여 이주시키고 가난한 자는 안동성 근처에 머물게 했다.
고구려의 땅 남쪽의 일부는 신라 손에 들어가고 남은 민중들은 흩어져서 말갈이나 돌궐로 들어갔다.
그 땅은 마침내 말갈이 일으킨 발해의 소유가 되었다.
부여 융 또한 옛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백제 땅은 그 사람들과 함께 신라로 편입되었다.
다음해 의봉3년(문무왕 18년) 9월 당나라 고종제는 병사를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시중(侍中) 장문관(張文瓘)이 간청하기를 이제 토번(土蕃)이 노략질을 하니 군사를 내어 서쪽의 토벌을 정벌하십시오.
신라는 복종하지 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당나라의 국경을 침범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 동쪽을 토벌하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폐단이 클 것입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즉시 이를 그만두고 신라의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문무왕17년 이후 당나라 병사는 반도(半島)에 나타나지 않았다.
문무왕19년 탐라(耽羅)를 공략하고 문무왕20년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에게 왕의 여동생을 시집보냈다.
21년 사찬 무선(沙飡 武仙)에게 정예병사 3천을 주어 비열홀(比列忽: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安邊))에 위수(衛戍)하도록 했다.
신라 영토의 동북 끝은 천정군(泉井郡, 지금의 원산에 있는 북덕원(北德源)에 이르렀다.
이해 문무왕이 훙거(薨去)하여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했다.
당나라 고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책립하고 신라왕으로 삼았다.
이때 신라의 영토는 서조선(西朝鮮)쪽으로는 대동강을 경계로 하고 지금의 황해도 이남, 동조선(東朝鮮)은 앞에서 기술한 천정군(泉井郡)을 북쪽 끝으로 하였으며, 남쪽은 탐라를 예속시켰다. 영토는 이때에 정해졌다.
제2장 신라의 번성기
제1절 신라의 내치(內治)
신라인은 무열왕 때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무열왕계의 8대 127년간을 중대(中代)라 부르고 이를 신라의 번성시기로
본다.
단 반도 통일 사업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대에 그 대략적인 것을 이루었고 문무왕시기에 영토의 확장을 성취하여 그 사업을 완성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당나라 병사를 불러들여 적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당나라의 손에 의해 이를 침탈한 것은 수단 상으로 보면 매우 비루한 방법이다.
신라가 반도를 통일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민족을 통일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고구려까지 통일했다고 하는 것은 오류(誤謬)이다.
무열왕과 문무왕 두 왕대(王代)는 군사에 관한 일이 많았지만 신문왕 때에는 매우 태평한 시대였다.
문무왕이 훙거(薨去)하자 신문왕에 대해 귀족들 사이에 음모가 있었지만 왕은 이들을 벌주기보다는 열심히 내치에 힘을 쏟았다.
신문왕 2년 국학을 세우고 경(卿) 1명을 두었다.
신라에서 사람을 채용하는 법에는 단지 화랑 선별 방법만 있었고 학교제도는 없었다.
이시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국학을 세웠다. 문무왕 3년 금마저(金馬渚)에 고구려 왕국을 세워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蘇判)이라하고 김씨 성을 주어 왕도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좋은 집과 양전(良田)을 제공하였는데 다음해 안승의 조카 대문(大文)이 금마저에서 모반을 꾀하였으므로 그를
주살하였다.
남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관리를 살해하고 읍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들을 토멸하고 그 사람들을 나라 남쪽의 주·군으로 이주시키고 그 땅은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5년 지방을 나누어 9주를 이루는 제도를 완비하고 5경을 두었다. 6년 주와 군을 백제의 옛 땅에 두고 7 년 문무관에게 전답을 제공하되 차등을 두었다. 이것이 직전(職田)의 시작이다.
9년에 왕은 왕도를 달구벌(達句伐, 대구)에 옮기려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신라는 개국 시작부터 수도를 옮기지 않은 격이 된 것이다.
왕은 또한 당나라를 공경하여 그 감정을 융화하였으며 재위 12년에 훙거했다.
아들 효소왕(孝昭王)47) 이홍(理洪)이 왕위에 즉위했다.
효소왕 재위 11년 임인(壬寅)가을 7월에 훙거하여(속일본기에 이듬해 계묘(癸卯)윤4월 고상사(告喪使)가 표를 올려 말하기를 군왕이 지난 가을부터 아프다가 올 봄에 훙거했다.
동국통감 또한 계묘(癸卯)윤4월 훙거를 적은 일이 있었다) 동생 성덕왕 흥광(興光)이 즉위하고 왕20년 하슬라도(何瑟羅道, 강릉)의 장정 2천명을 징발하여 북방 경계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다음해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인이 올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경주, 울산 간의 관문성(關門城)이 이것이다. 왕 재위 36년에 훙거하고 아들 효성왕(孝成王) 승경(承慶)이 제위한다.
재위 6년에 훙거하고 동생 경덕왕 헌영(憲英, 속일본기에는 헌영(軒英)이라고 적었다) 이 즉위한다.
왕 18년 내외 군관(群官)의 급료를 없애고 다시 녹읍(祿邑)을 지급했다.
그리고 주군현(州郡縣)의 명칭을 당나라 풍으로 바꾸었다.
16년에는 관칭(官稱)을 바꾸고 21년에는 오곡(五谷, 서흥(瑞興)), 휴암(鵂巖, 봉산(鳳山)),한성, 장새(獐塞), 지성(池城), 덕곡(德谷) 등의 6개성을 쌓아 각 성에 태수(太守)를 두어 북방을 지키게 했다.
재위 24년에 훙거하고,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즉위했다.
이상의 여러 대(代)의 신라는 태평했으며, 당나라를 종주국으로 대하고 조공과 하정사(賀正使)가 끊임이 없었다.
당나라 문화는 신라에 수입되었고 불교가 유행하여 지위를 불문하고 상하(上下)의 존숭을 받았다.
공예도 우수함의 극치를 얻었고, 국가의 수도인 계림(鷄林)은 일본의 나라(奈良), 발해(渤海)의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와 서로 대등하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문화적인 하나의 식민지였다.
혜공왕은 불과 8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 김씨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을 하였는데 이때부터 진골(眞骨)
간에 권력의 투쟁이 일어나 결국, 왕도에 병란(兵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혜공왕 4년에는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과 그의 동생 아찬(阿飡) 대렴(大廉) 등이 모반을 일으켜 민중을 규합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으나 왕군(王軍)이 이를 평정하고 구족(九族)을 멸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안국병법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대공(大恭) 각간(角干)의 무리가 일어나 왕도와 5도(道), 주(州), 군(郡)에 걸쳐 96각간이 서로 싸우는 큰 난(亂)이 있었다.
대공각간의 집안은 멸망하고, 집안의 자산 및 보물들은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큰 창고가 불타고 역당들의 보물과 곡식으로 모량리(牟梁里)에 있던 것들은 왕궁으로 옮겨졌다.
난은 석달만에 그쳤는데 상을 받은 자도 많았으나 참살당한 자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6년 정월에 왕이 서원경(西原京, 청주(淸州)에 행차하면서 통과하는 주현(州縣)의 죄수를 석방해주고 4월에는 왕도로
돌아왔다.
47) 원문에는 효조왕(孝照王), 오기로 보아 수정하였다.
무슨 일로 순행을 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8월에 화아찬(火阿飡) 김융(金融)이 반란을 꾀했으나 주살되었고, 또한 신라의 대공신(大功臣) 김유신의 자손도 죄 없이 주살되었다.
이러한 국난때문에 일본에 귀화하는 자들이 많았다.
11년에는 이찬(伊飡) 김은거(金隱居), 이찬 염상(廉相) 시중(侍中) 정문(正門)도 모반에 가담했다고 하여 주살되었다.
이때에 기강이 흐트러지고 반역이 뒤를 잊자 민심이 흔들렸다.
16년 2월에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모반을 일으켜 민중을 규합하여 궁궐을 포위했다.
4월 상대등(上大等) 김량상(金良相), 김경신(金敬信)과 공모하여 병사를 일으켜 지정(志貞) 등을 주살하고 마침내 왕을 시해하고 양상(良相)이 즉위했다.
무열왕 김춘추의 계통의 왕은 여기서 끊기게 되었다.
신라의 중대(中代)에는 많은 유명한 신하들이 나왔다.
가장 유명한 공훈을 세운 자는 김유신(金庾信)이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임나)의 왕 구형( 衡)의 증손으로 조부(祖父)는 백제의 성명왕을(聖明王)을 격파한 신주(新州)의
군주(軍主)인 무력(武力)이다.
아버지 서현(舒玄)이 갈문왕(葛文王, 신라의 왕 또는 왕비 등의 생부(生父)를 이르는 존칭) 입종(立宗)의 손녀와 결혼하여 진평왕 17년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은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칭호를 받고 왕족 김춘추와 서로 그림자 같은 사이가 되어 마음을 하나로 모아 백제, 고구려의 강적과 싸워 일찍부터 이름을 알렸다.
선덕, 진덕왕의 신라 등 매우 다난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알천(閼川), 임종(林宗), 무림(武林), 염공(廉公) 등과 나란히
중신(重臣)이 되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文姬)는 김춘추에게 시집을 갔는데 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왕녀(王女) 지소(智炤)48)를 유신에게 결혼시켰다.
무열, 문무 두 왕의 사업은 실로 유신의 무공에 의한 것이 많았다.
백제를 평정하고 유신은 매우 큰 지위를 얻었다.
대각간(大角干)의 지위에 오르고 고구려를 평정하면서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다.
당나라 또한 그를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으로 책봉했다. 문무왕 13년 7월에 훙거했다.
향년 79세로 그의 아우 흠순(欽純)이다. 이 또한 무공(武功)이 있었다.
48) 원문에 지조(智照), 오기로 보아 수정하였다.
제2절 일본과의 관계
일본과 신라는 백제문제 때문에 반도에서 전쟁을 치르고 적국이 되었다.
양국의 교통도 중단되는데 백제가 완전히 망하자 일본은 외교 정책 방침을 완전히 바꾸어 반도에 대한 뜻을 접었다.
신라가 당과 분쟁을 일으켰을 때 일본과 분쟁의 발단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교통에 있어서 형식상으로 기존의 반속국(半屬國)의 예를 쫒아 평화를 희망하였으므로 일본과 신라 사이에 평화를 회복하여 사절들이 왕래하게 되었다.
덴지천황(天智天皇) 7년(문무왕 8년) 신라는 사신 사찬(沙飡) 김동암(金東巖)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중신인 가마타리(鎌足)는 동암(東巖)등을 통해 말하기를 김유신에게 배 한척을 보냈다.
또한 신라왕에게 일본에 조공을 운반할 배 한척을 보냈다.
천황은 또한 신라왕에게 면직 등을 하사하는데 동암이 돌아갈 때에 다시 일본에서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것으로써 교통이 회복되고 보덕왕 안승의 고구려도 신라의 감독 하에 고려의 이름으로 매년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덴지천황이 붕어(崩御)하고 덴무천황(天武天皇)이 즉위하자마자 신라는 앞 천황의 조상사(弔喪使)와 신천황의 하등극사(賀騰極使)를 파견하였다.
덴무천황 4년(문무왕 16년) 신라왕자 충원(忠元)과 급찬(級飡) 김비소(金比蘇) 등은 조공을 바치는 사절로 일본에 왔고 이어서 급찬 박근수(朴勤修) 등도 왔지만 이때 매년 조공사절단의 조정 출입에 비해 일본으로부터의 사절단이 파견된 것은 적었다.
지토천황(持統天皇) 원년 다나카(田中)의 신하 법마려(法麻呂)를 파견하여 덴무천황의 상(喪)을 알렸는데 마침 신라의 왕자 김상림(金霜林)등이 주청국정사(奏請國政史) 및 헌조부사(獻調賦使)로 일본으로 건너와 치쿠시(築柴)에 이르러
이를 듣고 상복을 입고 동쪽을 향해 삼배를 하고 세 번 곡하고 치쿠시로부터 돌아갔다.
우리의 상을 알리는 사신 다나카의 신하가 신라에 도착하자 신라는 전례에 의해 소판(蘇判)이 칙서를 받으려 하였는데 다나카 사신은 부고(訃告)의 조서를 받으려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천황 3년 정월에 돌아왔다.
5월에 신라의 조사(弔使) 급찬 김도나(金道那)등이 내조(來朝)하였다.
조정(朝廷)은 즉시 태정관(太政官)의 경(卿) 등의 봉칙(奉勅)을 토사(土師)로 하여금 봉선(奉宣)케하여 말하기를, 만약 전례를 말한다면 고토쿠천황의 붕어(崩御)한 후 상(喪)을 알렸을 때 예손(翳飡, 제2위(位)) 김춘추가 봉칙했다.
그런데 이번의 봉칙에 소판(蘇判)이 나오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텐지천황의 봉조사(奉弔使)에는 일길찬(一吉飡) 제7위의 김륭유(金蕯儒)를 파견하였는데 이번에는 급찬(級飡, 제9위) 사람을 보낸 것은 또한 이전에 없는 일이다.
또한 신라의 주문(奏文)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먼 황조(皇朝) 대부터 봉사의 나라였다”라고 적고 있으니 이제 배 1척을 보낸 것은 또한 옛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주문(奏文)에 ‘일본의 먼 황조 대부터 봉사함’이라고 하였음에도 충(忠)을 다하여 본직(本職)을 널리 알렸던 것을 추론하면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기만과 아첨을 능사로 하는고로 조부(調賦)와 별헌(別献)에 대해서도 이를 돌려보낼 것이지만, 우리나라가 멀리 황조(皇朝) 대부터 너희들에게 널리 자비를 베푼 덕은 끊을 수 없으니, 조신하고 조신하여
그 직분을 익혀 법도를 봉준(奉遵)하면 천조(天朝)가 다시 더욱 자비를 베풀 것이다.
너희들 도나(道那)등은 이 칙서를 받고 너희 왕에게 봉선(奉宣)49)해라’라고 도나(道那)등에게 물품을 하사하고 치쿠시(築柴)에서 더 이상 오지 못하게 하고 귀환시켰다.
천황 6년 급찬(級飡) 박억덕(朴億德) 등이 조공사신으로 왔으며 다음해 7년 2월 사찬(沙飡) 김강남(金江南) 등을 파견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의 상(喪)을 알렸으므로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왕에게 부의(賻儀) 물품을 하사했다.
그리고 조공사는 매년 오지는 않았으나 누누히 왔는데 몬무천황 대보(大寶) 3년 윤사월 신라국 사신 융찬(隆飡) 김복
호(金福護)가 와서 효소왕(孝昭王)의 상(喪)을 전하자 천황칙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국 사신 융찬(隆飡) 김복호가 표(表)에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불행하게도 작년 가을부터 병에 걸려 올 봄에 훙거하여 영원히 성조(聖朝)와 이별하였다고 하니 짐(朕)이 생각하기에는 이 번군(蕃君)은 타지에 있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자식과 동일하다 수명이 다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지만, 이 말을 듣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사신을 보내어 조의를 표한다.
이 복호 등은 멀리 바다를 건너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으니 짐(朕)이 그 고생을 긍휼히 여겨 비단을 하사한다.
즉시 조신 히로아시(広足)를 신라에 파견하였다.
이 이외에도 신라로부터 조공사신이 온 기록은 많이 있고 일본에서 사신을 파견한 것도 있기는 있지만, 번잡한 것을
피하고 개략적으로 보아 한두 가지를 들어 이야기하기로 하자,
천황 경운(慶雲) 3년(聖德王 5년)신라의 조공사절 일길찬(一吉飡) 김유길(金儒吉)이 돌아갈 때 신라왕에게 보낸 칙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황은 신라왕에게 공손히 묻는다. 사신 일길찬 김유길, 융찬 김금고(金今古) 등이 도착하여 조공물을 가져왔다.
신라의 왕이 되어 돌아가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조공이 없었다.
이번 것은 매우 성의가 있었다. 매우 기뻤다.
봄이기는 하지만 매우 쌀쌀한 날씨이다. 건강하게 지내시고 국경도 평안하길 바란다.
사신들이 이제 돌아가니 나의 뜻을 전하고 아울러 토산품을 보낸다.
이때 신라에 파견한 사신 종5위 하미노연정(下美努連淨) 마려(麻呂)가 지참한 칙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황이 신라왕에게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는 많은 생각을 한다.
바라보면 국경의 민중들을 잘 다스리고 있다. 그것은 훌륭한 일이다. 오래동안 조공의 예를 갖추어 견고한 두 나라 사이가 되었다. 국내가 평안해지고 여러 가지 풍속도 잘 갖추어지고 있다. 추운날씨이지만 잘 지내길 빈다.
49) 천자나 신의 의향을 전하다.
우리 덴무(天武), 지토(持統), 몬무(文武)의 3 천황이 신라에 대해서는 문무(文武) 신문(神文), 효소(孝昭), 성덕(聖德,
전반)의 네 왕 시기의 가장 태평한 40년간 두 나라 사이의 빈번한 왕래에 대해 이처럼 우리나라 국사(國史) 기사에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는 이들 사건을 생략하고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
겨우 효소왕 7년(몬무천황 2년)의 조항에 ‘3월 일본의 사신이 도착하여 왕이 숭례전에서 인견했다’고 적고 있고, 성덕왕 2년(몬무천황 문보 3년) 조에 ‘일본국 사신이 도착하였는데 총 204명이다’라고만 적고 있다.
전자는 오히려 '속일본기(續日本記)'에도 아무런 기록은 없고 매우 의심스럽지만, 전년도 10월 말에 일본에 왔던 신라
사신 일길찬 김필덕(金弼德)이 이 해 2월 3일 귀국의 길에 오른 것을 치쿠시(筑紫)의 다자이후(太宰府)에서 환송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후자는 앞에서 기록한 신라 효소왕의 조문 사신으로 일본에서 파견된 일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과의 교통은 성덕왕대에 이르러 이전 시대에 비해 약간 소원해졌다.
겐메이(元明)천황 화동(和銅) 2년(성덕왕 8년) 신라의 사신이 내조하자 대신 후지하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가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맺을 속셈으로 일본의 집정대신이 신라국의 사신과 이야기를 나눈 전례없음을 깨고, 특히 사신을 관청에서 인견(引見)하여 사신이 기뻐하였는데 이때부터는 고상(告喪)의 일도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신라는 경계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음에도 왕21년(겐쇼 천황 양노(養老) 6년)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왕대에는 이찬 김순정(金順貞)이 양국의 교통에 대해 공로가 많았는데 쇼무천황 신귀(神龜) 3년(성덕왕 25년) 신라의 사신 융찬 김호근(金浩近)이 순정이 작년 6월 죽었다고 전하자 천황은 ‘칙서로 이찬 김순정은
신라를 편안하게 하고 우히 조정에 충성을 한 현신(賢臣)이다.
나라를 지켜 짐의 고굉(股肱)이 되었는데 이제 사망하였으니 내가 길사(吉士)를 죽였도다’라며 국서와 부의 물건을 하사했다.(혜공 말년 일본에 온 신라의 조공 사신은 당시 김순정의 손자 옹(邕)이 그를 이어 정사를 담당했다고 고했는데
순정과 옹의 일은 삼국사기에 전한다)
신구3년 사신이 온 이후 천평(天平) 4년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교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일이 없었고, 천평 4년(성덕왕 31년) 일본으로부터 종5위의 조정신하 이에누시(家主)를 신라에 파견함과 동시에 신라의 사신 한나마(韓奈麻), 김장손(金長孫) 등 40명이 와서 내조(來朝)의 연차를 주청하자 천황은 이를 허락하며, 3년에 한번 실시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 다다음해 천평 6년 12월 신라의 조공 사신인 급대찬 김상정(金相貞)이 다자이후에 도착하고 다음해 정월에 입경(入京)하였는데 신라가 왕성국(王城國)이라 칭하였으므로 함부로 국호를 고쳤다고 하여 그 사신을 돌려보내었다.
다음해 8년 2월 종5위하(下)아배(阿倍) 조정신하 계마로를 사신으로 신라에 파견하지만 다음해 9년 그 일행은 쓰시
마에서 아배(阿倍) 조신은 병으로 사망했다.
신라가 상례(常禮)에 어긋나게 사신들의 뜻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사신들의 뜻은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신라가 상례를 잃은 것을 힐책한 것 같다.
여기에서 조정은 5위 이상 6위 이하의 관인(官人)으로 45인을 다이리(内裏, 천황이 머무는 곳)에 불러 의견을 들었는데 군사를 일으켜 정벌을 하자는 설도 있었고 여러 신사(神社)에 사람을 파견하여 신라의 무례를 고하자는 등 자못 격론이 있었다.
다음해(효성왕 2년) 정월 신라의 사신 급찬 김상순 등 140명이 일본에 도착했지만 입경을 허락하지 않고, 다자이후에서 신라로 돌아가도록 했다.
1년이 지나자 천평(天平) 12년에 일본은 종위(從位) 하급의 기조신필등(紀朝臣必登)을 신라에 파견하였지만 같은 해 14년 신라의 사신 사찬 김흠영(金欽英) 등 187명이 일본에 왔다.
그런데 당시의 이니(恭仁)의 새로운 수도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다시 다자이후에서 신라로 돌려보냈다.
삼국사기에 이 해의 기록에 ‘일본국의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다음해 15년(경덕왕2년) 신라는 융찬 김서정(金序貞)을 파견하였는데 구례에 어긋나게 조(調)를 토모(土毛)라고 칭했으므로 이를 돌려보냈다.
이후 신라와의 교통의 단절하게 되고 8년이 지났는데 고켄천황(孝謙天皇)의 천평승보4년(경덕왕 11년) 정월 정7위(正7位) 산구기촌인(山口忌寸人) 마로(麻呂)를 신라에 파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힐문의 사절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3월 신라는 왕자 한아찬(韓阿飡) 김태렴(金泰廉), 조공 사신 김훤(金暄) 및 송왕자 사신 김필언(金弼言) 등 700명을 배 7척과 함께 일본에 파견했다.
6월 김태렴 등은 조정을 알현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말했다.
신라국왕은 일본의 조임천황(照臨天皇)의 조정에 말한다.
신라국은 옛 선조에서부터 끊임없이 배를 타고 와서 국가에 봉사하였다.
이제 국왕이 몸소 와서 조공을 바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만약에라도 주군이 하루라도 없으면 국정이 혼란스러워진다.
그리하여 왕자 한아찬 태렴을 파견하여 왕 대신에 대표로 하여 사신 아래 370여 명을 데리고 입조하여 여러 종류의
조공을 바칩니다.
천황은 신라의 사신을 조정의 향연회에 불러 말했다.
신라국이 와주어서 조정에 예를 갖추는 것은 기장족원(氣長足媛) 황태후(진구 황후)가 그 나라를 평정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하나의 번(蕃)의 병인데도 이전의 왕 승경(承慶, 효성왕)은 대부사공(大夫思恭) 각간사공(角干思恭) 등의 언행이 태만하고 예를 잃었었다. 따라서 사신을 파견하여 죄를 물으려 하였으나 이번에 그들의 왕 헌영(軒英)(경덕왕 휘 헌영(憲英))이 이전의 과실을 참회하고 몸소 조정에 오기를 바라지만 국정을 돌보기 위해 비울 수 없어 왕자 태렴 등을 파견하여 입조하여 조공을 바친다고 하니 짐이 기뻐하는 바이며 물품을 하사한다.
그리고 칙서를 내렸다.
오늘 이후 국왕 스스로가 온다면 주문(奏文)으로 하되, 다른 사람을 보내어 입조시킨다
면 표문(表文)50)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사신 김태렴(金泰廉) 등은 모두 허위의 말로 일시적으로 모면했다.
그렇지만 신라가 특별히 왕자를 파견한 것은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천황은 다음해 2월 종5위하의 오노(小野)조신 전수(田守)를 사신으로 하여 신라에 파견했다.
이렇게 기만을 당한 일본의 사신은 신라에 와서 일이 달라지자 신라가 무례하게 군다며 사신의 일을 하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신라 또한 일본의 사신이 무례하다며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2년 가을 8월 일본국 사신이 거만하고 무례하여 왕은 이를 만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적고 있다.
이후 신라는 조공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고 수년이 지났다.
일본에서는 정벌 준비를 했지만 쥰닌천황(淳仁天皇) 천평보자(寶字) 4년(景德王 19년), 고켄천황 신호경운 3년(神
護景雲, 혜공왕 5년), 고닌천황(光仁天皇) 보귀 5년(혜공왕 10년) 신라는 사신을 보내었지만 표문(表文)이 다르고, 용어의 실태(失態)가 보여 문제를 일으켜 일본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보귀(寶龜) 10년(혜공왕 15년) 겨울 신라의 융찬 김난손(金蘭孫) 급찬 김엄(金嚴) 대판관 한나마(韓奈麻) 융중업(蕯仲業) 등을 파견하였다.
다음해 정월 김난손은 국왕의 말을 아뢰어 “우리 신라는 개국 이래 천황의 은혜에 의해 배에 가득 조공을 가지고 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근대 이래 국내에 간사한 무리가 있어 입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바로 신라 사신에게 지위를 주고 신라왕에게 국서를 하사하고 금후부터는 표문(表文)을 지니지 않은 사신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알렸다.
김엄(金嚴)은 김유신의 후손이었다. 봉사(奉使)의 일본에서의 일은 김유신전(金庾信傳)에서 볼 수 있다.
융중업(蕯仲業)은 설중업(薛仲業)의 오기로 유명한 설총(薛聰, 원효거사(居士)의 아들)의 후손이다.
그 사신역할에 대해서는 서동(誓憧) 화상(和尙)의 비석에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설총전에 ‘일본국의 진인(眞人)이
신라의 사신인 설판관(薛判官)에게 준 시의 서문 운운’이라고 하여 설판관의 이름을 알 수 없는데, 설판관은 설중업(薛仲業)이다.
50) 군주 등에게 상소하는 문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국제교통 이외 상인의 교통은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신라의 악정(惡政)은 바로 일본에도 영향을 주어 혜공왕 시기에는 일본에 귀화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졌다.
일본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백성으로 삼아 경지를 주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표류하며 살 마음이 없는
자들은 본국에 송환해주었다.
신라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신라와 당 관계의 친소(親疎)에 의해 변화되었다.
제3절 당과의 관계
신라는 일본에게는 순종의 예를 암암리에 취했지만 당나라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속국의 예를 갖추었다.
당을 종주국으로 하여 당 황제를 군주로 하여 그의 봉책을 받고 신하로 따랐다.
문무왕이 훙거하여 신문왕이 즉위하자 당은 사신을 파견하여 책립하고 신라왕으로서 앞의 왕들의 관직인 계림주(鷄林州)대도독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개부의(開府儀) 동삼사상주국(同三司上柱國)을 세습하게 하였다.
이후 왕위 즉위 때마다 그 책봉을 받고 신라왕으로 인정받았다.
단 그 관작(官爵)에는 다소 다름이 있었다.
당은 백제, 고구려의 문제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지만 신라는 매우 당을 공손하게 대했고, 그 환심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매년 조공 사신을 보내었다.
당시의 교통로는 남쪽과 북쪽 두 길이었다. 남로(南路)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에서 배를 타고 흑산(黑山),
홍의가도(紅衣佳島)를 지나 대주(臺州),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도달하는 방식이며, 북로(北路)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 혹은 황해에서 덕적도(德積島, 덕물도(德物島)라고도 함)로 나와서 황해도의 서해안을 따라 초도에 도착한다. 다음으로 신미도(身弥島)에 도달하여 요동반도의 남쪽을 따라 여순(旅順)에 도착하여 남쪽의 등주(登州)에 상륙하는
방법이다.
신문왕 6년 당나라에 예기(禮記) 등의 문헌을 부탁하였고 길흉요례(吉凶要禮) 및 문관사림(詞林) 중 그 문리에 정통한 자가 완성한 50권을 얻었다.
왕 12년 당나라의 중종(中宗)황제는 무열왕의 묘호(廟號)를 태종으로 한 것이 참월하다며 고칠 것을 명하였는데
신라왕은 놀라 사죄하였다.
후에 별다른 칙서가 없자 그대로 두고 바꾸지 않았지만 신라는 당에 대해 성의를 다했고, 성덕왕 시대에는 1년에 조공을 두 세 번을 행하였지만 당으로부터 난(亂)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현종황제가 즉위하자 특별한 총애를 받아 12년 왕의 조공 사신이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현종이 직접 누문에 나아가 이들을 맞았다.
왕에게 책봉을 더해 표기장군특진(驃騎將軍特進) 행좌위위(行左威衛) 대장군(大將軍) 사지절대도독(使持節大都督) 계림주제군사(鷄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鷄林州刺史)상주국(上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이라고 칭했다.
다음해 왕은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김인문이 죽고 나자 숙위가 없었는데 이로서 복원되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당의 감정을 융화시켰을 뿐 만 아니라 그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일본에 조공 사신의 파견은 점차 소원해지고 마침내는 전례의 예의가 다르다고 다투어 결국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왕 27년 왕의 동생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어 숙위하게 하였다.
32년에는 숙위 김사란(金思蘭)이 귀국하여 왕에게 발해와 말갈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지만 다음해 숙위 김충신을 김지렴(金志廉)으로 교대했다.
이처럼 매년 하정(賀正)과 조공의 사절을 보내며 공손하게 노력하자 현종황제는 칙서를 내려 “삼한의 선린관계를 가지고 인의로서 이를 대하니 왕이 보내는 사절들에 의해 충의가 드러난다(본문 25쪽의 원문 내용으로 수정할 것)”라고 말하였다.
34년 현종은 칙서를 내려 패강(浿江) 이남의 지역을 신라에게 주었다.
여기에 이르러 백제의 옛땅 및 고구려의 남부지역이 신라의 영토가 됨을 공인하는 것이 되었다.
36년 왕이 훙거하고 효성왕이 즉위하자 현종은 그 훙거소식을 듣고 애도해 하였으며 좌찬선대부 형숙(左贊善大夫刑璹)을 홍려소경(鴻臚少卿)의 직분으로 신라에 파견하여 조문하게 하고 태자대사(太子大使)를 추중하고 효성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으로 봉하였다.
숙이 장차 출발하려 할 때 황제가 시의 서문을 짓자 태자 이하 백관이 이와 화답하여 시를 지어 보냈다.
황제가 숙에게 이르기를 “신라를 일러 군자의 나라라고 하라.
자못 서기를 아는 것이 중국과 비슷하다. 경은 훌륭한 유학자이니 마땅히 경전의 뜻을 잘 전해 대국 유교의 훌륭함을
전하도록 하라” 또한 신라인은 바둑을 좋아한다고 하여 칙서를 내려 참군(參軍) 양이응(楊李膺)을 부장으로 정했다.
여기에 이르러 왕은 숙(璹) 등에게 금은 보화 등을 하사하는데 숙(璹)은 효자, 도덕경 등의 문서를 왕에게 헌상했다.
당은 사신을 보내어 칙서로서 왕비 박씨를 책봉하고 효성왕 4년 사신을 보내 왕부인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왕비 책봉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경덕왕 15년에 당의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 현종황제가 촉(蜀)에 있음을 듣자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강을 건너 성도(成都)에 이르러 조공을 바쳤다.
현종은 즉시 자필로 5언 10운의 시를 지어 왕에게 하사하며 그 충절에 기뻐했다.
이후 혜공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에 봉사(奉事)하여 바뀌지 않았다.
제4절 발해와의 관계
발해국은 고구려인 및 고구려화한 말갈인이 고구려의 옛 땅 및 말갈의 땅에서 건립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고구려의 모습을 한 재부흥국이기도 하며 신라와 남방에서 접촉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발해의 교통에 대한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삼국사기는 원래 간략한 연대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실을 전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일본과의 교통 같은 것도 이 책에는 불과 세 네 개의 지극히 간략한 기사에 불과한 것을 보면, 발해와의 교통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이상하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발해인의 남해부 토호포(南海府吐號浦,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차호(遮湖)인가)에서 배를 출발하여 반도의 동쪽을
따라 남하하여 빈번하게 일본과 교통했다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신라와 교통이 없었을 리가 없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신라 천정군(泉井郡, 함경남도 덕원)에서 발해국 책성부(柵城府)(간도 국자가(局子街) 혹은 용정촌 주변)에 이르는 39역(驛)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교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신라 효소왕(孝昭王) 9년 발해 태조왕 대조영(大祚榮)이 원조를 기대한다는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였는데 왕이 제5품 대아찬(大阿飡)의 품계를 내렸다는 설이 있고 발해 문왕(文王) 흠무(欽茂) 신라(경덕왕·혜공왕) 때 당의 칙사 한조채(韓朝彩)가 발해에서 신라에 들어간 사실로 보아 양국사이에 교통이 있었음은 현저하다.
당나라 개원(開元) 20년 발해 무왕 무예(武藝)가 장수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자, 현종은 병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했다.
다음해에도 유주(幽州)의 병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케 했다.
신라의 입당(入唐) 숙위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어 성덕왕에게 병사를 일으켜 발해를 정벌하라고 했다.
김유신의 손자 대아찬 윤중(允中)과 동생 윤문(允文) 등 사장군(四將軍)은 병사를 데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심하여 남부지방을 공격했는데 때마침 큰 눈이 내리고 산길이 험하여 사망하는 병사들이 과반수를 넘어 아무런 공(功)없이 돌아오게 되었다.
발해의 민중인 말갈이 신라의 변경을 약탈하는 것은 효소왕 시대에 대현살찬(大玄薩飡)의 아들 국선(화랑) 부예랑(夫禮郞)이 납치되었다는 전설로서도 알 수 있다.
제3장 신라 중대의 제도와 문물
제1절 관직제도
신라의 정치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골품제로서 관위관직(官位官職)이 모두 골품에 기초하여 수여되었다.
17등의 관위(官位)제도는 앞대와 다르지 않았고 중앙의 관제는 혼잡하여 그 대소적(大小的) 권한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집사성(執事省) : 본명은 품주(稟主) 혹은 조주(祖主)라고 부른다. 진덕왕 5년 개칭하여 집사부(執事部)라 하였다.
흥덕왕 4년에 집사성으로 개칭하였다.
본관명(本官名)이 없다. 관명이 있는 것은 진흥왕 26년 전대등(典大等)을 두면서부터 시작한다.
신라 본래의 정치 제도이다.
이러한 성(省)의 경(卿)은 사농경(司農卿)이라 칭했던 것 같다.
병부(兵部) : 아마 법흥왕 때에 실시했을 것이다. 병부령은 재상(宰相) 사신(私臣)을 겸할 수 있다.
병마(兵馬) 군정을 장악한다.
조부(調部) : 진평왕(眞平王) 6년에 설치했다. 경덕왕 때 대부(大府)라고 개칭하였으나 혜공왕 때 옛 이름으로 복고되었다. 재화를 장악한다.
창부(倉部) : 옛날에는 창부의 일을 품주(稟主)에서 겸했으나 진덕왕 5년에 분치(分置)하였다.
후대의 호부(戶部)에 해당한다. 상사서(賞賜署), 국학, 음성서(音聲署)가 이에 속한다.
예부(禮部) : 진평왕 8년에 설치했다. 후대의 예부에 해당한다.
예작부(例作府) : 예작전(例作典)이라고도 부른다. 경덕왕이 개칭하여 수례부(脩例府)라 했으나, 혜공왕이 복고시켰다. 후대의 공부(工部)에 해당한다. 그 외에 경성주작전(城周作典, 수성부 : 修城府)이 있었다. 또한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 봉성사성전(奉聖寺成典) 등 임시의 큰 공사에는 설치 관청이 있다.
그 권한은 매우 협소하였으며 조부(調府)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위화부(位和府) : 진평왕 3년 처음으로 설치했다. 경덕왕이 이를 개칭하여 사위부(司位府)라 했다.
혜공왕이 이를 복고시켰다.
선거를 담당한다. 후대의 이부(吏部)에 해당한다.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 : 좌는 진덕왕 5년에 둔 것이고 우는 문무왕 7년에 둔 것이다.
효소왕은 의방부(議方府)라 하였다. 율령을 장악하는데 후대에 형부(刑部)가 된다.
사정부(司正府) : 태종왕 6년에 설치했다. 경덕왕이 이를 개정하여 숙정대(肅正臺)라하였다.
두탄(紏弾)을 장악한다. 탄정대(弾正台)에 해당한다.
국학(國學) 대학(大學) : 신문왕 2년에 설치했다. 예부(禮部)에 속하며 박사(博士) 조교(助敎)의 정원이 없었다.
선부(船部) : 예전에 병부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으로 배의 일을 장악하였던 것을 문무왕 18년에 따로 설치했다.
영객부(領客府) : 본명은 왜전(倭典)이다. 진평왕이 개정하여 영객전(領客典, 후에 다시 왜전으로 설치)로 하였고, 경덕왕이 다시 고쳐 사빈부(司賓府)라 하였다. 혜공왕이 이를 복고시켰다.
내성(內省) : 경덕왕이 개정하여 전중성(殿中省)이라 하였으나 나중에 복고시켰다.
집사성의 장관을 시중(侍中) 또는 중시(中侍)라 칭하며 내성(內省)의 장관을 사신(私臣)이라 칭한다.
그 외의 장관을 령(令)이라 칭하고 장관의 다음은 경(卿)이다(집사성에는 전대등(典大等)이 있고 병부에는 대감(大監)이라 한다).
다음으로 대사(大舍)가 있고 다음에 사지(舍知)가 있다. 다음으로 사(史)가 있다. 다음 표를 참조하기 바란다.
관원수(官員數)
집사성 시중1명 전대등2명 대사2명 사지2명 사20명
병부 령3명 대감3명 제감2명 노사지1명 사17명,
노당(弩幢)1명
조부 령2명 경3명 대사2명 사지1명 사10명
창부 령2명 경3명 대사2명 조사지1명 사30명
예부 령2명 경2명 대사2명 사지1명 사11명
예작부 령1명 경2명 대사2명 사지1명 사8명
위화부 금하신(衿荷
臣, 령) 3명 상당(上堂)3명 대사2명 - 사8명
좌우이방부 령2명 령2명 경3명 경3명 대사2명 대사2명 - 사15명
(후에 18명)사10명
사정부 령1명 경2명 대사2명 (좌)2명 - 사15명
선부 령1명 경3명 대사2명 사지1명 사10명 (후에 8명)
영객부 령2명 경3명, 감2명 대사3명 사지1명 사8명
내성 사신1명 경2명 대사1명 사지1명 -
시위부
(侍衛府) 장군6명 대감6명 대로(隊路)15명 정(頂)36명 졸(卒)117명
■ 무관
왕의 친위병의 부(府)를 시위부(侍衛府)라고 말한다.
진덕왕 5년에 설치했다. 장군, 대감, 대두(隊頭), 정(頂), 졸(卒) 등의 관직이 있다.
신라인은 군영(軍營)을 정(停)이라 칭하고 서(誓)라고도 칭한다. 정과 서 이외에도 서당(誓幢)이나 당(幢)이라고 칭하는 부대가있다.
서당이나 당의 안에서 다시 금색(衿色)을 가지고 분리한다. 군호(軍號)를 모두 합치면 23개이다.
정(停)에는 6정이 있는데, 그 중 일정(一停)은 대당(大幢)이라 칭하여 수도에 있었던 것 같으며 다른 일정(一停)은 귀당(貴幢)이라 칭하며 상주(上州, 상주(尙州)방면)에 있다. 다른 것은 정(停)이라 칭하며 각 지역에 있다.
6정 이외에도 10정(혹은 3천당(三千幢))이 10지방에 있었다.
오주서(五州誓)는 지방 5주에 있다. 그 외에 이계당(二罽幢)·이궁(二弓) 등의 대(隊)는 두 곳의 지방에 있다.
그외의 여러 당(幢)은 주로 중앙에 있었던 것 같으며 무관에는 장군, 대관대감, 대대감(隊大監), 제감(弟監), 소감(少監) 이하 다수의 이름이 있으며, 정(停), 서(誓), 당(幢)에 각각 배치되었다.
즉 다음과 같다.
장군(將軍) : 모두 36명으로 나중에 39명이 된다. 2당(幢)·5정(停)·9색금(色衿)·10당(幢)에 배치한다.
대당(大幢)·귀당(貴幢) 및 5정의 장군은 진골로서 상당(上堂)에서 상신(上臣)이 임명되었고, 다른 여러 색금(色衿),
당(幢) 장군은 진골 급찬(級飡)부터 각간(角干)에 이르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대관대감(大官大監) : 진흥왕 10년에 설치한다. 모두 64명으로 2당, 4정, 9색금, 당에 배치된다.
2당·4정은 진골인 경우 사지(舍知)부터 대아찬까지, 다음 품(品)은 나마(奈麻)부터 사중아찬(四重阿飡)에 이르는 자가 맡았다.
대대감(隊大監): 진흥왕 23년에 설치한다. 당(幢)과 정(停)에 배치한다. 63명으로 관등은 사지(舍知)부터 대나마(大奈麻)에 이른다.
군호(軍號) : 23개가 있다.
■ 승관(僧官)
정관(政官, 혹은 정법전(政法典))은 처음에는 대사(大舍) 1명, 사(史) 2명으로 사(司)라고 한다.
원성왕 원년에 처음으로 승관을 두고 승려들 중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 충원하였다.
사망하면 교체하였고 정년의 한계는 없었다.
국통(國統, 사주(寺主)) : 진흥왕 12년에 설치한다.
도유나랑(都唯那娘) 1인, 아니대도유나(阿尼大都唯那) 1인, 진흥왕 때 설치한다.
진덕왕 원년에 1명을 추가한다.
대서성(大書省) 1인, 진흥왕 때 설치한다. 진덕왕 원년에 한사람을 추가한다.
소년서성(少年書省) 원성왕(元聖王) 3년에 설치한다.
주통(州統) 9인 각주(各州)에 각각 1명씩 있었던 것 같다.
군통(郡統) 18명.
■ 토지제도
신라는 예로부터 신 영토에 주(州) 혹은 소경(小京)을 두어 이를 경영했지만 신문왕 5 년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대동강 및 덕원(德源) 이남의 반도에 9주(州) 5경(京) 제도를 완비하게 되었다.
왕도(王都)는 종래와 같이 6부(部)로 하고 모든 9주의 밖에 있어, 계림 또는 시림(始林), 신라라고 칭하며 전국의 이름과 혼동을 피해 동경(東京)이라고도 칭하였고 민간에 전해오는 옛 이름으로 계곡의 옛 이름을 따서 서벌(徐伐)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방은 9 주 5경으로 나누어 군현을 전부 통틀어 4백여 개를 두었다.
그 사이에 향(鄕), 부곡(部曲), 잡소(雜所)를 섞어 이것을 9주에서 나누어 다스렸다.
주(州), 군(郡), 현(縣)내에 최소행정구획은 촌(村)이었다.
9주는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尙州)),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양산(梁山)), 청주(靑州, 지금의 진주), 한산주(漢山州, 지금의 경주), 수약주(首若州, 지금의 춘천),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공주), 하서주(河西州, 지금의 강릉),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로 나누고,
5경은 (1) 금관소경(金官小京, 지금의 김해), (2)중원소경(지금의 충주), (3)서원소경(지금의 충주), (4) 남원소경(지금의 남원), (5)북원소경(지금의 원주)가 그것이다.
경덕왕 15년에 주군현의 명칭을 당나라 풍으로 개칭하여 (1)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 영주(領州) 1 군 10 현 30), (2)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 양주(梁州)라고 쓴 것도 있다, 영주 소경 1 군 12 현 34), (3) 청주를 강주(康州, 영주 1 군 11 현 27), (4) 한산주(漢山州)를 한주(영주 1 소경 1군 27 현 46), (5) 수약주(首若州)를 삭주(朔州, 영주 1 소경
1 군 11 현 27) (6) 웅천주(熊川州)를 웅주(영주 1 소경 1 군 13 현 29) (7)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 영주 1 군 9 현 25), (8) 완산주(完山州)를 전주(영주 1 소경 1 군 10 현 31)
(9) 무진주(武珍州)를 무주(영주 1 군 14 현 44)로 정했다. 또한 소경(小京)을 경(京)으로하였다.
신라의 주(州)이름은 후대에 도(道)에 해당하는 것과 주(州)에 해당하는 것이 섞여있었다.
다시 말하면 전국을 9개로 분할하여 주(州) 이름과 각각의 주안에 있는 영주(領州)는 같은 이름이다.
이 제도를 보면 전국을 9주 5경 117군 293현 전부 424구로 나누었다.
주와 군이 부근의 현을 나누어 다스렸다.
주의 장관은 다시 경군 및 군의 영이 다스리는 현과 그 사이에 섞여있는 부곡, 향 등을 관할하는 것이었다.
주의 장관은 이미 기록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군주(軍主)라고 칭했는데 문무왕 원년 총관이라고 개칭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원성왕 원년에 이르러 도독이라고 개칭했다.
그 차관을 주조(州助) 혹은 조보(助輔)라 칭하고 각 주에 한 사람을 두었다. 그 외에
장리(長吏, 무관은 사마(司麻))라는 관직을 각주에 한 사람씩 두었다.
경(京)의 장관을 사신(仕臣)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 칭하고, 차관을 사대사(仕大舍, 혹은 소윤(小尹))라 칭하고 각 경에 한명씩 두었다.
군(郡)의 장관을 군태수(郡太守)라하고 현의 장관을 소수(少守)라고 칭하거나 혹은 현령(縣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직관지(職官志)에 의하면 군태수 115명이 있어서, 군 숫자보다 2명이 적었다.
소수는 85명이고, 현령은 201명으로 합계가 286명이었다. 현 숫자보다 7명이 적은 숫자이다.
관원(官員) 숫자와 군, 현 숫자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곡(部曲), 향(鄕) 등의 성질은 매우 불분명하나 주, 군, 현에 속한 특별한 소행정구역으로서 그 지방의 조세나 부역(賦役) 혹은 그 지역 산물을 특별용도로 충당하기 위해서 설치해둔 것으로 보인다.
주, 군, 현 내의 최소행정구역은 촌(村)인데 오늘날의 면(面)과 같은 것이다.
그 장(長)에는 토호(土豪)를 기용하였던 것 같은데 촌주라고 칭했다. 전시(戰時)에는 전투를 감독하였던 것 같다.
촌주의 정(正)을 대감(大監), 부(副)를 소감(小監)이라고 칭했다.
부곡(部曲) 및 향(鄕)의 장(長)도 촌주와 동일한 성질의 인물이었을까? 외관(外官)에는 그 외에 외사정(外司正) 133명이 있는데 문무왕 13년에 설치한 것으로 규탄(紏弾)을 장악하고 풍속을 단속했던 사헌관(司憲官)이었으며 133명이 있었다면, 주, 군, 경에 약 1명씩에 해당한다.
태대각간(太大角干) 비상위(非常位)
대각간(大角干) 비상위(非常位)
신라 본국인의 관직 지위 고구려인위 백제인위
경위(京位) 외위(外位) 신문왕 6년에 고구려인에게 경관(京官) 외관(外官)
경관(京官)에 수여하였다.
본국의 관품(官品)을 헤아려
수여하였다.
1. 이대찬(伊代飡) 문무왕 14년 6도부
(徒部), 진골을 지방에
출거(出去) 시켰다고는
하지만 5경 9주에서는
따로관칭 명을 붙였다
고 한다.
문무왕 1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을 내외관(內外官)을 수
여하였다. 본국의 관함(官銜)
을 참작하였다.
2. 이척찬(伊尺飡)
3. 잡찬(迊飡)
4. 파진찬(波珍飡)
5. 대아찬(大阿飡) 이주부(李主簿)
6. 아찬(阿飡) 악간(嶽干) 본대상(本大相),
본대형(本大兄)
본(本)
7. 일길찬(一吉飡) 술간(述干)
8. 사찬(沙飡) 귀간(貴干) 위두(位頭) 본달졸(本達卒)51) 우(右)
9. 급벌찬(級伐飡) 선간(選干)
본견졸(本見卒) 우(右)
10. 대나마(大奈麻) 상간(上干) 본소상(本小相),
본적상(本狄相)
11. 나마(奈麻) 간(干) 소형(小兄) 본덕졸(本德卒) 우(右)
12. 대사(大舍) 일벌(一伐) 제형(諸兄)
13. 사지(舍知) 일척(一尺) 본선인(本先人) 본우졸(本杅卒) 우(右)
14. 길사(吉舍) 피일(彼日)
15. 대오(大烏) 아척(阿尺) 본자위(本自位) 당(幢)
본나졸(本奈卒) 우상(右上)
16. 소오(小烏)
17. 조위(造位) 본장덕(本將德) 우(右)
관등표(官等表)
태대각간
병부(兵部),
조부(調府),
창부(倉部),
예부등(禮部等)의 령(令)
사신(私臣) 사정부(司正府),
선부(船府),
영객부(領客府)의 령(令)
위화부령
(位和府令) 이방부령
(理方府令)
대각간
이벌찬
이천찬 중시(中侍)
잡찬 장군
파진찬 대감(大監)
대감
(대신)
(진골에
한한다)
대아찬
아찬 전대등
(典大等) 경대(卿大)
대두(隊頭)
일길찬
사찬
급벌찬
대나마
좌(佐)
나마
대사(大舍)
대사 사지(舍知)제감(弟監)
졸(卒) 경(頃)
사지
사(史)
길사
대오
소오
조위
51) 원문에는 달졸(達卒)로 되어 있으나, 달솔(達率)의 오기로 보인다.
차품대감대관(次品大監大官)
군사당주
(軍師幢主),
6대장척당주
(6大匠尺幢主) 사자금당주
(師子衿幢主) 흑의장창말
보당주삼천감
(黑衣長槍末步
幢主三千監)
보기당주
(步騎幢主) 삼천당주
(三千幢主) 착금기당주
(着衿騎幢主)
제감
(弟監) 삼무당주
(三武幢主) 군사감
(軍師監)
(步騂監)사자금당감
(師子衿幢監)
(着衿監) 법당감
(法幢監)
감사지
(監舍知) 소감(少監)
대장대감
(大匠大監)
대척(大尺)
도독
(都督)
(군주
(軍主),
홀관
(㧾管)) 임신(任臣
(임대등(任大等))주조(州助)군태수(郡太守) 현령(縣令)
삼천졸
(三千卒)
장리(長吏),
사대사(仕大舍)소수(少守)
(찰수(刹守))외사정(外司正)
미상(未詳)
제2절 중대의 문예
신라 중대의 문학은 상대(上代)보다 훨씬 진보했지만 하대(下代)와 같은 진보에 달하지는 못했다.
상대와 하대의 중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예는 중대에 가장 우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예는 당나라 사람을 불러들여 제작하게 하거나 제자를 양성하도록 하였다.
학문분야에서는 시대를 지나면서 문운(文運)을 조장(助長)하지 않으면 학문을 그 나라에 이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대에는 빈번한 당과의 교통 및 유학생, 입당승(入唐僧)의 귀국에 의해 당의 문물 수입이 가능했고, 전대에 이어서 불교문화의 시대를 맞이했다.
신라인을 지배하는 사상은 불교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종류의 공예미술은 불교적 건축 장식에 기인하고 있었고, 유교는 주로 단순하게 그 문예를 수요(需要)하는 것이지만 정교(政敎)에 감화를 주었다.
즉 당나라의 문물을 그대로 이식하여 여기에 불교적 요소를 농후하게 하였다.
신문왕 2년에 국학(國學)을 세운 것은 화랑취도(花郞聚徒)의 풍속에 비해 커다란 진전이었다.
국학에는 박사(博士), 조교(助敎, 숫자는 부정확)를 두어 학생에게 수업을 했다.
학생은 대사(大舍) 이하 관직이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15~30세의 자들로 충원하고 교수법에는 주역, 상서, 모시(毛詩), 예기, 춘추 좌씨전, 문선을 나누어 수업하였다.
박사 혹은 조교 한사람이 혹은 예기, 주역, 논어, 효경을 가지고 혹은 춘추좌전, 모시,논어, 효경을 가지고 혹은 상서,
논어, 효경, 문선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혹은 산학(算學)박사, 혹은 조교 한사람을 뽑아 경전을 베껴쓰고 9장(章), 6장씩 외우도록 수업했다.
학생 재학은 9년에 한하고 미련하여 따라오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고, 재능은 있지만 미숙한 자에 한에서는 기한을
넘겨 재학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대나마(大奈麻), 나마(奈麻)도 나중에 국학을 나왔다고 한다. 이로써 학교 상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귀족의 자제를 교양하는 것이며 일반인 자제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신라의 국체(國体)는 문벌을 중시했고 학문지식을 논하는 것이 적었다.
과거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국학에 입학 여부는 진골 이외에 사람들에게 입신출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신문왕 13년 의학박사를 두고 학생을 키웠는데 '본초갑을경소문침맥경',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성덕왕 13년 상문사(詳文司)를 고쳐 통문박사(通文博士)를 두고 서표(書表)의 일을 맡겼다.(경덕왕은 한림(翰林)이라고 개칭함).
왕 16년 의학박사 각 한 명씩을 두었다. 6년 국학에 여러 분야의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왕 7년 천문박사 한 명을 두고 17년에 율령 박사 2명을 두었다.
당나라의 인물로 신라에 들어간 자가 많은데 그러한 사실 중, 삼국사기에는 그 극히 일부분만 전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4년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던 대나마(大奈麻) 복덕(福德)은 역술(曆術)을 배우고 돌아와 이를 고쳐 신역법을 사용하였다.
신문왕 6년에는 예기와 문장을 당나라에 간청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와'문관사림(文館詞林)'의 발췌본(拔萃本) 50권을 얻었다.
효소왕 원년에 승려 도증(道證)이 당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바쳤고, 효소왕 3년 당나라에 가있던 김사양(金思讓)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헌상했다.
성덕왕 15년 입당한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10철72제자도(弟子圖)를 헌상했는데, 이것을 대학(국학)에 두었다.
27년에는 당에 다시 간청하여 신라의 자제들을 당의 국학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입학생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덕왕대에는 당나라 풍을 모방하여 주군현의 명칭과 백관직의 호를 고쳤다(단 백관(百官)의 호는 혜공왕 12년에 복원한다).
혜공왕이 즉위하자 그해(당시 8세) 대학에 행차하여 박사에게 명령하여 상서(尙書)를 강의하도록 한다.
12년에 국학에 행차하여 청강한다.
이때는 이미 내란의 시대였는데 이 형식적 행사를 보면 당시의 풍조를 추찰할 수가있다.
중대에는 한문(漢文)을 활용하여 표시하는 국어(國語)를 섞은 문장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고구려에는 일찍부터 행해진 것으로 보아 신라인이 만든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한자사용이 널리 행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체의 금석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한문을 쓸 수 있는 자는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향가(鄕歌)의 음훈(音訓)이 한자를 가지고 표시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만요(萬葉)와 같으며 경덕왕대의 월명사(月明師)는 유명한 작가이다.
문사학자(文士學者)로서 오늘날 그 이름이 전해지는 자는 강수(强首)선생, 설총, 김대문(金大問) 등에 지나지 않는다.
문무왕릉비문을 찬술(撰述)한 급찬 국학 소경(少卿) 김모(金某), 김유신비의 찬자인 국자박사 설인선(薛因宣), 성덕왕
신경명(神鏡銘)의 찬자 김필계(金弼溪)와 같은 사람은 그 전(伝)이 분명하지 않다.
강수에 대해서는 이미 전편에서 설명했다. 강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파진찬(波珍飡) 김량도(金良圖)가 있다.
6번이나 당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으며 문장에 능숙하고 불교를 받드는 일에 매우 근면했는데 특히 사죄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문무왕 10년 당나라의 감옥에서 죽었다.
풍훈(風訓) 또한 이 시대의 사람으로서 김진주(金眞珠)의 아들로서 숙위학생(宿衛學生)이었는데 문무왕 15년에 당나라는 풍훈(김진주는 문무왕 2년에 주살되었다)을 향도(嚮導)로 하여 신라를 공격해 왔다.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신라고기를 인용한 문장은 즉 강수, 제문(帝文), 수진, 양도, 풍훈, 골번(骨番)으로 제문 이하는 사실이
산일(散逸)되어 전하지 않지만, 모두 동시대의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문사(文士)로서 하대의 최치원과 상대할 만한 저명한 자 중에 설총(薛聰)이 있다.
설총은 자(字)를 총지(聰智)라고 하며 명승인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신문왕 시대의 사람이다.
당나라에 건너갔는지 안 건너갔는지는 불분명한데, 방언(方言)으로 육경과 문학을 훈해(訓解)하였다.
후대에 이르기까지 반도에서 경을 업(業)으로 하는 자들의 전수가 끊이지 않았는데,
모두 그를 원조로 삼았다. 또한 문장에 능숙하여 편찬을 잘했다고 칭하나 전해지는 것은 없다.
고려 현종왕대에 이르러 홍유후(弘儒候)에 추증되었다.
김대문은 진골 집안의 자손이다. 성덕왕 3년에 한산주도독이 되었다.
전기약간권(傳記若干卷),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紀)', '약본한산기(樂本漢山記)' 등을 저술했다.
이 저서들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 기사 중에서 삼국사기에 인용된 것이 있다.
병법가로는 문무왕 때에 아찬 설수진(薛秀眞)이 있었다.
방술가(方術家)로는 혜공왕대에 김암(金巖)이 있었다.
김유신의 후손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하였고 스승에게 음양가법(陰陽家法)을 배워 스스로가 둔갑(遁甲) 성립법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혜공왕대에 신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다.
또한 여러 주(州)의 대수(大守)에 임명되어 치업(治業)을 남겼다.
그리고 혜공왕 15년(보귀 10년)에 일본 사절단의 부사(副使)로 일본에 건너간 적이 있었다. 이때 설총의 후손 중업(仲業)이 대판관(大判官)으로 일행 중에 있었다.
이시대의 신라인의 저술은 하나도 보존되어 있지 않고 겨우 금석문에 남아있을 뿐이다.
글씨에는 이 시대에 유명한 김생(金生)이 있었다. 가문이 한미하여 그 자명(字名)이 전해지지 않아 김생으로 통했다.
성덕왕 10년(경운 2년)에 태어나 80세의 고령까지 붓을 잡았다고 전해지는데 하대의 초기에는 생존했던 것이 분명하다. 태자 사랑공대사(寺朗空大師),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의 문자는 신라와 고려(왕씨)의 기간에 김생의 글을 집자(集字)한 것이다.
제3절 중대의 불교
불교는 전대(前代)를 이어받아 전성기를 맞이하여 공사(公私) 간에 다수의 사찰이 건립되고 명승(名僧)이 많이 배출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불교를 얼마나 숭상했는지는 무열왕 2년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재화나 토지전답을 사찰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신라의 왕가가 건립한 사찰에는 장의사(壯義寺, 한산주 무열왕), 부석사(태백산, 무열왕), 사천왕사(경주, 낭산(狼山)), 감은사(感恩寺, 경주 동해 신문왕), 봉성사(경주 신문왕), 불국사 및 석불사(김대성(대성은 존칭으로 각간(角干)으로 생각된다)이 경덕왕 10년 신묘년에 기공(起工)하여 24년을 경과해서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혜공왕 10 년에 그가 죽자 국가에서 이를 완성하였다) 등이 있다. 그 외에 공사(公私)의 사찰 건립이 매우 많았다.
이러한 큰 절의 조영(造營), 수리(修理), 보존에는 사천왕사성전, 봉성사성전(경덕왕 때 수영(修營)봉성사사원이라 고침), 감은사성전(경덕왕 때 수영감은사사원이라고 고침), 봉덕사성전, 영묘사성전, 영흥사성전(경덕왕 때 감영흥사관으로 고쳤다) 등의 특별관청을 항구적으로 설치하여 령(令), 경(卿), 적위(赤位, 감(監)), 대사(大舍), 사지(舍知),사(史)등을 두어 중앙정부의 다른 관성(官省)과 같았다.
그리고 경덕왕대에는 황룡사 거종(巨鐘, 길이 1장 3촌 두께 9촌 무게 49만 7,581근(斤)), 분황사 약사동상(무게 30만 7,600근), 혜공왕 대에는 봉덕사 거종(巨鐘, 성덕천왕신종(神鐘), 무게 11만 근) 등이 만들어졌다.
이 시대에는 고승이 많이 배출되었다. 전대 말(선덕왕 12년) 고승 자장(慈藏)이 당에서 돌아왔다.
자장은 소판(蘇判) 무림(武林)의 아들이다. 선덕왕 5년에 왕명을 받아 문인 10 여 명을 데리고 당으로 들어가 태종황제의 총애를 받아 장경(藏經) 1부와 여러 불교 도구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분황사의 주지로 대국통(大國統, 나라 전체의 승려를 관할함)이 되었다. 양산 통도사, 강릉 수다사(水多寺), 태백산 석남원(나중에 정암사로 바꿈) 등을 창건하고 여러 경의 계소(戒疏) 10여 권과 관행법(觀行法) 1권을 저술했다.
문무왕 5년에는 입당승인 혜통(惠通)이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의 인결(印訣)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유가법사(瑜珈法師) 명랑(明朗)이 용궁(龍宮)에 들어가 신인(神印)을 얻었다고 하며 신유림(神遊林, 사천왕사)를 창건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칠 것을 빌었다.
해통이 귀국하자 밀교(密敎)가 크게 유행하였다.
문무왕 원년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삼장(智儼三藏)을 알현하고 화엄경을 연마하여 문무왕 10년에 귀국한 후,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립하고 크게 화엄을 창도하여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원조가 된다.
문무왕은 수도를 어떻게든 달리 하고 싶어서 이를 의상에게 물었다.
의상은 오두막에 살아도 정도를 걸으면 복이 오고 영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부려 성을 쌓아도 무익하다고 말하자 왕이 이에 중지하였다.
왕은 의상을 높이 사서 전답과 노비들을 하사하였다. 의상은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고하를 막론하고 균등하며 귀천이 없습니다.
토지가 있을 이유가 무엇이며 노비는 어디에 쓰겠습니까. 빈도(貧道)는 법계(法界)를 집으로 삼아 열심히 밭 갈고 농사지어 추수를 기다리니 법신(法身)의 혜명(慧命)은 이에 의해 생겨납니다.”고 말했다.
가히 고덕(高德)의 승려라고 말할 수 있다.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毗瑟山) 옥천사, 금정(金井, 양산) 범어사, 남악(지리산) 화엄사 등을 의상 전교의 10사찰이라고 한다. 제자 중에는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숙 등 10대덕(大德)이 있다.
표훈(表訓)은 일찍이 불국사에 주지로 있었다.
의상의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서인(書印)'과 '약소(略䟽)'가 있다.
의상은 성덕왕 원년 임인에 열반하였는데 78세였다.
고려 숙종왕 6년 대성원교국사로 추증하였다.
표훈은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 4권을 저술했다.
의숙은 '범강경보살계본소(疏)' 3권을 저술했다.
지통은 의상의 90일 간의 화암대전(華岩大典) 강의의 핵심을 뽑아 '추동기(錐洞記)' 2권을 저술한다.
신문왕 12년 종남(終南)의 문인으로 의상과 동학인 고승 승전(勝詮)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현자의 소초(疏鈔)를 의상에게 전했다.
승전은 개영(開寧)의 갈정사에서 화엄을 강론하였는데 사문의 가귀(可歸)가 그 불법을 전수하여 심원장(心源章)을 찬술했다.
무열, 문무왕 두 왕 때는 신라인의 영기(英氣)가 왕성했던 시기로 종교계에서도 정진한 자들이 나왔다.
천축에까지 구법(求法)한 자도 있었는데 신라인 승려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는 당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년간에
장안을 떠나 인도의 나란타사(那蘭陀寺)에 머물면서 많은 율론(律論)을 읽고 이를 패협(貝莢)에 베껴 썼으나 귀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70여 세에 절에서 열반하였다.
배우로 하여금 큰 박을 들고 춤추게 하며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포시키고 촌락을 돌며 춤추고 노래하여 세상 사람들이 불타의 이름을 알고 모두 남무(南無)를 부르게 되었다.
이를 계승하여 혜업(惠業), 현태(玄泰), 구본(求本), 현각(玄恪), 혜륜(惠輪), 현유(玄遊)등 신라의 승려들이 당나라에서 인도로 건너가 법문을 구하였다.
현태 외에는 중도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달성했어도 하더라도 당나라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의상과 시기를 같이하던 서당(誓幢) 화상(和上), 원효(元曉)가 있었다. 진평왕 39년에 태어나 신문왕 6년에 열반하였다. 학문과 스승을 정하지 않고 자유스러웠으며 계율에 집착하지 않았다.
무열왕의 궁중에 머물렀을 때 설총이 태어났다. 후에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를 성거사(姓居士, 혹은 소성거사(小姓居士)로 전한다)로 칭하고 배우로 하여금 큰 박을 들고 춤추게 하며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포시키고 촌락을 돌며 춤추고 노래하여 세상 사람들이 불타의 이름을 알고 모두 남무(南無)를 부르게 되었다.
원효는 불학에 정통해 금강삼매소를 저술하였는데 광략(廣略) 두 본이 있다.
약본은 당나라로 들어가, 금강삼매론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삼매론은 일본에도 전해졌으며 혜공왕 9년(보귀 10년)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신라사절의 일행으로서 일본에 오자, 진인(眞人) 모씨가 그에게 준 시의 서문에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보았는데 그 사람을 보지 못해 한탄스럽다고 기록하였다.
원효는 이전에 분황사의 주지로서 화엄소를 편찬하였는데 제40회향품(第四十回向品)에 이르러 붓을 멈추었다.
그 외 저서도 매우 많은데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1권, '관미륵상생경종요(觀弥勒上生經宗要)'1권,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1권, '범강경보살계본사기(梵綱經菩薩戒本私記)' 2권, '영락본업경소(瓔珞本業経䟽)' 2권, '기신론소기(起信論䟽記)' 6권,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䟽)'(제3권 전(傳)이 존재함), '판비량론(判比量論)' 1권,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1권이 일본에 전해져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에 수록되었다.
고려 숙종왕 6년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에 추증하였다.
경덕왕대에는 사문(沙門) 대현(大賢)이 있었다. 유가(瑜珈)의 원조이다.
남산용장사(茸長寺)에 거주하며 스스로를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칭했다.
저술도 무척 많았는데, '약사경고적' 2권, '보살계본종요' 1권, '범강경고적기' 6권, '기신론내의약탐기' 1권,
'성유식론학기' 8권 등 일본에 전해져 '대일본장경'에 수록되어 있다.
대현(大賢)과 시기를 같이하여 사문(沙門) 법해(法海)가 있다.
경덕왕 12년 여름에 가뭄이 오자 왕은 대현에게 금광명경(金光明経)을 강술하여 비를 내려달라고 기원하게 했다.
다음해 황룡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전기(傳記)에 전하는 승려는 거의 없다. 당에 머물었던 하여 신라 승려의 수는 매우 많다.
돌아온 승려는 거의 없다. 번경(飜經) 사문(沙門)인 원측(圓測)과 같은 승려는 매우 저명한 자였다.
이 시대에 선종을 빼고 다른 여러 종파의 불교가 전해졌다.
구사종(倶舍宗)을 전한 사람은 지평법사(智平法師)가 있다.
전대의 원광이나 이 시대의 원효는 이 종 및 섭론종(攝論宗), 열반종(涅槃宗) 등을 모두 공부했다.
원효는 또한 삼론종(三論宗), 천태종도 겸했다.
법종(法宗, 유식(唯識))에는 원측(圓測), 순환(順環), 대현 등이 있었고 원효 또한 이를 겸하기도 했다.
진언(眞言)에 혜통(惠通), 화상(和尙), 명랑법사(明朗法師) 등이 있었고, 정토종은 전수(傳受)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종파에 걸쳐 통관하는 사람이 많았다.
율종(律宗)에는 전대의 지명(智明), 자감(慈感), 화엄에는 원효, 의상이 있었다.
제4절 미술공예
이 시대의 미술, 공예는 반도의 고금을 통틀어서 최고의 위치에 달했던 시대이다.
불교는 여러 종류의 공예, 미술을 필요로 했고, 그 수입 습득(習得)에 영향을 주었다.
모두 당으로부터 그 기술을 전수받은 것으로서 초빙된 당나라 공인(工人)의 손에 의한 것도 적지 않다.
신라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조금도 당과 떨어져서는 발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없다.
무열왕릉비의 이수귀부(螭首龜趺) 같은 것은 후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불국사의 석재품, 석굴암의 석불, 김유신릉(陵) 및 괘릉(掛陵)의 석물(石物) 같은 것은 정교함의 극치에 달한 우수한 것으로 이것은 전후를 통틀어서 계승해 갈 자가 없었다.
경덕왕 13년 갑오(甲午)에 만든 황룡사의 거종(巨鐘, 길이 1장 3촌, 두께 9촌, 중량 49만 7,581근)은 거인리상택(巨人里上宅, 지역이름)의 하전(下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듬해 을미(乙未) 년에 만든 분황사 약사(藥師) 동상(銅像, 30만 6,700근)은 장인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남아있는 성덕 신종(神鐘)은 마찬가지로 경덕왕이 부친 성덕왕을 위해 주조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훙거하자 혜공왕이 그 뜻을 계승하여 왕 7년에 완성하고 봉덕사에 걸었었던 것으로 높이가 11척이고 종의 지름이 7척 5촌, 두께가 7촌, 무게는 12만 근이라고 한다.
종에는 비선(飛仙)이 구름 사이에서 공물을 바치는 형태의 그림을 주조하였다.
그 사이에 두 곳에 명기(銘記)가 있는데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이러한 동종(銅鐘)은 중국(支那)에도 모두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데 이 종은 현존하는 옛 종(鐘) 중 최대의 것으로 가장 우수한 작품이다.
신라의 명화가(名畵家)로 전해지는 자 중에 솔거(率居)가 있다.
가문이 한미하여 족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황룡사 벽화, 경주 분황사 관음상, 진주 단속사(斷俗寺) 유마상(維摩像)을 그렸다고 세상에 전해지는데 신묘한 그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 시대가 불분명하다.
신라의 그림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